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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01:21:20 조회 : 55         
20200918c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20200918제주특강c 사라질 자(요한계시록)-이 근호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세 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라는 것이에요. 유일한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예요. 그러니까 뭐가 없느냐 하면은 천사 없고, 예수님 없고, 하나님 없고, 아무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 쉽게 말해서 너와 나의 세계, 이게 전부예요. 없는 거예요. 다른 현실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릴 때, 현실이라는 것을 동그랗게 이렇게 그려놓고, 어제 그린 그림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동그란 원 한 모퉁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들어가죠. 현실뿐이에요. 괜히 하나님, 천사, 예수님, 거론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예요.

이게 뭐냐 역사라 하지 않고, 어제 주체역사라고 했죠. 내 몸은 확실하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역사. 이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현실. 그리고 그게 전부예요. 그게 전부기 때문에 다른 현실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근데 역사를 보게 되면 이 현실 속에 십자가 사건이 이렇게 끼어있다 이 말이죠. 그럼 요한계시록은 뭐냐, 이 십자가가 현실을 갉아먹는 이야기예요. 한 모퉁이를 차지했던 십자가가 점차 이게 십자가 자체 내에서 나온 해석에 의해서 현실 전체를 갉아먹어버리면 현실은 뭐냐, 현실이라고 우겼던 이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환상, 허망함, 진짜 현실을 가리고 있는 그러한 불순한 세력, 이렇게 변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그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뭐냐 하면은 가렸던 것을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가 다 긁어내는 거예요. 배에 녹이 쓸면 쿵쿵쿵~~ 부산 바닷가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힘든 작업을 해요. 녹을 떼 내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이 현실이라는 해석을 떼 내는 거예요. 떼 내게 되면 진짜 현실이 있겠죠. 그 현실은 십자가와 연관된 진짜 현실이 있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떼 내야 될 그러한 녹 같은 것. 그것이 두껍게 인간을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거는 십자가의 의미가 소위 전부라고 여겼던 그 현실을 깎아내고 뜯어내는 그 과정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밥이 있죠. 밥을 냉장고에 안 넣고 오래두게 되면 밥이 쉬어버립니다. 이 쉰밥은 못 먹죠. 이게 변화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보면서 명확한 현실감을 집요하게 추적해봐야 하는데, 그 한 예가 뭐냐 하면은, 어제 비 왔잖아요. 자, 비가 온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죠. 구름 있는 데서 땅으로 비가 온다. 제주도에 비가 온다 이 말이죠. 왜 꼭 비가 와야 됩니까? 이것부터 따져봐야 되는 거예요. 비가 온다, 여러분 비가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비가 안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근데 이 질문 자체가 우리에게 성립이 될까요? 안 될까요? 갑자기 질문이 네 개가 들어가 버렸죠. 비가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안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그 다음에 비가 왜 오는가를 묻는 것이 정상일까요? 안 묻는 것이 정상일까요? 하는 거예요.

정답은 네 번째에요. 비는 우리가 오라고해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라고 하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 의미의 그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의한 사건이잖아요. 예수님 홀로 하신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현실을 보는 사건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주체역사라고. 여기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은 나죠. 나의 현실 속에는 비가 굳이 와야 될 이유가 없어요. 내가 하늘보고 비를 주문 안 했거든요. 070-0000-0000 해가지고 비 오라고 주문 안 했어요. 쇼핑하듯이 주문 안 했다 이 말이죠. 주문 안 했는데,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는, 요청하지도 않는 비가 왔다는 것은 이 현실에 인간이 다 관여할 수 없는 요소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가 오는 것이.

