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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2:20:25 조회 : 131         
236강-여호수아 19장 1절(시므온의 땅)20190526-이 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1.154.249.203)
236강-여호수아 19장 1절(시므온의 땅)201905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9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348페이지입니다.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성경에 이렇게 열두 지파 또는 특정한 이름도 마찬가지고 엘리야, 아브라함, 이사야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이름이 나올 때는 그냥 남이라고 보지 마시고 나 자신을 여기 성경에 나오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다시 나로 재탄생 시킨다는 점을,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성경보는 것이 굉장히 쉽습니다.

여기에 시므온이라고 나오는데 열두 지파 중에 두 번째죠. 시므온이라는 사람 또는 그 후손들이나 지파라고 할 때 이게 남의 이름이 아니고 곧 우리 자신들의 이름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시므온이 레아의 두 번째 아들 야곱의 두 번째 아들이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가 열두 아들 중에 하나고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이 사람을 남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우리 자신이 시므온이라고 여기시고 성경 보시면 성경이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시므온이라는 이름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예요. 베드로가 시몬 베드로거든요. 그래서 시므온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시므온이 갖고 있는 그 위상이나 그 역할을 주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똑같이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거기에 ‘144000’이 나오면서 지파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역시 시므온 지파도 예외가 없이 ‘12000’이라고 천국에 지분을 배당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이면 열두 지파에 포함되어있는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간단하게 정리가 되죠. 열두 지파에 포한되는 거.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고 천국의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를 만들기 위해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기를 했습니다. 야곱의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거든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려면 거기에 야곱 언약이 개입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올 때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거든요. 언약을 들고 왔는데 그 언약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손만큼은 유일하게 복된 민족이 되겠고 네 민족 외에 모든 민족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거든요.

축복과 저주를 가늠하는 그런 영토 구분에서 이스라엘만 축복에 해당되고 그 외에는 다 저주에 해당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에서 생명을 부여하는 새로운 영토를 제공한 겁니다. 그 민족을 약속의 민족이라고 하고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약속의 민족이 사는 약속의 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약속의 땅을 통해서 보통사람이 어떻게 시므온 지파의 성격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땅이 변모시킬 것인가에 주목하시고 성경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온 땅에 변화를 유발시키고 그 변화는 안 믿는 이방 민족과 접촉하면서 일을 성사시키십니다. 그래서 주변에 언약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치밀하고 적절한 조치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입시다.

우리끼리, 우리끼리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옆에서 흔들어 주고 쑤셔주고 깨주고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해요. 그 한 가지 예가 사사기 1장 3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시므온이 나오는데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여기서 유다라고 하지 말고 유다지파, 시므온 지파로 다시 하면 “유다 지파가 그 형제 시므온 지파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희 제비뽑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유다 나오고 시므온 나오지요. 그걸 한패 먹는다고 하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걸 한패라고 보고 그 맞은편에 가나안 족속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하나님께서 땅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유발하십니다. 땅을 놓고 어느 민족이 차지하느냐를 하나님께서는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일에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죠.

주인공은 뭐냐 하면 역시 주인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보조 역할로 악인 역할을 하는 것은 가나안 민족이 그 역할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가나안 민족은 신약에 와서 이방 만족으로 개념이 확대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싸움에서 유다와 시므온이가 함께 나아갑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나아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중에 시므온 땅은 없어져요. 없어지고 어느 땅에 복속되느냐 하면 유다 땅에 복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므온 사람들은 헛짓한 거 아니냐, 자기 땅이 없으면 안 되잖아. 손해 봤잖아. 유다가 약속해 놓고 시므온 땅을 안 주고 유다 땅으로 전환해 버리면 이용당한 것밖에 더 되나’라고 이야기를 하실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 우리 고유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유다와 다른 모든 지파는 각자 독자적인 자기 땅이 있는 반면에 시므온 지파는 자기 땅이 없어요. 유다 지파 땅에 결국은 다 복속되어 버립니다.

