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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 05:42:40 조회 : 54         
서울의존강의20191107a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0.16)
서울의존강의20191107a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6절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마음.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그 마음을 알게요, 바깥의 행동을 봅니까? 행동을 보죠. 이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 신기한 게 뭐냐 하면, ‘고난’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 고난이라는 말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 또는 주의 일의 일부 또는 절차가 된다는 겁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겠죠. 선한 일을 하면 뭘 받는다? 고난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이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필수적으로 여기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난 받는 이것이 굉장히 행복한 현상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 굉장히 행복한 현상이에요.

그러면 악한 양심, 악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기피하겠죠? 고난 안받는 쪽으로 가겠죠? 그럼 고난은 하나님 일에 필수적인데 고난을 제거하고 없애겠다는 말은 하나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 되느냐 하면 본인의 본색이 그만 그대로 노출된 겁니다. 인간의 일은 뭐냐, 선을 행하면 고난 받기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 고난도 사라지기. 이러한 과정을 어떤 사람이 그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해놓고 그 뒤에 이는 너희라는 말 앞에 무슨 말이 있어요? 그냥 너희가 아니고 앞에 뭐 붙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다 이 말이죠.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 있어서 정말 너희 마음이 선한 양심, 선한 마음이라면 반드시 고난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지금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드냐, 어려우냐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나는 너를 통해서 주 안에 있는 사람의 그 흔적을 난 보고 싶다는 거예요. 네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살고 있다는 어떤 증빙 같은 것, 그런 것을 보고 싶은데 그 하나님이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증빙이 다른 게 아니고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고난 받으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라고 하겠죠?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악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있고 하나는 선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있는데, 악행을 해서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선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고난이다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 있을 때, 우리가 두 종류로 한 번 나눠봅시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사람이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그걸 따져 봐야 되겠죠.

첫 번째로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은 필수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다. 성경에서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그걸 이해하는 우리 쪽,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특정인이 아니고 보편적, 일반적으로 규정을 했는데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싶은 사람이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고난 받을래요 라고 나선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해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흉내내기, 그냥 성경말씀이니까 나도 이렇게 얼추 비슷하게 한번 흉내나 내보려고 뭐 말이야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이 필수다 라고 하는 그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점은,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포괄적이에요. 포괄적인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고난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개인적입니다. 사적인 욕망이 있어요, 사적인 욕망. 그 욕망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든 내가 구원받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있어요. 성경말씀을 가지고 구원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고난 받으라면 고난도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고백도 해보고 하여튼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건 다해요. 그럼 하라고 한다 해서 다 해버리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까? 성도가 아니죠.

자, 이 문제에요, 이 문제. 인간의 마음이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야기하는 포괄적인 마음 중의 하나가 되어야 될텐데 인간은 사적인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역량이나 그런 힘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을 변경시킨다든지 빼고 다른 마음을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이 있어요, 인간에게? 그런 자질이 있습니까?

가끔은 노래 가사에 보면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하죠.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가을엔, 이렇게 해놓고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이 말이죠.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양심, 마음. 그리스도가 만든 마음과, 선한 양심이죠. 그리스도가 안 만들어주면서 자칭 자기가 선한 마음이라고 우기는 사람과의 그 구별도 해야 되겠죠, 그 구별을.

그 구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스키타이의 전사들은요 자기의 노예가 있는데 노예를 다룰 때 두 눈을 뽑아요. 사람이 눈이 없으면 맥을 못 추잖아요. 그러니 노예가 노예답기 위해서는 두 눈을 빼고 그 다음부터는 채찍가지고 계속 후려치면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옛날에야 뭐 계급사회고 그리고 그 노예들이 다 전쟁에 이미 패배했기 때문에 실은 죽은 자인데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노예로 팔려 온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것 있죠? 전쟁에 패배할까 겁이 나서 미리 고개 숙이고 물 긷는 사람 되는 거 있죠? 기브온 사람인가. (여호수아 9장) 예, 우리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물 긷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래서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하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알아서 기는 거죠, 뭐. 전쟁에서 힘이 없으니까.

