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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14:21:38 조회 : 104         
[시간의 정체] 서평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시간의 정체] 군지 페기오- 유키오 저 박철은 역 그린비(서울:2019)

인지과학에서 시간은 어떤 식으로 생각할까?

저자는 인식의 착오를 통해서 시간을 규명한다. 인간의 신체는 늘 세계를 조작한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나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 차이를 조정하려고 시도하면서 여기에서 시간이 발생된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나무와 숲과 비교해보자. 숲은 나무를 단순히 한데 모은 것이 아니며 전체성을 갖고서 통일적 인상을 이룬다. 숲을 생각하는 순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개성은 은폐된다. 그래서 나무의 집단이 숲이 아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대상으로 선택했을 때, 숲은 그 선택된 한 그루의 나무와 쌍을 이루는 전체가 되며 배후를 만들어 낸다. 대상과 배후라는 나무와 숲의 대비는 ‘나무 집단’이 곧 ‘숲’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숲으로 바뀌게 했다.

어떤 대상을 골라내는 것과 그 이외의 것을 배후로서 숲으로 보는 것은 독립적이지 않다. 고른 것 이외의 것을 적극적으로 무색화하고 숲으로 일방적으로 간주하는 순간, 선택된 숲은 대상화된다.

나무로서 명확한 윤곽을 가진 것으로 시점이 이동할 때 여기서 ‘과거’가 만들어지고 숲이라는 모호한 것으로 시점이 옮겨질 때 ‘미래’가 만들어진다. 나의 존재로 인하여 새로운 경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숲을 봄으로써 나무라고 여겼던 그 시점은 과거가 되며, 반대로 나무를 주목하다가 숲을 생각하면서 여기서 미래가 생성된다.

이처럼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통해서 거기에 있는 실재와 주관적 해석이 어떤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다가온다. 이것은 늘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미 거기에 있는 실재물이라 불리는 것조차 상대적인 실재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역시 거기에 있는 실재와 주관적 해석의 혼합물이다.

그렇다면 해석 이전의 것으로 상정되는 사건의 계열, 역사라 하는 것도 이미 어떠한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사건의 계열로만 내용으로 할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 사건이 순서 계열(B계열)과 시간 양상의 계열(A계열)이 있다.

운동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을 구분해야 한다. 운동의 흐름은 사물이 주체가 된다. 이것이 B계열이다. 이에 비해 시간의 흐름이란 ‘지금’이 흘러가서 현재, 과거, 미래라는 동적인 계열을 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A계열이다.

인간은 동일성을 갖추고 있고 그 관점에서 사물의 변화와 추이를 읽는다. 그러나 이 동일성 원리에 경계가 잠재되어 있다. 동일성이란 X와 ‘X이다’라는 이중성을 같은 것으로 겹쳐서 보는 것이다. 이는 곧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나타나게 한다. 그런데 동일성은 비-동일성과 만남으로서 의미가 생기는데 이 의미는 방어적 성격을 띠는 의미다. 나의 동일성을 기어이 사수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X와 ‘X이다’의 원리는 내포와 외연이 단 하나의 관계로서 서로를 규정하는 것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예컨대 ‘사과’의 내포는 붉은 것, 단 과일이라는 것 등의 성격에 의해서 규정될 것이다. 외연은 이 성격을 만족하는 구체적 대상으로서 채소가게에서 팔고 있던 그 사과나 테이블 위의 쟁반에 감겨 있는 이 사과가 된다.

내포도 외연도 모두 같은 사과 개념을 규정하는 요소이고 그런 한에서 일치를 시도하게 되는데 이 시도를 통해서 ‘지금’을 만들어 낸다.

이 ‘지금’에 대해서 ‘주관’으로부터 시작해서 ‘객관’으로 나아간다. ‘주관’에서 보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 동시적이지 않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현재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보는 ‘지금’은 단지 한 점으로 인식되면 그로 인해 과거, 미래는 동시에 정렬된다.

