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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1 15:52:54 조회 : 96         
20190909a 부산강의 : [시편]21(14편)-개체와 말씀세계 이름 : 한윤범(IP:119.192.174.75)
20190909a 부산강의 : [시편]21(14편)-개체와 말씀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질문, 이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녹음할 거예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결정적이죠. 왜냐하면 내 몸 같으면 첫째 사망, 둘째 사망,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그런데 내 몸을 다루는 것은 아담의 몸 안에서 다뤄지는 거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분명히 아담의 몸인데 주님의 몸으로 간주해버려요. 그럼 우리의 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낼 거냐를 표현하는데 우리의 육체가 필요한 거죠. 보이지 않는 몸은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지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첫째 부활이 체험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다뤄지는 거죠. 다뤄지고 뒤돌아보면 주께서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그렇게 묘사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살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이건 첫째 부활이야, 둘째 부활이야, 이거는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그걸 말씀이 세계라 해요. 우리는 인간의 세계에 있거든요. 인간의 세계에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우리의 체험이나 경험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우리의 체험이란 것은 내 몸이 유지될 경우와 유지되지 않는 경우 딱 두 가지밖에 없거든요. 이 몸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과 아파서 죽는 것, 두 가지 경우밖에 없잖아요.

두 가지밖에 없으면 이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 그걸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아무리 따져도 죽음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몸을 무슨 몸으로 바꾼다고 했어요? 주의 몸으로 바꾸죠. 주의 몸으로 바꾸면 우리 몸에는 없는 게 주의 몸엔 있어요. 그게 바로 부활이에요.

여기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몸으로 부활을 이해하려면 경험되지 않습니다. 경험되지 않으면 상상하게 돼있지요. 이 몸이 죽으면 부활된다. 이건 상상이라니까요. 실제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이고 욕심이 되죠. 우리 몸이 생생하게(별로 생생하지도 않지요^^)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경우가 이미 보람상조가 처리한 상태, 관 속에 누워있지요. 자식들이 와서 입관, 하관하고 있는 그런 상태, 우린 다 듣고 있지요. 이 사이를 이걸 죽음이라 하거든요. 숨 끊어진 상태를 죽음이라 한단 말이죠. 우리가 경험하든지 체험하는 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부활이란 게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이나 고린도전서에 부활 나오지요. 부활 나오니까 체험되지 않은 여기서 상상력이 동원되는 거예요. 이건 허구지요. 그냥 욕심이에요, 욕심. 되면 좋겠네. 부활되면 억수로 좋겠다. 그뿐이에요. 실재 아니에요. 난 예수 믿고 교회 다녔으니까 부활되겠지. 누구 마음대로? 지 착각이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제가 설명해드렸습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반드시 점선으로 표현해요. 없는 거예요. 없는데 과거와 현재가 경험한 기억으로 자기가 구성을 하지요. 자기가 그냥 정해버려요. 자기가 정하니까 이것은 나만의 부활이에요. 이방인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적인 부활이 아니고 나만의 부활이에요. 다니엘에 나오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것이지 개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에서 물 나오지요. 특정 개인을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합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 없어요. 생명의 물을 받으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 구원받았다고 했어요, 메시아를 알았다고 했습니까? 메시아를 안 거죠. 나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메시아를 안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이지 나만을 건지는 게 아닙니다.

나부터 출발하는 것은 너무나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사적구원, 개인구원. 모든 교회가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개인구원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단적입니다. 솔직하게 이단이라 하고 싶은데 ‘적’이라고 하나 붙여주는 거고 그냥 이단이에요. 왜? 나의 구원만 하기 때문에. 거기서 새끼 친 게 뭐냐? 구원파잖아요. 구원론, 구원파.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부터해서 기존 교회 전부 다 구원에 관한 거예요. 성경과 관계없어요.

없으니까 허전하잖아요. 그러니까 마저 채우려고 하는데 어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남아있는 미래는 없다. 십자가가 최종성, 마지막 종결이기 때문에 미래가 없어요. 그걸 종말이라 합니다. 미래가 없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미래를 밟고 있는데 미래는 없어요. 모든 미래는 십자가로 다 소환되기 때문에 따로 나만의 미래를 설정할 권한도 없고 설정할 필요도 없어요. 십자가로 끝내기 때문에.

