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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15:46:53 조회 : 44         
4강-암 2장 11-16절(하나님의 폭주)20092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17.111.178.73)
4강-암 2장 11-16절(하나님의 폭주)2009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2장 11-16절까지입니다.

아모스 2:11-16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계획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의 노력을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주신 그 언약을, 친히 그 하나님이 그 언약을 다 이루어내심으로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는 것을 본인이 감 잡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척 훌륭한 줄 알고 그리고 별탈 없이 인생을 살게 되면 천국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혜택이나 배려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약속에 의해서 그것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가? 주셨습니다.

주셨는데 주신 그 흔적들이 12절에 “나시르 사람으로”라고 해서 나실이라고 하는데 그 나시르 사람이 나오고, 또 12절에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여기 선지자, 선지자와 나실인,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양심상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나시르 사람이나 선지자를 의도적으로 일부러 보낼 이유는 전혀 없지요.

선지자와 나실인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식과 세상사람들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던 자체적인 선입감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거지요. 선지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밝혔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예레미야 28장 18절에 보면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라고 되어 있어요.

하늘나라의 어떤 아침조회 같은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천상회의. 그러면 그 천상회의에서 논의된 그 일, 그 일이 이제는 하늘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땅에 있는 사람은 그걸 모르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선지자를 보내서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그 결과를 선지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전했는데 전하니까 사람들은 그 선지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면, 그 대우한 것이 예레미야 20장에 보면 나옵니다. 20장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그래서 그 권유대로 내가 전하는데 8, 9절에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의 몸과 정신은 자기 맘대로 못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딱 잡아서 하기 때문에 자기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전하니까 사람들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거예요.

선지자가 하나님의 천상회의 내용을 그대로 전했는데 사람들은 그걸 안받아주면서 분노를 유발하고 있다는 그 자체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종교적인 지혜를 끄집어내서 천국 가겠다, 구원 받겠다, 하는 그 방식과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선지자 보내줬잖아. 나실인 보내줬잖아.”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12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그 입 다물라.” 이런 식으로 선지자에게 천상회의에서 있었던 소식을 못 전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도 답답해서 “나 이 짓 안하렵니다.” 이렇게 하고 싶어도 떨기나무의 불이 활활 타는 것처럼 도저히 외치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거예요. 외쳐야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외쳤을 때 사람들은 알아먹겠느냐, 그들이 동의하겠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동의 안하지요. 더욱더 선지자에게 압박을 가하고 핍박을 가하는 겁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빈 수레가 아닙니다. 가득 실은 수레가 이 세상을 향하여 눌러버리는 거예요.

누르는데 그 누르는 중량이 어느 정도냐 하면 14, 15절에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수 없으며……”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이 세상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될 자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서도.

시편 33편 16-17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자기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뜻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구원은 없다.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억누르지 말지 왜 자꾸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가지고 흙을 밟는 것처럼 꽉 누르고 있느냐, 왜 그렇게 인간들을 그것도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느냐, 왜 이스라엘을 구원 못 받도록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억누르는 무게가 어떤 무게냐? 인간이 지은 죄를 계속 해서 하나님께서 치워줬어요. 계속해서 용서를 해줬고, 봐주고 있었고, 혜택을 입었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 살려줘 온 거예요. 계속 쓰레기를 치워온 거예요.

그 쓰레기를 치워준 그 은혜의 무게가 지금 심판이 되어서 그들을 억눌러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봐준 그 중량만큼 심판을 하거든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심판할 타당성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동안 은혜를 줬잖아.” 봐줬다 그 말이지요. 그동안 네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용서 또 용서를 해주신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그 용서를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그동안 해줬던 그 은혜의 값으로 눌러버리니까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자가 없지요. 인간의 본성상 벗어날 자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받지 못한다. 어떤 노력을 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그 심판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다.” 이렇게 선언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지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그들은 암담하겠지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릴 구원하지 않느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심판 할 만해서 심판하는데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저희를 심판해주세요.”라고 심판을 원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심판이라면 그 심판을 저에게 다 퍼부으소서.”라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할 위인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자꾸 자기편하고 살 궁리만 찾고 있습니다. 교회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그동안 준 은혜에 대해서 그들이 은혜 준 이유도 모르면서 자기가 잘나서 살아온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할 때에 교회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예배당 지었으니까 여기서 같이 놉시다.” 하나님하고 같이 놀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심판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내미는 어떤 프로그램도 하나님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윤리적 도덕적 처신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빠져나가게 하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이 본문 보면서 이걸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폭주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길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을 치었어요. 트럭이든 버스든 사람을 치었을 때 보통 차를 멈추고 “아저씨, 살아 있습니까?” 하고 확인하고 119에 신고하고 경찰에 신고해서 사고수습을 하고 처리를 해야지요.

