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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 10:26:24 조회 : 137         
20181207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이름 : 한윤범(IP:125.129.150.1)
20181207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문제를 제기했지요. 어떻게 나의 운명을 제사장이 몽땅 다 가져가느냐?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과 두 번째는 인공물이 만든 부착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의 효과를 내는지 그 문제거든요. 그 문제를 오늘 본문과 해결돼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해결되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해요. 비-현실(성)입니다. 비-현실성을 붙잡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제사장이 가져간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현실에 속해요. 나 자신이 제사장을 통해서 어떻게 좋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된다면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돼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섞여버리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나로 인하여 계속해서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이 돼버려요. 비-현실은 현실에 없는 겁니다. 있는 데서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없는 것은 없는 거고 있는 것만 있지요. 있는 것 속에는 없는 것은 없어야 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있어도 결국 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저 제사장이 우리한테 어떤 이득을 줄까를 늘 현실성 있는 결과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현실을 잡아야 되는데 자꾸 현실을 이루려고 현실을 유지하고 그걸 발전시키려고 키우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게 있지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죠. 그렇다면 현실에선 죽음이 끝자락이에요. 현실의 한계점이고 경계선입니다. 죽으면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니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 죽음 뒤에 모든 것이 허사고 아무것도 아니고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죽음이 가장 진지하지만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죽음조차도 시시한 일이 되는 그 무엇, 그것이 제사장을 통해서 뿜어져 나와요. 그게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게 비-현실적인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거지요.

여러분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제사장이 그런 복장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제사 드리지요. 제사는 반복, 죽음을 집어넣고, 원료가 죽음이고 결과물이 생명 또는 죄 사함이 나오는 거예요. 공장에다 죄를 집어넣으니까 제품이 죄 사함이 나오고, 죽음을 집어넣으니까 영생이 나오는 거예요.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제 명(목숨)을 가지고 같이 동거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걸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강조하는 겁니다. 너, 나 만나면 죽어. 이거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런데 안 죽는 사람이 있어요. 불속에 들어가면 타죽지요. 그런데 불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 갑옷을 입고 살아남았잖아요.

제사장 복장에 무슨 요소가 있단 말입니까? 죽어 마땅한 것도 살릴 수 있는 요소가 제사장 복장에 장착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제사장의 효과입니다. 그 제사장 효과에 대해서 궁금합니까? 궁금하면 우리는 산 채로 다른 말로 하면, 현실감각으론 다가설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채로 다가가게 되면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고 싶은 인간의 생존 욕구가 작용되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연속에 불과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과감하게 희생제물 죽을 때 자기가 산 자로 여기면 안 돼요. 희생제물아 너 죽고 나 대신 살자. 이건 안 되고 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은 놈이란 인식으로 동참해야 됩니다. 그게 안수라는 거예요. 안수가 현실과 비-현실의 융합이에요. 양에게 안수한다. 어떤 사람이 죄 지었을 땐 죄 지은 사람이 안수를 해요. 어린양을 가져와서 할 때 제사장이 안수하세요, 안수하게 되면 전가라 하지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부탁한다, 양아. 옮겨지는 거죠.

이게 신약에 오면 세례와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갔다? 이건 의인이 죄인 속에 합류하는 거예요.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인으로 다뤄지는 거예요. 반대로 예수님과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인데 이제부터 의인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그럼 세례 자체, 안수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모든 현실적인 마감을 언도하고 선언해버려요. 현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란 사실을 선언하는 효과가 비-현실에서만 울려퍼지는 보이스, 음성입니다. 내가 정상이 아니란 것, 나는 환자에 불과하고 환자기 때문에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그 보이스, 영적 음성, 그게 비-현실이 나타나는 효과에요.

아까 제가 메커니즘을 언급했는데 철저한 메커니즘을 조사하라. 제가 그런 운을 뗐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영생을 얻는구나. 그걸 보고 싶어 하죠. 그러나 어느 순간에 현실적 경계선에서는 그걸 관찰, 조사하고자 탐색해서 내 지식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도 거기서 그만, 우리가 주저앉아야 됩니다. 그 다음부턴 어떻게 하느냐? 맡겨야 되지요.

