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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15:29:08 조회 : 67         
광주강의20190719a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190719a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10절입니다.

 

10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절,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 이 이야기는 14장 20절에 보면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는 계획적이었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 반드시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될 요소를 열두 제자 속에 그걸 포함을 시킨 겁니다. 그럼 열두 제자를 누가 뽑았는가? 예수님께서 뽑았죠. 그러면 열두 제자가 본인이 하고 싶어서, 신청해서 열두 제자가 된 게 아니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았잖아요. 뽑을 때에 가룟 유다도 뽑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뭘 뜻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열두 명을 이렇게 뽑았을 때에, 여기에 자신을 팔 사람도 뽑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예수님 본인이 본인을 넘어뜨리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일에 거기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요소, 그게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죠. 예수님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요소,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이 예수님이 하는 이것이 예수님이 하는 개인이니까, 예수님은 무슨 개인이냐 하면은 표준적 개인이에요. 표준적 개인이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넘어뜨릴 요소를 내 안에 합류하고 있는 개인. 이게 표준적 개인입니다.

 

그러면 이 표준적 개인, 단일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과 견주게 되는 겁니다. 대비해보는 거예요. 너 나처럼 될 수 있어? 너 나처럼 될 수 있어? 다 견주해보는 겁니다. 그럼 견주어볼 때에, 그럼 누구하고 가장 결정적으로 견주시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넘어지게 한 가장 근접한 인물이 예수님, 표준적 개인과 가장 차이가나는 개인이 되겠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표준적 개인과 가장 충돌되고 가장 반대가 될 수 있는 모델이 가룟 유다죠.

 

그래서 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하는 자기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면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요소 중에서 둘로 갈라지죠.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려버린 예수님.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는 가룟 유다에게 팔려버린 그런 예수님. 그런 인간. 개인상.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밀쳐버리고 배타시하는 그런 개인상. 인물상. 이 대표자가 누굽니까?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 이 세상이 결국 이 두 종류의 개인으로 구별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다 모아놓고 어떤 인간과 어떤 인간이 구분이 되는가, 바로 1번 쪽의 인간상과 2번 쪽의 인간상이 구별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도가 죽으면 어디에 간다고 했습니까? 천국에 가죠. 천국은 누구의 나라냐 하면은 가룟 유다에게 팔려버린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내 안에 나를 넘어뜨릴 요소가 있음을 인증하는 사람의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밀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겠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지옥에 가죠.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이 가룟 유다가, 2번이죠. 예수님을 이렇게 팔아넘겨야 될 그 심정, 그들의 삶의 정황, 실존,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떤 마음가짐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것이 과연 진짜로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예수를 믿는 것인지 판정이 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심점을 제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봤어요. 이렇게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 절대적인 자아상이 거침없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뭘 알아?” 자식이 부모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어요. 애 셋이 부모한테. 멀리 떨어진 부모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고. 남편이 아내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고. 교인이 목사한테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너희들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라고 하는 순간, 여기서 너와 나가 완전히 결별, 끊어지게 하는 요소죠.

 

그런데 아까 1번은 뭡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넘어뜨리는 요소에 자기가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 이게 가룟 유다의 심정인데요. 심정인데, 사는 게 괴롭다 이 말 아닙니까? 괴로우니까 자살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내가 나와 결별하셨다. 내가 나와 결별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2번에 속하는데, 우리는 항상 힘들고 어려울 때는, ‘에구 자식들이 전화 한 통화 없고. 결혼은 해놓고.’ 이런 식으로 불평들을 할 수가 있죠. ‘자기만 알고 내 심정은 안 알아주고.’

