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1-09-18 05:49:41 조회 : 77         
서울의존강의20210916a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2.212.44.181)
서울의존강의20210916a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절-4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가 사도죠. 그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과 동일하게 받은 사람 맞지요?”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우리가 고기 잡는 보통 사람인데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경로, 똑같은 절차를 밟는 분들 계시지요?”라고 물으면서 이 편지를 날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베드로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이 사도가 되는 것과 똑같은 경위를 밟은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편지 받은 사람이 ‘그것은 뭐 사람이 할 수 없지. 하나님이 하시지.’ 라고 궁시렁 궁시렁 뭐 ‘나도 이제 5년 됐는데 10년 되면 뭐 변화 있겠지.’ 이렇게 하겠죠. 그런데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의 신기한 능력”이 나오죠, 신기한 능력.

지금 사도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사도된 것이 신기한 능력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것 받았죠?”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사람을 모욕주고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동네에 교회 있어서 재미삼아 교회 다녔습니다. 지금 이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교회 다니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훌륭하게 신앙생활 했냐를 묻는 게 아니고 레벨이 어느 정도 레벨이냐 하면 “신기하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하실 자신이 있어요?” 라고 묻는 거예요. ‘신기한’ 능력이에요, 신기한 능력.

쥐나 개나 다 할 수 있는, 인간이 연습하면 되는 것 말고요. 인간이 연습하는 것 말고 신기한 것. 신기하다는 말은 예측 불가, 예상 불가죠. 예측 불가, 예상 불가가 신기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예측하고 누가 예상합니까? 내가 예측하고 내가 평소에 예상하잖아요. 그러면 신기하다는 것은 무엇을 완전히 박살내는 겁니까? 거덜내는 겁니까? 신기할 게 없는 나를 신기함이 이 ‘나’에게서 나오는 예상과 예측을 그냥 묵사발 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능력’이에요.

그러니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3절만 내려가도, 그냥 내려가는 것은 아무나 내려가지만 제대로 보고 내려가게 되면 쭉 내려가다가 중간에 턱턱 걸리는 턱 같은 게 있어요, 턱 같은 게. 빠찡코라는 게 이런 건데 중간 중간에 장애물들이 있고 구슬이 위에서 내려와요. 내려오면서 턱, 턱, 턱, 턱 걸리는 거예요. 걸리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빠찡코 구슬이 본인한테 안 떨어져요. 엉뚱한 곳에 툭 떨어지는 거예요. 그 곳에 툭 떨어진 게 누구냐 하면 베드로거든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으로부터 신기한 능력, 여러분들 받았어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건 완전히 약 올리는 거예요. 약 올리는 겁니다.

방금 제가 구슬이 떨어진다고 했죠. 이 구슬에다가 베드로를 집어넣어봅시다. 그 다음 구슬 말고 베드로 당신이 한번 떨어져 보세요. 베드로가 떨어지면서 툭, 툭, 툭, 툭. 장모 병 낫기, 물 위를 걷기, 뭐 툭, 툭, 모조리 그 모든 경로가 무슨 능력이다? 나의 예측과 예상하고 전혀 관계없이 신기하다는 능력으로서 현재 베드로가 사도가 되었는데 이 경로와 동일하게 밟아온 사람이 여러분 맞죠? 라고 베드로후서라는 편지를 보낸 겁니다, 편지를. 사도의 편지가 이제 슬슬 짜증나려고 하죠. 뭐 편지도 좋게 좋게 안하고 이게 뭐에요? 완전히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 신기한 능력 중에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 그 신기한 능력이 연속되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무슨 단어냐 하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교묘하게 소설 쓴 게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이것과 같은 의미가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옵니다.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해당되고, 베드로는 “우리가 공교하게, 묘하게, 속아 넘어갈 만하게 각본 짠 게 아니요” 그냥 능력 받은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17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절에,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이게 지금 여러분들이 들어보니까 바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 산 이야기죠.