주님이 실제로 비-현실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떼쓴다고 비-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비-현실에서 이미 구원받은 효과가 영적 음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정상 아니야. 나 원래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 아니야. 아름답지도 않고 쇠해야 돼. 나는 죄인이야, 라는 그러한 확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확인되는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현실에서 소속이 비-현실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럼 비-현실 쪽에서 보면 나는 산 자에요, 죽은 자에요? 우리가 정상이 아니란 말은 결국 정상이 아닌 값을 해야 돼요. 죄의 값은 뭡니까? 사망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선취한다, 미리 당겨서 취하는 거예요. 죽기 전에 죽었다고 치는 겁니다.

내가 미리 죽었다고 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할 필요 없어요. 큰 손해 본 걸로 생각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씨앗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비정상이니까. 점점 아파가요. 점점 치매 돼가고. 점점 오그라들고 있고 주저앉고 있습니다. 고집 부려도 소용없어요. 헌금하고 기도하고 백날해도 계속 오그라들어요.

나 자체가 헛돼요. 헛되고 헛된 게 나라니까요. 여러분들이고. 헛되다는 말은 허공으로 보면 돼요. 아무것도 없음,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가 과연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런 소리하면, 목사님 돈 정도는 제가 초월했습니다, 하고 싶어 하겠지요. 돈 좀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돈보다 더한 것은 명예, 자신의 명예에요. 명예를 다치는 경우는 남과 대화하며 다치는 거죠. 사람이 언제 격분하고 언제 화가 날까요? 물론 돈 좀 잃어도 화납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분노는 남이 나를 무시할 때 나를 무시하고 살아온 인생 전체를 완전히 개망신주고 무시할 때.

무시한다는 게 뭔 뜻이냐 하면, 나를 눈앞에 있어도 현실에 없는 사람 취급할 때. 우리가 격분한다는 말은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야. 여기 내가 존재하는 게 안 보여, 라고 강변하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믿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믿음 있다고 해도 건드리면 격분하는데. 돈 한 백만 원 사기 당했다. 이건 참을 수 있어요.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맛이 없다. 그 집에 안 가면 되지, 뭐. 애가 신경 썼는데 성적이 안 좋다. 잘하면 되지, 뭐. 이런 것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면전에 예상 못한 무시를 당할 때는 격분하죠. 용수철을 눌러놨는데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처럼. 낡은 침대 위에서 뛰면 찢어지면서 용수철이 튀어나오잖아요. 그 식으로 그 순간 우리가 감추었던 것 다 찢어지고 하지도 못할 욕 같은 게 막 나오는 거예요. 안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나 그렇게 없는 존재로 취급받은 녹녹한 인간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스스로 좀 접었지. 접으면 접을수록 탄력이 강렬해요. 그동안 잠시 접은 것뿐이지요. 그래 놓고 믿음 있다, 복음 안다고 우겼지요. 창조된 인간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있어도 망했어요. 제사장 있어서 망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실패했다고 제사장 직을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확대시킵니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든 사람이 그 어떤 현실도 이깁니다. 원대한 비-현실을 붙들어야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기 21장의 제사장 율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부착물이 된 인간을 뭐로 바꾸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비-현실적 제사장으로 확대시켜 나가고 그걸 성화시켜 나가고 완성시켜 나가겠지요. 예수님 옷 입을 때 제사장 복장으로 돌아다녔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평범해요. 예수님의 옷마저 나중에는 가위바위보 해서 이건 찢어지지도 않아. 통으로 빼앗겼습니다. 이 현실세계에.

주님께서 비-현실 세계를 드러낼 때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처참한 죽음으로서.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세계의 마지막 나락, 절벽이 죽음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죽음 근처에도 가기 싫어해요. 곧 없어져도 살고 싶어 해요.

