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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9 14:55:26 조회 : 56         
49강-호 13장 4-8절(실패의 기쁨)20070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17.111.178.73)
49강-호 13장 4-8절(실패의 기쁨)2007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3장 4-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3:4-8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 스스로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언급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자기취향에 맞는 구원자를 설정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진짜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면, 7절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그 사자가 그냥 잠만 자고 있는 사자가 아니라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저희를 삼키리라.”(8절) 상당히 난폭한 구원자지요. 거친 구원자입니다. 구원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말살을 하겠다는 것인지 혼동을 일으켜요. 하나님은 구원자라고 해놓고는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찢어버리고, 차라리 너는 없어야 된다는 식으로 잔인하게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구원자와 내가 요청한 하나님의 구원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표범처럼 화가 나서 자기 백성이라도, 이스라엘이라도 찢어버리는 그 이유가, 8절에 보면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라는 말이 나와요. 자기자식을 잃으니까 곰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겁니다. 내 자식을 이렇게 했으니 너도 한 번 당해보라고, 자식을 잃었을 때 그 때 그 성질을 나의 구원자 됨의 본성으로 드러내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자이신데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나타나느냐? 내가 정작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너희들이 방해할 때 거침없이 나의 구원을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에 찢어버릴 정도로 주님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는 단호함을 드러내는 구원자, 그런 구원자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런 구원자하고 인간이 그냥 생각하는 구원자하고는 타협하거나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거예요. 찢김을 당하려고 구원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을 때, 이런 말씀이 선지자의 설교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개를 나눠서 생각할 수가 있어요.

평소에 내가 나한테 설교하는 그 설교, 그리고 선지자가 하는 설교, 그 둘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훈계하고, 내가 나를 설득하고, 내가 나에게 설교하고, 똑바로 살라고 나를 가르치는 그 나에 대한 설교는 목적이 나의 성공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성공, 내 구원에 성공.

그런데 호세아를 통한 하나님의 설교는 나를 구원하는, 내가 성공하는 인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에 성공하는 내용으로 호세아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설교하시는 거예요. 내 성공이 아니고. 이 두 가지의 설교가 서로 상충됩니다. 자, 인간이, 자기가 성공적인 인간이다 할 때, 어떤 사람이 “저 사람 참 성공했어.”라고 이야기할 때 어떤 것을 근거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

“저 집은 참 먹을 게 많아. 늘 배불리 먹어. 풍족하고 만족스럽게 살아. 넉넉하게 살아간다.” 할 때 “아, 그 사람 성공했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점에 대해서 5,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 괜찮은 결과가 풍족하고,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상태지요. 인간은 이것을 구원이 지금 잘되고 있는 상황, 하나님께 지금 나에게 복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본인이 생각한 자기구원이라는 모습을 본인이 이미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간단하지 뭐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오늘 호세아의 설교에 의하면 배부름이 구원이 아니라는 거예요. 배불렀는데 그 배부름이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필히 교만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우뚝 솟아오르는 거예요. 혼자가 단독적으로 부각되는 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나 혼자 부각되는 것. 주위를 돌파해서 나 혼자 우뚝 솟는 것을 교만이라 하지요.

예를 들어서 수학성적이, 다른 사람들 다 50점에서 80점 나오는데 혼자 100점 맞았다고 자랑하면 친구들이 교만하구나,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다른 애들 다 50점 맞고 있는데 혼자 10점 맞으면 교만하구나, 이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교만이라 하는 것은 뭐냐? 뭔가 성공하고 싶다는 거예요.

성공하고 싶다는 것, ‘구원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괜찮은 것이야. 구원되면 이것은 신나는 일이야. 아, 그러면 내가 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구원되어야겠네.’라는 것이 교만이 되어버립니다. 그걸 위한 맞춤 신을 찾게 되어 있고요. 오늘 본문 호세아 13장 1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자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해서 이미 전제적으로 인간들은 자기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런 구원하는 신들을 이미 그들이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성공하게 만들고, 내가 잘되게 만들고, 나를 구원시키는 하나님을 그들은 이미 시키지도 않았는데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성공입니다. 선지자의 설교, 호세아의 설교에 나오는 진짜 참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에요. 참 선지자에 나오는 참 설교는 뭐냐? 주님의 성공이거든요. 주님의 구원의 성공입니다.

