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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23:17:45 조회 : 212         
서울의존강의20180810b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서울의존강의20180810b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핵심키워드는 불가능함, 그리고 잃어버림,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이 땅에 말씀이 왔다는 것은 버림받는 경우만 구원되는 거예요. 버림받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말씀이 이 땅에 왔을 때는 버림받는 자를 생산해내는 것이죠. 버림받는 자. 왜 그러냐 하면 아무도 버림받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버림받을 의사가 없어요. 어느 인간도 자기를 사랑하고 싶지, 자기를 미워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자진해서 "나를 버려주세요." 이게 안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욕을 해줘야 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게 어디 개 주제에!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창녀가 구원을 받겠다.” 자꾸 대조되는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평소에 남들을 향해서 질타하는, “저건 인간도 아니야. 저건 지옥가야 돼.”라는 그 발언을 이제는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사용을 하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할례도 없지, 이방인들은 안식일도 안 지키지, 그래서 개 같은 이방인들, 마땅히 언약이 없으니까 지옥가도 싸지.” 우리는 언약이 있기 때문에 천국 간다고 하는 그것을 의식해서 주님께서는 백부장을 천국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백부장을.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을 그냥 천국에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내요. 공개적으로. “봤지?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 다 나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 다 나와! 천국은 이 사람들의 것이야.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잃어버림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데리러 오는 거예요. 근데 유대인들은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잃어버림을 생산해내야 되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기 때문에. “옳소이다. 나는 개입니다.” 잃어버렸잖아요. 세상에! 어느 사람이 자기보고 개라고 하겠어요? 주님 앞에서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잃어버린 자가 아닌데, “니나 나나 뭐 못났지. 뭐 있나?”라고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나는 확실하게 잃어버렸어요. 아예 이름도 바꿔요. 명찰에 잃어버린 자로. 다른 것으로 하면 죄수2565번 이런 것으로.

 

이게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왜냐하면 가능을 뛰어넘었잖아요. 나는 잘나고 싶어요. 왜냐하면 주변에서 그걸 요구하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요구하고 주변에서 너는 훌륭해야 된다고, 집안의 영광이라고 계속 붕 뜨게 만들었어요. 그게 나 자신의 본질인줄 알고. 나는 처참하게 망가지면 안 되는 사람인줄 알고. 주변의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가문의 영광을 생각해서 나쁜 짓하면 쉬쉬하고, 이런 집안에는 이런 소문이 안 돌았으면 좋겠다고, 예민한 자기 관리와 민감하게 주변눈치를 보면서, 벌벌 떨면서 누가 내 죄를 들추어내지는 않는가, 늘 조바심을 가지면서 불안과 안절부절 못 하는 그런 어두운 세월을 지나죠.

 

나는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하면, 아야흐햐!!하고 놀라죠. 귀신이 잡아먹자고 등장하는 것처럼. 왜, 괴기영화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잃어버리면 그렇게 안 무서운데, 귀신이 와서 내 목덜미를 물면 안 돼! 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물리면 안티프라민 바르면 되거든요. 좀 이빨자국은 나지만. 드라큘라한테 물리면 후시딘 연고 바르면 낫는다고요. 쓰레기가 안 되려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결국 불가능이죠.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변화를 준다고 했죠. 변화. 변화는 존재에 의해서 포착이 안 됩니다. 바람을 포착하지 못하듯이. 변화를 포착하려면 변화를 스톱시켜야 돼요. 날아다니는 새를 잡으려면, 새가 다음에 스톱하는 순간을 예측해서 총으로 쏴야 되죠. 그러나 인간은 찰나적이라도 스톱하는 순간, 그거는 내가 아니에요. 이미 그거는 변화를 존재로 왜곡되게 본 나의 모습이에요. 왜곡되게. 지금 이 순간이 고정된 나의 진짜 본질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그래서 착각이나마나 나를 찾을 때는 놀러가서 찍은 스냅사진밖에 없어요. 여고생 포즈 있잖아요. 옆으로 나란히 서서 찍는 것. 여고동창생들 전부 다 옆으로 서서 찍잖아요. 어른이 돼서 계모임할 때도 그렇게 똑같이 찍고, 30대에도 40대에도 50대에도 다 그렇게 찍어요. 그럼 60대는 뭐냐, 60대가 되면 자기 얼굴이 귀신처럼 나오니까 그걸 알고 전부다 사진 찍는 것을 사양합니다. “찍지 마라! 안 볼란다.” 50대까지는 찍는데 60대에는 사진 안 찍습니다. 자기 예상을 벗어나요. 이 정도로 내가 망가진 줄 몰랐다는 겁니다. 맨날 자기가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화장하고 포장하고 변신하니까 괜찮은데, 사진은 못 속이거든요.