 

흔히 부부들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에휴 몰라, 몰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고백과 한통속이다. 그래보면 돼요. 가룟 유다. 왜냐 하면은 나와 나를 결별을 할 줄 몰라요. 나와 헤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빠이빠이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럼 헤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꼭 껴안고 안 놓치지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는 겁니다. 나다움에 대해서. 나의 나다움에 대해서 그걸 사수하고 지키기 위해서, 조금도 흠집 내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든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세상은 나 중심이 되고 남들, 나 바깥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대구강의 할 때 도표 하나 그렸죠. 예수님 중심에서는 YOU라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 중심은 너희들이지, 집단을 말하지, 개인적으로 너라는 것은 해당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볼 때에 너가 아니고 너희들이 돼요. 그리고 주님께서 성도를 볼 때에 너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 포함해서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미 천국이 시작이 된 거예요. 예수님 더불어서 우리가 될 때에는 이미 천국은 벌써 현장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반대가 되어가지고 나 중심이 되니까, 나 빼놓고 모두가 뭐냐 하면은 너 또는 너희들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와 너는, 어려운 말인데, 비대칭적이다. 비대칭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대칭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안 같다. 여분의 것이 따로이, 너 없는 것 나 있어, 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나만의 특별한 가치를 이렇게 따로 챙겨놓기 위해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이 학교 다녀도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으로, 애써 그쪽으로 가고 싶은 거예요.

 

비대칭적이라는 말은 똑같지 않다는 뜻이에요. 비대칭적이다. 같으면 대칭적이겠죠. 똑같지 않다. 자 그러면 이 말의 취지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백설 공주 주변에 난장이들이 몇 명이 있었어요? 일곱 명이죠. 일곱 난장이잖아요. 백설 공주 입장에서는 일곱 난장이가 다 다르겠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겠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죠. 왜냐하면 백설 공주 외에 일곱 난장이는 백설 공주를 봉사하는 쪽이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철칙입니다. “형이 내 유산을 가져갔습니다.”라고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죠. “형이 내 유산을 가져갔습니다. 해결해주세요.”라고 할 때에, “너와 너희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 의사는 없다. 형이 유산을 가져가든 말든 사람의 소유는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벌써 나 중심이 되다보면 나하고 남하고 비대칭적으로 나는 독보적인 존재로 그렇게 이해를 하는데, 이 관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인정할 의사는 전혀 없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 외에 너희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고 제자들이 눈을 떠서 보니까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팔아먹은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하나님의 아들 구석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평범한 보통 인간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고, 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룟 유다를 이해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는 하등의 우리와 이상한 점이 없다는 거예요. 똑같은 오늘날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올 때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독특하게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 컷시키고 달랑 누구만 남았어요? 예수 외에는 아무도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무리하게 뭘 요구합니까?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으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뭘 강요받느냐 하면은 보통 여느 인간과 동일한데, 보통 인간에 불과한 예수님에 대해서, 그 분이 뭐라고 내 모든 의사와 뜻을 졸지에 다 찢어버리고 밟아버리고 예수님 그 분의 말만 들어야 될 어떤 이유와 근거와 건더기가 나한테는 생겨나질 않는다는 겁니다. 이거는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목숨을 바칠 대상으로서 예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왜? 너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뭘 하시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이 땅에서 극히 평범하게 만들어버려요. 변화산 말고. 산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평범하게 만들고 그리고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없게 만듭니다. 예수님 홀로 있다고 하니까. 해놓고 하는 말이 뭐냐, 니가 목숨을 다 걸뿐이다. 됐나? 한번 해볼래? 이래 나오는 거예요. 한번 해볼래? 이래 나오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의 고민이 뭐냐 하면은 자기의 목숨을 걸 투자처가 없는 거예요.

 

요새 주식이 내려가는데 목돈으로 투자할 마땅한 주식회사가 없어요. 삼성재벌, 삼성그룹 했는데 그것도 뭐 일본 때문에 좀 시끄럽죠.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내 목숨인데, 이 목숨을 내가 쥐고 있으려면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내가 불안 불안하니까, 차라리 내 목숨을 누구한테 바치고 나는 그 앞에서 없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데 그럴듯한 대상자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치고 자기는 편하고 싶은 생각은 인간의 그 유아기적인 의식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홀로 살겠다는 의식이 없고 대신에 엄마아빠가 다 해주고 자기는 그냥 엄마아빠 덕으로 그냥 놀기만 하면서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렇게 편해 보이고 그리워요.