인간은 주어진 그걸 현실로 보지만 이 현실 속에서, 어제를 현실1, 지금의 현실을 현실2라고 한다면, 현실1에서 현실2로 가는 데에 있어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여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변화. 이 말은 맞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비를 보내신 분, 비를 보내신 분을 몰라요. 그리고 보낼 때는 이유가 있어야 보내는데, 비 오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받으실 분도 없어요. 야구할 때 공 던지는 투수(피처)도 없고 포수(캐처)도 없는데 공이 이렇게 지나간다면, 이건 아주 희한한 현실이에요. 아주 이건 이상한 현실이잖아요.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이겁니다. 예수님이 발신자가 되고 예수님이 수신자가 되는 거예요. 편지를 보낼 때 예수님이 발신자가 되고 예수님이 수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걸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내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인 겁니다. 수신자 발신자가 있으면 여기에서 뭐가 생기느냐 변화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 변화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고 인간들이 아무리 우겨도 이 변화에 대해서는 인간이 눈을 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 변화를 예수님의 십자가 해석으로 전부 다 다가가는 거예요. 이 변화가 결국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의 현실을 전부 다 갉아먹고, 밥으로 하여금 쉰밥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못 먹는 밥. 인간이 의지하는 것은 이 현실, 땅의 세계밖에 없잖아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땅의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로 이걸 완전히 전환시키는 겁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렇게 하니까 벌써 윤곽은 대충 잡힌 거예요. 윤곽은. 그러면 이 윤곽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현실에는 뭐만 있다? 눈에 보이는 내가 있는 것, 이게 전부라는 것을 명심을 해줘야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다.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이게 전부라고 해줘야 여기서 변화라는 퀘션 마크Question Mark가 발생이 되는 겁니다. 변화라는 것이 우리 손을 떠났다는 것, 어떤 여분의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야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나요. 왜? 십자가는 우리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격받아야 될 이유가 있어야 돼요. 수신자도 모르고 발신자도 우리는 모르는데, 모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잖아요. 그거는 주제 넘는 이야기예요. 이 세상에서 수신자도 발신자도 모르면서, 공이 날아갔는데 누가 공을 던지는지도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야.”라고 하는 것은 못돼먹어도 보통 못돼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맞아죽어도 싼 거예요. 지금 인간들이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이게 전부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우리가 뭘 알아?” 이게 아니고, 나에게서는 나의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산, 나무, 이게 전부에요. 전부. 우리가 그걸 고집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논리와 이론과 철학과 학문에 의하면 이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천문학을 하던 뭘 하던 간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망원경 들고 별 조사하고 거기서 진리를 따내는 그것이 인간이 하는 전부에요. 거기에 하나의 고집이 있는 거예요. 고집. 우리는 그걸 과학이라고 하죠. 과학이라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과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과학이라고 하는 이걸 가지고 복술이라고 해요. 복술. 미신행위로 보는 거예요. 미신행위. 성경에서는.

왜냐 하면은 미신행위,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와 십자가 지신 주님의 행위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입니다. 이걸 벌써 백번까지는 아니지만 여러분 했어요. 오십 번까지 했어요. 인간의 전부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이 안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요. 이게 우리 인생 사고방식의 기반이고, 그라운드고, 이게 전부예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간에 나를 살려줘야 해요.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나와 내 자식이 살아야 돼요. 전부 다. 무조건 살아야 돼요. 무조건이에요. 이거는 이유가 없어요. 모든 본성은 그것뿐이에요. 이게 전부에요.