그건 베냐민 지파도 지파 중에 제일 작은 지파니까 베냐민 지파가 유다 땅에 흡수 통합되는 것은 사사기 마지막을 통해서 제가 지난번 여호수아 설교할 때 했고요. 시므온 지파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누가 나를 접수해 준다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든 것은 본인을 접수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참 이런 이야기 하면 곤란한데 이해하시고 들을 줄 믿습니다. 여자 나이 서른 넘어서 혼자 살면 본인은 힘들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 죽습니다. 노산인데 아이 못 낳는다고. 뭐 안 나으면 되지요. 온 일가친척들이 걱정하거든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여자는 이 험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면 몇 배의 힘이 든다는 말이죠. 온 천지에 성희롱이고 놀리고 등쳐먹고, 고아 과부라고 하면서 여자를 그렇게 고아처럼 대우하는 남성들의 지배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성만큼 입지를 갖추고 산다는 것이 그게 힘들고 늘 남성의 재정적 노리갯감이 되고 이용 대상이 돼요.

그러니까 세상 전체가 남성 위주로 가는 상황에서 여자가 빌어먹고 사는 방법은 시집가는 거 외에는 다른 수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20대는 잘났다고 튕겼다가 30대는 뒤늦게 후회해서 붙잡으려고 하면 늙었다고 떼 내고 그러니 주변에 일가친척들이 “누구에게 좀 복속되라. 철저하게 네 인생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네가 필요한 거 다 채워주고 네가 어떤 행동 어떤 태도를 해도 다 용납이 되는 그런 듬직한 가슴 넓은 남자 만나서 그 안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공주처럼 살아봐라. 여자의 행복은 그것뿐이다”라고 여자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내가 살아 보니 여자 팔자는 남자 잘 만나는 것에 달려 있더라. 네가 아무리 커리어우먼이라고 해도 보기에 안쓰럽다. 조마조마하다. 한 가문을 인수 받는 것이 여자의 도리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일종의 배려죠. 마찬가지로 시므온도 그런 처지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므온은 너무 큰 나라가 되는 유다 땅에 복속이 됨으로써 편안하게 자기 이름 아닌 유다 이름으로 천국에 동참할 수 있듯이 오늘날 유다가 예수님이라면 바로 시므온은 우리 같은 입장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이 바로 성경을 볼 때 시므온을 볼 때 남이라고 보지 말고 우리 자신으로 집어넣고 보자는 겁니다.

각지파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작업이 각 열두 색깔만큼 다 다르거든요. 그 다른 색깔들이 그 본질이 계속 우리에게 주입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므온 지파가 독자적으로 그렇게 살 수 없는 이유가 창세기 마지막에 나옵니다. 시므온 지파가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창세기 49장에 보면 5절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영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레위와 시므온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계획을 갖고있다고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에게 미리 알려줍니다. 이건 저주가 아니에요. 맡은 역할이 그러한 겁니다. “그들의 모의에 참석하지 마라”라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행사하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독자적으로 외치는 집회 장소는 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고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겠다. 거기서 빠지겠다”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와 시므온이 사는 방법은 뭐냐 하면 레위는 각 지파에 파견되어 살아요. 모든 지파에 레위 지파의 성읍들을 둠으로써 다른 지파 덕분에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십일조가 되고요. 그다음 시므온 지파는 그중에서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지파인 유다 지파에 하나의 부분으로 예속되어 살아가는 거죠.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기생충이 되는 겁니다. 잘 사는 집안에 못사는 백수 집안이 가서 같이 살아가는 궁색해도 결과는 괜찮은 거죠. 이런 경우 만약에 우리가 자존심이 있다면 부끄럽게 여길 건데, 그것은 세상 이방 민족, 가나안 민족이나 그런 짓 하라는 거죠. 이스라엘 민족 요소에서는 시므온 같은 요소가 오히려 그게 가장 제대로 사는 지름길이 되는 겁니다. 그냥 주님 품 안에 안겨 사는 거죠.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7장에서는 이걸 아주 어렵게 묘사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묘사인지 히브리서 5장에서 12절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라고 해서 어린아이 같은 인간과 그리고 어른 같은 성도와 그렇지 못한 막 이제 시작한 어린애 같은 성도를 구분 짓고 있습니다.