지금은 다볼 산 (Mount Tabor)이라고 하는데 그 변화 산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때 누가 있었느냐 하면 3인방,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직접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어제 수요설교에 의하면 ‘주님이 계시는 현장’이에요, 주님이 계시는 현장.

그런데 평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자기 현장이 있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있잖아요. 눈에 뭐 보이는 대로 들어오죠, 이 현실은. 그 현실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기존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잠시 옮겨간 거예요. 그것을 방금 제가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신기한 능력. 이거 뭐 인간이 통용하는 단어와 의미는 전혀 먹히지를 않죠.

여기서 강의의 공식 하나 냅시다. 공식 하나 만들겠습니다. 간단한 공식이에요. ‘모든 의미는 의미 없다.’ 공식입니다. 게임 끝났어요. 모든 의미는 의미 없습니다. 어떤 시선에서? 신기한 시선에서. 신기한 능력의 입장에서 모든 의미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울고 불고 난리치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나는 요새 매일 짜증이고 매일 화난다. 지금 어디에 얽매이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자기가 의미를 지금 뿌려놓은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공교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신기한 능력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사는 게 변화 산입니까? 아니죠. 아침에 뭐 빵 먹을 때 갑자기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변화되었어요? 아니죠. 앞에 있는 남편 얼굴이 뭐 해같이 빛났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러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간단하죠. 그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네가 아는 세상의 현실로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철칙입니다.

강의 다시 해볼까요?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하고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다들 받으셨지요? 그것은 신기한 능력으로 받으신 것 맞죠?” 라고 할 때 그게 신기함에 해당되려면 내가 하는 평소의 행동이 신기함에 침입되거나 들어갈 수가 없어요. 오히려 깎아내야 될 대상들이죠.

그런데 우리 인생은 뭐 이렇게 예수 믿는다, 복음 안다, 복음 이야기하다 보면 한 두 시간씩 이야기하면서 얼굴에 인상은 혼자 다 찡그리고 있어요. 신기한 능력으로 기뻐해야 되는데 기쁨은 없고 감사도 없고 그냥 짜증내면서 내가 아는 복음은 이 정도입니다, 그거 뭐 배틀하나 자랑질 하나...... 그것은 여러분의 앞길에 여러분이 압침을 뿌려놔서 그래요.

지가 뿌려놓고 아야아야아야. 지가 뿌려놓고 밟고서는 아야아야아야, 난 왜 걱정, 근심이 많습니까? 그거 누가 뿌려놓은 거예요, 압침을? 그 때 뭐라고 합니까? 다 네 탓이야. 세상 탓이고 문재인 탓이고 저 김정은 탓이고...... 전부 다 자기 탓이에요! 그 ‘자기 탓’이라는 말을 제가 바꾸겠습니다. 이게 뭐냐? ‘의미 탓’이에요, 의미 탓. 기존에 있는 의미는 의미가 없어요. 없는데 그 의미에 맞춰 살려고 애를 썼다는 거예요, 맞춰 살려고.

왜 의미 없는 그 의미에 맞춰 살려고 하느냐? 맞춰 살 때, 나는 남들을 통해서 ‘내가 사람이다.’ 라고 규정받고 싶은 거예요.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지, 맞지? 자꾸 남한테 묻는 겁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서 내가 사는 정답을 얻으면서 우리는 자꾸 끌어 모으고 있어요. 확보하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는데 임신해서 아기가 태어났잖아요. 태어났을 때 애가 일주일 만에 시름시름 앓아요. 자꾸 아파요. 죽어가고 있단 말이죠. 그 때 다윗이 금식을 했거든요. ‘하나님, 봐주세요. 저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 죄 때문에 태어난 아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회개하고 내가 알아서 참회할 테니까 저 아무 죄 없는 아이만큼은 살려 달라.’ 라고 했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 아이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일주일 만에 죽었죠. 기억 안 나요?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다윗이 1번, 대성통곡했다, 아니면 다윗이 싹 표정을 바꿔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번입니까? 아무렇지 않죠. 왜냐하면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이 아버지로서 내가 죄인이어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다윗 내가 책임지겠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의미도 없는데 그 의미 없는 것을 내가 책임지는 아버지이고 싶은 거예요. 내 잘못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무의미라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예요. 그게 죄가 된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예요.

