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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4 20:54:53 조회 : 86         
18강-엡 2장 11-12절(이방인)190302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8강-엡 2장 11-12절(이방인)19030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1-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보통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자기를 이방인으로 생각한다, 라는 의식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너나 나나 다 같은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약에 우리보고 이방인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냐 하면, ‘이스라엘만을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의식,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민족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택했고 이스라엘만 구원한다는 그런 의식으로 무장된 사람의 입장에서 봐서는 우리는 졸지에 사람에서 뭘 로 변하느냐 하면, 이방인으로 변해요.

상당히 기분 나쁜 이야기지요. 이스라엘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무시할 만 하지요. 나는 이스라엘 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이미 사람이고 나는 죽을 때까지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사람이라는 단어자체가 저주받을 세상에서나 통하는 단어지 하나님에게는 사람이라는 단어자체가 없어요.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이방인이냐, 그것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이스라엘이 주장하면 우리는 이야기하기를, “당신은 무슨 근거로 사람은 아예 없고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이스라엘밖에 있는 이방인이냐.’ 라는 것을 주장하느냐?” 라고 하면 그들이 극구 제시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렇다고 정리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12절에 나오지요. 약속의 언약이라고 나옵니다. 언약입장에서 봤을 때에 인간이라는 단어자체가 반칙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인데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개무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없다고 여길 때는, 그 때는 인간이라는 단어가 당연한 것처럼, 그게 마땅한 것처럼 사용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이것은 언약도 약속도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필연적으로 나오는 단어는 뭐냐 하면, 세상을 설명하고, 창조를 설명하고, 자기가 죽고 나서 어디 가는가를 설명할 때는 필히 거기서 하나님을 거론하게 되어 있어요. 약속이 없을 때, 언약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거론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해와 달을 인간이 안 만들었으니까 뭔가 만든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초월자가 있어서. 종교라는 것은 뭐냐 하면, 고된 일상에서 피난처를 삼아 마음을 해소하기 위한 종교적인 안식처를 위해서 종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지요.

그런데 신이 있다는 말은 그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이방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면 그 하나님이라는 개념자체를 버리고 오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버리고 오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것과 개념짝을 이루어서 발생된 것이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오라. 사도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분이 운영한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당신은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느냐. 이스라엘에서 내려오는 언약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언약을 근거로 한다. 언약을 인정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작용했던 진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 완성으로서, 그 주어진 언약의 완성으로서 세상 진실은 드러났지요.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는, 내가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는 그 사람에 의해서 조작되고 상상되어졌던 그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던 하나님이고 구약 이스라엘에 의하면 그것은 우상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모든 원인은 뭐냐 하면,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누구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이스라엘역사 언약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를 새로 정립을 해야 되는데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가 서로의 지혜를 짜내자. 공부 좀 하자. 우리 역사는 뭐냐? 우리 문명은 뭐냐?” 그 속에서 “나는 누구냐? 나는 인간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장한 거예요.

뭐가 빠졌는가? 언약이 빠지고 약속이 빠져버린 거예요. 그 빠진 것을 근원적으로 수정에 들어가기 위해서 언약을 이야기하고 약속을 이야기하게 되면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도 언약이 무슨 말인지, 약속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언약이라고 하게 되면 김 정민이 부른 무슨 언약식인가 하는 그 노래, 그 노래에나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사람들은 언약자체를 몰라요.

왜 그러냐? 몰라도 된다는 겁니다. 왜냐? 나는 사람이고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까 하나님 섬기겠다는 겁니다. 둘 다 가위표에요. 너는 사람이 아니고 네가 사람이라고 여기고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도 가짜고 우상이에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원받고 싶다. 천당 가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하자. 성의껏 하자. 이것은 이방인들의 주특기에요. 이스라엘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방인이라는 개념자체도 등장하지 않아요. ‘이방인+이스라엘=언약’이에요. 언약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같이 조합을 이루면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입니다. 언약과 더불어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도올 김용옥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스라엘은 너무 독선적이고 편파적이다. 왜? 너희들 민족만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인 단군의 자손도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감사했어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믿는다 할 때 그 하나님이 우상이에요.

어떤 체험을 했든지 소용이 없어요. 그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문제 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그 하나님이 가짜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그 하나님을 만들어 낸 내가 가짜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면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자아의 확장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종교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불교신자라도 관계없이 누구나 인간은 재주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재주들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영물입니다. 인간 자체가 초월적이에요. 아무리 자연과학, 물리학, 화학자라 해도 로켓 올릴 때 제사지내요.