 

변화를 포착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돼버립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따라서 그 변화를 스톱시키지 말고, 저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지정해주신 호칭이 있어요. 본질이 있어요. 그 본질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벌써부터 수상하죠. 변화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한번 적어볼게요. 썩어질 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우리가 나 자신을 변화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기 때문에, 역으로 주님께서 변화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원래 주님은 우리 없으면 영원하신 주님의 독생자에요. 주님은 변함없는 독생자인데, 근데 변하기는 누가 변해요? 우리가 변해야 하는데, 우리가 착각을 해가지고 우리가 안 변하니까, 상대적이거든요. 우리가 안 변하니까 예수님은 우리한테 변화되는 모습으로 자신의 본질을 알릴 수밖에 없어요. 썩어질 씨에서 썩지 아니할 씨로 그 모습을, 과정을 보여주죠.

 

이 과정에서 누구 때문에 생긴 변화입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 때문이죠. 주님은 어디를 다녀갔습니까? 인간이 사는 동네를 다녀갔죠.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동네는 썩어질 씨의 동네입니까? 아니면 안 썩을 동네입니까? 우리 동네가. 인간 동네가 전부다 썩어질 동네죠.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보여주니까, ‘아, 내가 썩어질 것이 마땅하구나!’라는 것을 알지, 주님이 안 다녀가셨으면 전부다 자기는 썩어질 것이 아니고 꽃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꽃 자랑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그 꽃은 본질상 썩어질 꽃이에요. 우리의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모든 영광, 그러니까 건강한 것, 부자 된 것, 재벌된 것, 공부 잘 한 것, 애 이쁜 것, 키 크고 성격 좋은 것, 전부다 이 모든 영광은 사실은 썩는 것으로 변화될 임시적인 환각상태인 것입니다. 슬쩍 지나가죠. 옛날에는 복권 당첨 할 때 판을 돌려서 번호가 나왔잖아요. “돌리시고 쏘세요.” 스톱되면 “7번입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사실은 7번이든, 2번이든, 4번이든 같은 표면에 있는 겁니다. 아이스하키 할 때 전부 다 같은 표면에 있는 거죠. 2번이 7번보다, 8번이 2번보다 4배 똑똑하고 훌륭한 게 아니에요. 그냥 기호에 불과하고 숫자에 불과하고 인쇄된 문자에 불과하죠.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파생된 변화가 우리 인간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늙어죽고 그 다음 우리 후손들이 태어나서 늙어죽고 그 다음 후손들 태어나서 늙어죽고... 이 모든 변화의 유발자는 오직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옵니다. 창세전에 존재에서 나와요. 20절에 봅시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아신바 된 자니” 그리고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신바 된 자니”

 

주님한테는 존재가 그냥 나타난 것뿐이라면, 그 나타남을 보여주기 위한 재료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지금 60분 동안 하고 있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논리적으로는 맞거든요. 불쑥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목사님! 60분 동안 이야기한 게 진짜입니까? 그게 진짜입니까?”라고 이렇게 물을 수가 있거든요.

 

베드로는 그 증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부활과 살아있다는 차이점이 뭡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전에도 살아있고, 지금도 살아있고, 살아있음이잖아요. 근데 부활이라는 의미를 애써 집어넣어야 할 것은 뭐냐, 부활이라는 의미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한때 죽었던 그 당사자의 살아남이거든요. 죽었던 그 당사자의. 그러면 죽었음을 이끌어내는 살아있음이에요.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을, 그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한 부활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의 문제는 뭡니까? 근데 그 분이 왜 죽었죠? 그 왜 죽었죠? 라는 것을 제가 60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죽었죠? 왜 죽었습니까? 니 때문에 죽었다. 니 때문에. 니가 니 자신을 괜찮게 보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 같이 훌륭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자꾸 자기 자신을 좋게 보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면 나쁘게 보면 되지 않습니까?” 나쁘게 볼 수가 없어요. 나쁘게 본 그걸 근거로, 내가 나쁘게 봤으니까, 나는 잘났다는 것으로 전환되거든요. 그러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유발해요. 변화를.

