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1-07-25 05:24:37 조회 : 58         
광주강의20210723b 고린도전서 7장 30절(추상성)-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광주강의20210723b 고린도전서 7장 30절(추상성)-이 근호 목사

자,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했습니다. 가뭄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으니까 온 천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영향력이 사르밧 과부 집까지 와가지고 밀가루도 없고 참기름도 다 떨어졌죠. 이것은 이 현실세계에서 어느 개체가, 개인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자존심도 세고 자기의 자긍심도 세서 나는 나 혼자 산다고 하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총괄적으로 봐요, 총체적으로. 하나님뿐 아니라 마귀도 그렇게 봐요. 어느 누구도 내가 하나로 묶어놓은 이 세상에서 홀로 자기만 살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밀면 떠밀리게 되어 있고, 딸내미 와서 좋다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가 되고. 뭔가 이렇게 전부다 하나 안에 들어있어요.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그 하나 안에서 나라는 것이 내가 개체성을 가지고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렇게 했죠. 개체와 주체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개체는 착각이죠. 나는 홀로 있다는 착각이죠. 그런데 주체와 개체가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인(誤認)입니다. 또는 오(誤)인식,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 ‘나’라는 주체를 주님으로 바꾸어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고정화되신 그분께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고정화되신 그분께 소속이 되어 있다.

자, 그 다음 211페이지 한번 봅시다. 위에서 7번째 줄에. 아, 이거 진도 나가기 힘들겠죠? “구약 성경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국가 자체에요. 국가가 뭐냐. 또 어려운데 어려운 게 자꾸 나와도 할 수 없어요. 국가란 언표 내용과 언표 행위로 나눌 수가 있는데 언표(言表)라는 말 자체도 어려워요. 언표는 쉽게 말해서 그냥 말. 국가는 말의 내용 속에 들어온 것과 그 말하는 행위자 속에 국가가 달리 되는 겁니다.

국가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국가는 행정, 입법, 사법 이런 행정기관에 의해서 다수의 인민들을 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국가라 하거든요, 국가. 가정에서, 그 다음에 소규모 지역에서, 나중에 더 크게 되면 국가.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맞죠? 가정이 하나의 혈족관계이고 그래서 역사는 씨족에서 국가로 된다는 거예요.

국가 속에는 많은 혈족들이 들어있다. 혈족관계에서 약간 소규모로 확대된 것의 대표를 추장이라 하고 이 추장은 국가에 의해서 역사 속에서 보면 무차별 학살당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죠, 남미에서. 남미에서 정복당할 때 국가가 그것도 자기 국가가 아니고 외부 국가가, 스페인 국가가 페루고 뭐고 잉카 마야 문명을 작살내놨잖아요. 그들은 같은 이웃, 옆에 있는 종족끼리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이미 씨족과 혈족 중심으로 평화롭게 사는 것을 한 단계 넘어선 어떤 다른 집단의 출현이 기존의 소박한 혈족관계를 싹 다 밀어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미국이라 합시다. 미국 인디언들이 미국 땅 군데군데 살아요. 인디언들이 이 미국 전체 영토를 자기 영토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씨족, 종족이 있는 이 범위 안에서만 자기 것이에요. 그래서 땅 개념이 어려운 거예요. 땅 개념은 없어요. 땅 개념은 씨족개념이 이동해서 임시적으로 거기에 거주하면 그게 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땅은 전부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씨족의 이름으로 땅이 이름 지어지는 겁니다.

인디언들은 이 구역에 있다가 나중에 사냥감 따라서 버팔로, 들소 따라서 록키 산맥으로 올라가면 이전에 살던 땅은 없어지고 옮긴 땅만 있는 거예요. 지금 머무는 땅도 마찬가지에요. 기후 따라서 이동하면 또 기존의 땅은 없어지고 환경 따라 옮기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초등학생들한테는 무슨 저런 개념이 다 있냐는 거예요. 국가의 철조망이 없고 영토가 없는 국가가 어디 있냐는 거예요. 옛날에는 철조망이고 영토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인디언들의 개념은 총체적입니다, 총체적. ‘하늘과 땅의 신을 믿습니다’, 이겁니다. 하늘과 땅의 신. 그러니 이것은 신이 분배한 그 땅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잠시 혜택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신에게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인디언들의 의식이에요.