과학을 하고 의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뭐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이 세상은 안 무너져야 해요. 이거 무너지면 안돼요. 왜? 내가 무너지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이건 뭐냐 하면은 복술이에요. 미신이에요. 미신. 던지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는데 공은 날아가니까, 저 공을 인간이 중간에 가로채는 겁니다. “저 공은 우리를 위한 공이야. 그리고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다. 올모스트almost, 전부예요. 전부.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 정동원 하고 린 이야기를 강남강의에서 했어요. 그때 그 시간에 생각이 났어요. 린이 불렀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그때 정동원이 린하고 이야기를 할 때, “아줌마! 누구세요?” “나 같은 건 몰라도 돼.”라는 그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이제 생각나는 거예요. 린이 불렀던 노래가. 유어마이데스티니“You`re my destiny~~”(별그대ost), 당신은 나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나의 운명이다. 나 당신 없이는 못 살겠다. 그런 노래가 아닙니까? 당신은 나의 운명이다. 이게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적이 이미 살기 위해서 확정된 이상은 모든 행위는 누가 하고? 내가 시작해서, 나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변화를 추구하고. 이 변화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수혜자가 누구다? 혜택자가? 내가 되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나라에 복종도 하고 나라에 순종도 하고 이웃 간에 협조도 하고 떡을 먹고 나누고 도와주고 하는데,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나를 살리기 위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니까. 이 전부 안에서 어떤 수완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고, 그 안에 있는 내가 전부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살 궁리를 찾는 것, 이게 인간이에요. 그거 뭐 성경에서 들은 대로 예수, 하나님 이야기하지만, 이거는 뭐 이 프레임을 고집하는 거예요. 이 틀을. 고집하면서 천사고 뭐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아까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면, 동그라미를 그리면 이게 현실밖에 없어요. 현실밖에 없는데 여기에 또 뭐를 그렸습니까? 생채기, 상처처럼 십자가 사건이 여기 현실 속에 들어왔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작은 부분으로서. 이순신 장군이 죽었는데, 죽어있으면 되는데 이순신 장군이 살아나서 돌아다녀보세요. 이거는 보통 재난이 아니잖아요.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서부터 인간이 그렇게 사수하고 싶은 이 모든 세계를 다 갉아먹습니다. 뭐로 나타나느냐, 현실의 변화로 나타나요. 징조가 불길한 변화로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 삶에 도움이 안 되는 변화들을, 여기서 십자가에서 계속 꽂아주는 겁니다. 계속 거기서 시그널을 보내는 거죠.

보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공을 던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걸 나는 시작이고 나는 끝이라고 되어 있죠. 끝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보면 마감이라. 끝났어요. 이 세상 자체가 끝났어요.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은 철거대상입니다. 재개발도 안 되죠. 그냥 싹쓸이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걸 없애면서, 세상 없애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은, 너희들이 건드리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건드린 그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서 십자가가 이정도 의미가 있음을, 가치가 있음을 망하는 세계를 통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이 요한계시록을 쓰신 이유예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하나 쓰게 되면 순수는 보복하기 마련이다. 순수한 것은 반드시 뒤에 보복이 따라요. 보복이 있어줘야 순수함이 더욱더 순수함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순수함은 자체적으로만 순수해야 되지, 외부의 것이 필요치 않거든요. 근데 외부의 것을 남겨둔 순수는 순수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외부의 것은 강력한 보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순수는 보복을 하기 마련이다, 라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보복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함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뜻이에요. 보복이 있다면.

현실 속에 끼어든 이 십자가사건은 무슨 용이냐 하면은 보복용이에요.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죠. 요한계시록 1장 7절,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그 보복하시는 분. 일종에 전쟁이 확장되는 거죠. 계속해서 전쟁이 지속되는 거예요. 이 부분을 요한계시록 1장을 잠깐 한번 볼까요? 1장 13절에서 촛대 사이에 누가 등장하죠. “인자 같은 이” 인자 같은 이가 심판주가 되는 이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인자 같은 그 분이. 인자 같은 것은 아들이죠. 옛날에 예수님이 공생애에 있을 때 자기를 뭐라고 합니까?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죠.

그게 인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결국은 심판주 라고 확정되었음을, 보복을 당하는 세상의 멸망을 통해서 확인 사살하는 그 이야기가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기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한번 당해봐라 이 말이죠. 다시 이야기할게요. 순수는 뭐하기 마련이다. 순수는 그냥 순수가 아니에요. 보복이라는 변화가 있음으로서 순수가 더욱더 그 빛이 빛나는 겁니다. 순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진짜 현실이죠. 진짜 현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이 순수를 뭐로 표현했느냐 하면은 이 순수를 보석으로 표현해요. 열두 가지 보석으로. 아주 빛이 나요. 엄청난 킬로수가, 뭐 이천 칠백 킬로인가, 뭐 어떻게 나와요. 만 이천 스다디온인가 나오는데.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2700킬로이고요. 그 다음에 또 측량하니까 일백사십사 규빗이에요. 이거는 400킬로 정도. 하여튼 전체 다 합쳐서 이게 크기가 일만 일천 스다디온에 400킬로 가까이 돼요. 엄청나게 크게 정방향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이거는 순수를 이야기해요. 21장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정결한 신부 같다. 거룩함. 그 거룩함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된다? 보복이 있어야 돼요. 보복이라는 파장을 유발하지 않으면 그건 순수가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만,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게 전부예요. 비가 오는지 몰라요. 그냥 오니까 받아 챙겨서 자기 생존에 필요만 채우면 되지, 비가 왜 오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내게 필요한 현실만 현실이기 때문에. 인이라고 하는 것은 개봉하는 거예요. 개봉하는 것. 나팔이라고 하는 것은 자각시키는 것. 자각시키고 실행에 옮기는 것. 그 다음에 대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최종 정리, 정돈하는 거예요. 일곱 인을 뗄 때마다 계속 개봉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보복당하는 세상의 현상의 그 모습이 전부 다 펼쳐져요. 안에.

