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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07:30:00 조회 : 234         
겨울수련회 안내 이름 : 관리자(IP:14.44.77.240)
겨울수련회 안내

일 시: 2020년 1월 12~14일
장 소: 유성 유스호스텔 (대전시 유성구 학하중앙로 68) 전화 042-822-9591
제 목: 역사 검열(에스더 강해)
강 사: 이근호 목사
회 비: 10만원 (유치, 초등은 5만원)

수련회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해당 지역 담당자께 12월 15일까지 신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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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지역 : 이미아 성도 (010-9998-4171)
부산 경남지역 :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지역 :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지역 :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지역 : 김종인 집사 (010-8808-7111)
강원 지역: 정인순 목사 (010-2676-6823)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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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수련회 교재

역사 검열

-에스더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전제군주 체제

전제군주 체제에서의 정치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덕성을 가지고 일을 한다. 조국애, 참다운 영광 추구, 국가 이익을 위한 희생, 영웅적인 덕성으로부터 독립해서 전제군주는 존재한다.

전제군주 정치체제에서는 법률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므로 덕성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국가가 왕에게 그것을 면제시켜준다.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진 행위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오늘날에 있어 모든 범죄는 그 성질상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별된다. 사적인 범죄는 사회 전체보다는 특정 개인을 손상시키는 문제이다. 하지만 전제군주 체제에서는 공적인 범죄가 사적 범죄로 번진다. 따라서 군주는 비-정직한 자가 공직에 등용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전제군주정치 체제하에서는 신분적 권리 및 지위, 그리고 태생에 의해 계급이 정해진다. 각 계급에는 편애와 특권이 주어지는 데 이 특권이 바로 명예다.

명예는 전제군주 정치체제에 있어 모든 부분을 움직이며 또한 명예에 의해 여러 부분이 결합되어 이 명예 안에서 공동의 선(善)을 추구한다.

전제군주의 명예는 생명에 대한 경시로 나타나는 데 전제군주가 힘을 갖는 것은 그가 생명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전제군주는 아무런 규칙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백성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 군주의 명예가 정치, 법률, 생명까지 허락한다.

실제로 바사(페르시아)에서 국왕이 어떤 자에게 형을 선고했다면 그 누구도 국왕에게 사면을 요청할 수 없다. 만약 국왕이 술에 취하거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내린 판결이라도 역시 형은 집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국왕은 모순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제군주정치의 원리는 공포이며 목적은 정숙(靜肅) 즉, 고요하고 엄숙함이다. 평화가 아닌 백성의 침묵이다. 힘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와 국가를 세우는 데 공이 있는 신하와 군대에 있다.

전제군주 정치체제에서 군주는 모든 토지의 소유자이고 그 신하 전체를 상속인으로 지정할 수 있다. 국왕은 모든 상속재산, 아내, 자식, 집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 전제군주는 보통 여러 명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그들은 많은 자식을 거느리게 되므로 왕은 자식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고 자식들 또한 형제애를 느끼지 못한다. 아하수에로 왕은 11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음모를 꾸미다가 50명이 사형당한다.

인간은 자유에 대한 사랑과 폭력에 대한 증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고대국가가 이 정치 형식에 복종하는 이유는 여러 힘을 결합하고 신속히 작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제정치 체제에 있어 권력은 그것을 위탁받은 사람들에게 옮겨진다. 대신들은 전제군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백성에 대한 관리는 그들이 한다.

