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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2 20:40:44 조회 : 114         
[21세기 지성] 서평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 21세기 지성] 매켄지 와크 저 한정훈 역 문학사상(경기도 파주:2019)

21세기 현존하는 사상가 21명을 뽑아서 그들의 사상을 나열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 군데군데에 저자인 매켄지 와크가 자기 평을 담아서 장단점도 아울러 피력하고 있다. 즉 사상가들이 저자가 보기에 한계와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사상가들의 본 뜻과 저자의 생각을 같이 보게 된다.

(1). 에이미 웬들링 Amy Wendling : 마르크스의 형이상학과 물류물리학

(2). 가라타니 고진 Kojin Karatani : 세계의 구조

(3). 파울로 비르노 Paolo Virno : 문법과 다중

(4). 얀 물리에 부탕Yann Moulier Boutang : 인지 자본주의

(5).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Maurizio Lazzarato: 기계 노예

(6). 프랑코 “비포” 베라르다 Franco “Bifo” Berardi : 상품화된 영혼

(7). 앤절라 맥로비 Angela McRobbie : 공예의 위기

(8). 폴 길로이 Paul Gilroy: 인종의 존속

(9).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절대적 반동

(10). 조디 딘 Joid Dean : 상징적 효율성의 쇠퇴

(11). 샹탈 무페 Chantal Mouffe : 민주주의 대 자유주의

(12). 웬디 브라운 Wendy Brown : 신자유주의에 맞서다

(13).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 위태로운 육체

(14). 아즈마 히로키 Hiroki Azuma : 오타쿠 철학

(15). 폴 B. 프로시아도 Paul B. Preciado : 제약-포르노 정치적 동일체

(16). 웬디 전 Wendy Hui Kyong Chun :프로그래밍 정치학

(17). 알렉산더 갤러웨이 Alexandre R. Calloway : 인트라페이스

(18). 티모시 모튼 Timothy Morton : 객체 지향 존재론에서 객체 지향 실천으로

(19). 퀭탱 메이야수 Quentin Meilassoux : 절대성의 스펙터클

(20). 이자벨 스텐저스 Isabelle Stengers : 가이아 침입

(21). 도나 해러웨이 Donna Haraway : 비인각적 코미디


1. 에이미 웬들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그것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다. 인간의 필요에 맞게 세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간 자신이 인간을 상품화하게 된다. 분명 본인들이 노동했음에도 나중에 보면 노동의 생산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지점에 노동이 있지만 점차 노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 된다. 생산물 속에서 노동한 당사자가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고 배제되는 것이다. 이 배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불안하고 위태롭게 만든다. 재분배를 통해서는 보완되지 못한다.

더구나 이 과학시대에 들어와서는 작업자는 주변 기계 장치로 전락되었다. 노동은 더 이상 자기실현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피로를 우발하는 에너지의 소모품에 불과하다. 개인이 노동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방되어야 하지 않는가?

비록 노동은 인간을 사물로 만들지만 과학적 사고는 자유로울 수가 있다. 여기서 ‘과학유물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지만 도리어 도구가 인간을 사용하고 인간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것이다.

2. 가라타니 고진

그동안 인류사에서 세 종류의 교환 양식이 있었다. 교환 양식 A는 증여의 호혜성이다. 교환 양식 B는 야만적 폭력 또는 규율과 보호이다. 교환 양식 C는 상품교환을 나타낸다.

유목민족은 상품을 비축할 수 없었으며 다만 순수한 증여를 위해 모았다. 그들의 사회는 이동성과 평등의 사회였다. 씨족 사회는 일단 정착이 이루어지면 증여의 호혜성만 발전시켰다. 씨족 사회 구성원들은 증여의 호혜성에 의해 평등해졌지만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았다.

따라서 고진이 제시하는 교환 양식 D는 평등하면서도 자유로운 유목생활로의 복귀를 구상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생산양식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교환양식에 치중해야 한다. 오늘날 시장에서의 교환 양식 C는 상호 의무나(교환양식 A)나 무자비한 강요(교환양식 B)와 다르다. 양식 C에서는 거래가 끝나면 상대방은 공동체나 통치자에게 더 이상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된다.

교환 양식 D는 시장경제(양식 C) 위에서 호혜적 공동체 (양식 A)를 복원하는 시도다. 이 시도를 위해서는 국가 주도적이지 않아야 한다. 범국가적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 보편종교가 필요하다. 이를 테면 유대인들의 신은, 그들의 국가가 실패했을 때에도 그들의 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의 패배는 결코 그들의 신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공동체와 국가, 화폐를 초월하는 신의 능력을 의미한다.

네이션nation(민족)은 상상력을 통해 교화 양식 A와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시도로서 사회 형식 내에서 나타나는 자본-국가(state스테이트)의 지배 하에서 해체되고 있다. 민족은 자본-국가에 의해 형성되지만 동시에 자본-국가가 초래하는 조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형태이면서 자본-국가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민족은 종교를 사람들에게 영원성의 감각을 주는 것으로 대체한다.