상견례 마치고 난 뒤에 사돈한테 이바지 선물을 받죠. 이바지 선물을 열 때에 북으로 두두두둥~치죠. 개봉박두. 짠~하고 개봉하는 것. 그게 인 떼는 거예요. 인을 딱 뗐잖아요. 그러면 그 안에 뭐가 있고 편지 한통 있고 뭐 여러 가지 이바지 물건이 격식에 맞춘 게 딱 나온다 이 말이죠. 그걸 다 펼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포괄적으로, 대략적으로 전체의 계획이 다 보이는 거예요.

다 보이는데, 그 전체 인 중에서 우리에게 관심 끄는 것은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 해와 달이. 그 단단한 눈에 보이는 현실이,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려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죠.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하늘에 별이 무한히 떨어지죠. 그 다음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보면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고” 그 다음에 나팔을 받고. 요한계시록 6장 12절에 보면 “여섯 째 인을 떼 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뭐 같이 된다? “피같이 되며” 피같이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을 보고 섬뜩해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도 섬뜩한 거예요. 우리가 주문을 안 했거든요. 하늘보고 주문 안 했잖아요. 해와 달 모든 것이 전부 다 없어진다면,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늘이 깜깜했죠. 하늘이 깜깜했다 이 말이죠. 자, 하늘이 빛을 잃는다든지, 달빛이 피가 된다든지, 이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장담하고 확신했던 그 역사는 누구한테서 나온 역사에요? 바로 우리가 나의 현실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는 쇼킹은 되죠. 이런 것은 예상 못한 거잖아요.

우리가 아는 현실, 현실이라고 할 때 십자가는 한구석에 조그맣게 한 남자가 사형당하는 작은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무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는 현실은 여전하고 굳건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질서 있게 반복되기 때문에. 규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일곱 인을 떼자마자, 전체 설계도가 딱 나오자마자 그렇게 철석같이 안정하다고 했던 그 해와 달과 별, 천체마저 이거는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요. 이걸 아까 제가 했잖아요. 밥이 쉬어버렸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이 땅에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충격이다, 불안하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라고 여긴다면, 그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십자가는 안 바라보고 뭐만 바라보느냐 하면은 자기 몸의 안정을 위한, 여전히 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그걸 자꾸 의지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미신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빼놓고 성경을 해석해서 세상을 보는 것은 전부 다 미신덩어리에요. 미신덩어리. 좋게 해서 미신이고 성경에서는 이것을 우상숭배, 악마의 종, 뭐 이렇게 나오죠.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666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과 합세한 악마를 뭐로 만든다? 이걸 숫자화 만든 거예요. 숫자. 숫자화로 만든 이유는 이 세상이 멸망하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숫자를 뽑아내는 거예요. 1000, 7, 144,000, 666.. 숫자화 돼버리면, 이 숫자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박스, 곽 속에 집어넣어요. 이걸 규격화, 하나님은 세상을 규격화로 정리 정돈하는 거예요. 이걸 할 때 선반이 있어요. 그 선반이 뭐냐, 일곱이에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다가 착착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규격화시켜서. 살림 잘하는 여자들 보면 서랍을 딱딱 정돈해서 그렇게 하죠.

