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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4:02:43 조회 : 73         
과거 체험 (삼상 16:2-3) 대전-47강 이근호 이름 : 주향(IP:124.5.122.56)
과거 체험 (삼상 16:2-3)   
대전-47강   이근호  

2019년 3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2-3 절




(삼상 16: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삼상 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삼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삼상 16: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삼상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삼상 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삼상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 상 16장 2절부터 3절까지 봅시다. 사무엘이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사울 왕 쪽 권력이 많지요. 사무엘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눈치를 보고 있는 거에요. 만약에 사울의 의견과 달라진다면 단순히 사무엘이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겠지요. 왜 그러냐하면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어요. 자기 권력에 누수가 생기면 통치가 어렵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은 남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통제하려면 무엇이 성립돼야 하냐 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길 때만 통제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가족이 다섯 명이다. 아버지가 가장 노릇한다고 딸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하는 것을 통제라 하지요. 이렇게 통제하는 이유가 이 가정은 누구의 소유라고 여깁니까? 내 책임하의 내 소유라고 여기기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이 통제와 통치에 계속 길들여지게 되면 누가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계시고 성도가 있다면 성도는 분명히 신약 성경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통해서 지시 받고 결정하게 되어 있어요. 제 말이 잘못된 말입니까? 잘못된 말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요한 1서 2장에 나오니까요. 27절에 보면 기름 부음이란 성령을 말하거든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통제를 받으세요. 성령이 어차피 없다면 통치를 받으세요. 만약에 성령을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팔요 없지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왜냐하면 가르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두 사람이 필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늘 주님이 가르친다면 가르친 대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냐 하면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넓은 길이란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과 대조기 되는 것이에요. 고난 받아도 넓은 길이 되는 이유가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 하지 않는 것은 전부 넓은 길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고생하고 주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하는 것 마저 부인 되야 되요. 천국 가는 길이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는 것은 부인 할 것이 따로 있고 부인 안 해도 되게 남겨 놓을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부 부인해야 되요. 왜냐하면 죄를 이야기 해주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나쁜 소식은 우리가 뭐를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죄를 통한 사람만이 구원된다는 것이에요.


나쁜 소식을 경유하지 않으면 좋은 소식에 들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발람 선지자가 있었지요. 발람 선지자에게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선 나쁜 소식은 나귀를 탔는데 전진을 안 하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천사가 와서 자기와 상관한다는 것, 천사가 직접 자기를 다룬다는 게 보통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시시하게 사람과 상대하다니요. 사람과 상대 안하면 절에 가나 교회에 가나 마찬가지에요. 안 가도 마찬가지에요.


어차피 절에 가도 사람과 상대하고 교회에 가도 사람과 상대해야 하고 절이나 교회에 안가도 친구나 동창생하고 상대해도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니까 똑같다는 말이죠. 가장 기쁜 소식은 가장 나쁜 소식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이 자기가 선지자라는 신분 자체를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디 가서 제사장 정도면 묻지도 않아요. 선지자 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누구의 공격 대상이 되냐 하면 사울 왕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사울 왕의 입장에선 사무엘이라 할지라도 너는 내 통치하의 사람이라 보는 거에요. 그래서 내 뜻에 위반하면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본문 내용에도 나오잖아요. 나를 죽이리이다 라고 집에서 도 닦는 게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뭐를 남기냐 하면 복음의 현장을 유발시킵니다. 복음은 현장성을 줘요. 이런 말이 참 어려운 거에요. 어떤 현장에서 우리가 복음대로 살자! 이건 틀린 말입니다.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에 합당한 현장이 추후적으로 만들어 져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복음이 먼저 있고 나중에 성도가 생기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이고 구원받으려고 복음이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복음의 위력으로 만들어 지는 거에요. 우리가 복음의 공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를 사랑하고 공로자가 아니고 수해자에요. 혜택을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혜택을 입었을 뿐이에요. 그 혜택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복음의 현장화가 될 때