아무리 무신론자라 해도 영화 찍을 때 돼지머리 올려놓고 거기에 5만 원짜리 꼽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욕해도 공장 새로 지을 때, 또는 집 새로 지을 때는 상량식이라 해서 공장 프레임만 짜놓고 제사 지내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신을 인정 안 해도 고기 잡는 어부가 바다에 나갈 때는 제사 지냅니다.

인간은 허약한 면을 신이라는 존재로 메우려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교회 이 자체가 가짜라는 말이지요. 교회는 자신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포기를 해야 되고 하나님을 믿지 말아야 돼요. 그런 자신이 있거든 믿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 자체가 가짜며 거기에 의존하는 나도 가짜라는 것을 인정해야 될 것인데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의롭게 되려는 그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의롭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 정당함을 포기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누굴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의로움과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굴 호출하는 거예요. 자꾸 사람들을 불러내고 자꾸 만나는 이유는, 자기변명과 자기보호를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나 의롭지? 나 정당하지?’ 인간이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의로움이에요. 제가 설교 처음에, 하나님을 버리고 이 언약 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이런 식은 아닌데 하여간 그런 조로 들리신다면, 심지어 그것조차도, ‘예, 내가 쓰레기고 나는 나쁜 인간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버리고 십자가진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시도할 것인데 그것은 자기 의로움 아니에요? 그것도 자기 의로움이거든요.

어디 되도 않는 꼼수를 쓰십니까? 그것조차 자기 정당함이고 다른 것은 실패해도 나는 이것만큼은 실패 안하겠다는 다부진 의지 같은 거거든요. 그것도 자기변호가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에서 이방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결과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이고 나는 저주받을 사람이 맞습니다, 하고 입증하고 그 다음부터 나를 인생실패자로 자인하고 난 뒤에 예수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일을 안 하십니다.

왜냐하면 실패하는 그 위상, 실패의 자리를 우리는 몰라요. 나름 실패했다고 우기지만 아직 실패는 멀었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몰라요. 실패를 언제 아느냐 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임할 때 실패라는 것도 세팅되어서 같이 공급되는 거예요. 진정한 실패는 주님의 사랑을 이미 입었을 때 비로소 이미 실패자로 규정되어서 주의 일에 세팅되어서 그 요소로서 이미 들어 있는 거예요.

내가 구태여 실패하려고 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이미 실패자로 담겨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인생은 즐거운 실패의 인생만 남아 있어요. 즐거운, 기분 좋은 실패의 인생만 남아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실패의 체험을 한다고 해서 각인되는 그 실패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내가 실패했다는 체험, 애가 장애자니 그 어떤 체험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여전히 자기의 의롭게 되려는 본성과 자기 정당함이 찌끄러기는 여전히 그 안에 잠복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그것은 내 힘으로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이 정도까지 자기포기하고 주님 섬겼으니까 주님이 설마 내치지는 않겠지, 라는,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미련 같은 것, 여전히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방인 되고자 하는 노력도 소용없는 겁니다. 시편 79편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라는 고백을 시편 79편 6절에서 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시편 59편 8절에 보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모든 열방,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열방들은, 그들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언약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모르는,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에 하나님께서 마음껏 저주를 퍼부으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시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해요.

모든 민족에는 다 신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일방적으로 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아예 규정해 버려요. 김용옥이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민족마다 신이 다 있어요. 있는데 언약이 있는 쪽에서는 아예 하나님이 없는 자로 규정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자고 그들은 약속 밖에,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다.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은 시편 79편의 말씀처럼, 주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주의 진노가 임하는 대상자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면 잘 느낌이 오지 않겠지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가 3절, 제일 마지막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평화 되신다.” 여기 멸망자라는 단어가 나와요.

세상에서 잘 쓰지 않는 거예요. 동아일보에 “멸망자”라는 단어 잘 안 나오잖아요. “9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멸망자가……” 이렇게 안 나오지요. 인권사회가 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굴 지목해서 멸망자라고 지목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교양에 위배되는 거예요. 참으로 상대를 멸망자로 본다면 전자동기관단총을 쥐고 이마에 카메라 달고 뉴질랜드의 회교도사원에 가서 신나게 쏴버리는 거예요.

