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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12:24:44 조회 : 97         
27강-엡 3장 12-13절(담대함)190609-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27강-엡 3장 12-13절(담대함)19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2-13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12-13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에 대해서 9절에 나와 있습니다. 9절은 뭐냐 하면, 감취었던 비밀입니다. 비밀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어떤 비밀도 없고, 어떤 남겨진, 숨겨진 은밀한 것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통설이고 정설로 되어 있어요.

혹시 우리 인간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지식으로 찾아가면, 탐구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화성을 개발하고 목성을 개발하고, 점점 더 나아가게 되면 우리는 진리에 더 접근해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다 모르면 어떻게 하지요? 사람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구원이 잘된다고 여기는데 구원은 우리가 지식이 충분치 않아서 구원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비밀이라 하는 것은, 일단은 박스를 만들어요. 박스 안에 비밀이 들어 있고 누군가 열쇠를 가지고 그걸 열기만 하면 비밀이 팍 눈부신 광채를 띄고 나타나는 것, SF나 옛날 신화영화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 식의 비밀은 아닙니다. 이 땅에는 비밀을 여는 열쇠가 없습니다.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비밀이라는 거예요. 네가, 네가 비밀이다. 하나님이 생각해 놓은 비밀의 그 생산물, 그 결과물이 바로 너야. 성도라는 이름의 네가 바로 그 비밀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돌아다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비밀이 움직이는 거예요. 세상은 비밀이 없다고 여기고 혹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계속 미진한 것은 연구하면 될 문제지 애초부터 이 우주에는 비밀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비밀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격렬하게 거부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숨겨놓은 비밀이 있다고 한다면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어요. 평생 민주화 운동했는데 비밀 모르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평생 살면서 국가를 위해서 몸 바쳤는데 타고난 집안이 불교집안이라서 비밀을 모르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비밀이 있다는 그 자체를 역겨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굉장히 불편해 하는 겁니다. 그 불편한 입장에서는 차라리 비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소위 공평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사는데 마음적으로 좀 편하게 여기기 위해서 비밀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는 처지에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비밀이 얼마나 대단한지, 13절에 보면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이 땅에 존재하는 새로운 인간, 천국 가는 사람을 새로 생산했습니다.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고, 소중한지 그 비밀의 소중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온갖 것에 대해서 살아가면서 다 갖다 붙여요.

돈, 명예, 건강, 그리고 가정화목, 행복, 출세, 승진, 성공, 교회부흥, 축복받는 것, 이런 것들을 다 갖다 붙여놓고 그 붙인 그것이 시답지 않은, 시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비밀은 독보적으로 대단함을 비교함으로 우위를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네 속에 품어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 소중할까, 아니면 네 가정의 행복한 것이 소중할까? 어느 것이 소중할꼬?” 이렇게 묻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묻게 되면 여러분은 정답을 다 알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다 알겠지요. “그거야 천국이 더 중요하지. 세상 가정행복보다 천국이 더 중요합니다.” 말이야 번지르르하게 잘 하는데 막상 우리가 눈물 날 때가 언제며 고민거리는 언제 생기며 낙심할 때는 언제던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숨겨놓은 비밀에 비해서 극히 사소하기 짝이 없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에 우리가 몸 달아 왔다는 것이 완전히 다 티를 내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우리나라가 세네갈에 만약에 졌다면 어떻게 될 뻔 했어요? 복음이고 뭐고. 류 현진이가 9승 못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실제로 성경대로 교회 나왔다 치고, 성도라고 치고 성경대로 “역시 복음이 최고입니다. 천국이 더 좋지요.” 입이 있으니 말이야 못하나요? 실제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우리의 정체, 우리의 노골적인 본모습을 들춰내는데 세상만한 것이 없어요.

