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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2 20:54:59 조회 : 191         
22강-엡 2장 19-22절(하나님의 처소)19042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2강-엡 2장 19-22절(하나님의 처소)19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9-22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19-22“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방금 읽었던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단 한군데도 없어요. 성경해석해서 교회에 보탬이 되는 해석, 설교 그 자체가 전부 다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교회 지어놓고 교회의 명분을 찾으려고 성경 가지고 들이댑니다.

“성경 내용이 이러니 우리 교회는 천국 가는 여행사 맞습니다. 우리 교회 오시면 천당 갑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구약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연결시켜서 보게 되면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처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설교요약에 보면 이런 것이 있지요. ‘새로운 처소’라고 제목은 걸어놓고 “죽은 이와 현 살아있는 자들과 계속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죽은 이와 산자가 같이 있는 곳이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교회는 죽은 사람은 빼놓고 그냥 산자들만 우르르 앉아 있어요. 옆에 혹시 돌아가신 귀신 있는가 한 번 보세요. 전부 다 산자들만 모여 있지 죽은 자를 여기에 집어넣지 않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산자와 죽은 자가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할만한 조건과 요건이 갖춰지는 것이 관건이에요.

그리고 그 조건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예 못 만드는 것처럼 그런 인식을 갖고 있어요. 인간이 시작하지 아니하고 인간이 손대지 아니하면 이 땅에는 있을 만한 곳이 없다는 식으로 아주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 스가랴 예언서 4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려면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뭘 배격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을 다 뺍시다. 우리교회 여기 존재한다면 우리교회 있기까지 사람의 힘으로 했던 것 우리교회에서 다 뺍시다.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다 뺍시다. 여러분 가정이 있다면 여러분 가정에서 남편이 했던 것 다 뺍시다. 그리고 아내가 했던 것 다 빼고 자녀가 했던 것 다 빼고 그리고 가정이 되신다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된 것, 하나님의 신으로 되신 가정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아멘 할 문제가 아니에요. 차 빼고 포 빼고 다 빼버리면 장기 둘 수가 있어야지요. 진정한 교회라면 정말 어려운 일을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산 사람만 쳐다본다면 탈락이십니다, 하는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떻게 꾀어서 교회까지 데려왔는데 “천국 못가십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수월하게 술술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 꾄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그렇게 꾀면 단 몇 푼이라도 헌금, 돈을 가져오는데 그걸 나가라고 하면 교회 운영이 되겠어요? 안되지요. 오늘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의 처소와 연결되어 있는 단어들이 뭐냐 하면, 21절에 보면 “주 안에서 성전”이라고 되어 있고요. 22절에 보면 “성령 안에서”라고 되어 있다고요.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인간도 만만치 않지요.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인간의 역량을 다 동원합니다. 일 년 스케줄 자체가 교회 유지하는 책략이에요. 신년예배,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고난주일……, 천주교는 빼놓고 기독교경우입니다. 부활주일, 맥추주일, 여름철에는 어린이성경학교, 추수감사절 끝나면 성탄절.

이런 절기의 공통점은? 봉투 돌리는 날 아닙니까? 봉투 돌리는 날이거든요. 신년 때 목돈 모아놓았는데 벌써 5월이면 헌금이 줄기 시작합니다. 이 참에 맥추주일 핑계로 봉투 돌리면 관리할 돈이 좀 나오거든요. 좀 준다 싶으면 또 추수감사절이라 해서 봉투 돌리고, 크리스마스 때 봉투 또 돌리고, 성탄절과 신년예배가 겹치면서 신년이 대목이거든요.

그거나 부처님 가신 날인지 오신 날인지 모르겠는데, 그날 등 다는 것이나 차이점이 뭡니까? 주님을 모시겠다는 거예요. 성경 모든 구절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제가 단언합니다만 주님의 처소는 십자가사건이 터지는 그 현장입니다. 사건 안에서만 만나요. 존재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묘동 몇 번지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십자가사건 안에서 만나는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예수님의 개인적인 사고사가 아니고 온 우주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의 모든 변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변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인간의 몸을 만들어놓았을 때 해와 달과 별도 아담의 몸과 관련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 와서 한 그 일에 온 우주의 운명이 같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는 히브리서 1장 10절에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폐기 되어야 돼요. 다 불살라버려야 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을 죽게 한 세상이었다, 라는 그 증거로서 이 세상은 불태워져야 됩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의 말씀이거든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있는 세상은 다 파괴되고, 날라 가버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십자가의 결과물로 생긴 용서함과 의로움과 그 영광스러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새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핵심이에요. 성경 줄거리입니다. 성경줄거리가 뭐냐 하면 ‘죽자’에요. 자기가 죽어야 됨을 아는 자가 성도라는 겁니다.