 

우리가 죽고 우리가 천당 가는 것은요, 복음이 아니에요. “목사님! 우리가 죽으면 천당 가죠?” 그거는 복음에 끼어들면 안 돼요. 그거는 결국은 “안 버림받았잖아.”라는 내 원초적인, 악마적인 본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고,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련회 때 많이 했으니까 여기서는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당연한 거예요. 그 괜찮은 분이 왜 죽었습니까? 니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때서요? 우리가 스스로 너를 잃어버리게 할 재주가 없고 그러한 능력이 없고 무능한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버림받은 세상에 살면서 버림 안 받았다고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좋죠? 주제파악이 안 되니까. 그래서 주님이 대신 주제파악을 하신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니들이 이미 죽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까요? 라고 할 때에, 그게 바로 어떻게 살까요? 라는 생각을 갖는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면 살까요? 라는 말을 안 하고 속으로 새기겠다고 하는데, 속으로 새기는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요? 그냥 사세요. 그냥. 하던 행세대로. 성질들 있잖아요. 성질. 그냥 막 사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본질입니다. 막사는 게. 그게 잘 하는 짓입니다. 막살면서 미워하잖아요? 미워하세요. 그러면 내가 말씀을 못 지키잖아요? 말씀을 처음부터 못 지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막살라는 거예요.

 

막살면 말씀을 못 지키는 방식으로 말씀을 못 지키고, 못 지키니까 열심히 잘 지켜보자는 식으로, 오히려 말씀을 틀어막는 식이 되어 말씀을 못 지키게 되는, 그 둘 다를 보여줘야 돼요. 말이 길었다만 알아들으세요. “내가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막가면 안 돼. 내가 말씀 지켜야지.”하는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때로는 막가지 않고 가족도 돌보고 자기가 희생하고 그런다고요. 주님께 충성하고.

 

그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그나마 라도 해야 자기 마음이 편하다는 거예요. 그놈의 양심 때문에. 나 때문에 남이 아프면 막 가슴이 아프고 동정심이 있죠. “나 때문에 저렇게 고난 받는구나. 내가 도와줘야지.” 그런 막사는 것도 있어요. 진짜 도끼 들고 막사는 것도 있지만. 아프리카에 봉사하고 선교하고 그렇게 막사는데, 그건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지 성질대로 사는 거예요. 그냥 성질대로 살면 돼요. 착한성질이면 착하게 사세요. 어차피 그거는 구원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자,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의 문제가 뭐냐, 말씀을 정착시킬 때 아까 이야기한 대로 예수님께서 썩어질 씨와 썩지 아니 할 씨라고 했죠. 썩음이 필연적인 세상과 그 다음에 주께서 준비한 세계는 아무리 오래가도 안 썩는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 과정을, 베드로는 썩었다, 안 썩었다라고 했는데, 저는 이것을 층으로 만들겠습니다.

 

뭐냐 하면 말씀을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그 다음에는 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둘 차이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알면 이 문제가 풀립니다. 육으로 해석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육을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열심히 해봐라가 아니라 육을 육 되게 도출시키는 식으로 인간의 해석을 허용하는 거예요. 인간이 해석하는 것을.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썩어가는 유대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어요. 대표로 제대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잘 와 닿지를 않으니까 제가 갈라디아서 6장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이 이야기를 딱 들으면 썩어지는 것은 나쁜 거잖아요. 그러면 나쁜 것은 사전에 안 하면 되겠죠. 그러면 사전에 안 하려면 앞에 있는 것,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면 원인을 한번 바꿔보자는 겁니다.

 

뭐냐 하면 자기 육체를 위하지 않고 살면 되겠죠.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육체 빼버리고 나를 위해서 안 사는 삶. 나를 위해서 안 사는 삶이 없습니다. 그게 성립이 안 돼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나라는 자체가 타인으로부터, 타인이 먼저 있고 타인에 의해서 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남에게 호응받기 위해서, 남의 요구에 따라서 사는 것이 돼요.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곧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살아도 썩어질 것을 거두고 나를 위해서 살아도 썩어질 것을 거두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거예요. 아무리 해도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타인을 위해서 사랑해도 그것은 내 사랑이 돼버려요. 안 되는 겁니다. 마른 꽃 걸려있는 그 여인을 생각하거든요. 존재기 때문에.