 

그래서 나이가 많으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어르신네 어떻습니까? 남들은 고생을 하든 말든 자기 몸 하나 편하면 최고죠. 그렇잖아요? 생각이 일단 자기 몸이 여유가 있고 편할 때는 남 생각해주는 것처럼 돼요. 근데 자기 몸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남까지 생각할 그런 여력이 없어요. 인간은. 피곤해서 수련회 못 오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 몸에 대해서 내가 표준화된 자아죠. 그게 나와 나를 결별할 의사가 없다. 평생 내 몸을 꼭 쥐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항상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뭐냐 하면은 저 제자라는 것이 나한테 어떤 실제적인 이득을 줄까를 늘 견제한 거예요. 이 가룟 유다의 마음상태를 좀 더 알기 위해서 제가 세 명의 사상가를 거론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홉스이야기인데, 홉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기주의다. 이기주의. 이기주의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몸이 아니고 이거는 기계다. 기계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하나는 뭐냐 무조건 살고자 하는 거. 두 번째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일단 숨 쉰다 싶으면 움직이고 싶은 거. 이게 바로 기계고 인간이라고 본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살겠다는 의지와 일단 살만하면 움직거리겠다는 그 본능이 가장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홉스가.

 

그러면 이런 움직임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강호의 검투사처럼 전부다 나만 살고자 하고 그리고 움직이는 기계와 기계들의 그런 장터가 되겠죠. 만남이 되겠죠. 그러면 여기서 필히 뭐가 일어납니까?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 전쟁이 있는데, 나 빼놓고 다 적이에요. 그래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해서, 아군도 없어요. 내가 아군이에요. 나 빼놓고 나머지기는 다 적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뭐 넉넉하고 남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위로해줄 때는 이걸 잘 못 느껴요. 그런데 자기가 몸이 아프다든지 갑자기 생활비가 똑 떨어졌다든지 모든 친구들이 나를 떠났을 때, 그때 나한테 걸치고 있는 그러한 위장술들이, 은폐하고 있는 위장술들이 전부다 떨어져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달랑 그냥 움직이는 기계, 짐승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홉스는 말하기를 전쟁에서는 뭐가 없냐면 옳고 그름은 없다. 살아남는 게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 윤리도덕은 전쟁터에서는, 맹렬한 전쟁터에서는 찾을 이유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 이래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면, 만일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가 힘들잖아요. 힘들고 나보다 더 위세가 있고 돈 많고 더 힘세면 내가 눌리기 때문에, 그러면 나한테 손해가 되겠죠. 그러면 국가가 해야 될 일은 뭐냐, 국가가 이 전쟁에 개입해가지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있는데 홉스는 이걸 자연법이라, 자연에 법이 없는데 하여튼 자연법이라고 해요. 자연에는 법이 없어요. 법이 없는데 자연법이라고 해가지고 국가가 첫째는 뭐냐 하면 사이좋게 지내는데, 구체적인 방법이 두 번째로 뭐냐 양보하기, 이걸 국가가 개입해 주선하잖아요. 양보하기. 세 번째는 뭐냐 하면은 보다 넓은 범위의 관행은 용납하기.

 

이 세 번째가 좀 설명이 필요한데,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이 옳다 그렇다, 옳다 그렇다 할 때는 항상 좁은 의미,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 그것에 자기는 손해를 안 보려고 하잖아요. 근데 넓게 보면 변수가 많아지잖아요. 그러면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 같으면, 내가 그 일을 만드는데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한 적도 없고, 그냥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더라. 하나하나 따지려고 하니까 내 지식과 경험상 그것을 다 따질 수가 없어요. 이게 왜 이래 됐는지를. 그걸 관행이라고 하는데, 관행은 그냥 용납해주자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식사할 때는, 자식들이 같이 밥 먹을 때는 먼저 숟가락을 들지 말고 아버지가 드시면 하자.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그거 왜 해요? 왜 해야 되는데요?” 그렇게 따지잖아요. 그걸 따지지 말자. 그게 관행상 내려온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따진다고 알 수 있는 지식이라든지 지혜에 한계가 있어요. 하나하나. 이 선풍기 망이 없으면 더 시원할 건데, 왜 망이 있을까? 모르죠. 우리는 잘 모르는 거예요. 만든 사람은 이 망이 있어야 애들 손가락을 보호하고 하면, 사람들은 우린 어른들만 있으니까 이거 떼어버릴까? 이래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항상 인간은 자기 코앞에 있는 자기 편리만 생각하지, 두루 두루가 어느 정도가 다 두루 두루인지를 잘 모르잖아요. 그냥 용납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하느냐, 약속의 법을 만들어서 국가가 이걸 시행해야 된다. 그러면 우리는 국가의 말을 듣고 사이좋게 양보하고 용납하고 살면 된다. 이게 국가의 할 일이다. 이게 홉스의 이야기에요. 홉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짐승이고 이기주의고 그냥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기계고. 어떤 기계냐, 무조건적으로 나만 살겠다고 버티고 가만히 살아나면 또 움직여가지고 이렇게 치고 박고하는, 그러한 공격적인 본능을 이게 바로 인간이라고 홉스라는 사람이 주장한 겁니다. 여기에 뭐 의의가 있습니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걸 조정하는 대상이죠.