죽음과 상관없으려면 현실에서 비-현실로 뛰어넘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 21장 1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너희들은 죽음과 상관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장례식에 가지 말라. 비-현실적 요소로 지금 모세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든다는 것은 곧 현재 우리가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살고 있는 사람을 비-현실로 옮기려면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하라고 하겠어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평소에 줄곧 해온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계속 하라고 이야기하겠어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죠. 그게 2절~7절이에요. 계속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제사장이 아니면 의당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뿜어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비-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현실적인 것만 아주 확실하게 보여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현실적인 나락의 끝은 바로 죽음이죠. 결국 일반인들은 죽음이라는 가마솥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죽음에 완전히 포위된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장소가 뭐라 했습니까? 제사하는 거죠. 제사할 때는 죽음을 반복하죠. 죽음을 반복했는데 비-현실적 효과가 나타났습니까? 효과 나잖아요. 진짜 이런 게 어려워요.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데 중앙 성막이 있어요. 성막에서 하는 일이 양을 잡고 소를 잡고 죽음을 반복하지요. 죽음을 반복하는데 뭐라고 선언하느냐 하면,

특히 7월 10일에는 제사장이 지성소까지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피가 완료가 되면 어떤 효과를 봅니까? 죄 사함을 받지요. 그런데 죄 사함이 뭘 경유했어요. 현실의 죽음을 경유한 효과가 죄 사함이잖아요. 그렇다면 죄 사함을 고개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이 제사 기능의 비-현실적 효능을 인정해줘야 거기서 나온 죄 사함도 실제가 돼요. 하나의 위로가 아니에요. 격려가 아니고 생생한 실제상황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나 자신을 현실적 존재로 인정하는 경우에만. 나는 백날 죽어도 죽음의 근처도 안 가려는 그런 속성으로 매일같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짜증내고 살아간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세 자로 나는 비정상이다. 누구 앞에서? 비-현실적 효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데 여호와를 안 믿는 율법을 안 믿는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견학, 구경 갔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하고 있어요. 양을 성막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소나 염소를 잡기도 하고. 그래서 인터뷰하면 묻습니다. 아저씨 양 끌고 어디로 갑니까? 내가 죄 지어서 양에 안수하고 죽이러 갑니다.

그러면 양 죽으면 당신한테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물으면서 내가 예를 들 테니까 그중에 어느 것인지 보세요. ①양 잡으면 내가 부자 된다. 양 잡으면 내 몸이 낫는다. 양 잡으면 우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해진다. 양 잡으면 내 부동산 값이 오른다. 양 잡으면 승진해서 최고의 자리에 앉는다.

이중에 정답이 있습니까? 정답이 없지요. 정답이 없는 걸 보고 현실적인 이방민족은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 왜 갑니까? 예수 왜 믿어요? 라고 질책하겠지요. 이상한 사람들이네. 효과 없는 공연을 왜 보냐고 할 거란 말이죠. 문제는 제가 예를 들 때 이방인들이 그렇게 묻는다 했지요.