그러면 내 미래가 없어지고 십자가로 소환되려면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돼요? 우리 자신은 죽으면 되지요. 내가 죽으면 나의 미래도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말이 나오지요.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시험에 들지 말게. 나에서 우리로 가야 되는데 자꾸 나로 가려하는 거예요. 시험이란 단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광야에서 나온 거예요.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그게 시험입니다.

그럼 시험이 되려면 이 세상 환경이 광야로 바뀌어야 되겠죠. 광야로 바뀌면 본색이 드러나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시험이란 방향성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알던 이미 경험한 상상한 미래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시니까 애굽보다 더 잘 살게 하시겠지. 광야 같은 것을 없을 거야, 아마. 가자마자 멋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그것과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 광야란 사막 같은 환경과 대비해볼 때 본색이 본능적으로 톡 튀어나오지요. 내가 이러려고 교회 나왔나, 하는 식으로.

광야란 애굽에 살던 자아를 죽이는 장소에요.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니까. 죽으라고 광야에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옛날식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주님은 네가 옛날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영생 얻으라. 우리는 옛날식이 좋습니다. 맨날 싸움이 그 싸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교회 나와서 그냥 성경 알 필요도 없이 하나님 저기 계시고 열심히 빌면 복 받는다. 왜 그렇게 간단한 걸 놔두고 자꾸 성경 봐야 되느냐? 귀찮다.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고 복 받을래. 그쪽으로 갑시다, 라는 생각이 계속 나오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왜 성경 봐야 됩니까? 거기에 광야 나오고 이스라엘 나오거든요. 이스라엘 나오고 집단적으로 어떻게 대들었으며, 이방인 나오잖아요. 이방인들은 얼마나 개인주의냐. 이방인들은 개인적인 지혜를 원하고 개인적인 지식을 원하거든요. 유대인들은 집단적인 기적을 원하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어리석은 십자가지요.

아까 집사님 들어올 때 목사님 장난치며 못 들어오게 했잖아요. 돌아가라 이 말이죠. 여긴 올 데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진정한 시험의 해석은 바로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라. 거기에 정들었고 몸에 배였잖아. 네가 모르는 하지도 않은 짓을 왜 하려고 하냐는 거죠. 그것은 주께서 이끌어줬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성경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뭐가 좋으냐? 바로 우리가 알던 세계에서 어느 세계로 들어갑니까? 말씀이 세계로 들어가요.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없어요. 이건 주님 몸에 해당되는데 나한테는 그냥 상상의 세계일뿐인데 이게 상상이 아니고 이미 들어온 게 돼버려요. 이미 미래가 나한테 덮쳐버렸어요. 생소한 미래에요. 낯선 미래.

낯선 미래가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미래는 과거, 현재가 바탕으로 해서 미래가 상상되잖아요. 점선이니까 미래는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억지 부려서 채우는 거죠. 나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야. 천당 갈 거야. 그런데 천당은 가는 게 아니고 덮쳐버리면 생생한 천국이 돼버리면 동시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과거에 나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리죠.

나는 어느 동네 살았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고, 재산은 얼마 모았고, 아파트 사고, 그것 자체가 그것 한다고 해서 그게 구원과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어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장애자다. 몸이 아프다, 안 아프다. 그게 의미가 없다니까.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해요. 구원받는 것도 십자가만이 아니라 구원되고 난 뒤의 상황도 십자가만 자랑해요.

홀라당 십자가만 이용하지 말고. 천당 가서 나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되선 안 됩니다. 그건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는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십자가 알고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나에게서 더 이상 자랑할 게 없다는 것이 홀가분해져야 되지요. 내가 자랑할 것 없고 굳이 자랑한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러면 죄를 자랑하면 과거의 죄냐? 아니지요. 왜냐하면 계속 살게 하시면서 거기서 매일같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죄가 발굴이 돼요. 발굴된 그 죄들을 보게 되면 이건 죄 아닐 거라 한 죄도 목록에 쓰레기처럼 계속 쌓이게 돼요. 내가 죄가 아니란 것도. 그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도 죄로 들어가 버려요. 모든 게.

그러면 죄 아닌 게 뭡니까, 물으면 죄 아닌 걸 찾는 그게 죄에요. 죄 아닌 게 없는데 죄 아닌 걸 찾겠다는 의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뭔가 수상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죄 아닌 것을 찾게 되면 우리는 또 그 죄 아닌 것을 담지, 그걸 담아서 유지해야 될 부담을 또 갖게 돼요.