이 스키타이 전사가 노예를 아주 가혹하게 다뤘어요. 행여나 그들이 노예되기 전에 뭐였는가. 노예되기 전에 자기 나라, 자기 민족에서는 자기가 자유자였잖아요, 그쵸? 자유자였는데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갑자기 노예생활 할 때 속에 있는 응어리 진, 내가 언젠가는 두고 봐라 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그러니 그걸 사전에 없애기 위해서 두 눈을 다 빼는 거예요. 이제는 그냥 인간으로의 가치를 아주 없애 버리는 겁니다. 우리들이 밥 먹이니까 너는 살아 있는 것이지 너 식대로 두 눈뜨고 열심히 네 가치를 높이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다 그러니까 너는 어쩔 수 없이 노예 하는 걸로 그만 감사해라 이렇게 가혹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스키타이 사람들이 다른 나라 전쟁한다고 전쟁하러 전부다 나가 버렸어요. 노예들은 전쟁 안나가니까.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 스키타이 노예 어른들은 두 눈을 잃었지만 스키타이 전쟁에서 낳은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눈이 멀쩡할 거 아닙니까? 멀쩡하겠죠. 걔들이 드디어 민족의식이 싹트는 거예요.

출애굽기 초반에 보면 모세가 비록 바로 공주의 아들이지만 그 마음 속에는 뭐가 움틉니까, 싹틉니까? 언젠가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마음이 싹트죠. 싹트네 싹터요~ 하는 노래 있어요. 싹이 났죠.

그래서 드디어 그 애들을 앞장세워서, 그들은 눈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얘야, 앞에 나가서 적들이 언제 오는가 봐 전쟁에 나갔으니까 반란을 일으키죠. 내란을 일으켜 가지고 그들이 언제 오는가 봐라 해가지고 그들은 열심히 창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전쟁하고 왔는데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주인들을 대항해서 무기를 다듬어서 달려드는 거예요. 그럴 때 스키타이 전사들이 창을 들고 그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채찍을 들고 탁탁 쳐버리니까 들고 있던 무기 다 놔 버리고 다시 돌아왔어요.

왜냐하면 그 채찍 소리가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을 자각시켜가지고 그래 우리는 노예야. 노예되는 거예요. 아, 우리 노예지. 이러면 안돼. 이거는 채찍소리만 듣고 손 다 놔버린 거예요. 일본을 이긴다. 한국사람이 일본을 이긴다하죠. 그러면서 스끼다시 하나 주세요. 하고 후루꾸가 어떻고 뭐. 갑자기 일본 뭐라고 하면 예. 자기 본성, 일본에게 우리는 밀린다는 한국 사람이 잊을 수가 없어요.

제 말은 인간의 마음이 본인이 만든 게 아니고 꾸준히 그동안 우리에게 누적된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누적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에 와봤자 그 마음, 새 마음 아닙니다. 그 마음 새 마음 아니에요. 새로운 마음 아닙니다. 옛날 마음 가지고 흉내내고 있는 거예요. 옛날 마음 가지고 흉내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 받는다 하니까 그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거예요. 나 예수 믿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착한 일인데 그 착한 일 했으면 복을 줘야지 고생을 하다니 이건 말도 안됩니다. 버티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을 내가 말씀드리면 개인적인데, 개인적인 것들, 개인적+개인적+...하면 그들은 무슨 결론에 이르냐 하면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겁니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시장통에 가서 아주머니들 이야기하는 것 쭉 들어보세요. 그 이야기 쭉 들어보게 되면, 뭐 세상 이야기, 여러 가지 자식 이야기 하지만 그 밑바닥에 늘 깔려 있는건 뭐냐 하면 난 어디까지나 착한 사람이라는 의식입니다.