끊임없이 부딪히게 만듭니다. 계약이 갑자기 좌절된다든지, 이사 가는 날 갑자기 집 앞에서 수도관공사가 벌어져서 난처하게 만든다든지, 이민가려고 비자 신청해놨는데 갑자기 심사가 강화되어서 앞 사람은 들어갔는데 딱 내 차례에서 끊어진다든지 하는 것. 급행 1번 타려고 하는데 가자마자 막 떠나버린 것. 좀 기다리면 될 것인데 아주 사소한 일에서 울컥 하고, 내가 이런 꼴 보려고 세상 살았나, 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난과 환란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나의 소유처럼 다가왔던 모든 것, 자식, 재산, 금융거래, 이 모든 것들이 환란이고 고난입니다. 자, 환란의 리스트를 봅시다. 골프 잘 치는 것, 이것 환란입니다. 내가 사업 벌였는데 갑자기 고객들이 몰려오는 것, 이것 환란이에요. 관절이 안 좋았는데 산에 한두 번 갖다 오니 다 나은 것, 이것 환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난이에요.

우리가 고난을 상상할 때 너무 찡그리며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내가 원했으면 하는 그것들이 전부 다 고난이고 환란이에요. 땅 사서 뒀는데 갑자기 열 배로 오르는 것, 지하철 깔린다고 해서. 그게 환란이에요. ‘주여, 또 환란케 하셨으니 어찌할꼬.’ 이런 거요. ‘땅값이 열 배나 올랐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까? 앞으로 돈 좋다고 떵떵거리면서 살 것인데.’

주님 좋아한다고 자부했는데 돈이 갑자기 생기니까 돈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졌어요. 생면부지의 어떤 할머니가 죽어가면서 “널 양자로 삼았다. 유산 20억 남긴다.” 이런 거요. 세상에 이런 환란이 어디 있어요. 나 주님 만나고 싶은데 갑자기 20억 생기니까 ‘이것 가지고 동성로에 빌딩을 하나 살까, 땅을 좀 사둘까?’ 갑자기 추가적인 고민거리가 발생되는 겁니다.

너는 그냥 대학도 다니지 말고 취직만 하라고 했는데 애가 시험 치는데 무조건 백점, 수능 1등급, 0.1프로, 이렇게 나오니까 얘를 법대에 보낼지 의대에 보낼지 아주 고민거리가 될 때 그걸 성경에서 환란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은 가치가 없는데, 나를 구원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내 앞에서 자꾸 얼쩡거리게 만드는 거예요.

‘너 이거 원했잖아, 이거. 예수 핑계대고, 사실은 예수는 그냥 핑계고 예수한테 살살 빌고 또 빡세게 기도해서 이거 원했잖아, 이거.’ 하고 우리의 본 모습의 엑스레이 사진을 다 찍어내는 겁니다. 일평생 성도가 가는 길이 이렇게 환란이에요. 수입이 늘어나고, 건강하고, 자식 공부 잘하고, 딸 시집보냈는데 사위가 너무 잘되고, 이 모든 환란, 언제까지 견딜 겁니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주께 가기 위한 미로거든요. 그 미로에서 우리는 천국이 아닌 것들을 계속 만나야 되고, 그것가지고 아주 반가운 고민거리 하여튼 어떤 고민과 환란, 근심, 계속해서 이 땅의 문제꺼리와 얽히고설키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포수에게 공 던질 때도 그냥 곱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패스트 볼, 커트, 슬라이더, 체인지업, 포심, 투심, 포크볼, 팜볼, 커브, 누가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지만 온갖 변화구들이 많아요. 포심이라는 것은 네 개 가지고 던지는 것, 투심이라는 것은 두 개가지고 던지는 것, 패스트볼은 직구, 커브는 휘어져오는 것, 체인지 업은 폼은 갖는데 빠른지 느린지 분간 안 되게 하는 것, 와서 뚝 떨어지는 것, 멀리서 뚝 떨어지는 것.

이처럼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차피 죽는데 곱게 못 죽게 만들어요. 어떤 사람은 직구로 가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으라고, 죽으라고 약을 써도 안 죽고 95세 되어서 아주 지저분하게 자식들 다 애먹이는 경우, 슬라이더 이런 것. 커브인지 직구인지 구분도 안 되는 이런 것.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맞춤 인간을 만들어요. 무슨 맞춤이냐 하면, 천국에 적합지 않은 세상이 이 세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내가 얼마나 착해집니까, 얼마나 성실합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봉사하게 충성하겠습니까, 하는 이것이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은 뭐가 비밀이냐? 새로운 환경이 비밀입니다.

네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환경이 덮치지 아니하면 너는 새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주어지고 찾아오는 그 낯선 환경이 비밀입니다. 모든 것은 환경이 결정하는 거예요. 내 행동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 그 환경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의 세상 보는 안목이 그 때 그 때 마다 정해지게 되어 있어요.