새로운 케이스 경우 또는 현장을 만들을 때 그 순간 아하! 나는 까불락 까불락 나설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나서서 내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복음의 현장에 있다 아니다를 어떻게 알아요. 복음의 현장에 특징이 뭐냐하면 반드시 세상에 내 것이라고 쏟아내는 권력의 압박감이 현실 적으로 다가 올 때 복음 속에 있는 겁니다. 권력이란 이 세상에서 뭐냐 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요. 회사에서 권력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네가 얼마나 믿음이 좋고 착실하냐 효자이냐를 묻는 게 아니고 돈 벌어주면 그 기업에서는 권력에 부합한 사람이고 돈 못 벌고 그 만큼 생산성을 못 내면 사표내고 나가야 할 악한 사람이에요. 기업 자체에 권력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교회는 뭐로 가득 차 있습니까? 교회 자체도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죠. 너의 발언과 행동이 교회가 커지는데 도움이 되는 지를 한번 생각해 봐라!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선이고 도움이 안 된다면 악인 거에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꺼니까.

문제가 뭐냐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가 화근이에요. 인간은 내가 있는 이상 내 것이 확장되고 커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 강아지를 만지면 주인은 화가 날 거에요. 내 것에는 강아지까지 확장되어 있으니까 그것 건드리면, 내 소유물을 건드리면 곧 누굴 건드린 것이다? 나를 건드린 거에요. 옛날에 임금님은 자기의 그림자만 밟아도 죽여버렸어요. 자아가 자기 그림자까지 확장되어 있어요. 이 세상 구조는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레이저 같이 쏘아대는 촘촘한 망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몸 둥아리 밖에 없어요. 그런데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너라는 것을 요구한다고요. 너는 몸이 아니에요. 너는 몸에서 세상에 촘촘한 권력 망에 한 지점으로 있을 때 비로소 남들 앞에서 너가 되고 그들 앞에서는 나는 나가 되는 거에요. 자기 몸이 아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몸은 멀쩡하고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뭡니까? 그것은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자아가 아파서 그래요. 자아 자체가 악마가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이러스라 했는데

인간은 근원적으로 병들은 거에요. 너도 환자이지만 나도 환자에요. 전부 다 환자뿐이에요.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모두 환자에요. 먹지 말아야 될 독 사과, 독약을 먹은 거에요. 농약 마신 것처럼 농약에 취해서, 악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이 내 것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것이거든요. 사무엘도 잘 한 것 없어요. 사무엘의 몸도 주님이 관리 할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 몸보다 주님이 복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나 권력의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시무엘이 살아 온 일종의 관습이거든요. 살아온 관습이라는 말은 줄 곧 살아온 식대로 자아가 자기 몸을 다루려고 할 때 관습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당연 한 것처럼 되거든요. 왕의 안 말을 들으면 죽어 나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니까 내가 왕의 눈 밖에 나면 가혹한 조치가 내려 질 것이라고 내가 먼저 감지한다는 것은 그쪽에서 어떤 조치를 하기 이전에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눅들은 티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몸의 주인 되시는 성령으로부터 지시 받는 것이 아니라, 옛날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늘 지시 받는 게 아니고 지시 받기 전 그 텀 사이에는 세상적으로 살았거든요. 왜냐하면 구약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이 몸을 살아온 성질대로 권력에 주눅 들어 살아온 거에요. 사울에게는 칼든 군사들이 있지만 사울에게는 보디가드가 없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의 보디가드 있는 것처럼 없잖아요. 그래서 죽이려하면 죽는 것이거든요. 그건 죽는 것이 무섭다는 거에요.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것은 새로운 지시를 못 받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먼저이고 죽는 것과 사는 것도 복음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내가 자체적으로 관리할 대상이 아니거든요. 몸이 있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자아가 있다고 했지요. 사무엘 몸의 자아는 하늘에 있어요. 주님이 자아에요. 사무엘의 몸은 누구의 몸이냐 하면 주님의 몸인데 사무엘은 이 자아를 어디에서 가져왔냐 하면 계속해서 관행적으로 살아왔던 권력에 주눅들은 자아상으로의 몸으로 같이 결합되어 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못 끊어내요. 끊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권력들이 발악을 해줘야 아! 내가 환자구나! 정상이 아니구나! 를 깨닫기 위해 그러한 권력자들이 그렇게 난동하는 거에요. 민주주의와 공산당이 친하면 공산당이 나쁜지를 모르잖아요. 그런데 공산당이 가끔 난동을 부린다는 말이죠. 개성 공단 하니 안하니 삐졌다하니 그 순간은 애초에 공산당이 질 좋은 사람들이 아니구나! 그 순간은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난동을 부려줘야 되요.


