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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9 16:33:08 조회 : 82         
20190906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이름 : 한윤범(IP:119.192.174.75)
20190906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3장 2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 신경 쓰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다른 게 늘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에요. 그러면 시작을 ‘살았다’부터 시작해야 되겠어요, ‘죽었다’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시작은 ‘죽었다’부터 시작해야 되지요. ‘죽었다’부터 시작해줘야 이 생명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이 생명만 생명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죽었다고 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또 사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자기의 노력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요령 같은 것 있잖아요. 텃밭에서 열댓 가지 채소들 키우는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건 자기가 이런 것들 뜯어먹고 산다는 그런 지식을 본인이 다 확보하고 있겠지요. 그러면 텃밭에 먹을 게 있으면 그다지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텃밭이 넉넉하니까 먹을 게 있으니까. 하나님의 개입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특징은 항상 죽음부터 출발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주면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그들이 22절에서 누구냐 하면, 가난한 자와 객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내에서 사라지게 하면 안 돼요. 남들보다 죽음을 더욱 더 화끈하게 제대로 노출시키는 그러한 부류가 있어야 됩니다. 이걸 22절에서는 객이고, 또 하나는 뭡니까? 가난한 자죠.

옛날 농사짓고 살던 때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 토지의 텃밭이 없다는 거예요. 토지가 없는 거예요. 떠돌이지요. 머물 곳이 없는 거예요. 이건 매일 죽음에 내몰리는 겁니다. 이 사람들과 넓은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의 차이점은, 넉넉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매일같이 죽음과 멀어지는 태도를 갖고 있지요. 왜? 넉넉하니까. 죽음은 자기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니까.

거기에 반해서 레위기 23장 22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객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요. 토지가 없으니까. 그러면 어디에 굉장히 민감하겠습니까? 늘 죽음과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죽음에 노출시키겠지요. 여러분, 주기도문,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시킨 내용에 보면, 이틀 치 기도하라 했습니까, 일주일 치 기도하라 했습니까, 뭘 기도하라 했어요? 일용할 양식이죠.

일용할 양식이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란 말이죠. 매일같이 내일 것을 보장 안 해주니 쫓기듯이 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쫓기듯이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서 인간 자기의 본질을 알 수 있어요. 나는 내일을 보장받을 권리가 없음을 하루하루씩 살아가면서 절감하는 겁니다. 내일은 마땅히 살아야 돼, 라는 주장을 할 수 없는 입장이 인간이란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곡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토지 주인이 씨앗을 90을 뿌렸다면 하나님께서는 90을 주는 게 아니고 10을 더해서 100을 주시는 거예요. 그럼 10은 씨 뿌린 땅 주인이 몫이란 말입니까, 남겨두란 이야기에요? 남겨두란 이야기에요. 그러면 90 말고 10을 가져갈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이 따로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선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9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까요, 1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까요? 1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됨을 나타낼 때에 넉넉한 90을 통해서 나타내는 게 아니고 아슬아슬하게 목숨 부지하는 10으로 겨우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의 면모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90과 10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대변자냐 하면, 90을 가져가는 넉넉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변자가 아니고 10을 가져가는 자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에서 실제적으로. 이 말은 자기가 넉넉하게 가지게 되면 자동적으로 누구를 멀리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에 관심도 없고 그래요.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은 목숨을 부지하는 나라가 아니고 생명을 이야기하는 나라에요. 그리고 그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을 때만 생명이지 기존에 목숨 부지하는 것을 이방나라들도 그렇게 해요. 목숨과 생명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목숨 안에는 내가 악바리처럼 살았다는 나의 잘남과 자기 증명이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 안에는 주님의 살려주심만 들어있어요.