인디언들은 알래스카 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샤머니즘이에요. 샤머니즘은 성경에 바알 신에서 나온 거예요. 바알 신, 땅의 신. 바알 신이 땅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의 개념은 없습니다. 국가 개념이 없는 시대가 오랫동안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현대인들은 잘 이해 못하고 있어요.

또 현대인들은 뭘 이해 못하느냐 하면 우리보다 뛰어난 왕이 있었다는 것도 이해 못해요. 지금 뭐 일본에 왕 있고 영국에 왕 있고 태국에 왕 있지만 그것은 전부다 허수아비거든요. 그냥 명목상 하나, 대표 없으니까 네가 해라, 그렇게 된 것이지, 진짜 왕, 진짜 우리는 왕에게 속했다는 이런 개념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신약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은 기름 부으신 주님이죠. 기름 부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원한 왕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이사야에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왕 개념이 빠져있어요. 왜냐하면 왕국에서 현대 자본주의로 바뀐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주님, 주(主)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기름 부으신 왕 되십니다, 하면 왕이 뭔데? 어떤 게 왕인데? 참, 이 점도 이해하기가 참 힘들어요.

이것부터 이야기할게요. 국가가 와서 이 추장들을 싹쓸이 다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없애버렸어요. 이것을 다니엘서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모든 땅의 권세자가 된다’라고 합니다. 짐승의 특징은 결국은 통합체제에요. 모든 걸 하나로 묶어버리는 겁니다. 이 통합체제, 짐승이 될 때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양함이고 다양함은 눈에 보인다. 그런데 통합자는 눈에 안 보인다. 그렇죠? 대통령이 누군 줄 알고 대법원장이 누군지는 아는데 국가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래서 짐승은,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인간의 주체성 또는 자아성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생성됩니다. 생성된다는 이 말을 여기다 집어넣을게요.

국가는 뭐냐. 국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국가의 면적이 있고 국화는 뭐고 국기가 따로 있고 올림픽 나갈 때 대표선수 따로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언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언표 행위, 더 정확히 말해서 언표 행위자는 뭐냐.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입니다’. ‘조국’이라 하면 너무 정치적이니까 ‘그것이 나의 나라입니다’.

자,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설명해놓고 이것을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거예요. 독도는 우리 땅. 우리가 뭔데? 우리가 어디 있어, 우리가? 우리라는 인간들 만나서 싸우기밖에 안하는데 우리가 어디 있어요? 언표 내용, 그러니까 말의 내용, 문장의 내용은 줄줄이 국가가 이렇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국민 본인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짐승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로는 바로 그 나라가 우리의 조국, 우리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한 가지 예를 들께요. 말 표현 자체도 어렵죠? 말의 내용과 말의 행위자. ‘나는 어떤 이사 온 여자를 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회사 사장인데 너무 못됐다.’ 할 때 ‘나는 어떤 여자가 이사 온 걸 안다’ 언표 내용이죠. 그리고 그 여자가 회사 사장인 직업까지 알았죠. 언표 내용상 여자에 대해서 추가적인, 클래스가 다른 차원의 이야기는 안 나왔죠? 어떤 이사 온 여자를 아는데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가 왔다. 추가적인 게 없죠.

그런데 그 여자는 성질이 못됐다. 갑자기 여기 뭐가 들어갔습니까? 이 말을 하고 있는 나의 견해가 들어가 버렸죠, 나의 견해가.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상대를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키가 얼마고 얼마이고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그 사람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도중에 누가 들어가 버렸어요? 그것을 설명하는 자신의 견해와 그 사람을 보는 나의 태도가 섞여 들어가 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잉여, 여분의 것 또는 초월성이에요. 초월성보다는 추상적인 것.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자기의 견해가 거기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이야기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권한 속에 권역 속에 있는 것처럼 들어가 버립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타인을 본다 했죠. 타인을 보고 인간이 기존에 갖고 있는 그전에 알던 타인들, 남 있잖아요, 남이 있고 그 새로 이사 온 여자를 볼 때 성질이 더럽다, 라고 평을 내린다는 말은 타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자아성이 자극받고 노출되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타인이 어떤 여자가 이사 온 것이 아니고 여기에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성전을 짓고 한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했다, 저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결론은 뭐냐 하면 죽여 버리자, 아닙니까? 그래서 죽여 버리자.