죽는 자는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없어요. 구원받았는데 뭔들 못해요. 러브이즈 뭔들, 아닙니까? 구원받았는데, 영생 받았는데 뭔들 못합니까? 대외적으로 아주 존경받고, 성자라고 칭송되는 어떤 신부가 있었는데 그 신부가 인품 면에서 어떤 흠을 잡을 데가 없는 신부에요. 그 신부가 제단을 하나 운영을 했습니다.

더 어려운 사람, 소외된 사람, 고아와 과부들, 성경말씀대로 실천한다고 국가가 놓쳐버린 틈새의 연약하고 소외된 자를 위해서 늙은 신부가 나서서 복지재단을 만들어놓았는데 하필 복지재단의 터가 요지의 땅이에요. 아주 값나가는 땅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깡패집단에서 그걸 차지하려고 늙은 신부를 협박합니다.

팔아라, 도장 찍어라. <열혈사제> 이야기에요. 드라마이야기입니다. 정의로 완전히 똘똘 무장되어 있는 신부가 꿈적도 안하지요. 그런데 깡패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 교회에 있는 이 천사 같은 수녀들, 같은 동료 신부들, 직원들 다 죽여 버린다고 하니까 신부가 나약해 지는 거예요. 신부의 그 정의감 어디 갔습니까? 없는 거예요.

지킬 것이 있었다는 거예요. 신부의 그 정의로움, 그 착함? 다 빈말입니다. 지킬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 약점이었어요. 자기가 지킬 것이 따로 있으면서 바르게 산다? 어디서 그런 구라를 펼치고 있어요. 그것은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 교회는 불타라고 있는 것이 교회고, 망하라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없어져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의 현장성이에요. 교회냐, 십자가사건이냐? 둘 중 어느 것 할래요? 십자가사건이 구원합니까, 교회가 구원합니까? 교회라는 것은 존재가 있어요. 눈에 보이는 존재가 있지만 사건이라는 것은 붙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잡을 수가 없어요.

내 것이 될 수가 없어요. 덮쳐지는 것이니까. 덮쳐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처소로 덮쳐지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필요치 않아요. 교회라는 것이 없어져야 돼요. 모든 교회의 역사가 전부다 성경해석을 하고 신학을 내놓는데 그게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그 정의롭다는 늙은 신부와 똑같아요.

교회 지키려고 성경이 있는 겁니다. 교회 지키려고! 교회 돈 끌어 모으려고! 교회 크게 확장시키려고! 세력을 크게 만들려고! 더 나아가서 목사의 자기 생계문제, 자기의 가족의 생계문제가 걸려 있고 나중에 노후대책까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게 사도의 후손들입니까? 사도는 그렇게 살았어요? 제가 아는 사도는 그렇게 산 사도가 없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죽는다고 좋다고 하고, 사도바울은 빨리 죽으라고 기도하고 있고. 제가 아는 사도는 이런 사도에요. 그 사도를 가지고 성령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것부터 따져야 돼요.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운영은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교회 운영을 하자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공통점을 끄집어내야 돼요. 그 공통점이 뭐냐? 선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공통점입니다. 착하게 살면. 우리 하나님이 착한 분이고 선한 분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하고 착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을 그냥 방치할 리는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해석의 기본도 안 되어 있어요. 성경이고 뭐고 덮어버리고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신은 착한 분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는 겁니다. 현실적이지도 않아요. 현실적으로 나쁜 사람이 더 잘사는데요 뭐.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냥 희망사항이에요, 희망사항.

