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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13:36:22 조회 : 68         
196강-창 50장 15-21절(요셉의 용서)190717-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37.238.179)
196강-창 50장 15-21절(요셉의 용서)1907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 15-21절입니다. 구약성경 80페이지입니다.

창세기 50:15-21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과 형들의 사이가 좀 좋아졌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아니 됩니다. 요셉과 형들은 이 세상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새로운 환경 속에 놓여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되는 겁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실수를 했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실수를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실수이겠느냐 하는 것을 점검해봐야 되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살기 위해서 모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우리가 지옥가게 된다면 그것이 실수였음을 알겠지요. 그러면 성도는 그게 실수인 것을 언제 아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을 때 내가 살고자 하던 모든 수단과 방법은 다 잘못이고, 죄고, 실수였다는 것을 그 때 아는 겁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어요. 자기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천국을 가고 구원받는 것은 자기 실수를 미리 아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부여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들이 실수인지도 몰랐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행세에 대해서, 하는 일에 대해서, 최선의 노력에 대해서 누군가 피해를 본 분이 계시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다는 점, 내가 내 것 챙기고 내가 살기 위해서 노력한 그것을 우리는 절대로 실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마땅한 것으로 여기지요. 우리입장에서는 그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지만 그게 마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존재로서는 그것은 원래 인간과 다르다는 것, 틀려먹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미리 알게 하시는 혜택을 입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가 새삼스럽게 재산을 취한다든지, 높게 승진을 한다든지, 세상성공, 이런 것을 기대한다든지, 교회 와서 갑자기 커진다든지, 자기가 속한 교회가 유명한 교회가 된다든지, 자기 가정, 가족이 유명인사가 되는 그런 것을 노리면 안돼요.

성도가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 저 죄인 맞지요. 그지요?” 하는 그 고백, 그게 전부에요. 주님이 우리를 지적하는 그 주님의 시선과 안목에 우리가 공감하고 거기에 함께 공유되는 것, 주님이 우리를 지적하는 그 자리에 우리가 합세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 이야기해요. “당신이 이야기 하는 것은 맨 날 ‘십자가 앞에 우리가 죄인이다. 끝.’ 그게 다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다입니다. 그게 다일 때 우리는 세상 것 모든 것이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작은 일에, 햇빛과 공기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실수를 줄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독자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될 최선이고 나의 최선을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간주할걸?” 일방적으로 그렇게 착각해요. “제가 하나님 믿고 실수를 줄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는 말이지요.

실수를 줄인다는 말은,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고, 완벽해지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이 더 좋아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지금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빌빌 기면서 “동생아,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아버지가 용서하라고 했으니까 너도 버티지 말고 우리를 용서해줘.” 이렇게 나오는데 우리가 이 본문 보기 전에 도대체 형들이 요셉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한 번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창세기 37장 23절,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들이 요셉을 보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요셉의 옷을 벗긴 겁니다. 요셉이 입은 옷은 형들의 유니폼이 아니에요.

특별하게 아버지가 ‘나는 너만 사랑한다.’ 하는 표식으로서 오직 한 벌만, 요셉에게만 입혔던 옷이에요. 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담긴 거예요. 형제간이 있는데 부모가 나 말고 다른 형제를 특별히 사랑해서 철마다 때마다 백화점에 그 애를 데려가서 신상 나올 때 마다 사서 입히고 다른 형제는 누가 입었던 것, 재활용품이나 꺼내서 입혀버리면 화 안 나겠습니까? 화나지요.

저 형제와 나는 뭐가 다른데?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뭐냐 하면, 자의식이 갖춰져 있다는 거예요. 자의식이 갖춰져 있다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은 누가 와도 죄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선입감을 그렇게 갖는 거예요.

사랑받는 자와 사랑 못 받는 나 앞에서 ‘네가 뭔데? 너는 왜 특별대우 받는가?’라고 할 때 여기서 필히 미움과 거기에 대한 저주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마음으로 억누를 수 없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사랑받은 자를 해코지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심정이 우리 마음속에 어떤 식으로도,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튀어나오기 마련인 거예요.

