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9-04-18 20:10:10 조회 : 76         
186강-창 49장 1-4절(야곱의 유언)19041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86강-창 49장 1-4절(야곱의 유언)1904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8페이지입니다.

창 49:1-4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찌어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여기서는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49장 28절에 보게 되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1절에 나오는 ‘후일에 당할 일’과 28절에 나오는 ‘축복’을 서로 연결하게 되면 복이라는 것이 뭐냐?

복이라는 것은 내가 기획하고, 내가 원하고, 내가 희망하고 소망한 것이 복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지어내서 갖고 싶은 것이 복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일이 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구하거나 원치 않은 일이에요. 그래서 49절에 당할 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이런 일을 당하고 저런 일을 당할 때 그게 세상 끝에 주님나라 가게 되면 그게 바로 복이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세상 살면서 육적인 생활 하면서 은근히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서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겁니다. 복이라는 것은 점잖은 나에게 덤으로 막 퍼주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강탈하는 거지요. 빼앗는 겁니다.

이것만큼은 빼앗아 가면 저는 못 삽니다 하는 그것까지라도 달달 긁어서 들춰내고 갖다 버리고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그게 바로 복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2절에,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들은 야곱의 아들인데 아버지는 누구냐?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야곱 같은 내 새끼들아. 너희 그냥 안 둔다. 이스라엘로 바꿀 거야.” 내가 야곱이었던 시절에서 이스라엘시절로 있었던 것이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곱이 경험했던 그 복을 받은 것은 야곱으로서의 인생이 아주 처참하게 깨지고 박살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거든요.

제가 며칠 전에 누가 부탁을 해서 우리 집안 족보를 봐야 될 일이 있어서 족보를 죽 봤어요. 경주 이 씨 상서공파 족보가 9권을 보면서 우리 이름은 어디 있는가를 찾으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족보를 본다는 것은 시신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차례차례로. 테러범들이 한 마을 싹쓸이 한 뒤에 경찰이 와서 시신들 수습하잖아요. 조상이라는 분들이 다 시체들이에요. 나중에 우리도 그 안에 포함이 될 것이고.

그 시체를 한 단위로 말해서 그걸 아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렵지 않아요. 아담은 필히 죽어야 된다. “아담으로서 태어났느냐? 그러면 알아서 죽는 것을 네가 복인 줄로 알아라.” 그걸 아주 간추려서 하면 “네가 죽는 것을, 네가 돼지는 것을 복인 줄로 알아라.” 그런 뜻이에요. 문제는 누가 죽이느냐, 그리고 무엇으로 죽이느냐 하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족속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전에 우리가 눈치 채야 될 것은 누가 죽이시는가 하는 거예요. 나를 죽이시는 분을 사전에 만난다면 그게 복입니다. 괜히 위로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에게 그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은, 야곱이 만났던 천사는 하나님이 어떤 차원에서 인간을 죽이는가, 라는 그 기준을 동반시켜서 야곱을 찾아온 거예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챙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면 이렇게 대접하고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이렇게 잘나게 살았습니다, 하고 자기 것을 자랑질하려고 하는 그 야곱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기준이라는 거예요. 야곱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되려면 도중에 뭔가 바뀌어져야 돼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뭔가 바뀌어져야 돼요. 아담의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아담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바뀌어야 돼요.

아담의 행함으로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는 식으로 살아가야 돼요. 교체가 일어나야 되고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아담이 그냥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신에게 달라고 하는 것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간단하게 두자로 ‘종교’라고 이야기해요. 종교는 신이나 절대자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정성과 열심, 성심성의껏 착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 하면서 아양을 떨고 귀염 받아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거예요.

죽어서 천당 간다든지, 이 땅에서 만사형통한다든지, 고부간의 갈등이 없어진다든지, 몸이 건강 한다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그것이 종교단체에서 하는 거예요.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그런데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단체 운영은 누가 하느냐? 사람이 하는 겁니다. 교회도 사람이 운영하지요. 절도 사람이 운영하지요. 성당도 사람이 운영해요.