나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됐는데 이것 잃어버리면 주께서 얼마나 섭섭해 할까? 그렇게 돼버리면 계속해서 그 죄 아닌 것이 의인데 그 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써 내 가치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어디까지 잘 나가고 훌륭한지 부질없는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식이냐 하면, 옛날 애굽에 선악으로 나를 따졌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다시 말해서 시험에 빠진 꼴이 돼버립니다.

그 시험에 빠진 꼴을 그동안 누가 잘 가르쳐왔던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요. 예수 믿었으면 똑바로 살아야지. 어떻게 세상 사람과 똑같아. 그게 영광되겠어.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영광은 여러분의 행함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얼마나 들었어요. 그리스도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빛과 소금이 돼야 되고.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우리가 모델로 여겼던 해와 달 다 폭파되는데? 요한계시록 안 본 모양이라. 해도 맛이 가고 달도 맛이 가버렸어요. 모델을 죄를 지고 가신 주님 외에는 없어요. 모델을 왜 찾아요. 모델을 찾겠다는 말은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계속 붙들겠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자아를 유지시키는 게 시험입니다. 자아를 놔야 되는데 계속 붙들고 가겠다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의 몸인데 자꾸 내 몸으로 자꾸 빼돌리는 이 악마의 짓을 용서 하옵소서, 라고 해야 되겠지요.

시편 14편과 무관하게 아닙니다. 여전히 시편 14편은 어렵구요. 시편은 스토리가 없어요. 스토리가 없고 남의 체험이거든요. 다윗의 체험 아닙니까. 참 얼마나 어려운지 문장과 단어를 나열할 테니 어느 정도 어려운가 보세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누가 앞에 있단 말이죠. 묻습니다.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내 눈앞에 나타났느냐, 이런 뜻이거든요. 너는 왜 없어야 될 자리에 네가 앉아 있느냐? 무슨 의미냐? 내 쪽에서 이쪽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이건 응용실습하면 돼요. 오늘 집에 가서 남편 앉아 있으면 물으세요. 당신은 왜 없는 존재인데 앉아 있지? 너, 누구한테 배웠나. 오늘 낮에 공부하러 갔더니만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너는 없어야 되는데 왜 있지, 라고 할 때 상대방은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①이렇게 물으면, ②정답이 뭐냐 하면, 너는 나를 왜 관찰하느냐? 지금 이 질문과 답변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내보는 거예요. 이거는 서울법대 시험보다 더 어렵습니다. 서울법대로스쿨 교수라도 못 풀어요.

여기서 공통점을 찾아야 돼요. 공통점은 자기만의 밀폐된 공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걸 개체라고 하는 거예요. 과연 성경이 인간의 개체를 인정했는가 하는 겁니다. 인정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오고가는 질문이 이거에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평소에 이런 말 안 하지요. 자칫하면 폭력사태 일어나는데 하지만 속은 이거에요. 여기서 전부 다 파생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신, 나와 결혼해서 얼마나 행복하게 해줬어?” 이 말이 이 말이에요. 없지 않고 이왕 있으려면 있을 값을 하라는 겁니다. 그냥 있지 말고 돈 좀 벌어오라 이 말이죠. 제가 언젠가 가혹한 70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할머니 나이가 72이고 남편 나이가 76인데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당신 돈 벌어 와라. 돈 벌어오지 않으면 반찬도 없다. 제목이 가혹한 할머니.

뭐냐 하면 당신이 내 앞에 있으면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있는 값을 하라 이 말이죠. 있는 값 못해? 그런데 너는 왜 내 앞에 없지 않고 있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남들은 다 산에 가서 자고 있는데 너는 왜 아직도 방 안 있느냐? 네 친구들 다 공동묘지에 고이 자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개체에서 나왔지요. 그 개체가 그냥 공간이 아니고 어떤 공간입니까? 밀폐된 공간이에요.

나는 너를 관찰할 수 있으되 너는 나를 관찰하면 안 돼. 나는 너를 관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너는 나를 관찰하면 안 돼. 그런데 그것을 반격해서 답변이 뭡니까? 너는 왜 나를 관찰하느냐, 이렇게 되지요. 결국 이 두 사람은 있지만 서로 개체 둘이 있지요. 개체 둘이 있음으로 이거는 영원히 합치되거나 일치되거나 한 마음이 될 턱이 없어요. 아무리 어떤 수를 해도 우리 속에는 너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다시 있으면 있을 값을 해라.