안 믿는 남편하고 믿는 아내와 친하게 지내면 복음의 차이와 가치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남편이 술 먹고 난동 부리며 교회 가지마라! 설칠 때 아하! 저 인간의 존재와 내가 애초부터 달라야 하는구나! 를 느끼고 달라야하는데 너무 다르면 가정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조금 씩 맞춘다면 당신에게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정치적 딜, 협상을 해 왔는데 그 평화가 가끔은 깨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또 내 마음대로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나쁜 소식에 있지 아니하면 좋은 소식이 값을 못하듯 복음이 귀한지도 몰라요. 사람이 귀한 게 없으면 세상에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요.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하지 마세요. 세상보다 소중한 그것이 없을 때는 주께서는 그것을 게속 찾는 작업으로 세상에 휘둘리게 하시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이라는 노래를 아세요? 우리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왜 헛된 것을 그 만큼 나에게 헛된 것이 없을 경우에는 헛된 거라도 붙잡아야 그동안 유지했던 내 자존감이라도 지킬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거에요. 헛되고 헛된 것들을~우리 주님 하신 말씀,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것을 주님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너무 세상 먼지에 깊이 파 묻혔잖아요.


그러면 먼지를 떨어 내줘야 하거든요. 먼지를 요청하게 된 동기가 외부의 탓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려는 세속적인 자아상이 주님을 숨 막히게 하는 겁니다. 꼼작 말고 가만히 계세요, 숨 죽은 듯 사세요. 복음 가만히 있으세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보다 내 가치를 소중히 한다면 주님을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제가 주일 낮 끝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여러분도 사랑을 해 본적이 있지요. 사랑할 때 상대방이 나를 욕해도 좋기만 하지요. 왜 그렇게 무장해제를 하냐 하면 그 사랑의 관계가 깨질까 싶어서 그러고 내 자존심은 문제가 안 되지요. 주님이 나로 인해 가리워지는 것이,가장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으로 나로부터 대우받지 못할까봐 안타까운 거지요. 디모데 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할 때 인간이 견줄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딤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있어 권력과 비교 대상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빈대보다 못한 인간이 어디서 깝죽대면서 대듭니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있다면, 주안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다면 누가 건드립니까? 건드린 자가 심판받지요. 우리의 주민 등록을 분명히 해야되요. 우리는 하늘의 호패를 찬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 나라에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지요.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잖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사람에게 모욕당할 때 주님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아시지요.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 거에요. 정신 못 차렸으니까 아직도 주님의 피 그 자체가 소중하고 기쁜 소식인데 그것을 제끼고 세상적으로 내 중신에 기쁜 소식을 따로 만들어 놓게 되면 그것이 주님의 기쁜 소식인데 가만 두시지 낭ㅎ지요. 그것이 상이고 복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가리는데 가만두는 것은 버린 자식이지요.


그것이 아니고 손질하고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본문에 사무엘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지금 껏 하나님의 계시를 박아 선지자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막상 새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 갑자기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간이 작아졌어요.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원래 그래요. 인간은 늘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돌아볼 때나 생기는 것이에요. 그 시점에서는 행복이 행복인지 몰라요. 안 아플 때나 건강할 때 행복을 느끼지 안 아플 때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다른 걱정이 찾아오잖아요.

행복이라는 것은 돌아볼 때나 생기는 거에요. 이미 버스 지나가고 난 뒤에 어~어~행복아! 서라! 하면 뭐해요. 벌써 지나 갔는데 그러면 성도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미 다 지나간 것으로 여기면 되요. 나는 오늘 죽은 자로 간주하면 되요. 그렇게 해놓고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다시 이 세상에 끼어든 초월적 존재로서 아무 부담 없이 어차피 놀러 왔기 때문에 나의 살던 고향에 놀러 왔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다 죽었다라고 현장 답사 왔기 때문에 나는 사나 죽으나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의 입장에서 이 땅에 어슬렁거리는 겁니다. 인생을 어슬렁거리는 거에요. 어느 인간이 주님을 몰라 나에게 욕하는 지 구경해 보는 겁니다. 오늘 본분에서 사무엘은 구약의 인물이기 때문에 성신은 함께 있지만 성령이 아직 안 오셨기 때문에 어슬렁대지 못 했어요. 초조하고 가슴이 조마조마 간 떨어 질까봐 하며 내 마음을 하나님은 나를 편치 못하게 하나?


