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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12:35:39 조회 : 40         
20200917b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00917b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제목을 저는 ‘절망’이라고 그렇게 정해봤습니다. 절망 안 하기가 누구의 욕구냐 하면 나의 욕구에요. 누가 요구하느냐 하면 나는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나한테 요구하기 때문에. 사실은 괴물이죠. 세상이 누구 세상인데 지가 왜 절망을 안 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절망 안 해야 된다는 그런 당위성을 도대체 누가 준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되기, 교회 돼야 돼, 라는 것이 절망 안 하기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지요. 절망 안 하기 위해서 교회가 돼야 된다. 거기에 대한 참고자료는 뭐냐? 성경에 풍부하다. 성경대로 말씀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절망에서 희망이 된다, 라는 짓거리를 누가 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했어요. 이미 이스라엘이 해왔단 말이죠.

십자가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절망 안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여기서 뭐가 유발된다? 십자가 사건 터진 거예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는 거예요. 나는 왜 절망 안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에 대한 해답을 우리 내부에서는 찾을 수가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무조건 절망 안 해야 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예요. 우리는 속임을 당하는 대상으로서 나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회를 누가 공격하느냐? 정답 미리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교회를 공격해요. 공격당해야 주님의 진 뜻, 진짜 의도가 세상이 공격당할 때는 주님의 의도 안 나타나요. 그러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공격당할 진짜 주님의 의도가 나타나요. 그게 요한계시록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3장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나오지요.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그라고 하면서 뭘 줄줄 달고 오시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나는 이렇게 하시는 그이다. 자신에 대한 서술의 내용을 꽉꽉 채우는 기능들을 달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이런 서술을 갖다 붙이느냐 하면 교회를 공격하면서 비로소 교회에 가려진 진짜 교회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는 다 이루심의 내용으로 꽉꽉 채워져야 돼요. 여기 무화과과실은 꽉꽉 차있지요. 빈틈이 없지요. 무화과나무 과실 단면을 보여줘요. 단면을 잘라보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육신의 단면이에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라면 잘라보면 벌건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단 말이죠.

그 십자가에서 가짜를 진짜로 바꾸어서 주의 나라의 백성 만들었거든요. 그 피로. 그러니까 하얀색으로 하얗게 되는 게 아니고 피로 붉은 피로 하얗게 되게 된 기능이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 계획은 그걸 그대로 그 일을 세상 끝 날까지 반복을 시키는 거예요. 그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이름의 기능이다. 이렇게 지난 낮 설교에서 한 것처럼 주의 이름의 기능이에요.

유일하게 연결돼있는 이름.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을 하나님께 다 끊어졌지만 유일하게 연결된 것은 죽은 자를 되살리시는 하나님의 일관성, 언약의 일관성이에요. 언약의 일관성이 되려면 반드시 죽은 자가 돼야 되고 죽음 없는 부활은 없어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잖아요. 주님이 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돼요. 하나님 나라에 계신다고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죽어야 돼요. 죽음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죽을 때는 죽는 이유가 있어야 죽지 그냥 죽지 않아요. 죽는 이유가 뭡니까? 흔히 아는 죄기 때문이겠지요. 그럼 죄냐, 아니냐를 누가 결정하느냐? 언약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언약과 견줄 때 죄가 되는 거예요. 비교될 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주님이 언약 완성으로 미완료에 대해서 공격하게 되면 여기서 교회의 죄가 드러나겠지요. 죄가 드러나야 교회가 부활되는 겁니다. 또는 부활됨이 확인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원리를 작용시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 3장에 잔소리가 그렇게 많지요.

그러나 이걸 잔소리로 들으면 안 돼요. 이걸 잔소리로 이해하는 것은, 그래 주님 알았어. 제가 잘 하겠습니다. 좋은 교훈 주셨기 때문에 촛대 옳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고칠 것을 고치고 유지할 것은 유지하겠습니다.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라 했으니까 그 말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교회됨을 이제는 개선하고 회개하라 했으니까 네가 떨어진 사랑이 그걸 찾으라 했으니까 찾아서 주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교회로 거듭나겠습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가짜 교회에요.

