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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15:20:28 조회 : 38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과거공유)-이 근호 목사


성령이 찾아왔다, 라고 했을 때 나라는 것이, 인간의 몸이야 거울 보면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 중요해요. 이게 허구거든요. 거울에 비친 몸은 허구가 아니지만 나라는 것이 눈이 보이는 것이 나가 아니고 걸쳐 있는 관계가 나를 만들어요. 그럴 때 나가 항상 자체적으로 완결 지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여기까진 나, 완결 지을 때 나답다고 하는 겁니다.

나답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결정권을 발휘하고 싶어 해요. 자기결정권 발휘를 수시로 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선택이죠. 자기선택을 왜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 해요. 교회 나온 사람들 다 이렇잖아요. 내가 죽어서 천국 갈 것이냐, 아니면 지옥 갈 것이냐를 어떻게 결정하느냐? 나의 결정권을 발휘해서 나는 옳은 선택을 한 사람으로써 천국 가고 싶어 해요.

그러면 방금 논리를 따라가 보면 나라는 것은 항상 나답다는 것은 완결 형으로 돼있을 때, 아까 봉합이라 했지요. 자체적으로 나로 꽉 찼다.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나는 내 소유로 꽉 찼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남편이 있는데 아내가 집을 나갔다면, 그건 아내가 걱정되는 게 아니에요. 화가 나는 이유가, “너는 내 소유가 돼야 돼. 내 결정권이 발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왜 말도 안 하고 집을 나가느냐.”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너, 결혼한 지 몇 년 됐어?” “3년 됐어.” “그러면 집 사람은 집에 있겠네?” “아니.” “어디 갔노?” “집을 나갔어. 어디 있는지 몰라.” 이러면 얼마나 남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 사람 앞에 뭘 느끼느냐 하면,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 나로 꽉 차있을 때 으스대고 자랑하고 싶은데 지 마누라 하나 간수 못하는,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되게 수치스런 거예요. 남들은 꽉 찼는데 나는 덜 찼다. 수치스럽지요.

그래서 인간은 의미체계가 항상 닫힌 채, 닫혀있음, 꽉 차서 빈틈이 없기를 바라요. 이런 지위를 구약에서는 이래요. 오랜만에 한자 썼는데 좀 어려운 한자인데, 王이죠. 왕이란 항상 모든 인간은 본인의 방 안에서 본인이 왕이에요. 따라서 아이들도 내 방 달라는 게 뭔 뜻이냐 하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왕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자기결정권의 자기완결성이에요. 방 안에 있는 물건 하나, 책꽂이의 책 하나에 내가 결정한 결과물들이 있기를 원해요. 그리고 누가 들어오려면 반드시 노크를 해야 되고.

아이들 사춘기라 하는데 사춘기란 뜻은 이거에요. 아빠, 엄마와 같이 사는 건 사춘기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는 엄마, 아빠는 왜 있느냐를 다시 따져보는 관계가 사춘기에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나대. 엄마, 좀 조용히 해.” 이게 사춘기에요. 전에는 엄마, 아빠는 고마운 분. 그분들 없이는 내가 안 돼. 따라서 엄마, 아빠 말 듣고 순종해야 돼.

이게 사춘기 전이라면 사춘기 후는 뭐냐 하면, 나의 행복권(나의 결정권)을 위해서 엄마, 아빠나 동생이 방해가 안 됐으면 좋겠다. 방해된다? 처음에는 말로 하다가 성질 낼 때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해요. 너는 너 안에서는 왕이 된다.

모든 내 안에서 완결돼야 되는데 완결돼 있질 않아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세기 2장에 보면, 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지 말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따먹지 말라는 것의 벌칙은 어디 있습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는 그전에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요.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데 정녕 죽으리라 한 것은 사실은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에요.

벌칙이란 것은 그 벌칙이 두려워서 행동을 안 할 때 벌칙이 유효한 거예요. 그런데 죽어보지도 않았는데 따먹으면 죽는다, 이러면 겁나겠어요? 안 나지요. 만약에 자기 딸에게,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미스코리아 된다.” 그러면 얘는 미스코리아가 뭔지 찾아본다고요. 찾아보니까 되게 좋은 거거든요. 그리고 공부 안 해도 되겠구나, 이렇게 되지요.

