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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3 11:38:32 조회 : 47         
28강-호 7장 8-12절(화덕위의 전병)200212-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59.116)
28강-호 7장 8-12절(화덕위의 전병)2002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7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2페이지입니다.

호세아 7:8-12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공회에 들려준대로 저희를 징계하리라.”

여기에 비둘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비둘기가 어떤 비둘기냐? 어리석은 비둘기. 어리석은 비둘기라는 말은 자꾸 쳐다보지 말아야 될 곳을 쳐다보면서 간절히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띄면서 도와줄 수 없는 쪽을 향하여 울고 있는 모습을 비둘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나는 ‘공중의 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 같으나 결국은 그물에 걸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제한적인 자유, 자기는 자유롭다고 하는데 전혀 자유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가련한 비둘기, 가련한 새의 신세.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에 얽매여 있는 모습들을 북 이스라엘이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중력장에서 못벗어나는, 세상의 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벗어나지 못해서 우왕좌왕 하는 그 모습 같으면 이것은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민족과 동일하다, 이렇게 생각이 들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 이스라엘은 택함받을 때에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게 됩니다. 8절에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다른 이방민족도 자기 맘대로 살고, 똑같지 아니하냐, 이렇게 생각될 수가 있는데 똑같지 않아요.

똑같지 않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당장에는 비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제대로 된 참 뜻을 유일하게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이 복되다고 언급을 해야 돼요. 전병이라는 것은 떡을 의미하는 겁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 하는 것은 이 전병이 홀로 있는 전병이 아니고 화덕위에, 불판위에 놓인 전병이에요.

이 말은,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야 될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세상전체가 벌건 화덕이다, 불판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겁니다. 이미 전 세계가 벌겋게 달아오른 불타는 동네에요. 물론 이방인들은 그걸 모르지요. 이스라엘도 모르는데 그걸 알 리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불이 벌건 화덕으로 보신다. 그 불은 심판의 불, 저주의 불이지요. 전세계가 저주와 심판의 불붙은 세상이다, 라고 보는 것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시간상으로 보게 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납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은 그 최후를 보시거든요. 그 최후의 관점을 북이스라엘에게 미리 현실화시킨 겁니다.

이스라엘 망한다고 다른 나라는 괜찮다는 말이 아니고 전 세계가 마땅히 멸망 받아야 되는 나라들이다, 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택한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 처참하게 멸망당하고 망가지는 것을 봐서 이스라엘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심판이 결국은 전 세계로 다 퍼져버린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코스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거든요. 사람은 과거는 알지 모르지만, 그것도 기억나는 것이나 알지만, 과거나 알고 현재는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의 주가가 어떻게 뛰는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모레는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지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갈 데로 가보자는 식으로 되어서는 안되고, 적어도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같으면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하는 마지막 장면, 하나님의 스포일러, 하나님의 영화의 모든 끝장면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고편으로 미리 다 보여준 거예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그게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입니다. 존재의 의미고. 불이 붙었어요. 불이 붙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오고 통하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뜨거우면,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앞당겨서 어떻게 끝난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화덕에 누워있는 본인 자신이 이걸 뒤집어야 된다고요.

“아이고, 뜨거워라.” 뜨거워서 뒤집어야 되는데 본문에는 벌건 화덕에 누워있어도 뒤집지 않는 전병이라, 돌아누울 줄을 모르는 거예요. 만약에 북이스라엘 가운데 진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화덕에서 뒤집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세상은 이렇게 끝장나는구나. 참 하나님이 무섭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이렇게 맹렬할 줄을……, 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게 살아계심의 증거다.’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뜨거움에 대해서 뒤집을 거예요.

뒤집는다는 말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관하고 나하고는 안맞다는 거예요. 체질상 맞지를 않아서 뒤집는 거예요. 뒤집게 되면 뒤집기 전에는 말쑥한, 불에 데지 않는 말쑥한 모습으로 잘난 체하다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심판에 타버린 사람, 최후의 탄 사람 같으면 뒤집게 되겠지요. 뒤집게 되면 잘났다, 하는 인간이 졸지에 천하에 괴수가 되어서 등장합니다.