고진은 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발생하는 자본에 대한 투쟁의 한 형태라면,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탈하려는 운동이다. 노동조합은 생산에 중점을 두지만 협동조합은 유통에 중점을 둔다.

3. 파올로 비르노

현대인의 삶 형태를 분석한다. 농업의 상품화가 도시의 산업 노동자 계급을 만들어내기 전에 부랑자와 노상강도를 만들어낸 것처럼, 오늘날에는 공장 노동에 무관심하고 교대 근무가 지속되는 생황의 외부에서 서툰 밀폐된 대도시 거주민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多衆(다중)이다. 다중은 국민이 아니면 ‘통일되지 않는 다수’다.

다중은 결코 편안하지 않으며 항상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 근거지 상실과 평범한 곳에 대한 의존성이 함께 있다. 다중은 ‘일반지성’을 찾는다. ‘고통의 장소’다. 일반지성은 일반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의 포괄적인 인지적, 언어적 능력은 생산단계 내에 비치되면 공공 영역이나 정치 공동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 외부의 탈정치적이고 대표성 없는 민주주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개인화이다. 국민은 국가가 생산하고 또 그런 사실을 자신들의 합법적인 기원 지점으로 주장하는 반면에 다중은 반국가적이고 따라서 비국민적이다. 현대에 와서 국가라는 제도는 쇠퇴하고 있다.

4. 얀 물리에 부탕

부탕이 주목하는 건,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매개체이다. 오늘날의 정보 산업단지에는 더 이상 희소성과 육체노동에 의존하여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重商主義(중상주의:국가가 보호무역주의를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와 산업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認知(인지)자본주의다.
지적활동이 거래 가능한 자산으로 전환됨에 따라 업무는 비물질화되고 기업이라는 윤곽은 불분명해졌다. 금융화는 생산이 더 이상 단순히 노동과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닌 때에 생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이 되었다. 노동을 시간 단위로 측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인지자본주의는 이른바 비노동 혹은 디지털 노동을 비롯해 전통적인 노동 외의 것에서 가치를 포착할 수 있는 공간적, 제도적 형태를 찾는다.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이 혼란을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금융이다. 기업의 가치는 무형화되었으며 회계 규정으로도 자식의 가치를 제대로 포착 못한다. 가격은 금융 시장을 통해서 거래자들 사이의 의견교환에 의해 결정된다. 꽃가루에는 꿀벌이 필요한 법이다.

5.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사회는 역할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남자이고, 당신의 여자다. 또는 당신은 상사이고 당신은 노동자다 등등. 사회적 종속은 각 개인을 정체성-그리고 신분증-를 가진 개별적 주체로 생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적 종속과 반대되는 기계적 노예화가 진행된다. 기계적 노예화는 주체화되지 않는 흐름과 파편을 만든 다음, 그러한 주체를 기계의 구성부분, 즉 노예단위로 바꿔버린다.

사회적 종속이 주체를 만든다면 기계적 노예화는 개인을 만든다. 그것은 자기를 분열시키고 자기 일부를 인간 이하의 주체로서 기계적인 과정의 여기저기에 부착한다. 기계적 노예화는 개인, 인식, 언어에 앞서 그리고 개인을 초월하여 영향을 미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자본은 종속과 예속화의 차이를 이용한다. 실제로 일을 하는 건 기계이지만, 가치는 초라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나머지를 챙기는 사장에게 배분된다.

생산하는 것은 결코 기업이 아니다. 기업은 말 그대로 ‘공짜로’ 기계적 공유지라는 할당되지 않는 가치를 전용하고, 이익이나 임대료 형태로 그 가치를 손에 넣는다. 자본이 자연적 공유지를 전용하는 것처럼 여기서 기업은 사회적 공유지 또는 사회적-기계적 공유지를 전용한다.

이에 반해 개체는 영혼의 시장에서 자아를 화폐로 거래하는 투자자이자 채무자인 자유 계약자로서 다시 결속되어야 한다. 노동은 구성 요소에 불과한 프로세스이지 실제 노동이 아니다. 그저 장치의 일원이다. 더 이상 해석이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 통계 작업에 동원될 뿐이다.

6.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노동 절약 기술로 노동을 끊임없이 대체함으로써 과학은 자본 축적의 완전한 수단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잉여노동은 더 이상 일반적 부의 조건이 아니다. 우리의 시간과 돈을 위해 타인의 노동의 산물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시대다. 소통 부재가 아니라 소통 과잉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자아에 있어 고통스러운 분열이 일어나고 접근할 수 없는 타인에게 도리어 영혼조차 건드림을 당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한 때 노동자들의 영혼은 그들만의 자존감이 있었다. 욕망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 환상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나만의 개임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욕망이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계를 경험한다. 계속 나의 열정을 밀어붙일 노동 현장이 별로 없다.

