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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10:05:07 조회 : 68         
4강-호 2장 1-4절(광야출신)19082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195.253)
4강-호 2장 1-4절(광야출신)1908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5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1-4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호세아를 시작하면서 음란한 여자가 등장하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 음란한 여자와 혼인하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하지요.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상당히 낯설게 느끼는 것이 있어요. 보통 음란이라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몸 팔아서 사는 사창가의 여인네들에게나 해당이 되고, 일반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보통 가정에서는 음란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는 싸잡아서 그 나라자체를, 이스라엘나라자체를 음란한 나라, 음란한 족속이라고 규정을 하니까 우리가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그 감각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는 그 감각이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호세아에서 이스라엘 자체가 음란하다고 하니까 벌써 시작부터 호세아에 대한 해석이 난감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욕망의 쾌락에 정신 빠져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오순도순 가정꾸리고 직장생활 하거나 농사지으면서 살아보려고 땀 흘려 열심히 애쓰기 때문에 성적인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싶어도 신경쓸 시간조차 없는 처지잖아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호세아에 기록된 그 당시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은 어디 자식이 없습니까? 아내가 없고 가족이 없겠습니까? 아내와 가족이 있으면 쾌락이니 그런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지 일반사람들은 밥 먹고 하루 사는데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음란이라는 개념을 들고, 그런 컨셉을 가지고 계시를 구성을 해서 다가올 때에 도대체 그 선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단박 들어오지를 않아요.

1장에서는 그것이 단박에 안 들어왔는데 오늘 2장에 들어오면 아, 이런 차원에서 나라 자체를 음란한 여성으로 비유한 이유를 여러분이 감을 잡을 겁니다. 그게 뭐냐?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음란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하는 일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호세아 가정, 특별한 가정이죠, 그 특별한 가정, “너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라.”라고 시작을, 하나님의 계시의 촉발을 호세아가정부터 시작을 시킵니다.

시작을 시키면서 음행했다는 컨셉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계시가 유포되고 퍼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호세아의 계시에 의해서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다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왜 이래요?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반발이 나왔을 때 그 반발을 가지고 호세아는 “너는 이제 걸려들었어. 그게 바로 음란이야.”라고 지적을 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사람이 점잖은 사람인데 “너 음행했잖아.” “나 음행한 적 없어.” “그게 바로 음행이야.” 이런 식의 좀,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닌 식, 윽박지르는 식으로 호세아가 계시를 들이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너무 억지가 아니냐고 했을 때에 2절 끝에,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듣는 사람들은 기가 찬 거예요. 음행한 적도 없는데 음행을 제하라니 “나보고? 다른 사람보고 해야지. 사창가의 그 여인네들에게 해야지. 난 아닌데 왜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야. 번지수 잘 못 짚었어.” 이러고 싶은데 3절에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여기 광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광야는 어떤 것을 광야라고 하느냐 하면, 3절에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여기서 윤곽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볼 때 뭘 로 보느냐 하면, 목말라 죽게 된 자들을 내가 이 땅, 약속의 땅까지 데려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말라 죽어도 괜찮은,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작자들을 내가 약속의 땅까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까지 데려왔을 때에 그 데려왔던 그 취지를 만약 잊어버리면, 모르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식에 뭐와 같으냐? 하나님이 남편이라면, “그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지만 아내는 그 남편의 사랑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그 차원, 그 생각과 동일하기에 나는 음행, 음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겠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자, 그러면 더 쉽게 가겠습니다. 제가 물을 테니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성경에서 여러분들의 몸의 순수, 순결을 원합니까? 안 그러면 여러분의 몸의 희생과 봉사를 원합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 중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이 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착하고, 죄를 적게 짓게 되면 나를 하늘나라에 흔쾌히 받아줄 것이라고 자기 몸의 순결과 순수에 온 전력을 다 해요. 모든 힘을 거기에 다 쏟아 부어요.

‘비록 돈 벌기 힘들지만, 빡빡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지조나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성도답게 살려고 나는 정결한 신부로 살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그런 것이 계속해서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수 믿습니다.” 하거든요.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우수한 존재인가를 한평생 살아가면서 증명해 내겠다는 거예요.