뒷면이 앞면이 되고 앞면은 뒷면으로 내려가겠지요. 남들 보기에 멋있고, 별로 잘못한 것도 없고, 의인중의 의인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딱 오니까 “의인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죄인중의 괴수야.” 하는 그것을 자기의 전면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물론 북 이스라엘에 그런 사람이 단 한명도 없어요. 왜? 오늘 본문이 그러니까.

뒤집는 전병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 잘난체를 하고, 세상이 지옥이고 불구덩이 속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본문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돌아오지 아니하고,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부를 때 그 마음자세가 묻지도 따지지 않고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함이 하나도 없어요. 그 당시에 왜 그런 절박함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아직도 여유만만하게 내 것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보장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있기에 여유를 부릴, 꼬장을 부릴 정도의 내 것이 있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니까 절박함이 없지요. 자, 여기부터 오늘 본문이 어렵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무도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집지 못하는 전병이 되게 하신 이유가 뭐냐?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안 부른 것도 아니에요. 여호와 제사 안 드린 것도 아니라고요. 다 했어요. 그 당시 다 여호와종교의 신자로 행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그들의 본심을 드러냈다는 말은, 그 여호와 이 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성직자, 오늘날은 목사, 성직자부터 어린 주일학교 애들에 이르기까지, 예수, 하나님, 십자가, 언약, 복음, 성화, 교회고 간에 이 딴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에 다들 동조하고 동의하고 있어야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기도하고, 예배참석하고, 설교 듣지만 그것은 센 것이 아니에요. 더 센 것이 아니에요. 기도하고, 설교 듣고, 성경공부 참석하지만 ‘이딴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이 마음에 우세해요. 이 마음이 강렬하다고요. 그래야 돼요. 그래야 됩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정말 중요한 대목입니다. ‘30년 복음 들었으니 얼추 이제는 구원받는 믿음이 있겠지.’ 그러면 안돼요.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어야 돼요. 이 이야기는 ‘뜨거우니까 뒤집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뒤집을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인 것을 시작점으로 하는 겁니다. 어렵지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라면 소용없다는 그 말이에요. 내가 지금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들, 신학이고, 복음 지식이고, 그리고 집에 있는 현찰, 돈, 그밖에 부동산, 자식이고 부모,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라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주님 안다, 이게 나를 위해서라면, 나를 위한 십자가, 나를 위한 복음, 나를 위한 예수라면 그것은 어디에 패배하느냐? 결국은 믿으려고, 믿으려고 그렇게 애써도 어느 한 순간이 되면 씩 웃으면서 ‘그 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50년, 40년 교회 다녔는데, 복음 들었는데, 성경 들으면 딱 어느 구절인지도 다 아는데, 그런데 아는데,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돈이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지 그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어느 놈이 천당 가 봤나?’ 이게 더 우세하다니까요. 천국은 어떻고, 예수니 그리스도니, 예수와 함께 산다, 다 좋은 이야기인데 글쎄 그게 현실성이 뚝 떨어진다고요, 현실성이!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 본성이 발휘하는 현실성 앞에서 성경의 이야기가 현실성이 희미해지고 소실되고 파쇄되어 버려요. 다 깨져서 없어져요.

모기약 뿌리면 냄새가 나지만 돌아서면 냄새가 다 없어지잖아요. 또 뿌려야 되잖아요. 또 뿌려봤자 에요. 교회 와서 복음 들어봤자 에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내 본성은 더 셉니다. 그 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성경대로 말씀드릴게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빼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방금 들었지요. 구원이란 주님께서 빼내주는 것. 성경대로 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나 우리에게 납득이 되는 구원은 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발 빼려고 노력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그게 더 우세해요. 그게 현실성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발을 한 번 빼 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확 다가오지요. 주께서 빼내준다는 것은 안다가오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의 구원자는 나에요. 나의 노력 여하, 내 열심에 따라서 내가 구원되지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나를 빼내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거짓말 같아. 나중에는 “아이고 그런 소리 그만해라. 지겹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도 지겨워. 현실성 없는 이야기 그만해라. 나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복음 알고, 또 연구하고, 성경정리하고, 십자가 굳게 믿고, 기도를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로 기도하고. 나는 그게 와 닿아.” 그게 확 와 닿는다고요.

