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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8:58:54 조회 : 160         
서울의존강의20190412a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서울의존강의20190412a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2-24절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죠. 예수님이 당했던 일들을 보게 되면 그 예수님과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계셨으면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다른 사람도 괜찮다.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주변으로부터 많이 당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우리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라고 할 건덕지를, 사도는 또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거든 니가 예수님에게 어떤 가해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걸 아예 염두 해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당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어요? 안 속했어요?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죠. 그렇다면 성도가 되었던 성도가 되지 않았던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보이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했다는 사실만 자꾸 보여주면 돼요.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뭐 어떻게는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내가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그걸 고백해야죠. 예수님은 당하기만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당하셨는데, 그 뒤에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렸다.”라고 했죠. 자, 나무에 달렸으면 뭐 밑에 있는 세상 관람하고자 달리신 건 아니고, 달렸다는 말 자체가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죽으셨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죠. 나무에 심심풀이로 달리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상대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는 이유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돌아가시게 한 원인제공자로서 우리가 살아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라면 우리가 과연 제대로 살아갔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 의해서 어떤 분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누구 하나 억울하게 죽게 한 그 사람들은, “나는 지금 사는 게 당당해! 정당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는 거야.”라고 주장할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살아도 산 자가 아닌 거예요. 죽음을 유발한 범죄자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 내가 누구냐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악착같이 자꾸 살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 살 생각만 하는 그 생각을 그들은 옳다고 하는 거예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옳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은 하자가 없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뭐가 계속 투입이 되느냐 하면은, 투입되는 것들이 뭐냐 하면은 윤리와 도덕이죠. 윤리와 도덕들이 막 드나드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정도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런 주장은 옳은 것이라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애를 키운다. 애를 키울 때 제대로 열심히 키우려고 했다. 이게 윤리 도덕적으로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이것은 옳은 일이다. 가정주부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이 과정에서 뭔가 빠져버렸죠.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빠졌죠. 주님이 빠져버렸죠. 주님은 그냥 끼어들지 말라고 할 정도로 빠져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을 죽였을 때에, 자, 잘 보세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라는 이것이 누굴 죽이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게 했죠. 근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정당하다고 한다면 일괄적으로 누가 정당하지 못합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정당하지 못하죠. 그러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죠. 아무리 윤리도덕으로 처발라도 옳지 않죠.

 

그러면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뭐가 옳지 않다는 겁니까?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이거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말이죠.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살 이유도 없으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결과는 예수님을 죽게 한 가해자로 드러날 뿐이죠. 제가 지금 중간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빠져있는 상태라면 내가 살고 싶다, 라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우기게 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그냥 살라고 하느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바른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옳다고 좀 봐줘.” 이래 나오는 거예요. 뭐만 빠지면? 예수님만 빠지면 그렇다 이 말이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살고 싶다, 라는 것이 건강할 때만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살고 싶다는 것의 정당성은 특히 병원에 누워있을 때, 요양병원이나,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몸이 아플 때에 환자들이 이중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오시게 되면 “목사님. 이제 나는 죽어 마땅해요. 나는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놓고, 자식들이 오게 되면 “애들아, 나는 살고 싶다.” 어느 게 본심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게. 믿음도 개뿔도 없으면서 목사님 앞에서는 믿음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성도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일관되지를 못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도라고 흉내 내는 이유는 평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는 이왕 사는데, 그냥 살라고 하니까 미안스러워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내 속에 있는 진짜 본심을,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살고 싶다.”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이 옳다, 라는 생각에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이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이 중간에 끼어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리니까, 여기 베드로전서 2장 22-24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나 예수다.”라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나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당했다.”라는 쪽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죠. 그러니까 그냥 예수님, 예수님, 하지 말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해를 하라 이 말이죠. 그리고 그냥 나쁜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24절에 나오죠. 친히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베드로 사도가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것을 왜 강조합니까? 그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완료는 부활이 아니고 바로 나무에 달린 죽음의 사역에, 최종성이 거기에 있다고 본 겁니다. 24절에 보면,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죄라는 말 앞에 뭐가 있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바로 앞에 있는 단어가 뭐예요? 우리죠. 우리.