뭐가 빠졌어요? 덜 죽었어. 온전히 죽어야 되거든요. 첫째 시간 제목이 뭐라 했던가요? 절망. 제대로 절망해야 돼요. 절망하는 이유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절망 안 하고 싶은데 왜 나는 절망하기 싫은데 그 이유를 우리가 모르고 있단 말이죠. 그게 절망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왜 그런지 도대체 나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자꾸 우리는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해요. 절망 안 하는 나, 구원받는 나, 천국 가는 나, 하나님의 교회라고 인정받는 그래서 기분 좋은 나. 자꾸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 자체가 뭐에 대한 기피냐 하면 십자가 없이 혹시 구원되는 방법 없어요, 하는 악마적인 제안이 되는 겁니다. 이왕 선악과 따먹은 것, 이왕 따먹었잖아요. 따먹은 상태로 어떻게 천국 갈 수 없습니까, 라는 것이 악마가 집요하게 우리를 설득시키는 대목이에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니까 죽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충성을 하되 죽지는 않아요. 이 정도하면 죽음 가까이 어프로치 해보는 겁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진짜 죽으면 안 되니까. 왜? 몰라요. 진짜 죽으면 왜 안 되는지 모르는데 궁극적인 방법은 죽음의 근처까지 가보는 것. 이걸 문학에서는 영웅담화라 해요.

이 세상에 모든 민속의 설화들 이만 가지를 조사한 사람의 분석에 의하면 모든 설화 거의 대부분이 영웅담화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담화의 대표적인 것은 <춘향전>이죠. 영웅은 고난당하면서 비로소 영웅으로 나타난다. 춘향전 또는 <심청전> 풍덩 물에 빠지고 다시 건져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영웅담화에요. 시련 없는 곳에는 성공도 없다. 모든 아침드라마가 다 그래요. 사실 모든 드라마가 다 그래요. 한 번 다녀왔습니다. 어쩌라고?

모든 영웅담화 속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겠어요? 인간은 주님을 모르는데 유일하게 주님을 아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악마입니다. 먼저 한바탕했거든요. 하늘에서 한바탕 전쟁을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태어나서 살아가는 농사를 짓는 우리에게 쑥 하고 들어온 거죠. 하늘의 전쟁이 확전된 겁니다. 전쟁이 하늘에서 끝난 게 아니고 땅까지 번지면서 그 전쟁했던 두 개의 주체가 서로 싸운 거예요.

그걸 먼저 눈치 챈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이름은 거룩한 전쟁의 만군의 하나님이에요. 자기의 군사를 갖고 있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엘리사가 게하시한테 보여준 게 뭐였어요? 눈을 뜨니까 수만의 천군천사가 있었고 야곱이 얍복강 가기 전에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라는 엄청난 많은 숫자의 천사들이 필요했지요. 그게 영적 세계잖아요. 영적 세계는 전쟁하는 세계, 영의 세계.

에베소서 5장에도 나오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다. 인간은 빠져라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네 운명에 대해서 네가 빠져라.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쓸 수 없는 처지인 것을 알아라. 절망해도 주께서 절망을 주시고 희망을 가져도 주께서 주시지 네가 절망한다고 네가 낙담한다고 네 문제로 넘기는 것은 전형적인 악마의 수법이고 악마가 너를 그렇게 가둬놨다. 다른 아이디어를 준 적이 없어. 악마는 뭐냐?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 이거거든요.

악마란 말을 썼습니다만 아침에 눈 뜨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것부터 시작하잖아요. 따뜻한 커피부터 마시고 시작하는 거나 이 모든 문제는 오늘 하루는 내 손에 달렸다. 그것부터 시작해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절망으로 가면 안 돼. 뭐, 벌써 인생관이 정해졌어요. 절대로 절망스러운 일은 벌어져선 안 돼. 내가 단도리 할 거야. 내가 사전에 대비할 거야. 그것밖에 없거든요.