그게 사적인 데서 공적인 천국백성 되는 방법입니다.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에 전부 다 퍼졌습니다. 그것뿐이에요. 이렇게 노력하시면 여러분은 천국, 좋은 날이 있을 겁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겠다는 거예요. 요새 초인종 누르는 장면 유명하잖아요.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 선배는 김 진모 그는 외사촌…… 딩동!!”

그 부잣집에 과외 하러 들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가 갖출 것을 다 갖춰놓고 이거 잊으면 사달 나는 거예요. 이 모든 모략이 다 깨져버리는 거예요. 기생충 못됩니다. 이거 다 해야 돼요. “다 외웠지?” 해놓고 “딩동!” 이게 중요해요. 초인종을 눌러요. 천국 문을 여는 겁니다. 천국 집에 기생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 노력에 의해서.

그래서 상 받은 거예요. 작품상. 인간의 노력으로 좋은 행복을 꾸밀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종교라고 해요, 종교. 다른 말로 하면 교회. 같은 말이지요. 인간에게는 천국갈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으며 그 시도에서는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천국 갈 때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준비하는 거예요.

외울 것은 외우는 거예요. 제시카는 외동딸이고 시카고 일리노이대학 미술과 출신이고, 이런 식으로 외울 것을 다 외워야 돼요. 그래야 “딩동!” 누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뒤집히지 않는 전병이 되어라. 마지막 때가 되어도 불감증에 걸린, 감각 없는 인간이 되어라. 제발 네가 싸대고, 노력해서, 알아서 천국가려는 생각을 제발 하지 마라.” 그것은 사적에서 공적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공적은 뭐냐? 공적은 모든 인간은 화덕에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이게 하나님께서 규정지은 겁니다. 확정지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알아서 돌아눕는 인간, 아담의 후손치고 그런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참석하고 복음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그 헛수고는 오늘부로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걸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는 것은 ‘그래.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대. 참 좋은 이야기 들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결국은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실컷 들어놓고 뒤에 나오는 접속사가 있어요. 뭐냐? 그런데, 하지만, BUT(그러나). 그런 것이 붙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런데, 그러나’가 붙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내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모으고 있는데 자꾸 그게 모자란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아까 그 말씀 다시 해 볼게요. 이게 어려운 대목이거든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라면, 그딴 것이 소용이 없는데 나를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에 자꾸 그것을 소용이 있는 것으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이 복음 듣고, 저 설교 듣고, 이 설교 또 듣고. 왜 자꾸 공부하고 듣습니까? “일리노이 시카고 제시카는 외동딸……” 그거 왜 자꾸 외우는데요? 지금 나도 다 외웠다. 과 선배는 김진모, 그걸 왜 외우는데요? 그래야 딩동, 누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거 아니면 쫓겨난다는 겁니다. 부잣집에서, 천국에서. 이게 타고난 거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장래를 대비하려는 이것이 인간에게 타고난 것인데 모든 인간이 다 타고난 그것을 공적이라고 합니다. 사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공적이에요. 그 공적인 것에 대해서 주께서 이렇게 규정합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엉덩이에 불이 붙어도 뜨거운 줄 모른다는 그 말이지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지요. ‘알아야지’ 한다고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그런데 말입니다.”가 붙어요. 그런데, 단 한 사람이 있어요. 단 한 사람,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요, 하나님 앞에 된통으로 당한 사람이에요. 자기의 인생이 없어요. 자기를 위한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 못하고, 정말 가장 악랄한 여자, 바람기 있는 여자, 정숙하지 않은 여자를 자기 아내로 받아들여야 돼요. 바람기로 소문난 여자를 자기 아내로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종교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또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사람이 신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어떤 강한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서 교회 나가고, 절에 다니고, 성당에 나가면서 신앙생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은 뭘 모르냐 하면, 호세아 7장에 의하면 인간은 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악한 존재에요.

사람은 자기한테 너무 연민을 가지고 너무 동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자기연민이 너무 심해요. 지난주일 오후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이 굉장히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갈 인생이 아닌데 뭐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고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해요.

