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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12:18:57 조회 : 53         
15강-호 4장 8-10절(법대로 일하심)19111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59.116)
15강-호 4장 8-10절(법대로 일하심)191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4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4:8-10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충분하게 자신의 뜻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냥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자꾸 들이대지요.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현실에서 너희들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일치되는가, 얼마나 합치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율법,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추가적으로 계속 추어집니다. 이것은 이 약속의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중지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짓는다고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불일치, 하나님의 뜻과 차이나는 것을 죄악이라고 언급합니다.

죄악이라는 것을 언급하려면 하나님께서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법을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법을 제공하게 되면 그 제공된 법에 의해서 결국은 인간이 마음에 죄악을 품었다는 것이 들통나고 마는 거지요.

만약 수능 50문제를 친다. 전국에서 수능 만점이 열 명이 나왔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60문제로 늘입니다. 그래서 수능 만점이 10명에서 5명으로 된다면 문제를 200문제 내버리지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만점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폭로될 때까지 추가적으로 계속 율법을 주시는 거예요. 어느 정도 실력 있다고 우겨서는 안되는 겁니다.

속죄제물이라는 그 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속죄제물이라는 이 율법이 함축하고 있는 이 의미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거기에 담겨 있던 의미가 조금씩, 조금씩 확산되고 펼쳐지게 되면 그 안에서 속죄제물이 들어 있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속죄제물을 함부로 먹으면 죽는다는 그 내용이 일치감치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을 받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되느냐? 두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왜 나는 죽는가? 그리고 왜 이 세상은 불로서 망하게 되는가?

이걸 전제로 해서 염두에 두고 성경 보시면 비로소 이 성경이 내 소원 들어주려고 준 책이 아니라는 것을 출발부터 분명히 하고 들어가겠지요. 못들은 척 하지 마세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두 번째는 이 살기 좋은 세상이 왜 불심판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찾는 방법으로 성경을 보시면 돼요.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만든 그 아담의 존재보다, 아담이 살아 있는 것보다 법이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된 법을 그 만들어진 아담에게 주는 겁니다. 아담 만들어놓고 법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법이 아담보다 먼저 있었고, 아담, 곧 인간을 만들어놓고 법을 기다렸다는 듯이 제공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음을 언급한다고요. 그러면 인간이 해야 될 것은 뭐냐? 왜 선악과 따먹으면 죽느냐? 인간보다 먼저 있는 그 하나님의 법을, 그 뜻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인간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소원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뱀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뱀이 싫어하는 것은 뭐냐? 아주 간단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에서 ‘선악을 아는 지식’과 ‘죽으리라’를 강제로 잘라버리는 일을 악마가 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어도 안죽는 수가 있다.” 이게 악마의 이야기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오히려 너를 신으로서 살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앞에는 ‘선악과 따먹음’ 그리고 그 뒤에 ‘죽는다.’ 이것이 붙어 있어야 되는데 악마는 이것을 잘라서 떼버린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구라다. 거짓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너 안죽는 가능성을 생각해봐라.” 이것이 악마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아담이 유혹받아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정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선악지식을 계속 키우고 살리는 방식으로 치중하고 정신을 거기에 몰두합니다. 나는 이만큼 선악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잖아요. 여기에 자기의 모든 가치와 토대를 바치지요.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이 죽인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죽기는 싫고 선악은 알고 싶고, 그쪽 경향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이라 하는 것은 자기정신이 편한 대로 행동하는데요. 그 편하다는 것은 뭐냐? 항상 자기주변을 자꾸 정리하는 경향이 있어요.

정리할 때 정리하는 기준이 뭐냐 하면, 나는 선과 악을 알기에 나는 이상없다, 건전하다, 정상이다. 그쪽으로 자꾸 인생, 자기과거를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만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지요.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내 정신이, 내 맘 편한대로 살겠다는 그것이 율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이것을 폭로시키는 방향으로 율법을 시행해버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선악을 아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에서 죽음을 도외시해버린 겁니다. 나 죽음 없다가 되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데 거기다 몰두를 다 하면서도. 다시 말해서 수능 치는데 온 정신을 다 몰두하는 거예요. 그러면 수능을 치는데 왜 치게 하느냐? 죽으라고 치는 거예요. 간단하지요. 이왕 죽는거 제대로 시험 잘치고 죽으라고 찹쌀떡 사주고요. 수능 잘 쳐서 조국처럼 되라고 사주는 거예요.