 

육체의 해석은 아까 말씀한 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뭐가 도움이 되고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까를 내다보면서, 성경말씀을 들여다보는 그러한 태도, 육의 해석입니다. 이 해석을 함으로써 해석자인 내가 이 해석의 결과에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 것을 감안해서 해석이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 믿는 그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득이 누구한테 옵니까? 누가 구원받아요? 뻔히 알잖아요. 누가 구원받아요? 내가 예수 믿는데 안 믿는 옆 사람이 구원받아요? 아니죠. 내가 구원받잖아요. 그래서 이게 육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자가 육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니, 성경에 보면 그런 구절이 많잖아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거는 보너스인지 너뿐만 아니고 니 집이 공짜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말씀대로 지키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믿으라고 명령을 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믿으라고 명령을 함으로 말미암아 평소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들통 내는 순간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아니죠. 제가 강남강의에서 두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했는데, 두 개의 개념이 나와요. 두 개의 개념이.

 

믿는다 개념이 두 개고, 구원 받는다 개념이 두 개에요. 믿으라의 개념이 다르다니까요. 내가 주체가 되어서 믿는 개념이 있고, 주님의 선물로 준 믿음의 개념이 있고. 그리고 구원이라는 개념도 나 좋아라고 하는 구원의 개념이 있고, 나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서 주님의 구원에 합류되는 구원, 구원은 주님의 구원이에요. 내 구원이 없어요.

 

그래서 나의 구원 같으면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순간 뭐가 탈락이 되느냐, 뭐가 잘라지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했던 결과들을 전부다 자르는 조건하에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생각한 천국을 포기하는 조건하에 천국가요. 내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를 잘라내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에게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고, 그 구원 때문에 내가 달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옛날에 생각한 것과 다른 나 자신이 점점 더 달라지고 바꾸어지는 거예요. 나를 위한 예수님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면류관을 기꺼이, 즐겨 반납할 정도로 달라지는 겁니다. 천국은 죽어서 골라잡는 데가 아니에요. 지금 살아있으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한테 일어나게 하는, 미리 땡겨서 와야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이득을 챙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게 바로 내가 미워져야 되죠. 그럼 내가 미워지게 되면 뭘 얻습니까? 아니요. 내가 미워지는 것은 그냥 그거고, 예상 밖의 사랑이 오는데, 그 사랑은 바로 내가 잃어버림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가운데 비로소 그때 눈에 처음으로 들어와요. 내가 잃어버림을 통해서. 절망이죠.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절망할 때, 비로소 그동안 내가 헛바람, 헛짓했다는 것이. 구원도 아닌 것을 구원인줄 알고 내가 농락당하고, 나한테 농락당하고 교회 목사들한테 농락당하고. 이근호 목사한테 농락당하고. 저 말 들으면 이익이 있을까 싶어서.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이근호 목사가 주는 줄로 착각한 거예요.

 

주님이 나에게 이미 구원을 줬는데,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납득이 되는 구원을 따로 챙기려고 하니까 우왕좌왕이에요. 안절부절. 사자성어를 막 남발하죠. 안 해도 되는데 뭔가 막 해야 된다는 생각이 왜 듭니까? 안 잃어버리겠다는 거예요. 이미 잃어버렸는데,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야 되는데, 안 잃어버리겠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뭔가 꼼지락거리고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썩어질 씨, 썩어졌으면 그냥 썩어진 채로 있어야 돼요. 썩어진 채로 있어야 되는데, 뭔가 희망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썩어진 가운데서 뭔가 안 썩은 부분을 따로 떼 내어가지고 그걸 가지고 새롭게 시도하는 거예요. 보통 천주교에서 낙태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생명이라고. 왜 기성어른들이 하는 말이 지는 태어났는데, 왜? 막 태어나는 것을 밟아버리느냐는 거예요. 근데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낙태되고 난 뒤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거듭났다고 하는 거예요. 낙태당해야 돼요. 누가 나에게 메스mes, 칼질을 해야 돼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데 무슨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태어났죠. 그 태어난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죠. 60년 살았습니다. 그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죠. 태어난 적이 없네요. 언제 태어났어요? 태어난 것은 성령이 와야 그때 제대로 생일 축하한다고 해야 되는 거예요. 안 태어났어요.