그런데 예수님이 노렸던 것은 바로 그거에요. 나에 대해서 마구 마구 보고 내가 어떻다 하는 것을 너희들이 다 설명해. 그래서 너희들이 나를 통해서 나를 평가하면서 내놓은 결과로 인해 너희들의 소속이 예수님에 의해서 드디어 까발려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아까 추상성이라고 했죠, 추상성. 보이지 않는 국가라 하는 추상성이죠, 영적 개념이 되는 거예요. 고로 악마는 안 보이면서도 있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정신 속에 거기에 전부다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그걸 강남강의에서는 공백, 공백에 대한 추구, 빈 자리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에게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마저 채울 수가 없어요. 채우지 못하니까 결핍을 느끼니까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죠. 제가 강남강의 할 때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 먹는 폭식증, 불안한 것 또는 갑자기 말실수를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추상성, 내가 다룰 수 없는 초월적인 추상성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저 사람의 삶이 부럽습니다, 해서 똑같이 한번 살아보세요. 살아보게 되면 나하고 안 맞아요. 나하고 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온 과거가 다르고 다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남 강의 때 한 것을 잠시 해보면 집합론 하면서 A, B, C, D, E, F 하나의 순서로 되어 있다 할 때 A→B→C→D→E→F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고 F→E→D→C→B→A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죠. 이것을 사슬 또는 한자로 쇄(鎖), 연쇄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는 남, 타인을 눈으로 보고, 보고 있는 것을 자기 기존에 있는 과거 기억에 준해서 자기 안에서 정리정돈해서 이것을 현재 자아로 굳혀버려요. 여기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가면 새롭게 굳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있다 합시다. 이제부터 중요해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과거가 만든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성경이나 목사를 통해 들었다 이 말이죠. 들었을 때 현재 들었잖아요, 그 들은 것들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게 되겠죠. 그럴 때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가 자아를 구축했던 그 방식에 근거해서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과거의 방식이 뭐냐 하면 ‘빈 자리 채워서 온전해지는 것’ 이에요.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은 지금 그 순간 자기가 의롭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난 너보다 의롭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의롭다는 말은 나 지금 온전하다는 거예요. 알 거 다 안다는 겁니다. 온전한데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죠.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신입이. 신입이 들어온 거예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거예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이 새로운 정보가 어디에 필요하냐하면 내가 온전해지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빈 자리가 마련되고 그 빈 자리는 예수님의 성경 지식과 복음적 지식으로 채우게 되면 나는 전에도 온전했지만 갈수록 점점 더 나는 철저해지고 온전해진다는 거예요.

이것이 아까 첫째 강의에서 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대로 하게 되면 결국 대립자와 동일시되죠. 내가 바로 악마다. 이게 바로 악마죠, 예수 믿는다고 여기는 악마. 자아를 위해서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신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악마니까 악마에 속하겠죠.

모든 인간은 악마에 속해야 비로소 구원이라는 깊은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악마에 속해야. 악마에 속하는 것을 말리지 마세요. 물론 악마에 속한다고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요. 구원되고 안 되는 일방적 선택권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분한테 일임해야 돼요. 아이고, 우리 처남이 자꾸 이상하게 된다. 처남이든 누구든 간에 인간은 원래 그쪽으로 가야돼요, 원래. 이게 본모습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추상성 안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고 추상성 안에 포로가 되어 있어요. 그 추상성이 악마인 줄을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죠. 왜? 자기는 항상 옳고 완전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향하여 추구한다고 봤기 때문에.

제가 설교시간에 <랑종>, 태국귀신 팔자 이야기 했죠? <랑종>이라는 영화, 그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했잖아요. 자식은 눈에 보이지만 지금 신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오십년 째 무당 생활을 해도 그런 이론이 있고 그런 가설이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저건 괜찮다 싶어서 나한테 가져왔는데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런 귀신 무서운 것보다 내 자식 다치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의 육의 본성을 누가 떼어냅니까? 하나님보다 내 자식이 더 중요한데 그걸 누가 말립니까?