 

첫 번째 사상가는 홉스죠. 자, 홉스하고 가룟 유다하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유사점이 많죠. 뭘 고집합니까? 기본이 뭐냐 하면 내가 나와 결별할 의사가 전혀 없죠. 예수님을 팔아넘겼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예수님 저를 팔아먹으세요, 라고 안 했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들이 팔아넘겨지는 것을 그냥 수용했어요. “주의 뜻이라면 제가 죽음에 넘겨도 괜찮습니다.” 이게 사도들의 특징이었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나와 나 사이를 빠이빠이 했으니까. 결별했으니까.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 소원이 있었죠. 사도바울은 소원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뭡니까? 내 육체를 뭐로 봤느냐 하면은 내 육체를 옷으로 봤어요. 옷으로. 옷으로 봐가지고 옷을 홀딱 벗고 싶다는 거예요. 벗고 하늘나라에 영광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소원이었죠. 그러면 옷을 벗는다는 것을 두자로 말하면 뭘 의미합니까? 죽음이죠. 옷을 벗기 전에 매일 옷을 벗는 매일의 삶을 살았어요.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뭐냐 하면 육신 자체를, 이 신체 자체를 뭐로 봤습니까? 내 몸이 아니고 주의 신체로 본 거예요.

 

주의 신체라는 말은 주께서 관리대상, 주님이 처분하는, 주님의 손에 잡혀서 주님의 처분하는 대상으로 자기의 육신을 본 거예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어떤 것이라도 주께서 내신 거기다가 육체를 집어넣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사실은 옷이 아니고 옷 위에 입은 옷이에요. 옷 위에 입은 옷. 옷 위에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범죄하고 난 뒤의 아담과 하와거든요. 그러면 옷을 입음으로 뭘 줄이느냐 하면은 자기의 수치심을 줄였는데,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이 육신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이게 수치스러운 몸이니까, 이 수치스러운 몸을 내가 관리하지 않고 나와 결별하게 해주세요! 라고 한 거예요. 내가 결별하게 해달라고. “빨리 죽게 해주옵소서. 주여! 이 몸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이 몸 때문에.

 

그들은, 사도바울이나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가룟 유다도 이유도 원인도 모르지만 자기 육신을 견지하고 자기가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내 아픔을 알아? 이렇게 했죠.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아?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은 가룟 유다가 이런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오늘날 자기와 결별하지 않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입니다. 주부가 옆집 아줌마를 오랜만에 문 열면서 만나가지고 “아이고, 장에 가십니까?” “아, 예.” “잘 다녀오세요.” 이 말하는 바탕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니가 내 아픔을 알아? 니가 우리 집안의 사연을 알아?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아?’ 이게 전부다 양쪽 다 칼날처럼 내부에 깔려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자체가 고역이라니까요. 고역. 고역인데, 사도바울은 이걸 확장시켰죠. 그 확장시킨 것이 뭐냐, 이걸 가지고 형벌, 이 땅의 삶의 형벌. 이 땅은 이미 감옥생활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교도소입니다. 우리는 못 빠져나와요. 이 몸이 있는 한 못 빠져나와요. 이 교도소에서 율법을 줘서 죄목을 만들었죠. 없는 죄도 율법을 주게 되면 죄가 나타나요. 니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야 될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다. 합당하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이거면 돼요. “합당하니이다. 합당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했잖아요. “주님, 저 죄인이 맞죠?” 그러면 된다 이 말이죠. 형벌은, 벌이니까 어디서 옵니까? 죄에서 오죠. 벌은 죄에서 오는 거예요. 죄가 없는데 형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죄가 없는데 무슨 죽음이 와요? 우리가 죽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로마서 6장에 보면. 죗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죗값은 편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 아이고 아프다, 이게 아니라 살아온 모든 내력이 고역이라는 말이에요. 힘든 거예요. 아파요. 그리고 남한테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아픈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내 아픔을 몰라줘요. 애들 열심히 가르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퍼질 때에 남편은 그 아픔을 알까요? 니는 살림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까요? 둘 다 몰라요. 둘 다. 니가 내 아픔을 알아? 몰라! 둘 다 자기와 빠이빠이를 할 생각이 없어. 전부다 자기와 결별할 생각이 없어요.