마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도 사람이 운영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거든요. 돈 내서 교회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신이 들어준다. 우리가 게을러서 기도를 안 해서 그렇지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분은 주님이다. 따라서 기도 열심히 하면 한만큼 보상이 주어진다. 그게 희망과 기대거든요. 그게 아담이에요. 그게 아담의 요소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 고대종족들의 종교성을 보게 되면 힌두교, 북유럽종교, 이집트종교, 인도종교, 북미인디언종교, 종교가 이렇게 많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신에게 바칠 때는 술과 고기와 음악으로 대접하게 되어 있어요. 왜 신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음악을 틀어서 기쁘게 하지요? 그게 자기가 좋아서 그래요. 본인이 평소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신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레위기 1장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음식은 따로 있어요. 죽여 버리는 거예요.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 연기를 흠향하십니다. 레위기 1장의 이야기는 창세기 8장에 나오는 노아가 정결한 짐승의 연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내가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그 대목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신, 종교에서 신은 완전히 구라입니다.

완벽하게 구라에요. 왜냐하면 아담이 납득이 된다는 것은 벌써 가짜에요. 우리 아담자체가 이미 범죄한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가짜거든요. 그런데 가짜한테 납득이 되는 신이다? 그러면 그 신은 역시 인간이 만든 가짜신인 겁니다. 낯설어야 돼요. 어, 내기대나 내 소망은 어디서 찾지? 오히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소망과 기대, 희망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해야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정답은 나와 있어요. 사람은 희망으로 삽니다. 아무리 살기 어렵고 힘들더라도 희망만 있으면 사는 겁니다. 세월 호 애들 빠져죽고 난 뒤에 엄마들이 십억을 받았는데 보통 큰 돈 아니지요. 십억 받고 애들 목숨 값 좋다고 합니까?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어요. 다른 자식은 애먹이고 담배피우고 그래서 맨 날 학교에 불려 다녀도 그래도 죽은 자식보다 나은 이유는 그 자식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희망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할게요. 아담은 주제넘게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 아담 최후의 죄입니다. 쫓겨난 입장에서는 희망을 가질 자격도 없는데 희망을 갖고 있어요. 뒤에서 누가 부추겼어요. 악마가 부추겼어요. 계속 희망의 파랑새를 띄워 보내는 거예요. 희망의 풍선들을. 우리는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겹고 희망이 그렇게 좋아요.

어려워도 마음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이겨냅니다. 부부가 생각이 따로 있으면 아무리 좋은 부부라도 싸우기 마련인데 뜻이 하나가 되어버리면 그 부부는 이겨냅니다. “우리 식당 뭐할까? 하나, 둘, 셋, 족발!” 그러면 그 둘은 살아요. 궁중족발을 하든 전세 값을 올리든 그들은 버팁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된다. 부자가 되었다. 그 둘이 갈라서지요. 여자는 아파트 바꾸자. 남자는 차 바꾸자.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희망이 벌써 갈라지는 겁니다. 따로 놀지요. 아담에 속하면 필히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뜻이거든요. 그 없어짐,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미리 열 두 아들을 없애버립니다. 그 없애는 작업이 축복이에요. 야곱의 자식들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거예요. 앞당겨서 먼저 선제해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여 버리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죽어도 살려주지 않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듯이 예수 믿는 사람도 죽었다가 부활하겠지. 아닙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야곱의 축복이 그대로 성도의 본질로서 완성이 되거든요.

야곱은 죽어버려요. 그리고 이스라엘로 태어날 때는 그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새로운 임무와 역할이 주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능이 중요한 거예요. 이게 구약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적인 야곱의 아들은 죽어야 되고 주의 이름의 기능으로 인하여 그들은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어야 돼요. 이스라엘 국가가 되어야 되고 이스라엘민족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내가 기대하는 희망은 어디서 찾느냐? 찾지 마세요. 이미 끝났어요. 죽음과 동시에 나의 희망과 나의 기대는 날라 가버렸어요.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을 때 뭐가 심판받았는가를 확인해 보세요. 내 꿈과 희망과 기대, 아담적 요소, 술과 음식과 노래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한다. 그런 것 다 죽었어요.

그런 것 다 갖다 지옥 불에, 레위기 1장에 나오는 번제 태울 때 다 태운 거예요. 아담의 요소를 다 태워버린 겁니다. 그리고 새로 부여된 것은 아담의 요소가 아니고 장차 올 예수님의 요소를 미리 일찍이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에게 그 기능을 부여한 겁니다. 이 말을 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아직도 철이 없는 애들, 군에 안 가본 사람들이 처음 군에 갈 때 그런 현상이 있어요. mbc에서 여자연예인들을 군 생활 체험시킨다고 훈련소에 집어넣는 것 있어요. 여자들은 군에 안 가봤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 친구들 중에도 군에 가본 친구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군에 가는데도 가기 전에 놀던 인형을 아주 순진하게도 바리바리 캐리어에 두보따리를 싸가요.