주체성은 생산 과정에 선행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슬픔이 만연해졌을까? 연대감은 질식당했으며 열정은 소모적이며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상품으로 연결될 뿐이다. 나의 욕망은 전혀 신성하지 않는다. 욕망의 확산은 바이러스의 유포와 같이 타인에 의해 수시로 거절당한다.

7. 앤절라 맥로비

맥로비는 하위문화에 주목한다. 예술계는 항상 새로운 미학적 가치의 원천을 찾는다. 비록 그것이 예술계의 슬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대중은 문화를 만들지만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위문화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열망을 치환한 것으로, 대중 생산이라는 영역에서의 투쟁을 대중 소비라는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거대 자본이 들어와 소시민계급의 다양한 틈새시장을 식민지로 만들면 이 계급은 점차 프롤레타리화(노동자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한때 노동자 계급이었던 다양한 계층이 소시민계급이 된다. 자본은 더 이상 그들에게 일할 공장이나 사무실조차 의존하지 않는다. 안정장치가 없다는 단점이 도리어 틀에 박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좋은 조건으로 변한다.

하나의 문화 산업이 아닌 다양한 창조 산업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도시 경제는 젊은이, 특히 젊은 여성에게 성취감을 부여하면 개인적 성공의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낡은 노동계급 지역은 창조 계급을 위한 세련된 놀이터가 된다.

그동안 지배적 가치 체계는 창조적 경제의 성장과 재능을 부추겼다.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은 강도 높은 고소 고용과 자기 활성화 사업 영역에 드리워진 실업의 그림자 아래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노동주의자들이 여전히 자본과 노동을 둘러싼 고전적인 계급 대립을 핵심으로 다룬다면, 문화주의자들은 사회 형성의 정치 수준과 문화 수준을 동등한 본질적 요소로 취급한다.

자본주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일의 즐거움을 약속하는 매혹적인 제안을 하지만, 최근에 이러한 일은 불안정해지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발적 활동을 선호하고 단조로운 직업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걸 거부하려 한다. 이 또한 그동안 관행이 되었던 남성 위주의 분위기를 벗어나 노동과 문화가 연결되는 창조 산업 시대를 제시하고 있다.

8. 폴 길로이
‘같은 인간’이라야 하는 자들 끼리 ‘인종’이라는 개념이 들어서면서 ‘같은 인간’이라는 의식을 상실되었다. 모든 인종적 차별에 대해서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흑인 민족주의’를 옹호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친척과 친족을 넘어선 급진적 포괄성을 지닌 인간 범주이어야 한다.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처럼.

상대 인종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된 반인종주의의 투쟁은 그저 폭력만 유발할 뿐이다. 인종화된 인간에서 자연화된 인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은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화 형태로 변형될 수 있다. 미국 흑인들은 시민권을 얻기 훨씬 전부터 소비자로 인정받았다.

백인들이 구매하는 것을 흑인들이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반란의 형태로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체념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없다. 상품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걸 나는 가질 수 있다고 해서 상대에 대한 질투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물건을 가진다는 것이 보다 결속된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는 않으며, 권리 대신 물건을 얻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백인들이 가졌던 자동차를 어느 듯 흑인이 갖게 되면 백인들은 교외에 이주해 버려서 흑인과의 차별성을 유지하려 한다.

따라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서로의 문화에 대한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려는 결단이다. 이러한 결단은 근원적으로 인간성 속에 제한적인 주장의 근거를 없애게 해준다.

9. 슬라보예 지젝

보편적 주체에 관한 이론에서 힘의 작용을 언급한다. 주체란 외부의 억압된 힘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힘은 주체에 대해서 부정의 효과로 적용한다. 즉 첫째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힘을 과시하고 두 번째 그런 다음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힘을 과시하는 않는다. 첫 번째가 실재적이라면 두 번째는 상징적이다.

이 상징적 현실세계에서 힘이 과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힘은 여전히 상징에 내재되어 있는 ‘실재의 작은 조각’으로 존재한다. 이로서 주체는 흥미롭게도 자유로운 선택권을 갖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산물, 즉 공백(빈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빈 프레임, 즉 순수한 형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주체다.

반면에 자연은 항상 안정적이지 않으며 집단적 인간 노동은 항상 변화해 왔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인류의 역사가 자연 질서의 특성을 종식한다. 우리 인간은 자연 그 자체와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만나는 자연은 언제나 이미 집단적 인간 노동과의 절대적인 상호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길들일 수 없는 자연(우리가 이해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 노동력을 분리하는 간격은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동에서 마주치는 저항력이다. 자연은 이미 그 자체가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다.

여기에 철학적 상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간극, 공백, 균열이다. 길들일 수 없는 자연과 노동 사이의 균열은 영원히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자연 자체 내의 균열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 내에서 대두는 균열에 의해서 보완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정성의 힘이며 이 힘의 숭고한 표현이 곧 사건이다.