그런데 운전사가 차를 몰다가 뭐가 부딪힌 것 같아서 보니까 그 큰 바퀴 틈새에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끼었어요. 그 트럭운전사가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빨리 확인해야 될 텐데 사람 끼인 채로 차고지까지 가버리는 거예요. 이건 폭주지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까라면 까, 하고 밀어붙여요.

“네가 내 큰 이 심판의 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보라.” 큰 트럭의 바퀴가 열 몇 개인가 그게 얼마나 큰지 몰라요. 그 바퀴에 인간이 끼어있어요. 멈추지 않습니다. 그냥 차고지까지, 갈 때까지 가버리는 거예요. 끝까지. 이게 하나님의 폭주요 하나님의 심판의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아모스가 했는데 아모스가 선지자거든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결과를 미리 보여줘요. 왜냐하면 선지자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기에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이런 결과,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폭주의 그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고 이런 결과가 주어진 그 원인을 이제부터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결과를 주고 원인을 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집에 있는데 집 편지함에 난데없이 교통범칙금 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합시다. 범칙금 받을 일이 없었거든요. 그걸 보고 ‘내가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동명 건너가는 거기? 혹시 학교 앞에서 속도제한이 시속 30킬로인데 40킬로로 갔나?’ 이렇게 추적을 하는 거예요. 먼저 범칙금 고지서부터 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이이여, 저 같은 인간은 심판해 달라, 하고 요청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심판하려고 하는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심판해달라고 요청할 위인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선지자는 고지식하게 사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천상회의는 하나님의 결정된 사항을 그대로 전해버리지요.

미가 2장 6절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미가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니까 그들은 뭐라고 평을 내리느냐 하면, “너 왜 나에게 욕을 하느냐? 왜 욕하는데? 내가 뭐가 잘못되었다고 욕하는데? 선지자면 다냐? 다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예요.

중간에 끼어 있는 선지자 입장이 난처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앞선 사람이, 미래의 사람이 현재의 사람한테 현재에 맞춰서 가짜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요.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 난 거거든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나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저에게 심판해 주옵소서, 라고 요청하는 사람, 지옥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없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이미 글러먹은 거예요. 하나님의 뜻하고 이미 틀어지니까. 일반교회에서 금요철야기도하면서 “여러분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지옥 보내 주세요. 다 같이 통성기도 시작!” 이렇게 합니까? “주여, 삼창, 쭈여, 쭈여, 쭈여!” 이렇게 하면서 “주여, 지옥가게 해 쭈시옵소서.” 합니까?

인간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성경말씀 앞에서 제대로 우리는 고백해야 됩니다. 옛날 2, 30년 전에 흔한 이런 tv드라마 가 있어요. 젊은 남녀가 아주 절규합니다. 절규하는 멘트가 이거예요. “제발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제발 우리 둘이.” 드라마 전개 보면, “너희가 배다른 남매였다. 보육원에 있을 때 몰라서 그런데 너희가 남매다.” 그 남녀는 “둘이 좋아하면 되지 왜 주위에서 우리의 사랑을 막느냐?”

그 갈등이 드라마를 계속 이끌어갑니다. 2, 30년 전의 그 드라마내용이 그래요. 또 인도네시아까지 도망갔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 사랑 방해하고. 네 여자의 과거를 아느냐, 또는 네 남자의 과거를 아느냐, 하고 계속해서 방해하는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제발 집안 어른이고 뭐고 제발 우리 둘이 사랑하니까 사랑하게 내버려두라고 요청하지요.

그런데 제가 이걸 약간 각색을 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게 그거예요. “제발, please, 제발, 우리 좀 살게 해주옵소서. 술 끊으라, 담배 끊어라, 복음 알아들어라,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이 땅에서 살고 싶은 우리를 그냥 살도록 내버려 두시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이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진심으로~,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께 부탁하노니 제발 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하나님. 알아서 바르게 살 테니 관여하지 마세요.” 아모스 당시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에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내 나름대로 내 인생 꿈을 펼치면서 한 번 살아보려는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간섭질입니까? 왜 그리 간섭질이에요?”