옛날 나찌 영화에 보면 유대인들 학살하는 영화가 많이 있었잖아요. 보게 될 때에 그 독일병사에 있어서의 유대인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물건이에요. 처리해야 될, 곧 시체가 될 물건에 불과해요. 유대인여자가 아무리 예쁘고 몸매가 좋아도 전혀 독일병사에게는 흔들림이 없어요. 짜증이나 나는 거예요.

옛날 미국의 노예상인들에게 노예라 하는 것은 그냥 노예일 뿐이고 가구일 뿐이지 인격 대 인격,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자기가 정한 일이 그 사람의 세상 보는 안목으로 정해져버리는 거예요. 아침에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관에 있어서 박 한이라는 사람은 음주운전을 했느냐 안했느냐의 여부뿐이지 그 사람이 삼성라이온즈에서 40세까지 20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야구선수라는 것은 생각 안 해요.

여러분은 박한이가 누군지를 모르지요. 야구를 모르니 모르겠지요. 박한이든 추 신수든 관계없어요. 음주운전측정을 하는 순경에게는 문제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어젯밤에 술을 먹었느냐 아니냐, 딱 그것뿐입니다. 경찰관이 해야 될 그 일, 그 상황이 세상을 재편성하는 거예요. 세상을 구역을 짓고 구획을 짓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자기세계에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채 ‘나 이거 하고 싶어.’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니 내가 하는 일에서 소중한 것, 귀한 것, 아까 기도하신 분의 기도에도 나왔지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 어느 일이든 이 세상에서 각자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것을 공통적으로 묶는 것이 있는데 그게 자본이라는 겁니다.

돈이 보편성을 대신하는 거예요. 의사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돈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목사가 되어도 돈이 최고거든요. 목사가 되어도 헌금이 많이 나오면 좋고. 돈이 전부를 차지하는 이 시대에서 돈이 주님의 비밀을 가로막고 있고 돈이 있으면 환란에서 면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이 그렇게 했지요.

인간이 극복할 수 없고 갇혀 있는 상태, 돈 안에. 가게 밖에서 셔터 문 내리고 잠가 보세요. 안에서 아무리 행복하고 음악 듣고 있어도 밖에서 보는 사람은 갇혀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돈이라는 문으로 밖에서 가둬놓은 이상은 아무리 내가 부자 되었다고, 인생 성공했다고 자랑질을 해도 갇혀진 그 상황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인간이 스스로 찾아갈 수 없는 이유는, 비밀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일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비밀을 전달하시면서 그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그 방식을 말씀드릴게요. 12절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담대함이 여기 나옵니다. 성경을 통해서 죽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줬어요. 그 담대함을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 나온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다 압니다. 천국은 행함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간다. 이것이 상식에 속하는데 문제는 그 믿음이 뭐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아주 친절하게도 행함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헌금하는 것 믿음 아니지요. 선교하는 것 믿음 아니지요. 교회 출석하는 것 믿음 아니고, 예배드리는 것 믿음 아니고, 찬양하는 것 믿음 아니에요. 바르게 사는 것 믿음 아니고, 경건하게 사는 것 믿음 아니고, 온 집안 다 교회 나오는 것 믿음 아니거든요. 순교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그걸 믿음이라고 하지 마세요. 믿음이란 차 떼고 포 떼고 다 빼는 거예요. 믿음은 빼고, 빼고, 빼는데도 남아 있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걸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동네에다 믿음을 놓은 겁니다. 내가 누굴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왜?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플러스가 아니고 빼기에요.