이미 벌칙에 대해서 알게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뭐와 결부되느냐 하면, 자기결정권과 결부가 됩니다. 그런데 벌칙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선악에 대해서는 자기결정권이 개입될 수 없지요. 이건 몸은 있지만 자아성이 없는 거예요.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벌칙은 뭐냐? 아담이 안 벌칙은 이거였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벌칙이 되고, 그 결과는 뭐냐? 선악을 아는 자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벌칙으로 주님께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악을 안다는 것은 자아가 의미체계가 닫히질 않아요. 추운데 문을 닫아야 되지 않습니까. 꼭 성질 급한 아들 같으면 문을 열 때 꽝하고 튕겨 나온다고요. 문을 열어 놔버려요. 그러면 다리 아픈 어머니가 문 좀 잘 닫으라고 가서 다시 닫고 오잖아요. 두 번 걸음하게 만든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닫히질 않은 거예요. 왜 닫히지 않느냐 하면, 선과 악이 통합될 성격이 아니고 대립이 되고 대체가 되기 때문에 악은 항상 아무리 선해도 이미 선악을 알았으니까 악이 입을 벌리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것과 이것의 차이를 보세요. 2=2+0, 2와 2+0의 차이는? ‘=’로 돼있으니까 차이가 없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차이가 나지요. 2+0에는 0이 있지요. 이게 excess‘여분의 것’ 나머지, 여분의 것이에요. 평소에는 이게 안 나타나나다가 사건이 오게 되면, 그러니까 내 자아를 다시 정립하게 되는 사건이 오게 되면 내가 붙잡지 못하고 놓친 게 있단 말이죠. 놓친 게 제로가 되는 거예요.

사랑이 있는 거예요. 사랑은 사랑할 때 사랑을 몰라요. 그런데 언제 사랑을 아느냐 하면, 이별할 때 사랑을 알아요. 뭐 쿨하게 헤어진다. 사랑할 때나 그런 소리하지요. 헤어져 보세요. 쿨하게 못 헤어져요. 이런 남자를 만났으니, 하면서 참견하는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남자가 이런 메시지 남겼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됩니까? 이런 남자와 계속 사귀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요. 그러면 키 큰 농구선수와 김숙 등 네 명 다 결혼 안 하거나 이혼한 사람들 앉아서 조언을 해줘야 돼요. 절대 이런 남자와 헤어져야 된다며. 지들도 결혼 안 해놓고 웃긴다고.

이 +알파, 제로는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나를 몰라요. 나한테 이런 요소가 여분의 요소가 있는 줄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령이 안 온 사람은 2=2고, 3=3이고, 4=4에요. 왜? 이걸 전혀 모르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2+0가 있어요. 이 제로 부분이 빈 공간, 공백, 빈자리가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의 자리에요. 예수님의 자리가 나로 하여금 2되게 하고 3되게 하고 4되게 하는 이런 사건을 유발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요. 나한테 보이지 않는 분, 지금 예수님 안 보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나를 데려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지 않으면 제로가 없지요. 제로가 없을 때는 2을 내가 상상해서 천국을 상상하고 예수님을 상상해서 내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전하든지 기어이 여기다 나를 집어넣어야 돼요. 집어넣는 방법은 봉합되지 않은 선+악 지식을 동원해서 천국에 집어넣어야 되는 거예요.