목숨은 내가 애썼다. 이만큼 고생 많이 했다는 자기의 공로가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은 주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못 살았습니다, 라는 주님의 혜택과 은혜가 담겨있는 게 생명이에요. 오늘 제목이 벌써 나왔습니다. 목숨과 생명. 그 차이점 분명히 해야 돼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레위기 23장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하나님께서 아주 치중하십니다. 주목하시죠. 가난한 자와 객에서 아주 주목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자식이 열 명인데 유난히 자식 하나에 주목하는 부모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에 주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그들의 삶의 현장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입장이고 인간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 그렇게 챙기시고 주목하시고 관심 두면 가난한 자와 객한테 좀 풍성하게 해서 두 번 다시 나그네가 되지 말고 가난하게 안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인간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인 바람에서 말이죠. 하나님께 네 가정을 굽이 살피시고 절대로 시선을 떼지 않고 너를 늘 지켜보고 챙겨줄게.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다면 기도응답이 그렇게 나왔다면 우리는 뭘 생각합니까? 얼마 주실 건데요? 한 달에 얼마나 더 주실 거죠?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 위주가 아니고 목숨 위주지요.

목숨과 생명의 차이점은, 목숨은 뭐가 들어있다? 내가 이만큼 살기 위해 힘들었다. 나는 이렇게 고생했다가 들어있는 건 목숨이고 생명은 뭡니까? 살 필요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살려내셨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생명이에요.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생명이 계속 지속되는 사람은 천국과 연결돼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유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반면에 생명을 품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양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 두 면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나타나지 다른 나라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아브라함언약을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지요. 창세기 12장에.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을 택하여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린다 했지요. 복 나왔지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했습니까? 저주 나왔지요. 그러니까 언약을 복만 주는 게 아니고 필히 뭐가 와야 돼요? 저주가 필히 나와 줘야 돼요. 언약은.

복음전파란 것은,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만 복음전파가 아니에요. 복음전파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함을 보여줄 때 전도가 돼요. 전도란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나오기 전에는, 하나의 기준에서 나와요. 이럴 경우에는 천국 간다. 이것만 전도로 여기지 마시고요.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필히 어디 간다? 반드시 저주받고 지옥 간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돼요. 그게 전도입니다.

어디 천국에 사람 모자라서 땜빵하려고 전도하는 게 아니에요. 천국에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가요. 그걸 사도행전에서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가기 때문에 누가 작정됐는지, 작정 안 됐는지 모르지요. 그때는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을 던집니다. 그 기준에 물리면 천국이고 그 기준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 기준은 어떤 경우라도 변함이 없어야 돼요. 총장상을 줄 때는 딱 그 기준에 맞아야 주는 거예요. 어떤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 기준을 고쳐서 총장상을 주면 안 돼요. 그 기준에 딱 맞춰야 총장상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은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 기준이 중요합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그런 내용이 담겨있는 일생, 그것이 매일같이 되어 지거든요. 그게 바로 레위기 23장 22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고 23장 23절부터 봅시다.

23장 22절과 23절이 연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집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곧 그 달 일 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이게 칠 월 달이에요. 왜 칠 월 첫 날은 안식일이 돼야 되는가? 왜 그런가? 유월은 안 되고 왜 칠 월만 되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만 궁금한가. 이스라엘 절기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 되는데 첫 번째는 유월절이 있어요. 유월절은 단 하루입니다. 1월 14일 딱 하루에요. 두 번째는 무교절이라 하지요.

유월절은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가 넘어가는 거예요. 심판의 천사가 넘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좋게 다가온다, 심판하려고 작심하고 다가온다? 어느 쪽입니까? 아예 심판의 대상으로 봐요. 그래서 뭐가 복이냐 하면, 심판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면 복인 줄 아세요.

뭐 복 달라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그냥 봐주고 쳐도 되는데 치지 않으시고, 저주해도 되는데 저주가 와야 되는데 무슨 근거에 의해서 저주가 사라져버리고 저주에서 면제되는 그 날을 기념하는 게 유월절이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렸다는 이것만 해도 한 평생 살면서 군소리하면 안 돼요.