바깥에서 놀던 식으로 군에 가서도 놀겠다. 군사훈련은 받되 나머지 시간은 내 맘대로 즐겨야지. 이런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군대를 모르는 이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은 군에 갈 때 기타들고 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 부름을 받으면 주님이 오지 않았을 때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했던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그런 것은 다 잊고, 잘라내고 주님에게 부름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를 때 불러놓고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재산이나 다 버린 자는 영생도 받고 내세에 백배나 받는다고 했어요.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또 그거 흉내 낸다고 천주교에서는 수녀들이나 신부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유니폼을 입고 하는데. 수녀들은 모여서 참기름 짜고 된장 만들어서 밥 먹고 산다고 수녀원에서 그거 하거든요. 공동체 생활한다고. 세상과 격리한다고.

정말 그런 사람들은 이리보고 저리보고 뭘 봐도 진짜 이단 같아요. 뭘 버려야 될 것인지도 모르고 뭘 얻었는지도 몰라요. 뭘 얻어야 얻었는지를 알지요. 군에 갈 때 기타 들고 가면 안돼요. 곰 인형 들고 가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담인데 주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기능이 우리에게 왔다면 마치 우리는 뭐와 같으냐 하면, 새로운 쟁반에 담겼다고 봅시다.

이 쟁반이 언약이라는 이름의 쟁반이에요. 그 쟁반의 개미라고 봅시다. 그 쟁반의 개미가 쟁반의 가장자리에 가면 절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막다른 길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이제부터는 네가 세상을 그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내 일, 주님의 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됩니다.

그걸 열 두 제자는 잠시 오해했지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오해했어요. 내가 세상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겠는가, 아마 큰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쓴잔을 마시는 처지인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치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처럼 가족 버리면 다 버린 것으로 착각한 거예요.

정작 버려야 될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니까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고난 받는 것은 우리가 허락지 않을 테니, 우리가 보디가드처럼 지켜줄 테니까 염려마세요,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그게 사탄이에요.

사탄은 뭐냐? 옛날 아담의 생활을 꾸준히 연속성을 지니고 그대로 천국갈 수 있다는 그 발상자체가 사탄의 발상이에요. 왜냐하면 그 사이에 뭐가 빠졌느냐? 십자가라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라는 것이 빠져있어요. 십자가는 철저하게 아담적 요소에 대한 징벌이요 저주고 심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면서 아담적 요소 외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라는 말이 그 뜻이에요. 저는 지금껏 살다보니 손녀 돌 때부터 두 살 세 살 될 때까지 애의 자아성이 어떻게 점점 더 확대되는지,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아담의 요소가 어떻게 그렇게 발휘가 되는지를. 물론 손녀를 실험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좀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아담이 어떻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절대적 존재로 전환되느냐? 그걸 자아라고 하거든요. 어제 강남강의의 제목이 뭐냐?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아정립의 세월이라 했습니다. 교회 들락 달락 무슨 짓을 해도, 세상 어떤 경험, 군에서 베트남 전에 가든 어떤 경험을 해도 전부 다 그게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나는 이런 인간임을 정립하는 요소로, 재료로 다 모여졌어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잖아요. 실컷 자기도만 닦았어요. 예수고 뭐고 없어요. 자기만 달랑 남는 거예요. 어른들이 자식들 훈계할 때 자기 이야기하잖아요.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술만 먹고 나면……, 진짜 술집을 부수든지 해야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복을 받지 않으면 이 아들은 없어요.

이 아들은 세상의 육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아예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인데 결국은 모든 아담에 속한 것은 없어져요. 이 땅에 없는 존재인데 이스라엘만큼은 영원하도록 보장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장차 오실 주의 이름의 기능을 미리 아담 속에 담으면 돼요. 실어버리면 돼요. 실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아담 요소하고 새로운 오실 주님, 예수님의 요소로 서로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현상을 제일 먼저 누가 경험했느냐 하면, 야곱이 먼저 경험했어요.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실제에요. 요셉도 실제로 애굽에서 고생했고 야곱도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전에 수요일 예배 때 언급을 자주 한 것 같은데 서울 안 가본 사람이 꼭 가본 사람처럼 이야기한다고요. 실제로 주님을,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어긋맞게 한다고요. 뭔가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뒤집기로 오시기 때문에. 하나님인데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고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도 가장 싫어하는, 가장 낮은 죄인, 자청해서 저주의 길로 가신 거예요. 빠져나가신 거예요. 그래서 길이 생긴 겁니다. 그게 주의 기능이에요. 새로운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새로운 아담의 모습이 그 기능이에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호강하는지 알았지요. 능력이 많으시니까.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됩니다. 왜? 주님께서 앞장서서 그 길을 갔기 때문에. 그 기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기능을 살리다 보니까 열 두 제자가 구원받은 겁니다. 열 두 제자 구원받으려고 그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구원은 아니에요. 인간의 복은 구원은 아닙니다. 기능을 드러내기 위한 일군으로 참여하다 보니까 저절로 구원된 거예요.