얼마나 화딱지 났으면 “하나님이여, 지켜보시기만 하십니까? 하나님은 혀 잘린 하나님이십니까? 눈먼 하나님이십니까?” 광주사태 나고서 나온 유명한 노래의 가사에 있어요. 하나님은 눈먼 하나님이고 혀 잘린 하나님이다. 헬리콥터에서 총기 난사할 때 하나님은 뭐 하셨습니까? 광주에서 꼭 나서는 신부들이 있어요. 선동해가지고. 제주도 강정마을. 전부 다 신부들이 관여되어 있어요.

성경해석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 있는 자기 아들을 끄집어내겠다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만 보면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이,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고생하니까 그 고생 들어주려고, 그리고 새 나라 만들기 위해서 모세를 파견했구나.

아주 쉽게 하면 그렇게 돼요. 상식적으로. 그런데 출애굽기 4장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여기부터 성령 받지 않고 육적인 인간의 해석이 거덜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시킨 사람에게 보호해줄 생각은 안하고 숙소에서 죽여 버리려고 했느냐?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적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모세부터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모세를 죽여 버리면 하나님 자신의 일에 차질이 일어날 것이고 지장이 있을 것이 뻔한데 지금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모세를,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을 왜 죽이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죽이는 이유는 24절에 안 나타나 있어요. 죽이려고 했다가 나중에 풀어놓았다는 결과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주목하게 만드느냐 하면, 하나님이 죽이려고 했는데 어떤 조치가 일어나고 난 뒤에 보니 모세가 죽음에서 벗어났네. 그렇다면 그 조치와 모세를 죽이려는 하나님의 뜻과 뭔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그러면 그 조치가 뭐냐 하면, 출애굽기 4장 25절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았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암호 같은 이야기입니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하는 짓거리도 낯설기 짝이 없고요. 무슨 행동을 했느냐는 거지요. 그 행동이 뭐냐? 할례언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면 피가 나니까. 할례언약을 해서 모세의 발 앞에, 생식기 앞에 던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사람 아쉬워서, 천당 가는 숫자 아쉬워서 내 백성 건지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할례언약에 부합되는, 할례언약의 조건에 합한 그 백성을 내가 애굽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그냥 존재하는 히브리인들, 혈통적인 히브리인들을 살린다고 착각하고 잘못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뭐보다 세냐 하면, 인간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데 모세는, ‘고생하니까 하나님이 건져줘야지.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하고 어지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 고생하니까 건져주는 것이 마땅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쉬워서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건져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모세를 죽일 일이 없어요. 모세를 시범조로 너부터 먼저 죽어봐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세의 네 사고방식 자체가 사람중심이냐, 하나님의 언약중심이냐를 너부터 정신 바짝 차리라는 말이지요.

할례언약이 없는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아니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모세 언약, 할례언약식 방식으로 사람을 건져서 그렇게 건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내 목숨 귀해서 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이용했고 사용했다는 그 관계성을 살리는 거예요.

피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양피를 벨 때 피가 흐르거든요. 양피를 벤다는 말은 인간의 육으로부터의 자식,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서 손자로 내려가듯이 육에서 육으로 나오는 그 혈통에 속한 아담의 존재는 일체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한 것이 할례언약입니다. 중간에 그 노선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절단 내는 겁니다. 끊어버리는 거예요.

혈통에서 난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능으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나의 거처, 나의 처소라고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뭐냐? 인간의 혈통으로, 행함으로 하는 것을 배격하고 배제하는 일 그것이 성령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네가 천국가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그 한 것을 기억하고 한 것을 붙잡는다면 너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처소에서 하는 일이에요. 교회는 사람 못 끌어 모아서 환장을 했어요. 문화센터 짓지요. 고딕식 건물 짓지요. 고딕식 건물 짓다 이번에 불났지요. 노트르담 성당 불났잖아요. 고딕식 건물이잖아요.

뾰족하게 지었다 이 말이지요. 저 하늘까지 닿겠다고. 바벨탑 따로 없어요. 첨탑에 막 찔릴 것 같아. 무너져야지요. 그것은 교회가 아니지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처소를 위해서 사람들은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거두기 위해서 사람들에 반대급부로 뭘 제시했느냐 하면,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는 사람 맞습니다.” 구원을 상품으로, 미끼로 사용해서 구원과 돈을 맞바꾸는 거예요.