영적 싸움이 아니에요. 혈과 육의 싸움이에요. 우린 혈과 육의 싸움 외에 다른 싸움은 환상에 속합니다. 현실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미쳤지요. 사도 바울이 미쳤으니까 우린 아예 성경을 덮어버려요. 이 미친 이야기를 왜 듣느냐 이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도 처음부터 성경 덮기를 원하면서 성경을 펼쳐요. 또 안 봤다간 하나님께서 벌줄까 싶어서 두 장 더 보고. 보면서 빨리 덮기를 원하고 있어. 빨리 덮고 드라마 봐야 되니까. 기도 시작하면 빨리 기도 끝내기를 원하는. 요령 생기면 유튜브 보면서 온갖 짓 다하고.

그게 기초가 뭐냐 하면, 영웅담화에요. 그 영웅의 끝을 우리는 왕이라 합니다. 전부 다 실제적이에요. 영웅담화는 전부 다 실제입니다. 실제들의 연합체, 주님께서 이걸 거짓 환상이라 보는 거죠.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가 아니라 해석 자체가 엉터리 해석이다. 네가 너를 해석한 자체가 잘못된 해석이라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날 때부터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2, 3장 통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이 가라사대 다음에 반드시 뭔가 기능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또 2장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게 전부 다 하나에 주님의 기능이죠, 이 기능은 망상 같은 이 세상에 가려진 거예요.

그러면 이 기능을 기능답게 하려면 그냥 나다. 이렇게 하지 않고 무지개 은혜를 들춰내듯이 우리의 실상을 주께서 들춰내는 거예요. 그러면 들춰낼 때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영웅이 되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수법들도 그게 가짜로 다 드러나겠지요. 참 좋은데 와서 좋은 시간에 이런 더러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런 자극적인 예를 들 수밖에 없어요. 지금 고민되는데 너무 지저분한 예를 돼서 고민 한 5초했습니다만 고민한다는 말은 실시한다는 뜻이거든요.

사람이 옛날 어릴 때 1950년대와 60년대 걸칠 때 이와 빈대가 많았어요. 집에서 엄마가 실로 쉐타 짜주면 겨울 내내 입습니다. 붉은 실이나 검은 실로 하면 때도 안 보여서 때가 세탁했는지 안 했는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겉은 모르는데 한 번 옷 벗는다고 거꾸로 뒤집으면 거기 실올에 뭐가 묻습니까? 이나 빈대가 묻지요. 참 지저분하지요.

그처럼 주님께서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기면 온갖 영웅담화로 가득 차있는 내가 이 짓해서 천당 가려는 모든 빈대 같은 짓이 다 달라붙어있어요. 달라붙어야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결국 주께서 우리 성도를 아직도 이 땅에 육신으로 살려준 이유는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기 위해서 거기에 우리가 하나의 빈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려준 거예요.

주께서 강조하는 것은 가라사대, 이것 하나뿐이에요. 가라사대, 주께서 말씀하시되. 이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사라사대와 네가 우기는 것과 차이점을 보게 하는 겁니다. 차이점이 있어야 십자가에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또다시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라사대가 나왔으니까 왜 가라사대를 언급하느냐?

요한계시록 5장 봅시다. 3절에,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이 책의 내용과 이 세상에 있는 소위 움직이는 어떤 것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은 책의 내용에 의하면 버림받아야 돼요. 내침을 당해야 될 대상이에요. 그러나 사도 요한은 어느 쪽에 있느냐 하면 책 안에 있어요. 생명책 안에 있으니까.

책은 가라사대의 덩어리잖아요. 책의 모든 내용이 주님의 사라사대의 말씀하신 말씀의 덩어리에요. 언약 책이라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언약 책이 인격화, 인물화 되지만. 이사야 40장에도 나오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이고 그들의 한껏 영광이라고 우기는 것도 풀에 핀 꽃에 불과하지만 바람 불면 다 떨어지고 영원한 것은 말씀밖에 없다.