그 착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졌으니까 어떤 사람이 만약에 교회가자고 하면 에이, 착한데다가 더 착하게? 착해봐? 착함의 절정에 한 번 이르러 봐? 교회 안다녀도 착한데 교회 다녔으니까 나는 착함의 업그레이드 해봐? 그런 마음으로 교회 오겠죠. 그러면 교회가 행복한 교회 같은 경우에, 당신은 사랑받기에 합당하고 행복합니다 하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라. 착한 인간에게 복 준다는 거. 다른 사람들은 말을 안하는데 교회 오니까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주니까 나 이제부터 이 교회 다닐래, 나 이 교회 다녀서 천국 갈래. 이게 바로 영업 비밀 아닙니까. 영업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그게 영업 방식이거든요.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의식이 기본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그게 전제로 되어 있어요,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만약에 착한 사람이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아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다 이렇게 하면 그래 내가 착한데다가 또 추가해서 예수까지 믿는 착한 짓을 했기 때문에 내가 고난 받을 때 나는 드디어 천사 레벨이다, 천사 수준에 이른다 라고 얼마나 자긍심이 커지겠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뭘 제거해야 돼요? 착한 사람이다. 나는 원래부터 엄마도 그러고 누구든지 나는 착하대. 그러니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알고 있다 라는 이것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볼 수 없잖아요, 그렇죠? ‘착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고난이고 뭐고 고생이고 와도 합당한데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될 때 이것이 성경에서 규정하는 성도의 규정과 내가 받아들이는 성도의 규정과 이게 합치가 되는 거예요. 선한 양심이라는 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선한 양심이에요. 선한 양심이, 그리스도 밖에서도 선한 양심인데 예수 믿어가지고 선한 양심을 더 보태는 게 아니고 나의 선함이 예수 믿는다는 그걸 유인하는 게 아니고. 아 선한데 이왕 선한 거 더 착한 일 없나? 그렇지 예수까지 믿어줘야지. 이렇게 나의 선함이 스스로 시발점이 되어서 예수 믿어가지고 추가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선한 양심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어떻게 규정받습니까? 선한 양심 있어요,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선한 양심이 아니죠. 양심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라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마음 씀씀이, 그 마음가짐이 예수님의 뜻과 합치돼요, 합치 안돼요? 합치가 안된단 말이죠. 합치가 안되면서 자기 딴에 선하다고 우기니까 이게 더욱더 하나님의 뜻에 위반하고 방해하는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 분위기 너무 고요하다, 지금. 고요해요. 마치 메시아가 오기 직전같아. 사방에 눈이 오고 마리아는 안에서 기도하고 있고 천사가 곧 내려올 거 같아. 이 천사 분위기에요, 너무 조용해가지고.

죄의 규정을 지을 분이 하늘에서 따로 내려와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죄가 뭔지 의가 뭔지를 규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죄만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죄와 더불어서 같이 이것이 죄다 라고 알려줄 그 분도 같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뭘 증거했겠어요? 바로 죄를 증거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죄 규정은 엉터리라는 거예요. 또 뭘 증거하겠어요? 의를 증거하겠죠, 복음 증거하겠죠.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늘나라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천국 증거하죠.

그런데 증거했는데 이 땅의 사람들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동적으로 자기를 뭐로 봅니까? 선한 사람으로 보죠. 갑자기 이 땅에서 두 개의 선함이 배틀, 경쟁하게 생겼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선하게 보거든요. 자기 부모들이 자기를 그렇게 했어요.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착한 줄 알아요.

초등학교 앞에 가가지고 꼭 인터뷰 해봐야 압니까? 초등학교 가가지고 자, 의존교회에서 나왔는데 하나 물어볼게. 설교에 의해서. 네가 착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저 착하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 너는 착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착하다고 생각해요. 근거를 대라. 우리 엄마가 나보고 착하다고 해요. 네가 악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그런 건 없어요.

제가 물어볼게요. 대부분이 착한데 하나가 악하면 착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이 착한데 조금, 한 구석이 악하다면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에요, 악한 사람이에요? 들어오자마자 질문해서 죄송합니다만. 인간의 마음은 같은 마음 아닙니까? 같은 마음에서 악한 마음이 나왔다는 말은 비율이 다수가 착하다고 해도 항상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한 착함으로 봐주지 않습니다.

온전한 착한 마음이 아니면 거기서 죄가 무엇인가 하는 규정은 오류가 일어나요. 기계가 고장 났으면 제품이 하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내 마음이 착한 마음이 아닌데 착한 마음도 아닌 게 성경 보면서 자기가 이거는 죄고 이거는 죄가 아니고 성경이나 세상을 보면서 저거는 죄고 저거는 죄가 아니라는 그 판정을 우리가 믿으면 안돼요. 믿을 수가 없어요.