제가 지금 책을 쓰고 있는데 수련회 강의 시간에도 얘기했어요. 다윗 언약은, 다윗에게 준 언약은 누구를 제거하느냐? 다윗을 제거합니다. 이것은 부산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어요.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을 제거하고 이삭 언약은 이삭을 제거하고.

이삭 언약이 이삭을 제거한다는 말은 이삭을 바보로 만들었다는 거죠. 자기 아들한테 속아 넘어갔어요. 자기를 속이는 아들이 정통 계통을 이룹니다. 이게 말이 돼요? 안 속인 아들은 정식 하늘의 약속의 계통이 아니에요.

한번 따져보세요, 논리로. 아버지를 바보로 만드는 아들이 하나님께서 점지한 진짜 아들이다. 이것은 결국 아버지의 가오, 아버지의 자존감, 자존심, 그 거짓말하는 야곱 앞에서 이걸 챙길 수 있습니까, 못 챙깁니까? 못 챙기죠. 못 챙기는 그것을 신약에서 ‘자유’라고 이야기해요.

자유란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안 챙기게 하는 게 자유이고, 자유가 아닌 것은 챙길 필요도 없는 것을 챙기는 것이 바로 속박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속박, 허무에 대한 속박, 종속됨, 노예가 됨, 바로 왕의 노예 되듯이 노예가 됨,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해드릴까요? 자유란 속박될 필요 없는 것한테 속박 안 되는 것. 바보 등신 같은 짓은 속박될 필요도 없는데 거기에 자진해서 속박되는 것.

이 세상은 신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아니, 목사님 모든 것,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신기한 주의 뜻인데. 다 하나님의 기적이죠.” 라고 이야기하실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현장감 속에는, 인간은, 인간의 현실은요, 하나님이 주신 봄, 여름, 가을, 겨울, 꽃잎 이런 걸 따지는 게 아니고 내게 와서 내게 의미가 되는 요소만 그것을 꽃다발로 만들어서 그걸 바로 나의 삶의 현장감이라고 이렇게 뭉쳐요. 뭉친다고.

그래서 열 살 때 현실감 다르고요. 열두 살 때 현실감 다르고요. 스무 살 때 현실감 달라요. 지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만들어서 의미 꽃다발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지가 만들고 지가 그 안에 종속되고 속박되고 그것 때문에 울고 불고. 책임진대. 맨날 책임지겠대. 책임지는 인간이 그래 죽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네가 평생 책임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더냐 이 말이에요, 무슨 소용이 있더냐. 어머니, 효도해드리겠습니다. 해놓고 아들이 먼저 죽어버리고 뭐 이런 경우 있잖아요. 효도 받을 생각했는데 먼저 죽어버렸어요. 술 먹고 감기약 먹고 먼저 죽어버렸어요. 합병증 일어나가지고. 그것도 멀리 외국에 나가서. 기가 차죠, 부모로서.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데, 아들인데.

베드로후서 내용이 뭡니까? 물으면 베드로후서 내용은 신기한 능력들의 카탈로그, 항목들, 쭉 나열된 항목들이에요. 5절에 한번 봅시다.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게 전부다 신기한 능력에서만 나온 거예요, 신기한 능력에서. 우리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신기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하느냐. 7절에,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예를 들면 이 7절 같은 본문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본인이 남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본인이 타인을 사랑하려고 해요. 이래놓고 베드로후서 1장 7절을 지켰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의미 없는 의미에 종속되어 있고 책임 없는 책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아, 지금 이해했는지, 내가 잘못인가 하는데 쉽게 갈게요. 인간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성도 자체가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이에요. 자기가 사랑인 것을 알면 그 의미는 신기한 능력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신기하지 않은 사랑은 내가 해야 돼요. 내가 하고 자꾸 물어봐야 돼요. 자꾸 물어본다고요. “오늘 설교 어땠어요?” 자꾸 물어본다고. 이거 뭐 무슨 답변을 원하는데? “참 잘 했어요.” 그런 답변을 원해요? “오늘 강의 어땠어요?” 그걸 왜 묻는데?