그러면 이 땅은 이거에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수시로 바람 부는 지평이다. 바람 부는 대지다. 싹쓸이 쓸어버리는 바람만 말씀에서 계속해서 풀어내는 거예요. 확 다 선풍기로 해서 우릴 다 날려 보내야 되는데. 말씀의 바람이 불게 되면 구십 살았다, 백 살 살았다 해도 나중에 뒤에 가면 그 사람 산 적 있었어? 언제 날아가 버렸어. 한낱 안개 같은 거니까요. 바람 불면 안개는 그 자리에 없어요.

말씀의 바람이 주님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십자가의 완성에서 쏟아지는 그 바람이 한낱 울고불고 행복했다, 슬펐다, 짜증내고 울부짖던 낙망했다고 우겼던 우리의 우울증이다, 아니다 하는 그것도 아예 현장에서 없애버려요. 우울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없는데 무슨 우울증이 있어요, 그래. 우리는 하나의 빈대고 더러운 이 같은 존재다, 이 땅에. 십자가 때문에 생겨난 존재에요. 태어난 존재에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모든 말씀의 완성인 것을 증거하라고 같은 빈대지만 십자가에 붙어있는 빈대, 고귀한 빈대지요. 그것도 십사만사천. 빈대인데 피가 묻어있기 때문에 하얗게 돼버린 하얀 빈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 우리를 영웅으로 화하기 만드는 그러한 더러운 괴물의 힘이 우리는 예속돼있고 거기에 만날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거든요.

바람이 늘 불어줘야 돼요.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대비시키는 겁니다. 누리끼리한 흰색 될래, 진짜 흰색, 흰색이 귀하냐, 누리끼리한 흰색을 원하느냐? 이것 비교시키는 거예요. 네가 노력해서 의인 될래, 아니면 그냥 피로 의인 될래? 그것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피로 의인 되는 것은 위에서 은혜를 주셔야 되고 누리끼리한 것은 이 땅에서 내가 애를 쓰고 공을 들이고 철저한 자기 관리가 돼야 누리끼리한 흰색처럼 남들에게 날조가 되죠. 자아날조지요. 만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에요. 자아를 날조하는.

[생명의 신호] 60페이지 보면 그림들 그려놨어요. 역사 놓고 그 다음에 환상,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환상은 우리한테 있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환상이에요. 환상이 역사와 겹치니까 십자가가 여기에 겹친 게 십자가에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십자가가 객관적 역사로서 들어온 거예요. 주체역사 없는데 이상하게 낯선 십자가 사건이 들어와서 여기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내가 주체가 된 내 역사만 역사고 진짜 현실이고 네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너희는 유일한 현실로 여겼다. 너희는 끝났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 봅시다. 진도 안 나가는 것처럼 진도 팍팍 나가는 겁니다. 이건 중요하니까 8절과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 보게 되면 이 세상을 소돔과 애굽이라고 포괄적으로 단정을 짓는데 소돔과 애굽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이게 좋은 단어가 아니고 너흰 죽었어, 하는 그런 단어거든요. 너희들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관계 끊어졌어? 이미 죽은 자라는 것, 나중에 첫째 사망이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첫째 사망이에요. 죽음이 태어나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는 게 아니고 죽음이 태어나서 죽음이 한 살 먹고, 두 살 먹고, 세 살 먹는 거예요. 내 외손자는 벌써 네 살 됐어요. 죽음이. 난 육십이 넘게 죽음에 있었고. 결국 죽게 되는 거죠. 웃음 대목에서 안 웃고 심각한데, 갑자기.

우리가 기능이 있어요. 주님과 연결돼있으면 우리 인생이 헛수고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기능에 우리는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저는 죽은 자 맞습니다, 하는 그 기능만 해대면 돼요. 우리는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너무나 이건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기뻐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옥 간 부자인데 천국 가서 지옥 간 부자를 납득을 하고 해석을 해내는 거예요. 동생 다섯 명인데 다 지옥 간다. 지옥으로 다 가거라, 이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해석이 가능해요. 해석 가능,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나에 대해서 해석 가능한 거예요. 자, 다시 해석 가능한지 해보겠습니다. 나는 왜 절망 안 하고 싶은가? 그게 바로 악마의 속성이다.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이건 내가 아니고 악마가 그렇게 세뇌를 준 거에요. 너는 지옥 가면 안 돼. 그러나 우리는 태어난 것은 내가 어떻게 잘 될까 태어난 게 아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소돔이고 애굽이기 위해서 그중에 태어난 거예요. 출생이 대구에서 태어났든 광주에서 태어났든 태어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한 평생 경험하는 것은 바로 여기 9절에 경험하면 되지요. 모든 백성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면서 장사하면서, 거저는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잘한 짓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치하하고 상찬하는 칭찬하는 그러한 세상, 그 세상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그들의 운명과 같이 할 뻔했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냥 공통적으로 보여줄 뻔했지요.