인간의 신체에게 있어 ‘현재’는 이 주관적 현재와 객관적 현재를 다 나타낸다. 주관적인 이 ‘나’의 체험이 A계열(사건)이고 이 A계열에 탁월하게 앞서서 ‘나’를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는 체험이 B(양상계열)이다.

실제로 뇌에서 객관적 시간, 주관적 시간이 코드화되고 끊임없이 調停(조정)된다.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는 ‘양자 얽힘’ 현상을 가지고 이 주관적, 객관적 시간의 조정을 설명할 수 있다.

양자 얽힘 현상이란, 입자가 오직 즉각적인 주위 환경에 의해서만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표준 물리학의 ‘국소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현상으로 “유령 같은 원격작용”이라며 핀잔 받았던 이론이지만 실험을 통해서 도리어 증명이 된 물리 현상을 말한다.

양자론의 논리는 타입type과 토큰token의 쌍으로 진행된다. 타입이란 일반화된 개념을 말한다. 토큰이란 해당 개념의 구체적 대상, 개체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태란 모든 속성(물리량)의 목록이다. 소박하게 생각해서 물리상태는 단 하나로 결정지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를 고전물리론에서 통할 이야기다.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생각하는 상태는 하나로 결정되지 않고 확률분포로서 기대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 관점이 도입되어야 뇌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의 조정을 설명할 수 있다.

양자론은 파동함수의 중첩으로 양자상태라 불리는 물리상태를 규정한다. 그것은 상태의 일반화, 즉 타입적 용어다. 그 중첩은 관측의 결과로 볼 때에 도저히 융합 불가능한, 즉 토큰의 확률적 중첩을 의미한다. 어떤 물체에 ‘한 곳, 거기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말하는 것이 고전물리학 관점에서 볼 때는 이상한 발언이 되는 것이다.

특히 타입과 토큰의 관계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인과(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이론)론과 숙명론의 대립 도식과 결부시켜 시간 현상을 따져 본다.

인과론자와 숙명론자가 논쟁할 때 타입과 토큰의 논쟁이면서 이 논쟁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 조정이 진행된다.

예를 들면, 제 2차 세계대전 때 런던은 독일 공군의 격심한 공습을 받았다. 런던 시민을 폭격 지점의 분포에서 어떤 경향을 확인하는 등 폭력에서 피할 다양한 방어책을 취했다. 그들은 방어책을 취하면 살 수 있다고 믿는 인과적 결정론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책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 자들이 숙명론 자들이다. 즉 우선 죽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면 오늘 방어책을 취하지 않아도 내일은 죽지 않는다. 방어책을 취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역으로 자신이 내일 죽는다고 치자. 이때는 역으로 오늘 방어책을 취해도 내일은 죽는다. 따라서 어느 경우도 방어책과는 상관없이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무엇을 해도 의미는 없다.

이 숙명론자의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세계에는 항상 숱한 도처에 개별적 사건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바로 순간순간에 다양한 개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순간에 서로 무관하다. 정보의 전파는 최대 빛의 속도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순간에 병치되는 세계의 사건은 무관계하다. 무관계성이 엮어내는 이 세계의 순간을 일반화하고 인과율을 발견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숙명론자의 주장은 토큰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만약에 사건이 개체적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의 양이 된다고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타입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중첩함을 타입은 표현하는 것이다. 개별적 사건들이 개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할 정도로 중첩과 얽힘이라는 변화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과론이 타입을 요청하고 숙명론은 토큰을 요청한다.

인과론자(타입론자)는 시간 발전이 정보의 보존을 만족해서 실현한다고 주장하고 그는 스스로가 확인하는 사상에서 토큰을 발견하지 않는다. 즉 인과론자는 비- 인과집합을 단위로 해서 시간을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숙명론자(토큰론자)는 인과론자가 동일시하는 사상이 서로 독립적으로 무관계한 토큰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인과론자가 보는 사상을 비-인과집합으로서 인식하고서 그럼으로써 시간 발전의 보존칙에 관한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보 손실의 지적에 대응하는 것이다.