제발 우리 사랑하게 해 달라, 이렇게 하는 것처럼 제발 우리 그냥 살게 해 달라, 이렇게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끝판왕입니다. 언약의 끝장을 냅니다. 차고지까지 폭주를 해버리지요. 그 차고지가 사도행전 17장 30, 31절에 나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증거를 주셨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상황입니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 강남강의 두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수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는 역사가 있어요. 그 숨어 있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해서 하나님이 오실 때를, 메시아 오실 때를 대비해서 유대민족은 나라자체를 조직적으로 메시아를 영접할 만한 국가로 형성하는데 그들은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어요. 율법은 율법대로 살리고 그걸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서 이제는 메시아가 온다, 하면 충분히 메시아가 우리를 받아줄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겁니다. 그게 역사에요. 조직적 역사.

그런데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그 숨어 있는 족보는, 마태복음과는 다른 족보는 마치 수영선수 박 태환이 잠영해서 수면위로 안 나타나는 상황에서 잠영해서 한 20미터 죽 나아가는 것처럼 긴 터널의 끝자리에 역사의 옆구리를 치고 등장하게 되면 그게 뭐냐 하면,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가 이미 와 버렸어요.

숨어 있는 형식으로 나와 보니까, 딱 나와 보니까 이쪽은 지금 메시아 기다린다고 난리에요. 그래서 강남강의 두 번째 강의에서 예를 들었지요. 부산의 해운대역. 해운대 역 앞에 지하철역이 있는데요. 잘못 빠져나오면 해운대 역 쪽으로 빠져나온다고 했는데 출구가 반대편으로 나와 버려요.

자기는 열심히 하나님 메시아를 위해서 교회에서 철야하고 기도하고 충성 다 했는데 나와 보니까 저쪽구멍으로 나가야 할 것을 이쪽 구멍으로 나와 버렸는데 저쪽 구멍과 이쪽 구멍이 서로 충돌, 대척관계에 있어요. 자기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충성을 다 했는데 그 충성을 다 한 것이 너는 나사렛 예수를 핍박했다는 그런 소리를 듣는 구멍으로 빠져나온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하자 없이, 실수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만전에 만전을 다 했다 했는데 만전에 만전을 다 하고 철두철미하게 메시아 영접할 준비를 다 했는데 준비한 결과가 엉뚱한 곳에 떡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로 그들이 집결되어 있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제 그 잘못된 것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뭐가 잘못되었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우리 같은 것은 심판해주옵소서.”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지만 근원적으로 말해서 나실인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원형과 닿아져 있어요. 이 우주의 원형, 창조의 원형, 하나님의 계획의 원형과 닿아져 있어요.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이미 잉태해서 이 땅에 출생했잖아요. 태어났으니까 몸이 있잖아요. 잉태해서 출생한 몸이기 때문에, 또 더러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인간들은 자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똥은 내가 치운다는 겁니다. 내 똥은 내가 치운다.

교회 와서 목사한테 설교 듣고 성경 보면서 배운 게 그거에요. 내가 있으니까 있는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뭐냐? 하나님 말씀에 맞춰서 내가 나의 정당성을 조절하겠다는 겁니다. 죄지으면 벌 받는다는 겁니다. 죄 지으면 벌 받기 때문에 “죄를 지었으면 알아서 내가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결과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원인을 분석해서 그 결과를 따져서 그 결과가 해소되도록 내 원인을 또다시 수정해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의 정당함, 나는 그렇게 더럽게 살지 않았다는 약간의 정당성을 내가 쥐고 있으면 이게 나 천당 가는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 같은 것은 지옥 보내셔서 심판하소서,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지요.

내가 나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갖다 부은 헌금만 액수가 얼마인데요. 엄청나게 했거든요. 교회 구석구석 주보대까지 다 만들 정도로 충성 봉사했으니까. “하나님, 저 정당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잉태된 그 자체가 옳게 잉태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걸 두고 인간은 자기형상에 대해서 긍정한다고 강남강의에서 첫째 시간에 했는데 그러나 성경의 언약은 뭐냐? 그런 인간들이 지옥 갈 수 밖에 없고 구원되지 않는 인간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54장에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렇게 합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그러니까 잉태치 못한 자들만 구원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인간을 싹 갈아 엎어버리는 거예요. 싹 갈아치우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폭주가 필요한 겁니다. 전면적인 심판이 필요한 거예요. 그 원형이 있어요. 말로만 잉태치 못한 자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를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 원형이 이삭입니다.