신학의 역사에 보면 최초로 그 당시 교회가 국교로 되면서 교회가 세력을 얻기 위해서 시도한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문구를 외우고 동의하신다면 당신은 천국 갑니다, 하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그게 삼위일체에 관한 문장입니다. 삼위일체를 알게 되면 이것은 정통신자기 때문에 천국 갑니다, 라는 제안을 교회 쪽에서 제시한 겁니다.

이 음모가 지금까지 2천년 계속 내려옵니다. “목사님, 무엇이 참된 정통개혁의 진리입니까?” 목사는 간단히 이야기하지요.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당신은 죽어도 천당 갑니다.” 이게 옛날에 했던 수법이에요. 옛날에 써먹었던 수법이에요. “목사님, 무엇이 이단입니까?” “삼위일체에 위반되면 다 이단입니다.”

교인들은 아마추어가 되어서 그것이 맞는 줄 알았어요. 목사도 모르지만 교인들이 알 리가 있겠어요? 유대교의 구원관은 이 성경말씀을, 어지시고 자비롭고 착하신 하나님께서 이 성경말씀을 우리를 구원하려고 주었다. 이게 유대인의 구원관이에요. 그 유대인의 구원관이 어디서 깨졌는가? 십자가사건으로 다 깨져버렸어요. 다 붕괴되었어요.

인간 쪽에서 말씀을 지켜서 뭔가 선한 하나님과 상봉을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십자가라는 그 걸림돌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그게 오늘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 모퉁이 돌은 뭐냐?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 돌이에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이 뭡니까? 그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십자가를 알 사람이 이 땅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신학교 공부한다고 십자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그들의 목표가 뭐냐 하면, 3천명, 5천명 되는 교회하는 기법과 테크닉 배우는 거예요. 두 날개가 어떻고, 여리고성 돌기가 어떻고.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끌어 모으느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뭘 제시하면 된다. 사람들은 무엇이 필요한가.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교인들에게,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다. 그게 뭐냐? 영빨이에요, 영빨! 영빨이에요. 남자들은 슈트빨. 권사는 기도빨. 목사는 영빨. 카리스마, 영빨이에요.

사람의 심리에 메저키스트심리가 있거든요. 얻어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반대는 사디즘. 때리는 사람은 때리는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이 두 가지의 이상 정신병증세가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교인들은 조져야 목사의 말을 듣고 교회에 야당은 없고 전부 다 하나가 되어서 “예 썰!”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걸 이미 유대인이 실험을 안 해봤겠습니까? 실험을 한 거예요. 유대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빨, 카리스빨이 근거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역사적으로 사독계통, 다윗언약 계통의 혈통이라는 그것을 명분으로 내세워서 사두개인, 사독이거든요, 사독, 바로 다윗이 인정한 사독계열의 제사장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는 그것이 그들의 영빨이었고 명분이었습니다.

목사의 불같은 설교 가운데서 영빨을 실어서 하라는 말이지요. 인간 뭐 있나. 쥐어 패면 말 듣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자로 애쓰면서 구원을 했던 그 유대인들, 그렇게 똑똑하고 머리 좋다는 그 유대인들이, 탈무드를 달달 외우면서 살았던 그 유대인들이 어째 십자가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모르는지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니까요.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사람에게 말씀을 준 것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키워서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줬다는 거예요. 그게 유대교에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사람들이 이 성경가지고 교회 부흥 쪽으로 왜 설교를 하느냐? 그것은 구약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그렇다고 했어요.

구약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성경을 보게 되면 목사가 하는 이야기는 딱 하나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어요, 안가고 싶어요?” “가고 싶어요.” “착하면 갈 수 있습니다.” “착하고 싶어요.”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할까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게 영빨입니다.

이게 개인적인 욕심 아닙니까? 구원받겠다는 욕심이거든요. 욕심을 부추기고 달래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요한계시록도 그렇고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방법은 참 신기해요. 그들이 지옥갈 수밖에 없다는 식입니다. 절대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게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에요. 구원되지 못해야 될 사람은 구원되지 말아야 돼요. 이게 주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보게 되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하게 하라는 말이지요.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거론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우리는 내 맘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것은 핑계일 뿐이고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자기 본능대로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문자 좋아하고, 그렇게 말씀대로 살자고 주장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네가 오른 손으로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간음을 하거나 음란을 하거든 그걸 빼버리라고 했다고요. 오늘날 성경을 보면서 성경말씀대로 지키자고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거 가지고 영빨 내세우면서 교회 돈이나 뜯어내는 사람인데 왜 그 목사는 오른쪽 눈이 멀쩡한지 모르겠어요.