이것은 나의 구원의 성공, 내가 원하는 나의 구원의 성공이 아니에요. 이게 같지 않아요. 일치되지 않습니다. 구원하시면서, 이렇게 찢어버리고 구원하시면서 애굽에 포로 잡히게 만들고, 구원하시면서 광야에 집어넣는다. 이게 얼마나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 아이디어서에서 나올 수 없는 희귀한 구원의 방식입니까?

우리는 고생 안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인생 고생 안하고 고난 없이, 시련 없이 사는 것, 이것을 우리는 구원된 상태라, 인생 성공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 그렇다면 우리가 호세아의 설교를 듣기 전에 먼저 전제로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 구원은 없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는, 인간계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다 자기 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성공을 위한 자기 일을 하기 때문에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순전히 인간의 일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이에요. 구원은 주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호세아를 통해서 낯설게 들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지, 구원의욕, 성공하겠다는 의지, 의욕, 이것을 없애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너에게 실패하고 싶은 의욕이 있느냐, 네가 구원에 실패할 맘을 갖고 있느냐를 묻는 거지요. 우리자신의 구원, 우리자신의 성공에 실패해야 비로소 주님이 일이 보이게 되고 느껴지게 되어 있어요. 그 방법은 성경에 나오지만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목욕탕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 목욕탕도 좋고, 어떤 집회라든지 혹은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 들어갔든지, 학교에 갔다든지, 그런 느낌이 들 때 하나님이 그 쪽에 불을 질러버려요.

불을 질러버리면 그 안에 있는 학생들이나 누구든 다 죽겠지요. 죽는데 그 죽은 애 가운데서 자기 아이를 발견해서 손잡아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일단 타자.” 새까맣게 타지요. 그러면 애가 나오는 모습이 마치 숯불에 구운 고구마처럼 시커멓게 그을려서 나오겠지요. 바로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는 겁니다. 내가 예상한 구원에 내가 성공했다는 생각을 일체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옛날 촌의 집 아궁이에 고구마 굽잖아요. 저도 옛날에 외가집에서 고구마 구워먹게 되면 물론 맛있는 것은 맞는데 고구마 크기가 이만하다면 나중에 먹을 때 불에 그슬려서 탄 부분 벗겨내면 반밖에 안 남아요. 맛있기는 해요. 먹고 나서 나중에 보면 입 주변이 시커멓게 되었지요. 시커먼 아궁이 속에서 나왔으니까.

그게 바로 첫 번째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의 전제가 애굽입니다. 애굽은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목욕탕에 불 지른 것처럼 모든 인간을 죽게 만들어버렸어요. 애굽의 그날 밤에, 유월절 첫날밤에 다 죽게 만들었어요. 그 집안 맏이가 다 죽었다는 것은 대가 끊어진 것을 말하지요. 다 죽게 만들었어요. 불 질러 놓고 그 속에서 자기 아들 끄집어내는데 끄집어내면서 “이제부터 네가 내 아들이다. 네가 내 아들이다.”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아들 만드는 작업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성공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는 실패하면 안 돼. 나는 망하면 안 돼. 어떤 경우에도 나는 성공해야 돼. 나는 천국가야 돼.’라고 생각해서 가지 않는 반대편, 반대쪽, 그쪽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과정을 친히 보여주셨어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 돌만 버려진 것이 아니에요. 모퉁이 돌에 합세한 모든 벽돌 하나하나가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버려진 자에요. 세상에서 버려진 자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사실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가 나한테 버려진 내가 되는 거예요.

내 본성,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나는 사람취급도 안 되는 나로서 버려질 때 ‘나는,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나는 인생 실패자야.’라고 생각하기도 싫어버린 그 자리가 주의 일의 시작점이에요. 주의 일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주의 일을 못 느끼는 것은 성공하고 싶어서 그래요. 성공하는데 급급해서 그래요. 성공의욕이 넘쳐서 그래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본인은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보기에, 나는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 뭔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 그리고 모든 말씀을 통해서 분석에 들어갑니다. 분석에 들어가면 그것은 결국 뭐냐? 교만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본인 혼자 우뚝 서는 거예요. 부각되는 거지요.