 

가룟 유다를 욕하지 마세요. 가룟 유다를 왜 거론했겠습니까?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새끼로 가룟 유다를 배태하신 거예요. 범죄한 인간의 모델로서. 자기 품 안에서 가룟 유다를 딱 열두 제자 속에 심어놓은 거예요. 집어넣은 겁니다. 카드 쌓기 놀이에서 카드 하나 빼면 다 무너지죠. 베드로 뺐다고 무너집니까? 야고보 뺐다고 무너집니까? 열두 카드의 구조가. 아니죠. 뭐 하나 빼면 다 무너집니까? 가룟 유다 빼니까 다 무너졌죠. 모두다 가룟 유다와 동일한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과 달리. 예수님만 표준이고 나머지기는 예수님과 비대칭적이에요.

 

비대칭적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중복된 것 말고 여분의 것이 있다고 우기는 것이 비대칭적이에요. “내가 니하고 생각은 같지만 니가 모르는 내 생각이 따로 있거든.” 이게 비대칭적이에요. “니 나에 대해서 함부로 안다고 하지 마! 어디까지나 나는 나만의 개성이 있어.” 이게 비대칭적이에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과 비대칭적인 존재로, 모델로서 세워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과 함께 귀신을 쫓는 권능을 행했지만 결국은 예수님과 결별하는, 그러한 촉발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룟 유다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자.

 

자, 그러면 이러한 홉스에 대해서, 홉스의 주장을 아시겠죠? 인간은 전쟁 중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말을 들어라. 안 그러면 너는 괴물이니까. 괴물은 괴물이니까 국가의 말대로 서로 양보하고 잘 지내자. 여기에 대해서 너무 극단적이다. 좀 좋게 보자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그 다음에 사람이 존 로크라는 사람이에요. 존 로크라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사람은 더 괴물이에요. 뭐라 하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주셨는데, 주셨지만 사람마다 달라야 하는 이유는 각자의 노동의지, 노동하겠다는 의지에서 재산이 생기는데, 이 재산은 사유재산이다. 하나님께서, 신께서 뭘 줬을 때, 은혜를 주실 때에 노동에 개입된 사람의 이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재산이니까 이거는 본인만의 독보적인 재산이 돼요. 이게 사유재산이 되는 거죠.

 

이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 이래 되어 있어요. 아까 홉스는 뭐냐 하면은 개인 대 개인의 짐승적인 본심을 살기 힘들기 때문에 잘 조정하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고 했죠. 로크는 뭡니까? 개인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지 말자.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 돈이잖아. 재산이잖아. 재산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돈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은 경제에 속하죠. 존 로크부터 경제가 무엇보다 우월하냐 하면은 정치보다 우월한 거예요. 정치라고 하는 것은 뭐다? 경제를 잘 굴리게 하기 위해서 국가와 정치가 일한다. 이게 존 로크의 사상, 사고방식입니다.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존 로크는 자기에게 뭐가 신성한 겁니까? 자기의 돈이, 재산이 신성한 거예요. 신성하니까,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복속되고 누구의 종이냐 하면은 나는 신성하지 않지만 신성한 그 우상 같은 것을 나는 섬기기 위해서 나는 존재하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는 마구 희생되고 구박받아도 상관없다. 왜? 왜냐하면 돈은 나를 대행해주고 나의 구현체이기 때문에. 존 로크 이쪽에 의하면 돈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나 때문에 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귀해? 돈이 귀해? 돈이 더 귀해요. 내게 있는 돈이 더 귀해요. 내가 안 귀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뭔가 목숨 걸게 없으면 사람은 힘들어서 못 살거든요.