애가 성적이 안 오르니 고부간에 갈등이 있니 아랫배가 튀어나와 뚱뚱하니 그런 되지 않는 건 하면 안 된단 말이죠. 저주를 면제했으면 내 인생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부세요. 법무부장관 돼도 저주받잖아요. 제사 지내는 것 보니까 교회 안 다니는 건 분명하고.

법무부장관 된들 그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게 저주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교회 나오고 법무부장관. 이러면 법무부장관 복 아닙니까, 이러는데 교회 나오고 법무부장관 되면 어느 것에 치중하고 어느 것에 더 우선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저주인 거예요. 차라리 법무부장관 청문회 해서 떨어지면 다행인데 돼버리면 이게 저주인 거예요.

세상에 어떤 가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이게 유월절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끼리 지어낸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들어낸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것만 해도 충분해요. 저주 안 하고 그냥 넘어가주기만 해도 정말 감사해요. 차들이 엄격하게 노란불이면 건너가면 안 되는데 건너가더란 말이죠. 앞차 걸리고 그 다음 내 차 걸릴 참이고 그 다음 뒤차 걸리려고 하는데 경찰이 잡으려고 하다가 그냥 통과시켜주더란 말이죠. 보니까 조카라, 아는 사이라. “아재, 빨리 가소.” 뭔가 봐주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그 순간만 일까요? 한 번 봐준다는 것은 평생을 봐주는 거예요. 어떤 짓거리해도. 나중에 칠팔십 넘어 노인정에서 10원짜리 화투쳐도 봐줘요. 하나님께서. 한 번만 봐주는 게 아니고 늘 평생을 봐주는 식으로 그 정도로 아는 사이, 그것이 바로 유월절 의미를 아는 사람이죠. 유월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신나지요. 살았다. 나는 살았다. 이렇게 되지요.

무교절을 뭐냐 하면, 그 다음날 15일부터 21일까지 칠일 동안이죠. 무교는 빵을 맛있게 하는 이스트가 없는 날을 칠일 동안 지내라. 그러니까 이스트가 없는 빵을 만들되 딱딱하고 맛없는 빵을 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빵 종류가 몇 가지나 되겠어요? 맛있는 빵이 있고 맛없는 빵이 있겠지요. 이 날만큼은 맛없는 빵을 먹어야 돼요. 칠일 동안이나.

왜냐하면 맛있다는 것은 나의 미각을 나를 기쁘게 하는 나의 쾌감을 증강시키지만 맛없는 빵은 씹으면 씹을수록 딱딱하니까 나의 쾌감을 줄여주지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죽음의 고통을 빵을 통해서 맛보라는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첫째는 신났다로 끝날 게 아니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봐주기로 넘어갔는데 그 근거가 뭐냐? 어린양이 고난 받았다는 사실. 따라서 나의 구원받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정작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봐줄 수밖에 없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수난 당하신 그분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관심사가 거기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관심사가 죽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관심사가 나보다 주님한테 가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무교절의 의미를 알고 유월절의 의미를 알겠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1월 21일 지나고 그 다음 22일 되겠지요. 이 날을 안식일로 정해라. 이 날에 노동하지 말란 말이죠. 노동하지 말라는 것은, 너의 노동으로 네가 사는 게 아니고 그건 목숨 부지하는 것이고 생명은 너의 노동과 상관없다.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네가 열심히 공부해도 생명 없는 곳에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죠.

진정한 의미를 안고 안식일 지킨다는 그 자체도 참된 성도라면 오히려 감격스러워야 돼요. 왜냐하면 평소에는 열심히 이것 아니면 나는 굶어죽는다고 했던 오직 나에게 나의 목숨 부지에 치중하다가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되면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한텐 목숨이 중요하지만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내 목숨 부지가 하나님한테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안 중요하고 내 안에 나 같이 목숨 부지하는 인간을 살려내는 주님의 생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겁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심은 성자에게 있어요. 대신 죽으신 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우린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냥 건짐 받았으니까.