오늘날 내가 나한테 물어요. 매일같이 교회 가는 내가 나한테 묻는다고요. 안 가면 안 되나? 헌금 좀 하면 이번 주 수입이 오른 게 아니고 헌금해도 헌금한 만큼 날아가 버렸어. 십일조 10년 했는데 집안이 거덜 나고 적금도 곗돈도 깨지고 현실적으로 돌아오는 효과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궁시랑 거리니까 목사가 총신 졸업해서 개혁주의신학으로 하다가 교인들이 나이 많은 장로부터 궁시랑 하니까 목사가 마음이 바뀐 거예요. 이제부터는 꿩 잡는 게 매지. 내가 매가 되려면 꿩을 잡아야 돼. 이제 간증설교로 바꾸겠지요. 복으로 바꾸겠지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복 주는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설교가 바뀌겠지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은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예레미야 44장 17절과 18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하늘의 별과 달을 섬길 때는 그렇게 복을 받더니만 여호와로 바꾸고 난 뒤에 환란밖에 없다. 그 당시 선지자에게 불만을 터뜨려요. 그게 그 당시 교인들이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긴 거예요.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제사장 주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정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까, 비정상임을 확인하라고 준 겁니까? 우리가 비정상인 거예요. 고만고만한 사람으로는 우리가 비정상인 줄 몰라요. 우리는 나름대로 다 정당해요. 딱 깨놓고 사람 사는 게 뭡니까? 나 정당하다. 그 소리 외치며 살아가는 거예요. 나 나무라지 마라, 나 질책하지 마라. 나 정당해.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럼 교회에 왜 옵니까? 정당함을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 온 거예요. 이렇게 정당하니까 복을 받는구나. 복을 받으니까 더욱 더 나는 정당한 사람이다. 평소에 자기를 정상으로 보는 사람이 더욱 더 확고한 자기한테 신뢰를 주기 위해서 교회를 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도해보세요, 복 받습니다. 헌금해보세요, 복 받습니다. 교회 봉사하고 목사 섬기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소위 테스트를 시험해보는 거예요. 내가 정당한 걸 보여주기 위해서 봉사해야 되겠다. 교회 빠지면 나는 나쁜 사람 되지만 수요예배까지 참석하면 나는 더욱 더 정상인이 된다. 그게 성화론이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십자가는 허들. 110미터 허들에 허들이 10개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자긴 정상이고 복 받으려고 하는데 허들을 높여놨단 말이죠. 허들 높이가 40cm면 넘으면 되지요. 허들 높이가 7m40인데? 밑으로 기어가나? 이 교회 가겠어요? 안 옵니다. 올 리가 있어요?

이 교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자빠지라고 넘어지라고 못 건너오라는 기준이거든요. 십자가가. 십자가를 지라해도 못 지거든요. 그래서 십자가 없는 다른 교회로 가지요. 그럼 다른 교회는 부흥되지요. 쓰레기는 모아 놔도 쓰레기입니다. 여러분 티끌 모아 뭐 되는 줄 알아요? 티끌 돼요.

평소에 우리가 현실 쪽에 살다보니까 외롭잖아요. 외로우니까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사람은 자기 정당성 때문에 살고 또 사람은 그 정당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리워서 살아요. 자기 정당성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 그걸 두 자로 러브, 사랑이라 합니다. 퀸의 불렀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란 영화 보면 그 노래 나와요. 그리고 유명한 노래들.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분석해보세요. 나의 정당성에 내가 호응하는데 같이 호응할 사람을 찾는 거예요. 생활비 줄 테니까 내 정당성에 호응해줘. 이게 부부잖아요. 여자는 살림하고 남자는 돈 벌어오고. 여자가 할 일은 뭐냐? 우리 남편 정당하다고 해주면 남편은 아내에게 밥 먹여주고 생활비 주고. 애 낳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이게 현실입니다.

그 현실에 대해서 주님은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하죠. 이혼해도 헛되고 이혼 안 해도 헛되고. 결혼해도 헛되고 결혼 안 해도 헛되고. 차라리 혼자 살아라.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 대통령 시켜놓으면 결혼 아무도 안 할 거예요. 인구 단절이 있어요. 정 사랑이 그립거든 결혼하되 너한테 고난을 있을지어다. 이런 저주의 발언을 쏟아놓지요.

그게 바로 현실 속에서 사도바울 같은 비-현실적 제사장 같은 존재에서 쏟아내는 비-현실적 효과에요. 그런 발언을 할 때 우린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 자체가 우리가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비정상이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나는 살았다고 했지요. 못 알아들어요.

듣는 우리 귀에 눈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치매에요. 얼마나 치매 걸렸으면 지 주체파악도 못하고 천당 보내달라고. 니가 뭔데 왜 천당 가야 돼요. 죽음이란 것을 경유해야 됩니다. 현실과 비-현실에는 중간에 죽음이 있어요. 자꾸 제목을 바꾸고 싶은데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이것도 후보감이다.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그게 비-현실이에요.