그런데 아까 요한계시록 5장을 다시 보게 되면 5절에, “장로 중의 하나가 내게 말하되” 장로는 벌써 천국에 가있는 사람입니다. 예비군이죠. 이미 제대했어요. 제대해서 가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은 전쟁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미 이겼다에요. 싸움하고 있는데 이긴 거예요. 이겼다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에요. 이겼으면 여기 공간이 생기는데 주님의 공간. 주님의 시간, 공간을 두 자로, 이게 바로 교회라 하는 거예요. 주님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있는 그 교회.

일곱 별이 이 지상의 역사 속에 십자가로 섞여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땅에 뭐가 생겨야 되느냐 하면 교회가 생겨줘야 돼요. 그리고 교회는 망해야 돼요. 모든 교회는 망해줘야 돼요.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망해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래 기능이듯이 교회는 이 땅에서 망해주는 것이 기능이에요. 그래서 일곱 교회 그 지역에 가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망했어요. 칭찬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고 뭐고 다 망한 거예요.

이 교회가 망해줘야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 교회가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 교회 내용은 여기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가라사대라고 하시면서 언급된 그 모든 내용은 이미 그 안에 꽉꽉 가득 차있어요. 무화과나무 속처럼 차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인하여 흰옷을 입었다로 꽉 차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3장 11절에,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이러한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역사 속에 처음 들어올 때 자꾸 명령조로 들어오지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할 때 믿는 자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지요. 아무도 없어요. 없으니까 믿는 자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누가 이뤄요? 모든 언약은 언약을 주신 당사자, 예수님만 이루지 아무도 못 이룹니다. 예수님이 쏟아냈던 모든 말씀은 우리라는 개인한테 경과용이에요. 그냥 스쳐지나가면서 졸지에 우린 완성이 돼버린 것이지 내가 그 말씀 받아서 내가 실천한다고 해서 지킬 말씀이 아니에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베드로고 뭐가 다 떠나버려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오늘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에요.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뭔 뜻입니까? 아무도 생명의 면류관 얻을 자 없다. 없으니까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말이죠. 만약에 이 사람이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했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절망할 거예요. 우리도 절망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절망케 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구원받았음을 통보하는 그분이에요. 절망케 하시면서 우리에게 희망 정도가 아니고 아예 단정을 해버리지요. 너는 주님 소속이라고.

실컷 절망해라. 누가 취미가 뭐냐고 하면 절망하는 게 내 취미입니다. 난 낙담하는 게 취미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당신 어떤 식으로 낙담합니까? 성경 보고 낙담하지요. 죽도록 충성하라 했는데 죽도록 충성 못하거든요. 첫째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찾으라 하는데 어디서 뭐. 회개를 어떻게 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라 했는데 문 열어주지도 않아요. 주님 복 나가세요, 이럴 사람들이에요.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주께서 다녀가심의 효과가 뭔지를 너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라. 너부터 시작해서 구원받지 말고 너부터 시작할 것은 말씀 보고 절망하는 것이 너의 준비된 것이고 성령이 오게 되면 절망한 우리로 하여금 바로 부활을 주시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음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면 우리는 나의 스케줄만 챙기는 것은 주의 일이에요. 내 생각만 하는 것. 오늘도 단도리 잘해서 이 세상에서 생존해야지, 라고 결심하는 것, 그것도 주의 일의 시작이 된 겁니다. 아주 아름답게 시작된 것. 벌써 주께서 피 흘린 옷을 아침 아홉 시부터 누렇게 만들어놨어.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6장을 보겠습니다. 7장 보고 6장 봅시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아까 7장을 봤지만 이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온 게 아니고 그들이 덮친 거죠. 완료된 완성된 덮쳤는데 여기 보면, 이 대목이 약간 어렵습니다. 7장 3절에 보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네가 구원받는 데는 어떠한 태풍이나 코로나도 방해가 될 수 없어요.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겁니다. 환란 자체가 네가 받은 진짜, 복음의 진수가 까딱도 안 함을 증명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환란입니다. 그 환란에 대해서 되게 땀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이 악마에요. 악마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몰라요. 대단히 악마가 수고해요. 흔드는 작업에 죽을 둥 살 둥 일해요.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합니다.