 

욥이 그렇게 바랐던,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주의 은혜로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어요. 그냥 죽은 태 안에서 죽은 채로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면 잠깐 왔다가 사라지죠. 태어나려면 영원히 살아야 태어났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게 뭐냐, 썩지 아니할 씨가 우리를 방문하신 겁니다.

 

근데 그 만남은 예상한 만남이 아니고, 예상하면 안 돼요. 예상하게 되면 내가 그 만남에 기여했다고 자꾸 착각하게 된다고요.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만나게 해줬다고 한다고요. 이렇게 성령 달라고 기도하니까 성령이 왔다고 자꾸 착각들 한다 이 말이죠. 그냥 평소에 사시는 대로, 죽은 채로 그냥 살면 안 되겠어요? 유난떨지 말고, 유별 떨지 말고 그냥 살면 안 되겠습니까? 왜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무슨 근거로 그게 안 된다는 생각을 왜 갖습니까? 그냥 살면 되는데.

 

안 하기가 힘들죠. 누가 그런 못된 성질을 갖다가 줬어요? 마귀가 했죠. 안하면 되는데 안 하기가 힘들어요.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 “몰라.” 뭔가 기도했을 때 더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뿌듯한 느낌이 들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내가 용서가 안 돼. 더 자세히 보면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착하기 때문에. 복음을 30년 듣고 나중에 돌아서는 것은 나는 착하다는 거예요. 여전히 죽어있어요. 쓰레기라는 그런 이야기는 또 듣기 싫어. 착한데 예수 믿어 더 착해서 천당 간다. 이러고 싶어요. 썩어질 그 용어를 나한테 안 썼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마귀가 계속 우리한테 바른 소리를 해요. “정신 차려라! 그런데 현혹되지 말고, 평소에 니 잘하잖아.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믿으라고 하면 믿으면 되고. 믿음 없으면 믿음 달라고 하면 될 건데. 뭐가 그렇게 어렵냐?”라고 마귀가 계속 니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이캔두잇(I Can Do It), 하면 할 수 있다고 계속 그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걱정할 것 없다.

 

21절에 봅시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죠. 사실 제가 오늘 준비한 멘트는 이 문장이었어요. 이 멘트를 이야기하려고 긴긴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주님의 일은 뭐냐, 줘놓고 빼앗아가요. 주님은 다 주셔놓고 빼앗아갑니다. 애한테 맛있는 거 줘놓고 빼앗아 가보세요. “할머니 나빠!”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죠. 애는 “아, 원래 내 게 아니구나. 드리자.” 이게 없어요. 애가 우리의 원형 아닙니까? 우리는 이중삼중오중십중으로 자꾸 애의 이런 본성을 감추고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걸 뜯어내게 되면 본성은 뭐냐 하면 줬으면 됐지, 왜 도로 빼앗아 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금고로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줬잖아요. 내 것인 줄 착각하잖아요. 금고 비밀번호 0707707열어가지고 계속 줘놓고 계속 빼가요. “그만! 그만! 그만하란 말이에요.” 그래도 계속 빼가요. 우리를 자기의 개인적 금고로 사용합니다. 주님은 빼가는 재미로 살고. 우리는 안 빼갔으면 좋겠다고 하고. 몸도 늙어가고 그리고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이건 내 건데 왜 가져가느냐 하는 식으로. 그냥 십일조나 받고 떨어지라고, 우리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주님은 꾸준히 빼앗아갑니다. 다 빼앗아갑니다. 원래 우리는 다 빼앗겨야 될 잃어버린 자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를 우리가 몰라요. 그리고 잃어버린 자가 난줄 모르고 우리는 괜찮은 사람인줄 알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방법은 뭐냐, 듬뿍 줘요. 듬뿍 주고 하나둘 빼가면서, 니가 생각하는 니 자신과 주님이 너를 다루는 방식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질이 나서, “가져라! 다 가져라! 감질 난다 감질나. 몇 달간 안 빼앗아가서 좋다고 했지.” 근데 몇 달 뒤에 차사고 나서 오십만 원 물어주고. 이거 뭐.