인간이란 공백을 지닌 사건이 남긴 결과물이다.

10. 조디 딘

산업자본주의가 노동을 착취한다면 소통자본주의는 의사소통을 착취한다. 의사소통은 창의성을 포착하는 장소다. 하지만 접근, 포용, 참여라는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일종의 사회적 괴짜들은, (이를 테면 해커집단 같은 컴퓨터광들을 말한다.) 그들만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만의 이질적인 이익 영역을 구축하고, 자본도 노동과 무관한 상품을 생산해 낸다. 이들은 현 사회에서 추방된 매개자들이며 변방으로 밀려난 자들이다. 그런데 무엇에 의해 밀려났는가?

무의미한 산만함에 집착하는 너무나 인간다운 능력은 인간을 스스로의 불가능성에 몰아넣는다. 상대방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포식하는 것이 유행하는 포식자산업은 더 이상 소통 방식을 향한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욕망은, 결여된 사물에 대한 하나의 욕망이 이끌리지만 동력은 늘 반복적으로 욕망에 도달하는 것을 실패하게 한다.

소통을 더욱 가속화하고 싶어 하는 행위가 도리어 히스테리컬한 유형을 낳으면서 소통이 쉽게 와해되게 한다. 사람들은 검색하고 또 검색하고, 블로그하고 또 블로그하고, 남의 정보를 훔치고 또 훔치지만 아무 누구와도 소통이 오래 지속되지 아니한다.

나는 나게 특정된 메시지와 나의 정체성을 일치되게 수신하지 못하고 자아 형성에 늘 실패한다. 온라인 퀴즈를 풀어내려 끝없이 노력해봤자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잘대로 알지 못한다. 상징적 효율성의 쇠퇴는 허구와 현실의 수렴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욕망이 욕망하기를 욕망하는 간극에 머무르는 상징적 정체성이 세계라기보다는, 유희의 약속에 의해 유지되는 상상적 정체성의 세계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는 대중의 뒷구멍들은 모두 침묵에서 쫓겨난 소음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정체성을 찾기 보다는 ‘정체성 이후’의 존재들이다. 이는 곧 나의 의미보다 내가 하나의 정보자로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물음 당한다. 늘 철회하면서 참여하는 조각난 인생, 이것이 정보 사회의 실정이다.

11. 샹탈 무페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자유인의적일까 아니면 민주주의적일까? 미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 내에서 ‘미국인 우리 대 미국인 아닌 그들’의 버전이다. 이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이며 구성 요소 밖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국민은 헌신과 소속감이라는 공유된 감정 구조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 경계에 있어서는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윤리적인 보편적인 완전한 정치체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최선의 상황을 달성하는 욕구에 의해서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정치체제가 작용해야 한다. 보편적인 평화와 정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는 없다. 경쟁적 충돌의 목적인 타인을 말살하는 것도 동화시큰 것도 아닌 하나의 대립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이한 접근법들 사이의 긴장은 다극화된 세계를 특징짓는 다원주의를 증진하는데 기어한다. 모든 사람을 화해시키지는 않지만, 우리/그들의 경계라는 제약 속에서 다원주의의 몇몇 수단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제한된 미덕이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으로 특정 국민의 정치가 아닌 개개인으로 구성된 추상적 인류의 정치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재산권을 소유하고 자신의 일을 돌볼 개인의 권리가 보호받는 보편적 정치체제를 꿈꾼다. 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몇몇 유형의 평등 속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을 상정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동등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대적이다. 심지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한다.

민주주의의 논리는 사실상 ‘국민’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폐쇄 시점을 암시한다. 자유민주주의 모델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시점을 다르게 협상할 뿐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서로 다른 감성적 집단의식의 표출을 통해 협상과 재협상의 구조적 역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추상적 개인주의와 민족의 특수성 사이의 긴장감 역시 정치 형태의 창의적 타협을 가져온다. 국민개념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하나로서의 국민이라는 이론(자유주의)에 맞서고, 다중으로서의 국민이라는 이론(탈자유주의)에 맞서서, 국민이란 분열된 존재이다.

12. 웬디 브라운

정치에서 합리성, 이성의 규범적 질서를 앞장 세워버리면 필히 민주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독점적인 경제자유주의로 전락한다고 보고 있다. 경제 성장, 자본 축적, 경쟁 우위 확보만이 국가의 유일한 프로젝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시장의 자연성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이론)는 이상적 형태의 정치와 민주주의 모습에 대한 특정한 강박관념을 주입한다. 시장이 세계를 지탱하는 신앙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화될 수 있는 것만’의 영역 확대를 시도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달리 신자유주의는 거기에는 인적 자본으로 간주하는 ‘경제 인간형’만이 존재한다. 즉 서로 경쟁하는 자본의 종류만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금융자본 모델에서 자신의 가치를 축적하고 중대하고자 하는 투지 단위의 불평등한 분야로 여겨진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닌 경제적 자유를 말한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보는 건 소시민계급의 세계관이다. 여기서 노동은 하나의 범주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자본만이 죽은 노동이 아니며, 기존 노동은 멸종되고 자본만 남는다. 자본은 사로 경쟁하면서 다양하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인적 자본이 파산하여 사라져버리면 시민권의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자율에 맡기는 국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경제를 위해 국가를 활성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기능을 수행하거나 경제 효과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서의 경쟁과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사회를 경제화하는 것이다.