구분 짓는 기준이 뭔가가 궁금하죠. 그 기준은 단어 하나에 있다는 겁니다.`히브리서에 있는 단어 하나. 그 단어가 뭐냐 하면 멜기세덱이에요. 멜기세덱. 멜기세덱을 모르면 어린아이고 그 뜻을 알게 되면 진짜 장성한 분량의 성도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멜기세덱에 담긴 그 내용이 5장 끝에 있고요, 6장과 7장에 “이제부터 내가 그 장성한 어른 같은 성도 되기 위해서 이야기해줄게. 풀이해 줄게”라고 하면서 멜기세덱을 등장시켰고 그 멜기세덱이 뭐를 품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맹세를 품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만 맹세했고 그 누구에게도 맹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보고 맹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맹세에서 배제 시킵니다. 우리를 약속에서 배제 시켜요.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네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자꾸 심도 있게 생각하고 자꾸 의식을 갖는 것은 내 구원에 나 자신을 끼워 넣고 싶은 어린애 같은 심보 때문에 아직까지 육에서 제대로 못 벗어난 그러한 기질이 발휘되어서 그런 겁니다. 차라리 주님께서 우리를 총으로 쏴 죽였으면 좋겠어요. 죽여 놓고 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떠맡으라는 말이죠. 주님 죽으심을 떠맡아라.

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살던 땅이에요. 모든 설비나 모든 기초 같은 것이, 내 힘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문명이 거기에 상존해있어요. 그러면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유다와 시므온이 한패 먹고 싸운다는 것은 그들의 다른 삶의 방식이 작용한다는 사실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주님께 일임하고 맡긴 것, 주님의 약속에 일임하고 맡기는 겁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멜기세덱에 의해서 맹세하면서 이 맹세는 사람을 배제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하나님께 맹세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인데 둘로 분리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로 둘이 분신처럼 되어서 떨어져 나간 하나님을 위하여 원래 있던 하나님이 떨어져 나간 하나님에게 자기 약속과 맹세를 다 줘버리고 그걸 다시 자기에게로 회수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 인간이 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구원 못 받네요. 구원받는 사람은 딱 한사람 예수님밖에 없네요. 예수님만 구원되네요”라고 하거든요.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을 등장시켜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기에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허리가 나와요. 7장 10절에 보면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라고 ‘허리’라는 말이 나와요.

허리라는 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야곱이 브니엘에서 자기 환도 뼈가 차이고 난 뒤에 허리 쪽에 문제가 생겨서 지팡이 짚고 다니는 그 허리를 말하는 거예요. 야곱을 개인으로 보지 말자는 겁니다. 물론 언약이 없으면 야곱은 개인이에요. 그러나 야곱 언약이 오면 야곱은 집단의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은 물론 개인이에요.

하지만 예수 안에서라는 새로운 새 언약이 완성되게 되면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 허리에 있는 사람들, 아무것도 안 하고 주님에게 복속되었다는 이유때문에 주님 안에서 의인 되고 천국 가는 그런 자들이 자생, 그 안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성도의 복음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겁니다.

성도가 믿음의 분량이 장성했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뺄 줄 안다는 겁니다. 자신의 행함이 거기에 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누가 손등에 화상을 입었어요. 그때 생각을 해봤습니다. 손등에 화상을 입었는데 그 고운 손등이 갑자기 흉측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 손등을 그만한 세월까지 곱게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화장품을 쳐발랐겠습니까?

화상이 오니까 피부가 갈라지면서 흉측하게 되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아름답고 곱고 이쁘다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한방에 갈라지고 균열 되어서 나중에 80세 넘은 할머니보고 이쁘다는 말은 망측하고 자칫하면 욕이 될 수가 있어요. 본인은 늘 젊을 때의 기억을 갖고있는 데 “다리가 어찌 그리 잘빠졌습니까?”라고 하면 다리 잘빠지면 짧은 치마 입지 긴치마 안 입거든요.