이것은 꽁, 하고 간직하고 세월 지나면 잊혀질 것이 아닙니다. 꽁, 하고 있는 그 마음은 나중에 청소년이 아니고 40대, 50대, 60대가 되어도 이것이 없어지지 않아요. 맏이라고 부모가 없는 가운데서도 대학공부 시켜주고요. 형 대학 보낸다고 더 이상 돈이 있어야지요. “동생, 너는 공고나 가라.” 여자애들에게는 “여상이나 가라. 타자 배워서 경리로 취직해라. 빨리 취직해서 오빠 공납금이나 대줘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응어리가 10년, 20년이 가도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부모 돌아가실 때 유산문제까지 연관돼요. 형은 대학까지 나와서 사업한다고 다 털어먹고 나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돈 벌어서 부모 봉양하는데 나중에 유산 받는 것 보니까 형은 제사지낸다고 형이 다 가져가 버리고 자기는 끝까지 홀대받고, 천대받을 때, 못 견딥니다. 형 조카 꿀밤 막 때리고 싶고 그래요. 다시는 안 찾아 가지요.

부모가 형제들에게 골고루 줘야하는데 형 사업하는데 다 줘버리고, 형은 주는 족족 다 털어먹고, 둘째 몫은 하나도 안 떨어질 때 그것은 부모에게 감정이 있기 마련이에요. 결국 형들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요셉에게 다 쏟아 부은 겁니다. 쏟아 부을 때 그러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형들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너무나 충성하고 자기충실에 대해서는 양보 없는 열정으로 최선의 것을 내 안에 꽉꽉 채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채워봤자 요셉만큼 사랑받지 못할 때는 요셉을 제거해야 내 고유한 가치가 살아남는다고 보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에게 달랑 두 형제가 있어요. 하나는 가인이고 하나는 아벨입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둘의 제사를 평등하게 받는 것이 아니고 형이 드린 제사를 안 받습니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아요. 가인은 은근히 기대했겠지요. 내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았으면 공평하게 동생 제사도 안 받아야 되는데, 자기 제사는 안 받는데 동생의 제사는 받을 때 나온 결과는 뭐냐? 그 동생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결국은 자기가 자기한테 충실하게 자기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이것이 본인한테는 실수가 아니지만 이것은 결국 무엇을 남기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타인에 대한 미움을 양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 하고 나에게 그런 환경을 마련하신 하나님이 보는 평가하고 그 평가가 달라요.

우리가 교회 나왔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먼저 있느냐? 하나님이 먼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지키려고 만든 기준보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인간에게 적용시키는가, 그걸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 기준을 우리는 모르니까 성경을 보면 나오지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선악체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알지 않아야 된다는 그 지식을 우리는 통과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갖고 있는 선악을 통과해서 선악을 모르는 쪽으로 거기에 도달되어야만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선악을 통과하면서 인간은 자기를 악하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아요. 선악을 통과하면서 그 선악의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내뱉는 의견, 내 생각, 내 행동, 이것은 무조건 이유도 없이 선한 거예요. 진리가 되는 겁니다.

왜? 나는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따먹게 되면 선악을 평하는 주인이 자기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자기는 자기 자신을 지켜야 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무슨 기준이 날라 가버리느냐 하면, 인간이 있기 전에 먼저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적용하는 그 기준은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날라 가버린 거예요. 방해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 앞에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서 네가 세운, 네가 잘났다고 우기는 그 기준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기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동생 아벨에게 준 거예요. 똑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37장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요셉의 형들 기준보다 먼저 앞장세우니까 형들은 자기의 정당함을 지키기 위해서 요셉을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죽이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있는 그 채색 옷을 벗겨버리고 거기에 짐승의 피를 발라서, 그 요셉에게 입혔던 채색 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서 아버지에게 되돌려줘요.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은 이렇게 짐승에 물려죽었습니다. 더는 없습니다. 이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버지 사랑은 우리 몫으로 돌아오겠지요.’라는 그러한 계산을 하고 요셉을 죽은 자로 만들어서 아버지께 알려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은 아들이 이 땅에서 떠날 때는 그 몸에 인간들이 저지른 피가 묻은 채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자, 십자가의 의미가 뭔지 알겠지요? 하나님의 기준부터 출발해야 될 우리 인간이 이미 범죄 한 입장에서 그 범죄 한 기준을 유일한 선으로 간주해서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고, 나는 무조건 정당해야 되고, 나는 무조건 선하다. 여기에 토 달지 말라.’ 이것부터 출발하니까 주님께서 그 인간 앞에서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니까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심지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마저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쓸쓸하게 피 묻은 모습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그 피 묻은 예수님의 신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 죄인 맞지요? 그지요?”라고 고백할 때 그게 바로 언약 안,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50장 15절에 보면, 그런 짓거리를 한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가서 누굴 거론하느냐 하면,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당부한 것을 요셉에게 거론합니다.