주님이 주신 언약적 기능은 주님을 살리는 거예요. 주님을 구원하는 거예요. 덩달아 그리스도 기능에 합한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덩달아 구원받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아담 안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으로부터 어떤 기능을 받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 기능 받는다는 것이 뭡니까, 라고 한다면 신약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 해요.

성령의 은사라 하는 것은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만 달랑 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더불어 함께 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축복들이 구약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에요. 다양합니다. 다양하지만 성격은, 성질, 본질은 똑같아요. 아버지가 당했던 경험의 재현이에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떤 경험을 당했느냐? 아버지 야곱이 당했던 것은 밤을 지배하고 밤을 활동시간으로 여기는 분을 만났어요.

자, 밤은 천사의 활동시간입니다. 반면에 낮은 인간들의 활동시간입니다. 낮에 활동해야 될 야곱이 누굴 만났느냐? 밤에 활동하시는 천사를 만났어요. 낮에 활동하다 보니까 사고방식이 인간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낯선 인물이 공격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느냐 하면, 하늘에 속한 천사, 하나님이 인간들 활동하는 시간에 들어와 버리면 반드시 핍박을 받고 수모를 당한다는 그 사실을 야곱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몰라요. 밤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밤이 우선이에요. 낮은 그 뒤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와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것이 첫째 날이에요. 저녁에 몰래 활동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때 주께서 일을 다 처리하시는 겁니다. 천국 지옥은 우리 활동으로 간섭하거나 조언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너는 입 다물고 있어라. 내가 다 해줄게.” 인간이 활동을 못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가 활동해서 이미 우리가 들어갈 나라는 천사와 하나님에 의해서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낮에 활동하는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오히려 거기에 대해서 오해하고, 반발하고,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희망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기대하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밤의 주인공을 만나지를 못해서 그런 거예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만난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나는 떠나야 된다. 어디로 떠납니까? 어디로 떠나겠어요? 떠나야 된다는 그 말은, 인간들아, 너희들이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들이 활동하는 낮의 세계는 밤의 세계에 완전히 포위당한 겁니다. 포위당한 그 세계에서 야곱에게 언약이라는 관계망을 형성한 거예요. 언약을 제공한 겁니다.

쏙 집어넣은 거예요. 언약을 야곱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이제는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쏙 집어넣는 겁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달라진 그 체험을 이제는 열 두 아들 공동의 체험으로 쏙 집어넣는 거예요. 뒤집어져야 돼요. 내가 생각한 것과 반대가 되어야 됩니다. 그 첫 번째 예로 루우벤이 나옵니다.

3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맏이)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초등은 탁월하다는 말이지요)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여기 아버지가 르우벤을 마치 나무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르우벤의 이 성질은 곧 아버지의 성질입니다. 아버지의 성질이 그대로 르우벤에게 쏟아진 거예요.

왜냐하면 3절에 보면, 르우벤은 장자고 나의 능력이고. 아버지의 능력이 장자 르우벤에게 고스란히 갔고.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나의 모든 것이 그저 인수인계로 르우벤에게 다 전달되었습니다. 물론 다 전달된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전달되었으니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정도가 아니고 그 아버지의 그 맏이.