오른 눈 빼버리고, 왼손 잘라버리고, 인간신체 가운데 멀쩡한 부위가 있겠습니까? 바람피우면 그 부분 다 잘라버려야 되는데요. 남아 있는 부분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남에게 해코지 하는 것만 죄가 아니에요. 남한테 죄를 유발시키는 요인도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성령 안에서,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자유라고 했거든요. 죄에서 벗어난 자유.

자유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죄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생각할 때마다 죄 안 짓겠다는 생각이 더불어 같이 나타날 때 그게 바로 내 지금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령 안인지 성령 밖인지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죄 자체를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죄 자체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벌벌 떨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착한 일 더해서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 볼까, 하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논리를 설명하려면, 결론을 끄집어내려면 중간과정이 필요해요. 십자가사건이 하나님의 유일한 처소라면 그 전에 나오는 하나님의 처소가 뭐냐?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에만 아버지가 계셔요.

아버지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있어요.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 했으니까. 그러면 그 전의 논리가 뭐냐? 제가 논리를 설명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최종 하나님의 처소라 하기 전에 그리스도 몸이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 전에 그리스도 몸이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은 왜 처소가 되지 못하는지 그것부터 생각해 보면 이제 논리가 시작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성경말씀 지킬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런 것이 있어요. 거기에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나오고 구두장이가 나와요. 천사가 구두장이에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라고 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그런 이야기들, 휴머니즘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고 질문을 고쳐야 돼요. 인간의 몸은 무슨 기능을 하라고 만들어졌는가, 해야 돼요. 사람이라고 하게 되면 자아가 언급이 되어버려요. 자아가 언급된다고요. 자아라 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자아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자아는 허깨비 같아서 여기서의 자아와 저기서의 자아가 다 달라요.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몸입니다. 몸은 주께서 친히 다루셔서 죽음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을 자아라고 여기고 자기소유라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뉴스에 보니까, 어떤 인도청년이 자기 손가락을 잘랐어요. 자른 이유가 얼마 전에 인도에서 대선을 치렀는데 실수를 해서 자기가 찍어야 되는 후보를 못 찍고 엉뚱한 후보를 찍어서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자기 손가락을 절단을 했답니다.

자아가 자기 몸을 절단을 했어요. 그러니까 자아와 몸이 하나가 되어서 몸이 원래 주인 되시는 주님이 다루시는 몸을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서 자아라는 엉뚱한 것이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몸은 그렇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야.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야.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아버지의 몸을, 이 땅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그 말씀과 그 몸이 결합이 될 때 어떤 말씀의 완성, 완료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 뭐냐? 그게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몸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이 마리아의 몸에서 나온 거예요. 따라서 마리아의 몸은 아담 몸이에요. 아담의 몸을 받은 것을 가지고 로마서 8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몸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죄의 몸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이 몸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라. 쓴잔을 마시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과감하게 저주받는 그 몸은 그런 식으로 쓰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안 죽으려고 환장을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 덕분에 출세하려고 덤벼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 달라붙어서 예수님 제자라고 우겼던 사람들, 외부에서 권력자가 죽인다고 하니까 도망 다 가버렸습니다. 내 몸과 예수님의 몸이 자기 딴에 열심히 붙들고 착한 일 하면 이게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살면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보니까 접근할 수 있는 몸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스도 빼놓고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몸을 그렇게 만든 그 모든 와중에서는 인간이 알고 있는 이 천체, 우주의 대자연의 변화, 이 모든 변화가 ‘내 몸이 어떻게 밥 먹고 살아볼까’와 관련되어서 몸이 움직인 겁니다.