인간의 몸,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성도의 몸은 몸 자체가 내 몸이 아니고 시므온이라는 그 개념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 몸을 활발하게 사용하고있는 중입니다. 네 몸에 네가 매료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몸은 시므온이라는 개념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몸은 날마다 후패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물론 장사하는 사람은 “아이고, 옷 잘 맞습니다”라고 해야겠지만 그건 개한테 개사료 받기 위한 수작이고요. 이 히브리서 7장에서 허리에 있다는 말은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인생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받은 그 기쁨만 있으면 됐지 뭘 더 원하냐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네가 무슨 기쁨을 청구하느냐고 하면서 우리에게 날마다 심하게 나무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았잖아요. 우리는 멜기세덱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 허리에 있잖아요. 예수님 안에 있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류현진이 7승 가는 거 원합니까? 자기가 응원하는 팀 잘 되기를 원하고 황금 종려상 한 번 더 받기를 원해요? 다음에는 어디 태극기 부대에서 대통령 나왔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후패하는데, 낮에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요란스럽고 울고불고했던 그런 사연들에 매여서 호들갑 떨던 시절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건 지하철 탈 때 그렇게 요란스럽고 나중에 객차 버려지면 그냥 한적한 곳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집합소에서 가만히 죽어 있을 뿐입니다. 주의 맹세가 실려야 해요. 주의 맹세. 네가 안 해도 내가 다 해준다는 주의 맹세가 있어야 해요.

“어느 교회 가서 무슨 말씀 들으면 구원받을까?”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그래 봤자 점점 자기만 강화돼요. 자기 피부에 화장품 하나 더 바르고 복음으로 쳐발라서 계속 자기 가꾸기에 전력하는 것밖에 안 돼요. 저는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밑에 바탕으로 두는 것이 있습니다. 백날 전해봤자 당신 그 말 소용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서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복음도 좋고 예수도 좋은데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지금 문 열고 밖에 나가면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 키우는 사람에게는 휴식도 없어요. 지금 나는 은혜 받아서 좋은데 은혜받았다고 소한테 풀 뜯어서 먹이 안 줄 겁니까? 그게 생계인데.

예수님의 허리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현실입니까? 아니면 집에 가면 소 키우는 사람에게 소가 ‘음매~’하며 소 풀 달라고 하는 그게 현실이에요? 어느 쪽이 현실입니까? 옛날 코미디에 남자가 여자를 아주 무시하는 코너가 있었거든요. 여자도 여권 주장하고 여자를 무시하지 말라고 주장하면 “여자가 밖으로 싸돌아다니면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울 거야?”라는 그 대목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든지.

“집에 설거지는 누가 할 거야? 빨래는 누가 할 거야?”라는 말과 똑같은 거거든요. 이게 어린애 같은 신앙 같으면 결국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허구처럼 날아가 버려요. 날아가 버린다고요. 실제로는 생계유지를 해야 하니까. 그게 가나안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가나안 민족과 유다 시므온이 한패 먹고 가나안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 무대에 존재하는 가나안 민족과 시므온 유다가 한꺼번에 우리 안을 성전으로 여겨서 주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그 드라마를 연출해 내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유다가 되고 시므온이 된다고 할지라도 가나안 사람들의 사고방식 쪽에 네가 서 있지 않은지를 스스로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딴 복음과 그딴 예수님 하나님이 무슨 돈이 되고 밥이 되겠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여호수아는 여호수아로서 성경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감안해야 해요. 성경은 여호수아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까지 오는 겁니다.

어떤 어린아이를 보면 어른들이 어린아이를 보고 관심을 드러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죠.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자기도 답변 못 할 어려운 질문을 아이에게 한다고요.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그래서 제가 질문을 수정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질문이 인간의 본심에 맞는데 “너는 아빠를 닮고 싶으니 엄마를 닮고 싶으니?” 그리고 “너는 예수님을 닮고 싶으니 가나안 사람을 닮고 싶으니?”