 

우리가 남한테 죄지은 것 말고 우리가 예수님께 지은 죄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는 예수님 구경도 못했습니다. 만나본적도 없습니다.”라고 이래 나올 거라는 말이죠. 그 문제를 풀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이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시사,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사고사였나? 이 말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죽음이었나? 아니면 마지막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죽음이 적용될 그런 죽음이었나? 그것을 따져봐야 돼요.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은 당신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나는 이순신 장군 만나본적도 없고, 나는 이순신 장군 별로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고 해서 그 것 때문에 돌아가셨는가? 내가 이순신 장군 죽으라고 총 쏜 그 왜군의 총잡이에게 내가 뒤에서 배후조종했습니까? 아니죠. 그때 저는 안 태어났어요. 비겁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을 때, 저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우리 책임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아까 24절, “죄에 대하여”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우리. 우리라는 말이, 사실상 오늘날 우리라는 말이 없어요. 우리라는 말은 없고 개인들의 집합체밖에는 없어요.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다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슨 수가 틀어지면 다시 도로 뭐로 환원이 됩니까? 개인, 개인으로 환원해버립니다. “나는 거기에 책임 안 졌다. 나한테 거기에 대해서 묻지 마. 나는 그냥 구경만 했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처형할 때 동원되었던 로마군인들이 있죠. 그 사람들은 공직을 수행한 겁니다. 공무원들이잖아요. 공무원들. 경찰이 공무원들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뭐 의사로서, 판사로서, 가장으로서, 주부로서, 자식으로서, 목사로서, 장로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게 보이는 것은 평소에 개인의 가치를 자기가 늘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개인적으로 봐서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세상에서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그 돌아가는 그것이 내 개인의 가치를 높일 것이냐, 낮출 것이냐에 대해서 나는 잘 처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제 2인자 최룡해(현재 김영남은 91세 고령으로 퇴진)가 있잖아요. 김정은이 도와주는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북한에서는 북한의 국가운영에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기여자죠. 근데 그 사람이 한국에서는 환영을 받을까요? 맞아죽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죠. 왜 똑같은 개인인데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다르죠?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달라요? 동일한 개인이잖아요?

 

근데 전에 북한 제 2인자였던 김영남이가 집에서 자식 때리고 술 먹고 부인한테 행패부리고 그런 개망나니 짓을 할까요? 적어도 국가의 고위직이라면 안 하죠. 점잖죠. 인자하신 아버지, 훌륭한 남편감입니다. 적어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부 다 교양 있고 배운 사람들이에요. 아내가 자기 일 때문에 바쁘면 남편이 다 알아서 주식투자를 해주는 겁니다. 45억짜리를. 그 정도로 아내를 철저하게 외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판사 일만 해라. 내가 다 알아서 45억 주식투자 해줄게.” 둘이 싸울 일이 별로 없죠. 싸운다고 머리끄덩이 잡아당기고 이러지 않겠죠. 그냥 말로 싸우겠죠. 그리고 말로 싸우는 것도 “여보, 내 의견은 이런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냐?” 뭐 이렇게 재판하는 것처럼 아주 점잖게 했을 거예요.

 

항상 점잖고 바르게 살고 남한테 해코지 안 하는 그런 누구? 우리가 아니고 누구? 그런 우리가 아니고 누굽니까? 나예요. 나. 그런 나예요. 그런 나.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에 대해서 내 책임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지금 괜찮은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괜찮은 나는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인간은 윤리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고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여지를 항상 두기 때문에 개인으로 다가가서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 바라봐도 여기서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은 죄인이 성립이 안 돼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면 그거는 뭐 구원 못 받죠.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해야 하는데, 성령이 안 오고, 성령이 안 오니까 누가 가는가, 본인이 가는 거예요. 어떤 본인? 괜찮은 가치를 갖고 있는, 괜찮은 인품을 갖고 있는 본인이 가는 거예요.