아담의 몸이 범죄할 때 이 온주가 같이 피곤함에 의해서 썩어짐을 당했다는 것이 로마서 8장에 나와요. 아담이 홀몸이 아니에요. 온 우주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고 난 뒤에는 온 우주도 같이 슬퍼하고 같이 폐기처분 되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의 몸이 마련되었다는 그 말은 그야말로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새하늘과 새땅은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디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중심으로 새하늘과 새땅은 새롭게 마련되는 거예요. 이게 일관된 하나님이 성경 뜻이에요. 우리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입니다. 어떤 분이 너무 힘들어서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어요.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가정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식으로 왔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보냈습니다.

남편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 어떤 부인이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인데. “약해지지 마시고 악해져야 됩니다.” 약해지지 말고 악해져야 돼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선악의 굴레에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자꾸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나가는데 선한 쪽으로 나가서는 악이 계속 따라붙기 때문에 해결이 안나요.

선악이라는 그 내부적인 갈라짐, 그 갈등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을 행했다는 그 자리에 벌써 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탈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독하게 살면 안돼요. 자꾸 독하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고, 독하게 살지 말고 악하게 살아야 돼요.

내가 아담의 몸이 있다는 그 자체가 가만히 집에서 놀아도 악해요. 악한 것만 나와요. 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악한 것을 알아야 내가 미완료를 완료로 바꾸려고 시도 자체를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뭐냐? 성령은 주님의 몸에서 오거든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주님의 몸에서 성령을 주게 되면 주의 몸에서 완료된 업적이 우리한테 옵니다.

오게 되면 이것은 미완료가 아니라 완료에요.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완료와 완료를 내놓는 겁니다. 나 이렇게 악한데 이렇게 구원받았어. 이렇게 완료를 내놔야 돼요. 완료란 말은 인간이 새삼스럽게 손질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교회는 새삼스럽게 손질할 필요가 없어요. 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교회는 새삼스럽게 추가적인 노력과 애씀이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그것을 배격하고 거절합니다.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게 되면 그것이 기억에 남아요. 내가 했다, 가 돼요. 내가 했다, 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악해야 구원받는데 졸지에 선한 쪽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선한 쪽으로 기어 들어가면 기다리는 것은 뭐냐? 마귀의 나라, 악마와 악마의 나라에 합류될 뿐이에요. 자꾸 선하고 싶지요. 그것은 버림받은 거예요. 천국에서 내놓은 자식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그냥 선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보상과 후한 어떤 기대를 갖고 있어요. 음흉한 기대, 어떤 희망, 이런 것을 갖고 있다는 말은 본인이 아직도 미완료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시켜줬고 영생을 줬으면, 그게 사랑이라면 러브이즈 뭔들, 사랑은 뭔들 못해요.

아이고, 어떻게 악합니까? 악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악한 것 한다고 자기 집에 불 지른다고 하지 말고. 그것도 얼마나 본인이 힘들겠어요. 가만있으면 돼요. 힘든 짓 하지 마시고. 내가 악했다가 아닙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악한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내가 악하다고 되겠지만 내가 나쁜 짓을 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면 악하게 됩니다. 악하게 되고 자기 의를 챙기지 않게 되고.

악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약점이 없어요. 원체 악하기 때문에. 선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니까. 이것만큼은 남겨둬야지. 남겨둘 필요도 없어요. 무슨 내 교회가 있고, 목사 라이센스 그런 것이 왜 필요합니까? 자격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인간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놔야 영빨, 목사나 장로라고 해야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있다’ 해서 내 기도보다 목사의 기도가 영빨이 있으니까, ‘이번 일만 잘 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교육관 짓는데 목돈 내겠습니다.’ 이렇게 거래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에 말려든다는 자체가 내가 뭔가 완료된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완성된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직도 이 몸을 자아가 관리하려고 설쳐대는 겁니다. 그러나 자아는 헛방입니다. 아담의 존재가치라 하는 것은 죽었다는 사실에 있어요. 아담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증거물이 돼요. 이 말은 몸은 곧 하나님이 작용하는 사건의 현장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 논리의 마지막을 봅시다. 잉크 물에 수직으로 종이를 넣어보세요. 그러며 잉크물이 종이에 다 스며들기 마련이지요. 종이를 빼보면 잉크물이 젖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언약사건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인간의 몸은 뭐냐 하면, 왜 인간은 죽어야 되며 왜 주님은 부활되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뽑혀 나온 것이 돼요.