굉장히 억울한 감을 느끼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고, 팔자가 제일 사납다고 여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동정하는 것 그 밖으로 못 벗어나요. 그러나 주님은 ‘약하다’고 보지 않고 ‘악하다’고 보는 겁니다. 벌써 인간이 보는 자기자신과 주님이 보는 우리와 완전히 달라요. 아무도 그 점을 모르는데 호세아에게 된통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인간은 자기 뜻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세상을 공적으로, 이미 불판, 불덩어리 위해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호세아 입을 통해서 이야기해버리지요. 이것은, 너희들이 보는 현실판하고 호세아 내가 보는 현실판하고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이게 포개져 있거든요. 포개져 있는데 너무 닮았기 때문에, 똑같기 때문에 그 현실이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포개져 있는 현실이 어떻게 농간을 부려서 약간 갈라지고 틈이 생기느냐?

호세아같이 말씀에 놓인 사람들, 말씀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말씀으로 완전히 포장해서 개를 가지고 “물어! 물어!” 하는 것처럼 진짜 주님이 주인 되시고, 주님이 움직이는 똥개같이 말씀의 개처럼 쓰이는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할 때 현실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 운모(雲母), 돌비늘이라 하지요, 그 운모의 얇은 각질층처럼, 운모의 단편, 운모의 절편처럼 포개져 있던 현실층이 갈라져요.

얇은 막으로 두 개가 갈라진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선지자의 말을 믿는 사람과 선지자의 말을 무슨 소리냐고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편이 갈라지겠지요.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은 사적으로 공적인 세계, 천국에 가려고 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될만한 요소를 내 것으로 간직해서 그 간직된 것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호세아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구원이란 주께서 빼내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참 말은 굉장히 쉬워요. 주께서 빼내준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모든 이야기가 뭐냐? 제발 네가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구원받으려는 모든 시도와 노력을 그만두라는 이야기에요. 그것은 네 분수에 안맞기 때문에. 너는 멸망당해야 마땅하지 멸망당하는 인간이 구원받으려고 자꾸 들썩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 되면 뭐가 죽느냐 하면, 그리되면 빼내주시는 그 취지가 날라 가버려요. 부잣집에 누를 초인종도 없지만 있다면 그냥 누르세요. 그냥 “살려주세요.” 하세요. 강도처럼. 강도가 예수님의 구원받기 위해서 뭐 준비했습니까? 십일조 몇 년 했습니까? 없어요. 무대포에요, 무대포. 저 강도입니다. “죄인입니다. 살려주세요.” 이거예요.

왜냐하면 정말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마지막 때가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데요, 그 마지막 때가 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게 되면 이런 사태가 됩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이에요.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여, 저를 버린 자로 보시는군요. 버려져야 마땅한 자로 보시는군요.’ 이게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레위기 26장 39절에 보면,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죄가 자기에게 돌아가는 겁니다. 자기가 지었든, 물려받은 죄든 관계없어요. 하여튼 무조건 인간은 죄의 결과가 맺어지는 하나의 통로에 지나지 않아요. 죄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죄의 결과는 저주, 심판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구, 하나님이 갖고 노시는 기구에 불과해요. 그것뿐이에요.

사람은 말하기를, “아이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값은 그냥 숨 끊어지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참혹은 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참혹한 심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렬한 저주지요. 자비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배려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고, 일체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하심, 화내심, 미워하심, 그냥 온통 영원토록 그것만 받는 것이 죄 있는 인간이 합당하게 받을 대우입니다.

그것 외에 딴 것 생각하지 마세요. 왜? 죄로 인하여 버림받아야 되니까. 이게 하나님의 뜻의 총괄이에요. 뜻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대표해서 보여주잖아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버려져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이 대표해서 지금 발설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자로서 마음껏 진실을, 실제현실을 이렇게 발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뿐이에요. 버림받는 것. 마땅히 버림받아야 돼. 라는 말,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버리시는 것이 주님의 합당한 조치 맞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억울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입니다. 비로소 이제 그 최종적인 뜻이 나타났군요. 버림받는 것.