 

기존 교회의 장로들 한번 보세요. 복음 압니까? 모르죠. 모르니까 장로가 됐죠. 복음 모르니까 교회운영에 대해 목사에게 조언할 때 뭐라고 합니까? 괜찮은 자아의식으로 접근해요. “목사님, 저는 3대째 이 교회에 새벽제단을 쌓고 충성을 다합니다.” 이게 윤리도덕이 아닙니까? 품위 있고 괜찮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젊은 목사한테 조언한다고요.

 

“목사님, 천천히, 발걸음은 이렇게 조신하게 내셔야죠. 목사님, 강단에서 그렇게 사투리나 쓰고 쌍스러운 소리를 쓰면 안 되죠.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인품이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나이 들어서 아는데, 젊은 기분은 알지만 이렇게 점잖게 하셔야죠. 목사는 교회에 어른인데, 어른답게 점잖게 해야죠. 아직 목회 경험이 없어 그런가본데, 제가 벌써 열두 명의 목사를 섬기고 있습니다.”이런다고요. 섬기는 건지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은 괜찮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그 교회가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죄인은 어디서 찾습니까? 없지요. 무슨 죄인이 있어요. 아니 교회에서 죄인 봤습니까? 교회는 죄인 없어요. 돈 뺏으러 온 교회 앞자리 노숙자가 나쁜 사람이지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없어요. 다들 한 점잔하시는 분들입니다. 은연중에 경쟁하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교회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아닌 겁니다. 점잖은 개개인들 딱딱 따져서 질 좋은 사람들인데 무슨 그게 교회겠어요? 주님께서는 피해를 입었다는데 피해자가 아무도 나타나질 않아요. 희한한 현상이에요. 죽으신 분이 있는데 죽을 만큼 나쁜 놈은 예수님 근처에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잘났어. 예수님 죽이는데 가담했어도 잘났고 죽고 난 뒤에도 잘났어. 그 잘남의 역사, 그 잘남의 전통, 이게 오늘날 교회역사가 되고 말았어요. 신학의 역사가 되고.

 

신학을 한번 보세요. 전부 다 잘난 사람 만들기의 용도로 신학이 흘러가고 있어요. “여러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꾸 어떤 계단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계단을. 더 질 좋은. 진화한다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논리를 인용했습니다마는, 한 계단 딛고 맹세하고 또 한 계단 올려놓고 언약하고. 이 노래 가사는 뭐냐 하면 ‘용두산 엘레지’라는 노래에 보면 나와요. 용두산아~~ 용두산아~~ 일백구십 사계단에~~ 부산 용두산에 있는 공원이거든요. 계단이 많아요. 제가 여러 번 올라가봤거든요. 올라가면서 맹세한 거예요. 점점 더.

 

인간 머릿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은 신이 되고 싶은, 신에게 연결되는 어떤 계단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착하면 착할수록 자기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마귀의 꼬임에 빠져가지고 정반대쪽으로 갑니까? 주님은 나락에 떨어졌는데, 주님이 떨어진 곳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고 주님이 없는 곳에, 마귀가 유인한, 마귀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잖아요. 세상신이니까. 그 마귀 만나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거예요. 마귀 만나러. 기도해서 만나고, 선교해서 만나고. 주님은 그 잘난 인간들의 발에 차여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십자가에, 저 용두산 계단 밑에 떨어져있단 말이죠. 쉬는 시간에 용두산 엘레지를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애절한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베드로사도가 언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 해요.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사람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오직 예수님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이야기만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 혼자 잘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겠네, 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죠. 다른 사람은 못나고 죄인이니까 뭐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만이네, 이래 하겠죠.