그 몸이 바로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성도의 몸이 처소가 되는 이유가 성령 안에, 십자가 안에 담겼다가 빼내니까 우리는 죄인이고, 독한 악인이고, 주님만이 의인이라는 것의 증거물이 합류되어 있어요. 포함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피에 풍덩 넣었다가 빼고, 넣었다가 빼는 그 과정이고 그거 하라고 하루하루 더 살려주고 살려주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너나 나나 둘 다 똑같은 사건의 증거물이잖아. 아담처럼.” 아담이 죽어야 될 이유를 증거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영생 얻어야 될 증거물로 이미 피 속에 담갔다가,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고 의가 다시 배겨서, 주님의 이름으로 피의 의가 배겨서 의인으로 나오는 거예요.

약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완료되시는 분이 우리를 독한, 악한 놈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의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은 챙길 필요도 없고 오히려 그것이 있으면 부담만 되지요. 어떻게 삽니까? 살기는 왜 살아요? 이미 죽은 인간인데. 피 속에, 죽음에 담갔다가 다시 뺐잖아요.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게 그리스도의피를 증거 하는 용도로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우리를 얄팍한 종이로 보시면 됩니다.

주께서 하신 일을 담아내면 돼요. 그러면 처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침에 일어나면 내 몸은 내 거에요. 내거기 때문에 자기연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도 이런 몸으로 나가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온갖 생각을 하면서 자기연출을 하다가 이 나의 모든 의도와 계획이 무산됩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내 계획대로.

그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내 모든 것을 빼앗았다고 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그 전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얼마나 뺏고 살았는지 점점 더 자각하게 돼요. 이만큼 빼앗길 수 있다는 말은 내 것도 아닌데 이만큼 내 것이라고 훔쳐왔고 무조건 내 것이라고 우겨왔음을, 그 죄악 되고 지독하고 악독한 면이 노출되는 겁니다.

뭘 빼앗겨야 되는가? 나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 그것 빼앗겨야 돼요.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개꿈이에요. 여러분, 사후세계와 종말세계가 다릅니다. 사후세계는 사람이 죽었다가 천국가기 전에 중간에 뭘 하느냐? 그것이 사후세계에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후세계 다음에 종말세계는 모든 것이 끝장났을 때 천당 지옥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이 종말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사후세계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하는 이유가, 모든 사후세계는 인간의 자기내면의 세계를 그대로 사후세계에 반영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모든 자아의 생각은 뭐냐?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어디 갈 것인가, 그게 지금 현재 자신의 자아의 생각이에요. 망상이지요 그냥. 개인적입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느냐? 내가 죽고 난 뒤에 저 마누라 계속 살까, 말까?

예수님께서 말하는 종말세계는 마태복음 22장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29절에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어차피 이 몸은 이 땅에 있으면서 소모하세요. 어차피 이 몸 없어져요. 하늘에서는 천사와 같으니까.

하늘에 가게 되면 예수님의 몸,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니까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을 입을 겁니다. 지상에 있는 몸은 아담의 몸으로 자기 시효가 끝나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더운데 자기의 두꺼운 외투 같은 것을 훌쩍 벗는 거예요. 아이고, 그동안 자기 몸 믿고 산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점점 엷어지면서 벗는 거예요.

몸이 아프면 아플수록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겁니다. 아픈 사람한테 지금 약 올리는 것인지. 이 몸은 포기하라는 몸이에요. 전도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혹시 아직도 집에 돈 좀 있거든 그만 즐기라 그 말이지요. 어차피 죽으면 다 못쓰는 것. 노세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젊을 때 즐겨야 되잖아요.

악한 인간이 인생 그냥 즐기면서 자기 몸을 그냥 폐기처분 하는 것. 이거 안 됩니까? 이거 못해요? 누가 말립니까? 성령께서 뭔들 못하게 하십니까? 미련 갖지 마시고, 자기 것 챙기지 마시고, 내 교회, 내 가족, 내 국가 없습니다. 왜? 내가 망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보여주는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을 다른 몸으로 전환시키거나 그것을 바꿀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 안에서 우리 주께서 배격하고 쫓아내는 것이 뭔가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내 능으로, 내 힘으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마귀의 처소로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희들 자기 자신에게 미련두지 말고 오히려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2강-엡 2장 19-22절(하나님의 처소)1900421-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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