경제가 2차 대전 전후시기에 정적이지 않은 것이 되었다면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와 국가 모두 같은 가술에 의해 변형된다. 선진국의 과잉 개발된 세계가 되었다. 시장 또한 평등하지도 않고 자유롭지 않다. 가격 신호만이 복잡한 경제에서 합리적인 정보 관리와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 거래 비용이 효율성을 상회하는 경우 비시장적인 회사(독점적 회사) 조직 형태가 우세해진다.

특히 가족관계에서 신자유주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돌보고 요리를 한다. 가족은 경제화 될 수 없는 비시장영역으로 남아 있다. 가족은 필요의 공기면서 상호 의존성, 사랑, 충실함, 공동체, 보살핌의 공간이다. 이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너무 가혹한 희생을 강요하는 바가 된다.

자본을 상수로 유지하면서 정치 합리성의 체제에 브레이크를 걸어주어야 한다.

13. 주디스 버틀러

정치란 자신의 주체성을 넘어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정체성 정치’는 때로는 선택되지 않는 근접성 모드에게서의 차이를 넘어 정치적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더 넓은 개념을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체성 정치’는 ‘위태로움’을 늘 유발한다. 위태로움이란 고통에 대한 차별적 노출에 관한 것이다. 즉 왜 몇몇 인간 주체만이 주체로서 대우받고 인식되어야 하는가?

위태로움이 표출하는 건 그것의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약함이다. 공화주의 이상은 아직까지 감각의 민주주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주체로 보이지 않는 이 같은 궁핍한 육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성적 정체성이 불안정한 자들에게 불법체류자들이며 계급, 인종, 종교 또는 기타 배경으로서 차별을 당하는 자들이 위태로움에 노출된 자들이다.

정치란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므로 서 ‘우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스스로의 권능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식될 수 없는 이들이 발생하며 포함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정치의 한계가 넓혀져야 한다.

상호 의존성은 타인들에 대한 윤리적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하기도 전에 타인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행동을 가하는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이들이다. 그건 윤리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동일성을 지니고 오는 자들이 아니다. 상호적이기는 하지만 비대칭적이다. 이기심이나 이타심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이 나타날 때 그 타인은 나보다 더 우선권을 지닌다.

권리를 얻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은 동맹을 형성해야 하며 외양의 경계선 부분에서 긴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정치 행위자가 된다는 건 다른 인간과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행동하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죄 없는 자’만이 윤리적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법과 사소한 다툼을 벌인 성인 난민이나 흑인 십 대 청소년은 살아갈 만한 삶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14. 아즈마 히로키

2차 대전 후, 전쟁에 패망한 일본의 지배계급은 무기를 내려놓고 순수한 예식과 의식 문화를 고양하는 데 헌신했다. 이는 욕망을 물질이 아닌 형식으로서 살아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이 이러한 세속적인 관습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군국주의의 개입을 극복했다. 세속인은 계속 욕망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의 부정을 통해 인간이 될 가능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부정된 세계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니었고 그 결과 역시 역사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이 세속성이 80년대와 90년대에 와서 ‘미국화’된 즉각적 만족을 요구하는 소비자 문화다. 오타쿠 문화(‘덕후 문화’ 한 분야에 깊게 심취한 사람을 뜻한다.)는 그런 현상의 최전선이었다.

오타쿠 하위문화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60년대는 TV 만화영화 [기동전사 건담]이었다.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에 태어난 자들에게 관심을 끈 B급 몬스터 영화와 공상과학 영화 [메가존23]이다. 세 번째 물결은 1980대에 태어난 세대다. 그들에게 상징적 작품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고 추리소설과 컴퓨터게임이 뒤를 이었다.

오타쿠 문화의 산물은 무한한 모방과 불법 복제의 연쇄 작용으로 태어난다. 거대서사의 쇠퇴는 가부장적이고 국가적인 권위의 품격의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 ‘또래친구’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거대서사의 상실에서 오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그들만의 껍질문화를 개발한 것이다.

원본이 아닌 사본의 무한한 반복이 그들의 캐릭터 산업으로 이어진다. 집단적 무의식으로 상호 연결되기에 데이터베이스가 그들의 존재의 터전이다.