 

사도 베드로가 여기 24절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효과를 이야기해요. “우리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친히 나무에 달려서”라고 되어 있죠. 이게 세상의 모든 학문을 동원해도 이걸 풀어낼 수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우리가 천국에 갑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석가모니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공자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왜 다른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가 천국 가는 효과가 없고, 왜 예수님이냐 이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죠? 그걸 설명하려면 개별자로부터, 개별자의 자격으로 주님 앞에 나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개별자의 자격으로. 왜냐하면 이 개별자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윤리도덕으로, 항상 점잖은 것으로 자기를 분명히 잡고 스스로 자기를 부추기고 있어요. 아까 처음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정당하니까. 예를 들어서 가정주부라고 합시다. 나는 가정주부로서 살고 싶다. 왜? 가정주부로서 내가 완전치는 않지만 착실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는다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 자부한다. 이거거든요.

 

이렇게 말이 많은 문장 같지만 평소에 사람들이 길에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그거에요. 나는 정당하다 이 말입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을 장착하고 그냥 무심코 길을 가는 거예요. 길거리에 담배피우면서. 나는 길거리에서 담배는 피우지만 집에 가장으로서는 충실하다 이 말이죠. 따박따박 월급 가져다주니까. 까짓것 길거리에서 담배피우면 어떠냐는 겁니다.

 

항상 인간은 나는 정당하다가 있어요. 나는 정당하다. 뭐 나는 결백하다까지는 안 나가도 나는 정당하다는 것은 있어요. 그러니까 남들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개별자죠. 개별자가 집단속으로 들어가도 개별자는 안 죽습니다. 개별자는 계속 개별자 의식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뭐 4.11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이라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했죠. 기분 좋았죠. 1919년 3.1운동했으니까, 올 2019년 100년이 맞죠. 했는데, 그 사람들 서로 이권을 다투고 서로 양보합니까? 안합니까? 양보 안하죠.

 

나라가 독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요. 내 사랑이 깨졌는데 왜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느냐. 왜 파도는 치고 햇빛은 반짝이느냐 하는 노래가 있죠. 왜 새들은 짹짹거리느냐. 나는 사랑이 깨져서 세상종말인데. 왜 세상은 내 사랑 깨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돌아가고 있느냐 이 말이죠. 이런 의식이 뭐냐 하면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줘야 마땅하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이런 개별자로서는 우리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24절에 보니까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달려서 그 효과를 누가 보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거든요. 여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에요. 왜? 인간은 개별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이거든요. 개별자로부터 출발했다 이 말이죠. 개별자로 출발하는데, 개별자로 출발하는 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우리에요. 우리 안에 개별자가 들어있어서, 개별자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깁니까? 의인이라고 여깁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잖아요.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어떤 용서도 없고, 어떤 대신 죽으신 그런 것도 없어요.

 

따라서 여기에 있는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타난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자기가, 참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니까, 그걸 근거로 해서 보니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 맞네요, 라고 여기는 우리에요. 이게 어떤 철학과 과학과 신학을 동원해도, 정치경제 다 동원해도 이런 논리가 없습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이 안돼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공자가 죽는다고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부처가 죽는다고 우리가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면 이는 곧 예수님의 효과에요. 예수님의 효과. 제목을 예수님의 효과라고 합시다. 예수님의 효과는 무엇을 배제하느냐 하면은 나는 잘났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해버립니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살고 싶다. 이걸 다 배제해버려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살고 싶다. 살아있는 내가 살고 싶다. 그러니까 삶에서, 살아있다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예수님의 효과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죽었다. 사람들에게 죽은 거예요. 사람들에게 죽었으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죽음을 유발시킨 그 모든 주변의 속한 자들은 누굽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돼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죽는 데에 가해자가 된 거예요.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모여서 의논 맞춘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니가 예수님 죽일 때 각도를 너무 심하게 했잖아!” “뭐?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그냥 나는 멀리서 구경만 했어. 속으로 예수님 참 안됐다고 그렇게 생각은 했었어.” 이런 온갖 변명을 해도 하늘의 유황불은 그런 핑계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것이라고 이거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렇게 되려면 이 십자가의 효과, 예수님의 효과가 그런 결과를 낳게 한 어떤 논리성 같은 것이 있어줘야 합니다. 논리성 같은 것이.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게 참 신기하죠. 신기한 일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뭐가 됐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으면 그동안 우리가 윤리도덕을 장착하고 우리가 정당하다고 하는 그 말이 일단 쑥 들어가야 되겠죠.