요셉 있고 자기 형들이 있고,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지붕처럼 덮여 씌워진 일관된 기준이 뭐냐? 그것은 바로 야곱이 알고 있었던, 즉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원칙이 요셉이나 형들이나 둘 다에게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요구를 요셉에게 들이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아버지가 ‘이제 형들 용서해줘라.’라는 이야기를 했잖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용서라는 말은 뭘까요? 죄가 없는 곳에는 용서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되기 위해서는 형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을 지니고, 그저 편하게 본성대로, 자기의 성격대로 미운 것은 밉다고 했을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그냥 일반적인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일을 형들이 대신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을 죽일 때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오늘날 인간들은 그냥 무턱대고 살아가요. 멍하니 살아갑니다. 닥치는 대로 살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어요. 닥치는 대로 살고, 무턱대고 살고 있어요. 왜냐하면, 매일 같이 주어지는 스케줄에 떠밀려가니까.

뭐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거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떠밀어요. 저는 어릴 때 이런 생각했어요. 옛날 학원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쌍무지게 뜨는 언덕>이라든지 그런 순정소설 같은 것이 있었어요. 또 초등학교 1학년 때 국어책에 나오는 “철수야 안녕,” 또는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거기 나오는 삽화, 그거 그린 화가가 몇 년 전에 죽었는데 그 삽화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이, 파마하고 앞치마 하고 자기 남편 출근할 때 남편은 양복 입고 서류가방 들고 나가면 엄마는 기와집 대문 앞에서 인사하는 대목이 나와요. “여보,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옆에 애들에게는 “학교 잘 다녀오너라.”

글을 국어책에서 처음 배울 때지요. 그 삽화에 강아지 하나 그려져 있어요. 여기서 꿈이 뭐냐 하면, 나는 취직해서 양복 입고 가방 들고 나가고, 아내는 앞치마 입고……, 앞치마를 꼭 해야 돼요. 앞치마를 안 하면 단정하지 않아요. 파마도 하고 그래서 엄마 앞에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런 꿈을 꿨다고요.

취직만 하면 월급 나오고, 그 월급으로 애하고 같이 한가하게 놀러가는 것. 세상에 맞벌이라는 것을 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집에 오면 퍼져서 죽 뻗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애들 둘은 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걸어 잠글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것은 한 가족이 아니고 다세대주택이지요.

내가 돈을 버는 이 환경자체가 나에게 생각을 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일은 계속 밀리지요. 택배회사 취직해 보지요. 성경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계속 하루에 수천 개의 물건을 운반해야 되지요. 택배회사 뿐만 아니고 모든 직장이 다 그래요. 떠밀려가고, 피곤하고, 그리고 무턱대고 살고, 생각 없이 막살고, 어쩔 수 없이. 결국 인간은 멍~ 하니 되어버려요.

나중에 연차나, 월차내서 따로 하루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하는데 어린아이가 도 닦는 것 봤습니까? 놀러간다고 해서 예수님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도 닦을 필요도 없고 도 닦을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요셉의 형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 형들이나 오늘날 우리나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나 하나 추스르고 나 하나 챙기기에 급급해요. 그거 외에 하나님이고 성경이고 다 생각 못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우리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이 주어졌는가? 청도에 가면 소싸움 경기장이 있어요. 제가 이야기 듣기로는 청도 소 싸움하는 소에게는 일반소와 달리 특수사료를 준다는 거예요. 심지어 소고기까지 먹인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소한테 소고기 먹이고, 닭 가슴살 먹이고, 한약 달여 먹이고. 특수하게 다루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을 요셉이라는 아들의 이유 때문에 천국에 넣어주는 이유는 특수한 조치를 가한 겁니다. 그게 뭐냐? 내가 실수했다는 겁니다. 누구 앞에?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발각시키는 존재를 형들 앞에 버티게 해주는 이 혜택, 이 축복,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나를 죄인 되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비너스라는 조각상을 보면 장애인처럼 팔다리가 끊어져 있고 몸통만 있는 비너스가 있지요. 그것을 토르소라 하는데 그렇게 몸통만 있듯이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도 바쁘니까 무엇에 급급 하느냐 하면, 자기 몸통만 챙기고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려요. 우주선 올라갈 때 걸치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올라갈 때 몸통만 올라가잖아요.