기도하면 선이고 기도 안 하면 악이고, 헌금하면 선이고 헌금 안 하면 악이고, 나쁜 짓하면 악이고 착한 짓하면 선이고. 그것을 자신의 과거로 싸잡아서 그것으로 천국에 넣어달라고 가져오는 거예요. 교회에.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선악 자체를 없음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선악 지식 안의 2을 죽음으로 보지요. 죽음은 뭐와 결합된다? 0은 예수님이니까 생명. 생명이 죽음을 이김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평생을 살면서 왜 죽어야 하는 이유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입장에서는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은 자가 되지요. 나쁜 자가 되면 자꾸 선한 것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내가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다녀야지. 자꾸 뭔가 선한 쪽으로 생각하는데 이 자체가 이 순환구조는 뭐냐 하면, 이미 죽음을 유발하는 순환구조에요. 그러나 내가 죽은 자로 아는 것은 생명이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죽은 자가 되고 죽음은 어디서 생산되는가? 나쁜 것, 좋은 것을 따지는 것이 바로 죽음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아까처럼 하면, 처음에 선악과에 있는 사람은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진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지옥 갈 사람들이 하는 사고방식에서 기껏 종교를 교회 다녀보자 이래 돼요. 내 인생을 누가 책임지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책임진다. 이 정도까지 나간다고요. 이래도 이건 지옥 가는 거죠. 진짜 증언은 뭐냐? 나는 책임질 가치도 없는 거예요. 내 인생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내 인생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여러분? 예수님? 자꾸 예수님 보고 책임지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만약에 치매 걸렸다. 그러면 그 사람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이고 뭐고 몰라요.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자기 믿음이 도대체 몇 살까지 가야 믿음이에요. 나중에 정신없이 믿음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려요. 처음부터 없었어요. 처음부터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여기에 개입됐거든요.

개입된 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격침.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격침된 거예요. 내 이름이 자아인데 자아 있으니까 내 이름이 있잖아요. 내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격침된 거예요. 격침됐다는 말은 그냥 침몰하고 무너진다는 것과 달라요. 격침됐다는 말은 어떤 요소가 강하냐 하면, 공격당했다는 요소가 강하지요.

공격당하기 전에 나는 그냥 멀찍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싸웠다. 나 방어에 나섰다. 격침당하지 않도록 애썼다. 왜? 내가 속한 것은 세상이 인정해준 타인이 인정해준 전체가 총괄적으로 의미체계 속에 나는 일부로 사는 것은 내 자아가 그걸 편안하게 받아들였거든요. 예수님 빠져도 내 직업이 있고 또는 직업생활하다 은퇴를 했으면 과거를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옛날에 내가 그만큼 사는데 내가 수고와 희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살 권한이 있다.

이만하면 연금 오백 받고 아파트에 살아도 남들이여, 날 욕하지 마라. 왜? 난 그만큼 고생했기 그만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건 격침되기 전의 군함이지요, 뭐. 이건 나의 의미에요. 내 안에는 내 의미로 꽉꽉 차있어요. 내 안에는 나다운 것은 꽉 차있어요.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 기억인데 기억은 나의 과거지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어요? 과거를 공유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를 받아들이지 말고 내가 나답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정당하다는 그게 살아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문가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재판받고 처형됐잖아요. 그 전문가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의식과 그들의 예리한 법의식과 그리고 예수님이 있음으로서 이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까지 정치적 고려까지 다해내는 그 정도로 뭔가 포괄적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그런 뛰어난 천재들, 정치적 행정적 천재들에 의해서 결정된 사항, 그 속에 우리는 일부로서 요소로서 들어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내쫓아야 된다,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나중에 그들이 허공에 발길질하는지 모르고 그들의 그라운드, 뿌리가 없다는 것을 애써 감추면서 그냥 밑은 안 보고 이 세상은 서로를 보면서 뭘 하느냐 하면,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위로해달라는 분위기가 코로나블루거든요. 이 코로나우울증은 누가 위로해줘요?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줘야 되는 거예요. 바가지 밟아 깨가면서, 스트레스 풀어가면서 서로가 위로해주는 거예요.

그 위로를 영어로 여러분 아시죠. 위로, 치료, Healing. 도대체……. 힐링 하려거든 김여정한테나 힐링 해라. 전부 다 힐링 해 달래. 피에다 뿌리를 꽂아야 되는데 꽂질 못하고 힐링만 찾고 있어요. 그래서 상담치료가 그렇게 위험한 거예요. 상담가가 나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온 사람들의 의도 간파해서 의도대로 해주는 게 상담이에요. 나한테 이런 결핍이 있습니다, 라고 상담가가 알아내는 게 아니고 손님 보고 해내래.