숙명론자가 인과론의 불완전함을 명시적으로 반박하려고 할 때 토큰의 지시를 내재하는 한 개의 타입이라는 형식이 분출하고 타입-토큰의 대립 도식이 역으로 무효가 된다는 전회이다. 즉 양자 얽힘의 구조가 인과집합에 출현함으로써 인과론적 시간 발전과 비-인과집합이 지정에 관한 어긋남은 대립 도식이 해체됨으로써 무효로 간주된다.

인과론자와 숙명론자의 대립에서 나타난 얽힘은 인과론적 전체를 선취한다는 의미에서 ‘토큰의 지정을 내재하는 한 개의 타입’이었던 것이다.

비-인과집합의 시간 발전에 관해 정보의 손실이나 부가의 유무를 두 비-인과집합의 완전쌍으로 정의한다. 우선 어떤 비-인과집합이 어떤 사건의 완전미래라는 것을 정의한다. 그것은 그 사건에서부터 순서 관계를 위로 더듬어 가 최대원에 이를 때 그 경로가 반드시 그 비-인과집합을 통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아래 방향으로 순서를 더듬어 감으로써 완전과거를 정의할 수 있다.

어긋남, 조정이라는 과정을 실제 현실 속에서 2인칭이라는 관점이 된다. 우선, 2인칭은 1인칭과 3인칭 사이의 관계, 거리감으로서 등장되는 묘사이다. 내 눈앞에 당신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기억되고 기록되며 누군가에게 보고되는 대상이 된다. 역으로 그러한 기록으로서의 객관적 대상이 당신의 배후에 끊임없이 있고 그 객관적 대상의 기록을 변경, 조정하는 절차 전부로서 눈앞에 있는 당신은 나에게 묘사된다. 이런 한에서 눈앞에 있는 당신, 2인칭 존재는 1인칭(나)과 3인칭(당신에 관한 기억, 기록)의 조정과정으로서 현전한다.

수동으로 전도된 환경에서 대상이 되는 내가 하는 것은 능동적 환경과 전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한 것과 접촉할 뿐이다. 단 선택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사라짐으로써 나의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쓸모없어진다. 환경이 변화함으로써 자발성이 무너져 간다. 능동성, 수동성이 대립 도식에서는 이 쌍이 ‘나’의 성립의 정도로만 상관을 갖는다. 능동적이라 할 때 ‘나’의 존재에 의문이 없고 수동적일 때 능동성의 성립기저뿐만 아니라 ‘나’의 성립기조도 해체되어 버린다. 즉 능동은 존재감이 없고 수동은 존재가 강제로 상실되는 감을 갖는다. 내가 스스로 능동이라고 지목할 때만 자유의지가 감각되는 것이다.

이로서 시간이란 ‘나’의 개설로 인해 실감하게, ‘나’는 외부의 공공성에 노출되어 있는 채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주관, 객관의 발생과 상대적 관계를 통해 육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평)

인간의 몸이 ‘자아’를 속이고 있다. 이 사실을 인간의 두뇌로서는 알아 챌 재간이 없다. 인간의 몸은 언약적으로 ‘아담의 몸’이므로 그 자체로 아무리 해도 ‘언약 완성의 몸’인 그리스도 몸에 도달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아담과 몸과 그리스도 몸은 늘 충돌하고 다툰다. 이 다툼과 충돌 속에서 시간의 새로운 관점이 출몰한다.

구약에서는 창조성 속에서 꿈틀거리는 언약의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시간이며, 신약에서는 십자가 복음을 위한 시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몸 안에 있지 아니하면, 복음적 시간관을 공격하고 반발하고 거부하게 되어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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