악마의 일은 정죄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다 넘어가지요. 쉽게 말해서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그게 악마가 우리한테 하는 일이에요. 주님 보던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로 쏠리게 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환란을 줘서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가 강화됩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두루두루 경치구경하다가 갑자기 신발에 모래 들어가면 갑자기 경치구경하다 자아가 강해져요.

겨울철에 백록담 올라갈 때 올라가기 전에 상상을 해요. 눈 덮인 백록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데 막상 백록담 근처에 올라가보세요. 욕하지요. 누가 여기서 만나자고 했는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이지요. 삼손이 마지막 끝에 보면 현빈한테 얼마나 욕하는지 몰라요. 누가 여기서 만나게 해서. 백록담 풍경이 아름다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춥다는 게 중요해요.

또 성경에 보면 삼손 같은 사람 있지요. 욥. 누가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허락하신 분은 주님이고 거기에 담당자가 누구에요? 악마지요. 어떻게 이 현실을 부정합니까. 악마가 욥에게 고통을 줍니다. 뭐에 집중하라고? 자아. 자아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절망해선 안 돼, 나는 절대로 지옥 가면 안 돼. 왜 이런 생각을 줬는지 몰라요. 지옥 가면 가는 거지 나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바로 왜 인간이 악마한테 그동안 못 벗어나는지를 모델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하루하루 삶이 악마의 족쇄에서 못 벗어나는지.

그래서 여기 해하지 말라는 것은 그 악마의 세력과 권세를 이미 누가 이겼던 말입니까? 십자가로서 이겼잖아요. 이건 지식이거든요. 우린 십자가로 이겨서 악마에게 이겼다는 건 지식인데 그 지식이 현실화시키기 위해선 우리는 아직 안 죽어야 됩니다. 충분히 이걸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이 무슨 미친 값을 하는지를. 육신이 있어야 이걸 체험하거든요.

그런데 내 육신보다 더 센 게 있어요. 여기 보면,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7:4) 두 번째 시간부터 어려운 게 나와서 감당해주셔야 돼요. 숫자가 구원의 사인이다. 인물이 숫자 되면 인물은 날아가 버려요. 숫자화 돼요. 그럼 숫자는 어디서 쏟아진 숫자냐? 언약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십이라는 숫자, 곱하기 십이라는 숫자, 곱하기 천이라는 숫자가(12*12*1000) 전부 다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천이라는 숫자는 모세의 십계명에 나오지요. 천 대까지. 그리고 창세기 5장에도 처음 인류의 수명이 거의 천이라는 커트라인을 넘질 못하지요. 천은 경계선이에요. 인간의 세계와 하늘나라 경계선이 천이라는 숫자로 표현한 거예요. 백날 해봐야 구백 몇 살이라 하지만 천까진 넘어갈 순 없어요. 이 말은 천 넘어버리면 인간의 숫자 이해를 금지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숫자를 해석하는 그 해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숫자를 사용하면서 이 숫자가 지상에 와버리지요. 그래서 인간이 숫자 계산하다가 숫자 잘못 계산했단 그 빌미로 지옥 가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왜 숫자 해석에 인간적 기존에 네가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되는 숫자를 잘못 적용시키느냐는 죄목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이왕 지옥 가는데 주께서 지옥 가는 핑계를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천사를 보내서 심판 해버리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심판할 경우에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는 어떻게 된다? 강화되지요. 고집 부리게 되지요. 그러니까 환란을 안 주면 고집 안 부리고 사람이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려움을 주니까 갑자기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이 되지요. “거봐. 그러니까 지옥 가잖아.”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지옥 갈 인간을 기어이 지옥 가게 만드는데 아주 하나님께서 성공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화자찬이에요. 아주 밟을 놈을 밟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확인사살이라 해요. 두 번째 제목으로 이것 괜찮네. 제목이 살벌한데. 숫자해석이 엉터리라는 거예요. 숫자해석을 못하면서 자꾸 하는 척을 하는 거예요.