다른 분을 초청해야 돼요, 다른 분을. 제대로 죄, 제대로 의를 아는 분을 초청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초청할 마음조차 없어요. 왜냐 하면 죄와 의에 대해서 나름 내가 알기 때문에 이거는 죄다 아니다 자꾸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죄 규정으로 인하여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이게 발생돼요. 저런 놈은 감옥에 집어 넣어라 하는 게 발생돼요. 내가 아는 죄의 규정에 따라서 감옥을 만들어 놓고 저런 나쁜 놈은, 이 안에 있는 놈들은 나쁜 놈이 돼요. 저런 나쁜 놈은 교도소 집어 넣어야 된다 이렇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재판 받을 때 죄인으로 판정났습니까, 의인으로 판정났습니까? 재판 결과가. 죄인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자체에 따로 교도소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왜? 세상 자체가 교도소이기 때문에. 세상 자체가 감옥이거든요. 여기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다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감옥 안에서 이뤄지죠, 감옥 안에서.

포괄적이라니까요, 포괄적. 이 안에서 사람들은 전부다 개개인 자기 가치와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데 높다란 벽에 갇혔다는 생각을 그들이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들은 하지 못하고 뭘 만드냐 하면 교도소 안에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교도소 갇힌 인간들은 나쁜 사람, 정경심 같은 사람, 나쁜 사람. 나는 교도소 안 잡혔으니까 나는 어느 부류다? 착한 사람. 둘을 이렇게 나누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어디 갔습니까? 교도소 안에 들어갔거든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교도소 안에 죄수로 잡혔잖아요. 요새 같으면 수갑 채웠잖아요.

제가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 예수 안 믿을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 세상이라는 교도소 안에서 예수 믿는다는 게 죄에요. 왜 죄냐 하면 교도소 안에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인식을 못한 나쁜 마음, 온전하지 못한 마음, 착한 양심이 아닌 상태에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고 주님에 대한 모독이라니까요, 이게.

제가 유튜브 강의에서 교회 기둥에 뭐 붙이라 했는데, 기둥 두 개에 표어를 하나씩 붙이라 했죠? 한 쪽은 믿지 마!, 한 쪽은 오지 마! 기둥에 한 번 붙여 볼까요? 만약에 예배당에 기둥이 여기 있다면 보통 예배당 기둥이 있다면 뭐 써붙이잖아요, 뭐 선지자에게 잘해라 그런 거 붙이잖아요, 성경구절. 여기에 오지 마, 여기 한 쪽에는 믿지 마. 쌍으로 마, 마. 오지 마, 믿지 마.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야, 사람들이 그래 나 예수 안 믿을게. 이래 나오죠.

내가 예수 안믿을 수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그것은 가짜 믿음이에요, 그게. 언제든지 나는 예수 믿는 것을 철회할 수 있는 자율권이 나한테 있다는 그 자체가 이거는 예수님하고 장난치는 거예요. 그건 친목모임단체죠, 그거는.

예를 들면 진도 트롯 가수 송가인 가는데 보통 송가인이 이동하게 되면 대형버스 4대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뒤따라가요. 방탄소년단 아미 팬 못지 않습니다. 대형버스에 4대, 시작부터 끝까지 다 따라 다녀요. 뭐 봉 만들고 하면서 다 따라다닌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한사람이 만약에 그 송가인이라는 가수가 악수를 해야 되는데 악수를 안해줬다 그러면 삐져가지고 난 당신 팬 안할래. 그러면 그만인 거예요. 그만이죠, 뭐. 송가인 팬도 있지만 홍자 팬도 있거든요. 홍자 팬은 홍일병이라 해요. 그 사람들은 어딜 가든지 다 따라가요.

꼭 베드로 같아, 정말. 주님 가신 길에 다 따라가는 거예요. 어떤 마음으로?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마음으로 가요. 문제는 제자들이 선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자신의 선한 마음을 주님께서 호응을 해주지 않았던 거예요. 동조를 안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 믿습니다’에 대해서 예수님이 거기서 동조를 안한 거예요. 호응을 해주지를 않는 거예요.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들어갑니다. 예수도 안 믿으면서 오늘 성경 본문을 보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선한 양심을 갖게 되면 고난이 온다, 아니면 있던 고난도 사라진다. 어느 쪽을 원하겠어요? 선한 양심이라면. 왜? 선하잖아요. 선한 양심이 되면 고난이 오는 게 아니고 있던 고생도 끝이어야 되는데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선한 양심이 있다면 필히 뭐가 온다? 고난이 온다는 거예요. 이래도 믿을래? 그래서 사람들은 나 예수 안 믿을래. 이렇게 한다고요.