2. 반항하지 못하는 백성들

그 당시 인간들은 왜 이런 전제군주 체제에 반항하지 못할까? 반항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정치적 권력 환경의 일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 몸의 실존성이 전제군주 체제를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몸은 ‘세계 내의 존재’다. 개인적 몸은 일방적으로 바깥 세계를 보는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요구하는 대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몸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의식하고 권력이 스며들도록 조성된 몸이다. 반항이 되려면 인간의 몸은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반성을 해도 몸이 발휘하는 주체의 지평은 이미 제한되어 있다. 둘러싼 평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직관조차도 자기 몸의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초월하지 못하고 몸 형성용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쓰고 몸을 움직이는 식으로 생을 살기에 지성적, 감성적, 실천적 활동마저 몸이 자아내는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율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규율이 자율적 규율로 마음 내부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 당시에 바사 백성들은 전제군주 치하에서 원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몸 따로, 정치 따로가 아니라 몸 자체가 이미 정치화된 것이다. 이 정치화된 몸은 ‘생명’을 만끽한다. 사적 신체가 권력을 흡수해서 보다 확장된 ‘권력화된 개인적 몸’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전제군주는 이러한 백성들 몸이 요구하는 것(생명)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치적 기술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명-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행되는 잔인함과 공포는 수혜자 입장에서는 신나는 일이요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이벤트요 축제의 일종이다. 백성들은 ‘권력의 동력’에 몸을 맡긴다. 나라 자체가 모두 한통속이요 한 몸임을 감사한다.

이러한 현실성에서 새삼 발견해야 할 국가 권력의 본질이나 기원적 통일성이란 없다. 아니 필요치 않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기 전에는. 이로써 고대국가에서의 백성은 기계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의 구성은 ‘교환의 통합’ 덕분이다. 통합은 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친족체계의 층위이다. 두 번째는 경제의 층위, 셋째는 언어체계의 층위다. 친족체계의 규칙(규율)은 집단 간 여자의 교환을 보장하며 동시에 유전자의 교환을 보장한다. 경제적 층위는 재화(돈과 재산)와 서비스(용역)의 교환을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언어체계의 층위에서의 소통은 메시지와 예절과 의례의 교환을 보장한다. 혼인관계는 경제적 증여를 동반하고, 언어는 세 층위 모두에서 주도적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언어에 힘(권력)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3. 바닥을 보여주는 에스더
현실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자기 목숨보다 더 고귀한 것이 등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자기 목숨에 대한 평가는 늘 한결같지 않다. 때로는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한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환영받을 일이 생기면 자기 목숨을 사수한다.

‘괴로운 일’이 발생하는 것과 ‘위기’가 생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괴로움’이란 개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위기’란 괴로움 이전에 속해있는 소속감을 실감케 한다. 개인적으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책임용 금식에 나설 수 있으나 위기란 인간의 책임의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변동이란 개인이 개인의 자족을 조절하는 위치선정과 관련 있다. 가만두지 않는 것이다. 즉 위기 없이 여유롭게 홀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개인의식을 집단의식 속으로 섞어 넣어 버리는 것이다.

유대나라가 바닥을 치므로 그 바닥이 곧 세상의 밑바닥인 것을 알게 하는 위기다. 즉 언약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동성을 갖게 되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현상임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언약 제공으로 인해 성립된 세상나라와의 ‘단절성’을 하나님께서 양보하신 적이 없다.

세상은 형식상 적법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법에 부합한다 해도 거기서 정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세 행사만 나온다. 그것은 법이란 지금의 질서를 옹호하고 지탱하려고 이론적으로 계산과 예측 가능한 질서를 전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리나 정의(正義)는 반복이 가능하되 논리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것, 계산 불가능한 것, 따라서 결코 해체될 수 없는 것으로 출몰한다. 이렇게 되면 법을 따르는 판단은 정치적 판단일 뿐이다. 새롭게 등장한 진리에 의해서 현 질서의 정치는 판단 받아야 하고 분류되어야 한다.

분류는 분리다. 분리가 없이는 거룩도 없다. 강제로 분리하는 작업에 에스더와 유대민족이 말려들었다. 모래시계를 뒤집는 양상이다. 잡은 자가 잡힌 자에 도로 잡힌 것이다. 못 빠져나가게 하는 조건을 먼저 세상 나라 쪽에서 내밀었다. 유대나라가 내뿜는 언약 품에 세상 나라가 갇혀 있다.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당한 것이다. 유대 백성들은 존재이지만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네트워크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언약 나라는 미끼가 된다.