당신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그걸 왜 상담가가 찾아내야지 손님에게 이야기하라 합니까. 그럼 손님은 이렇게 어려움이 있다고 하지요. 이야기할 때 자아체계에서 닫히지 못하고 뭔가 뚫렸잖아요. 이게 자식문제, 남편문제, 아내문제 뭔가 뚫려있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고 찾아온 사람이 오해하느냐 하면, 이것만 메우면 나는 예전처럼 온전한 내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때려죽어도 나라는 것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쉽게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옥 생활 편하게 해줄 수 없겠어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물론 지옥은 모르니까 지옥은 빼버리고 그냥 생활하는 데 편하게 생활하면 어떻습니까? 사실은 그게 지옥인데. 주님께서 제기하는 것은 힐링이 아니고 상담이 아니고 우리의 근본 뿌리를 우리의 발과 결합시키는 거예요. 피에다 붉은 잉크에다 우리의 발을 꽂아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바람이 불든 태풍이 오든 코로나가 오든 뭐가 오든 상관없어요.

꽂을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죽음의 의미 안에 생명이 개입했다는 것, 그럴 때 죽음이 선악을 아는 여기에 선과 악은 결코 봉합이 안 돼. 닫히지 않아요. 항상 미흡함으로 남아요. 선과 악이라 할 때 선이 이만큼 5센티미터 더 가잖아요. 악을 제치고. 악과 달리기 하다가 나는 선으로 이기고 싶어. 그러면 내가 악보다 속도 빨라서 앞장섰단 말이죠.

그리고 뒤돌아보고 악에게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려고 그렇게 했지만 나는 유혹을 이기고 선을 하고 있다, 하는 그 순간 이미 마중된 악이 옆에 동반하고 있어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악이 왜 거기서 나오지? 내가 악을 이기기 전까지는 그 악보다 더 악이 있을 줄 몰랐는데 내가 악을 이기고 선을 행했다는 그 순간에 기다렸던 악이 동반자로써 동행자로 다시 붙는 거예요. 선과 악은 항상 같이 동반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뭐냐? 예수님이 했던 행적으로 바꿔치기해버리는 거예요. 선악체계에다 예수님의 행적을 바꿔치기해버려요. 바꿔치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이 그림이 중요한데요. 인간이 자기 의미체계가 있으면 이건 자기 몸이 아니고 신체가 아니고 자아라 했어요. 일단은.

이 전체가 많은 부분을 선이라 보고 악은 거의 쪼금, 경상도 말로 쪼매인데 신경 거슬리는 게 있어요. 장미에 찔렸다. 장미 가시에 조금 찔리지 온 몸에 박히는 그렇게는 안 찔리지요. 그러나 이걸 빼면 온전하게 되는 그 미흡함, 악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볼 때 항상 이렇게 좋게 봐요.
“내가 천사가, 하나님이가. 살다보면 먼지 묻게 마련이지. 하지만 퍼센트를 따져봐라. 이게 99%가 선이고 1%가 악인데 그걸 티 잡나, 타인들아.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아, 응시자들아. 내가 이렇게 잘해보려고 아내 떠나서 울릉도에서 일하는 것,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니고 우리 가족 잘 살려고 사업 세 번 실패했는데 네 번째 여기서 이명나무 키우면서 고생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잖아. 잘해보려고 하는데 네가 좀 이해해줘.”

그러면 아내 쪽에서, “취미생활하면서 어딜 핑계대로 있어.” 이렇게 하지요. 아녀자가 됐으면 남편이 하는 일을 팍팍 밀어줘야, 남편이 안 그래도 험한 세상에서 기죽고 사는데 가정에서나마 기가 팍팍 살아야 플러스알파에너지가 나와서 일에 성과가 있을 것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힘들 때 자꾸 위로받으면서 자기 이름을 외친다고요. “아무개야, 파이팅!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지 혼자 산 위로 올라가서 이 짓하고 있다고. 허공 속에 발질하고 있어요.