인간의 모든 일상이 종교화에요. 뭐냐 하면, 나는 혼자 살고 싶어. 그걸 인간은 구원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성공해도 나란히 성공하면 싫어요. 나 혼자 성공해야 돼요. 나 혼자 성공하는 그날까지 나는 내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내 노력과 내 의지를 멈추지 않고 나만 성공하는 거예요. 나만 성공한다는 말은 누구하고 같이 있기가 싫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다 망치고 난 뒤에 불속에서 끄집어낼 때 그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또 혼자 살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나랑 같이 살자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자. 아,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정말,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같이 사는 것이 결국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타고 났어요.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너 구원될래 아니면 혼자 살래?” 그것을 묻는 거예요. “너 나랑 살래, 아니면 너 혼자 살래?” 인간은 타고난 게 악마의 죄로부터 타고나가지고, 악마는 최고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같이 사는 것을 역겨워 해요. 같이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이런 식으로. 타고난 것이 홀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같이 살게 되면 그게 그렇게 아파요. 참, 그렇게 아파요.

사람이 배부르다는 것은 홀로 배부를 때 만족하거든요. 그런데 그 배부른 상태가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땡, 탈락이라는 거예요. 땡, 탈락, 구원에 탈락이라는 거예요. 배부른 그것이. 우리는 배부른 것이 소망인데. 혼자 살려면 배불러야 되고, 여유가 있어야 되고, 풍족해야 되잖아요. 우리가 그걸 희망으로 삼고 살거든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마땅함과 당연함은 어떤 방향을 갖고 있는데 그 방향은 뭐냐? 홀로 배부른 상태가 되는 것. 왜? 같이 살면 그 같이 사는 사람이 나를 찌르니까 아파요. 젊은 분들이 생각하기를 ‘혼자 살면 외로우니 같이 살면 좋겠다.’ 같이 사는 것을 가지고 보통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연애할 때는 그렇게 좋지요. 연애할 때는 같이 안사니까. 토요일 아니면 금요일 오후에 만나기 때문에 가끔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거예요.

그래서 어느 노래 가사에 그런 것이 있어요. 사랑은 내가 외로울 때 아플 때 부드럽게 강물처럼 쓰다듬어 주면 그렇게도 사랑은 좋지만 사랑은 또 다른 면이 있더라. 면도칼처럼 나를 찌르고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raze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그래서 둘 중에 경중을 따지는 거예요. 자, 내가 아플 때나 외로울 때, 내가 필요할 때, 힘들 때 옆에서 내 일을 거들어줘서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많을 까, 아니면 다른 경우, 혼자 있고 싶은데 잔소리하고, 닦달내고, 내 일 감시하고, 하나하나 추적하고, 나를 평가하는, 갑 질하는 인간과 사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을까?

어느 쪽일까, 해서 만약에 간섭하는 그 점이 힘들다면 ‘나 혼자 살래.’ 그렇게 되고, 그래도 같이 살면 경제적으로 이익이 있을 것이고, 나도 애도 보고 싶고, 그런 것이 있다면 같이 살면서 겪는 아픔은 감수하겠다 싶으면 결혼하는 것이고. 정산하면 계산이 그렇게 떨어져요. 차변 대변 따져서, 당기순이익 따져서 어느 것이 이익이냐 따져서 ‘그래. 나 이제 결혼할거야.’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 <아가>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혼자보다도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이 같이 있다는데서, 자기가 혼자 있을 때 예상 못한 다른 색다른 새로운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사랑을 가져온 상대로 인하여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나 혼자 사는 것을 포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제는 나는 더 이상 나 혼자 안 살래. 간섭을 하든, 나를 지적질 하든 나는 그분이 있어야 돼.” 이게 바로 아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구약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겁니다. 같이 있다는 것, 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설마 죽음에 몰아넣는다 할지라도 주와 함께 같이 죽는다면, 같이 지옥 간다면, 같이 죽는다면, 같이 아프다면 저는 그것도 족합니다.”라는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사랑이고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왜 그렇게 불 질러놓고 끄집어내는 식으로 하느냐? 불 질러 놓고 끄집어내는 식의 아주 유사한 구절이 신약에도 나와요. 신약의 고린도전서 3장 12절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주의 일에 의해서 네가 구원되었는지, 아니면 네가 구원받고 싶어서, 네가 노력해서 구원받았는지는 불로서 시험해버린다는 겁니다. 아까 말한 대로 그냥 태워버려요. 불을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 내가 주님한테 하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갖고 오실 때는 어떤 것을 점검하느냐?