충분하게 귀신다워야 돼요. 제대로 귀신 노릇해야 돼요, 충분하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이야기하되 그것을 슬프게 이야기하지 말고 기쁘게 이야기해야 돼요. 왜? as if니까. 마치 지옥 가는 것처럼 사세요. 나는 지옥에 사는 것처럼 사세요, as if.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자아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어졌다. 이것을 늘 실감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어진 거예요. 주님이라는 이 장(長)으로부터 특별 보좌관, 가룟 유다, 그리고 사탄, 악귀가 예수님의 모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이들의 활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욥기에 나오죠. 욥에게 고통을 준 자가 누구죠?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누구입니까? 마귀죠. 악마가 욥에게 고통을 줘요. 그런데 욥은 자기는 악마와 별개의 개체성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한테 고통을 준다고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한테 고통을 주니까 이게 자기한테 모순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난 의롭고 그럼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계속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워야 되거든요. 욥에 의견은 하나님은 정의로워야 돼요. 선은 선이고 악은 악으로 분명히 구분 짓는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안에서 악과 선이 혼재되어 있으니까 이걸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서 욥은 난처한 거예요.

어떤 전자회사에서 식기 세척기가 고장 나서 엉터리 부품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그런데 엉터리 부품을 집어넣은 것을 밝혀낸 개발자, 예를 들어 최반석이라고 합시다, 반석, 그 사람이 그걸 밝혀내었는데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징계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최반석이라는 사람은 불량품을 밝혀낸 본인이 오히려 죄인취급 받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남을 구원하실 죄 없는 분이 주님 앞에 버림받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악마의 세계에서 통하는 정의롭고 훌륭하고 선하신 하나님관을 완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전부다 혼란케 해버리고 없애버리고 찢어버리는 거예요. 흩트려버리는 거예요. 착하고 훌륭하고 자비로운 그 하나님이 거짓된, 있지도 않은 하나님인 거예요.

그 모순은 왜 발생되는가. 본인이 바로 짐승의 세계, 악마의 세계에 속해서 그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예요. 착한 것만 해왔거든요. 지금 이 부자청년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어요. 자기가 아무리 봐도 하자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합세했습니까, 떠났습니까? 예수님을 떠났죠, 모든 걸 팔라 하니까.

자기가 부자 된 것은 주님의 축복의 결과인데 축복의 결과를 저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해석기제가, 해석 매커니즘이 자체 안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너무 모순된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 당신이 전하는 신학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떠나버리죠. 떠난 그것이 바로 착함의 극단은 곧 그것이 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착한 사람만 지옥 가는 거예요. 스스로 착하다는 사람은 조폭들 중에도 굉장히 많아요. 자기가 착하다는 것을 나는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그런 사람들이 지옥 갑니다.

내 것은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 것이 바로 자아성이에요. 그럼 내 것 버리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내 것 버릴 수 있는 위인은 없어요, 이 세상에. 내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것이 있더라도 마치 내 것 아닌 것처럼 그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죠. 그러니까 내 것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반드시 있어줘야 성령의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잖아요. 지가 알아서 내 것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래서는 구원 못 받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짐승의 나라에 속해져야 비로소 구원은 거기서부터 이뤄진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짐승의 나라. 짐승의 나라가 뭐라고요? 개체성. 내가 곧 주체다, 주인공이다. 주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내가 그냥 주인공이에요.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해야 돼요.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왜 세상은 내 편이어야 하는가? 이거 정답 누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세상은 내 편이어야 하는가? 나는 왜 사랑받아야 하는가? 나는 왜 미움 받아서는 안 되는가? 그걸 모르죠. 모르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잖아요, 네 자신을 미워하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이런 저런 것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콕콕 집어서 쑤시고 들어와요, 콕콕 집어서. 이것은 네 잘못이 아니고 너의 정체성이 악마라는 너의 총체성 안에 있어서 너는 거기에 푹 잠겨 있는 거예요, 못 빠져 나와요. 그걸 총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

모두들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안 속으려고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안 속으려고 하니까. 십자가는 그리고 모든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안 속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각시키는 일입니다. 저거 지켜야지, 저거 지켜야 돼. 십일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온전한 데다가 더 온전하게 되면 구원에 가깝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총체성이에요. 네가 아무리해도 못 빠져나오는 그런 지경 속에 네가 지금 놓여있다. 내가 달려갈게, 내가. 내가 갈게. 네가 나오지 마. 거기서 헤엄치지 마. 그냥 내가 갈게. 달려라, 달려라~ 내가 너한테 찾아갈게.