율법은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의 취지를 모르고 율법을 수용한 자의 어설픔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네가 이 율법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 너는 정신적으로 너의 안정감과 편한 것만 생각해서, ‘나 이렇게 율법대로 살았으니 복 주세요.’라는 쪽으로, 자기가 안죽고 사는 쪽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행복하게, 무탈하게 사는 쪽으로 하나님의 법을 이용하는 그것이 율법의 위반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 정신이 따로 있는데 네 몸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간자체가 그 정신이 무너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원래 주신 법의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율법을 거론하니까 이 율법에 대해서 오답이라고 잘못되게 지킨다고 나설 수밖에 없지요. 나서면서 거기에 율법이 또 추가되고 마는 겁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죽음에 노출시켰어요. 첫 번째, 자연상태로의 죽음이에요. 자연으로부터 공격받아 죽는 것. 지진, 번개, 홍수,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되지요. 자연이주는, 토지가 주는 저주. 힘들게 살다가, 농사짓다가 자기몸이 망가져서 백년도 못살고 죽는 그 죽음. 자연상태가 우리를 공격하는 식의 죽음.

두 번째 죽음이 뭐냐? 인간들이 쌓아놓는 권력, 국가권력이 인간을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치는 거예요. 자연이 인간을 치는 것은 자연이 자연답기 위해서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고요. 노아홍수도 그렇고요. 왕이 왕답게 하려는 것, 대장질 할 자격도 없는 것이 대장질을 해서 백성들을 무차별 죽이는 정치적인 죽음, 이것은 이 세상이 왕중심, 국가중심으로 잘못되게 가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인간은 또 죽어야 되고요.

세 번째는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되게 위해서 죽이는 것, 그것이 율법에 의해서 죽이는 겁니다. 자식을 낳아도 인구가 증가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요. 수가 증가되지 못한다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뭘 하나 생각해야 되느냐? ‘아, 실패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아는구나.’

실패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알고, 실패를 통해서 이 세상 임금에 대해서 알고,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실패를 통해서 자연에 대해서 알고. 수능만점이 실패라는 사실을 감안하시고 수능 치시기를. 실패하려면 공부를 좀 해야 실패할지 싶어요. 공부 안하면 실패하는 경험자체도 누리지 못하지요.

내 일이 잘되는 것이 곧 실패라는 것, 점점 더 실패의 늪에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다는 하나의 체험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죽음과 가까이 가야 되는데, 내가 살수 있다는 것과 가까이 간다면 방향자체가 율법에서 담고 있는 하나님의뜻과 점점 더 멀어지는 순간이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목사가 목회에 실패해야 비로소 그 목사는 천국을 본다고요. 목사가 목회성공하면 천국을 안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손을 놔야 비로소 천국이 보이지요. 예수님이 보이고요. 그래서 목사가 신자 된다는 이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겁니다.

8절에,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속죄제물을 언급하는데 속죄제물이라는 이 이야기,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라는 말을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백성의 죄악에 동참한다. 어디에 둔다는 말은 공간을 이야기해요. 장소를 지정하는 표현이지요.

원래 속죄제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가 받은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6장 26절에 보면 “죄를 위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거룩한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먹으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제사장들은 속죄제물을 백성들이 주니까 백성들이 죄 짓는 거기에 참여하면서 그 속죄제물을 먹고 있는 거예요.

그 속죄제물을 받아먹으면서 먹는 그것이 곧 그들의 죄에 동참하고 합세하는 식으로 제사장들은 자기의 생계를 꾸려나갔던 겁니다. 레위기 10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한다, 여기서 거룩한 곳이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에요. 그러면 거기에는 누가 있는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에서 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먹으라는 말은 뭐냐? 속죄제물이라 하는 것은, 죄를 지었고,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 맞습니다.’라고 죄 지음을 자백하는 의도에서 드리는 제물이거든요.

죄는 백성이 지었지만 죄지은 백성의 모습을 대행하는 대행자가 제사장들이에요. 제사장이 속죄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백성이 지은 죄지만 백성의 그 죄를 내가 먹습니다, 하는 거예요.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백성의 죄를 먹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을 때 그 결과는 죽음이잖아요.

백성의 죄를 먹는다는 것은 뭐냐? 백성이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그 저주와 심판을 제사장이 대행해서 자기가 그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자기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먹는다는 거예요. 먹을 때 그것이 누가 주신 율법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라는 말이지요.