네 속에는 내가 주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네 속에 있는 것이 아무리 고귀하다 할지라도 네가 보기에 괜찮은 일, 착한 일, 거룩한 일했다 할지라도 내가 주는 이 생명에 비하면 생명과 바꿀만한 것들은 없어. 그만한 가치 있는 것은 네 안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갑질입니까? 이게 우리한테 서글프게 느껴지는 겁니까, 아니면 기쁨으로 오는 거예요? 기쁨으로 와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로소 주님의 생명 앞에서, 피 앞에서 나를 제대로 발견하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내가 생명보다 귀하지 않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것 가지고 꾸역꾸역 모아서 어떤 성공을 기대했다는 것, 나 홀로 내가 독자적으로 설 수 있도록, 나 혼자 배부른 상태가 되도록 뭔가 시도했다는 이것이 얼마나 내가 비정상적인 존재인가?

이것은 진짜 때려죽여도 쌀만한, 지옥가도 할 말 없는 가짜였습니다, 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를 본인이 누리게 되니까,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늘 그걸 느끼게 되니까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계속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요. 전부 다지요.

전부 다인데 성공하고 싶어서 자기의 윤리도덕, 뭐 이성적인 것, 깨달음, 온갖 것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변동이 있어요. 여러분이 주유소에 가보게 되면 휘발유 값, 경유 값에 변동이 일어나지요. 리터당 1308원 하다가, 1259원 하다가, 그 다음날 보면 1298원 하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주유기의 기름은 지하탱크에서 올라오지요.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성공일념 때문에,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돼. 실패하면 안 돼. 실패하면 내가 나를 용서 못해.’ 이런 식으로 오직 성공, 성공, 성공, 하기 위해서 뭐라고 하면서 그걸 하느냐 하면 “저는 마땅한 일을 합니다. 당연한 일을 합니다.” 하는 거예요.

본인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놓고 자기는 마땅히 성공해야 됩니다, 하는 데 성공이라는 말은, 교만하게 들릴까봐서 그 말은 빼버리고 “저는 당연하고 마땅한 일을 합니다.” 돈 버는 일을 한다는 그 말이지요.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 그런데 그 주유소 탱크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기름 들었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오기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 내가 우선이고 신은 나중문제에요. 내가 잘되기 위해서 후원해줄 수 있는 신을 나는 나의 구원자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기 싫다는 겁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괜찮은 인간인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정상인줄 알고 있어요.

이걸 볼 때 인간이 교회 와서 어떻게 기도하고 그런 것은 다 소용없는 거고요. 모든 인간의 일상자체가 종교화되어 있어요. ‘신이시여, 나를 위해 봉사하라. 나를 위해 힘껏 일해라. 신이 나에게 어떤 잔소리를 하든 나는 내 성공을 절대로 포기 못하겠다.’ 이런 오기로 태어났어요. 인간은 오직 오기밖에 없어요. 일기, 이기, 삼기, 사기, 오기밖에 없어요.

인간은 오기로 똘똘 뭉쳤어요. 정 안되면 목숨까지 버릴 양이에요. 그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래놓고 그것이 마땅하대요. 그게 당연하답니다. 자기는 늘 자기를 좋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성공하는데 있어 나는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걸 지금 자기가 즐기는 거예요. ‘이렇게 반듯하게 하면 내 성공이 어느 날 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다림이지요.

