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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1 11:54:26 조회 : 136         
182강-창 47장 27-31절(환도뼈)19032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17.111.178.72)
182강-창 47장 27-31절(환도뼈)1903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27-31절입니다. 구약성경 76페이지입니다.

창 47:27-31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야곱이 애굽 땅에 십 칠년을 거하였으니 그의 수가 일백 사십 칠세라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오늘 대목은, 야곱이 자기 죽을 때가 다 되었습니다. 보통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세상을 떠난다고 보통 그렇게들 이야기하지요.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면 이 세상 떠나서 또 어디로 간다는 뉘앙스가 있지요.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곳에 본인이 훌쩍 떠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서 살만큼 살다가 훌쩍 떠나면서 ‘너희들은 고생해라. 나는 이제 편안하게 쉰다. 그곳에 간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개인주의적 구원관이 되는 겁니다. 자기만 달랑 살면 된다는 생각이 강렬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온 것은 야곱 개인만 구원받으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 속에는 야곱 개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손 전체의 집합의 의미가 들어 있어요. 야곱이 구원이 된다면 이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야곱의 후손이 되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이 되는 것으로 야곱이 떠나고 난 뒤에 역사 속에 증명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보기에 그냥 야곱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야곱 속에 하나님에게 구원받아야 될, 천국가야 될 많은 사람이 야곱 안에 다 함께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그러면 야곱 하나가 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구원하는 그 원칙, 기준과 원리가 그대로 야곱 안에 들어 있는 구원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이 된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보통 이 세상 사람들은 다 각자 개별자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보통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너는 네 개성이 있고 나는 내 개성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네 인생 따로 있고 나는 내 인생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것도, 구원받는 것도, 너는 네 식대로 구원받고 나는 내식대로 구원받는다면 이것은 어떤 식이 되느냐 하면, 사람 숫자만큼 천국의 숫자가 생겨버리는 결과가 되지요.

열 사람이 있으면 천국의 종류가 열 가지가 되고 백 사람이 있으면 백가지의 천국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야기했듯이 야곱 안에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들어 있다 했습니다. 그러면 야곱을 구원하는 그 원리가 야곱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공통적으로 동일한 기준과 원리로서 그들이 구원받아야 되겠지요.

사람은 얼굴은 다 다르지만, 지문이 다 다르지만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서는 야곱이나 우리나 동일해야 된다는 원칙이 성립되는 겁니다. 원리는 굉장히 쉬운데 막상 사람이 개인과 개인이 만나게 되면 각자 자기 고집들이 있고, 남한테 안 밀리고 싶은 본성들이 있어서 내가 네 구원받는 방식대로 따라갈 이유가 뭐가 있나, 하고 틱틱거리는 느낌, 경향들이 있어요.

그래서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천국 갔다면 그 사람과 똑같이 흉내를 내서 그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간 천국에 합세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 개인이 똑같이 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체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똑같이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야곱에게 주어진 그 구원의 원리와 그 후손들의 구원의 원리가 동일해야 된다는 그 원칙도 맞는 이야기고, 또 무슨 이야기도 맞느냐 하면, 아무리 사람이 천국 갔다고 해서 그 사람과 똑같이 해도 똑같을 수 없다는 이 현실적인 문제도 맞는 말이고.

두 가지 다 말은 맞는데 이게 잘 융합이 되지를 않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야곱이 자기의 구원받는 원칙을 자기 후손들에게 남겨줄 때 야곱이 어떤 식으로 남겨주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이 이야기를 야곱이 자기의 마지막 시점, 나이가 147세가 되었으니까 떠날 때가 되어서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일,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야 될 존재의 의미가 이제 최종성을 나타낼 시점이 온 겁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 동행했다는 그 의미가, 이제 자기가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그 내용이 이제는 최종점에 와 있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야곱으로서는 보여줄 것이 없어요. 자기가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마지막 최종적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그 때가 된 겁니다.

그 때에 어떤 식으로 물려줘야 되는가? 어떤 식으로 구원의 원리가 자손들에게 전수되는가? 그것에 주목해야 됩니다. 그것이 29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여기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지요.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아버지가 아들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지요.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어떤 지점이 나와요. 환도뼈는 야곱의 신체의 일부입니다. 자기의 신체의 일부에 아들의 손을 집어넣기를 원하는 거예요. 환도뼈라 하는 것은 남성의 생식기를 말합니다. 고추지요. 고환이 있는 곳. 거기에 손을 놓고 맹세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복의 원리원칙을 인수인계 받으라는 표시를 했거든요.