다시 말해서 이런 질문, 너는 없지 않고 있느냐, 할 때는 2번 답변이 뭘 요구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런 답변을 요구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바보입니까, 쪼다에요? 너는 나를 관찰하면서 왜 관찰하는 것을 시비 거느냐? 이 말을 내가 하고 싶어. 너는 왜 있는데? 이게 누구 말하고 있어? 서로가 으르렁거리고 있어요.

개체가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새로운 나의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철저하게 인간은 개체는 구분 짓습니다. 외부공간을 쉬운 말로 외부 환경과 나의 내부 환경. 그런데 지금 평소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뭘 이야기해요? 외부 환경, 외부공간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오늘 시편 14편으로 이야기할 것은 인간의 내부공간, 내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 내부에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나 자체, 예를 들어서 볼링공 안에 공간이 있습니까? 당구공 안에 공간이 있어요? 외부에서 보면 딱딱해 보이고 공간이 없어 보이잖아요. 딱딱한 야구공 그 안에 공간이 있거든요. 우리는 내부 공간은 어느 빈곳이 없고 나의 욕망으로 꽉 차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내부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이건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린 그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내부공간을 굳이 언급해야 되는가? 인간들이 개체가 내부공간을 따질 때 저건 나한테 유리한 공간, 불리한 공간. 한국의 좌빨 때문에 못 살겠다. 슬슬 캐나다 이민 갈까, 이런 식으로 내 환경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될까 겁난다고 이민 갈 생각할 때 이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 내부 공간의 의식이 그대로 외부에 반영되어 나온 거예요.

외부공간이 있고 내부공간이 없는 게 아니고 딱 들어붙은 게 아니고 외부를 생각할 때 유리한 외부인지 불리한 외부인지 이미 자기 내부 안에 유불리를 따로 구분 짓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이 그대로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아가씨들이 결혼할 남자를 사귈 때도 그냥 사귀는 게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저 남자 그냥 남자 같으면 커피 집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선본다고 앉아 있을 때 똑같은 질문이에요. 당신은 내 앞에 등장 안 해도 되는데 왜 등장했지요? 했을 때에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케이크 하나 시켜서 들고 오더니만 이것 드시라고 했는데 뭔가 씹히는 게 있어. 다이아?

이 귀한 다이아를 바치듯이 내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런 것을 여자가 이미 상상을 했다면 남자가 진짜 케이크 들고 오게 되면 남편으로 받아주겠습니까, 안 받아주겠습니까? 안 받아주지요. 왜? 그런 남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요새 아가씨들 까다로워요. 이미 나왔던 경우의 수는 내 내부 공간을 만족시킬 수가 없어요. 이미 드라마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직장 생활한다고 남자들의 드라마를 안 봐서 드라마에 나온 그것 괜찮다고 그것으로 들이대다간 퇴짜 맞는 거예요.

그냥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성경을 보면서 이야기합시다. 시편 14편 보기 13편 1절 봅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갑자기 다윗 속에 뭐가 들어왔어요? 본인으로 꽉 차야 될 내부공간이 갑자기 다윗은 누굴 찾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거예요. 외부공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야, 어렵다. 중요하다.

여호와가 외부공간에만 계신 게 아니고 그러면 그건 신자 아니고 여호와가 어느 공간에 있어요? 내 내부공간에 여호와가 되는 거예요. 다윗의 이야기가 어려우면 쉽게 귀찮더라도 요한일서 잠간 봅시다.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제가 쉽다고 했지만 이 말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어요.

다시 할게요. 내 안에는 나밖에 없어요. 목사님, 뭔데 그렇게 장담합니까? 제가 장담하는 이유가, 남편이든 아내든 누굴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요구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요구사항이 있다는 말은, 순수하게 나는 나만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당신은 날 위해 존재해야 돼. 왜? 날 위하면 당신에게 약간의 수고와 헌신할 용의가 있기 때문에. 왜 그런데? 나는 개체니까. 절대적인 개체니까.

이렇게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19xx년도 주민등록번호에 따라 태어날 때에 아담의 복사물로 태어나거든요. 아담의 복사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악마의 정신, 악마로부터 계속 사주 받아야 될 연결고리가 같이 장착되었어. 칩이. 추적기가 우리 안에 포함되어서 악마의 지령과 지시에서 못 벗어나요. 악마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했던 자가 악마입니다.