왜 하나님은 내 소박한 작은 평화로움 마저 이렇게 뺏어 가는지 지금 사무엘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어 환장했어요. 좀 좋게 지내면 안 되나? 왜 이렇게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난처하게 하는지 차라리 선지자 때려 치워버리지, 어제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저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 왔어요. 체육관 사범을 오랫동안 했어요. 어제 날짜로 그만 두게 됐다는데 그동안 권투 사범을 하면서 회원들이 연습할 때는 온 몸으로 다 받아줘야 되요. 그러다 집에 가면 온 몸에 다 통증이 오는 거에요.

그 펀치 에너지를 다 받으니 아픈거에요. 이제는 주께서 그만 두게 하셔서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하면서 비로소 몰랐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왔는데 권투 사범만 그런 게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위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이 자기 성질부린다고 온갖 불평을 성도를 향해 쏘아대고 펀치를 날리고 있는 거에요. 홍삼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쏘아대는 거에요. 너는 왜 내 가치를 개부시하냐고 그런 식으로 쏘아대는 거에요. 도대체 너의 가치라는 게 어디 있는데? "나는 내 가치가 제일 소중해!" 그래서 그 사람에게 주님의 복음이 짓밟히는 거에요. 이 세상은 곁눈질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거든요. 진리가 없어요. 믿는 것도 안 믿어요. 그냥 컨닝하는 평생을 동생은 크면서 형을 컨닝하고 형은 아버지를 컨닝하고 딸은 엄마보고 컨닝하고 둘째 딸은 언니를 따라하고 가족은.


후배는 선배를 컨닝하고 신참은 고참을 컨닝하고 회사에게 선배들이 만든 메뉴얼, 형식, 방식을 컨닝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사무엘에게 소중한 것은 뭐냐? 없어요. 주로 과서 살아온 방식대로 해왔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되냐? 새로운 것을 주는 거에요. 이게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조금씩 줘서 그들을 개조해 나가는 방식으로 구약의 성도를 다루십니다.


그런데 신약은 십자가로 끝났어요. 이미 줄 것 다 줬어요.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에요. 내 살과 내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으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떡을 먹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뭘 더 구합니까? 예수 믿고 이미 영생을 얻었는데, 죽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졸업하고 난 뒤에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 가보는 것과 같은 거에요.

이건 내가 앉던 의자이고 책상이고 내가 입던 교복이고 과거 체험 하는 거에요. 성도의 인생은 과거 체험이고 죽었음에도 죽은 지 모르는 과거 체험을 통해서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운적도 없고 보탠것도 없고 수해자로 그냥 은혜를 받기만 한 거에요. 은혜 앞에서는 선과 악을 논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의 과오를 찾아내지 마세요. 그것은 악마의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래 당신 말을 듣고 이런 것은 고쳐야지!” 고치지 마세요.


고친다는 것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죽는 것 외엔 새로운 게 없습니다. 죽음 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날마다 죽은 자라는 사실 외에 새로운 사실은 없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이 있다면 사나 죽으나 죽은 자라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사실, 그 소중한 내용을 고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보물이라서 녹도 안 슬고 도적이 와서 뺏어가지도 못해요.


도적은 기껏 쓰레기 같은 목숨이나 뺏어가지, 귀한 복음은 뺏어가지 못합니다. 달리 예를 들지 마세요. 스데반 집사 예를 들면 되요. 그들이 돌을 던져서 뺏어 갔는데 뺏긴 것은 목숨이 아니였어요. 구제품 같은 옷이었습니다. 알아서 벗어 놓으려 했던 옷, 아담에 속한, 흙에 속한 유니폼을 알아서 저쪽에서 뺏어가네 친절하게도. 은혜라는 말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의 열심으로 부여받아 사는 것에요. 계속 제공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나의 것으로 되돌아 와요. 정말 성도라면 주님 쪽으로 되돌아와야지 내 쪽으로 되돌아오면 안 되잖아요. 내가 뭔데요. 내 안에 창고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어야 되지요. 저쪽이 고향이라면 나의 창고는 텅텅 비어야 된다는 말이죠.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요.