왜? 숫자는 인간의 상거래 상에 나타나거든요. 요한계시록 17장, 무역 가운데 처음으로 숫자가 언어가 나와요. 그 모든 숫자는 무역에서 이윤을 남기겠다는 자기 이익과 관련돼있단 말이죠. 그럼 하나님께서 이 숫자 해석해봐라, 하고 내놓은 게 666. 인간은 숫자해석이 안 되는데 이것 해석한다고 매달린 사람들 다 지옥 가는 겁니다.

이미 하늘에 숫자가 인격화되신 분이,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의 완성으로 인격화되신 분이 이 지상에 인간들에 통용하는 숫자로 잠입했을 때 인간들은 이게 뭔지도 모르고 천당 갈 거라고 여기면서 그 숫자해석에 몰두하는 거예요. 덤벼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상에 왔을 때 벌어진 사건이 무슨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지금 반복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부터 계속해서 제가 하는 말이 그거에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지상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왜 왔습니까?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기 위해서. 그걸 왜 해야 하느냐? 그게 언약 완성이니까. 미리 언약에는 십자가는 주어졌으니까.

12라는 숫자는 어디서 통용된다? 지상에서 통용되는 거예요. 왜? 유일한 현실은 지상뿐이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현실은 지상에 눈에 보이는 것뿐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는 없어요. 분명히 없어요. 없는 거예요. 있다고 여길 때는 내가 이미 나이가 백육십오 세 때 다시 말해서 벌써 죽은 지 한참 됐을 때 그때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아무리 꼬집어봐도 있는 것은 내 몸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 현실뿐이에요.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서 내 인생은 내가 경험한 어릴 때 먹혔던 달콤한 빵, 나만의 현실, 주체의 역사 그게 전부에요. 그게 유일한 현실이에요. 날 속이려하지 마세요. 난 안 속아 넘어갈 거예요. 이 세상뿐인 것을.

성경에 숫자 나온다. 숫자 지켜서 천당 가면 될 것 아니냐. 없는 줄 알지만 혹시나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는 무슨 천국 있다면 숫자 통해서 가겠다는 것, 이게 바로 자아 역사의 확장이죠. 이미 죄인이 아무것도 없이 천국에 쑥 들어가겠다는 나한테 뭔가 욕구하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했지요. 자꾸 나한테 미흡함을 유발하는 욕구가 있다고. 그 욕구 중에 하나가 내가 천국 가야 되겠다는 욕구지요. 그 천국 내 욕구의 확장이고 연장이지 천국 아니거든요. 안 죽고 들어가는 나라에요. 나는 아직 안 죽었잖아. 나이가 죽을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라는 것은 내 능력으론 그 개념을 체험할 수 없어요. 첫째 시간 제목이 절망이라니까요. 우린 천국의 입장은 절망뿐이에요.

12라는 것은 지상에 언약이 왔잖아요. 언약이 왔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나님이 미리 앞당겨서 온 거에요. 그걸 제가 이번 룻 강의에서 실루엣이라 했지요. 우리말로 하면 그림자.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구약에 왔다, 언약이 온 거예요. 언약이 왔는데 숫자가,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 열두 명이란 임신 못한 여자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열두 명. 잉태치 못했는데 열두 명 낳았어요.