 

“바쁜데 교회 한번 나오시죠?” “아이고, 바빠서 못 나오겠어요.” 자,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바빠서 못 나오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나는 내 개별자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뜻이잖아요. 임금님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이는데 오시죠? 나는 땅을 사서 못 온다. 나는 밭을 사서 못 온다. 나는 장가가느라 못 온다. 나는 소를 사서 못 온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뭘 이해를 못해요?

 

임금님이 내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시라는 말은, 당신이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각자 자기의 바쁜 일이 있죠. 그 바쁜 일을 통해서 본인 개별자가 자기를 뭐로 봅니까? 바쁜 일을 통해서 자기는 정당하고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점점 더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고 다져나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이 지나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발각당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노출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되었다는 말을 평소의 의식으로 한번 전환시켜보면, 내가 죄인 되었다는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지킬만한 어떤 가치도 손톱만큼도 내게 없다는 거예요.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지 스스로 나 혼자 반듯하게 설 그러한 인품도 아니고 또 그런 시도도 해서는 안 될 존재다. 내가 스스로 나는 이만큼 내가 정당하게 살아왔다고 우길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 앞에서 자인하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발견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저쪽에서 미리 확정짓고 규정지어버린 거예요. 누가 와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무슨 거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죄인이라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더 살라고 하지 마. 오늘 죽더라도 합당한 조치인줄 알아라.” “예.”라고 하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에요.

 

침대에 누워가지고, “이것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조금 남아있는 재산 교회에 갖다 바쳐버릴라. 안 찾아오고 말이야. 니들 진짜 유산 안 받을 거야?” 그까짓 유산가지고 협박 공갈 칠 게 아니고. “주여, 내가 더 사는 것이 너무 주제 넘는 은혜가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너무 과분한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살 가치도 없으면 빨리 데려가시는 것이 마땅한데, 저는 별 볼 일도 없는데 왜 자꾸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끄십니까? 차라리 제 소원이 있다면 빨리 육신을 벗어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의 정당함이거든요.

 

아직 예수님의 효과에 대해서 제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어떤 논리가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 다만 여기서 예수님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효과라는 사실. 우리 자신이 살 가치가 없다는 그 효과가 확산되는 그것이 선교죠. 그것이. 그래서 교회가 선교를 해야 될 텐데, 오히려 교회가 선교를 막고 있어요. 전부 다 잘난 사람들만 다 만들어놨어요.

 

그러면 이 예수님과 새로운 인간과 어떻게 만나는가, 산자들은, 보통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산자들을 만나거든요. “당신 취미가 뭐냐?” “저의 취미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에 공동묘지에 가서 거기서 산책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 별로 없어요. 공동묘지에 있는 아버지 후딱 하고 후딱 와야죠. 거기는 죽은 자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는 산자들끼리 같이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공동묘지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산자들이 왜 산자를 만나느냐 하면은 서로를 만나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자, 어떤 사람이 낮술, 술 한 잔을 걸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술 냄새가 온 지하철에 퍼지겠죠. 그 사람이 술을 왜 마셨을까요? 그 사람은 누굴 상대했습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누굴 상대했느냐 하면은 술과 술을 상대했죠. 술을 상대했습니다. 왜 술을 상대했습니까? 사람이 개를 상대하고 고양이를 상대하고 술을 상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 자기 말을 잘 듣거든요. 자기 말을 잘 들어요. 술은 한 잔 부어서 그냥 마시면 되잖아요.