15. 폴 B. 프레시아도

사회가 자신을 여성으로 보기에 남성 호르몬제인 테스토스테론을 늘 복용하면서 사회가 자신을 특정성별로 지정하는 것을 반항한다. 이로서 이 사회는 새로운 산업 복합체가 필요하다. ‘육체의 정치학’을 실행하는 것이다. 남성-여성으로 구성되지 않는 새로운 성을 생산하는 사회이어야 하고 정치를 행사해야 한다.

이 분야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는 영역이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생산 과정의 원재료는 육체적 자기 만족이어야 한다. 즉 성적 즐거움이 가미된 노동과 생산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육체를 성적인 육체로 봐야 하는데 이는 각 신체기관이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성적 능력에 근거해서 나오는 힘으로 버티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이 열심히 살기 위해 보조 약제들이 계속해서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리콘은 가슴에 부착하는 것이나 팔에서 피부와 지방을 떼어내는 산업이 그런 것이다.

제약회사는 신체에 호르몬을 도입하고 안구에 이미지를 분사하는 제품을 내놓는다. 지금은 ‘부드러운 기계’의 시대다. 생명공학이 그 몫을 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신체에 성적 매력을 부여해야 한다.

그동안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차단해 왔다. 인간 존재 자체가 생식을 위한 신체를 갖고 있기에 정치적으로 이점에 대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유아용 유동식은 이미 모유를 대체하거나 보충했으며, 경구요 피임약은 가장 일반적으로 복용하는 처방 중 하나가 되었다.

호르몬 처방을 통해 ‘털 과다증’은 치료되고 있다. 코나 성형수술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신체를 사유재산으로서의 신체로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도와야 한다. 이처럼 새로운 ‘분자의 힘’은 육체 자체를 살아 있는 플랫폼으로 변형케 한다.

16. 웬디 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계는 아날로그적인가 아니면 디지털적인가? 태초에 코드가 있었다. 어떤 수준에서 사용자는 코드가 자체적으로 마술처럼 작동하기보다는 기계를 제어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코드가 그런 능력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서는 기계의 작업도 인간의 노동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분리하면 소프트웨어의 특정 프로그래밍 작업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프로그래밍이 산업으로 될 때 품질과 노동 규율을 관리하는 방법인 구조화된 프로그래밍이 등장한다.

구조화된 프로그래밍은 노동 분업을 가능케 하고 정형화된 프로그래밍 작업에서 기계의 작동을 보장한다. 구조화된 프로그래밍은 기계가 기계 자신을 관리를 작업을 채택한다. 이것이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이는 단계별로 사용자는 자신의 기계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에서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그래머는 더 강력해졌지만 컴퓨터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용자 역시 더 강력해졌지만 자신의 컴퓨터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프로그래머와 사용자는 기계의 물질성이 아닌 정보와 함께 작업한다.

소프트웨어가 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약칭이 되었다면, 하드웨어는 자연에 대한 상식적인 약칭이 되었다. 소프트웨어와의 상호작용은 우리를 훈련시켰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일정한 기대치를 창조했다. 또한 우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는 즐거움과 힘을 제공한다. 믿음을 준다.

이 새로운 미디어의 상존은 그러한 미디어를 간편한 미래로서 미래에 연결한다. 과거를 저장함으로써 미래를 더 알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미래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추세를 살펴보고 예측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기술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저장된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17. 알렉산더 갤러웨이

인터페이스interface(기계와 기계 사이에 주고받는 정보, 신호 전달)에 관해 사람들은 그 존재를 거의 눈치 채지 못한다. 이는 인간 세계에 있어 이데올로기(이념)와 유사하다. 이 인터페이스에 종사하는 노동현장은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똑같이 언제나 초조하게 흘러가는 정보를 주고받는 위치에 있다.

이 일에 관여하는 자들은 사실을 내면성도 공동체적인 생활도 필요 없다. 가족적인 공간도 필요 없다. 일자리 말고는 가진 게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근무 중이라는 말이다. 늘 노트북이나 휴대폰이나 모니터를 열어둔 상태다.

문화의 전달이나 표현과 관련해서 인터페이스는 역사와 정치를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된다. 컴퓨터는 효과를 제시하므로 서 세계 형성에 가담된다. 컴퓨터는 객체이 창조자가 아니다. 상태와 국면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예술의 경우, 그 가장자리는 항상 미디어 자체를 참조한다. 인터페이스의 형태 중에 더 특정적인 형태가 있는데 예술과 문화를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이 인트라페이스intraface이다. 인터페이스 내의 중심과 가장자리의 관계를 말한다. 중심과 가장자리 사이에는 항상 애매한 영역이 있다. 작업자도 미처 예측 못할 여분의 것이 풍겨 나온다.