자,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을 아는 그 지식이라니까, 이미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정신상태, 지식의 상태가 있어서 뭔가 행동을 나름대로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행동이 율법과 만나서 무엇을 야기하느냐? 결국 내가 안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마주치게 되면 이것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이 코스를 누가 보여주느냐? 제사장이 보여주는 거예요. 이러한 결과, ‘백성들이 알기는 아는데 알면 알수록 그들이 죽음에, 저주에, 심판에 더욱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이디어였습니다.’라고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이음새역할을 하기 위해서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나는 그 공간에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이에요. 인격성이 부여된 장소. 인간이 장소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의 자리가 인간을 덮치는 거예요. 이 자리가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서 먹습니까?”라고 할 때 히브리서 5장에서는 그 장소를 인물로 제시합니다.

그 장소가 히브리서 5장 6절부터 죽 보면, 멜기세덱이라고 되어 있어요.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이에요. 히브리서 5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은 사람이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하지만 이는 연약에 싸였다. 인간에서 뽑혀나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미 인간은 죽도록 되어 있어요. 인간의 세상도 멸망하게 되어 있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중에서 한 사람을 뽑았기 때문에 그 뽑힌 제사장속에는 인간은 망한다, 인간은 필히 망해야 된다는 그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필히 망한다는 그 인격에다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는 말은 그 율법대로 산 제사장은 필히 죽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율법다운 결과물을 내놓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맞이한 인간은 필히 죽는다.’ 이 말은, 인간보다 뭐가 더 월등하고 우세하냐? 법이 우선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법이. 거룩한 법 앞에서 인간은 연약에 싸였다는 것, 미혹한 자, 이미 미혹되기로 된 인간에서 뽑힌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이 세상은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아파트 넓게 사는 사람, 빌라에 사는 사람, 지하에 사는 사람, 여러 가지 울퉁불퉁 산지와 계곡으로 그 모든 것이 굴곡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위에 올라가면 토지정지작업하는 거예요. 정지작업이란 불도우자 가지고 땅을 확 밀어버리는 거예요. 깨끗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으로, 율법으로 모든 인간의 차별과 구별성은 의미가 없어요. 다 평평하게 밀어버린다니까요. 밀어버릴 때 뭐도 같이 밀려야 되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저 사람보다 착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하게 살았다, 저 사람보다 경건하다, 하는 사적인 것으로 자체적인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것마저 하나님의 율법 앞에 깔끔하게 다 밀려나가 버려야 돼요. 평탄화작업을 한다는 말이지요.

동지가 되면 옛날에 우리 할머니는 연례행사처럼 하는 것이 있었어요. 큰 솥에 시루떡을 해요. 시루떡 만드는 공정을 어릴 때 죽 지켜봤지요. 쌀 얹고 팥 얹고, 또 쌀 얹고 그 위에 팥을 얹고. 그걸 아주 평평하게 해요. 그걸 찝니다. 쪄서는 칼로 나누지요.

그 다음에는 동지팥죽을 끓여요. 새알이라는 것 만들어서 넣은 팥죽을 먹고, 그 다음에 설이 되면 떡국 먹고, 먹은 후에 집안 어른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우리에게 공포를 해요. 젊을 때는 빨리 나이 먹으려고 두 그릇 먹다가 배탈도 나고 그러죠. 시루떡 할 때 평평하게 고르는데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몰라요. 팥을 뿌릴 때 골고루 뿌려서 더 많은 곳도 없고 적은 곳도 없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자질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는 모든 율법이 굉장히 공평하게 누구에게 다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같은 것을 일체 묻지 않겠다. 그것을 묻지 않겠다. 네가 스스로 너를 판단하는 것도 내가 귀담아 듣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평지작업, 정지작업에 있어서 그 다음에 나타날 성도는 뭐냐? 역할이이에요, 역할!

자체적으로, 사적으로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다’가 아니라 역할을 달리하는 거예요. 맡은 기능이 달라요. 그것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성도지만 부자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도지만 몸 아픈 사람이 있고. 그것은 역할이 그래서 그래요. 하얀 쌀가루 위에 평평하게 팥 얹은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시루떡 잘라보세요. 한 조각씩 꺼내면 모양새가 똑같아요.

흰 떡 위에 팥고물. 그게 끝이지요. 색도 똑같아요. 흰색과 보라색으로 같잖아요. 그저 역할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뭐냐? 네가 너를 판단하지 말고 역할로 부여하는 겁니다. 율법을 이루신 분을 증거하기 위한 역할.