이 언약을 공격하고 물어버릴 때, 세상 나라는 언약을 공격하는 성격으로 무장되어 있음이 발각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언약 성취의 희생물로 충분히 활용하신다. 이 희생적 관계에 속하지 아니하면 구원의 승리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4. 특이한 신

역사란 신이 스스로 신을 없애는 방식을 성사시키는 무대다. 신이 스스로 사라지면 ‘낯선 무신론’이 형성된다.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것이다. 유대 백성은 외로움을 느낀다.

신앙인에게 있어 외로움이 곧 신앙의 위기다. 신앙은 이 역사에서 인간에 의해서 유지할 수는 없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내시는 무신론의 공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무신론적 태도가 보다 신앙적이다.

역사 안에서 즐기는 신비로움이란 사치요 여유 부림이다. 참된 신앙은 자기 삶에 대한 폭력으로 다가올 때 실감 난다. 이 폭력으로 인해 고상한 인격성이나 자아성은 들어설 자리를 잃는다. 다급하다. 영적 전쟁이 양쪽 다 치열하게 세속적으로 벌어진다. 신앙인조차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자기 본색의 부끄러운 바닥을 보인다.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살고 보자’는 식이다. 자아에 대해 멋있게 해석할 그 어떤 여지도 깨어진다. 구차하게 생존욕에 매여 빌빌거린다. ‘그’라고 3인칭으로 불렀던 그 거룩한 하나님 자리에 살아남은 ‘나’로 대체된다. 그동안 하나님 공간으로 알던 곳이 나의 공간이었고 그 공간이 이제 부재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을 절감하게 된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이 죽게 되는 개죽음이다. 둘러 썬 사회와 세상이 신앙인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신앙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 자체가 신과 함께 신이 없는 세계를 지상에 남기기 때문이다.

세상 쪽에서 볼 때 신앙인은 자체적으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그냥 죽어 마땅한 개다. 금식이란 바로 이런 기분을 찾아 파고드는 행위다. 중요한 점은 이 죽어 마땅한 죽음을 집단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약 나라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무신(無神)적 형식 속에서 비로소 신이 없이 죽은 분을 왕으로, 메시야로 알아 모시는 것이다.

승리는 ‘죽은 신’의 승리이어야 한다. 백성의 승리감과 감사는 그 주님의 죽으심에 의해 조성된 환경에 같이 참여하게 된 것을 소급적용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Ⅱ 본론

1. 줄거리
바사시대 때 아하수에로 왕 치하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 부림절의 내력을 설명하는 책이다. 부림절이 생기기까지 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절박한 경험을 지니게 되었다. 공격하는 쪽이 오히려 자기가 설치한 덫에 빠지게 된 경위가 어떤 경위였을까?

언약의 백성은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작용되었음을 다시 한번 역사와 만천하에 공개한 사건이기도 한 것이 부림절 사건이다. 그러면 유대인을 공략한 그 원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일단은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모르드개가 대표한 것이 언약의 민족이라면 하만을 대변한 것은 어떤 집단일까? 여기서 우리는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과 같이 유대인의 적으로 포함될 수 없음을 본다. 일단 중립 지역에 서서 하나님이 쓰시는 종에 불과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부림절의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무엇일까?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며 뛰어나며 월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애초에 그렇게 위대한 민족이 별거 아닌 민족에 잡혀가지 말게 하시든지, 잡혀가더라도 기적적으로 금방 탈출시키시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포로 귀환 때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들을 예루살렘에 귀환시키지 않고 남겨 두신 하나님의 계획은 새로운 형태의 출애굽을 보여주신다.

부림절은 포로 이후에 있어 유월절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7:3). 언약의 민족이 이방 민족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된 것은 배후에 하나님의 어떤 일관성 있는 법칙이 작용했는지를 알 때 하만의 잘못이 드러나고 유대인 즉 선택 민족의 본질이 밝혀질 것이다.