미장원에 갔다와놓고 남편한테 물어요. “뭐 달라진 거 없나?” 니 미장원 갔다 왔는데 내가 꼭 그걸 찾아내야 될 의미, 책임이 뭐 있어요? “뭐 달라진 거 없네.” 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관심이 0도 없다는 뜻이야. 오늘 밥 없다. 너 알아서 라면 끓여먹던지 니 마음대로 해라.” 남편한테는 아내 머리 스타일 바뀐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없는데 아내가 일방적으로 자기가 종속된 의미를 강요해놓고 거기에 협조 안한다고 아주 저주를 해버린다고요.

이게 무슨 사랑이고 이게 무슨 경건이고 이게 무슨 형제 우애고 이게 무슨 절제입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내 의미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여기 나오는 베드로후서 1장에 믿음, 절제 이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 상관없어요, 이것은.

그러면 내가 사랑을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 원천이 뭡니까? 그 매카니즘, 그 과정은 어디서 나온 과정입니까? 물으면......야, 이거 베드로후서 결론 부분을 벌써 이야기하면...벌써 이야기하자. 내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합시다. 주님이 주님한테, 하나님이 주님한테 토스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연락해요. 우리는 뺀다니까요.

모든 성경의 의미는, 우리의 의미는 일체 인정 안하고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연락 취할 때 발생되는 그 의미만 하나님께서 받아줘요. 우리는 “나가.” 하고 그냥 이탈시켜버려요. 주의 일에 자꾸 끼어드는 것을 이렇게 배제해버린다고요.

오늘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신기한 능력부터 시작했거든요. 제가 분명히 신기한 능력이라 했죠? 그 신기한 능력이 뭐냐 하면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 산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가 봤다는 거예요. 그럼 베드로가 봤다는 것은 능동입니까, 수동입니까? 수동이죠.

지금 눈 반짝반짝해서 잠 안 올 때 빨리 이야기해버려야겠다. 자, 마태복음 17장에 변화 산입니다, 변화 산. 변화 산 이야기죠. 변화 산은 공간이죠, 특정 장소죠. 평소에 뭐 변화 산 등산 안 해봤겠습니까? 뭐 높이는 내가 가보니까 한 500m도 안 돼요. 차 타고 올라가니까 15분 만에 올라가던데 이 변화 산에 갔을 때 갈 때마다 변화됩니까? 아니죠. 변화 산은 특수한 공간이죠, 특수한 공간. 특수한 공간이잖아요, 변화 산이. 특별한 공간이죠. 이 특별한 공간에서 신기한 능력이 나온다면 이 공간은 위에서부터 주셔야 돼요.

이런 원리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제가 3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요.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보고 하신 말씀인데 굉장히 교묘해요, 이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공간 문제잖아요, 공간 문제. 그럼 아담이 있는 곳에 아담이 있겠죠. 그 아담이 있는 공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합류한 공간,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찾아올 때 아담은 기존의 공간 말고 하나님이 찾아 들어오신 새로운 신기한 공간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변화 산이에요. 야고보, 요한, 베드로 데려와 가지고, 가자. 그러면 몇 명 올라갔어요? 야고보, 요한, 베드로 세 명에다가 +1, 예수님 이렇게 네 명 올라갔죠. 올라가보니까 몇 명 있었습니까? 여섯 명이죠. 올라가보니까 거기에 엘리야도 있었고 모세 있었잖아요. 네 명이 올라갔는데 이 네 명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보기에 현장이에요, 자기의 현장. 인간의 현장에서는 카운트가 되니까. 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예수님, 딱 네 명 올라간다. 분명히 자기는 네 명으로 알고 있어요. 이게 베드로 세계의 의미입니다.