맏이는 마치 형제들 사이에 아버지 같은 존재지요. 그래서 르우벤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르우벤이 나서서 말렸잖아요. 나중에 요셉이 애굽에 팔렸다는 소리를 듣고, 너희 형제들이 너무 심하지 않았느냐, 하고 나무라는 것도 르우벤이에요. 맏이가 맏이 값을 하는 거예요. 보통 세상에서는 그러지요. 아버지 대신이라고요. 물론 그렇지 않은 맏이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서 르우벤의 장자역할이 어디로 바뀌느냐 하면, 유다로 바뀌어요. 그리고 장자가 갖고 있던 혜택은 요셉으로 가버립니다. 장자가 하나인데 둘로 쪼개져버려요. 르우벤이 누려야 될 것, 르우벤이 가져야 될 그 장자가 오히려 동생들에게 전이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12장 16절부터 보게 되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여기 망령된 자.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다는 거예요. 자기 장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제가 아까 예로 든 군대 예를 다시 들면, 군대 가서 아직까지 곰인형을 갖고 있고 기타를 치려고 하는 것은 네가 우리나라의 군인이라는 사실을 망령되이 욕보인 거예요. 옛날 아담이 즐겼던 것을 천국까지 즐길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야곱의 요소를 가지고 천국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르우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르우벤이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창세기 49장 4절에 보면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라고 되어 있어요. 물이라는 것은 액체에요. 주체가 고체가 아니고 액체라는 겁니다. 액체라는 것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릇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내가 그런 짓을?’ 혹은 ‘내가 그렇게 대단했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어?’ 또는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했어?’ 액체는 그릇에 따라서 세모가 되기도 하고 네모 되기도 하고 동그라미 되기도 하고 액체는 종잡을 수 없어요.

인간의 몸 안에, 아담의 몸 안에 액체 같은 악마의 정신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 고체가 액체를 주관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감정을 책임질 수 가 없어요. 뭐 욱하는데 어쩔 거예요. 자기 집 불 지르고 쌍칼 들고 사람 다섯 명 죽였다 했잖아요. 진주에서. 열 세 명이 부상당하고. 몰라요?

이게 초등학교 2학년 때 “성질나거든 집에 불내고 그냥 칼도 아니고 쌍칼, 식도 두 개 들고 설쳐야 돼” 이렇게 가르칩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안돼요?” “나빠요.”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면서 그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은 알아요. 나쁜 짓을 몰라서 나쁜 짓 합니까? 알면서도 하지요. 왜냐하면 액체 같은 아담의 요소, 악마의 성질과 성격을 참을 수가 없고 감당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육은 육의 지배자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대표적으로 르우벤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 르우벤 요소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다 들어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 중에 “우리한테 이런 게 있었다. 이런 난처한 것이 있었어.”라고 열두 조각으로 피자를 조각낸 그중의 조각 하나가 우리한테는 이런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르우벤적인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르우벤은 지옥 가겠네. 르우벤은 지옥 가는데 유다는 좋겠다. 난 유다 할래.’ 뭔가 이것 가지고 구원론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통합되어 있어요. 전부 다 한 아버지 야곱에게서 나온 성질들이에요. 아담의 성질이 주님의 약속과, 언약과의 만남에서 교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기능이라는 이름으로 열 두 제자한테 할당되어 있고 분배된 거예요.

은사지요. 여기에서 육으로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장자가 아니라는 점을 장차 천국에서나 신약에서 그걸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창세기 25장에 보면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 불임여성인데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계시라는 언약의 기능 때문에 갑자기 쌍둥이를 낳게 돼요. 원래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에요. 사라처럼 아기를 못 낳는데 하나님의 계시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 계시가 주어집니다.

쌍둥이를 낳는데 그 쌍둥이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말이지요. 둘 중 하나는 맏이고 하나는 맏이가 아닌 거예요. 맏이라는 말은 뭐냐? 하나님의 맏이라는 것은 맏이만 합격돼요. 천국에는 맏이들만 가요. 왜냐하면 맏이와 두 번째는 그냥 순서가 아니라 맏이는 축복의 대변자고 맏이 빼놓고 다 두 번째 인데 두 번째는 뭐냐? 저주의 표상입니다. 맏이는 축복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먼저 복 받은 자가 누구냐? 에서가 축복권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났으니까. 그런데 네 태중에 두 민족이 있다. 이 민족이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되어 있어요. 참 하나님 이상하지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 말고 애초부터 섬김을 받을 자를 먼저 큰 자로 만들어서 하게 되면 아무 변화 같은 것이 없고 그냥 순서대로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 일도 복잡하지 않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예수님의 피, 장차 십자가지신분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그 역전적인, 반대로 뒤집는 그 요소를 미리 구약에다 심어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먼저 난 자가 나중 되는 방법, 전략을 사용하신 겁니다. 예수는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먼저 태어난 것은 무조건 먼저에요.