그 다음에 해보겠습니다. 3절부터 하지 말란 이야기를 계속 했지요. 하지 말란 이야기를 하시는 내막이 있어요. 이것 하기 전에 아까 그 문제를 풀어야지요. 어떻게 인공적인 것이 주의 일이 될 수 있느냐? 주님의 일이 인공적인 것의 비정상성을 계속해서 공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잖아요. 손으로 만든 것에는 내가 내 몸이 만들었다는 것에 자꾸 머물러 있잖아요. 그 자체를 비정상이라고 쏘아대는 겁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할 때 무슨 대안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냥 하지 말라 하면 안 되겠지요.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왜 하느냐를 시비 거는 겁니다. 왜 그 일을 하느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7절에 봅시다.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여러분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기생과 부정한 여인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인간세계에서 비정상이죠. 남의 딸은 기생 되도 좋지만 자기 딸은 기생 되면 안 좋잖아요. 이 세상의 비정상인 존재를 통해서 나머지 우리가 정상이라고 꼼수를 쓰면 안 돼요. 비정상적인 요소가 있다는 자체가 늘 비정상적인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악하다는 것이 잠재화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만약에 우리가 기계라면 어떻게 됩니까? 예, 하고 우리가 그런 여자와 결혼 안 하겠지요. 기계는 비정상이 없어요. 기계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그것이 정상이잖아요. 기계는 작동만 잘하면 되니까. 내가 만약에 기계인데 율법대로 하는 기계라고 봅시다. 선악과 따먹지 마. 예. 기생과 결혼하지 마. 예. 기계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고 안 그래도 그 여자 찝찝해서 내좇으려고 했는데 주님 말씀에 순종해서 좇아내겠습니다, 라고 우리가 수월하게 내좇을 것 같지요. 만약에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창녀고 부정한 여인이고 이혼당한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여잔데 그 여자 없으면 같이 죽고 싶은데.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에요. 잠자고 싶어도 그 여자가 떠올라서 잠을 못 이룰 정도에요.

그러면 우선순위가 뭡니까? 일단은 나의 그리움은 채워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법이 우선입니까, 나의 괴로움이 우선입니까? 나의 괴로움이 행복으로 바뀌게 우선이겠지요. 그런데 재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약에 어떤 창녀를 내가 너무 사랑한다. 사랑이란 말은, 여러분 기계 같으면 내가 사랑하자 하면 사랑하게 돼요. 그러나 인간은 사랑 앞에 누구도 장담 못하고 자신 못해요.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하고 싶은데. 오랜만에 좋은 말 한다. 사랑이 되는데 어떻게 그걸 금지한단 말입니까. 호텔 여자 사장과 신입사원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습니까? <남자친구>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거든요. 여러분은 그런 현실적인 세계 아닌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드라마 보면 난리도 아니에요. 호텔 여사장이 신입사원과 사귄다고 호텔 이미지 나빠진다고 반대하고. 송혜교는 이미 이혼한 여자에요. 나이도 물론 여자가 많지요.

그 드라마 보는 사람들은 박보검 보려고 보지 송혜교 보려는 게 아니거든요. 그 박보검이란 한참 연하의 남자가 하는 말이, 인간적으로 끊을 것 같으면 진즉에 끊었지요. 안 끊어지는 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이고 복음이고 복음 듣고 끊을 것 같으면 끊지요. 복음을 알고 철석같이 믿어도 이게 안 끊어져요.

다시 말해서 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못 지키고 일반인도 못 지키고. 일반인이 못 지키는 걸 대표로 제사장이 하라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은 제사장 직을 걸로 하려고 애를 쓰겠지요. 백성의 어른이니까. 열두 지파를 가슴에 품고 열두 이름이 자기 어깨에 있으니까 책임이 막중하잖아요. 나 하나 망가지면 이스라엘이 망가지니까.