자꾸 빼는 거예요. 내가 구제한 것도 빼고, 헌금한 것도 빼고, 설교한 것도 빼고, 강의한 것도 빼고, 교회 다닌 것도 빼고, 이것도 아니야, 이렇게 자꾸 제키고, 제키고, 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옛날 그런 동화도 있지만. 남편이 장에 가서 사과 한 상자를 사왔어요. 제가 객관식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 남편이 사과를 사온 이유는? 1) 후식으로 맛있게 먹기 위해서. 2) 즙 짜서 아내 미용에 쓰기 위해서. 3) 사과를 놓고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서. 4) 처갓집에 선물로 주기 위해서. 5) 죽 쒀서 개주기 위해서. 몇 번 입니까? 5번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죽 써서 개 주기에요. 인생 자체가 원래 그런 거예요. 인생의 보람이라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자식 잘 키웠다고 자식이 알아줍니까? 안 알아줘요. 안 알아주기 때문에 부모덕분이라고 말로 때우는 겁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망상 아닌 것이 없어요. 너무 망상이기 때문에, 너무 허하기 때문에, 너무 빈속이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슬퍼서, 억지로, 변명조로 누덕누덕 때우기 바빠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노력해서 개주는 겁니다. 개가 연거푸 시리즈로 나옵니다.

인생은 짧게 사나 길게 사나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의미 없는 것이 인생이에요. 오죽 했으면 성경에서 안개 같다고 했습니까? 물방울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없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거기다가 의미두지 마세요. 의미 두는 자체가 반칙이고 이것은 조작입니다. 자기 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무슨 행복이 있어요?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 하는 겁니다.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돼요. 나 잘났어, 라고 남에게 묻는 것은 ‘나는 못난이’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과 행동은 변명이고 자기조작입니다. 거짓된 거예요. 얼마나 기도가 안 되었으면 기도를 하겠어요. 기도하는 손으로 예수님 목 졸라 죽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그 기도손이 주님을 살해하는 손이에요. 얼마나 욕심이 많았으면 기도를 하겠어요. 제가 지금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평소에 욕심이 많았으면 기도를 하겠어요. 얼마나 만족감이 없고 주님 앞에 불평불만이 많았으면 떼를 쓰겠습니까?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요. 발악하는 거거든요.

기도한다는 그만큼 나는 주님이 싫다는 자기표현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맘에 안 맞는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너를 구원한다 했지만 우리는 비밀 그런 것은 필요 없고 세상은 내가 원하는 식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주님 앞에서! 주께서 주신 비밀은 상황을 따라 주는 거예요.

그 상황을 성경에서는 너무나 친절하게 출애굽 할 때 유월절이라는 상황을 줬습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이 낮이 아니고 밤이에요. 고요히 잠자고 있을 때입니다. 거기에 등장했던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들, 모든 가정의 맏이라는 맏이는 다 죽여서 집집마다 대를 다 끊어버리고 다 죽여 버리는 그 죽음의 사자들이 왔을 때 그들은 잠자고 있었어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비상 걸어서 박격포 꺼내서 천사들 보고 쏘겠지만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고요히 잠자고 있다가 당한 겁니다. 하늘에서 보낸 천사들의 특징은 뭐냐? 일본의 사무라이, 또는 닌자, 닌자 거북이 알지요? 등짝에 사무라이 칼 차고 와서 그냥 다 죽여 버리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이 세상을 애굽으로 보고 전부 다 진작 죽어야 될 세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비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 안목, 그 주님의 시선 있잖아요, 주님의 응시, 시선, 안목, 그걸 이제는 너도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안겨주는 거예요.

그게 비밀이 새로운 눈동자로 꽂히는 겁니다. 박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보는 거예요. 죽은 자에게 의로운 것이 뭐가 있다고 거기에 주눅 들어서 벌벌 기느냐는 말이지요. 동창회 갔는데 어떤 친구가 성공했단다, 하는 거기에 주눅 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것은 어린양의 피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지난 시간에도 했잖아요. 그리스도의 비밀이 뭐냐? 2장 13절에 ‘그리스도의 피’고 1장 7절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피라는 것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요. 아무리 해도 이해를 잘 못하시는데 제가 아주 차분하게 말씀드릴게요. 피는 뭐냐 하면, 마감입니다. 모든 것의 마감. 마감, 피에요. 잘 이해 안 되세요?