그러나 그 기다림의 무상함, 무심함, 기다림의 허무함, 결국은 다 오늘 호세아의 나오는 주님의 구원자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원수로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자, 첫 번째 애굽, 두 번째 광야, 5절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그리고 7절부터 보면, 네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나라에 가가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지시받는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혹독한 하나님의 피괴 작업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작업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이 이렇게 진행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진행되는가? 공통점이 있어요. 1번, 2번, 3번, 첫 번째 애굽, 두 번째 광야, 세 번째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 공통점이 뭐냐? 땅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벌주면서 어떻게 벌주는가? 땅이 저주받음으로 인간들이 저주받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땅을 복 줌으로서 거기에 사는 인간들이 저절로 복된 사람이 되게 해요. 그래서 인간은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환경구원이지요. 환경, 땅, 집단구원이라 할 수 있는데 환경이 구원받음으로 그 환경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구원되는 구원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하는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인간이 사는 땅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았고, 이 땅에서 설움 받았던 메시아가 자기의 만족스러운, 모든 고난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만한 만족스러운, 메시아의 위상과 메시아의 영광을 충분히 살게 하는 땅, 그 땅에 자기아들도 합세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에요.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그 천국에 여러분이 가 보세요. 내가 보니 다 갈 사람 같은데……. 가보게 되면 깜 놀! 깜짝 놀라요. 이것은 내가 행한 것 때문에 주어진 좋은 환경이 아니에요. 이것은 나 말고 예수님의 수준에 맞는, 예수님의 격에 맞는, 예수님의 인품에 맞는 환경인데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그냥 들어간 거예요.

모든 천국의 인테리어가 예수님의, 그 하나님의 영광됨의 맞춰서 너무나 영광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거기에 우리는 참 염치불구하고 한 것도 없이 거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에 반해서 지옥은 악마가 당해야 될 그 심판과 형벌에 딱 맞는 곳에 악마 따라간 사람들 거기 다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뭐가 마땅합니까? 뭐가 당연함이에요? 우리는 성공하면 안돼요. 실패를 하겠다는 그 의욕을 목표로 삼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아, 참, 실패를 나의 목표로 삼을 수 있다니!’ 이렇게 돼야 돼요. 혹시 여러분 학교에서 가훈이 뭐냐, 이렇게 묻거든 네 자로 이야기해주세요. ‘실패하기’ 네 자가 좀 길면 ‘망하기’

쌤이 물을 거예요. “뭐가 망한다는 거냐?” 집안 망하기. 내 구원 망하기. 구원에 실패하고, 집안에 실패하기. “그렇게 실패하게 해놓고 슬프지 않느냐?” 그런데 전부 다 하하하……, 웃고 있어요. 그러면 ‘미쳤구나.’ 하지요. ‘완전히 미쳤구나.’ 그러면서 선생님은 자기가 정상이라 여기지요. 자기는 성공을 원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이미 실패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사야 65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업적들이 나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천국에 소 있고, 이리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당시 구약사람들이, 약속의 땅에서 인간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기 전이니까, 그 약속의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복된 상태가 상함이 없고 해함이 없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인간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이 이리와, 토끼와, 소와, 사자와 더불어, 함께 사는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의 모습, 그 이미지로 마지막세계 천국을 묘사한 겁니다. 이사야 35장 5, 6절에 보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자, 이사야 35장 5절 이하에 나오는 그 모습을 가지고 오늘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아들 만들기, 아까는 제가 시커먼 아궁이속에서 고구마 끄집어낸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세상을 시커먼, 저주받은 그러한 아궁이로 보자, 이 말이지요.

그 속에 자기백성을, 애굽에서 나온 사람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그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했고, 양식 없다고 원망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은 물이 없으면 자기인생 실패했다고 여기고, 양식 없으면 인생 실패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 말은 곧 뭐냐 하면, 평소에 애굽에서 살면서 자기에게 장착되어 있는 그 사고방식자체가, 삶 자체가 물이 많아야 되고 양식은 넉넉한 것이 내게 맞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에, 나는 물이 많아야 되고 양식이 많아야 된다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나는 돈이 많아야 되고, 나는 부자 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에 부합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하면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지 주님의 구원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병고쳐주고 돈 내라 돈, 이렇게 했어요? 그렇게 했습니까? 철인3종 경기에 출전시켜 줄 테니까 내가 팀 닥터니 돈 내라 돈, 이렇게 했겠어요? 돈 안내면 폭력행사하고, 때리고. 너희 집에서 돈 가져오라고 하고.