그래서 그 비장한 각오가 율법을 이길 수 있어요? 없지요. 그러면 해결책 어떻게 할까요? 바로 창기와 혼인하는 거예요. 이혼한 여자와 혼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거예요. 이게 중간 과정으로 호세아에 나와요. 이게 복음입니다. 안 되잖아요. 되려고 애쓰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왜? 자진해서 자기를 부정한 여인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혼인이라는 게 뭘까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거잖아요. 부정한 여인과 하나가 되게 되면 옛날 유대인의 율법에 보면, 해설을 이렇게 해요. 왜 제사장은 창녀촌에 가서는 안 되는가? 죽은 자, 시체를 가까이 하게 되면 부정 타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저주받아 죽거든요. 저주의 효과가 제사장에게 묻으면 제사장은 나라의 대표자기 때문에 나라 자체가 저주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에이즈바이러스 병균 묻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감각에서 율법을 바라보는 겁니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우리가 어길 경우에만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괜찮은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안 보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허들에 걸려넘어진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다시 말해서 환자며 죄인이며 비정상인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말씀만 보지 말고 교회를 보세요. 다 자기 정당성, 잘남 때문에 교회 가잖아요.

하나님 보세요. 출석했습니다. 이번 주 중요한 일 있으니까 복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요. 지 잘난 맛에 가요. 그러다 더 잘난 사람 만나서 싸우고. 교인끼리 만남은 어떤 의미에선 싸우기 위해서 만나는 것 같아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있어. 새순교회는 예외고요. 여긴 말 함부로 하니 그런 게 없지만.

격식을 갖추어서 조심조심해서 내가 이 말하면 저기서 반발하고 명예가 어떻게 손상되고 그것 계산해가면서 기계가 아니고 완전히 죄인들의 모임 같아요. 그러면서도 죄인들의 모임이면서 죄인 아닌 척하니 더 큰 문제 아닙니까. 네 죄가 크니라.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소지와 잠재적으로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이 참다, 참다 그걸 할 수밖에 없는데요. 왜? 율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계속 늘어나요. 벌칙조항이 늘어난다고요. 결국 이 말은 영원한 제사장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제사장 직으로 오셨느냐 하면, 이 하지 말라를 자기 한 몸에 다 짊어져요.

짊어지면 가슴에 열두 지파 있지요. 어깨에 열두 지파 있지요. 거기다 뭐까지 추가했습니까? 백성들의 죄까지 짊어졌잖아요. 짊어지니까 현실적 입장에서 예수님은 뭐냐? 저 사람은 나무에 죽은 걸 보니까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따라서 큰일 날 뻔했어. 저 저주받은 가짜를 메시아로 믿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사람들이 전부 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거예요. 예수 안 믿기를 잘했다고. 예수 죽인 걸 잘했다고 말이죠.

오늘날 복음 전하는 교회 한 번 왔다가 가버리잖아요. 오늘도 그런 교회 갔다 왔습니다만. 그 사람은 가슴 쓸어내려요. 아이고, 이단 교회 갈 뻔했다.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내가 날 살리는 데 지장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 만났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고상한 사람들만 호텔에서 만나서 그래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 만나보세요. 주님 몰골이 왜 그래요? 너 때문이다. 등짝에 보니까 채찍 왜 맞았어요? 네 죄 때문에 맞았어. 내가 맞음으로 니가 나음을 입었어. 이게 바로 비-현실적 효과입니다.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걸 현실적으로 증명을 어떻게 합니까? 현실적 용어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공연프로그램으로 어떻게 그걸 증명해내요.

예배참석해서 이걸 증명 못해요. 다만 말씀 가운데 역사하다가 내가 예배 참석하는 이것도 죄구나 하는 것, 내가 뭘 해도 죄가 됨을 아는 것, 내가 죄를 아는 순간 악마를 이긴 겁니다. 악마가 내 멱살 잡고 흔들거리는 없는 거예요. 그것도 잠시 뿐이지만. 잘난 척하면 또 멱살 흔들어요.