분명히 사래와 아브라함사이에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있거든요. 물론 종 하갈을 통해서 난 자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부인을 불임여성으로 꽉 잡고 계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불임여성이니까 임신을 못하는 여성입니다. 여기에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기를,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다. 이렇게 둘을 붙이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부인은 아기를 못 낳는데 약속은 뭐냐 하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진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모든 아이큐를 동원하고 협의를 해봐야 여기서 이렇게 건너갈 수가 없어요. 이미 잉태한 인간들은 잉태했다는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죄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천국에 못갑니다.

인간이 천국갈 수 없는데 중간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들어요. 약속이 끼어들어요. 약속이 끼어들면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내가 아무리 착해도, 양심껏 살아도 못하는 그 일을 하나님의 언약이 해내시는 거예요.

이삭의 등장으로 인하여 없던 자식이 새로 등장했고 그 이삭이 갖고 있는 원리, 잉태치 않은 상태에서 나타난 그 자식이 보여줄 일과, 이미 보통 우리가 만나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는 내가 여기 거울 앞에 있는 모습, 오늘도 어떻게 살지, 밥이나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돈 벌어야 되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라고 내가 나를 관리하고 추스르고 인생을 살아가는 그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우리의 방식은 뭐냐 하면,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 똥은 내가 치운다. 내가 나쁜 짓하면 벌 받는 그 정도는 내가 알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죄를 안 짓고 짓더라도 후딱 회개해서 착한 일로 덮어서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이 더 많다면 나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점점 더 증가한다. 잉태된 자들의 기껏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잉태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무엇과 닿지를 않느냐 하면, 우리의 원형과 닿지를 않아요. 결국 자기가 자기한테만 닿을 뿐이지 우리의 원형과 닿지를 않는다고요. 그래서 복음 듣고 성경공부 참석해도 몇 번만 주고받고 이야기를 해보면요, 아, 이 사람은 정말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피 안다, 복음 안다, 해도 자기 자신의 잉태한 원칙을 못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 알아요.

인간이 얼마나 극단적인 이기주의인지, 여러분이 다른 사람하고 30초 동안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아주 신기한 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30초. “안녕하십니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지금 7초 지났어요. “어디가십니까? 아, 장에 가십니까?” 째깍, 째깍……, 16초. “그럼 가입시더.” “예, 가입시더.” 끝났어요. 30초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네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자. 사람이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은 마음을 터놔야 되는데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마음을 온전히 남에게 터놓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잉태된 인간의 가장 근본적으로 되돌아와야 될 근원의 자리는, 그 원형은 나기 때문에 이미 태어난 나를 내가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좋은 분이라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다면 내 소원 들어줘라, 그 말이에요. 그러면 믿어줄게, 그거거든요. 메시아 오면 내 죄지은 것 용서하라, 이런 식이에요. “나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구원되겠다는 것도 죄고, 죄 씻어 보겠다는 것도 죄고, 성령 받겠다는 것도 죄입니다.”라는 소리가 인간의 입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잉태된 자에게는 선지자가 괜한 선지자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서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인다는 말은,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포도주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포도주를 먹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나실인의 해야 될 기능이 장차 올 메시아 예수님께서 포도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을 나실인이 미래의 사람으로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거든요.

나실인하고 선지자하고 같다고 보면 됩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에요. 선지자가 예레미야 15장 15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나를 박해하는 거예요.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은 곧 장차오실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 홀로 할 수 있는 언약 다 이루심, 언약 끝장내심을 사람들이 박해해서 예수님을 돌아가게 하신 거예요.

예레미야 17장 17, 18절에 보면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예레미야가 천상회의에서 있었던 내용을 전하면 전할수록 예레미야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심한 박해에요.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예레미야 빼놓고 다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한결같이 잉태된, 즉 이스마엘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지 않는 악마적 속성, 선악적인 속성을 가지고 그것 가지고 억지로 천국 가겠다는 거예요. 교회 만들어가지고. 종교단체 만들어가지고.

주님께서 심판의 폭주를 가지고 하시는 일의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좀비가 있다 칩시다. 좀비가 사흘을 굶어 배가 고파서 골목길을 어슬렁대는데 마침 창 너머로 보니 애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좀비가 그 애를 잡아먹기 위해서 몰래 뒤로 다가서는데 애가 뒤를 쑥 돌아보면서 “아저씨, 잘됐다. 나 숙제하는데 좀 도와줄래요?” 좀비는 심각한데 애는 내일 선생님한테 보일 숙제하는 게 심각해요.