그 쏘는 남자의 심정은 뭐냐 하면, 사람이라고 여겨서 쏘는 것이 아니에요. 멸망자이기 때문에 ‘회교이민자가 어딜 기독교집안에 들어오느냐?’ 해서 다 쏘아죽인 겁니다. ‘너희들이 기독교를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는 너희가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다 죽여 버린 거예요. 죽일 때 그 상대를 멸망자로 보는 겁니다.

그 의로운 분노, 언약을 모르고, 여호와를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그 분노, 하나님의 분노와 일체성을 가질 때만 이렇게 과감하게 주를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주소서, 라는 하소연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정신으로 무장된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가운데 15퍼센트에 해당되는 정통유대주의가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알라를 믿는 사람과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멸망자와 무슨 대화가 됩니까? 그러면 뉴질랜드에서 총을 쏜 그 것이 너무 심하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언약밖에 있는 자의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다 같은 인간이잖아. 다 같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쓴다니까요.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기 멸망자라고 되어 있지만 그 용어를 바꾸겠습니다. 천벌 받을 자는 천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당연하신 조치인거예요. 천벌 받을 자. 알라신 믿는 자 천벌 받고, IS, 어제부로 다 망했습니다만 그 망한 것에 대해서 천벌 받았다고 신나게 외치고 싶지만 그 신난 외침을 여러분의 딸과 자식과 친구와 교인들에게 한 번 쏟아 부어 보세요. 멀리서 찾을 것이 없어요. 같은 교인 안에, 같은 집안 식구 안에 있어요.

오랜만에 동서가 오니까 “아이고, 천벌 받을 자 오셨네요. 웬 떡을 이렇게 사가지고 오셨습니까? 이 천벌 받을 자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아버지가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예수 안 믿으면 천벌 받습니다. 천벌 받아도 좋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그래.” 여러분, 그거 감당하시겠어요?

민수기에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그 대상자가 만약 아들이라면, 자식이라면, 그것도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식이라면 돌로 치겠습니까? 신명기 22장에 나오지요. 아들이 말을 안 듣거든 동네 어른들, 장로들에게 이야기해서 돌로 치게 하라고. 율법에 위반되니까, 언약에 위반되니까, 약속에 위반되니까 내 자식 죽여 달라고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못 내놓지요.

왜냐하면 이것은 내 자식이니까. 내가 인간이라면 너도 인간이니까,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돼요. 사람이라는 단어 자체는 없고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언약에 의해서 그 다음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언약으로 봐서 이방인이냐, 아니면 언약으로 봐서 이스라엘이냐, 그것만 규정될 뿐이에요.

우리규정을 내가 하면 안돼요. 그것은 반칙이에요. 언약에서 규정하도록 좀 놔두세요. 거울 보고 내가 나를 비추지 마시고 언약입장에서, 달리 말해서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입장에서 나를 다시 보는 눈이 있어야 돼요.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속하느냐? 이방인에 속하는 겁니다. 천벌 받을 자요 멸망 받을 자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내가 천벌 받을 자라는 것에 신나야 돼요. 기분 좋아야 돼요. 왜? 천벌이고 지옥이고 그것은 나중문제고 내가 누구냐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 내가 이런 입장이라는 것, 하나님의 안목에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자꾸 자기를 의롭게 하지 마세요. 자기 변명하는 식으로 자꾸 찾아다니지 마세요. 우리는 내가 누구냐고 확인하듯이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의 십자가와 언약에 의해서 결정된 겁니다. 사람이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옵니다. 나오는데 부정적으로 나와요. 1장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목회를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교회운영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돼요.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나를 좋게 하려면 나가세요, 라는 뜻이에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이미 우리는 실패자에요. 실패자를 이방인,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실패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한다는 것은 누가 한다?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천벌 받을, 이미 천벌 받고 있어요, 천벌 받을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예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구하는 그 자체가 지옥가지 않았더라도 이미 지옥생활 이미 시작을 한 거예요.