의미인데 틀어버리죠. 이 의미를 틀어버리고 여기서 두 명이 추가가 되는 겁니다. 엘리야와 모세. 그러면 추가가 되면서 아, 추가가 됐구나. 이렇게 되지를 않죠. 나의 카운트, 베드로의 카운트가 뭐가 됩니까? 일절 부정당해요. 너는 의미도 없는 곳에 네 의미를 고집했다. 신기한 능력이 찾아오기 전에 네가 먼저 성급해서 나는 진리를 안다. 라고 너무 성질이 급해버렸어요.

아담은 어디 있느냐. 아담은 지 있는데 있겠죠. 그러나 아담으로 하여금 ‘제가 어디에 있습니다.’ 를 보통 아담의 이웃사람, 그 때 아담에게 이웃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담의 이웃사람이 “아담, 어디 있어요?” 하면 “나 여기 있어요.” 이 의미, 인간들의 현장감에서 있는 의미, 인간들끼리 소통되는 그 의미의 세계 있잖아요, 언어의 세계, 그것하고 비교해서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을 때 아담은 이렇게 답변해야죠.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죠. 그런데 그 유사한 답변으로 아담이 이야기한 게 뭐예요? 여러분들이 아시잖아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아담의 답변은 뭐였습니까?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그럼 이웃사람이 아담보고 “아담, 어디 있어요?” 이야기하면,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라고 합니까, 안 합니까? 다 같이 벗은 입장에서 숨을 것도 뭐 없잖아요. 그렇죠? 답변이 다 다르죠?

“고기 잡는 베드로가 이런 새로운, 주님이 추가적으로 주신 그 의미 속에 의미의 장 속에 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나처럼 된 사람 혹시 있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내가 지금 고함 질러서 경찰, 동사무소에서 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집회 한다고. Calm down, calm down. Relax, relax.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것과 만남으로만 거기서 의미가 생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전달할 때 그 의미는, 인간 세계에서는 의미가 발생되지 않고요, 아버지가 아들 되신 예수님과 연락하면서, 연락, 약속이죠, 약속을 이루었을 때 발생되는 그 의미 있잖아요, 그 의미만 하늘 나라에서 받아줍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그 의미에는 무엇이 들어있냐 하면 감사하게도 주께서 일괄 책임졌다는 내용이 거기에 담겨있어요. 아, 이거 복음 아닙니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 여기 경건, 형제 우애, 절제, 인내, 사랑,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런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날아다니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종이 접어서 비행기 날릴 때 “아들아, 간다.” 하고 아버지가 탁 뿌릴 때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고 받을 때. 이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잖아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내가 포착한다. 포착이라는 말은 없지만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내가 끝까지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이것이 내 뜻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이 종이 비행기로 비유되죠. “간다이~” “예~ 주신 것만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성도는 뭐냐. 주님의 의미를 실어 나르는 결과물이죠. 이 세상의 의미 말고 다른 의미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징조로서 등장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게 사도 베드로고요.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존재 가치가 막 업 되지요? 잠깐 물 한잔 마시고요. 지금 너무 신기해서 제가 놀라겠습니다.

자, 책임은 없습니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책임을 져버리면 지상에 통용되는 나의 의미가, 이 더러운 의미가 감히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는 의미를 훼방질하는 거예요.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여기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이 뭐냐. 날아다니는 나에다가 이름을 ‘믿음’이라고 쓰고 ‘덕’이라고 쓰고 ‘지식’이라고 쓰고 ‘절제’라고 쓰고 ‘인내’를 쓰는 거예요. ‘경건’을 쓰는 거예요, 내가. 날아다니는 종이 비행기라고 했는데 이것을 좀 고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고상하긴 고상한데 이게 어려운 단어가 되어가지고...... ‘사라지는 매개자’. 어렵죠? 사라지는 매개자.