저는 여성분들이 집에서 열심히 놀지 않고 살림을 잘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좀 험상궂게 생긴 남자 배우 이름이 뭐죠? 김일우가 등장하고 난 뒤에는 여자는 놀고 있었다는 것, 여자는 완전히 놀았어. 브랜드까지 딱딱 맞추는 김일우. 이건 안 돼! 참을 수 없어! 그냥 김일우죠. 혼자 사는 김일우. 그러니까 혼자 살죠. 모든 각을 맞춰야 돼. 아, 이런 무질서는 참을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규격화에요. 규격화. 왜? 순수하니까. 이 김일우. 김일우가 왜 나와. 김일우는 순수하니까. 나는 순수하니까. 순수한데, 어떤 손님이 와서 어질러놓으면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순수한 것은 뭐가 주어진다? 보복.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박살 내놓아버려요.

어디 내 순수함을 더럽혀? 보석 같은 내 백성을 누가 건드려? 이거하고 마찬가지에요. 이 지저분한 땅과 하늘과 별 이런 것들을 내가 그냥 둘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나는 전부 다 그들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하늘에서 땅으로 다 떨어트릴 거야. 마치 우박이 내리듯이. 하늘에 달려 있던 것들이 다 땅으로 내려오는 거죠.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는 피뢰침 만들고 뭐 구름 현상을 연구해가지고 과학이라는 질서에다가 전부 다 집어넣었잖아요. 그 집어넣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니까. 올모스트almost, 이게 전부거든요.

전부기 때문에, 이거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종교라고 하는 그거는 취미고, 그거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거든요. 내가 이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 되고, 내 자손이 번성하면 되고, 그만이다고 이래 생각했는데, 본인이 하나의 숫자인줄을 상상도 못했죠. 숫자라고 하는 것은 납작하게 해버리면 그게 숫자가 되죠. 심지어 예루살렘도 이게 뭐냐 하면은 숫자입니다. 왜? 뭐하기 때문에? 측량대상이 되기 때문에.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그 성전을 측량을 해요. 측량, 숫자화 된 자기 백성을 거기에다가, 선반에다가 적재적소에 딱딱 집어넣는. 규격화시키는 그거.

숫자화 시켰다는 것은 인격, 인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누구의 원수냐 하면은 십자가의 원수인 겁니다. 따로 끄집어낼 때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인물이다, 라는 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숫자로 바꿔서 땡겨야 돼요. 숫자로 바꾸면 이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144,000이 되겠죠. 종려나무를 들고 천국에 오는데,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종려나무를 들고 오는 사람을 인물로 보지 않고 144,000이 우르로 온다는 거예요. 144,000.

이 144,000이야기는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144,000은 그걸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아는데, 그게 끝난 게 아니고 14장에 또 나와요. 1절에,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되어 있죠. 자 예수님은, 인자가 뭐가 됩니까? 인자라고 하지 않고 인자 같은 이가 뭐가 돼요? 끝까지 뭐로 갑니까? 인자 같은 이, 심판주가 어린양이 되죠. 근데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순수는 뭘 낳는다? 보복을 낳는다. 니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증거 대. 증거 대볼까? 나는 어린양이야. 너희가 죽인 어린양이야. 자, 이만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수를 해도 할 말이 없지? 이런 거예요. 인자가 어린양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요한계시록입니다. 편지를 쓰는데,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다음에 받는 사람, 수신자가 있죠. 보낸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죠. 누가 보내고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받으면서 주님의 그동안 몰랐던 실체가, 복수의 권한을 가진, 그리고 누굴 구원하고 누굴 저주 보낼 온전한 권한을 가진 어린양.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만천하에, 이 멸망하는 세계에 보이면서, 세상은 침몰하죠. 침몰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옛날 한때 그냥 있고 잊어버린 그런 사건인줄 알았느냐? 절대로 주께서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그냥 너는 따먹고 입 싹 가리면 완전범죄인 것 같지? 내가 갈굴 거야. 끝까지 내가 갈굴 거야. 이런 식으로. 그래서 하나님은 뒤끝이 있어요. 뒤끝이 있고 뒷조사하고. 멸망의 자료를 찾는데 충실하고. 이래도! 이래도! 니가 할 말이 없지.