먼저 장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아, 형 싫은데 내가 맏이 할까?’ 이러면 듣는 형 굉장히 기분 나빠할걸요? 대구에 있는 동생이 인천에 있는 형보고 “내가 형 할 게” 이러면 “니 미쳤나.” 할 거예요. 육은 한 번 정하면 끝이에요. 그게 육의 세계에요. 그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지옥세계와 천국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의 계열과 마지막 아담의 계열이 어떻게 다른가?

아담계열은 과거에 정해진 것이 미래로 이어간다는 것이 아담의 계열이라면 장차 올 예수님의 계열은 뒤집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아담의 순서를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가 되게 만들어 버려요. 그 마지막 요소가 일찍이 미리 성령을 통해서 올 때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자에요. 이미 맏이가 된 자에요. 이미 복 받은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야곱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미리 알고 있었는데 그 때는 성신이라 하지요. 야곱은 미리 알고 있었는데 형은 육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백날 나한테 팥죽 끓여줘도 먼저 된 이것은 변동될 수 없어. 먼저 낳은 것은 먼저 낳은 거야.’라고 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창세기 25장 33절에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얼른 보면 장자의 명분은 팔 대상이 안 되지요. 먼저 태어난 것은 먼저고 무조건 장자가 되고 나중 태어난 것은 무조건 차자가 되고 먼저 태어난 자가 아버지의 복을 먼저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담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원칙이거든요. 그 절대적 원칙, 절대적이기 때문에 안 바뀐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안 바뀌는 것을 바뀌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한판 뒤집기입니다.

안 바뀌는 것을 바꾸는 거예요. 세리가 천당을 가요? 창기가 천당을 가요? 지옥 갈 강도가 천당을 가요? 이것은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것이 있게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착한 사람 천당 갈 거다. 그게 지옥가요. 뒤집기입니다. 열심히 착하게 살면 복 받는 것 아니에요. 열심히 착하면 착할수록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착한 자기 자신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보다 자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르우벤이 아버지 침상에 가서 맏이, 장자로서의 할 역할을 제대로 한 거지요. 잘릴 자의 장자역할입니다. 한 때 장자였는데 지금은 잘릴 그 장자역할, 르우벤에게 그 기능을 준 거예요. 르우벤보고 지옥 갔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기능입니다. 그 기능이 살아 있는 한 르우벤은 구원받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할은 뭐냐? 아담의 역할을 다 해야 돼요. 이 르우벤 역할을 다 해야 됩니다.

복음을 듣고 백날 들어도 우리는 우리밖에 몰라요. 그거 르우벤 소질 있습니다. 르우벤 성질이에요. 그런데 르우벤 성질이 다른 성질로 바뀌면서 아,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만, 그 공로만 높이는 성도일 것입니다. 그 기능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영원한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물려받은 것이 뭔가 대단한 것 물려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악마의 성질과 본능을 물려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뀌지 않는 이 능력이 주님에 의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바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주님의 뒤집어주심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86강-창 49장 1-4절(야곱의 유언)19041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6
게시물7,802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책]2019 신간 '소리없는현실'출간&구입안내 최지영 18-12-24 354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816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1126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1899
공지   실시간 생방송 새주소 입니다. 관리자 17-02-19 5814
공지   이 근호 목사님 저서 안내 관리자 14-07-11 5417
8311   25강-엡 3장 7-9절(출생의 비밀)190526-이 근호 목사 (1) 오용익 19-05-27 34
8310   236강-여호수아 19장 1절(시므온의 땅)20190526-이 근… 송민선 19-05-26 30
8309   광주 강의 안내 김을수 19-05-26 17
8308   대전강의안내 이종분 19-05-26 20
8307   주일학교 설교 / 변화산 / 190526 정인순 19-05-26 31
8306   20190519우리교회 오전설교 마가복음 7장 24-30절(예… 이미아 19-05-25 62
8305   20190519우리교회 오후설교 민수기 35장 9-15절(도피… 이미아 19-05-24 39
8304   20190512우리교회 오후설교 요한복음12장 20-26절(자… 이미아 19-05-24 42
8303   20190512우리교회 오전설교 누가복음8장 40-56절(체험… 이미아 19-05-24 59
8302   가상 현실 송민선 19-05-24 79
8301   마가복음 7:24-30(예수님의 개) 오용익 19-05-20 135
8300   안양20190412b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공은주 19-05-15 78
8299   안양20190412a야5장7절(나는 기계다)-이 근호목사 공은주 19-05-15 73
8298   정석훈 목사 5월 집회안내 김태윤 19-05-11 166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