 

술을 먹는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취하기 위해서, 자기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잖아요. 인간은 술을 먹는 기분으로 모든 사람을 다 만나요. 제발 나를 좀 만족시켜달라고 다 만나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죄가 나타나지 않죠. 자기의 잘남만 자꾸 자기한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정도로 잘났다. “내가 만나는 친구들은 이정도야. 우리 카톡 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아? 하여튼 빅토리도 있고 승리도 있고 다 있어. 우리 노는 가락이 이정도야.”

 

자기의 죄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간다 이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을 알아서 ‘눈치 없는 너’처럼, 눈치 없이 명절에 복음을 이야기하지, 진짜 쉬쉬하고 전부 다 기피해요. 자기 죄가 드러날까 싶어서. 예수님은 죽으셨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만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제 이게 논리에요. 우리가 탄생하는 논리입니다. 나무에 달림으로서 누가 죄 용서 받았다? 우리가 받았다.

 

그 우리는 없는 우리인데,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면은, 예수님이 죽은 자로서 죽은 자를 불러요. 죽은 자를.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주님께서는 죽은 자라고, 죽은 자로 호출되는 사람.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여기서 뭐가 발생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비-역사성이 드디어 정립이 됩니다. 비-역사성. 비-공간성. 죽음의 비-역사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는 적용되는 것, 비-역사성. 어떤 지역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적용이 되는 것, 비-공간성.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목사님 진짜입니까? 실제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두 명의 여인을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다비다. 하나는 루디아. 하나는 다씨집안. 하나는 루씨집안. 다비다는 다른 말로 하면 도르가라는 여인인데, 사도행전 9장 36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루디아라는 이름이 괜찮죠. 루디아. 이루디아라고 해도 괜찮죠.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빌립보라는 곳, 지금의 터키에서 건너가자마자 첫 번째거든요. 요새 그리스죠. 영역으로. 빌립보사람이에요.

 

이 두 사람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지금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로 보시는 그 경우를, 그래서 우리라는 것을 어떻게 형성시키는지를, 그 논리를 제가 지금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37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됐습니다.

 

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굉장히 정당한 사람이에요. 더 살아야 될 가치, 오히려 죽인 것이 하나님의 실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보다 더 살아야 될 가치 있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37절에서 주님께서는 그 도르가를 또는 다비다를 죽여 버리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뭘 알 수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멀쩡해요. 착한 일을 많이 했죠.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은 안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셨다고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끝. 이래버리면 이거는 예수님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부처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공자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부처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소크라테스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누굴 부활시켰습니까? 예수님을 부활시켰죠.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면서 그 정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른편까지 올려놔버렸단 말이죠.

 