‘나 이 정도였다. 세상은 악하고 다 더러운데 그 가운데서도 나는 이만한 몸을 지켜냈으면 내가 대단한 것 아니에요?’라는 이야기를 하나님께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친구들 다 타락하고 예수 버리고 갔지만 그러나 그러한 시험과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이정도 버텼으면 저 애쓴 겁니다.’ 자기 자신의 순결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는 마지막 그라운드라 하지요.

내가 하나님의 지적 앞에서 “그래도 이 정도는 내가 노력했습니다.” 하는 그 변명거리와 최선을 다했다는 그라운드를 마련하는데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음란이고 음행입니다. 비교할 것을 잘못 골랐어요. 타인,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했어요. 우리는 이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 그냥 호세아목사님이라 합시다, 호세아 목사님가정하고 내 가정을 애초에 비교 안한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호세아가정, 호세아 자기는 정숙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기 싫어서 그랬습니까?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모르고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그 시대에 알려주기 위해서 호세아 가정부터 계시의 발단이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호세아가정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호세아목사님이 음란한 여자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 지시에 의해서 혼인을 한 겁니다.

그 취지, 그 미묘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지요. 세상과 짝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호세아 당시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고, 우리는 여호와 믿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너희는 세상과 짝했어.” “우리가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데 세상과 짝할 리가 있습니까?” “너는 네 본성을 못 속여,” 본성을 못 속인다고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2절에 나옵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그 어미의 그 자식이니까.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주님께서 과도하게 나옵니다. 이게 문서선지자의 특징이에요. 지난 수련회 제 1강에서 했습니다. 과도하게 인간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식으로 나와요.

터무니없이 가만있는데 툭 치고 들어오는 식으로 선지자가 하는 거예요. 별로 잘못했다는 의식도 없는데 “너 이정도로 망했잖아.”라는 식으로 푹 쑤시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주께서 너무 심하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나오면 이사야 6장의 경우에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더 세게 나오는 거예요.

여기 보면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얼굴부위와 몸통부위, 특히 여자의 유방이라 하는 것은 외면적으로 가장 돌출된 부분이잖아요. 몸통을 대표하는 거예요. 얼굴부위와 몸통부위를 의도적으로 분리시킵니다. 얼굴은 뭐가 나오는가? 표적이 나와요.

몸통은 뭐냐? 얼굴에 그런 표정이 나오도록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속성, 육신의 속성, 육체의 자연적인 본능이 올라오게 되면 얼굴 표정으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 했지요. 하나님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복음 확 들이대 버리면 얼굴빛이 달라진다고요. 악마의 눈빛으로 되돌아온다고요. 악마의 눈빛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태복음 6장 22,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네 속에 있는 그 어두움이, 감추고 있는, 드러나지 않은 그 어두움이 얼굴로 올라오고 결국은 눈빛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눈빛이 밝지 못한 사람은 속에 어두움이 꽉 차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눈빛이라는 것, 눈은 마음의 창이니까, 마음이 어떠하다, 하는 것은 눈빛을 통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밝지 못하다는 말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다는 거예요. 정신이 딴 데 가 있다는 것은 좀 어렵지만 제가 약간 설명해 드리면 ……,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목사님이 음란한 아내를 만나서 혼인했을 때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에요. 누가 봐도 이것은 미쳤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이 일부러 조성했습니다. 그럴 때 음란하게 소문난 여인과 결혼한 호세아의 태도, 행동을 보고 옆집 사람이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혀를 차게 되고 ‘저 사람이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정상이니까. 그러나 호세아가정에서 일어난 그것이 진짜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뜻이고 진심이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사람은 호세아 가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교만이에요. 그게 교만이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고 눈빛이 벌써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는가 하면, 그 시대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모르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께서 호세아가정에 그런 계시를 보여줘도 우리는 ‘뭐가 문젠데?’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호세아 전체의 내용이 뭐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들은 세상과 짝했다.” 하는 거예요.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더불어 희희낙락 정신이 거기에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겁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문제가 있구나. 내가 잘못되었구나. 고쳐야 되겠네.’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니면 반발할까요? “세상과 짝하면 어때서!” 이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분위기가 호세아가 계시를 전하는 북이스라엘의 상황이에요.