그래서 이 날은 첫 이삭을 바치는 날이라고 돼있어요. 레위기 23장 9절에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걸 첫 번째 이삭을 바친다고 초실절이라고 해요. 1월 22일. 제가 아까 던진 질문, 아직 답변 안 해드렸습니다. 왜 칠 월이냐는 거예요. 레위기 23장 15절에서 22절에 보면, 그 다음 절기. 초실절 이삭은 보리에요.

그 다음 네 번째 맥추절로 밀의 첫 이삭을 바치는 날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이라 해서 첫 이삭을 바치고 오십 일 후에 와요. 오순절에서 오가 다섯이고 순이란 10을 의미하거든요. 5x10의 절기. 오순절을 다른 말로 칠칠절. 7x7=49, 얼추 50이죠. 이 날은 밀의 첫 추수하는 날로 맥추절이다. 보리로 돼있는데 사실은 밀 추수에요. 초실절은 보리의 첫 이삭이라 해도 되고 첫 소산이라 해도 되고. 그리고 유월절도 사실은 농사짓는 절기인데 그것도 첫 이삭과 관련돼있어요.

오십 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 바친다고 돼있는데 오순절, 다시 정리합니다. 분명히 합시다. 첫 이삭 바치는 날을 초실절이라 했지요. 보리 추수하고 첫 소산을 바치는 것이고 칠칠절, 오순절은 보리가 아니고 밀입니다. 그런데 밀을 추수하는 날로 정리합시다. 50일이니까 한 달 20일 정도 되겠지요.

그리고 난 뒤에 칠월에 나팔절이라고 등장합니다. 그러면 칠월 첫 날을 나팔절로 하느냐? 안식일이란 말 들어봤지요. 안식년 들어봤지요. 일 년의 중간 달을 안식 달로 정한 겁니다. 그게 칠월 달입니다. 초실절은 보리의 첫 소산을 바치는 것, 칠칠절은 밀의 추수하는 그런 절기, 나팔절은 그 달 자체가 안식 달이 돼요. 안식 달이 되고 칠월 일일에 나팔을 불게 돼있어요. 오늘 본문 24절에. 나팔을 왜 부느냐?

지금까진 쉬운 축에 들어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생을 오십 년 산다 합시다. 또는 육십 년 산다 합시다. 우린 분명 오십 년, 육십 년 살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것을 축소시켜버립니다. 시간의 축소. 시간이 축소된 것이 절기에요. 내 인생이 오므라드는 거예요. 솜사탕이 부풀어있지만 그걸 압축하면 손바닥에 다 들어오지요. 압축을 시켜버리면 시간의 압축이 절기에요.

왜 시간을 압축, 축소하느냐 하면, 절기라는 것이 제사하는 날이고 이것은 곧 죽음을 뜻하거든요. 처음에 강의할 때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중요하다? 생명이 중요할 때는 그냥 목숨 유지하고 생명으로 올 수 없어요. 여기에 죽음을 경유해야 됩니다. 죽음은 한 순간이거든요. 죽을 때 한 순간이잖아요. 한 순간을 펼치면 이게 오십 년이 되고 육십 년이 되는 거예요.

그냥 제사, 절기와 상관없으면 나는 육십 년 살았다, 오십 년 살았다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버리면 목숨은 연장되는데 어느 노선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생명 노선에 들어갈 수 없어요. 중간에 무슨 계기가 있어야 돼요. 목숨을 압축시켜서 이건 죽은 목숨인 것을 드러내려면 블랙홀처럼 어디에 빠져야 되느냐?

싱크대 구멍 있잖아요. 모든 물이 그리로 빠지듯이 어디에 빠져야 되느냐 하면, 시간의 구멍, 시간이 압축된 것, 우리가 백 년을 살아도 그것은 죽음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이 기다리는 곳, 그게 바로 절기에요. 왜? 절기는 곧 제사고 제사는 누가 죽습니까? 제물이 죽기 때문에.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제물 받고 이스라엘과 맞바꾸신다. 제물 주고 이스라엘 살리거든요. 어린양 주고 이스라엘 백성 살려내는 겁니다. 바꿔치기한다니까요. 그게 언약이니까요. 이삭 주고 누가 삽니까? 이삭 죽고 아브라함이 살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죽음 안에 계속 놓여있을 때 아브라함은 목숨의 사람이 아니고 생명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어렵다했지요. 그냥 훅훅 넘어갑니다.