그 반항심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따먹지 마라. 그거는 반항의 대상이죠. 따먹으면 어때, 이러거든요. 하지 마라. 옳다구나 하자. 그 말은 악마가 준 심성이 뭐냐 하면, 나는 최종 절대자로 나를 이미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앞에 누가 없지 않고 나타나게 되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꼬?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흉내 내면서. 신처럼 흉내 내야 되니까. 너는 무엇 때문에 내 앞에 등장했는고? 그 말은 내 내부가 바깥을 보고 외치는 거예요. 사람의 말은 자기 내부에 담긴 말을 쏟아내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아담으로 가면서 “여호와여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이 말은 뭐냐? 다윗 속에는 지금 다윗만 있는 게 아니고 다윗은 초정하지도 않은 인사가 등장해서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뿐만 아닙니다. 14편 1절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왜 하나님을 거론합니까? 지금 다윗이 목이 마르고 아픈 것도 아니고 밥이 없어서 화내는 게 아니고 바깥 환경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화가 납니까? 바깥에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가 유행되기 때문에 화가 난다면, 바깥 풍경을 그렇게 봤던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에요?

누가 그렇게 서러움과 불평을 유발했습니까? 내가 아니죠. 우리는 남들이 날 위하기만 바라지 그런 마음 없어요. 그런데 이게 나한테 이익도 안 되고 나한테 실익으로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것에 화가 난다는 말은 그 마음이 바로 다윗을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어제 제가 한 낮 설교 끝에 보면 나오지요. 정중동,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다. 고요함이 있고 속에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있다. 사도 바울 경우에는 속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그리스도가 일하게 하셔서 온갖 데 다 가고 온갖 번잡스러운 일 다 했어요. 로마 가는 것도 자기 뜻이 아니었잖아요. 속에 나침반이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에게 들어오신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 한 고집하거든요. 이걸 이사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내 열심보다 우세해요. 천국 가는 것은 빼박이고요 당연히 가는 거고 곱게 못 가게 만들어요. 내 개인적으로 천국 가면 속 편하겠는데 예수 믿고 기도원에 도만 닦다 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뭔가 질질 흘리고 간다 할까요.

우리 어릴 때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에 김치를 넣어주면 바깥에 비닐로 싸야 되잖아요. 옛날에는 비닐이 귀했는지 비닐로 안 싸고 버스 타고 가다 몇 번 밀리면 내부에 있는 도시락이 흔들리면서 김칫국물이 질질 새잖아요. 김칫국물이 가는 데마다 핏자국처럼 가방 들고 가면 뚝뚝 떨어지고 있단 말이죠. 질질 새게 돼있어요.

예수님의 열심을 질질 새게 돼있단 말이죠. 나는 조용하게 살고 싶어. 아주 소박하게. 여기 아파트 있잖아. 85층. 한 채만 마련하고 딴 건 욕심도 안 내요. 벤츠나 아들 벤츠하고 두 대 해서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어. 태풍 올 때 파도나 내려다보면서. 그런데 가만두질 않는다니까요. 가는 곳마다 질질 새게 해요.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어. 이게 아니고 탄식하면서 세상에 왜 이렇게 하나님 믿는 자 없노. 그 소리 듣고 남편 하는 말이 쓸데없이 니가 걱정 왜 하노. 그렇지요. 걱정할 이유 없어요. 그럴 당위성도 없고. 주께서 질질 새게 하는 거예요. 내 열심이 아니고 주의 열심이에요. 나도 절제해야 돼, 조정해야 돼. 하지만 현장에서 이래선 안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을 안 했을 때 남는 건 뭔가?

무엇을 안 하게 되면 남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정당하다. 이게 큰 병이거든요. 악마거든요. 나의 가치를 나에게 회수하는 그러한 스스로 시험에 들어요. 나는 이 정도까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큰일 날 뻔했네. 시험에 들 뻔했구나.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래서 남는 건 뭐냐? 찢어져야 되는데 이게 봉합이 돼버려요. 봉합이 되면 새끼 개체, 개체 속에 내가 지킬 만한 새로운 가치 있는 새끼 개체를 또 내가 생산하고 말았어요.