말 좋게 해서 들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들을 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다는 거예요. 왜? 사람이라 하는 것은요. 친구 따라가기 마련이에요.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어려운 문자 써서 죄송합니다만 끼리끼리 논다고.

사람이 끼리끼리 논다면 ‘지금 이런 나의 태도나 행동이 문제 있는 것 아니야? 문제 있어.’라는 그 자체를 자기가 간파를 하지 못합니다. 선지서의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사야 3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16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만큼 귀족들이 여유 있게 산다 그 말이지요. 18절-24절에 보면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반지)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 당시 유다나 이스라엘이 이미 다 수입품이에요. 쉬운 말로 인천공항에서 들어온 수입품들이에요. 롯데백화점이나 신세계 수입코너에 다 있어요. 무역을 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과 짝하는 것이 이미 일상화된 거예요. 분위기가 그쪽으로 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언제 돈 벌어서 저 사람처럼 잘 살아보나. 언제나 저렇게 사치품으로 몸을 포장을 하고 향수를 몸에 붓는 식으로 살아보나?’

그게 유행이 되고 그 나라의 대세가 된 거예요. 그 나라의 대세가 되니까 ‘그게 뭐 어때서? 돈 있어서 돈 쓴다는데, 내 돈 내가 쓴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세상과 짝하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지적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에스겔 28장에 그 당시 가장 무역으로 돈 많이 번 나라가 두로라는 거예요. 지금의 레바논의 베이루트의 남쪽에 있는 지중해 해변가 도시에요. 휴양도시입니다. 에스겔 28장 2절에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47장 8절에 바벨론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오늘 오신 분들은 사치의 근처도 안간 얼굴들이니까 해당이 없어 보이는데, 우리가 사치를 안했으니까, ‘그까짓 외제 그거 뭐 별로 안 좋더라.’ 하지만 한번 사치를 해 보세요. 좋아요. 역시 좋은 게 좋다고요.

그리고 그 좋은 위치에서 내려오기 싫어요. 거기서 내려오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 그런 마음 든다니까요. ‘내가 이 정도 누리는 것은 그 정도 내가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정도 되기에 이만큼 내가 누린다는 겁니다. ‘시기하지 말고 너희도 노력해서 나만큼 살아라.’이게 일방적인 사람들의 그 시대상을 반영해주는 겁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딸 보냈다. “욕하지 마. 너도 민정수석 해봐. 그런 것 다 되지. 뭘 시기하고 그러나? 너도 그 자리에 있으면 ‘누려~’ 하면서 누릴 건데?”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그러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사치를 좋아하느냐? 외국이 잘 살거든요. 잘 사는데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원하는 신이 있어요. 그게 바알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하, 신을 바꿔보면 잘 사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이라 하는데 사실은 신은 헛것이에요. 이 세상에 신이라는 것이 없고 자기 자신이 신을 지금 대행하고 있는 겁니다.

신은 이스라엘에게만 있어요. 다른 데는 신이 없어요. 신이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최고의 자리가 먼저 있다고 상상한 어떤 인격체지요. 내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렇게 되고 싶어요. 성경이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곧 신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진짜 신은 이스라엘에만 계시를 했고 나타냈지 다른 민족에는 진짜 신이 안 나타났어요.