십자가를 안 만나면 우리는 삼십 년, 사십 년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시간만 와요. 그렇지만 십자가 만나는 순간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육십이든 칠십이든 이건 내 목숨 아니에요. 주님이 자기가 필요해서 이어지는 세월을 살아가는 거예요. 신약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걸 지금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압축할 때 절기가 하나만 아니고 여러 개로 많습니까? 여러 절기가 있더라도 그 절기는 칠월 달(안식월)을 중심으로 경사지게 돼있어요. 칠월 달이 산봉우리라면 나머지는 산기슭이라 보면 돼요. 모든 것은 칠월 달로 최종 마감이 되는 겁니다. 애들 방학 전에 기말시험 치잖아요. 마지막 시험이 칠월 달로 다 몰려요. 칠월 달 다음엔 절기가 없어요. 마지막 회개에요.

칠월 십일 같은 경우는 단 하루인데 그 날은 대 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전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반성하는 죄만 제물 바쳤습니다. 자기가 죄라고 인식하는 죄만 드렸어요. 그러나 인간이란 자기가 죄라고 느끼는 것만 죄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도 죄일까요? 인간이 산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잖아요.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이 힘들다는 것과 같은 뜻이거든요.

서로 윈윈한다, 서로 도와준다. 그런 것 없어요.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선 자기만 살아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누굴 원하느냐? 타인을 원합니다. 내 밥이 될 타인. 옛날에는 노골적으로 노예라는 타인이 있었는데 지금은 근대사회로 피상적으론 노예가 없어요. 하지만 사회 나가면 자진해서 노예 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강압적으로 노예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협박에 의해서 노예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집안이 가난해서 노예로 시작해서 노예로 가는 그런 사람들.

촌에서 올라와 아무것도 없이 서울에서 식모살이부터 술집에 팔리는 꽃분이를 아시나요. 옛날에 그런 영화, 그리고 <별들의 고향>.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노래. 산업화 시대에 험악할 때 그런 사람들. 그뿐만 아니고 서울에 구로공단이라 해서 60~70년대 여공들 다 모아놓은 데에요. 그리고 유명한 평화시장에 재봉사 같은 경우에 하루 근무시간이 16시간이나 되는. 그게 너무 심하다 해서 자살하고 데모 일으킨 사람 있잖아요. 유명한 노동자 전태일이라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살기 위해서 타인을 찾지만 타인을 만나는 순간 누가 주인인지, 누구 노예인지 결정되는 거예요. 그 순간. 따라서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못 먹고 살고 목숨 부지가 안 되고. 목숨 부지 되려면 또다시 누구의 노예가 돼야 되고. 그래서 인간은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누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타인, 남이 필요한 거예요.

왜 교회 안 나오고 왜 말씀 안 봅니까? 교회 말씀은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없는 거예요. 누굴 만나야 돈이라고 한 푼 나올 게 있지요. 오늘 누굴 또 만나야 돈이 나오느냐? 그래서 내 목숨 부지하느냐? 그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몰라. 연금이나 많으면 안 만나겠지만. 따로 나는 외진 데 살겠지만. 돈이 없을 때는 부지런히 가야 돼요.

백화점 평소엔 안 가다가 아파트 광고에 붙은 걸 보니까 세일한다 하니까 아침 9시부터 새벽 5시부터 세일하는 그 타인을 만나고 남을 만나려 가는 거예요. 그런데 왜 성경 안 보고 하나님 안 만납니까? 제사는 타인이 아니거든요. 자기가 이용할 타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평소에는 남을 만나야 되는데 그래야 돈이 생기는데 성경은 돈이 생깁니까, 떡이 생깁니까, 뭐가 생깁니까? 우리교회는 나오면 생기는 게 있어요. 점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뭘 찾고,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남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알면서 하나님의 제사,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의 죽음을 네가 만나야 된다. 너의 실상을 아는 그러한 장치를 제사. 제사와 더불어서 절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만나는 것은 곧 평소에 우리가 살고자하는 자체가 사실은 사는 날이 아니고 죽는 날의 반복이었다. 연속이었다는 거예요.