우리 속에는 속을 감추면서 얼추 신앙인인 척을 하는 게 있어요. 가나안 사람이면서도 성경 보았다고 유다인 척, 시므온인 척 착각하는 게 있어요. 주님께서는 그걸 들춰내는 식으로 철저하게 들춰내는 식으로 가나안 사람을 자주 만나게 하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그리고 실망, 또 실망케 하는 거죠.

제가 독일에 있으면서 이제 나도 복음 잠시 쉬고 좀 편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용납지 아니하시고 우리 사위를 통해서 다음 같은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아버님, 다음 주에 제가 기도인데 기도문이 잘 안 되는데 아버님이 하나 써 주시겠습니까?” 여기서도 복음 전할 기회가 왔구나 싶고, 제 프레임의 내용이 빠지고 주님이 다시 채워주심을 감사하면서 기도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단정 내리신 주님, 생존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수 없는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당연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그것이 마땅함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욕심을 멈추기만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이지만 삶의 분주함과 조급함으로 인해 우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습니다. 주님의 사죄가 우리의 과오를 능가하게 해주시고 주님이 선택하신 신분이 우리가 결정한 운명을 이기게 하옵소서. 주님의 희생이 우리들의 잘남 경쟁을 가리게 하옵소서. 선물로 다가온 약속으로 인하여 우리 행함의 가식이 노출되게 하시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일관성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했어요.

처음에는 사위가 짧다고 하더니 가만히 보니 길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위가 그렇게 기도를 가서 했어요. 하니까 거기에 설교하러 온 목사만 아멘 했답니다. 이걸 하면서 뭐냐 하면 아무리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알아도 이게 우리 자체로서는 완성이 아니고 우리가 뭘 ‘믿습니다’가 완성이 아니고 우리가 맹세에서 빠져야 한다는 사실을 늘 확인 시키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을 보내셔서 내가 오히려 그들 쪽, 세상 쪽이 되고싶어하는 그것을 내 안에서 계속 불같이 일어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주님의 사죄가 우리의 과오를 능가하는 거예요. 맨날 우리는 선악 체계에서 나는 이거 잘못했고, 이거 반성하고, 인간도 아니라고 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죄가 우리의 과오를 능가함을 그러한 상황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인생을 내가 선택해서 인생을 꾸려나간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선택하신 신분, 예수님의 허리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몸체 안에 일부란 말이죠. 내가 전체가 아니고. 퍼즐 조각에 있어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우리가 메꾸면 안 돼요. 주님이 메꿔야 해요. 우리가 널어놓은 너저분한 것, 지저분한 것, 온갖 어질러놓는 시답지 않은 시근 없는 짓을 해놔도 마지막 퍼즐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게 맞춰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이게 새 언약이거든요.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저지레하고 마지막에 마지막 퍼즐 조각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사함을 얻는다는 겁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로 끝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조심스럽게 살지 마세요. 뭐 조심스럽게 사나 마구잡이로 사나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우리는 성깔을 못 버립니다. 행함 믿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같이 있을 때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어요.

예수님의 복의 중심되는 허리에 있었던 거예요. 시므온이가 유다에 복속되어있어도 결국 그들은 전부 유랑생활하고 약속의 땅을 떠납니다. 왜냐하면 우세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자기가 계속 유지할 수 없어요. 인간 본인이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따로 있잖아요. 그 메시아의 메시아 됨을 알리기 위해서 허약하고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일단 한번 적셔 본 겁니다. 약속의 땅에 살라고.

해보니 안 되는 걸 뻔히 알잖아요. 알고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하느냐, 마지막에는 우리 속의 그리스도가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나 너와 계산 안 한다. 계산하는 것은 주님이 나와 계산했다”라고 하면서 예수 안에 있음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성령 안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돌아서면 또 생계 걱정하는 저희들, 죽으면 안 된다고 염려하는 저희들, 우리가 연약한 이스라엘 지파와 다를 바 없음을 또다시 깨닫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유월절의 피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36강-여호수아 19장 1절(시므온의 땅)20190526-이 근호 목사.hwp (68.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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