자, 여기서 일단 정리해봅시다. 죄가 뭐냐? 할 때 ‘이것이 죄라고 내가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돼요. 죄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이거 혹시 죄 아니야?’ 할 때 죄가 생겨요. 왜냐하면 이것이 죄이다 할 때 긍정적 개념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죄라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필시 그 뒤에 뭐가 배치되느냐 하면 이거 자칫하면 내가 손해보는 거 아닌가 라는 두려움과 걱정을 수반해서 죄가 뭐지? 이거 혹시 죄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죄짓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또 죄 없나? 이러지는 않는단 말이죠. 죄를 즐겨 짓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이거 혹시 죄 아니야? 내가 실수해서 죄 지은 거 아니야? 걱정이 되어서 죄가 뭐냐 라고 공포에 휩싸이면서 죄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 뜻은 관심이 없고 나한테 어느 것이 이익이냐 내 인생에 뭐가 손실이 올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갔던 자기의 모습이, 자기의 본색이 톡,하고 들켜 버린 거예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차타고 가면서 늘 뭘 보느냐 하면 기차 바깥에 풍경들이 있지만 어디가 눈에 들어오느냐 하면 바로 교회에 눈이 들어와요. 바로 예배당. 나도 빨리 졸업해가지고 저렇게 조그만 예쁘장한 예배당에서 단독목회하면 얼마나 좋겠노. 교인들은 많아도 골치 아프니까 그저 한 오십 명, 오십 명이 거저 되는 줄 알고. 그 때는 오십 명 거저 되는 줄 알았죠, 순복음도 있으니까. 욕심 팍 줄여가지고. 그냥 외치면 오십 명 되는 줄 알았지. 뭐 개 눈에는 똥밖에 안보인다고.

사적인, 개별적인 기대가 그 많은 건물들 속에 교회만 보게 했죠. 결국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교회를 골라 본다는 것은 이미 출발점이 나의 은근한 기대와 목표를 거기서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제시하는 기대와 목표는 나에게 손실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서 목표를 세웁니까, 내 가치를 높여 준다고 생각해서 그런 목표를 정하겠어요? 나의 가치를 높이죠. 그러니까 나의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악한 자로서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죄라니까요, 논리적으로.

그냥 내가 사는 것도 이 발걸음을 세시고 모든 공기 마시고 사는 것도 선물이니까, 공짜로 얻은 거니까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하고. 아, 내가 오늘 강의 잘했을까, 못했을까 혹시 내가 실수 안했을까? 혹시 내가 말 잘못해서 남한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아, 내가 그런 죄를 짓다니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렇게 생각이 번뜩 떠올랐던 그 자체가 갑자기 주님 생각에서 방향을 돌려서 누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 걱정하고 있잖아요.

그 동안 내가 내 걱정해서 내가 이만큼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 선물로 살았다고 이거는 소위 교회 조금 다닌 사람들은 입에 달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입에 달고 사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결국 은혜라고 언급을 하면서 자기의 마음은 나한테 손실이 될까, 이익이 될까 그것 계산만 하는데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요, 우리에게 죄의식을 남기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공로가 우리한테 기어이 못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놓고 ‘실수했다, 아 그것만 없었으면 완벽했는데. 아 그때 진짜 그 말 왜 했을까’라는 어떤 실수했다, 잘못했다 라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굉장히 애통해하게 하는 것, 그러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 힘으로 의인될 수 있고 죄인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제가 죄라는 것은 죄의식을 느끼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 것은, 그런 짓 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경우를 의도적으로 발생시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된 것은 결코 나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아니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가 아니라 못난 인간, 주의 은혜에 감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인식하게 하는 겁니다. 실수를 인식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선한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고난을 받는다 했을 때에 그 말씀을 지켜라가 아니라 네가 아무리 완전하게 살아도 고난 받는 것을 누가 그리워하고 누가 원하겠습니까? 자기 생의 목표가 고난 받는 겁니까? 일생의 목표가? 고난 받는 거다, 자식 출세하는 거다. 몇 번입니까? 자기가 고난 받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일이 잘 안되면 어? 당황스럽죠. 그게 우리가 독자적으로 온전치 않다는 뜻이에요. 독자적으로 온전치 않게 하시는 그 분이 온전치 않다고 여기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왜? 스스로 만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구조가 내 스스로 완벽함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아들 장가보내놓고 가끔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오게 되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늘 신경쓰이는 것이 아들한테 신경 안쓰여요. 혹시 며느리가 우리 집에 왔다 가면서 우리가 어른다운 행동을 못했을까, 허점을 보이지 않았을까 내가 말을 잘못해서 화가 나가지고 우리한테는 못따지지만 집에 가서 자기 남편을 아주 삶아버리던지 쥐어 뜯는다던지 괜히 우리 때문에 아들한테 해코지한다던지 자기 분풀이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죠.