일관성 없는 미학+일관성 있는 정치면으로 정리될 수 있다. 미학적-정치적 인터페이스에는 내 가지 양식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데올로기적(이념)인 것으로 여기서는 예술과 正義(정의)가 거의 동일하다.(지배적인 양식). 두 번째는 윤리적인 것으로 여기서는 정의를 위해 예술을 파괴해야 한다.(특권화된 양식). 세 번째는 시적인 것으로 여기서는 예술을 위해 정의를 추방해야 한다.(용인된 양식). 마지막 네 번째는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이는 예술과 정의의 모든 기존 방식을 파괴하고자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첫 번째 양식인 이데올로기적인 양식에서 윤리적 양식으로의 전환으로, 그리고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적 효율성의 쇠퇴’로 보고 있다.

어쨌든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일관성 있는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일관성 없는 미학에 속한다. 데이터는 ‘주어진 것’이라면 정보는 주어진 것에 차례로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걸 의미한다. 데이터가 경험적인 것이라면 정보는 미학적인 것이다. 이 미학이 인트라페이스 형식으로 현 정치 환경을 형성하다는 것이다.

단일 기계가 이미지의 확산을 생산하는 상태에서 다수 기계가 단일 이미지를 생산하는 상태로 전환된다. 정치 권력의 핵심은 표현 불가능성이다. 오늘날 핵심은 이미지가 아닌 네트워크, 컴퓨터 알고리즘(논리순서), 정보와 데이터에 있다. 또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

18. 키모시 모튼

하이퍼 객체Hyperobjects는 우리 안에 있는 동시에 우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유령 같이 비지역적이며 곳곳에 스며드는 존재를 말한다. 객체는 독특하다. 객체는 더 작은 객체로 축소되거나 위쪽에 더 큰 객체로 용해될 수 없다. 객체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자신에게서도 멀어진다. 객체는 외면상의 자기보다 더 큰 내면이 존재한다. 객체는 불가사이하다. 그러므로 모든 객체에 가치와 이미를 부여하는 최상위 객체란 없으며, 모든 객체가 축소될 수 있는 최하위 객체도 없다. 이를 통해 그 어떤 종류의 전체주의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객체지향프로그래밍은 자신의 작업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객체의 세계다. 하지만 산업적, 상업적 이유에서 비롯하기에 원래 존재로는 그러하지 않다.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하이퍼객체 내부에 있으며, 그것이 방사성 폐기물이든 지국 온난화든 상관없이 하이퍼객체는 항상 우리를 가로지른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를 세상의 종말이라는 기이한 장소로 데려간다. 세상이 끝날 거라는 꿈에서 우리를 일깨워 세상이 이미 끝났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지식을 생산하는 특별한 실천이 있다, 그러한 실천은-노동이든 과학이든 상관없이-항상 인간적 노력과 비인간적 장치의 사이보그(합성인간) 혼합이다. 둘째, 은유와 이미지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실천의 일반화가 있다. 이는 일종의 노동, 지적 노동, 인간적 대화와 비인간적 의사소통 도구의 혼합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다른 두 단계를 삭제하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물리학이나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을 수행하는 실천이 존재한다. 그런 다음 하이퍼객체의 은유가 생성된다면, 이전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은유의 의존성이 삭제된다.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초월적 능력은 우주의 가장자리를 넘어 공간에서 적어도 은유적으로 떠다니고 있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로 전환되면 아니 된다. 비인간적 실천이 삭제될 경우 ‘단지 〜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하이퍼객체를 발견할 수 있다. 데이터가 외부에서 다른 앎의 방법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석유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세계라는 개념에 구멍을 뚫어 불태운 석유에 감사해야 한다. 석유의 산물은 이제 어디에서 존재하며 인류역사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플라스틱 쓰레기의 하이퍼객체로도 여겨진다.

원자력 방사선과 내부비계 장애 물질 것도 하이퍼객체다. 이것들도 석유처럼 근대성의 쓰레기 부산물이지만 분리되지 못한 채 모든 것에 스며들고 있다. 대기 중의 탄소도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라 부르는 이러한 고차원 객체는 어떤 모습과 복잡한 촉수를 갖게 될 것인가?

19 퀭탱 메이야수

원화석은 우리 인간이 생기기 전에 있는 세계를 증명하는 화석이다. 빅뱅(우주 최초의 폭발)에서부터 은하, 행성, 심지어 작은 암석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우주는 수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는 우주가 오늘날 인간의 생각이나 언어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수학 자체를 실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주는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앎의 주체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수학적 설명은 비인격적인 것, 즉 인간 주체가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근본속성이 있고 2차적 속성이 있다. 2차적 속성은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이다. 나는 객체를 보고 느낀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그 객체에 관해 중요할까? 어쩌면 나의 감각에만 나타나는 게 아닐까? 반면 객체의 근본 속성 즉 수학적 본질은 외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수학적 근본 속성은 철학적 의미에서 실재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측정될 수 없다면 과학적 의미에서 실재하는 않는 것이 된다. 근본 속성을 측정하려면 기계와 노동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장치를 통해 근본 속성을 2차적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예컨대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치 판독 또는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 ‘상관주의’로 빠질 수가 있다. 상관주의는 순환논법일 뿐이다. 의식과 언어는 분명 세상을 향해 자신을 초월하지만 의식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초월하는 한도 내에서만 세상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 존재의 상호관계로서만 존재하는 공간일 뿐이다.