666숫자가 짐승인데, 인간에게는,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벌써 잊어버렸겠지만, 인간세계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죠. 그러면 짐승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짐승은 없어요. 악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시간은 영원하고 공간도 영원하고 그것뿐이에요. 근데 요한계시록을 진행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첫째 날, 둘째 날, 그 다음에 뭡니까? 이분이 일(1/2)날이 돼요. 이분의 일. 이거는 시간도 소실됩니다. 공간은 한곳으로 압축이 돼요. 오므라지는 거예요. 시간도 오므라지고 공간도 오므라지는 거예요. 오므라지는 공간에다가 악마와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유황불에. 이게 둘째 심판이죠. 다 집어넣죠.

이 세상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너무 아쉬워할 게 아니라, 그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뭘 촉구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그날, 예수님이 죽던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요한계시록 어제도 봤지만, 1장 7절에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잖아요. 도대체 그 찔림을 받은 당사자가 누구였는가? 초라해서 힘도 자기 권세도 없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한 그분이, 그렇게 허접스러운 하나의 남성, 목수의 아들 그거였잖아. 우리의 역사 안에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 안에서는 예수님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냥 평범한 남자일 뿐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게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내 일상생활에서, 청소하고 있을 때는 예수님은 선풍기를 내 대신 틀어주지 않는 분이에요. 왜? 이미 돌아가신 분이고, 젊어서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 일상에, 내가 나를 살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굳이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상 알아요. 내가 믿는 예수님은 나의 일에, 내가 돈 버는 일에, 내 생활에, 내가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숫자화 되는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면 안 돼요. 왜 숫자화 되느냐, 숫자화 시키는, 선반에다가 정리화 시키는 그분만 인물, 다시 말해서 인자,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만 사람이에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고난당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고난당한 자라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어야 이게 사람이다. 정말 사람대우 받고 싶어? 그러면 그분의 몸에 흐르는 피를 니가 적시게 되면 너는 흰옷을 입고 내가 만든 세계, 어린양의 세계에 비로소 참여하게 된다. 144,000으로.

인간이 평생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데, 갑자기 누구하나 등장했다고 그 사람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거와 비슷한 옛날 동화이야기가 있었죠. 송창식이 그걸 보고 만든 노래가 있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그런 거 있잖아요. 그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부니까 독일 동화에서는 애들이 다 따라갔죠. 어른들은 안 따라갔죠. 그러니까 제가 어느 설교에서 니가 어린애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오라고 하는데 엉덩이가 무거워 가지를 않는 거예요. 어린애만 가는 거예요. 제자들은 다 어른이라, 누가 높고 그거만 생각해요.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은가 그거만 생각해. 순수를 잊어버렸어요. 순수를.

예수님만이, 아버지 보시기에 그분만이 진짜 인간이에요. 나머지기는 인간이 아니고 악마와 합세가 되어 있는데, 물론 인간들은 악마를 안 믿으니까 나는 나라고 우기겠죠. 하지만 이 주어지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하면 그 변화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죠. 왜? 시작도 모르고 끝도, 마감도 몰라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시작이요 끝이요, 본인이 발신자고 수신자고 다 돼버려요. 자기가 자기한테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인자에서 어린양으로. 나머지기는 싹쓸이되는, 죽을만해서 다 죽어야 되는,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이 일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은 천사한테 맡기죠. 여러분 천사한테 일을 맡긴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이런 뜻으로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에 보게 되면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잖아요. 꿈을 꿨는데, 느부갓네살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또 성질도 급박해요. 꿈은 본인이 꿔놓고 어젯밤에 꾼 꿈을 알아내라는 겁니다. 내가 꾼 꿈을 알아내 봐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거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느부갓네살이 화를 내면서 다 죽이라고 이래 돼요. 지금까지 나한테 조언했던 박사들, 점쟁이들 다 죽여라. 그거는 점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다. 내가 아는 지혜는 내가 잃어버린 꿈까지 찾아내야 그게 정말 신과 내통하고 있는 지혜자다. 다 죽여 버려라. 그렇게 해가지고 다 죽이도록 확정이 되었어요.