주님의 새로운 계획이 주어집니다. 본문 3절에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세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하는 거에요. 새로운 왕을 선출하라는 겁니다. 새로운 왕이 선출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는 사무엘이 주는 새로운 계시에 대해서 선택이라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너희가 사울 편이냐? 다윗 편이냐?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정화를 했는데 좋은 개념을 이야기 했어요. 성경을 해석 할 때 하갈의 해석이냐? 사라의 해석이냐를 묻는 거에요.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언약과 비 언약, 개인은 배제되요. 개인의 결심이나 각오는 없어져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의 복음이 먼저 있고 인간은 그 나중이라고 창세전에 계획이 먼저 있고 인간이 태어났다고요. 언약이 먼저 있는 거에요. 언약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는 거에요.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하갈의 언약과 사라의 언약이 있는데 하갈의 언약은 노예가 되는 거에요. 천국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해서 나는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하기 위한 집단이 필요한 거에요. 나는 저 좋은 천국에 못 들어갔어 라고 고백해야 될 집단이 필요한데 그 곳이 뭡니까? 두 자로 지옥이지요. 반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 왔다고 이야기해야 될 사람들, 자기 공로가 아니지요. 인간은 배제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예정된 사랑에 의해 나는 너를 안다고 하시는 사라의 언약이 되겠지요.

그러면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서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는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두 종류의 해석이 나오겠지요. 하나는 하갈의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의 해석이 나오는 거에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하갈은 어느 쪽입니까? 사울 쪽이고 다윗은 사라의 해석이 되겠지요. 본문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다시 정리해 보면 사무엘은 장래에 대해 압니까? 모릅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누구는 아나? 사무엘에게 장래를 주신 하나님은 아시죠. 그 관계를 우리가 놓치면 안되요. 내가 성급하게 앞장서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인간에겐 주의 일이란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주님만 아시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그만이에요. 미리 예측되고 예상되는 그런 하나님의 일은 없어요.


사람이 예측을 하게 되면 조치를 하려해서 안되요.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인간은 자기 계획과 기대감이 있으면 죄가 된다고 했거든요. 근원적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데 성경을 모르면 어때요. 모르면 못 삽니까? 이 성경을 안 보면 모르면 못사는 거에요? 성경 없이도 살사는 사람이 많잖아요.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이 많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은 뭐가 문제입니까? “그까짓 것 성경 알아야 돼?”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성경을 제대로 안 대하면 자기가 환자이고 병자라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의사로 오실 때 전제가 뭐였습니까? 병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오신 거에요. 그 대목이 마태복음 9장에 나올 때 지붕 뚫고 내려 온 사람이 있지요. 중풍 병자와 그 친구들, 그들은 뭐만 생각했냐 하면 내 친구는 중풍 병자라는 것만 생각한 거에요. 중풍병이 들어서 환자가 아니에요.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환자인 거에요.


주님이 중풍병을 고쳐 준 게 아니에요. “네 죄를 사해주노라!” 하신 거에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데 우리는 뭘 고쳐야 하는 지 몰라요. 주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고 새로운 사건을 제공할 때 내가 몰랐던 병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내 죄를 몰라요. 주께서 하시는 일은 내가 모르는 죄를 나에게 만들어 내신다는 거지요. 죄를 지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죄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 내신 죄를 사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면 복음을 안 들으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 버려요. 그게 문제에요. 괜찮은 사람 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왔다가 갔습니까? 집사님이 얼마나 힘들면 오지 마라 했겠습니까? 그 분들이 올 때 소망하고 기대한 것이 있어요. 어떤 계획이 있어요. 나는 예수 잘 믿지요. 이것을 기대하고 있단 말이지요. 자기가 의사라 의사가 필요 없어요.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물론 의사를 이용하려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용 대상이 아닙니다. 나 자체를 파괴 시켜서 주님 안에서 나라는 것을 재구성 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마음이 들어야 되요. 지금 뭐가 문제이냐 하면 주님 따로 나 따로 라 문제잖아요. 멀쩡한 내가 돼서 주님을 멀쩡하게 섬기겠다는 거에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주께서는 멀쩡한 인간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병자이고 죄인이라 부르러 오신 것이지 멀쩡하고 잘나가는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현재 얼마나 내가 잘 나가냐가 문제가 아니고 잘난 존재이고 싶다를 지향하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에요. 앞으로 질 좋은 내가 되겠다는 것이 문제라는 거에요. 이 만큼 복음 들었으니까 얼추 내가 알아서 살 수 있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에요. 내과 의사라 뭐라고 하던가요? 약을 언제까지 먹으라고 하던가요? 죽을 때 까지 먹으라 하지요. 협약 의존적이어야 되요. 우리는 계속 죽어줘야 되요. 계속 과거 체험을 해야 되지 이 정도 됐으면 이제 알아서 복음 전할까요?