 

우리는 이유는 알아요. 주의 뜻이라고. 근데 그 태도가 화난 투로 미안해요! 라고 한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어요. 왜 빼앗아 가느냐 이 말이죠. 빼앗아 갈 거면 아예 주지를 말든지. 줘놓고 빼앗아가야 우리의 주제파악이 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성질이 못된 인간인지. 주님 거라고 이론으로는 이야기를 해놓고 빼앗아 가면 화내고. 이거 뭐 앞뒤가 안 맞아요. 앞뒤가. 주님의 금고. 우리에게서 주님은 아무 때나 빼앗아갑니다.

 

욥도 반발했잖아요. 욥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라고 해놓고 막상 진짜 빼앗아가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니는 잃어버려도 싸잖아. 마땅하잖아. 근데 왜 니가 니 자신을 지키려고 그렇게 니 자신에 집착하느냐 이 말입니다. 뭐 너한테 의로움이 있다고? 뭐 바르게 살았다고? 덜 빼앗겨봤어요. 더 빼앗아보세요. 으악~하고 물죠. 손가락을 물 거예요.

 

겨울수련회 아가서를 미리 할게요. 사랑이란, 사랑의 시작은 미움입니다. 아가서의 주제가 뭐냐, 실패한 사랑이에요. 제목도 정했어요. 실패한 사랑. 아가서의 마지막을 보세요.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없어요. 남자는 집요하게 사랑을 하는데, 끝대목이 이거 뭐 아가2를 제작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전편이 이상하게 끝나버려요. 사랑한다고 하고 끝나버려요.

 

모든 인간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이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합니다. 사랑에 실패한다면 나올 것은 눈물밖에 없죠. 여기에 동원되는 가요는 열 개도 넘습니다. 아가서 하면 밋밋하잖아요. 아주 애타도록 잃어버린 사랑. 애원. 김광진의 편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다 줬는데 배신당하는 것. 데이트폭력이 일어날만하죠.

 

다 줬는데 여자는 사랑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사랑에 실패했는가? 그래서 아가는 신약에 있지 않고 구약에 있습니다. 그거는 다음 시간에...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것도 마지막 때에. 아가자체가 예언이거든요. 이스라엘은 아가를 해석하면 나와요. 이스라엘은 아가서 해석을 아주 좋아합니다. 은유적 해석의 선두주자가 아가입니다.

 

아가에 나오는 하나하나가 전부 다, 온리유Only You 오직 우리만을 사랑해서 사랑을 준 거예요. 아가서가 있는 한 구원이 이방인에게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독점적이니까. 이방인들을 주께서는 질투하듯이 미워했어요. 오직 나에게. 다른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보고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근거를 대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큰소리를 칩니다. 할례, 안식일. 바로 그거다 이 말입니다.

 

할례를 행한 민족은 누구밖에 없다? 오직 우리민족밖에 없다는 거예요. 할례는 몸에 새긴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할례 받은 자는 움직이는, 주님의 사랑을 싣고 다니는 매개체가 돼요. 주님의 사랑은 할례입니다. 특별히 사랑한 거예요. 모세가 할례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모세처럼 할례를 행했던 모든 사람은 모세가 받았던 모든 예언의 수혜자가 되는 겁니다. 수혜자. 혜택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창세기 15장에서 거룩한 사람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누구한테 다 흘러간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흘러갑니다. 근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또 시비를 걸어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이 말이죠. “저요!”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아니, 우리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모세 율법을 지키는데, 왜 우리 아비가 악마입니까? 그렇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실패한 메시야를, 진짜 메시야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실패했어요. 사울이 교회 부수는 혁명에서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죠. 실패한 사울. 실패한 사울 안에 성공한 교회가 거기에만 있어요. 성공한 예루살렘 교회는 실패했고,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가 실패하기를 독려하고,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았던, 그 실패를 요구했던 그 인간 속에 세상에! 진짜 교회가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실패한 메시야로 인하여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성공작입니다. 짜증이나 불평내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전부 다 성공한 사례에요. 성공한 거예요. 제가 간음을 했습니다. 성공하신 거예요. 제가 살인을 했습니다. 성공하신 거예요. 성도 입에 실패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세요. 주님이 싫어합니다.