하만의 잘못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3:2에서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아니한 것을 빌미로 그 벌을 그의 민족 전역에 확산시키는 이유는, 왜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너희들만 특별나냐 하는 데에 대한 하만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것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도전은 단지 아각 사람 대 유대 사람의 대결이 아니라 하만이 왕의 권세까지 끌어당겼기 때문에 결국 세상 나라로 지칭되는 바사 나라와 유대인의 대결 양상이 된다(3:12-15).

여기서 유대인은 새로운 스타일의 출애굽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전 세계 인류를 한 민족화, 한 종교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동질성으로 취급하겠다는 세력으로부터의 출애굽이다. 여기서 ‘언약을 위한 출애굽 의식’에 새로운 사상이 부가되는 것이다. ‘출애굽’을 야기시키는 세력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 ‘인간의 이름’을 도모하는 비-언약 계통이 하고 이스라엘 쪽에서 새롭게 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비-언약 환경 속에서의 사상적 탈출은, 언약의 역사적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재조립하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여기에 어떤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특정 지역 내에서나 특정 민족만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이미 애굽에서의 탈출 사건에서 실습한 바가 있다.

거기서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선택’이라는 의미를 보다 넓혀진 역사 판에서 새롭게 부각할 수가 있다. 전 세계를 향하여 오직 우리만이 복의 근원이 됨을 외칠 수 있어야 유일한 선택 민족의 가치가 빛난다. 이런 의식은 바로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이런 의식 없이는 참된 선택된 민족이 아니다(4:13).

이 관점에서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될 때 민족과 종교는 고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나타난다(2:20). 그것은 이스라엘 여자가 이방나라 왕과 혼인하는 것이 율법상 옳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유대인으로 전 세상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그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종교와 민족에 대한 발설은 유보되는 것입니다(2:20/4:14).

이것이 출애굽의 재판(再版)이 되는 이유는, 승리라는 것이 누구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언약 특유의 법칙 때문입니다(4:16). 마치 어린 양의 희생이 출애굽의 근거가 된 것처럼 말이다.

에스더라는 왕비의 희생이 바로 온갖 민족이 같이 덮여 살아가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는 기능은 묵히지 않았다. 그 기념일이 바로 부림절이다. 곧 언약민족의 특이성 상실로부터의 건짐이었다.

에스더가 두 번씩이나 잔치 배설을 요구하고 난 뒤 하만의 처벌을 시도한 것은 왕의 사명과 하만의 목표가 일치되지 않음을 왕이 스스로 알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왕이란 하나님의 종으로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징치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져서(6:1-9) 비로소 에스더는 자신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었다. 하만의 처벌과 파멸은 하만적 사고방식의 영원한 실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결코 어떤 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 언약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보였다.

시대의 모든 흐름과 분위기는 전부 이스라엘의 하나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에 있어 거룩이란 형식 차원을 넘어서 성속(聖俗)의 차이는 얼마나 언약에 기대를 거느냐에 달려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Ⅲ 결론

합창은 혼자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 금식(=외로움)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금식(=외로움)도 중요하다. 신은 사라지고 인간만 남아 역사를 구성하는 이 현실에서 누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4:16)!” 언약은 이 정도로 우월한 가치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찾아내 모집한다(신 30:3-4). 이 가치성은 언약 백성에게는 일상의 심심함 속에서 때로는 위기로, 심판의 징조로 다가온다. 다 잃어도 상관없다는 의식이 도리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용기와 기쁨이 생기는 동기다.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언약 행사로 다 잃게 되었다는 동지의식이 에스더 집안의 공로로 멈추지 않고 모두의 승리가 되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승리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

이유도 모르는 채 찾아든 낯선 외로움, 이 십자가로 인한 외로움 속에서 성도는 이미 평생토록 집단적으로 해야 하는 금식 생활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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