그러면 이 자식은 근원이 뭡니까? 잉태치 못한 거예요. 임신치 못한 여인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게 우리 현실은 없어요. 제주도 시민한테 그런 게 없습니다. 이 땅에는 마리아 없어요. 임신 못한 여자는 임신 못한 여자에요. 기껏해야 시험관아기뿐이에요. 사라는 태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임신하는 이런 것은 내가 아는 한 인간의 현실 속에는 망상입니다. 그거는 허상이에요. 환상입니다. 믿고 싶어도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쓸모없다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를 공격할 테니까 너희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가 허하노라. 허락하노라, 이 말이에요. 이 세상. 그게 영적 전쟁이거든요. 매일 아침마다 너는 나를 공격해라. 그 와중에서 십자가가 어떤 사건인 것을 오늘치 내가 알려줄게. 하루치 알려줄게.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죄인이니까. 십자가의 상대역으로 우리를 뽑아줬다는 것,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의 상대역이 됐다는 것. 그냥 여기에 역할이에요. 우리의 본질은 천국이지만 맡은 죽을 때 육신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의 역할은 불신자를 대변하는 역할이에요. 옛날에 우리 클 때 영화에 나오면 죽이고 싶은 만나면 진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허장강, 그 아들이 허준호.

그에 못지않게 그 뒤에 달중이가 있었거든요. 달중이 진짜 죽었어요. 시청률 70% 넘는 <여로>에서 그 달중이가 죽으라고 얼마나 악을 썼는지 몰라요. 저 인간 죽어야 된다. 태현실 괴롭히는 저 인간 죽어야 된다. 그 사람 진짜 죽었어요. 주인공 장욱제도 제주도 살다 죽었어요. 연예인 이야기니까 여러분 귀담아들을 필요 없고요.

그런데 우리고 달중이처럼 죽었어요. 죽었는데 죽었기 때문에 이 역할을 맡을 수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우린 매일같이 죽은 놈이 뭘 못해요. 때론 절망 역할도 맡을 수 있고 난 마귀 앞잡이 역할, 어차피 역할이니까 뭘 못해요. 아침부터 신나게 하면 돼요. 역할이니까, 역할.

그 역할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역할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파견 근무시키는 거예요. 실컷 내가 당한 십자가 욕을 너도 한 번 당해봐라.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봅시다. 11절,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 삶이거든요. 이러나저러나 결국 죽는 이유는 내가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를 또 살게 하신 이유는 피를 증거한다 했어요. 그 증거하는 어린양의 피, 예수님의 모든 행과 말씀은 어디로 쏠리게 돼있다? 십자가의 피로 쏠리게 돼있거든요. 그 십자가 피가 증거되려면 어떤 악한 역할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불신자는 역할 하는 줄도 모르고 악한 일을 하고요.

우리는 뭡니까? 피의 증인이에요. 증인하라고 하나님께서 이마에 에스겔에 보면 우리에게 인을 맡긴 거예요. 에스겔 9장 6절에,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늙은이든 젊은이든 관계없이 어린애들까지 전부 다 이마에 표를 받아라. 이것이 에스겔 마지막에 보면 성신, 하나님의 새 언약 속에는 이게 포함됐어요. 성령 받으면 성령의 그 택배 안에 이미 든 게 있어요.

그걸 고린도후서 2장인가 보면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돼있어요. 지금 제가 자꾸 잊어버려요.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인치시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죽은 자지만 말씀이 살아있기에 우리가 말씀을 주님의 상대역으로 하는 거예요.

열두 제자가 성령 받기 전에는 무슨 역할 했습니까? 예수님 배신하는 역할 했지요. 성령 받고 난 뒤엔 뭐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역할 하는 거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그 역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악마가 흔들어대든 주님이 승리하든 그건 내 소관 아니니까. 우린 그 주어진 역할을 해나가면 되는 거예요.

아, 이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 바로 복이구나. 주님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게 이게 바로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야 돼요. 개입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만든 현실세계에 우리가 아직도 안 떠나고 계속 있어야 될 이유는 이미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계속 그 일을 담당해야 되기 때문에 떠나지 않게 하는구나.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영적 전쟁에 이렇게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나도 알고 남에게 증거하시는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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