언뜻 보기에는 간단한 일 같지만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타인, 내가 누구의 신체를 만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려운 결정, 허락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세포 하나라도 만지면 안돼요. 아무리 남자와 남자라 하더라도 적절한 환경, 확실한 정당성이 보장 될 때는 만지는 것이 허용되는 겁니다.

신약에서 신체와 신체의 접촉의 대표적인 것은 안수하는 겁니다. 구약에도 나옵니다. 안수하는 것. 이것은 타인의 신체가 내 신체위에 접촉하는 거예요. 안수, 이 접촉이 무엇에 대한 사인이냐? 단독으로 살아가는 너에게 외부에서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너는 새로운 나라, 다른 나라에 갈 수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의 오심을 신체로 표현하는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신체에 외부에서 오신 성령이 우리에게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령을 보내신 그 나라에, 천국이지요, 그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원칙을 안수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뭐냐? 그 지점이 머리 위가 아니고 남성의 생식기 부위에 손을 대고 야곱이 알고 있던 구원의 원칙과 원리를 자식에게 인수인계하는 대목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것도 최종성으로, 마지막에 야곱이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필히 해야 될, 내가 죽으면 못할, 그래서 죽기 전에 필히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 평생을 다 모아서, 내 평생에 살아온 모든 축적된 의미가 이제는 최종성으로 그 환도뼈를 통해서 아들과 연결되는 여기에, 이 맹세에 내가 그동안 하나님께 받았던 축복과 의미, 하나님의 뜻이 다 담겨서 너희에게 전달한다는 취지로 환도뼈에 신체와 신체를 접촉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머리가 아니고 팔이 아니고 어깨나 엉덩이가 아니고 왜 환도뼈에다 맹세를 해야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와 원칙, 하나님의 천국 가는 원리와 원칙이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여기서 그 점을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야곱의 환도뼈는 다른 사람의 고추와 달라요. 야곱의 환도뼈가 특별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특화된, 하나님을 만난 뒤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그 사건을 특화시킨 특화의 자리가 환도뼈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32장 32절에 보면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이나 우리나 전부 다 혼자 살아요.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나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를 먼저 정리해야 됩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면,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따라다니면서 다 말릴 수가 없어요. 무슨 수로 그걸 다 말립니까? 행복을 말릴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의 꿈을 다 조종할 수가 있습니까? 생각마저 “그 생각하지 말고 딴 생각 해. 다음에는 그런 꿈꾸지 말고 이 꿈 꿔” 그렇게 지도할 수 있고 조언할 수 있는 자리라도 어디까지나 너는 너고 나는 나예요.

쉽게 갑니다. 인간은 내가 하는 행동을 남이 모두 다 간섭받지 않게 되고 내가 또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자식이라도 그 사람의 행동을 간섭하거나 조종하거나 말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입는다든지 누가 누구로부터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살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감동받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감동받는 것도 내가 내 결정을 한 것이지 감동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 내내 의지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내 팔은 내가 흔들고 내 머리는 내가 알아서 쓰고 내 꿈은 내가 알아서 꾸니까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것이 가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예수님 생각은 모르고 그냥 자기가 이 정도 하면 예수 믿는 거잖아, 라고 일방적으로 우기고 주장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게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혼자 믿고 혼자 좌절하고, 혼자 삐지고, 혼자 좋다가, 혼자 은혜 받았다가, 혼자 또 은혜 안 받았다가, 혼자 천국 갔다고 좋아하다가, 혼자 지옥 간다고 낙담하다가. 인간은 자기팔 자기가 흔들 듯이 매일 하는 것은 아무리 옆 사람을 참고로 하고 누구 말을, 교훈을 듣지만 결정과 선택은 누가 하느냐? 본인의 인생이기 때문에 본인이 내리는 거예요.

누가 영향력은 줄 수 있어도 일괄되게 모든 일에 다 영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선택과 자기결정이라는 것은 어디로 그게 되돌아오느냐 하면, 자기 일로 그냥 유턴해서 되돌아올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결정, 자기생각 바깥으로 조금도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성립이 안 됩니다. 천국이라는 것도 성립이 되지 않을뿐더러 실컷 교회 다니면서 열심 내 봐야 그것은 자기 쇼요, 자기 오락이고, 자기취미활동이고, 자기 상상력이고, 자기가 꾸민 자기연극 영화에 불과한 거예요. 운동해 보세요. 뱃살 빠지지. 이거 누가 했어요. 자기가 결정해서 운동해서 자기뱃살 뺀 거예요.