상관주의에서 벗어나면서 객체에 대한 사고를 구성하는 자기-관찰 주체의 중심성에서도 벗어나는 방법은 무얼까? 그것은 독단론을 버리고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관조적 실재론’이다. 나무에서 벌, 별에서 법칙, 물리 법칙에서 논리 법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실재로 붕괴할 수 있다.

이러한 붕괴는 모든 것이 멸망하도록 운명 지어진 우월한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어떤 멸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있는 우월할 법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절대성을 우연 그 자체의 형태로 부활하는 것이다.

20. 이자벨 스텐저스

취약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고 또 착취당하지도 않는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처음 자연인 가이아(지구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간주할 때 표현) ‘초월의 망각된 형태’다. 가이아는 매개자나 보증인 또는 원천이 아니기에 부정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에게 경고를 보낸다.

자본주의를 이대로 끌고 가면 ‘가이아의 침입’을 부를 수 있다. 가이아에서 오는 새로운 정보를 무시할 위험이 있다. 위험은 진보의 대가다. 과학에 대항하여 과학을 제대로 방어해야 한다. 과학이 상품화의 영원한 전진에 몸을 맡겨서는 아니 된다. 또한 국가에 의한 과학 장려에 현혹되어서도 아니 된다.

과학이 스스로를 국가에 그리고 국가가 일부분 설정한 의제에 정렬당해서는 아니 된다. 국가는 가이아의 침입 혹은 상품화의 요구에 맞서는 보호막이 되지를 못한다. 우리는 야만적이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 달려 있는 해답을 제시하는 연구들이 필요하다. 과학은 새로운 존재와 아이디어로 현실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자본 과학에 의해 국가와 지배 계급을 위한 일종의 문지기 역할로 제한될 경우에는 집중력 감소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과학은 일종의 독인 동시에 약이 될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이 어떠한 인공물도 필요치 않게 되도록 필사적인 노력만이 무엇이 독인지 무엇이 약인지 알 수 있게 한다.

21. 도나 해러웨이

크툴루Chthulu는 공상소설에 나오는 단어로서, 과거의 지구에서 이 세계를 공포와 공기로 지배했던 초고대 악신들에 관한 신화이다. 곧 원초적 괴물성이다. 이 원초적 괴물성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서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치명적 구성 요소들의 시간이 흐른다. 이 신기원은 뒤틀린 무수한 촉수를 가진 땅, 시간성과 공간성과 물질성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지구라는 지속적인 힘의 카이노스kainos(새로운 시작)다. 카이로스는 고대이면서도 고대가 아닌 두껍고 울퉁불퉁한 현재의 시간성이다.

‘뒤틀린’이란 서로를 깨트리고 분열시키는 파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광포한 가이아의 횡포다. 끊임없이 굴절하는 세계 속에서 가능한 지속성을 구성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공통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실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상호 배려와 배움이다.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완벽한 단결, 대칭성, 정체성, 순수성과 같은 낡고 가부장적인 천상의 신의 잔재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올바른 사랑을 가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부적절하며 결코 합당하고 깨끗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려는 이때 중요하다. 반려 종은 육체를 통해서 서로를 채운다. 서로 기생하며 서로를 잡아먹지만 또한 서로 공모하고 협력한다. 반려에는 동일 품종만 고집할 필요 없다. 유전자는 일반 품종을 생산하도록 만들어진다. 순수한 피와 고결함에 대한 담론은 좀비처럼 현대의 품종을 쫓아다닌다.

우리 인간이 자연과 문화라는 구조 안에서 동물을 보고 찾듯이 동물도 우리도 그렇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을 자신으로 알게 되고 그 부름의 주체가 된다면 개, 역시 그렇게 된다. 개와 인간이 서로를 훈련시킨다. 인간은 일련의 장애물을 통해 개를 훈육한다. 이는 인간과 개 사이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존중과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동물을 인간의 대용물로 만들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노동이 자신의 작업과 연결되어 있는 지 모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이론을 만드는 건 커다란 실수다. 늘 외부를 향해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공유된 작업에 나서야 한다.

심지어 동물과 기계에 연결된 친족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구히 부분적인 정체성과 모순된 입장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정치 투쟁에 나서야 한다. 거주할 수 없는 특정한 것과 거주할 수 없는 일반적인 것, 거주할 수 있는 특정한 것과 거주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 구성된 사회에는 나쁜 총체성에 맞서는 좋은 특정성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복음적 평)

안간힘을 쓴다.
신이고 싶어,
작은 신이 되고 싶어
해볼 것은 다 해본다.
멀쩡하지도 않는 몸에서 멀쩡한 정신이 나올 리가 없다.
악마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처럼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 있다.(고후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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