걱정이 될 때, 그러면 그 며느리 누가 보낸 겁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거죠. 그러면 그 걱정을 통해서 뭐가 좌절되느냐 하면 나는 시가집 가족으로서의 모든 완벽함이 누가 왔다 가면 그게 한 곳이 무너져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가지고 전화 해본다고요. 며늘 아가야, 네가 너한테 뭐 없었나? 아이고, 그저 감사하죠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평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 들어야 이제 안심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며느리가 화가 덜 났구나.

따라서 인간은 결국 며느리 또는 딸 이렇게 하지만 결국 인간은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겁니까, 끊임없이? 내가 나를 감시하면서 선한 양심이 유지되도록 계속해서 자기를 점검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되니까 뭐가 날라가 버려요? 은혜 다 날라가죠, 은혜 날라 가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날라가 버린 거예요. 쥐고 있는 것은 나는 완벽해 그것만 쥐고 있는 거예요. 나는 완벽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책벌하지 마세요. 나는 할 도리 다 했으니까.

그러면 죄 안짓는 방법은 10분 후의 감정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10분 후의 감정을. 10분 후에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인지, 10분 후에 내가 어떤 감정인지 그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할 도리가 뭐냐. 그것만 내뱉어 버리고 그것만 할 뿐이에요. 10분 후 되어봐야 그 10분이라는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상황배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지금 그 상황 그대로 간다는 보장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들뢰즈라는 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상당히 음미할만한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희극과 비극을 반복해요. 이 말이 맞는 이야기인게, 한 번 웃었다는 기준이 설정되게 되면 그 웃음의 조건이 나중에 희미해져버리면 계속 못 웃게 되니까 상대적으로 뭐가 돼요? 비극이 되는 거죠. 그러니 이미 비극이 됐죠. 희극에서 비극이 됐죠? 비극 됐는데 갑자기 뭐하나 생기면 갑자기 기분이 업, 좋아지죠. 그러면 뭐 됩니까? 희극이 됐죠. 희극과 비극이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인생을 산다 이 말입니다, 반복해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아무리 나쁜 일 있어도 좋은 일이,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는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억지 주장을 하는데 희극과 비극이 반복된다는 말은 이렇게 (일직선으로 죽) 가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죽 이렇게 가는 법은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때문에 이걸 똑바로 펼 수는 없어요. 이미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것을 걱정하고 내려갔으면 올라가는 것을 또 기대하기 때문에 똑바로 가는 게 없어요.

자, 그러면 희극은 왜 생기느냐? 결핍에서 생기고 비극은 과잉에서 생긴다는 말을 했어요. 이것은 왜 웃느냐? 무식해서 웃고요. 왜 슬프냐? 과잉지식이 있으면 아는 게 너무 많아서 우는 거예요. 아는 것이 많으면 목표가 많아지게 되거든요. 지식의 과잉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지식의 과잉. 이 비슷한 이야기가 전도서에 있어요.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써도 아는 게 많으니까 기대하니 기대치가 높아지겠죠? 그러나 결과는 조용하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실망이 되죠. 비극 아닙니까? 실망.

지금 이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뭘 빠뜨리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 다 빠뜨리죠. 그러니 소소한 감사를 위해서 그저 희극이나 원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 희극할 때는 왜 웃느냐 하면 손을 이렇게 긁어요 (뒷통수를 긁으면서). 이히히 이렇게 웃거든요. 아이고 그건 몰랐네 그러면서 웃는다 이 말이죠, 겸연쩍어서. 미안한 투로. 아이고 내가 미쳐 몰랐어, 아이고 웃고 넘깁시다. 이렇게 웃을 때가 내가 그것까지는 몰랐다 할 때 웃는 거예요.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평소에 수학을 20점 맞는 애가 갑자기 100점 맞으면 걔가 100점 맞을 줄 몰랐잖아요. 아이고, 그거 잘했네 이러잖아요. 그런데 걔가 늘 100점 맞는데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면, 어쩌라고 뭐. 니는 원래 100점이잖아. 뭐 또 나한테 무슨 소리를 듣기를 원하는데?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이 탈이 난 거예요. 너무 많이 아는 게 말썽을 일으키는 겁니다, 많이 아는 게.