제대로 사는 노선은 보지 못하고 자꾸 죽어가는 노선으로서 이게 자꾸 연장되니까 자기가 살 수 있는 희망 가지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안 만나니까 그래요. 하나님의 제사, 절기를 안 만나고 만나기 싫어하고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배부른데 왜 하나님 만나야 되느냐는 거예요. 아까 강의 처음에 했지요. 인간이 배부르면 안 만난다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할까요. 레위기 23장 22절.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이 말은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그 땅주인에 있는 게 아니고 나그네와 가난한 자에 있는 거예요. 왜? 그 사람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에요? 땅이 없다는 말은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진짜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가는 제대로 그걸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거기에 주목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23절이에요. 칠월 달 제사. 한 달 자체가 대부분 제사하는 날, 한 달 자체가 안식해야 될 날. 인간의 노동을 반 이상 중지해야 될 그런 날이 된단 말이에요. 반까지는 안 되지만.

속죄일이 7월 10일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속죄일 지나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다 지워버렸네. 지워졌으면 또 쓰면 되지, 뭐. 첫 번째는 유월절 1월 14일, 유월절 다음에 무교절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세 번째는 보리의 첫 이삭을 베는 초실절 1월 22일. 그 다음에 오십 일 되는 날, 밀을 추수하는 날 맥추절. 맥추는 보리인데 사실은 밀이에요. 같은 말로 오십 일 됐으니까 오순절. 여러분 오순절 아시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오신 그 날.

그 다음에 다섯 번째가 나팔 부는 나팔절. 나팔절 아직 설명 안 했습니다. 이게 어렵기 때문에 설명 안 하고. 이게 7월 1일에 하는 나팔절이라 했어요. 여섯 번째가 7월 10일에 대, 큰 속죄일.

큰 속죄일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좀 봐달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인데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못 지켰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 그래놓고 죄 지었으면 잘못됐다고 제물 드리면 되지만 자기가 모르고 지은 죄가 있어요.

결국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주는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내 몸이니까 내가 목숨 부지해야겠다는 자체가 전부 뭐가 된다? 죄가 되지요. 그러나 이 죄를 그대로 놔두면 저주받지요.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봐주고 넘어간 취지가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고 찾을 길이 없어요. “분명히 너를 구원했는데 너한테는 그게 안 보이네.” 보이질 않아요. 보이지 않으면 치워버려야 되지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봐준 게 있는데 말이죠.

화투를 치는데 벚꽃 광자 있는 것 삼월 벚꽃에 광자 있는 건 48장 화투장에서 그것 하나란 말이죠. 그걸 화투 뒷면으로 다 엎어놓고 찾는 거예요. 분명히 있는데, 하고 여기 있다고 찾듯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 행세 일체 묻지 않고 목숨 부지하는 것 묻지 않고 생명으로 그냥 생명 주기로 작정한 자가 어디 있을 건데, 하고 들춰보다가 여기 있네, 라고 마주치는 거예요.

그 마주치는 순간이 바로 네가 목숨 부지해서 사는 사십 년, 오십 년은 세월로 간주하지 않고요, 그 마주치는 순간 있잖아요. 그 순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주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봅니다. 그 시간 아래 우리의 모든 생애가 축소되고 압축되고 거기에 응축이 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십자가 사건 됩니다.