올리브가 뭐라고 합니까? 뽀빠이 살려줘요~하죠. 살려 달라는 올리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뽀빠이보고 살려 달라 할 때 혼자 있습니까, 아니면 부루투스하고 같이 있습니까? 부루투스하고 같이 있죠. 올리브라고 하는 야리야리하게 진짜 뼈대만 남은 지가 빰빠라 빰밤빠 하면서 지가 시금치 먹습니까? 지가 시금치 먹으면 안돼요. 시금치는 누구 전공이에요? 뽀빠이만 먹어야 돼요. 시금치를 뽀빠이가 먹어야 되지, 우리 남편이 시금치 먹으면 힘나니까 나도 시금치 먹어야지. 시금치 먹지 마. 시금치 먹지 마세요.

우리가 계약 상대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한번 보세요. 우리가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고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해도...... 10장 29절, 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미 심판의 기준은 지금 정해졌어요. 언약이 아니고 언약의 피에요, 피. 피라는 말은 어느 인간도 나를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인간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피 흘림이에요. 그러면 그 피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은 기존에 개인적으로 나의 의미뿐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현실관 있잖아요, 이 전체가 있어도, 세상의 모든 형질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세상 전체와 그리고 예수님의 피와 그냥 맞바꾸는 거예요. 맞바꾸는 겁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했죠.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온 천하를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 온 천하에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그래서 악마는 알아요, 이 사실을. 어째든 간에 내가 잘 되려고 애써야지, 가만히 있어도 망하고 설쳐도 망하는, 망하는 세계가 있다는 그런 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악마는 여러 가지 혜택들을 많이 주고 옵션들을 많이 주고 1+1을 선물 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보고 희망을 가지게 하고 더 격려하려고 그렇게 부추기죠.

211페이지 봅시다. “국가 자체가 형성된 채 육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 적’의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것은 땅이라는 공간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추는 거죠. 그 국가가 땅의 의미가 되려면 땅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원래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와요.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허용을 해요. 바다가 땅보다 더 세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이것이 바다에서 온 짐승에 의해 덮쳐지게 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이 되어버려요. 그게 짐승의 나라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나라 할 게 없어요. 코로나 보세요. 219개의 나라가 무슨 의미 있습니까? 소용없어요. UN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코로나를 못 이기잖아요. 중국에서 일어난 그 코로나가 전 세계에 다 퍼졌습니다.

본인들이 뭔가 남보다 더 특별히 죄 지어서 아프리카 난민들이 굶어 죽어요, 코로나 때문에? 물자가 운송되는 절차를 따져보니까 코로나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 수억 명이 굶어 죽게 된 거예요. 그들이 단체로 나쁜 짓했습니까, 단체로? 아니죠. 가만히 있는데 밀려 왔잖아요. 이래서 이 세상은 너, 나 없어요. 전부다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약간의 여유분이 있다는 것, 아직까지 재물이 있다는 것과 지금 재물이 완전히 다 바닥났다는 그 차이뿐이지, 이 땅에서 인간들이 짐승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힘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센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태고 적’ 힘이라고 해요, 태고의 힘. 그 태고의 힘을 처리하시는 것은 그 힘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이 오셔야 이게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211페이지 중간에 “그 태고 적 어두운 힘이 땅을 적시면서 활동을 해 줄 때, 비로소 땅의 사람들은 낯익은 질서로서 마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이제 알겠죠, 국가는 추상적 개념입니다. “추상적 개념 속에서 개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다.” 자기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국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결국 국가를 알지만 최종적인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국가의 말을 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실질성과 추상성이 원래는 반대가 되어야 되는데 실제로 보면 반대가 아니고 추상성에 복종을 해버리죠, 복종. 실질성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손톱이다, 이것은 지우개다, 하는 것이 실질성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이나 믿음, 이것은 추상성이죠. 사람들은 밥으로 살지,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생각하죠. 그러나 밥이라는 이 구체성, 실질성은 결국 추상성에 종속되는 거예요.