그 힘내라 할 때 목표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지요. 목표, 목적에 대한 리스트, 이것 어디서 구합니까? 바로 타인의 의미에서 구하는 거예요. 타인의 의미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나, 쟤처럼 돼, 나 이처럼 돼.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에게, “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박보검. 난 박보검이 칼인 줄 알았어. 왜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박보검이 리스트에. 그게 하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박보검을 원하려면 적어도 손예진 만큼 인물이 돼야지 지는 손예진 아니면서.

그래서 인간은 항상 모든 목적과 의미가 기존에 있는 것 중에서 추립니다. 추려서 덕지덕지 고르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걸 우상, 아이돌이지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우상이죠.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업무, 주님께서 찾아온 사람의 업무는 뭐냐? 딴 것 아니에요. 착하라가 아닙니다.

너의 우상성과 어떻게 네가 싸울 것인가? 이 문제에요. 매일같이 정립이 된 나만 쳐다보는 이 우상성을 어떻게 감당할래? 감당할 수 있겠어, 라고 하는 거죠. 그 우상성은 반드시 자기 의, 나는 선하다, 99.99% 선하다는 이 우상성과 네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래서 주님께선 사건을 일으켜요. 항상 우리는 이걸 닫아 놔버려요. 거의 100% 나는 착하다는 여기에 주께서는 돌발 사건을 일으켜버립니다. 갑자기 이가 아프다든지. 저도 임플란트 이주 후에 할 거예요.

이렇게 점잖고 착하고 남 대할 때 말도 곱게 하고 하다가 사건 하나 터져버리면 지금껏 내가 남들에게 착하고 바르게 산 게 다 무슨 소용 있느냐, 라고 그동안 자기 과거에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 안 먹고 몸조리면서 착하게 살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됐다는 그 허탈감, 허무감에 의해서 자기가 자책하게 만들어요. 이 사건이. 그럼 이 사건을 악마로부터 하게 만들어요.

이 사건으로 내가 99% 착하다는 이 의미 자체가 99+1=100, 이런 식으로 주께서 구원해주는 게 아니고 이건 선악적인 방식이거든요. 이 방식 말고 그냥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뿌리를 보게 해요. 네 두 발이 네 존재가 어디에 담겨있고 잠겨있고 박혀있는지 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것은 우상성과 싸우는 게 아니고 사건을 통해서 이미 우상이었구나, 라고 나를 주님의 과거로 만들어버려요.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죠. 내가 고칠 수 없는 운명, 인간이 스스로 바꿀 수 없어요.

인간은 잔소리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상담의 문제가 그거에요. 멀쩡하게 서있는 나, 우상이죠. 우상과 그리고 내가 담고 있는 발, 적시고 있는 발, 위에는 강도고 밑에는 피, 이러면 어디 가요? 천국 가지요. 이 피의 원칙과 위의 원칙이 다릅니다. 이 원칙은 선과 악의 갈등이에요. 항상 악을 뿌리치고 선한 쪽으로 나를 몰아세우려는 분투노력을 하게 해요.

결국 윤리도덕이 왜 악이냐 하면, 나를 지키는 거예요. 선과 악이 봉합이 안 되는데 마치 나는 악을 떼어내는데 성공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자기가 착각하고 싶어 하는 것, 그게 바로 우상이고 그게 윤리도덕이 거기에 작용되는 거예요. 나에게 기대 걸고 나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오늘 괜찮은 성적이라고 자기 자신의 성적표를 그 사람에게 제시함으로써 그 사람이 나한테 계속해서 인정함, 참 훌륭하구나, 잘하는구나, 라는 그 점수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없지요, 뭐. 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늙어 죽어가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착각만 남아요. 나라는 이름의 환상만 남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연예인들은 팬들 떠나면 자살하잖아요. 이유가 뭡니까? 팬이 없는데 내가 살면 뭐하나. 이 몸으로 살면 뭐하느냐.