근데 다니엘이 좀 참고 제가 알려드리겠다고 해서 겨우 말려가지고, 진정시켜가지고 자기뿐만이 아니고 다른 동료들을 다 살렸는데. 그 꿈 이야기에서 느부갓네살이 느낀 것이 뭐였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제국이 자기 거예요. 이게 전부에요. 자기 것이에요. 근데 꿈은 뭡니까? 외부적이죠. 내부적이 아니고. 여러분, 제가 첫째시간에 한 것이 기억이 납니까? 인간의 내부에서는 뭐가 나옵니까? 결핍을 따르는 욕망이 나오죠. 외부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것이 주어지죠. 느부갓네살에게 영문도 모르는 외부가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 이 약속에 의해 천국 갈 백성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왜 피리 부는 사나이 따라서 어린애처럼 앞뒤 안 가리고 왜 예수만 따라가야 되는지를, 본인이 영문도 몰라요. 이거는 느부갓네살이 번민해서 잠을 못 잔 것처럼, 그것을 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성도는, 남들이 무시하는 천사, 하나님, 예수님 다 무시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근데 본인이 무시를 못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구약에서 언약백성이라고 합니다. 언약백성은 자기에게 덮어씌워진 언약이 찾아옴을, 영문도 모르게 찾아옴을, 영문도 모르게 찾아왔기 때문에 본인 힘으로 이걸 벗겨낼 능력이 없어요. 예수십자가를 무시할 그런 재주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게 귀신 씐 것처럼 딱 달라붙어요. 예수 귀신 씌었다. 딱 달라붙었어요. 도망치고자 얼마나 시도를 했겠습니까? 예수는 없는 거야. 예수는 돌아가셨어. 예수는 하나의 종교야. 이 성경전체의 내용은 이게 전부 다 짜깁기 되었고, 여러 가지 그동안 있었던 J문서, D문서, 많이 배웠죠. 인간들의 지혜를 수집하고 분리한 거지. 이거는 진실이 아니야. 그 당시의 교훈집이야. 교훈집. 신학교 때 그렇게 배우거든요. 신학교 가게 되면 장사기 때문에, 인간에게 장사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전부 다 성경을 그렇게 가르친다고요. 전부 다.

소위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이. 그래서 신학자들을 제가 불신자자라고 안 합니까? 요한계시록도 안 믿어요. 심지어 이만희도 요한계시록 안 믿는데요. 이만희도 안 믿어요. 안 믿기 때문에 그렇게 144,000을 활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도 전부고. 내가 전부예요. 자기 자신이 전부기 때문에.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죠. 근데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없는 존재예요. 언약이 던져준 숫자와 연결이 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가,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뭣 때문에? 언약이 던져준 숫자에 걸려 들어가 버리면. 7, 144,000.. 전부 다 그런 숫자. 일곱 교회, 7. 전부 다 그것이, 말씀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고 나말 살고자 하는 인간밖에는 없어요. 누구도 짐승의 두꺼운 차단막을 못 벗어난다고 아까 이야기했죠. 인간은 어떻게 해도 나라고 인정하는 한, 우리는 신자가 아닙니다. 여기 거울 보는 그 나 있잖아요. 그게 나라고 인정하는 한, 절대로 신자가 될 수 없어요. 절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근데 기적은 뭐냐, 그 나가 그 나를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만 촐랑촐랑 따라가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거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내 욕망의 결핍만 맨날 채우는 거기에만 분주하지. 그래야 내가 온전한 나, 반듯한 나, 순수한 나, 그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어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나, 여론 속에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 나. 그걸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하잖아요. 내 정체성, 구성, 그걸 서울강의 제목 같으면 자아표준모델이죠. 이거 설정해놓고 그것뿐이에요. 이래야 나답다는 것. 매일같이 생각이 이래야 나답다. 나는 여기서 나다운 것이 없다면 나는 내가 용서를 못하리라. 이런 거요.