다른 신은 뭐냐? 나를 위대하게 만들고, 나를 부자 되게 만드는 그런 신들을 자기들이 만들어놓고 그냥 섬기는 거예요. 자기 정당화. 내 욕망, 내가 잘 먹고 잘살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 우샤우샤, 그걸 인정해주고 긍정해줄 수 있는 신. 그러니까 그 신과 짝짜꿍이 된 거지요. 오늘날 한국교회 예수와 비슷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하고 바르게 성실하게 살았더니 신이 복을 줬다. 왜 꼽냐? 너도 그렇게 노력해봐라. 하나님이 복 주지.’ 이게 아까 제가 물었던 것 있잖아요. “과연 내 몸이 잘 되는 몸이냐? 아니면 희생과 봉사의 몸이냐? 방향이 어느 쪽이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희생과 봉사의 몸이었어요. 자기 몸 하나 남들에게 부러움 사는 그런 몸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극단으로 가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순수한 호세아의 가정에 음란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시한 거예요. 음란이라는 것. 음행을 그 가정에, 목사님의 가정부터 음행을 개시한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시에요. 이 호세아 가정에 일어난 그 일이 ‘아니다. 나는 아니야. 난 음행하고 관계가 없어.’ 하는 너희들을 일괄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저쪽이 다 음행을 하니까 그 음행을 대변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호세아가정에서 음행이라는 사건이 벌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의도적으로 낳게 했고, “그 자식은 내 백성이 아니다. 이젠 긍휼을 기대도 하지 말라.”

다시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가정에 특이한 계시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서 그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낯설게 만들어요. ‘미쳤나? 왜 저래?’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기 이야기인줄 모르고 극단적으로 반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음행이 음행답게 노출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예수님이 너무 오버한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고백이 사실은 우리가 외쳐야 할 내 이야기라는 사실을 먼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준 거예요. 참된 계시가 십자가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는 정신도 못 차려요. 우리는 변명하기 급급하니까. “내 몸 순수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자랑하기 바쁘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음란, 음행이라고 규정된 이 우상 섬기는 세상의 특징이 한마디로 뭐냐? 그것은 예측가능 한 세상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음란이라는 것은, 교만을 자아내기 위해서 인간의 몸의 속성에서 올라와서 얼굴로 퍼진다고 했어요.

그 음란이 개인적인 쾌락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음란의 범위가 확장돼요. 뭐로 확장되느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예측 가능한 세상으로서 우리가 그걸 만들어내겠다고 시도하는 그것이 무엇과 대치되느냐 하면, 광야에서, 사막에서 예측되지 않는 방식으로 약속의 땅까지 옮겨놓으신 그 원리, 원칙과 대치관계에 놓이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있던 원주민들은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우리의 머리나 이성으로서는 정복할 수가 없어요. 예측이 안돼요. 도저히 예상이 안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6개월 동안을 광야에서 해매고 있으면서도 이제 와서 도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거예요. 왜? 애굽은 예측 가능한 거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고,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이런 결실이 나온다. 예측 가능한 세계에요.

예측가능 한 세계는 구태여 여호와하나님의 방식이 도입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그 세계는 이스라엘 주변을 장악하고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있는 이방세계, 그들은 신이 없다고 했지요. 바알이라고 하지만 바알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자기들이 상상해서 이성으로 지어낸 신이니까.

이사야 45장에 보면 우상은 다 헛것이라 했어요. 헛것이니까 없는 거예요. 신이 없는 입장에서 인간이 신을 대행하는 겁니다. 인간이 신을 대행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내 노력으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그동안 호사스럽고 힘 있는 세상을 일궈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두 자로 문명, 또는 문화라 하는 거예요.