팬이 없으면 떨어진다는 이 말을 장사, 상업에다 적용하게 되면 도꾸이 없으면 장사가 안 돼요. 도꾸이(とくい)란 말은 단골. 교회도 도꾸이고, 모든 장사도 도꾸이고. 보세요. 이 세상에 이 몸은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무조건 불행은 남들한테 가고 나에겐 와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예를 들면 피자가게를 냈다. 세상에 싸가지 없이 분명히 피자가게를 냈으면 적어도 500미터, 1킬로미터 내에는 다른 피자가게가 없어야 되는데 보란 듯이 피자가게 내고 인테리어 더 잘했어요. 나한테 왔던 도꾸이 어디 갔습니까? 반 토막 났고 저쪽 갔어요. 온 도꾸이도 다 날아갈 판이라. 너는 장사윤리도 없나, 하고 윤리가 등장해요. 이게 스트레스지요.

스트레스는 왜 오느냐? 딱 한 가지에요. 경쟁 때문에 생겨요. 독일의 교육에서는 경쟁이 없대, 시험이 없대.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데요. 우리 외손자한테 너 유치원에서 뭐 배웠나, 하면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요. 그냥 놀았대. 그래서 한국 오면 너는 완전히 바보 된다. 애들이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경쟁이 없으니 행복하지요. 전부 다 도꾸이가 오는데 행복 안 할 수 있어요? 경쟁자가 없는데 행복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경쟁 없으면 바보 되지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떤 방법으로 압니까? 도로에 자기 차 한 대밖에 없으면 세월아 내월아, 하고 그냥 가면 돼요. 그러나 앞차가 가게 되면 심리적으로 따라가게 돼있어요. 필히 그래요. 더 앞에 가면, 요것 봐라. 더 따라가게 돼있어요.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모방해서 움직이게 돼있어요. 따라서 항상 내가 갈 길은 남들이 가는 곳만 찾아가요. 심지어 그게 지옥이라도 좋아. 하여튼 멸망 길이라도 많은 사람이 가게 되면 진리라고 여기는 거예요. 큰 교회,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몰라. 무조건 남들 하니까 다 따라가는 거예요.

경쟁을 이 세상에 집어넣었어요. 부질없는 목적을 향하여 부질없는 헛짓하다가 나중에 경쟁자 물리치게 되면 본인은 나는 내가 최고라고 하는 순간, 경쟁자 없는 순간 그 사람은 살 의미가 날아가 버렸어요. 왜? 평생 동안 경쟁하는 재미로 살았거든요. 공부하는 재미로 살았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붙여줘야 하지 않습니까. 평등이라 해서 그 학교 다 없애버리면 얘들은 뭐하고 놀란 말이에요? 공부가 제일 재미있는데.

그래서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마지막에 형뻘들 축구하고 있는데 동생들은 장래 희망이 그거에요. 축구 잘해서 저렇게 환호 받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형들 다 떠나고 휑한 운동장에서 지 혼자 공 툭툭 차봐야, 분명히 공차는 게 재미있는데 왜 공을 혼자 차면 재미가 없지요? 환호성, 보는 타인들의 시선이 없잖아요. 나를 나라고 규정해줄 자가 없잖아요.

이게 바로 2+0인데 이 0이 악마가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우리는 원래 악마의 지배였으니까. 이 0의 자리를 주님의 자리로 바꾸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악마나 주님이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없는 존재고 숫자로 하면 0이 되는 거예요. 없는 동네에서 일어난 전쟁이에요. 우리의 운명이 확정된 것.

그러면 자기의 우상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우상 되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셔요. 2+0에서 주님은 분명히 2+0인데 이 세상은 이 0을 안 쳐주고 자꾸 나 보고 2이라고 이야기해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유행가 생각나네. 설악산 근처에 고갯길이 있어요. 한계령. 나 보고 내려오라고 하네. 나 보고 가라 하네.

이게 타인의 시선이 나의 욕망으로써 지휘체제, 지시를 하게 되지요. 이것이 몸에 배긴 정신적인 관행이 되고 관습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뉴턴의 제2법칙에 의해서 멈추지 않는 한 인간은 같은 속도로 가게 돼있어요. 관성의 법칙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던 대로 살게 돼있어요. 따라서 인간은 개조되지 않습니다. 교회 백날 다녀도 개조 안 돼요. 예수 믿어도 개조 안 됩니다.