누굴 따라가요? 안 따라가요. 이용하지 따라가지 않아요. 이용하지 안 따라갑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는 따라가는 척을 해주지 절대로 안 따라가요. 나는 나로서 종결되는 겁니다. 내가 시작이고 내가 마감이에요. 그런데 이 자체가, 내가 여기에 죄인으로 산다는 이 자체도 주님의 변화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비춰서? 주어진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이런 인간들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것도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뭐 다른 말로 할 수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주 되심의 흔적, 징후, 그것을 개봉하고 나팔 불어서 잠자는 흔적들아! 깨어나라! 와! 그러면 모든 개념들이 깨어나요. 해가 밝은 것은 봐주기였어요. 아침에 해 뜨는 것은 봐주기였지, 해가 하늘에 떠있는 것도 봐주는 거예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들, 인간들아! 거기에 대해서 너희들은 시비를 걸지 마! 어제 무지개이야기 기억이 나십니까? 이 땅에 사계절이 있는 것은 은혜의 차단막 때문에 봐주고 있는 것이지, 그걸 뜯어내버리면, 그걸 철거해버리면 이 땅은 저주 그 자체가 본래의 모습이에요. 본래의 모습.

이 땅에 있는 것들은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오게 되면 죽이라고 준비된 악마의 군대이름이었던 거예요. 오기만 하면 죽여 버린다는 것. 왜? 전쟁이 하늘에서 시작되어서 땅으로 꺼졌으니까. 잠자는 자들아 깨어나라. 그리고 마지막 천사를 해가지고 모든 것을 정리 정돈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일곱, 123456 이래 되죠. 가면 갈수록 발목 말단 부분의 색채가 짙어져요. 색채가 갈수록. 색채가 짙어지면서 123456, 다시 123456, 그 마지막 6에서 123456, 그럼 또 있느냐? 또 있지 않아요. 요한계시록 15장에 보게 되면 이게 마지막이라고 되어 있어요. 1절에, “또 하늘에 크고 다른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그러니까 주께서 마감을 일방적으로, 임의로 마감을 하는 자격자가 예수님뿐이에요. 우리가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자연의 변화도 이걸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이 땅에서 고요히 지내는 것이 아니고, 17장 17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숫자를 외우기도 쉽죠. 17,17이니까.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이게 바로 인간들이“You`re my destiny”라고 했던, 눈에 보였던 세상 전부가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심판주가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짐승한테 이 나라를 잠시 맡긴 거예요. 인수인계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인수인계한 조건이 뭐냐, 해는 니 자리에서 밝게 화사하게 비추라. 그래서 유치원 애들이 해를 그릴 때는 진짜 예쁘게 그릴 수 있도록 해를 하늘에 달아놓은 거예요. 물론 유치원 애들하고 그렇게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달은 또 예쁘게 해가지고 그렇게 해놔라. 언제까지냐, 응할 때까지.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충분히 속여 넘길 때까지. 눈에 비치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전부다, 내가 사는 목적은 거울에 비친 내가 사는 목적이야,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야, 라고 충분히 설득시켜라. 악마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은혜로부터 보호받는 생각은 하지 말고.

이게 악마가 얼마나 고객에게 속임수를 쓰는지 몰라요. 주님의 무지개 은혜로 보호받고 있는데, 그 보호가 어디서 왔는가? 신약을 따져보면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잖아요.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작살났죠. 뭐. 처참하게 망가졌죠. 그 다음부터는 그분이 피리 부는 소년, 그 피리 부는 소년이 성령이 아닙니까? 피리 부니까 소리가 막 날아가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다는 거. 끝났다는 거. 이 세상은 제거대상, 철거대상, 갉아냄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 이 말씀이 응했기 때문에. 이제는 인수인계한 것을 악마와 더불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준비된, 영원한 공간이죠. 어둡고 그리고 좁은 공간. 공간이 응축되니까. 시간은 개봉이 되었어요. 한때, 두 때, 세 때, 네 때가 아니라, 세 때는 날아가 버렸어요. 한때, 두 때, 그 다음은 반 때. 점점 희미해져요. 그 다음이 있다면 반의 반 때가 되겠죠. 반의 제곱, 제곱.. 그 다음에 제로.

시간과 공간은 끝났죠. 왜? 마감은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요. 예수님에게 빨려 들어갔다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미를 담아내겠다는 그 목적으로, 기능으로 시간과 공간이 악마의 손에 잠시 허락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200918제주특강c 사라질 자(요한계시록)-이 근호목사.hwp (80.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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