그러나 못났다는데 나는 환자라는데 마귀가 와서 더 훌륭해야 돼, 더 분발해야 돼, 그러한 유혹이 유혹거리가 됩니까? 못났다는데 뭘 더 잘날 수가 있어, 잘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단 말이야. 그게 미끼상품이 되질 못하죠.

8절 봅시다.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이 거룩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거룩이란 분리입니다. 분리란 창조주와 창조된 것 사이의 분리가 제사장의 거룩에 심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제사장도 인간이죠. 부착물도 인간이 만든 거죠. 인간이 만든 걸 비-현실적 안목 없이 현실적 안목으로 봐버리면 그냥 또라이지 뭐. 이상한 복장하고 돌아다닌 것처럼 보이지요. 그 속에 비-현실적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 제사장에게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 설교권이 있어요. 설교란 입에서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율법을 가르치는 권한이 있습니다. 율법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율법은 뭘 재촉하는 겁니까? 너 정상 아니야, 너 환자야, 죽어도 억울하다고 하지 마. 진즉 죽어야 돼, 라는 소리가 제사장을 통해서 나오지요.

그러면 백성들은 삐질까요? 그래 너 잘났다 하고 토라질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질책하면 할수록 고마워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감사해야지요. 도망가지 말고. 반대로 해야 돼요. 목사님, 어설프게 지적하지 말고 제대로 더 깊이 있게 내 죄를 들춰주세요, 라고 해야지요.

어설프게 위로할 생각 말고 달래서 내 교회에 돈 내는 교인 만들 생각 말고 제대로 진맥 짚어줘야 돼요. 아프지요. 마사지하면 아파요. 제대로 하게 되면. 왜 아픕니까? 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주사 놓을 때 아프지요. 항상 우리 앞에 우리 힘으로 우리 행함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허들 같은 것, 걸림돌을 제시해야 돼요.

내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명쾌하게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내게서 나오는 행함은 다 비정상적이고 죄악된 것만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론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은 시도하는 자의 소관이 아니고 지체하는 자의 소관이에요.

우리가 율법 보고 있는 거예요. 율법에서 빠져나가면 안 돼요. 율법을 통해서 율법 안에 들어가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구약 믿을까, 신약 믿을까? 골라잡을 입장 아닙니다. 제3의 중립지대가 있는 게 아니요. 우린 이미 심판 가운데 있어요. 심판 가운데 있으면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냥 옴팍 당할 수밖에 없어요. 태어난 대로 죽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창세전에 예정한 자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건져내준다면 비로소 그때 우리는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 안목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룩이란 분리된, 창조주와 죄악 된 피조물과의 분리, 이 분리를 제사장 속에 이미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제사장은 일반백성들과는 완전히 차이나는 분리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복장 자체가 이미 뒤집어씌웠으니까. 그러면 제사장은 직장이 성막이죠.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무엇의 반복입니까? 죽음의 반복이죠.

거기에 비해서 울산바닥은 살아 보자의 반복 아닙니까. 오늘도 누구 만나서 계약하고 일하고. 일 왜 합니까? 살아 보자, 살아 보자. 왜 사는지도 몰라요. 그냥 옛 몸의 본성대로 안 죽어야 된다는 그러한 욕구와 본성만 남아있어요. 어쨌든 간에 안 죽어야 된다는 것, 그러면서도 지남철에 쇳가루처럼 늘 끌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마귀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를 종으로 노예로 삼는 거예요. 너 그러면 죽는다, 하면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걸 철저화시키는 것, 그것은 그렇게 안 살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비겁한 우리의 모습을 날이 갈수록 더 철저하게 하는 거예요.

막 살아라. 네가 얼마나 개판인지 막 살아봐라. 그걸 통해서 진정한 감사는 내 죽음보다 더 큰 내용이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피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제사장 뽑는 것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사는가?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선에서 머물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우리 눈앞에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그러한 효과를 우리가 누리는 대상인 것을 저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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