주님은 외계인입니다. 미지의 세계에요. 미지의 세계가 우리에게 쳐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고, 단순히 죽은 자가 아니고 천벌 받을 자로 살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저주받을 자로, 하나님의 언약의 질서속에 세팅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나 혼자 지금 신났어요. 광주강의에서 제가 중요한 성경 대목을 했어요. 마태복음 11장에,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메시아인가, 진가민가 잘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사환을 통해서 “오실 자가,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심판주가 되신다는데 시간이 지나도 심판은 되지도 않고 아직 불도 안 떨어지는데 심판주 맞기는 맞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기 실족이라는 말이 나왔거든요. 언제 메시아가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고 소경된 자, 앉은뱅이, 문둥병, 귀머거리, 죽은자, 자기가 죽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변화를 주시는 식으로 개입하신 분, 내 인생에 개입하시는 분, 하나님은 나의 일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주님이 개입하셔서 결과물로 내놓는 나, 그런 자에게만 주님이 진정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겁니다. 소경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앉은뱅이, 문둥병, 이걸 굉장히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인간이고 자기의 정당함과 자기의 의로움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이 이런 사달이 나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주어진 조치를 지금 부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오고 난 뒤부터는 ‘이게 바로 언약이다. 내가 앉은뱅이 되어야 되고 문둥병 되어야 되고, 내가 죽은 자 되어야 되고. 그래야 주님이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사는 거예요. 우리를 통해서 마구마구 향기가 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출발해서는 도저히 이런 발상이 떠오르지를 않아요. 세리와 창기, 스스로 망하고 스스로 뭉개지지 않은 사람하고는 말 섞지 마세요. 창기 안 되려 하고, 강도 안 되려고 하고, 거지 안 되려고 하는 사람과 말 섞지 마세요. 그것은 음흉한 사람들이에요. 언약이고, 약속이고 때려치우고 나 천당 보내주면 신에게 감사할게, 이런 식으로 빅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무당집이죠. 진정한 교회가 아니지요.

사람이 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고 왜 그렇게 미련 갖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의외로. 사람이 아무리 막돼먹은 인간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건방지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깨어질까봐, 사랑이 없을까봐 무서운 거예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석규 톤으로 해야 되는데.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내 가치는 나에서 챙기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의 변호, 나의 변명, 이제는 그것 다 귀찮고, 그동안 나는 그것으로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짓 안 해도 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지요. 이것은 주님 앞에서 윤리나 도덕으로 뭘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감사하게 되어 있고 고맙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끝은 뭐냐? 사랑이에요. 성도의 삶은 뭐냐? 그 사랑의 효과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날 위해서 살았지요. 죽어서 천당 가려고 살았지요. 살아서 복 받으려고 살았지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모든 의미가 사랑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다지 염려할 것도 없지만 이제 염려하는 것은 그 사랑이 내 행함으로 깨어질까봐, 내가 까불까불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리워지고 훼손될까봐 오히려 내가 나한테 걱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그 사랑을 깨지 않기 위한 삶이라 할 수 있어요. 전심전력으로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자기 의로움, 자기가 의롭게 되려는 본성, 그것이 전부에요.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예를 드는 것이 적절하겠네요.

어떤 사람이 굉장히 날 때부터 성격이 모난데 없고 순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바둑에 소질이 있어서 열심히 바둑을 두었어요. 바둑기사는 보통 5세나 6세 때부터 바둑을 둡니다. 성격이 얼마나 착한지 중학교 때까지 바둑공부를 하면서 ‘박 정환 같은 프로 기사가 될 거야. 그래서 부모한테 효도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집도 사드려야지.’ 바둑 한 판에 2억짜리 바둑이 있거든요.

그런 포부를 가지고 중학교 때 열심히 바둑을 두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돈도 잘 버는 최고의 바둑기사가 되는 것보다도 상대방이 자기에게 바둑을 지니까 상대방이 울잖아요. 그게 가슴이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서 바둑공부에 열중했던 그 많은 세월을 때려치우고 상대방이 나에게 져서 좌절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바둑을 그만뒀습니다.

그 때부터 행자생활을 했어요. 행자라는 것은 정식 중이 되기 전에 절에서 청소나 밥을 해주는 수련생활을 하는 사람이지요. 인간의 본성이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니까 이제는 내 착함을 계속해서 보강하고 유지하려고 애를 쓰기 위해서 행자가 되었는데 한 2년을 했어요. 그러다가 무엇을 못 견뎌서 그만뒀느냐 하면, 고기 안 먹을 자신이 없어서 스님 되는 길도 때려치웠답니다.

이 사람의 처신을 보세요. 딱 하나입니다. 나는 안 망하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남들 만나서 내가 이만큼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고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온 사이트가 ‘알릴레오’에요. ‘알릴레오’의 반대말이 ‘감출래요’입니다.

뭔가 인간은 ‘저주받을만한 정도는 아니잖아.’라는 것, 그 반발심 같은 것이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끝까지 간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것이 다니엘 7장에 보면 짐승의 속성에서 비롯된 겁니다. 다니엘 7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특징을 보게 되면 이게 하이브리드입니다. 혼합체로 되어 있어서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에요. 그 다음에 보니까 또 다른 짐승인데 이번에는 곰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는 또 짐승이 나오는데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이렇게 짐승의 모습이 나온다 그 말이지요.