 

실패는 누가 실패했는가? 주님이 실패했어요. 주님이 실패한 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어요. 추가되는 실패는 없어요. 그 실패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실패했기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분수를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어요. 실패한 것 때문에 성도는 실패는 실패가 아닌, 실패 자체가 성공인 것을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실패했기에 성공한 거예요. 실패했기에. 아주 역설이죠.

 

더 이상 성공을 더 기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성공적인 인생입니까?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거든요. 조바심내고 협박, 공갈 할 필요가 없다고요. 더 이상 실패할 구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보다 더 큰 성공한 사례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번 달 실패해서 수입이 700만원 들어왔다. 다음 달에 또 실패해서 1500만원 벌고. 궁중족발해가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거보다 더한 실패가 없기에. 그 자체로 만족하니까. 마귀가 속아 넘어 갈 수밖에 없어요. “졌다!”

 

마귀는 항상 이걸 협박하거든요. “너 그러다 실패한다.”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아직은 실패 아니야. 아직도 얼추 성공적이야.”라는 것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독려하고, 긍정적인,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세뇌를 준 거예요. 세뇌라고 하면 너무 식상하니까 말을 바꾸겠습니다. 우리한테 주사를 놓는 겁니다. 주사를 딱 놓아요.

 

남한에서 파견된 그 간첩이 김정일을 만나는데, 김정일한테 병균을 퍼트릴까 싶어서 기업가로 변장한 간첩에게 주사를 딱 놓습니다. 그 주사가 뭐냐 하면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주사에요. 주사 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녹음기를 틉니다. “너는 어디 소속이야?” 무의식 가운데 본인이 이야기를 하겠죠. “너는 왜 평양에 왔어?” 근데 세상에, 흑금성(황정민)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남한에서 파견한 기업가 간첩은 무의식가운데서도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이 되었든지, “니 상급자가 누구야? 간첩하라고 누가 너한테 지시했어?”라고 물으니까, 약물에 취했는데도, 황정민이 하는 소리가 “내가 사업가인데 무슨 상사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거 진짜구나!” 그래서 통과한 거예요. 이 영화 이름이 ‘공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뼛속까지 버림받았어요. 뼛속까지 실패자에요. 주께서 성령으로 마취제를 꾹 놓는 거예요. 니가 성공해도 풀의 꽃같이. 풀꽃이 아름다워요. 박수쳐요. 성공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뭘 압니까? 말세는 역사가 마무리되거든요. 말세는 모든 역사를 사라지게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 모든 것이 풀의 뭐가 됐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하는 그것이, 우리 본질에서 피어난 꽃이나, 그 꽃을 피게 하는 그 원천이나 그놈이나 그놈이 다 똑같은 거예요.

 

썩어질 것에서 핀 꽃은 썩어질 것이잖아요. 그대 이름은 장미! 장미든 뭐든 간에 썩어질 장미에요. 그대 이름은 장미니 백합이니 백날 해도 썩어질 것이라 이 말이죠. 그동안 우리는 그 장미를 위해서 얼마나 먹을 것 안 먹고 혼신의 노력을 하면서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갔습니까? 한 순간에 주께서 주신 이 말씀, 너는 썩어질 인간이고 너는 죽었던 인간이라고 하는 순간에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 소망, 사랑, 이 모든 개념은 그동안 썩어질 육의 해석에서 도출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거거든요.

 

육의 해석에서 윤리도덕이거든요. 온유와 화평, 베드로후서 1장에 나오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5-7). 이러한 단어들이 뭘 거쳐야 된다? 육의 해석을 거쳐서 영의 해석에 도달할 때 뭐가 부각이 됩니까? 그 과정, 주님께서 변화했던, 주의 존재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나타날 때, 주의 그 변화가 담긴 채 이렇게 이동하는 겁니다. 썩어진 인간을 주의 개입으로 변화가 될 때, 그게 뭐다? 그게 형제우애고 그게 온유고 화평이고 사랑이고 겸손이고 덕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일에는 뭐가 나와야 됩니까? 영적해석이 나와야 됩니다. 영적해석.

 

영적해석의 특징이 뭐냐, 육은 창조되었지만 영적해석은 창조가 없어요. 이미 창조 전부터 준비된 겁니다. 그 준비된 것이 우리를 통해서 분출되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계속 남에게 분출돼요. 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그것에 짝을 이루어서, 조를 이루어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남들은 “아이고, 온유하네. 저렇게 겸손하고, 가만히 있어보자 겸손에 덕을 더하네. 아! 거기에다가 형제우애를...” 근데 본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근데 그게 형제우애고 덕이 되는 거예요.