남들이 운동했는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운동했는데 자기가 뱃살 빠지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이빨 아픈 것도 자기가 아픈 거예요. 남이 나 대신 아파주고 그런 것 안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자기 일에서 시작해서 마감도 자기 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야곱은 특이하지요. 야곱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구원으로 마감되어야 될 그 일이 죽는 시점에 와서, 인생의 마지막에 와서, 내 구원이 너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그 행동을, 그 지침을 아들을 불러서 그것을 실시한다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요셉은 요셉인생 따로 있고 야곱은 야곱 인생 따로 있어요. 부자간이라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야곱이 갖고 있던 그 구원의 방식이 그대로 아들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 이것은 ‘뭐 그럴 수 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이것은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에요. 이것은 안 되는 일인데 지금 실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예상 못한, 하나님만 아시는 어떤 조치가 그 안에 삽입되어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그 조치가 뭐냐?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당했던 그 지점, 천사 만나서 야곱이 죽게 되었거든요. 천사 앞에서 까불다가, 내 인생 혼자 살다가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죽음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는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야곱의 신체에 특화시킨 거예요.

언약, 하나님의 약속의 응축물로 환도뼈라는 것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를 만납니다. 야곱은 야곱이고 저쪽은 천사인지 누구인지 모르니까 타인, 남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나는 나대로 살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야곱이 줄곧 해왔던 일상생활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야곱은 생각했지요. 이것은 나를 공격하는 어떤 킬러, 형이 보내 나를 해코지 하는 적일수가 있다 해서 야곱은 전력을 다하여 그 정체모를 사람과 얍복강가에서, 밤중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살기 위해서 그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씨름을 하게 돼요. 천사인 줄 몰랐지요. 밤새도록 싸웠어요.

그 싸움은 뭐냐 하면, 야곱이 갖고 있던 힘이에요. 육의 힘이에요. 육의 힘으로 다가오는 저 나의 원수처럼 느껴지는 그 존재를 자기한테서 물리치기 위해서 힘을 다해서 싸웠던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평소에 야곱은 어떻게 살았는가? 내가 갖고 있는 내 힘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 내가 나를 건사하고 내가 생존하려고 나를 지탱해 왔다는 것을 유감없이 그 천사 앞에서 다 까발린 거예요. 노출된 거예요.

내 힘으로 하나님을 믿고, 내 힘으로 천당 가고, 내 힘으로, 뭐든지 내 힘으로, 내 힘으로, 내 힘으로. 내 힘으로 기도하고, 내 힘으로 헌금하고, 내 힘으로 봉사하고,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하는 그것이 바로 야곱이 그 때까지 살아왔던 한평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야곱이 버티던 그 힘을 걷어찼던지 했겠지요.

그렇게 하니까 야곱이 힘나올 구석이 없어졌습니다. 야곱이 맥을 못 춰요.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주저앉기 전까지는 내 힘을 발휘해서 적을 물리치려 하다가 자기 힘이 쏙 빠지고 난 뒤부터는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자기에게 찾아온 사랑과 봐주심, 그냥 봐주기, 또는 불쌍히 여기기, 그것을 기대하면서 싹싹 빕니다.

밤새도록 싸우다가 그 끝은 비는 식으로 나옵니다. “살려주세요. 내가 당신 앞에서 죽어야 될 인간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살려주세요.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그것이 인간의 힘이 아니고 초월적인 힘인 것을 깨닫고 천사인줄 알았습니다. 천사인 줄 알고 그 다음부터는 야곱은 천사와 원수로서 싸웠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운 자이기에 이것은 자기가 저주받아 합당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따라서 살려주세요, 라는 말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지요. 살려주세요,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은 이제는 거덜 났습니다. 끝났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받는 것은 이제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것은 엉터리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속였던 겁니다. 내 힘으로 내가 구원받고, 내 잘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꾸준히 속여 온 천국의 기준이었습니다.” 주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게 됩니다.

거기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가 살았다고 여겨도 그것이 죽은자였음을 자기는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을 창세기 32장 30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의 추가적인 조치에 의해서, 축복이라 하지요, 추가적인 조치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봐줘서 내가 이제 살았다, 라는 것이 야곱이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경험했던 구원이고 그게 유일한 구원의 기준입니다. 구원의 원리고 구원의 원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런 사건, 씨름하는 사건으로 찾아와서 야곱의 사적인, 개인적인 구원으로 마감시키지 않고 야곱의 후손들을 이스라엘로 간주하시고 이스라엘전체를 집단적으로 구원하는 방법을, 그 최초의 인물이 되는 야곱의 신체에 구원의 원칙을 특화시켜서 새겨준 거예요. 그게 환도뼈입니다.