그처럼 자기 폐쇄, 모든 관계를 안으로 다 접어버리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달랑 남아도 나는 버티겠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에게는 복음이고 뭐고 해도 ‘나에게 그딴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내 한 몸만 있으면 돼’라고 버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그렇게 두지 않고 환경자체가 요셉, 자기가 해코지해서 죽었다고 여긴 요셉을 성공한 상태에서 자기 앞에 들이대게 해서, 그 앞에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의지하는 것은 뭐냐?

돌아가신 아버지가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위치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는 그런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되면 되지 않겠느냐?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는 되지를 않아요. 누구 앞에 사과는 할 수 있지만 영원히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그 고백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조치,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런 언약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나보다 월등한 분이라는 인식을 우리가 안 갖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최고에요. 한국드라마에 보면, 아침드라마를 보면 복수를 많이 하는데요. 주인공이 갑자기 부자, 졸부가 돼요. 희한해요. 뭘 해서 벌었는지 모르겠어요.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서 외국에 나갔다 오기만 하면 부자가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복수를 하는데 돈으로 하지요. ‘재벌, 기다려라. 내가 돈으로 복수할게. 사랑도 찾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드라마 식으로 한다면 요셉이 형들 앞에서 갑자기 부자가 되고 거부가 된 거예요. 형들보다 월등한 존재가 된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말 예수님이 우리 앞에 과연 월등한 존재로 인식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소리 못하는 것, 그 정도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점이 어려운데 그 점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20절을 봐야 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요셉이 하는 소리에요.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악을 뭐로 바꿨다? 선으로 바꿨다는 거예요.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인간은 항상 내가 결정했으면 자기 행동이 무조건 선하고 옳아요. 약간 미안한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 내가 나의 선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못 지켜주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 될 이유가 있어줘야 나는 사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전적으로 죄인이라 하는 고백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여전히 선악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선악을 벗어나지를 않고 선악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내가 복음 믿어줄게. 내가 교회 나와 줄게. 좋다는 것은 내가 다 해줄게. 이렇게 복음 믿어주는 나는 선하다고 해줘. 교회 나와 주는 나를 선하다고 해줘.” 이런 식이에요.

교회 백날 나오고 백날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그 결과물은 뭐냐? 나의 선으로 귀결되는 겁니다. “나 십자가 안다. 십자가 믿는다.” 자꾸 이래버려요. “주님께서 우릴 용서하려고 피 흘렸다면 내가 그 피 인정해줄게. 내가 그 피 찍어 바를게. 됐나! 됐어? 됐지, 그지? 나 그 정도로 괜찮아.”

계속 자기 선한 쪽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처음 복음 알 때는 복음 좋다고 해놓고는 그 다음부터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아요. 왜? 자기는 자기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교회 나가기 전에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교회에 나가서 몰랐던 복음까지 장착했기 때문에 이제는 완벽에 완벽을 기한 거예요. 실수를 줄인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당신들의 죄를 선으로 바꿨다는 이야기에요. 요셉이 하는 이야기가. 이 말을 아주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선이라고 여기던 그것이 선이 아니었고 다른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게 악인데 선한 나의 일, 이 선을 포기하고 악을 받아들일 여지가 전혀 없는 게 나인데 하나님께서 나의 선을 죄로 바꾸었고, 그 죄를 또 다시 선으로 바꾸어서 장착시켰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우리는 내가 선하다는 점에서 꼼짝도 안 해요. 그걸 계속 쥐고 있을 거예요. 포기 못합니다. 이런 복잡한 과정, 그걸 우리한테 맡기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선한데다가 보다 더 선한 것을 줘서 완벽에 완벽을 본드 가지고 붙이면 ‘선하다 + 선하다 + 선하다’ 그 전체가 ‘선하다’가 되어버려요. 바꿈이 없어요. 바꿀 생각도 없어요. 원래 선한데 뭘 바꿔요? 원래 선하기 때문에 안 바꿔요.

우리나라에 천재가 있었는데 열 두 살짜리가 박사학위에 들어간 송 유근이라는 애가 있었어요. 송 유근이 8년 안에 박사학위를 못 받아서 그 학교에서 쫓겨난다는 소리도 있었어요. 한창 대단할 때 많은 사람이 “야, 아이큐가 200 가까이 되는데 더 노력하면 박사학위도 빨리 따고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어.” 전부 다 더하기를 이야기했어요.