호세아는 미리 그 마지막을 알지요.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망가진 가정을 통해서 온천지가 공적으로, ‘사적으로’는 없어요, 공적으로 온천지는 화덕위에 있고, 벌건 불 위에 있고 알아서 뒤집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뒷면이 지옥불로 벌겋게 태워져 있는 것을, 그 등짝을 오히려 뒤집어서 남들에게 “나 이렇게 당해도 마땅하다.”고 보여주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를 전면으로 내세워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되어 있다고. 고린도 11장 29절에 봐도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날마다 자기의 죄, 자기의 저주를, 자기가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확인하듯이 하는 거예요.

이런 분들에게 팁 하나 드린다면, 사람 만날 때 그냥 만나지 말고 그 등짝이 지옥불로 벌겋게 달궈져 있다고 생각하고 만나시기 바랍니다. “친구여, 오랜만이다.” 할 때 멀쑥한 앞면만 보지 마시고 ‘미안한데 잠시만 돌아볼래? 아, 벌겋네, 지옥불로. 알았다.’ 아무리 인간이 큰소리치고, 협박공갈을 하고, 권력이 있네, 돈이 있네, 해도 등짝은요, 지옥불로 불붙어 있어요.

종이 갖다 대면 막 타요. 지옥불이 벌겋게 등짝에 붙어 있어요. 이게 바로 화덕에서 돌아누울 줄 모르는 인간들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머리 좋은 분들은 이야기할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사람이겠네요?”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설교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전 2:2).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지요. 왜? 장래에 안 가봐도, 나이 천살만살 안 먹어봐도 미래에, 장래에 이 세상 전부가 어떻게 끝장나는지를 성령을 통해서 미리 호세아처럼 알아채고 눈치 채서, 그 사실을 감출 것이 없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돈 자랑해라. 나는 십자가 자랑한다.’ 이거거든요. ‘너는 자식 잘 키운 자랑해라. 나는 십자가 자랑할게. 너는 몸 건강한 것 자랑해라. 나는 십자가 자랑할게.’ 우리는 아파 죽어도 마땅한 존재라고. 텍사스 전기톱에 다섯 토막으로 잘려도 괜찮은 존재에요. 어떤 참혹한 일을 당해도 왜 이러십니까, 할 것이 없어요. 왜? 버림받는다는 것이 그거거든요.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한 거예요. 버림받는다는 것,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은 더 심한 거예요.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이삭을 죽입니다. 그런데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죽여 버려요.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후대의 미래를 아는 분이 먼저 우리 자신을 죽여버려요. 이것은 바로 아들의 죽음 안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거기에 함께 뛰어드는 겁니다.

‘내가 죽어야 될 것은 그 아들이 수풀에 있는 저 수양처럼 대신 죽는 죽음을 이삭 네가 내 앞에서 보여주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서 십자가 설명하면서 이삭과 아브라함 이야기를 따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자신들은 화덕의 벌건데 있으면서 멀쩡하다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멀쩡하다고 우기는 그 우김이 하나밖에 없는 현실판에서 어떻게 버텨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노력을 하지요. 호세아 7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애굽이라는 나라 나오지요. 앗수르라는 나라까지 두 나라가 나옵니다. 두 나라가 한꺼번에 나오는 대목은 열왕기하 17장 3절에서 8절에 나오는데요. 여기 나오는 호세아는 선지자 호세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북이스라엘 멸망할 때 마지막 왕이 호세아에요.

3-5절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그리고 7절에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그러니까 호세아서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의 별칭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서 약속의 땅에 뒀다는 말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현실이 포개진 것이 아니고 자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급하면 큰 형님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랬다가 또 눈치 봐서 저 남쪽에 있는 큰형님 애굽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제가 아까 몇 번이나 했습니다만 내게 유리한 것, 내가 잘될까, 하는 그것을 위해서 계속 필요한 힘들을 주변에서 끌어 모아서 간직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 통해서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놀지 않아요. 뭐든지 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교회 다녀도 나를 위해서,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미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딴 모든 노력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노력은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죄만 더욱더 죄로 드러나게 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나를 위해서’ 그것 때문에 다 죽는데 화덕 위에서 죽으면서도 뒤집을 줄 모르는 거예요. “아 뜨거워라.”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너도 나도 다 나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나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인간도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어요.