시작은 굉장히 멋있게 시작을 했어요. 신나게 시작했다고요. 이게 흐지부지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얼굴은 반듯하게 상체를 잘 그려놨는데 하체가 흐지부지 그려져 있다면 그것은 완성품이 아니지요. ‘그림이 왜 이래? 그리다 말았어.’ 그렇게 되지요.

이런 조각이 있어요. 미켈란젤로의 것들 보면 조각을 윗부분은 했는데 밑에는 바위덩이라고 합체되어서 아직까지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 잘났다, 나는 의롭다, 나는 정당하다, 아무리 평생을 두고 노력하고 시도해도 끝을 항상 못 봐요. 끝을 흐지부지로 끝나버려요. 일관성을 보장할 수가 없어요.

노력은 하지요. 착하려고 시도는 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 대해서 자기가 손을 못 놓는 겁니다. 그래놓고 누가 한소리 하게 되면 상처받았다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우리는 상처받을 권리 없어요. 얼마나 건방졌으면 상처받았다는 거예요. ‘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없애버려야 돼요.

저주받는 것이 합당한데. 소경되는 것이 합당하고, 앉은뱅이가 합당하고, 문둥병자가 합당한데 네가 뭘 근사하다고, 네가 뭐 그리 잘난 존재라고? 언약밖에 있으면서.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건사하려고. 네가 그 말을 해서 상처받았다는 거예요. 십자가마을 상처받은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삐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수련회 나왔다가 우르르 다 나갑니다. 그 다음 수련회에 없어요. 상처 받아가지고. 자기가 자기관리하려는 거예요. 우리가 자기관리하려는 잽이 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은 알아요. 그런데 복음 아는 것이 어느새 자기정당화가 되고 자기 의로움의 하나의 방편이 되고 마는 겁니다. 복음 아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복음에 나가 왜 그런 식으로 끼어들어가는 겁니까?

진정한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방인은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고 이방민족을 공격했습니다. 공격했는데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었어요. 이스라엘 본인들이 이걸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데 그 우김 때문에 진정한 이스라엘 되신, 유일한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을 배척해버린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은 배척당한 예수님 안에 함께 몸이란 이름으로, 지체란 이름으로 함께 거기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함축되어 있었던 거예요. 몸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진짜 어디로 가느냐? 이방인에게 가요. 이방인에게 가게 되면 거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멸망을 보면서 그들이 복음 안에서 왜 망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우리는 할례를 행했지만 너희는 할례가 없으니까 저주받은 자야, 라고 욕설을 많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는가? 이것 때문에 실패했다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육신의 할례는 소용없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돼요. 로마서 2장에 나와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되는데 그 육신의 할례를 마음의 할례까지 전이시키는 그 노력을 이스라엘 역사 내내 했지만 그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말은, 언약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은 인간이 지키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줄줄 외우는 시편 40편 6, 7절에 이미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그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이 “내가 왔나이다”를 아까 설교한대로 하면, 사랑이 왔나이다. 언약의 완성이 왔나이다. 그런데 왔나이다, 라는 말을 하기 전에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께서 내 귀에 계시하기를, 다윗에게 계시하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는 이 말에서, 율법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율법에서 요구한 거예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줬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킬 역량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실력이 되기에 말씀을 주셔서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했으니까 우리는 복 받은 민족이기에 우리만큼은 그걸 할 수 있는 재량과 능력이 구비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심지어 못 지켰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언약을, 말씀을 지키라고, 할례를 행하라고 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왜 상상을 못했느냐? 인간은 그것까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자질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이방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을 내쫓은 그들이 바로 언약 밖의 존재자였던 겁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인 동시에 모든 인간은 저주받을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새로운 규정입니다. 그 규정을 우리는 수용해야 돼요. 그러면 대책이 없지 않느냐? 아무리 말씀 지키고 사도바울이 어떤 명령을 해도 우리에게는 그걸 지킬 능력은 없어요. 없다는 말은 제발 그만 자기 의롭다, 자기 정당함, 제발, “그런 짓 하는 것도 부끄럽지 아니하냐 인간아.” 이런 뜻이에요.