그런데 사람은 그럼에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완벽함에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완벽에 완벽, 철저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 수비 자세로 나가는 거예요.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하고 악은 멀리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어떻게 됩니까? 반대로 되죠. 공격적으로 죄지어라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죄라고 만약에 성경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성경도 죄라는 항목이 많잖아요. 뭐 간음, 음란, 탐욕, 당짓기 나오잖아요. 이것이 죄가 되어 버리면 인간은 그렇지 않아도 수비형으로 나가요. 죄 안짓는 쪽으로 도망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것이 죄다 하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빠져 나갈 길 없는 하나의 감옥, 교도소로 이미 확정을 지어 놓은 거예요. 교도소에서는 출세해도 죄수에요, 출세해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전부다 흰 두부라고 보면 돼요. 흰 두부 아시죠? 죄짓고 난 뒤에 먹는 두부.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올 때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어떤 규정을 갖고 왔는데 뭐냐 하면, 이것이 죄다. 나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고 그것이 지옥행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도록 왔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러 왔다는 것을 사람하고 의논한 적도 없고 일방적이죠. 그래서 일방적인 것에 대해서 마음 열고 안 받아들이면 너는 일방적으로 당한다. 이것이 성경의, 주님의,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내가 기다 하면 긴거야, 이런 거예요.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야. 포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증인이에요. 자,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의의 증인도 물론 되죠, 천국 증인도 되고.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그러면 성도는, 예수와 함께 있는 성도는 무슨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성도는 뭐가 되어야 될까요?

죄의 증인 돼야 되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여기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 보면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뭐를 당한다? 부끄러움을 당한다. 따라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는 이유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그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그들의 무지함, 그들이 잘못 생각했음. 그들이 자기 처지도 분간 못했음. 그런 것을 성도를 통해서 노출시키죠. 노출시킬 때 그 사람들이 개과천선하고 잘못되었습니다. 할까요, 아니면 핍박을 할까요? 당연히 핍박을 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 받죠.

자, 성도가 고난 받는 이유는 예수님이 고난 받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규정이 달라서 그래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규정이 세상 사람들의 규정과 달라서 그래요. 자, 세상 사람들의 규정과 왜 다른가? 세상 사람들은 뭐가 잘못 되었는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착한 사람으로 보는 이 시발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여기는 그 출발점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고난과 핍밥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18절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이렇게 되어 있죠? 참, 이런 말은 정말 어려워요. 함축해도 너무 함축이 많이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죄가 필요한 이유가 나타나요. 이 세상이 죄의 바다가 될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뭘 받기 위해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참, 이걸 이 고요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걱정 되는데요. 다시 한 번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냥 하려고 하니까 참 논리가 너무 어려워서 그런데 쉽게 가겠습니다.

인간의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죄에 있는 게 아니라, 죄가 뭐고 의가 뭐고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그냥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인간의 관심사가. 일단 밥 먹고 살고 남한테 욕 안얻어먹고 남한테 사랑받고 사는 거. 그게 다예요. 밥되고 건강되고 사랑되고. 이거 합치면 행복이지 뭐가 있어요? 밥을 다른 말로 하면 돈되고 건강되고 남한테 우대받고.

악마의 첫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 아닙니까? 뛰어 내려라, 받쳐 줄 것이다. 네 몸 아픈 거 너 무섭지? 천사가 와서 안 다치게 한다면서? 이게 시험이잖아요.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삽니까? 밥심으로 산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무슨 힘? 복음으로 산다. 지금 이게 맞을 리가 없죠. 우리가 성경에 관심이 없으니까 이게 밥으로 살고 건강하고 사랑 받으면 된다 이걸 아주 정상으로 본다, 정상. 이게 바로 우리가 이런 걸 안하는 것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증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나 잘남의 증인인 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1107a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hwp (62.5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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