다만 주께선 하던 대로 하되 레일이 있잖아요. 레일 스위치를 바꿔버려요. 같은 죄인인데 가는 곳이 전에는 지옥으로 가다가 스위치를 바꾸니까 부산으로 가다가 광주로 오게 만들어요. 대전에서 레일을 바꿔버려요. 레일을 바꾸면서 천국 가면서 여기는 +0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전에 알던 나와 주님이 누군가를 주님의 과거사를 공유하면서 주님이 누구신지가 내가 누군가보다 더 중요한 기쁨의 요소가 돼버리지요. 그리고 자기 발을 본다. 나는 도대체 두 다리가 어디 있는가? 누가 요한복음 6장 65절 읽어보세요.

“또 가라사대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원리가 우리의 두 발을 담갔던 피의 원리입니다. 이 피의 원리에서는 네가 천국 가거라, 이렇게 하면 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네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제로에 주도권이 있고 이 제로는 아버지와 직결되신 분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되는가? 내가 아니라고 아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죽은 자답게 만드는 지옥 가되 마땅한 자로 만드는 그런 모습으로 나는 선의 경쟁에 뛰어들고 있음을 자기 자신을 이 뿌리의 안목에서 다시 자기 몸통을 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우상인지를.

그런데 우상인 내가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절대로 안 바뀌어요.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해도 이건 2초 내지 3초 지나면 그 다음에 누가 딴 소리하게 되면 정신없어. 너한테 경쟁에서 안 진다는 이런 소리 나온다고요. 자기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같은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하는데 아들이 와서, “엄마, 또 오늘 수학 망쳤다.” 하면, 집 나가. 너 내 자식 아니다. 방금 은혜 받았다며. 갑자기 집안에 쑥 사건이.

은혜 받았는데 갑자기 닫히는 거죠.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잖아요. 닫혔는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터져버렸단 말이죠. 터지니까 나는 우상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사건을 봉합하려고 이걸 메우기 위해서 갑자기 너는 앞으로 기도해라. 기도해야 되지, 기도 안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자기 괜찮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본성이 발작을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를 격침해야 되는데 주님의 새로운 나가, 그러니까 2+0가 지옥에다 죽으라고 격침시켜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알면서도 다시 가게 되면 헤헤하면서 이가 수면 위로 내밀어서 너는 3이냐 너 1이지 나는 2야, 하고 경쟁에서 안 지려고 하는 이유가 몸이 있기 전 관행과 관습입니다.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이 관행과 관습은 몸 인박혔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집에 아파트 문 닫고 돼지고기 구워 먹어봤습니까? 그 냄새 되게 오래 가지요. 그처럼 우리를 이어준 이 몸은 수상한 몸이에요. 선악에 의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가 포기해야 될 몸이에요. 오래 산다고 해서 자랑할 게 아닙니다.

강의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보람은 자기 하는 일에 있다. 지금은 일이 없더라도 과거에 이 정도 일을 했으니까 사람 값한다, 나 마구 안 놀았어, 사기 처먹고 사는 게 아니야. 나는 가장으로서 책임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고 죽을 등 살 등 해서 이만큼 이뤘으니까 강의에 의하면 자아 안에는 자기의 소유성으로 충만하지요. 이 아파트와 부동산은 내가 가질 만해서 가진다.

그걸 누굴 보고 이야기합니까? 지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여러분 가끔 친구들 만나자 하거든 자랑하라고 만날 줄 아시고. 친구 만난다는 것은 첫 번째, 술 먹으려고 만나는 것과 또 술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 지 자랑, 자식 손자 잘 키운 것, 손자 유학시킨 것, 전부 다 자랑하려고 모인 거예요. 결국 그 자랑은 화기애애하게 헤어진다, 싸우면서 헤어진다? 싸우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경쟁이니까. 적어도 착한 내가 나보다 못한 저보다는 매사에 복을 받아도 더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 복 받는 경쟁에서 지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목사들의 심방을 가고 누굴 만나도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망했다고 생각한 사람 집에는 못 찾아가요. 자신감이 팍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남 앞에 내세우기 전까지는 오지 마라. 내가 남에게 이 정도면 내세울 만하다고 되기 전까진 오지 마라.