그분이 만유의 주였습니다. 만유의 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의 적용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사역에 묶여버리는 그런 관계망 속에 놓여버린 거예요. 개별자가 날아가 버려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이 만들어졌음이, 예수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보자 이 말입니다. 그 자리가 옛날에는 여호와의 자리에요.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친히 관리하는 그 자리가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이 주어졌느냐, 쏟아졌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출발한 자리에서부터, 언약의 완성자가 출발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요. 도달하게 되어 있어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이게 전부 다 언약에 의해서 주로 말미암는 거예요. 어디로 돌아간다? 주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께서 주의 자리에, 자기의 본 자리를 차지하신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왜냐, 오른편의 자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곳이거든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가 예수님을 주되시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의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자, 사도가 사람들에게 설교해서 사람들을 구원했을까요? 주께서 일해서 구원했을까요? 주께서 일을 하셨죠. 사도가 이 세상을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내 설교빨이 좋다고, 내가 설교 잘해서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편지 썼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신기하게도 주께서 친히 작용을 해야 돼요. 아주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해요. 신기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어떤 원인도 그런 결과를 유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기한 거예요. 애쓰고 용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가 살아온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살아왔다. 이것은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말을 바꾸세요. 내가 죄인된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이 잘난 나는 뭘 해도 죄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죄만 드러나야만 했었다. 왜? 그래야 주께서 주되시기 때문에.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자기의 잘남이 빠지겠죠. 자기의 잘남이 빠지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은 나는 꼭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도 어떻게 됩니까? 빠져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도 빠져야 된다면 자기를 뭐로 본다? 산자로 보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로 본다. 따라서 주님은 죽은 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베드로전서이야기는 “죽은 자가 누구에요?” 죽은 자를 찾는 말씀이고, 거기에 희한하게도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면, 정말 이거는 기적입니다. 신기한 일이에요.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기쁨이라는 것이, 내가 예상되고 할 수 있는 것이 기쁨도 기쁨이지만, 진짜 기쁨은 예상치도 못했는데 기쁠 때, 그 기쁨은 오래갑니다. 오래갈 정도가 아니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있어야 돼요. 그거 없이는 성도는 못삽니다. 슬퍼서 못살아요. 슬퍼서. 뭐 어떤 노래에 보면 슬퍼서 행복하다는 노래가 있어요. 이건 말도 안돼요. 슬픈데 왜 행복합니까? 이승철이 불렀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에 보면 나와요.

 

우리가 죄인이라서 기뻐요. 이거는 그동안 내가 슬프고 두렵고 벌벌 떨면서 살아온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잘난 존재라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벌벌 떨고 살았던 거예요. 나는 항상 행동을 똑바로 해야 되고, 바르게 해야 되고, 그래야 내 점수가 유지가 되고, 향상되고, 점점 더 성적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는 더 찾아오는데요? 그것 때문에 분노는 더 크게 일어나요.

 

주님께서 사랑을 해줬다는 말은, 근원적으로 니가 죄인이라는 뜻이고, 죄인이라는 뜻은 뭔 뜻이냐 하면은 그동안 인생 잘못 살았다는 거예요. 잘못 살았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이 정당한데, 억지를 부리면서 나는 꼭 살아야 된다는 식으로 잘못 살아온 거예요. 이 의식 자체가. 죽으면 주님만나서 좋잖아요. 근데 주님 만나는 것이 싫다는 거예요. 나는 산사람하고 만나서 술 한 잔 먹고 싶다는 거예요. 내 잘남을 남한테 뽐내면서 사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만나는 것이 소원이 아니고.

 

교회 가서도 잘난 맛에, 시장가서도 잘난 맛에, 무슨 동호회하고 친목회가 왜 그렇게 많은지. 가정주부들이 그런 데에 굉장히 바빠요. 옛날에는 세탁기가 없어서 집안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세탁기 있고 전자레인지 있고 난 뒤에는 할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청소기도. 청소기가 50만 원 짜리 청소기도 있고. 그것도 귀찮아서 자동로봇청소기로 하고. 로봇하고 개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자기는 청소했다고 바깥에 돌아다니는 거예요. 문화 활동, 뭐 복지관에서 여러 가지 활동하는 것. 자기계발하자는 것.

 

누굴 만납니까?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을 만납니까? 안 만나죠. 대전의 시민대학에서 제가 강의를 한 학기 했어요. 처음에 한 20명이 왔어요. 나중에 몇 명 안 남았어요. 왜? 죄를 지적하니까 다 그만뒀어요. 도르가가 착한 사람이 맞아요. 그리고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거는 더 오래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답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자 도르가를. 다비다를. 같은 사람이거든요.

 

죽였을 때에, 우리는 “왜 죽이느냐?”라고 하지마세요. 사실은 죄인이라면 마땅히 죽는 것이, 거기에 토 달 필요가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0412a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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