그게 7월 10일 대 속죄일이에요. 대 속죄일은 지을 때도 죄인 줄 몰랐고 죄 짓고 난 뒤에도 죄인 줄 몰랐고. 그리고 죄 지었다고 반성한다고 제물 바쳐봤자 그게 일종에 주술적인 그냥 때우는 식으로 해줬습니다, 하나님 교회 나와 줬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런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여러분들이 안 믿는 사람이라 합시다. 그런데 가까운 친척이 음식가게를 열었는데 안 믿는 친척이 와서 개업선물로 꽃 같은 것보다도 앞으로 잘 되라고 부적을 하나 용한 점쟁이한테 오십 만원 주고 사왔다 합시다. 여러분이 안 믿는 사람이라면 그 부적을 찢어버리겠습니까? 식당 구석 어디에 붙이겠지요.

그 부적이나 오늘날 교회 다니는 것이나 차이점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걸 주술적이라 합니다. 재수 좋다는데 내가 왜 버려. 그럼 누굴 위한 재수고 누굴 기쁘게 하기 위한 영광을 위한 재수 좋은 겁니까? 살고자 하는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런 재수 좋은 것은 교회 백날 나와도 무당 짓이에요. 그건 이방나라에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주술적인 것이 강했던지 교회에다 십자가를 붙여놓는다고. 십자가인지 주술인지 부적인지 분간이 안 돼. 십자가 왜 붙이느냐? 혹시 손님 많이 올까 싶어서. 또 같은 교인들이면 이 집에 믿는 사람이네, 가야지. 그것도 단체손님들 올 수 있거든요. 교회 손님. 이능우 집사님, 십자가 붙여있습니까, 식당에? 가만있는 것 보니 붙여있는…

십자가는 숨겨야 되지 나타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옛날 영화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십자가로 하지요. 사탄아 물러가라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거든요. 십자가는 내 안에서 내 사탄이 물러가야 돼. 내 목숨 부지하는 이 귀신이 가야 돼. 십자가로서. 이미 생명으로 바꿨으면 봐주는 거잖아요. 봐줬으면 이제는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닙니다. 도대체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는지 구원받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걸 아는 일만 남아있어요. 딴 일이 남아있는 게 아니고.

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질문을 반대로 해야지요. 이런 죄도 용서됩니까? 이렇게 돼야지요. 내가 무슨 죄인지 몰라요. 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든 7월 10일은 내게 있었던 모든 생애는 전부 다 그 안에 집결되어서 한 방으로 다 용서가 되는 그러한 날이 7월 10일. 그래서 속죄일도 집단으로 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은 개인주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개인구원은 없어요. 집단구원이에요. 왜? 7월 10일 때문에 대 속죄일 때문에.

A란 사람, B란 사람 두 사람이 있다면 용서 얼마 빌었나? 난 5일 동안 했다. 난 7일 했다. 개인적인 용서 같으면 둘이 싸운다고요. 7월 10일은 이런 것 다 없애버립니다.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일체 묻지 않고 7월 10일은 날짜가 구원하는 거예요. 희한하죠. 그 날짜가 그 절기가 구원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누굴 찾는다고 했지요. 타인을 남을 찾지요. 제사는 남이 아닙니다. 왜 남이 아니냐 하면, 내가 원하는 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용서받기 위해서 용쓰고 애쓸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왜?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 어느 부적을 갈아치우느냐, 어떤 점쟁이를 찾아가느냐? 이건 나의 선택이고 7월 10일은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거예요. 정해놓은 그 지점에 우리가 참여할 뿐이지 내가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이게.

그 날에는 큰 걸 잡아요. 돼지 잡는 게 아닙니다. 염소 잡는 게 아니에요. 염소보다 더 커요. 소를 잡습니다. 왜 소를 잡느냐 하면, 개인용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그때는 우리라는 말을 해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는 나는 소멸돼야 돼요.

따라서 시간은 용서는 뭘 소멸시킨다? 나를 소멸시키는 겁니다. 나를 소멸시키면 내가 갖고 있던 걱정근심도 내가 죽는 순간이 같이 소멸되는 겁니다. 시간이 구원시킨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나는 소멸될 인간으로 진즉부터 나는 나라고 챙길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는 것을 7월 10일 대 속죄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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