그 문명은 4대산업을 통해서 이뤄지거든요. 지금은 또 제 5차 산업이지만. 인터넷 사업, 정보산업까지. 미래계획을 내가 세우기 때문에 내가 신 앞에 스케줄을 짜서 나대로 하겠다는 것 그게 정상이잖아요. 그러나 호세아 3장을 다시 보면 광야의 특징이 뭐냐? 목말라 죽게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살았는데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아니라 ‘애초부터 너는 죽었어야 돼.’ 어디서? 죽으라고 광야에 집어넣은 거예요. 물도 없지요. 양식도 없지요. 그것은 죽으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너 이스라엘은 너 스스로 도저히 살 수 없고 죽어 마땅한 존재다.” 계속 그것을 주입하고 확인시켜줘서, 그러면 죽은 형편에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그들이 하루하루 살아간다고요. 왜? 매일같이 만나를 주니까. 여러분, 만나주는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모독입니다.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 만나가 필요 없어요. 내가 농사를 지어서 내 노력으로 살면 하나님이 주실 필요가 없다고요. 그러면 내 자존심이 살잖아요. 나는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았다고. 이 세상이 다 그런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은 뭐? 이제 내가 잘 살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을 도와주는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것은 세상신이에요.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 성령, 성부 하나님은 아예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놓고, 도저히 살 수 없는 인간을 살려내는 방식으로만 거기에 하나님 자신의 뜻을 거기에 펼쳐내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우리가 언제 감을 잡느냐? 바로 목말라 죽었을 때지요.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양식이라든지 물 한 방울조차 그것을 내가 체득할 있는 권한도 자격도 없다. 왜? 나는 그냥 죽어 있으면 되니까. 왜?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로 그런 방식이 되어야 누가 사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희생하심이 살아요. 이 말이 어렵습니까? 그러면 더 쉽게 하겠습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 다 살았다고 자부했고 거기에 히브리인들도 살았어요. 출애굽되기 전에는. 다들 산 사람이 그날 밤에 곤히 잠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만큼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잠들 때 ‘내일 아침에 또 잠에서 깰 거야.’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를 한 번도 그들은, 히브리인이나 애굽사람이나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라고 물어본 적도 없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군지를 엑스레이 사진 찍듯이 확인해 본 적도 없어요.

주님 쪽에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니까 ‘야, 어린양의 피 아니면 우리는 벌써부터 애초부터 죽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것을 그 때 안 겁니다. 어린양의 피가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가 죽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여호와와 동행한다는 조건하에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스라엘사람들이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행한 여자, 음란한 여자와 혼인하게 해서 자식 이름도 딱 지정해 줬어요. “내 백성 아니다.” 누구 들으라는 이야기에요. “긍휼을 받지 못한다.” 들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약속의 땅에 집어넣었건만 너희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주위의 나라가 너무나 부유해서 잘 살고, 너무 잘 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최고 자리에 앉았다고 교만 떨게 만드는 그 신, 그들의 조작된 신, 거짓된 신, 있지도 않은 그 신을 너희들이 선호하면서 그들처럼 잘 살아보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라고 했고 그 잘사는 방법은 뭐냐?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들이 예측한대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세상으로 전환시킨 겁니다.

예측가능 한 세계, 그게 바로 음행이고 음란한 세계에요. 음란의 개념이 확장된 겁니다. 개인적인 욕망의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전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 다시 말해서 하나님여호와의 구원방식이 빠져 있는 세계, 호세아의 계시가 없는 세계, 그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고 음행한 세계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에스겔 16장 25절부터 나오는데요. 이거 19금이에요. 여기에 미성년자 없다고 치고 읽습니다. “네가 높은 대를 모든 길 머리에 쌓고 네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여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행음하고 하체가 큰 네 이웃나라 애굽 사람과도 행음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도다.”

그 다음 27절에 블레셋과 음행하고 28절에는 앗수르사람과 행음하고, 29절에, 그것도 부족해서 갈대아, 바벨론이죠, 갈대아사람과 행음하고 그래도 족한 줄을 모른다고. 잘사는 나라가 부러워서, 그들이 쓰는 화장품, 그들이 쓰는 가방, 그들이 사는 주택, 생활 스타일, 이게 부러워서 그걸 채우는데 급급한데 아직도 그 욕망을 다 못 채웠어요.

심지어 돈 까지 주면서, 그런 나라가 부러워서 그 나라 가서 자진해서 음행을 하고 돌아왔다고 에스겔 16장에 나와 있어요. 그리고 왜 잘사는 나라가 부러우냐 하면, 그 잘사는 나라가 현재 여호와 믿는 이걸로 채울 수 없는 욕망, 이걸 성적욕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성적욕망을 마음껏 다 채워주기 때문에 그게 부러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자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이 회개할까요? 미쳤어요, 회개하게? 안합니다. “세상 이렇게 살면 좀 어때서!” 하고 반발이 나올 거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광야의 일을 끄집어내는데 이 광야 이야기가 이사야 40장 4-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대로가 나오는데 어떤 대로냐 하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한 막이 끝나면 다음 막을 위해서 무대를 재설치하지요. 모든 배치를 움직이면서 재설치 하듯이 산은 깎여지고,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아져서 똑같이 만든다. 똑같이 만든다는 그것을 이사야 40장 5절, 6절을 제가 읽어드렸지만 7절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 전부가, 소위 미국, 일본, 잘산다는 유럽 모두가 풀이요, 그 풀에 난 꽃에 불과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그 위에 휘파람처럼 날아가는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할 것이다.’그 말씀을 너희 유다나라에 준다는 말이지요. 이사야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7,8)