인간이 무슨 복음을 전해요? 그것은 주의 일입니다. 왜 복음을 못 전하냐 하면 앞일을 몰라요. 현장의 의미도 모른다고요. 나쁜 소식 속에서 깨어질 때 비로소 좋은 소식이 부각되어 나오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근원적 질환이 뭐냐하면 자꾸 마귀와 합작이 돼서 홀로 살려해요. 혼자 사는 거에요. 그것을 오후 설교에서 자기가 자기 팔을 흔드는 것.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혼자이고 요새 아가씨들 결혼 할 마음 없어요. 왜 결혼 안하냐? 하면 답변 간단합니다. 혼자 살고 싶어서요.

혼자 사는 것이 정답이고 같이 사는 것은 정답에서 뭔가 혼자 사는 것이 실패하거나 성공하지 못할 때나 차선책으로 같이 살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심지어 결혼해도 애를 안 낳아요. 왜 우리끼리만 살겠다는 거에요. 둘이 살다가 심심할 경우는 낳을 용의가 있다. 그것도 귀찮으면 애 말고 강아지나 키우자 하고 세상이 악마의 작품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 사무엘, 본문 6절부터 보면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새가 큰 아들을 먼저 부르지요. 엘리압은 괜히 있다가 첫 아들이라고 불렸다가 버림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아들 일곱 명을 사무엘 앞을 다 지나가게 해요. 왜 하나님께서 현장에는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왜 사무엘에게 장차 여기 차기 왕이 될 자가 있으니까 기름 부으라고 찾아 가게 합니까? 무엇이 중요합니까?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전부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 우리 큰 아들을 보세요. 큰 아들도 큰 아들이지만 엘리압도 용모가 뛰어나고 하지요.


사람들이 뭔가 발언을 할 때는 그냥 무심코 나오는 게 아니고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대와 소원이 함축되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있음이 솔직하게 고백되게 하는 거에요.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있음 자체가 문제 있음에 그 죄를 지적하는 거에요. 죄 있어서 죄 짓는 게 아니고 있음 자체가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음은 과거에 살아온 인식이 종합돼서 내가 있다는 거에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내 것이 있어서 문제잖아요. 내 것 있음이 문제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있는 것을 가지고 내 것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있음은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에요. 주님이 새로운 것을 지시 할 때는 현재 있는 것으로는 안 되지요. 그 속에 내 기대와 소망이 있음을 향상시키려하는 거에요. 질 좋은 있음으로 개선하려는 본능이 발휘돼요. 괜찮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거에요.


그럴 때 누가 빵! 빠빠~ 방 하고 나서야 됩니까? 없음이지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개입합니다. 수시로 개입합니다. 있음의 잘남을 없음이 개입해서 박살내 버리지요. 그래서 그 복음의 현장에서 어! 우리가 기대하고 왕을 뽑으려 하는 데 일곱 명 중에는 없는 거에요. 결국 이 집안에 왕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묻지요. 11절에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그래서 여기 없습니다.

왕이 되더라도 순서대로 되는 것이 이새의 있음이 갖고 있던 선입견을 주님께서는 뿌리 채 뽑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는 현재의 있음이 뿌리 채 뽑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생 살면서 복음이 어떠니 십자가 안다 해도 항상 우리는 1초만 지나도 강렬히 생기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이고 그냥 살아 있다가 아니라 뭐든지 괜찮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드는 살아 있다가 되는 거에요.


어떤 권력이라든지 자랑 거리, 자식 자랑, 돈 자랑, 건강 자랑, 지식 자랑, 다 내 것 괜찮다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사태를 유발시키십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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