따라서 제사장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한데 그 제사장의 역할은 뭐냐? 내가 제사장을 해도 죽는다는 겁니다. 특별히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의 정지작업의 하나의 일부기 때문에, 멸망당해야 될 대상의 일부로서 뽑혀 나왔기 때문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죽어 마땅함 뒤에 하나님도 그 죽음 뒤에 끼어듭니다. 제사장이 죽고, 그 아들이 그 다음제사장이 되고, 또 죽고, 그렇게 죽고, 죽고……, 하는 그 맨 뒷자리에 하나님이 딱 서요. 그러면 죄없는 분이 뒤에 서 있다고요. 앞에 죽은 것은 죽어 마땅한 인간에서 뽑힌 제사장이 죽고, 죽고, 또 죽어갔지만 마지막 제사장은 죽을 필요도 없는 분이 죄 속에 들어와서 죽어버리면 죄 속에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 완성이, 제대로 된 제사장이 제대로 율법을 이루었다는, 그렇게 이루게 되면 의가 되지요, 그래서 죄 속에서 의가 생산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에 보면, 모든 제사장은 연약에 싸여서 죽을 수밖에 없지만 6절에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아들을 보내셔서,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셔야 될 아드님을 직접 보내셔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게 했어요.

그것도 한 번의 죽음으로,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영원한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뭐냐? 또 자기가 사적으로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배역을 분배받는 거예요. 역할을 받는 겁니다. 역할은 본인이 본인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을 받게 되면 단번에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가는 기능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당겨가는 거예요. 마치 마지막 때 휴거되는 것처럼. 주께서 재림 때 나타나시면 죽은자나 산자나 다 끌려나오는 것처럼.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놀이동산에 중심이 있고 거기에 줄이 달려서 빙빙 도는 놀이기구처럼 뭔가 보이지 않는 줄이 있어서, 성령이지요, 성령에 의해서 그 역할을 하게 되면 결국 한 자리에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그 고백으로 이끌려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든지간에.

재산이나, 인품이나, 인격, 인생에 얼마나 역경이 많으냐와 관계없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마지막 때에 준비된 제사장의 기능과, 역할과, 그 분을 위해서 이스라엘도 마땅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호세아당시에 몰아넣습니다.

너희들이 속죄제물을 먹되 그 장소가 백성들의 죄에 합세하는 식으로, 동참하는 식으로 네가 속죄제물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시루떡이 나오지요. 장차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다, 똑같이 소행대로 갚아준다는 이 말은, 똑같이 그들은 자기의 소행대로 죽을 수밖에 없도록 하겠다고 하신 거예요.

이러한 속죄제물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온 거거든요. 율법에서 나왔다는 말은,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부여하는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구원을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진 그 나라, 민족만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게 갈라져야 돼요. 갈라져야 율법이 있다는 것, 율법이 있다는 그 가치가 율법이 없다는 것과 섞이면 안되잖아요.

율법이 있다는 그 가치 자체를 부과하고 강조하기 위해서는 율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망하는 특별한 민족이 필요한 거예요. 아까 말씀 다시 해볼까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연에 노출되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민족은 그들이 뽑은 왕에 의해서 백성들이 압박을 받고 죽어요. 이 두 가지는요,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다 구분 없이 주어져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별함은 율법의 특별함에서 나와야 되거든요. 율법에 의해서 죽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에게 부여된 배역, 역할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역할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율법이라는 것이 그냥 헛소리고 헛말이고, “너나 해라.” 하는 식이 아니라 진정 이 율법대로 세상이 진행된다는 것을 보이려면 율법을 먼저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친히 치심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그들이 파괴되는지, 율법 때문에 파괴되는 그 민족의 특수한 기능을 다 완수해야 되겠지요.

그걸 하려면 이스라엘 초반부터 율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기존 이방나라와 차이 나는 다른 민족으로 다뤄져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 11, 12절에 나와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날 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법을 섬긴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법을 섬기는 민족으로 내가 친히 만들어 내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역할을 맡은 거예요. 율법이 이 우주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명을 받은 민족의 출현, 출몰,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사이의 이야기고 다른 백성들은 여기에 대해서 별 가망이 없겠지요. 다른 백성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자연의 죽음, 권력의 죽음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그저 국가, 왕에게 잘 보이기를 원하고 바알신에게 빌어서 그저 농사짓는데 복 받기를 바라는 그것뿐이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에 관심이 없고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뭐하고 사느냐? 그들은 자연상태에서 안죽으려고 발악하고, 국가 안에서 작은 일이라도 국가에게 상처받지 않고 자기목숨하나 부지하려고 그렇게 살아가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의 바알신을 섬기고, 여호와라는 이름의 바알신을 섬기려고 교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관심이 없어요. 내 몸뚱이 하나 살면 그만 아니냐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악마에게서 주어진 것이 뭡니까? 선악을 알게 되면 죽는다, 에서 죽음을 떼 낸 거예요. 선악을 알게 되면 사는데 유리하다는 쪽으로 악마가 인간을 호도한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요.