모든 것이 음란하니까, 모든 것이 인간이 자기가 예측한 욕망을 위해서 질주하고 있으니까요. 그 방식으로만 자기 삶의 스타일이 이미 정해졌어요. ‘나는 죽었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산다. 어린양의 피로 산다.’ 그거 없어요. ‘내 인생 내가 살지 뭐. 아쉬울 때나 도와주소.’ 그런 식이에요. 아쉬울 때나 도와달라고.

이러한 이사야의 광야의 예언은, 누가복음 3장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등장하는데 그게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은 그 눈앞에 서울대 나오고 연대 나오고 그런 것 다 필요 없어요. 스카이고 뭐고 간에. 요새는 그냥 스카이가 아니고 조카이랍니다. 조국스카이. 필요 없어요, 전부 다. 몇 평에 사는지 다 필요 없어요. 전부 다 광야의 풀 같아요.

“이 풀들아. 소리를 들어라.”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그 소리가 요한복음 8장 24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내가, 이 예수 내가, 예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 이 모든 세상을 지적질 하는 그 말씀을 다 모아놓은 것, 응축된 것이 나 예수라는 것을 너희들이 믿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죄 가운데 죽으리라.

그러니까 이런 마지막이 올 때까지 내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그 피 앞에서 ‘아, 나 죽은 자 맞군요. 음란한 자 맞군요. 내 인생 내가 계획한대로 가려고 세상적인 그 원리와 원칙만으로 살아왔군요.’라고 일찌감치 파악하라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 쳐다보면서. 호세아거든요. 예수님이 호세아의 말씀의 완성이잖아요.

호세아 보면서 ‘아, 내가 하나님의 백성 아니군요. 내가 긍휼을 받을 그런 권리는 없군요. 내가 바로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도 그게 뭐 어때서, 어쩌라고, 그런 식으로 대들고 반발했던 그것이 죄 맞군요.’라고 진즉에 미리 아는 사람은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나를 믿지 아니하면 지금부터 마찬가지고 끝에도 죄 가운데 죽으리라. 요한복음 8장 24절에서 주께서 그렇게 결론내립니다. 나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죄 가운데 죽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끝내면서, 그러면 호세아 내용이 뭡니까? 어린양의 피를 믿고 흔들리지 마세요. 나의 순수, 순결. 아예 그거 예상하지 마세요.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내 몸이 내 맘대로 안돼요. 복음이니 십자가니 해도 내 몸은 내가 예측한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안되면 속에서 올라와서 화를 내는 거예요.

화낼 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주신, “네가 목마르지 않으니까 네가 좀 여유 있다 그 말이지? 지금 집에 생수 많이 사놨다는 그 말이지? 광야에 집어넣어버린다.” 내가 아무리 음행 어쩌고 해도 물 없이는 못살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낮은 자리가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이 주시는 물 없이는 못사는 이미 죽은 자라는 그 위치, 그 자리까지 내려가라 그 말이지요.

내려가면서 ‘어린양의 피로,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우리가 살았구나.’ 그것, 그 원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백성 아니라고 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2장 1절에서는, 이제는 내 백성이라. 그러니까 백성 아닌 것을, 세상 자식인 것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내가 호세아를 보내서 만들어내겠다. 이것이 2장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건성건성 살았습니다. 그저 나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천국 넣어줄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사막이고 광야인 것을 놓쳤습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희생을 알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인 것도 모르고 그저 내 야욕만 채웠습니다. 주님, 십자가 피를 잊지 않고, 어린양의 피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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