그러면, 마감이 되기 전까지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어서 ‘이것은 착한 일일까, 이것은 나쁜 일일까? 내 인생은 점수 매기면 몇 점 나올까? 내 인생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지옥 갈거야.’ 혹은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천당 갈 거야.’라고 선과 악 둘을 이어놓고 선한 쪽과 악한 쪽을 늘 저울질 하는 그 세계 속에 우리는 셔터 문 닫혀서 살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고 이제 착해볼까? 예수 안 믿으면 나쁜 사람이겠지?’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헌금 하면 착한 사람, 헌금 안하면 나쁜 사람. 전도하면 착한 사람, 전도 안하면 나쁜 사람. 목사 대접하면 착한 사람, 목사 대접 안하면 나쁜 사람.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지옥 갈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밀이 거기서 빼내주게 되면 선악 체제는 이제는 아듀, 빠이빠이입니다. 우리가 선악과 따먹어서 죄를 지었다면 구원하는 방식은, 이제는 더 이상 선악을 동원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사랑이지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뭐냐 하면, 너에 관한 것은 전부 다 개나 줘버려라. 그거거든요.

너에서 나온 모든 것은 전혀 천국 가는데 보탬이 안 되니까 개나 줘버려라. 죽 쒀서 개주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나를 본받아라. 줘버려라 줘버려. 갖고 있어도 의미 없는 것, 쓰레기 같은 것 그냥 줘 버려라. 공부해서 남 주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다 줘버려. 그리고 네 목숨도 줘버려라.”

요한일서 3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줘버릴 때 이렇게 합니다. “아깝잖아요. 그동안 공들인 것이 너무 아깝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줄 때 목숨 주고, 돈을 주고, 구제비 주라는 말이 아니고 네 자아를 주님 앞에 소환 당하게 되면 내 자아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가벼워진 거예요. 내 자아에 대해서.

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안목을 유지하지 말고요 주님의 안목을 유지하게 되면 세상은 유월절 상태가 됩니다. 다 고요해요. 아주 요란스럽게 정지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요란스러운데 주님보시기에, 주님의 안목이라고 제가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보면 백날 설치고 회담을 하고 뭘 해도 정지되어 있어요. 유월절 상태니까 죽은 상태라는 말이지요.

그 죽은 상태에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만 주께서 건집니다. 피를 바른 사람만 구원한다는 말은, 그 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피 바른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냥 설명 없이 저를 욕하겠지요. 예수님의 피를 내 것 만들어서 그 피를 내가 찍어서 그래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피만 구원되기 위해서 피 앞에서 나를 제거하는 용도로 나를 데리고 간다는 말입니다.

너보다 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붙잡아두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납치된 겁니다. 예수의 피를 위하여. 비밀의 열쇠를 열어서 그 정보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를 거꾸로 쥐고 열쇠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이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의 중앙지점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지점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그동안 선과 악, 내가 착한 짓 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고, 착하면 천당하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 지옥 가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고 착한 나는 천당 간다.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매일 같이 검열하거든요. 자책하고, 검열하고, 평가하고, 수능점수 매기고. 이것이 선악사고방식이에요.

이런 사람은 한 명도 천국 못갑니다. 왜냐?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꾸준히 나에 대한 관심사를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의 중앙지점에 나를 절대화시켜서 내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마귀가 우리에게 그렇게 길들여놓았어요. 네가 따먹는 날에는 네가 신처럼 되리라.

신은 뭡니까? 심판자가 신 아닙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종판단자가 신이잖아요. 내가 내 모든 행동을 내가 판단해 왔던 거예요. 그동안! 사람이 자기 하는 일에 꽂혀 있으면 남은 보이지를 않아요. 여러분,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사람은요, 자기 나름대로의 다급함이 있어요. 담대함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의 담대함은 주님의 담대함이고, 나의 담대함이 뭐냐? 나의 시급함입니다.

만약 나의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내가 굶는데 굉장히 담대해져요. 왜? 몸무게 줄이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 착해서 천국가고 경건해서 천당 간다면 나의 다급함은 뭐냐 하면, 목사가 시키는 대로 착한 일 다 해야 돼요. 왜? 점점 더 내가 우수한 존재로 변해야, 성화되어야 천당 가니까.

그게 마귀의 꾐에 빠진 거예요. 그게 여전히 자기 안목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안목을 받은 적이 없어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목사는 신났지요.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었으니까. 교회 부흥되면 여러분도 복 받습니다, 해가지고 교회에 몸 바치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다 바치게 만들어요. 그래야 목사의 자기 교회의 자존감이 높아지니까.

그러면 목사가 하는 짓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목사 말 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목사 말 듣고 주의 뜻대로 바르게 살았으니까, 점점 더 내가 착해졌으니까 누구보다 천국에 더 갈걸?’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이렇게! 그런데 그 천국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할래요? 천국 가서 멱살 쥐고 한번 싸워볼래요?