돈 좀 있어도 자살하는 이유가 추상성 때문에 그래요, 추상성. 명예, 위신, 체면. 집에 뭐 굶어죽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체면 때문에, 위신 때문에, 웃음거리 되고 우사스럽다는 것 때문에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돼서 그래요. 그러면 이 자아는 실질성입니까, 추상성입니까? 추상성이에요. 실질성은 근육, 임플란트 한 이, 코, 눈 이것은 실질성이고. 사람이 코 있고 눈 달렸다 해서 ‘난 행복해’ 이럽니까?

우리는 사랑받기를 원해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해요. 혼자 코 있고 발 멀쩡해도 사람이 외로우면 못 살아요. 외로움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그리움 끝에 고독이 온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영물(靈物)이에요, 영물. 인간은 이상해요. 인간은 짐승하고 달라요. 짐승은 사료만 주면 되죠.

인간은 외로우면 못 살아요. 자식들 다 나가라 해놓고 자식들이 그리워서 아이고, 보고 싶다. 전화도 안 하고. Dear John Letter 또 편지 한번 보낼까요? 새벽 4시에 전화 오고. 새벽 4시에 전화 온다는 말은 사고 났어, 사고 났어. 청예 부대 갔더니만 또 사고 났어, 이런 거. 보고 싶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상적인, 오후 2시 반이라든지 저녁 6시 그때 전화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 모든 현실은 내 편이어야 돼요. 자식이 전화하더라도 새벽4시에 전화하면 안 돼. 내가 놀라. 낮에 정신 차릴 때 전화 와야 돼요. 자기가 조정해요. 내 인생은 내가 조정한다고요.

군대생활 12년 동안 하고 특전단 상사까지 한 사람이, 이거 4년만 하면 연금 나와요. 그런데 연금 포기하고 트롯트 가수했어요. 그 사람이 언양에 사는데 내가 그 중국집 짜장면 먹어본 적이 있어요. 일부러 내가 간 건 아니지만 우리 집사님이 박군인가 있으니까 가자해서 사진보고 사진도 찍고. 왜 이럽니까? 연금 나오는데요. 군대에서 사격대회도 1등 했어요. 왜 이럽니까? 추상성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추상성이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인기(人氣)에요, 인기. 인기라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거예요, 타인의 존재.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의 의미로 충분하게 뽑아내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 수만 명이 넘는데 다 무명가수에요. 그런데 갑자기 떴어. 이 사람이 강철부대 나왔어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흐름이라는 것을 한번 보세요. 하도 TV를 안 보니 내 말도 이해 못하고. 모든 예능프로든 한번 보세요. 보게 되면 전부다 추상성이에요, 추상성. 추상이 실제에요, 실제. 현실이 추상이에요.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진다? 국가 안에서. 그 가마솥 안에서 우쌰우쌰 이루어지는 겁니다. 출세해라. 네가 성공해라. 내 자식은 남한테 져서는 안 되니까. 이겨야 되니까.

여기서 짐승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주님한테 지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지기 싫어서. 그래서 뱀의 후손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무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죽였으니까 결정타라고 여겼는데 결정타가 아니라 발꿈치만 물었어요. 진짜 결정타는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위에서 망치로 악마를 치죠. 추상성이 추상성으로 추상성을 쳐버린 거예요.

추상적인 예수님이 추상적인 악마를 쳐버린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 치는 능력으로. 내가 고대하는 추상성이 주님이라는 추상성에 의해서 내가 박살날 때 비로소 그 사건이 우리의 최종적인 확정된 미래가 되고 그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온 나 중심으로 살았던 모든 과거가, 전부다 화투패가 다 뒷면으로 뒤바뀌어지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었다. 왜? 내가 완전해지고 내가 이것으로 구원받고자 했던 모든 시도 자체가 악마가 나한테 시킨 일이고 악마한테 배운 짓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인생 더 사시면서 까발려져야 돼요. 주께서 살려두실 때까지 살아야 돼요. 화투패 까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장로님도 한 백세 살까지. 너무 내가 욕설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다 까야 돼요.