“네가 지금 하는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벽에 완벽을 더할 수 있어.” 이것은 송 유근 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에요. 미지의 x가 있고 미지의 x 주변을 선회하면서 그 미지의 x가 나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설정하고 계속 거기에 접근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인간의 희망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송 유근 보고 “아이고, 이 바보, 아이큐 180의 바보야.” 그러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아이큐 180이 무슨 바보입니까? 그냥 30이 바보지요. 아이큐 160, 180이 무슨 바보에요? 그러나 선제되는 주님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가 선하고자 하는 이것이 악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선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으니까.

요셉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형님들이여, 걱정하지마소서. 이게 다 꿈입니다. 내가 꾼 꿈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꿈속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고 요셉이 생각한 ‘나 잘났다’의 현실은 그것은 개꿈이었습니다. 그것은 헛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꿔치기 그것이 현실이에요. 바꿔치기가 없는 그것은 계속 헛된 꿈속에, 망상 속에 한평생을, 90평생, 백 평생을 다 지내고 있는 거예요.

왜? 안 바꿔지니까. 내 선악자체를 버려야 되는데 내 선악을 그냥 쥐고 있는 거예요. 보다 선하게 되기 위해서. 선하게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자체가 죄인데 그 죄와 이 선악이 매치가 안 되네요 매치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교회 와서 술 끊고 담배 끊고 착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술 끊고 담배 끊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하고 강의하는 이것이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자기는 주의 일,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아담의 보편성은 전부 다, ‘착하기에 더 착해지자.’ 이게 보편성이에요. 이 보편성에 예수님, 특수성을 보낸 겁니다. 보편성에 특수성을 보내버리면 기존의 선악체제가 아니고 다른 기준의 선이 있어요.

그게 뭐냐?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말하는 선을 이룬다는 것은 로마서 8장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세상에 유일하게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밖에 없어요.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세웁니다. 십자가를 앞장세우면서 “네가 그렇게 너 잘났다 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갈 짓거리를 계속 되풀이하는 짓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통보해버리지요. “그리고 너는 거기서 네 기준 가지고는 달라지거나 바꿔질 수 없다.” 왜? 기준 자체가 일단은 ‘나 잘났다’ 하는 기준부터 시작하니까.

그 기준에서 못 벗어납니다. 탈출할 수가 없어요. 그게 아는 것의 전부기 때문에. ‘나 잘났다’를 빼놓고 그 다음에 무슨 진리가 나에게 의미가 있으며, 남 잘되는 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내가 잘돼야지요. 내가 우수해야 되고, 내가 공부 잘해야 되고, 내가 출세해야 되고, 우리 집이 잘 살아야 되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그게 죄라면 ‘그러면 죄 좀 짓자.’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진정으로 자기가 주님의 성령으로 인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딱 섰다 싶으면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인생을 펼친다 할지라도 저는 그것을 과분하게 여기고 감사히 감수하겠습니다. 나에게 어떤 질병을 주고, 내 인생이 어떻게 비틀어지고 사업이 부도나고 망한다 할지라도, 가정에 우환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마저도 주님 앞에 서 있는 내 죄에 비해서는 과분한 축복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와야지요.

그게 바로 사도들이 간 길이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라고 해서 하늘 날아다니고 그런 것 없습니다. 알라딘도 아니고. “내가 어떤 일을 할지라도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굶는 것도 괜찮고,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강의 위험, 어떤 것이 올지라도 원망 대신에 감사만 쏟아내겠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바꾸실 겁니다.

그것이 내가 만든, 악마가 준 기준을 이제는 탈피한 거예요. 하나님이 준 기준은 뭐냐? 내가 너 죄인 되게 한 그것이 이미 바꾸었다는 신호거든요. 그게 증거라는 말이지요. 바꿔졌기 때문에, 다른 기준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너끈하게 주님 앞에서 “저 죄인 맞지요, 그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맞지요?” 도리어 반문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은 다른 기준 안에서 살아가는,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요셉을 예수님으로 봅시다. 그리고 우리를 요셉의 형이라고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바로 내가 예수님한테, 내가 요셉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할지라도 일체 주님께서 쉿! 일체 불문에 붙이고, 묻거나 따지지 않고 이제는 용서,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 기준이 적용되는 환경 속에 우리를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 대목 읽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50장 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마소서.”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우리 짓이지요. 우리의 그 잘남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우리를 용서하사 우리에게 생명으로, 또는 생명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 작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잘 먹고 잘 살아서 감사가 아니라, 건강해서 감사가 아니라 늘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이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영생의 전략이 우리에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덮었다는 사실, 약속이 덮여 있다는 사실에 저희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6강-창 50장 15-21절(요셉의 용서)190717-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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