천국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딸은 안 오고 자기 딸을 죽인 어떤 범인이 온다면 천국생활 하겠어요? 천국이 우리 취향입니까? 우리라는 자체가 삭제되어야 되거든요. 아무리 나는 없다, 없다, 해도 삭제 안돼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 중앙을 놔버려야 돼요. 우리 중앙을 놓게 되면 내가 있던 자리가 빈자리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설명이 되는데요. 31-33절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잖아요. 인자가 그렇게 심판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중앙지점은 누가 차지하느냐 하면, 분명히 예수님이 중앙지점을 차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차지하기 때문에 그 중앙지점에 인간은 끼어들지를 못해요. 그러면 양들은 어떻게 되느냐? 양들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니까 양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신기하지 않던가요? 저는 굉장히 신기하던데?

‘그래, 이것을 하면 이것이 주의 일이니까 이걸 모으면 천당 갔을 때 상급 받겠지. 구원은 기본이고 하늘나라가면 상급 받겠지.’ 해서 “주여,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요게 하나의 꼼수거든요. 교회 와서의 꼼수가 뭡니까? 왜 남보다 기도 더 하고 헌금 많이 합니까? 그것이 성과급이 되기 때문에. 성과급. 직장을 다녀봐야 알지요. 기본은 천당이고 천당 가면 성과급, 상급을 더 주는 것, 그것 전부 다 나를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내가 중앙에 있잖아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나 잘되기 위한 이용물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걸 신앙이라고 믿어 온 겁니다. 여태! 우리교회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천국 가는 사람이 말합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열쇠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애 하나 들고 해봤으면 싶어요.

옆에 딱 끼고, 주님 옆구리에 우리를 모아놓고 우리를 사용한 거예요. 이게 영생이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탓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선과 악을 탓하지 않는 이게 바로 열쇠라고요. 주님께 얼마나 충성을 했는지 그런 것도 생각이 안 나야 그게 천국이고 그 자체가 열쇠에요. 우리는 움직이는 열쇠에요.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몰라” 이게 정답이지요 뭐.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 문제 아닌데요? 이게 정답이잖아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지점이 비어 있어야 돼요. 죽 쒀서 개 줘버리고 내 자리는 텅텅 비어 있어야 돼요. 내 평생 한 것이 나에게 의미가 없고 보람이 없어야 돼요. 왜? 그 보람은 내가 채울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천국의 열쇠로 사용하면 그것뿐이지요. 천국의 열쇠 말이 나왔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담대함이 뭐냐?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그 갈릴리 바다를 제가 가봤습니다. 저는 배타고 건넜어요. 배에서는 가스펠송 막 틀어주고 그랬어요. 저는 배타고 갔다니까요. 저는 물 위를 안 걸었어요. 베드로가 왜 물 위를 걸었습니까? 평소에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습니까? 연습을 하기를 뭘 연습을 해요. 연습 안했어요. 자기를 생각 안하니까 그냥 그런 거예요.

주님만 바라보니까 어느새 간 겁니다. 건너오라 이리로! 내가 그걸 분석하고 맞춰서 행동한 것이 아니고 그 음성이 내가 가진 금융의 재산보다, 돈보다, 통장보다 더 크게 들렸기 때문에 건너간 거예요. 애 성적이 좋은 것이나 내가 건강한 그것보다 더, 내가 부자 되는 것보다 그 소리가 더 소중하게 들려오기 때문에 건너간 거예요.

요한계시록 15장 2절, 3절에 나옵니다. 성도들이 건너가는데 불이 섞인 유리바다를 건너가요. 가는데 그 건너가는 모습이 나와요. 건너가는데 3절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건너간다고 나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홍해를 건너오면서 “이것은 절대 우리 덕분이 아니다. 내 덕분이 아니야. 내가 노력한 덕분이 아니야.” 이러면서 자기 자신을 비어 있는 구멍처럼 여기면서 자기는 그 비어있는 구멍을 쳐다보는 거예요. 자기는 한껏 비켜 나와서. 내가 그렇게 내가 잘되고자 하는 그 자리를 주님께 양도하고 자기는 비워버리는 거예요.