아, 이것마저 죄였구나. 이게 마귀 짓이었구나. 그것이 깊은 감사. 오늘 제목은 <추상성>입니다. 깊은 감사, 내가 다룰 수 없는 감사.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이건 설명 안 되는 울음처럼 깊은 감사에요. 그냥 고마운 거예요. 자기 형편 서러워서 우는 게 아니고 그냥 감사한 거예요. 고마운 거예요.

이 깊은 감사가, 나의 주체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그 주체의 자리에 주님이 계실 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총체성 안에 놓여있는 관계입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로 진짜 오늘날 이스라엘이죠. 성도죠.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성도의 적은 국가입니다. ‘우리가 국가 밖으로 나갔다’가 아니라 이 지옥 같은 국가 안에 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로 주께서 그렇게 다루어주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질적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말이 나와요.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약의 성도를 통해서 구약이 완성된다는 거예요. 구약은 과거지요. 신약 성도는 미래이고 현재죠. 그 현재, 미래를 봤을 때 구약 성도들이 자기에게 해석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신약에 오게 되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예요.

아까 어려운 것 중에서도 다시 한 번 복습하는 형식으로 정리해봅시다. 언표라는 말 자체가 어렵다, 말의 내용을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계속 내뱉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말의 내용을 계속 내뱉어요. 그러니까 말할 타인이 있어줘야 돼요. 혼자 집에서 웅얼웅얼 거릴 수는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때 내 안에 있는 의미가 타인을 통해서 확정되고 증명되는 거죠.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보고 “팥빙수 먹을까요?”라고 말을 할 때 그 여자는 듣는 이야기가 수작 거는 말로 들리죠. 당신에게는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아내하고 먹지, 왜 나하고 먹나. 이렇게 되겠죠. 그럴 때 그 순간 이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자극받았습니까? 나에게는 지킬 ‘나’가 있다는 것이 자극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복음이고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해도 타인의 존재와 말을 주고받고 할 때 무엇이 부각됩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 ‘나’가 주님의 나라에서 볼 때 없어져야 될 것인데 마치 지켜내야 할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지켜내야 할 것이라고. 그래놓고 아까 고린도전서 7장하고 비교해 보세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이 내 식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 그럴 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깊은 감사가 나오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계속 우리의 뒷면이 노출되게 하옵소서. 아무리 우리가 본능적으로 해도 정당한 본능, 옳은 본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깊은 감사와 더불어서 주님의 죄 사함과 언약의 피만 고마워하고 증거 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10723b 고린도전서7장 30절(추상성)-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5
게시물9,186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2021 신간소식 '두 개의 구원'사무엘상 속의 그리스도 최지영 21-07-19 213
공지   생방송 관련 관리자 20-09-30 536
공지   주일 오전, 오후, 수요예배 유튜브 생중계 예정입니다 관리자 20-09-02 546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2595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2412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3262
9726   강남 모임 안내 (장소: 양재동, 9. 28. 화) 이명직 21-09-26 2
9725   광주강의20210924b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 이하림 21-09-25 10
9724   광주강의20210924a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 이하림 21-09-25 10
9723   대전강의 안내 김성은 21-09-23 31
9721   1강-요엘서 1장 1-4절(메뚜기의 기능) 이 근호 목사 오용익 21-09-23 37
9720   주님의 보물찾기 송민선 21-09-23 35
9719   광주 강의 안내 김을수 21-09-20 38
9718   101강-욥기 30장 24~31절(교체)210919 이근호 목사 송민선 21-09-19 33
9717   5강-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우상으로 얻은 자유) … 오용익 21-09-19 41
9716   주일학교 설교 / 열매의 열매 / 210919 정인순 21-09-19 29
9715   서울의존강의20210916b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 이하림 21-09-18 29
9714   서울의존강의20210916a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 이하림 21-09-18 52
9713   살인자 공개 수배 김종철 21-09-18 55
9712   12강-요나 4장 4-11절(기호의 운명)210915-이 근호 목… 오용익 21-09-16 38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