인간의 힘은 구원에 소용없었더라, 하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그러한 증거물을 야곱의 신체에 남긴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의 환도뼈는 뭐냐 하면, 이질적인 두 세계가 중첩된 거예요. 인간의 세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인간 바깥에 외부가 있는데 외부의 세계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는데 과연 외부의 세계가 우리한테 직접 접촉했다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 증거가 바로 환도뼈에요. 따라서 하나님에게 정말 구원받았다면 각자각자의 인생에서 환도뼈라는 요소가, 특화의 지점이 성립되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뭔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어지는 단절의 지점이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내가 하는 식으로 꾸준히 살다가 죽어서 천당 가겠지. 이런 천국은 없어요.

뭔가 누가 와서 끊어줘야 돼요. 환도뼈 같은 것. 그 끊어준 지점에서 우린 뭘 아느냐 하면, 내가 살았다는 이름이 있으나 산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 안목에서 볼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안목이 내 인생 속에 삽입되는 그 부위가 있어야 돼요. 나는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것.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는……,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겁니다. 외계에 계신 주님이 내 안에 삽입이 되는데 그 삽입되는 현상중 하나가 내가 나를 산자로 보지 않고 나를 죽은 자로 본다는 조건하에 죽은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 들어오는 그런 증거를 가져야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게 성도고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이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이게 언약의 원칙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원칙입니다. 다른 식으로 구원은 없어요. 열심 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착하고 착실하게 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하나님께 바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오늘 본문의 환도뼈가 의미가 없어요. 야곱의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봐야 돼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나와 있고 그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언약을 줬고, 그 언약의 마지막 최종적인 완성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외침을 통해서 이미 증명이 된 거예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는 식으로 오직 유일한 언약의 완성만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30절에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고 했거든요. 선영, 선산이라 보통 하지요.

그 선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창세기 25장 9절에 보면, 막벨라굴이에요. 창세기 25장 9절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막벨라굴에다 장사를 합니다. 그 전에 창세기 23장 19절에는 사라가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막벨라굴에다 제일 먼저 장사하지요.

이 말은, 죽음자리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겉으로 보면, 그 사람들이 어느 장소에 묻혔느냐고 쉽게 생각하잖아요. 어느 장소에 묻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디에 집결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 장소에 집결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평생토록 그 장소, 막벨라굴의 의미를 위해서 몰아서 집어넣었다고 보시면 돼요.

그 막벨라굴이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에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구원의 대표자가 그 사건 속에서 사라지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거기에 집결해야 돼요. 그냥 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제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는지 증명하려면 너는 최종 죽은 자리가 어디냐를 묻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는 막벨라굴, 이삭도 막벨라굴,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곱도 막벨라굴이라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마지막 죽는 장소는 어디냐 하면, 여러분이 받은 선산에 묻히는 것이 아니에요. 부활동산에,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서 나중에 묻히는 것이고 지금은 뭐냐, 살아서 묻히는 곳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십자가 안이에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안에 우리는 이미 죽고 그 십자가 안에서 이제는 우리를 주께서 뭘 로 사용하시는가? 자기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는 하나의 빈무덤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일종의 움직이는 무덤이지요. 주님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날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개인의 행동들은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아요. 내 팔 내가 흔든다고요.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다 내가 잘되는데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하나님의 천사를 얍복강에서 밤중에 싸움을 붙인 거예요.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것을 도저히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 남들도 그렇게 살아가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해서 이 땅에서 생계를 유지하잖아요. 그게 무슨 약점입니까? 그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여겼지요. 야곱도 마땅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나는 구원될 인간도 아니야. 나는 천당 못가.’라는 것을 티내는 최종적인 약점이 된다는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보내주신 천사와 맞닥트릴 때 비로소 발각이 된 거예요. 교회 와서 같은 인간들 만난다고 발각되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하고 이야기한다고 발각되는 것이 아니에요.

직접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와 맞닥트릴 때,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님의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라는 거예요. 내가 저렇게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당연한 그런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야곱이 왜 구원의 원리를 갖고 있느냐 하면, 야곱이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직접 맞닥트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되 그 조건이 뭐냐?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조건하에 복을 주는 거예요. 복 받고 난 뒤에 까불면서 잘 살아라. 그래서 복 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내 힘으로 산다는 그것이 나를 지옥 보내고 나를 천국 보내게 하지 못하는 요건, 자질, 성격, 성질, 본질, 내가 내 힘대로 살겠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과 싸움하게 만든 원인제공이었다는 것을 깨달아라, 는 말입니다.