사랑이란 그 사람의 과거를 공유하는 게 사랑이에요.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했는데 적어놓으세요. 사랑이란 숨겨놓은 과거를 공유하는 게 사랑이에요. 예를 들어서 “여보, 내가 소를 시장에 가서 썩은 사과와 바꿨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잘했군, 잘했어.” 이러지요. 또는 충청도 말로 “괜찮아유, 뭐. 살다보면 그런 수가 있지.” “실은 내가 당신 몰래 저지레했어.” 남편이 그걸 들었잖아요. “괜찮아유, 뭐. 살다보면 그렇지.” 이게 하춘화 노래에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 는 서로의 과거를 공유해도 이게 하나로 서로 소통이 되는 것, 그게 얼마나 희망사항이겠습니까. 문제는 그 과거가 우리의 미래라는 거예요. 현재 주님과 함께 되면 현재에서 과거, 미래가 계속 새롭게 생산돼요. 없던 과거가 만들어지고 없던 미래가 만들어져요. 없던 과거가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한 일이죠.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닙니까? 지나간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져요.

왜냐하면 우리가 가질 것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주님의 과거를 공유하게 되면 주님의 과거로 나의 과거가 교체가 되고 채워져야 돼요. 그래야 주님 안의 새로운 자아가 주님의 소유성으로 주님의 하신 일로 업적으로 꽉꽉 차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보시기에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이에요. 주님 앞에서 전방후방 좌우 그리고 과거와 미래, 전부 다 주님의 것으로 채워나가는 겁니다. 2+0로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채워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의 증인이에요. 보이지 않는 분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럼 왜 우리는 보이느냐? 보이지 않는 분 때문에 보이는 거죠. 이 원칙은 뭐냐?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공격했잖아요. 왜 예수님을 공격합니까? 예수님은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 명령 따라갑니까? 아버지죠.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일을 못하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 땅에 보내듯이 이와 똑같은 과거 똑같은 예수님의 경험을 똑같이 적용시킨 사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끝. 아무도 올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는 지금 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우상이고 남한테 안 지려하고 우리 자신을 개조 못하고 그런데 우리가 딛고 있는 뿌리는 주께서는 주님의 과거를 거쳐서 주님의 현재에 이르도록 우리를 계속 매일같이 방향을 틉니다.

사건을 보내서 우리가 선악에 빠져있고 선악으로 미친 짓하고 있다. 죽은 벌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음을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는 겁니다. 내 선으로 악을 가리는 이 미친 짓 때문에 본인이 고민이 되고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하니까 잠이 오질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어도 살찐 사람은 어떤가, 잠 잘 오는 사람? 그건 많이 먹어서 그래요. 그건 야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고.

평소에 사람들은 얼추 됐다 싶으면 또다시 여기서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완전히 강호의 고수들의 판이거든요. 이 판에서 내가 칼을 제일 잘 쓴다 하면 다른 고수가 또 등장해요. 이건 설교, 목사세계도 마찬가지에요. 얼추 설교 잘한다하니까 다른 고수가 등장하면 엄매 기 죽어. 엄매 기 살아. 이러고 있다고요.

이 자체가 진짜 뻘쭘한 인생입니다. 아무도 봐줄 필요도 봐줘도 아무것도 아닌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거기에 대해서 평생 동안 마귀에 노예 생활하는 우리의 모습, 주께서는 일체 묻지 아니하시고 그 발을 피에 적셔서 얼굴이 술 먹은 것처럼 예수의 피로 벌건 그런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서 왜 사람들에게 일부러 죽으셨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뿌리 없는 우리가 생명에 우리의 발을 잠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0626b 마가복음15장 16절.hwp (60.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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