사람이 아무리 돈이 수십억 있어도 항상 바들바들 떨고, 부들부들 떨고, 무섭고, 두렵고 한 이유는 그놈의 성공 때문에 그래요. 성공에 대한 집착과 미련, 성공이라는 것,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함 지를 문제가 아닌데. 살살할 게요. 성공이라 하는 것은 홀로 성공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는 나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가끔 고양이나 개는 갖고 있지만 내가 왕으로서 나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뭐로 이어지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마땅함, 당연함으로 계산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겁니다. 성공한다는 것은 나 혼자 배부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분명히 교만이거든요. 이것은 구원에서 땡, 탈락이에요. 천국은 그런 세계가 아니에요. 혼자 살겠다는 사람은 갈 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 구원이란 문제가 나오거든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이 말은, 너 혼자 네가 용쓰고 애쓴다고 구원되는 세계가 아니야. 나는 너의 세계를 일체 구원이라고 생각해 준적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과 붙어사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 하게 되면 사람들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나 주님 안 믿을래.’라고 속으로,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주의 말씀 외치는 데 나 안 갈래. 왜? 나는 나 혼자 살고 싶은 이것이 하나의 취미가 되었으니까.’ “주의 말씀 전합니다. 오세요.” ‘안 갈래. 왜? 나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이게 구약이거든요.

인간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성공의지를 포기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보고 하소연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하느냐? 신약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천국 가는데 열쇠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들 갇혀 있어. 닫혀 있어. 너는 가둬졌어.” 다시 말해서 “네가 성공하겠다는 이 세상은 감옥이야. 교도소야. 못 빠져나와.” 그런 뜻이에요. 그래야 열쇠라는 것이 빛이 나잖아요. 열쇠의 가치가 높아지잖아요. 열쇠 줄까 말까, 이렇다 이 말이지요.

“나 열쇠에 관한 이야기는 안 들을래.” “그래. 안 들으면 이 세상에 갇혀서 영원히 지옥 가.” 그러나 “나 열쇠가 필요해요.”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그 사람은 천국 백성입니다. 왜? 열쇠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열쇠가 필요하다는 말은 갇혀 있음을 자인하거든요. 그러면 어디에 갇혀있겠어요? 자신의 성공욕구와 성공오기에 본인이 갇혀 있어서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이 성공의지에서 못 빠져 나간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거든요. 나는 내 구원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째는 애굽, 두 번째는 광야, 다시 애굽같은 이방나라에 집어넣습니다. 찢어가지고. 혼나보라고. “너는 네 기본적인 생각 가지고는 나의 구원을 거론할 자격도 없어. 네가 혼나봐야 돼. 이 세상에서 내 의지대로 구원되지 않는 것을 네가 몸소 느껴야 돼.”

주일날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복음을 알고, 교리를 가공해서 어떻게 무장해도 막상 새로운 어떤 사태가 등장하면 열쇠보다는 돈, 열쇠보다는 돈이에요. 천국열쇠 보다는 돈. 그 말은 뭐냐? 열쇠보다는 내 몸이 더 중요해요. 내 가치가. 생명나무보다 내 가치가 더 좋다고 노골적으로는 이야기 안하지요. 성경에서 그렇게 안하니까.

하지만 본성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주신 천국의 키, 열쇠보다, 생명나무 보다는 당장은 뭐냐, 내 몸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니까 찬송가 있잖아요.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 부르면서도 가사 개사를 해요. 부르는 순간 ‘내 몸뚱이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게 자기본성에 맞아요.

호세아 선지자는 구약입니다. 이 구약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신약에 와서 십자가로 우리를 같이 찢어버렸어요. “너도 죽고 나도 죽자.” 같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를 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성공의지가 예수님을 하찮게 보게 만들었습니다. 실패하지 않겠다는 그 자존심이 주님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를 무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여, 다시 한 번 십자가 바라보면서 실패하는 즐거움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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