그것이 야곱에게는 특별하게 특정신체부위에 언약을 응축물로 담아놓았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불러요. “내 인생 이제 끝난다. 끝나는데 내 구원으로 끝나면 안 되지.” 내가 안고 있던 이 구원의 원칙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내 후손들, 이스라엘 전체에 파급이 되어야 되고 인수인계되어야 돼요.

대표적으로 요셉을 불러다가 자기의 어디에 맹세하느냐 하면, 환도뼈에, 자기생식기에 합니다. 생식기에 하는 것은 뭐냐? 생식기란 자식을 생산하는 장소거든요. 대대로 자식을 번식하는 번식의 장소가 환도뼈, 생식기에요. 이 지점을 천사에게 얻어맞았다는 말은 흘러내려오는 육, 육적으로 육이 육을 낳는 그것을 도중에 끊어버리라는 말이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육에서 영으로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렇다면 환도뼈는 뭐냐? 이질적인 두 세계의 중첩이에요. 오늘날 성도라는 것은 하나의 세계만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이질적인 것, 천국과 부활의 세계, 그리고 이 죽음의 세계가 함께 뭉쳐져 있는, 중첩되어 있는 경계선에 우리의, 성도의 신체가, 우리의 몸이 놓여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힘으로 산다는 그 죄,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주님께서 아무것도 받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주시는 방식, 이 두 가지의 결과를 다 같이 품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자랑할 것이 뭐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이에요. 교회 자랑하고, 자기 출세 자랑하고, 자식 공부 잘하는 것 자랑하고. 그런 자랑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기 전에 자기의 약점인지도 모르고, 자기 분수도 모르고 까불던 때 나오던 자랑이고 그것은 세속적이지요. 오늘 본문 창세기 47장 2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애굽과 결별해야 될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이 요셉아, 새겨들어라.”라는 뜻이에요. 내 무덤을 이 애굽땅에서 빼내라 그 말이지요. 그러면 애굽땅이 어떤 땅입니까? 애굽땅이 육으로 살던, 야곱이 육의 힘으로 살던 그것으로 구성된 세계관이 애굽이거든요. 그 애굽에서 인간들이 자랑하는 것은 자기힘자랑밖에 더 있습니까?

자기 힘자랑, 자기고향자랑, 집안자랑, 자기 학력자랑, 자기 돈 자랑, 교회부흥자랑, 자기기도 실력자랑, 헌금한자랑, 전도 많이 한 자랑, 목사 섬긴 자랑, 그런 자랑밖에 더 있습니까? 자기 신앙 좋았던 자랑.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는 자랑거리가 유일하게 뭐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나를 못 박아 죽인, 나를 죄인으로 했던 그것만 나는 자랑한다. 나를 죄인으로 규정한 그것만 나는 자랑한다. 그 십자가사건을 자랑하는 거예요. 왜? 우리 몸은 십자가사건이 특화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지금도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우리 몸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생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환도뼈에, 아버지의 신체에 자식이 손을 넣었다는 것은 두 육신의 결합이지요. 이 두 육신의 결합이라 하는 것은 신약 때에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것이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것이나 그리스도의 육신, 몸이 제자들에게 합류한 것도 동일한 일이에요.

혼자 사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몸의 지체로서 두 신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성도의 삶이고 생활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혼자 있으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랑할 것은 자기 잘난 것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나 이정도야. 나 이정도 힘 가졌어.’ 그런데 환도뼈가 뭐냐 하면, 그 자랑질하는 힘이 몽땅 다 빼앗긴 거예요. 깨지고 빼앗기고 무너지고 내 소유 없고. 내 재산도 내 재산 아니고, 내 목숨도 내 목숨 아니고, 내 건강도 내 건강 아니고, 내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니고.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누구든지 자기의 전토나 자기의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누가복음의 말씀 같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갖다 바치면 구원 준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것은 시므온이가 돈 주고 성령 사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그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에,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끼고 싶은 내 것, 내 것이라고 자랑할 나만의 것의 자랑거리는 이제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만 자랑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야곱이 갖고 있는 그 개인적인 구원의 기준이 이제는 야곱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모두에게 공통적인 구원의 기준이 되려면 야곱이나 요셉이나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동일한 기준, 그들은 죄인으로서 십자가 앞에서 죽어 마땅함을 공통적으로 고백함으로서 그 사람은 새로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구원의 단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주님, 하나님 구원의 십자가의 언약의 원칙으로 우리를 규정해주시고 우리 속에 능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몸 자체가 환도뼈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동안 힘으로 살려고 까불다가 된 통으로 주 앞에 얻어맞아서 십자가에 같이 달렸음을 다시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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