 

사람이 사는 보람은 내가 애써서 돈을 이만큼 모아놓았기 때문에 그 돈을 볼 때마다, ‘아! 잘 살았다. 나는 참 보람찬 인생을 살아구나!’ 이걸 느끼는 겁니다. 부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뭔가 허겁지겁, 미지의 X가 있는데 그 미지의 X가 뭐냐 하면은, 미지의 X에서 뭐가 나올 때 갑자기 여기에 마음의 쉼을 얻느냐 하면은, 노력했는데 돈이 생길 때, 갑자기 목돈이 생길 때 마음의 쉼을 얻는 거예요. 그래 저거야! 관절이 좀 아프십니까? 뭐 배탈이 나셨습니까? 갑자기 돈을 주게 되면 관절이 아파도 괜찮아요. 보람을 얻었어요. 이거 아파서 돈을 얻었으니까. 사람이 섬기는 것이 있거든요. 섬기는 게. 섬겼으면 나는 그 앞에서 작아져도 괜찮아요. 돈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것과 내 노동력이 결합해서 나의 가치가 결합해서 만들어낸 게 재산이에요.

 

그래서 “댁의 자녀가 몇 명입니까?” 라는 그 질문이 다가 아니에요. 우리는 뭣도 모르고 그 질문이 다인 줄 알고, “세 명입니다.” “걔들 요새 뭐 합니까?” 이게 질문의 끝이에요. “돈 얼마나 법니까?”라는 게. “지금 하나 취직하고 둘 놉니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명확해져요. 명절날 사람이 언제 기가 죽고 언제 좌절하고 살맛을 잃는가? 돈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거예요. 건강도 아닙니다. 돈을 잃을 때 전부를 잃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큰소리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인간들의 사회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본주의사회에요. 이걸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게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 속에서, 이게 신의 세계거든요. 이게 천국이거든요. 이 속에서 내 위치가 어느 정도가 되느냐, 거리가 조정이 되는 거예요. 나는 거기에 가까이 있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고 이 자본에서 멀어지면 내 인생은 더 분발해야 될 인생이고. 아직 먼 인생이고. 남 앞에 내세울 수 없는 인생이고. 그런 겁니다.

 

자, 그러면 한번 더해봅시다. 홉스+존 로크, 여기에 한 사람이 더 있는데, 루소라는 사람입니다. 루소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더해봅시다. 사상가 루소. 시대적 순서는 홉스+존 로크+루소입니다.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나를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서 내가 있다.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이 사람도 재산이 중요한 것을 알지만, 재산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은 국가가 없이는 내가 없으니까, 나보다 더 국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국가가 법으로 내 재산을 보호해줄 때, 비로소 나는 이 국가의 국민으로서 살 이유가 생긴다는 겁니다. 국가가 있을 때.

 

그래서 존 로크는 정치보다 뭐가 세다? 경제가 더 세지만, 여기 루소에서는 정치가 경제보다 더 세요. 경제가 잘 돌아가 줘야 나를 보호하는 국가정치가 제대로 형성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주의입니다. 이 존 로크를 가지고 소극적 자유라고 하고 루소는 뭐 적극적 자유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적극적 자유. 공동체가 있어야 내가 산다는 적극적 자유. 같은 자유지만 둘 다 이런 차이가 있어요. 존 로크는 “국가가 내 재산만 보호해주고 더 이상 침해는 하지 마세요.”라는 뜻이고, 루소는 국가가 잘되면 나의 소득은 올라간다는 쪽이고. 차이점은 드러났죠. 홉스는 돈보다도 인간 자체가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거예요.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형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다 더하게 되면 이게 바로 가룟 유다가 돼요. 왜냐하면 관심이 뭐냐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 나는 기어이 나를 가지고 가겠다는 뜻이에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느냐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와 결별을 안 한 상태에요. “주님, 저가 저를 넘어뜨려주옵소서.”라는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저를 세워주옵소서.”라는 것이죠. 유 레이즈 미 업 쏘 아이 캔 스탠던 마운틴스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행진이라는 노래나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런 노래를 전부다 한번 보세요. 인간을 업up시키게 만드는데, 나의 좌절된 것에 용기와 품위를 높이는데 힘으로 자기에게 힘을 쏟아 부으라는 노래가 아닙니까? 좌절했을 때. 할 수 있는 거야! 뭐 이런 거요. 주여, 내 손 잡아주세요. 이런 거. 실로암 그런 가스펠 송이나.