똑똑한 것, 아는 것이 힘이라 해서 ‘알게 되면 사는데 유리하다.’ 자꾸 이런 쪽으로만 모든 머리가 돌아가도록 하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나와도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만큼 살았잖아.’ 그게 사는 겁니까? 그러면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뭡니까?” “몰라요.” “법은 뭡니까?” “몰라요.” “교회 왜 왔습니까?” “잤습니다. 설교 시간에.” “잘했습니다. 주무신 것 잘했습니다.”

사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내 몸 하나 편하게 살다 보니까 받은 역할과 사명도 없고, 부여된 기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내 몸뚱이 하나 살면 그만이지.’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거예요. 그게 바알신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리로 다 넘어간 거예요. 그 당시 제사장도 마찬가지고.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역할, 기능을 받으면 적어도요,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네가 법대로 충분하게 죽을 수 있어줘야 네가 사는 것도 충분하게 증명이 된다는 거예요. 법에 의해서 우리는 충분하게 죽어 마땅함을 절감을 하고 있어줘야 법이 만들어내는 그 의에 있어서 우리가 충분하게, 넉넉하게 영생을 얻는 존재라는 것도 아울러 주어지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지요. 그러나 생명나무 따먹으면 살잖아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에만 벌벌 떨지 마시고 생명나무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영생이다. 그 순간에 영생이라는 것도 우리는 만끽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영생이 율법의 완성에서 오고, 율법은 법이 너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 소중한 법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런 관계속에 있어야, 그런 역할과 배역을 맡아야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법에 의해서 우리는 충분히 죽을만 해요. 그걸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고, 서운하게 여기지 마세요. 법에 의해서 충분히 죽을만 하다는 것을 우리가 그냥 인정해버리면 그 법의 완성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하게 천국갈만 하고 영생 얻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줄 수가 있는 겁니다.

수능 앞두고 철야 한다고 하고, 수능 치는 애까지 데리고 새벽기도 나오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그 말이지요. 법은 안중에도 없어요. 법이 없으면, 언약이 없으면 그것은 우상이에요. 하나님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 이름의 바알신을 섬기는 거라고요. 나 잘되고, 자식 잘되고, 집안 잘되고. 그게 뭐예요?

그게 점점 더 천국하고 멀어지는 사고방식인데요. 수요일까지 예배참석하는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나무랍니까, 하겠는데 여러분이 충분히 죽을만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충분히 영생받을만 합니다,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출애굽 9장에 보면 ‘아, 이스라엘, 이것은 환상이 아니구나.’ 인간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꾸 환상을 끌어 모으거든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날 위해서라고 자꾸 엉뚱한 환상을 꾸며서 망상으로 자기 것으로 끌어 모으는데 성경은 그런 망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9장 1절-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 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생축 곧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실어놓고, 율법의 존재가 이 세상이 멸망당해도 마땅함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 9장부터 보면 이스라엘은 자의적으로 추방해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나를 추방해주기를 바라요. 이것은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과 인간세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예수님은 추방을 목적으로 말씀을 하시고 일을 하신 거예요.

“세상아, 나를 떠나보내라. 그게 내 역할이다.” 미련두지 않고, 이 세상에 애착도 없이 떠나보내는 거예요. 주께서 분리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설교 마치면서 다시 정리해드립니다. 실패를 통해서 주님을 아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주님의 가치, 그 주님의 십자가의 피 가치, 영원한 제사로 인하여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는 그 의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배역을 맡았습니다.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인생을 살면서 실감나게 보여주는 겁니다. 수능 만점이 어떤 실패인가를 본때를 한 번 보여주시고, 서울대 법대가는 것이 왜 실패인가를, 의사가 되고 돈 버는 것이 왜 실패인가를, 여러분이 게으르지 말고 그 실패에 정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다, 법의 완성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맡은 역할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충분히 영생 얻을 수 있었기에 충분히 우리가 죽어도 즐겁고, 상관이 없음을 아는 자유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5강-호 4장 8-10절(법대로 일하심)19111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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