뭘 피하면 뭘 만나듯이 큰 것 피했다고 했는데 귀신 피해서 도망쳤다고 했는데 귀신이 이미 내 안에 들어오고 말았어. 그 귀신은 늘 말합니다. 완전하라, 완벽하라. 완전하지 않으면 니 인생 사단 난 건 다 니 책임이다. 네가 행동 허투루 해서 그렇다. 또 나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나의 책임과 나의 올바른 선택을 강요하는 거예요. 네가 똑바로 살면 영광인데 똑바로 살지 않아서 영광이 안 된다고.

그러나 다윗 같은 경우에는 나라는 보자기가 찢어져버렸어요. 주님의 열심이 질질 샌다니까요. 정말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힘들 때는 그냥 힘들다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주여, 그 다음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또는 주의 지시는 뭡니까? 주의 지시가 뭡니까, 라고 할 때 성령 받으면 응답을 주시는데 그 응답은 딴 게 아니고 응답은 이렇게 나와요.

구조적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너는 이렇게 했다, 이렇게 했다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서 너는 종의 위치라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네 가치, 네 의미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 그 구조 자체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게 응답이에요. 주어진 것만 해도 감사하고 고마워해라, 이것들아.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이런 환경, 이번 조치, 내가 제대로 해야 되는데. 제대로 하지 마. 시키는 대로 해. 제대로 하는 것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다릅니다. 옳다/그르다와 다르다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옳고 그름이 아니고 달라야 돼요. 옛날 내가 했던 그 개체와 다른 개체가 있어야 돼요.

따라서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시편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다윗이 대표자니까 성도한테 성도의 허락도 없이 이미 침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침투는 그냥 침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세계를 몰고 침투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오기 전에 이 세계가 뭡니까? 바로 나의 세계지요. 나의 세계를 좀 더 분석해 들어가 봅시다. 나의 세계는 항상 반복해서 정리를 하게 돼있어요. 인간은 항상 반복해서 수습하는데 급급합니다. 수습해야 그게 나의 세계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야 내가 안심이 되는 세계, 이게 애굽적인 세계, 주님의 없는 세계거든요. 내가 나다울 때 뭔가 느긋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어려운 용어를 쓰겠습니다. 개체 안정화에요. 개체 안정화 작업이에요. 집안에 식구가 양말 함부로 벗어놓으면 출근하고 애 학교 가고 난 뒤에는 빨리 양말을 제자리에 세탁기에 넣든지 해야 되겠지요. 그게 개체 안정화 작업이에요. 그리고 개체 안정화 작업하면서 이걸 죄 짓고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하고 있어요. 버릇이죠. 당연한 거라고 여기죠.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이 가장 안전 빵이고 안전해요. 왜? 아담의 죄기 때문에 그냥 지옥으로 중간에 누가 와서 저쪽으로 밀치지 않는 한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네들 어른들처럼. 교회 나와 준 우리들 어른들처럼. 교회 나와서 지옥 가는 거예요. 왜? 교회 가도 끝까지 자기 개체 세계니까. 나의 세계니까, 개인구원이니까. 말씀의 세계를 가본 적이 없어요.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어야지. 없는데. 시편만 열댓 번 봤을 거야. 그것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성도에게 어떻게 주의 말씀 속에 속했다는 걸 눈에 띠게 하느냐? 간단하게 아주 쉬운 방법이 있어요. 이건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데 가르쳐줘야겠네요. 길거리에 이런 게 있지요. ‘임대’ 여러분들이 이걸 붙일 때 반드시 임대하게 된 사연이 있어요. 그리고 이걸 쳐다보고 있는 나의 사연도 있어요. 얼마나 장사가 안 됐으면 이걸 임대 놓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람이 이 가게를 처음 열 때 돈을 수천만 원 또는 수억까지 투자했을 때 그것 본전도 못 뽑고 하도 장사가 안 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임대 내놓은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람의 사연은 찢어지지요. 그러면 길 가던 사람이 임대를 봤다 칩시다. 저 가게 나왔네? 나도 이제는 애 키울 만큼 키웠으니까 내 하고 싶은 장사해볼까? 내 사연이 여기에 추가가 되지요. 이쪽이 죽든 말든 간에. 이왕 급하게 내놓은 것 시세보다 싸겠지. 그 틈을 노려봐? 내가 이 가게 해서 퀼트라든지 빵가게라도 해볼까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여기 올라오면서 봤지요. 영수의 집 밥인가 가게, 그것 때려치우는 것 봤습니까? 장사 안 돼서 다 때려치우는 거예요. 어떤 집이 장사 안 되면 그냥 보지 않습니다. 유심히 그 사연을 상상하는 거예요. 왜?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애굽의 실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장사 때려치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서 화나서 때려치웠습니까? 그리고 임대 놓은 것 보고 시세 물어보려 들어갔을 때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서 화나서 장사하려 합니까? 아니지요.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 말씀은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에 우리가 눈독을 들이고 여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 없는 세계 속에 우리가 정신이 팔려서 집착을 하면서 한 통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임대’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거예요. 모든 것이 시그널, 신호가 되는 겁니다.