나는 애초부터 헛방이다. 해봐야 그것은 안 되는 거니까. 뭘 해봐야 죄지을 밖에 다른 재주가 없기 때문에. 아낌없이 내놓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쳐다보는 겁니다. 그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고, 그 관계를 소망이라고 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걸로 구원하는 거예요. 남을 구제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왜 사랑을 언급하면서 아니오, 아니오, 를 나열했습니까? 그 ‘아니오’ 에 해당되는 것들을 인간들이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자꾸 자기한테 자극주고, 강요하고, 몰두하기 때문에, 그런 헛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충성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충성도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내가 헛방인 것을 아는 것이 사랑이에요.

내 인생 살아봐야 낭비밖에 안 되는 것을 아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쳐다보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내 쪽에서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개의치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마감이거든요. 주님이 피요, 피로 마감되었다는 것은 전부가 마감된 겁니다. 마감되면 그 마감됨을 견줄 것이 이 세상에 어느 것이 있겠습니까?

없어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구원이 된다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대체하거나 대신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부흥? 가정행복?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은 다 가짜에요. 나 오래 산다. 가짜입니다. 몸 아파요? 아픈 것도 주의 일이에요. 아파서 건너가게 하는 겁니다. 아프면서 그 유리바다를 건너가요. 담대함이라는 것, 갈렙과 여호수아가 담대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것도 자기 자신의 솜씨나 기술이나 테크닉, 자기의 종교적인 기능,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금식했고, 얼마나 기도했고, 얼마나 전도했다. 전혀 그것을 다 죄로 간주해버리지요. 헛된 인간이 헛되지 않으려고 시도했던 자기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요. 나를 꾸미는 짓에 불과합니다. 신앙인도 아니면서 신앙인인척 했던 그 시절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그 위선을 나도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귀신도 알아요.

그냥 나를 좀 놔둬버려 두세요. 여러분 자신을. 내 몰지 말고, 다그치지 말고 좀 놔두세요, 그냥.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다 보면 지난 저녁에 옷가게에서 박스를 내놨잖아요. 박스에 무슨 글자가 있어요. “취급주의. 던지지 마세요.”라고 써놓았어요. 그래서 쳐다보면서 ‘어? 빈 박스인데?’ 이게 박스가 내용물이 있을 때는 맞는데 빈 박스에 아직도 그런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상당히 낯선 거예요.

빈 박스는 전에 뭐가 들어 있었든지 던져버려야 돼요. 우리이름이 뭐냐 하면, “저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저 존엄합니다. 저에 대해서 예의를 다해주세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런 식이에요. “나도 인간입니다.” 이런 것. 사람은 이렇게 어떤 얼굴, 다양한 이름을 가져도 인간의 이름은 한결같아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심지어 세 살, 네 살 먹은 애도 부모가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해도 애는 점점 커가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나도 자존심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하도 유-튜브를 많이 봐가지고. 인간의 이름은 하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이름. 죄 지은 아담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얼굴은 달라도 이름은 한결같아요.

따라서 그 이름을 비우고 예수 자기 이름으로 피로 써버립니다. 네가 어떻게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개판이 되더라도 너를 구원하는 것은 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지 너의 이름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그 주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 죽으면 안돼요. 계속해서 우리는 온갖 그 나의 지저분함을 다 드러내야 돼요.

우리 맘대로 자살하면 안돼요. 우리는 복음 말고 늘 주어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자기를 재구성합니다. 자기를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 재구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사사기에 삼손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삼손 이야기할 때 삼손이 세 명의 여자를 사귀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셔야 되고, 그 중에 두 명의 여자가 아주 의미 있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 수수께끼를 삼일 만에 다 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사귀던 그 여자가 블레셋 여자거든요. 수수께끼 못 풀면 다 죽인다고 해서 블레셋을 심판하는 핑계로 수수께끼를 냈고 그 수수께끼는 삼손이 경험한 것, 사자에서 꿀이 나오는 그 장면에서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정답은 누가 아느냐? 삼손밖에 몰라요. 자신만만하게 수수께끼를 냈거든요. 그러니까 블레셋 쪽에서 삼손의 애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삿 14:15)고 되어 있어요. 불사르리라.