네가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났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질을 이미 품고 태어난 거예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좀 압시다. 자꾸 우기지 말고. 우리는 주님에 비해서 이방인이에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방인이라는 그 규정은요, 언약이 완성되고 난 뒤에 주어진 규정입니다.

언약이 완성되고 나면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이고 전부 다 이방인이에요. 예수님만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에 의해 수용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적 차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거예요. 어떤 자격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라는 자격으로. 그래서 한조가 된 거예요. 주님하고 단짝이 된 겁니다.

신나는 이방인이에요. 왜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이니까. 이방인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은 이방인. 따라서 “나의 하나님은 모조리 가짜, 내가 율법 지킨다는 것은 내 잘남에 대한 과시욕이었습니다.” 그런 겁니다. “이 세상에 나의 일이 없음에도 계속 나는 나의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일을 만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치론에 빠져요.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잘했을까, 못했을까? 이것 고민한다고 다 늙어갑니다. 악마에게 당해요. 그 행동은 잘했을까, 못했을까, 잘했을까, 못했을까? 또 이런 것 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은 인간의 입장이라면, 항상 ‘이것은 내 탓이다.’

나 잘났다는 주장도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은 나의 과오 탓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쪼그라진 것은 내가 죄지은 탓이다.’ 이게 사실은 더 무섭습니다. 그렇게 회개한다고 하나님께서 좋은 인간이라고 봐주지 않거든요. 그런 선악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이걸 한석규 톤으로 해야 이게 실감이 나는데.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내 인생이 옳았느냐 그르냐, 앞으로는 잘할게요.’ 하는 나의 정당성, 나의 의로움을 이제는 청산 시키려고 찾아오신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 <8월의 크리스마스>인가 그 영화에 나오는 대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이 사랑에서 오잖아요.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잘되면요 우리는 덩달아서 잘되게 되어 있어요. 한통속이니까. 언약에서 세팅되어 있으니까. 드라마에서 나쁜 일 한다고 출연료 안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요 말이 오늘 설교의 결론이네요. 설교 그만해야겠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했다고 영생을 안 받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오히려 내 역할이 악한 역할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서 부여된 거거든요. 그게 은사로, 성령으로서. 마귀는 자꾸 따로 독립해서 살아가라는 거예요. 착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그걸 포기하느냐? 말씀 지킬 수 있는 자질이 있는데 왜 그걸 포기하느냐? 이제 성령 받았으니 율법 지키자. 이런 식으로 악마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뭡니까? 단독, 내 구원이에요, 내 구원. 그것은 내가 신이 되는 거잖아요. 종교라는 것이 그거거든요. 당신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래요. 기독교, 천주교 할 것 없이. 신이 신으로 대접받겠다는 그것이 종교의 목표입니다. 어느새 기독교가 그렇게 변했고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예수 믿은 사람답게 살자는 것.

내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술 끊고, 담배 끊고, 바르게 살고, 악한 것을 악하다고 이야기하고 이제는 정의롭게 살겠다. 그것은 그물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요 그물에 더 깊숙이 들어간 거예요. 고질병입니다. 정말 이것은 더 이상 방법이 없어요. 그 정도 되면 악마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와요.

교회가 주님 쪽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새로운 전략에 전부 다 빠져들고 말았어요.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면서 교회법을 지키고 있어요. 재적교인의 3분의 2가 어떻고. 그런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안 나와요. 성경은 이겁니다. 속죄제와 번제, 요새 말로 하면 헌금이죠.

“그런 것 안 받는다. 내가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다.” 십일조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나한테 구원받고자 뭘 내밀지 말고 내가 직접 특이한 인물을 보낼 것이다. 그 인물이 잘되면 너도 덩달아 잘된 것이다.”라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눈을 활짝 밝힌 겁니다.

내가 준비된 인물을 보내겠다. 그분이 네가 그렇게 못 지키고 답답해하는 그 모든 율법을 혼자 다 이루어서 그래서 생긴 그 의를 너에게 선물로 줌으로 말미암아, 사랑이지요, 한 것도 없이 우리가 의인이 된 겁니다. 황송스럽고 미안하기 짝이 없지요. 그렇지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막 사시되 혼자 사랑 없이 막살지 말고 주님의 사랑 앞에서 이것도, 막사는 것도 주의 사랑으로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언약이 먼저인데 우리는 우리 인간이라는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내 존재가 먼저였습니다. 이 오류를 언제 수정해야 될지 몰랐는데 주님 십자가사랑으로, 몽땅 다 줬다는 그 사랑의 이야기로, 목소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품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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