온 천지가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장사해서 망했다, 안 했다가 본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성경이 귀에 들어와도 화낼 거예요. 나쁜 목사라고 지난 토요일 욕 얻어먹었지만. 지가 괴로워서 전화해놓고 나보다 나쁜 목사라고. 약 먹고 죽으라 했으니.

모든 세계가 십자가 앞에 다른 세계는 없어요. 십자가가 완성이고 없는데 우리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고 남이 못 될 때에 더불어 얻는 기쁨 같은 게 있어요. 남이 망했을 때. 그것도 그냥 망하면 기쁨이 덜 한데 쫄딱 망하면 굉장히 기분 좋아요.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사귑니까? 아까 요한일서 봤잖아요. 사귐 없어요. 요한일서 1장 봅시다. 말씀이 굉장히 현실적이죠. 무지무지 현실적이에요.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함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귄다는 것은 우리가 얼추 짐작은 되는데 하나님이 인간과 사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지요. 왜? 우리 눈앞에는 임대, 그게 확 다가오기 때문에. 해운대 고층아파트, 그게 확 다가오거든요. 사귀는 게 기뻐요, 고층아파트 공짜로 주는 게 기뻐요? 질문하는 내가 나쁜 놈이다.

사귐 없어요. 미쳤다고 사귀어요. 나만 절대적인데 왜 사귀어요.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쪽은 그런 나를 관찰하고 나는 그걸 관찰하고 서로 관찰하면서 주목하면서.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개체와 개체 사이에는 사귐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이 불가능을 극복하고 그걸 성사할 수 있는 방법은 어제 오후설교 끝부분에 이야기했습니다.

불가피성이에요. 불가능하거든요. 불가능의 대체는 뭐냐? 가능으로 못 바꿔요. 불가능이니까. 못 바꾸지만 주께서 하게 하시면 돼요. 내가 주님을 초청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쳐들어오시면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 그게 범위가 확대되어서 나한테 쳐들어오는 거예요. 쳐들어오게 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으로 돼있고 내부는 자기가 바짝 내부공간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못 느끼고 딱딱한 나와 유들유들한 외부 환경으로 보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어떤 조건이냐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그렇단 말이죠. 주님께선 이걸 뭐로 바꿉니까? 이 인간을 죽여 버리죠.

인간이 생각한 죽음은 죽고 난 뒤에도 관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거든요. 사실은 상상하는 이게 반칙이에요. 이 죽음을 앞당겨서 이 안에 꽂아 넣습니다. 그러면 나의 외부 환경은 주님의 외부 환경이 되고 나의 내부 환경은 주님과 사귐이 되는 주님과 함께 있는 외부 환경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사귐이 있으니까.

그게 뭐냐? 첫째 부활이에요. 이미 죽었지만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부활한 걸로 봐요. 이 몸이 주님의 몸이 된 순간 주님이 활동하는 주님의 몸이니까 주의 부활의 몸 또는 그걸 성경에선 성전이라 해요.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성전이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몸이 됐을 때 바깥 외부 환경은 뭐냐? 성경에서 찾아야지요. 아까 임대라도 괜찮은데 우선 성경을 거쳐서 왜 임대가 주님의 일인지를 봅시다.

출애굽기 1장 15절 누가 읽어보세요.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지금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잖아요. 요셉의 후손들이죠. 후손들인데 하나님이 가만둡니까, 아니면 바깥 외부 환경이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폭력이, 바로 왕의 폭력이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이 들어온 순간 산 속에 기도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 바깥에 말도 안 되고 우리 뜻대로 안 되게 죽여 버리라는 강력한 그런 환경을 주의 불가피성으로 주께서 이미 설정을 해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외부 환경의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이건 내가 받는 고난인 동시에 누가 받는 고난입니까?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인 동시에,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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