협박을 받은 거예요. 삼손의 아내에게 이미 기존의 육의 관계로 협박을 했고 그 협박에 밀려서 삼손의 아내가 또 삼손을 협박합니다. 또 다른 삼손의 여인인 들릴라에게는 협박성 보상을 제안합니다. 네 남편이 힘이 센데 그 힘의 원천이 뭔지를 알아내라고 블레셋 사람들이 자꾸 압력을 가했어요.

“16장 5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돈으로 회유를 하는 겁니다.

너와 네 집을 불살라버린다는 폭력성협박이나 돈으로 회유당하는 것,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세상살이 아니에요? 여러분, 부부간에 잔소리할 때 어떤 협박 속에서 잔소리를 합니까? 어떤 회유? 당신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이렇게 된다는 협박성이지요. 그 협박이 어디서 온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온 거예요. 유월절의 고요한, 잠자는 그 세상 아닙니다.

나를 중앙에 놓는,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임의로 재조정한 세상이에요. 그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세상으로부터 압력도 받고, 협박 공갈도 받고. 그것도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면 집안의 족보에서 잘린다. 너는 집안의 우세야.” 남에게 얼마나 공갈 협박을 받아왔습니까?

삼손이 복음보다 여자가 좋은 거예요. 여자를 못 놓으니까 삼손이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 이야기를 다 해버려요. 결국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의 마지막 담대함은 뭐냐? 그 여자들은 돈을 얻기 위해서, 또는 자기와 자기 집을 불태우지 않기 위해서 담대함으로, 시급함으로, 다급함으로 남편을 졸라서 수수께끼의 비밀을 끄집어내지요. 삼손은 끄집어 낸 거기에 오히려 불을 질러버립니다. 여우 꼬리에 횃불 달아서 다 불살라버려요.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삿 15:4-6)

그런데 막상 삼손은 마지막 때 담대함은 뭐냐? 그것은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담대함이었습니다. 이깟 목숨, 여자나 밝히는 목숨, 구원하라고 주신 이 목숨, 주님의 열쇠를 자랑해야 되는데 도리어 주님을 이용했던 엉터리 같은 내 목숨, 내가 이 기둥을 무너뜨려서 함께 죽는 이것, 평생을 살아온 이 인생, 죽 쒀서 개준다, 하고 잡아당기니까 삼손이 죽을 때 죽인 사람이 살았을 때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되어 있어요.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그 삼손이 바로 열쇠입니다. 그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되지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 뭡니까? 피 입니다. 그 피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세상은 믿지 말라. 세상은 엉터리다. 세상은 없다. 세상은 죽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합니까? 우리가 시장에 가면 사과 고르잖아요. 주님이 알아서 골라서 데려갑니다. 골라서 데려가는 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골라서 데려가게 되면, “내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어찌 주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주님을 쳐다보고 이야기해요. 안 믿는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너 방금 누구보고 이야기했나?” “너는 몰라도 돼. 내가 아는 분이 있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신앙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이 없다는 거예요, 그분이!

내가 비켜나고 대신 내 자리를 차지할 그 분을 우리가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자신의 문제는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지요. 비켜날 줄 알아야 되거든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더 중요해요. 왜? 그분의 비밀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니까요. 그분은 주인이고 나는 그냥 조수에요. 조수가 할 일이 뭡니까? 옆에서 주인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예수님의 조수가 될 것이다. 주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삶이 얼마나 편한 삶인지. 정말 편하고 편한 삶입니다.

그에 비해서 세상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먼저 일어난 노인네가 빈 박스를 줍는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아침 일찍 일어난 노인네가 빈 박스를 가져가요. 아침 일찍 보니까 양손에 들고 가요. ‘아 저거다. 먼저 일어난 노인네가 빈 박스를 줍는구나.’ 일찍 일어난 참새가 먹이를 먹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누구한테 쫓기는가? 허상인 나에게 쫓기면서 지금껏 온 거예요. 이제는 누구에게 쫓기면서, 내가 중심이다, 내가 돛대다, 최고다, 하지 마시고 이제는 반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여, 오늘도 왜 우리를 살게 하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담대함이란 그냥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분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관계성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쳐다보고 감사하게 해주시고, 날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일시키고, 부지런하게 만들고, 살게 만드는 이 관계를 우리는 남에게 증거하고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7강-엡 3장 12-13절(담대함)190609-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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