 

실컷 주님이 시킨 대로 남도와 줘놓고, “아이고, 집사님 고맙습니다.” 이러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요? 내가 그렇게 한 기억이 있나? 내가 흑금성인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게 내 무의식인데.” 이게 영적해석입니다. 만약에 육적 해석에서 겸손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게 무의식이 의식이 돼버리죠. 자, 누가 나를 도와달라고 해서 오만 원을 도와줬다. 그러면 무슨 부담이 되느냐 하면 나중에 십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줄까? 말까? 이게 부담이 돼요. 걱정이 된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육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내가 뭐했지?” 이러면 “오만 원 빌려줬잖아.” “언제? 내가 언제 그랬는데?” 근데 돈 빌려주고 잊어버린 적은 별로 없죠. 돈 갚는 것은 잊어버려도.

 

그래서 늘 우리는 육적해석, 영적해석의 변화에, 주님의 주시는 변화가 매일같이 돼요. 매일같이. 5년 전에 그렇게 했던 것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존재가 돼버리고. 매일같이 주께서 해가지고 육을 뭐로 바꿔준다? 영으로 바꾸어서, 육으로 할 때는 다음에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까, 말까 조마조마한데, 영적해석으로 은혜를 받아버리면, “내가 뭐 했는데?” “도와줬잖아요.” “내가 도와줬는가? 그래서 뭐?” “얼마나 착하다고요.” “뭐가 착한데? 지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네.” 이렇게 되죠.

 

다시 말해서 육적 해석은 자기가 성공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것을 마귀로부터 부여받지만, 이미 영적해석으로 들어와 버리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실패한 자가 되죠. 실패한 자기 때문에 실패라는 어떤 일도 실패가 아닌 거예요.

 

만약에 내가 육적해석 같으면 어떤 일에 실패했잖아요. 그러면 뭘 추적하느냐 하면 원인을 추적합니다. 다음번에는 그런 실패를 두 번 다시 안 하기가 돼요. 목사님들은 알아요. 심방 갈 때 친한 사이인줄 알고 농담을 한마디 했더니만, 갑자기 얼굴색이 확 변했어요. 수습이 안 돼요. 뒤늦게 알랑방구로 수습을 해보려고 해도 이미 바뀌었어요. “목사님 안 바쁩니까? 볼일 보세요.” “집사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됐습니다. 아이고, 옆에 전도사 있고 하는데 됐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뭐가 됩니까?” “(비꼬는 투로)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태도가 벌써, 톤 자체가 맛이 갔어요. 잠언서가 훅 떠오르죠. 성을 빼앗는 것은 쉬운데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아, 어떡하나?”

 

만약에요, 진짜 자기가 실패함을 알 것 같으면요, “막 했는데 어쩌라고!” 삐져가 다른 교회에 간다고 해도, 다른 교회에 가는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나도 이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닌데, 다른 교회에 가든 내가 왜 신경을 쓰는데? 나 원래 실패했어! 근데 실패했다고 해서 교인 하나 또 붙들려고 하는, 실패를 우회해서 또 노림수가 있죠. 그러니까 모든 하는 일이 합력하여 이게 선한 거예요. 근데 누가 선하지 않다고 우깁니까? 육적인 해석을 맨날 되풀이하는 내가 주님의 하는 일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못돼 처먹었어요. 우리가 알아야 돼요. 우리가 얼마나 못된 지를. 근데 주께서 못됐다고 하는 것 자체도, 주께서는 최고여~라고 합니다. 갑자기 전라도 방언을 하는데. 니가 못됐다는 것을 이제 알았느냐? 그게 내가 보기에는 성공한 것이라는 거예요. 잃어버렸고, 그저 잃어버렸고 못됐다는 것.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왜? 풀 값을 합시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넉넉하게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우리는 괜찮은 내가 되기 위해서 억지를 부렸습니다.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린다고 착각했습니다. 주여, 그것이 바로 썩어질 모습이라는 것을 또 다시 표출한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날마다 주님에 의해서 성공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80810b 베드로전서1장 20-25절(헛수고)-이 근호 목사.hwp (68.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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