언약을 이루신 주님은 이 땅을 갈아엎는 것이 심각한데, 갈아엎고 심판해서 새 인간 만드는 그것이 주님한테는 심각한일인데 인간들은, 예수라는 아저씨, 제 소원 들어 주세요, 잘 살고 싶어요, 이번에 수술했는데 쌍꺼풀 잘 나왔나 좀 봐주세요, 의사의 손길 인도하사 기적적으로 깨끗하게 낫도록……. 본인은 심각한 게 따로 있어요.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이야기 주고받고 해보면요, 본인에게 무엇이 심각한지를 감을 못 잡고 있어요. 지금 감 따는 시기이기는 하다만 감을 못 잡고 있어요. “이미 태어난 것 이것 작살나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니까요? 갈아엎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싹쓸이하는 거예요. 아담계통의 모든 인간은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폭주하는 대형차량의 바퀴에 우리가 끼었을 때 살려주세요, 하지 마시고 “차고지까지 갑시다.” 왜 이렇게 나를 차바퀴에 끼었는지 차고지에 가보니까 나대신 한분이 돌아가셨어요. 하나님께서 마지막증거로 죽었다가 살려내시는 증거, 바로 긴 트럭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차량들이 터널 끝에 나오는 것처럼 역사의 모든 원인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다 완성된 증거물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서 주님의 심각함은, 주님에게 귀하고 소중한 것은 십자가뿐이었어요. 그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의 선지자 아모스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게 천상회의에서 아침조회에서 의논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40년, 50년 동안 우리가 교회 다녀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기가 생각해서 죄지었다 싶으면 자기가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착한 일 더 해서 내 더러운 것은 내가 알아서 치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신앙생활 했다고 생각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면 정말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동안 내가 내 단도리 한 것이 얼마나 저주스런, 지저분한 더러운 일인 것을 알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주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꾸 오므라들어요. 뭐냐 하면, 가짜는 자기 내부로 움츠러들어요 내부로 움츠러들면, 카멜레온처럼 동그랗게 되어버리면 안에 있는 진짜 속마음은 안으로 꿍쳐서 보이지 않고 겉으로는 내가 그거 안다,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피 안다, 언약 안다, 나도 많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겉에 있는 것으로 속에 있는 자신의 것을 감추지요.

이게 위장입니다. 피하고 싶은 거예요. 속 시원하게 십자가 앞에서 활짝 “주여, 이 아담의 몸을 없애주세요.” 움츠리지 말고 반대로 쫙 활짝 날개 펴듯이 펴버려야 돼요. 펴버리면 내 방식으로 내 죄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다 이루었다는 그 증거, 예수 십자가의 그 피지요, 속죄의 피, 속죄하기로 준비된 피 어린양의 피가 곳곳에 우리에게 소낙비처럼 쏟아집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니까.

내가 내 죄를 처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양심껏 처리하지 마세요. 제발 날 내 식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하지 말고 주의 식대로, 주께서 언약이 드러나는 그 식대로 뭐가 되었든지 그냥 쓰이게 하옵소서, 활짝 주님 십자가 앞에서 펴야 되고 세상에 나가서도 두려움 없이 팔을 활짝 벌려야 돼요.

내가 나의 허점을 가리려고, 감추려고 하는 시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이 땅에 아담이 잉태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육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럼 우리는 포기해야 돼요. 우리 인생에 미련두지 마세요. 우린 제 2의 인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쪽 인생은 빨리 끝내고 두 번째 삶 살자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그거였잖아요.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다 이루심 앞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 앞에서 더 이상 자기 죄를 감추기 급급하고, 그 죄보다 더 나쁜 죄가 그 죄를 내 착함으로 어떻게 씻어보려는 그 더러운 짓거리, 그것마저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할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이고 살려주는 기간만큼 사는 대로 살고 더 살생각하지 말고 살면 돼요. 송 해처럼 90넘어서 전국노래자랑 하라고, 거기까지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살려주는 만큼 살면 되는 겁니다. 이 죄는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십자가 피가 얼마나 귀한지를 드러내기 위한 주께서 노출시킨 죄인 줄 알고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이미 성도, 백성, 언약의 백성, 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반대의 출구로 나와 보니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왔던 것이 들통 났습니다. 다시 들어가서 십자가 있는 곳의 출구로, 그 구멍으로 빠져나와서 우리가 얼마나 주의 앞에 원수이며 죄인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주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강-암 2장 11-16절(하나님의폭주)200923-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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