그것이 신약에……, 신약 하면 무조건 마지막 때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약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아무리 고상한 것, 거룩한 것, 목사가 시키는 대로 온갖 것 다하고 말씀대로 지켜봤자 로마서 8장에 보면, 죄와 사망의 법이 계속해서 나라는 요건이 있는 한 달려들어요. 죄와 사망의 율법이. 율법의 그물에 걸린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새니까.

슬피 우는 비둘기입니다. 날라 다니는 새가 그물에 걸리니까. 나를 위해서 뭔가 해보겠다는 그 자체가, 나라는 요건이 있으면 거기에 왁 뭐가 달려드느냐 하면, 죄와 사망의 법, 율법이 왁 달려들어서 이것도 해봤나, 저것도 해봤나, 이거 지켰나, 저거 지켰나, 쉬지 않고 지켰나, 멈추지 않고 지켰나, 계속해서 쏴댑니다. ‘이것 못 지키면 저주야, 이것 못 지키면 너는 지옥이야.’

‘나를 위해서’가 있다는 것이 수립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모든 사망과 저주의 법이 독수리가 먹이를 보고 낚아채듯이 왁 달려들어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못벗어나요. 그 못벗어나는 것을 이제부터는 구원자 되시는 분이 빼내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항상 ‘그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라고 하면서 자기자신만, ‘나는 나만 챙기면 그만이야’라는 생각이 우세해요.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우세할 때 율법과 대조하면 우리는 외면하고 싶어요. 왜? 불안하니까, 자기처지가 미완료로 남으니까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공포가 와요. 사적에서 공적으로 가면서 계속해서 쫓겨요. 계속해서 쫓깁니다. 죄에 쫓깁니다. 선악과에 쫓기는 거예요.

제가 부산서 대구로 오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어요. 죄를 온전히 다 용서받았다고 하지만 자꾸 죄에 쫓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기에 제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고 3 학생과장에게 시달리던 학생이 이제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생이 되었는데 우연히 길에서 고 3때의 학생과장을 만났어요. 벌벌벌 떠는 거예요.

선악에서 벗어났으면 선악적으로 안쫓겨야 되는데 자기자신의 요건을 갖추다 보니까 ‘내가 지금 요건을 제대로 못 갖췄나? 내가 뭘 놓쳤나? 내가 제대로 못 외운 채로 딩동, 하고 있지나 않은지. 제시카 송 다 못 외우고 초인종 누르면 안 되는데.’ 자꾸 뭔가 준비하고 대비를 하려고 해요.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 사랑과 생명의 법으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너는 말씀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빼내줄 때 어디로 빼내주느냐? 나에서 나로 빼내주지 않아요. 나로 하여금 이 불판에서 벌겋게 다 태워진 그 불판에서 사랑과 생명의 법 안에, 십자가의 용서 안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말씀의 완성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 버리면 어떠한 율법이나 어떠한 말씀도 나를 협박하거나 공갈할 수 있는 여지는 그 막에 의해서 전부 다 차단되고 맙니다. 스스로 구원받으려 하는 사람은 그 1밀리의 차단막 너머의 그 세계를 몰라요. 1밀리, 1센티가 아니고 1밀리 그 너머에 있는 그 세계를 안다면 여러분은 충분히 천국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봉준호가 한 이야기를 제가 지금 패러디 하고 있어요.

사망과 생명의 법, 이걸 악마가 제일 싫어해요. 놓쳐버렸거든요. 닭 쫓던 개처럼 놓쳐버렸어요. 바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때를 다 아니까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과 사랑의 법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 피로서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그 성령이 오게 되면, 네 죄는 내가 다 씻어줬다는 그 사랑과 생명의 법을 이제는 온몸이 벌겋게 탄 채로 여러분, 말씀 안에서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공적으로 이미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우리는 날마다 속으로 ‘복음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외칠 때마다 성령을 통해서 이미 사랑과 생명의 법안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이 큰 기적을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 않고,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8강-호 7장 8-12절(화덕위의 전병)200212-이 근호 목사.hwp (45.5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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