 

성경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전부다 나를 미워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주변에서 예수 뭐하노? 나 안 키워주고.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야지. 전부다 그쪽이에요. 그것은 내 목숨을 내가 계속 간직하고 싸고돌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면 내 목숨을 버릴 곳이 없어서 늘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제 목숨을 바치라고 하고 싶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이 나한테 뭘 해주게 되면 나는 목숨을 바치겠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 같은 경우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한 나는 주님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내 쪽에서 결정내린 마음자세. 나를 이쁘게 봐가지고, 나를 쪼개는 분이 아니고, 나를 이쁘게 봐서 나를 구원해줄 의사가 없다면 내 쪽에서도 나는 당신을 차버리겠습니다. 그런 마음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나중에 가룟 유다가 뭐합니까? 자살하죠. 자살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후회한다는 뜻이에요. 자기 결정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뜻이거든요. 후회한다는 것은 후회를 통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후회는 하지만 내 것을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 여러분들은 무엇과 비교해야 하느냐 하면은,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와야 해요.

 

자, 이것이 인간이라면, 그러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주느냐 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오늘 본문은 성령이 오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14장 10절을 봅시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절,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라고 되어있죠. 거기에 대해서 뭐 누가 말릴 사람도 없고요. 말릴 생각도 없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위치, 내가 누군지를 지금 예수님 앞에서 전혀 모르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기가 자기에게 신경을 쓰는 그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애가 있는데, 집에 골목이 있다면, 집도 있고 이래 골목이 있다면 이 세 살, 네 살 먹은 애들의 세상 끝은 어디입니까? 이 골목 끝이 세상 끝이에요. 저 밖에 나가면 귀신이 있을지 몰라요. 어릴 때 기억은 항상 이 골목 안에서 노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한 일곱 살 먹었을 때에 어디 뒷산이나 앞산에 가서 봅니다. 보게 되면 지평선에 있는 집들이 보이겠죠. 그러면 이 지평선 너머는 뭡니까? 이건 미지의 세계에요. 자기가 아는 세계는 이 세계 전부에요. 그렇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알고 있는 범주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을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걸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문장을 하나 복사를 해가지고 왔으니까 그 문장을 하나 제가 각색해드리겠어요. 그 문장은 뭐냐, 국민교육헌장입니다. 1965년에 나온 국민교육헌장인데, 국민교육헌장에 이래 되어 있어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기억나시죠?

 

이걸 예수님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기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 자신이 사기꾼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범주가 좁기 때문에. 골목 끝과 안 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일곱 살 되어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본 그 지평선이 전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나를 정립합니다. 그게 사기꾼이에요.

 

끝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기꾼은 뭐하느냐 하면은 그 뒤에는 각색할 필요가 없어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이게 사기에요.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이게 사기라는 거예요.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게 사기에요. 이게 가룟 유다에요.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우리의 사기꾼이 나아갈 길을 밝혀 사기꾼의 지표로 삼는다. 이게 오늘날 교육입니다.

 

사기가 사기를 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죽음의 세계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우리 자신을 정립하려고 하고 내가 누구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 바깥의 세계에 가면 겁을 내요. 두려워해요. 그 안에서 자기는 나름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그 바깥의 세계의 주님 보시기에 이게 사기꾼이죠. 오늘 제목을 사기꾼으로 할까?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광주강의20190719a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hwp (63.5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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