이것을 화학용어로 이야기하면 ‘촉매’. 촉매가 더 어려워요. 촉매라 하는 것은 화학반응에 본인은 끼어들지 않으면서 협조만 하고 빠져버리는 것을 촉매라 해요. 협조만 하고 빠져버리는 것. 일종의 중매쟁이죠. 물론 중매쟁이가 중매 서려다가 지가 소개한 남자하고 결혼하는 중매쟁이도 있다만 그런 건 특수한 경우이고 자기는 빠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건질 자를 건지고,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건지고, 자신은 승천해서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리 성도도 이 땅에서 사라지기는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결국 죽으니까. 죽으면서 성도가 존재하는 그 존재가, 또 어려운 것 하나 합시다, 성도가 존재하는 그 존재가 공간적이고 영역적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할 때 ‘아담이 거룩하지 않다’를 아담 자기 입으로 발설했어요. “나는 벌거벗었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숨죠. 인간은 자꾸 숨어요. 같은 인간한테는 안 숨는데 하나님이 등장하면 숨어 버린다는 말은 처음 만든 인간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뭔가 비정상이 됐다 이 말이죠. 숨어버리니까.

아들이 시험치고 난 뒤에 자랑질 할 때는 엄마 오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어요, 자랑질 하려고. 그런데 지금은 시험이 없지만 옛날에는 시험치고 난 뒤에 성적표가 나올 때는요. 자꾸 엄마 얼굴에 안 띄고 싶어요. 띄면 ‘가만있어보자. 아들한테 내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꾸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예 안 띄는 거예요. 띄었다 하면 “참, 오늘 성적표 나왔지. 성적표 한번 보자.”, 성적에 자신감이 없으면 숨어버려요.

왜 숨습니까? 자, 이게 문제에요. 왜 숨습니까? 나의 의미를 남한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견지하고 유지, 지탱하기 위해서. 나의 나다움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제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죄가 뭐냐. 죄라는 것은 난처한 입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전 방어에 나서는 게 바로 죄입니다. 난처한 입장에서, 내 입장이 난처해지기 전에 안 난처해지기 위해서 어떤 상황을 조작해가는 거예요. 현실을 조작해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조작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가지만 누구는 안 속아 넘어가느냐?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노리는 마귀죠. 바로 마귀가 그 때를 노리고 그냥 덮쳐버려요. 어떤 일을 벌여놓고 그 다음부터 조마조마 한 거예요. 일이 성사가 안 될까봐. 아들이 수능 쳤는데 수능점수가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듯이.

뭔가 목표가 있고 장래에 어떤 계획이 있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악마의 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꼭 그게 잘 성사가 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내 처지나 입장이 난처하게 안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거. 칠순 잔치 벌여놓고 손님 많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거. 손님 오되 저쪽에 시동생은 안 왔으면 좋겠다, 이런 거.

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며칠 전에 저한테 전화가 세 통이나 와서 해보니까 아, 이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자기 엄마를 시동생들이 무시하는데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를, 엄마 남동생들이 누나 되는 엄마를 모독하고 하는데 아들 되는 입장에서 그 삼촌들에게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걸 상담이라고 저한테 한 거예요.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게요? 뭐 아무 문제없네요. 그거 신앙문제 아니네요. 제가 답변하기를, 엄마 핑계대지 말고 삼촌 핑계대지 말고 본인이 성격 이상한 건 생각 안 해봤어요? 조카가 성격 좋으면요, 조카 봐서라도 조카의 엄마 되는 누나에 대해서 험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카 자체가 성질 더러우면 집안 싸그리를 욕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씹게 되어 있다고요. 씹고 험담하고 뒷담화 하고. 그 엄마에 그 아들 똑같지 뭐,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의미를 지킨다는 것은, 이것은 공식이랄 것까지 없고 상식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 꼭 남한테 험담을 하게 되어있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자체가 남에게 죄짓는 짓이에요. 남 험담 안 하고 살 수가 없어요. 밀어낼 걸 밀어내야 내 의미가 아름다워지고 고상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얘기 있죠? 바리새인은 그 세리 없으면 누구 욕 했나 몰라.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꼭 못난 인간이 있어줄 때 자기는 상대적으로 빛이 나는 겁니다. 그게 자기 의미를 간수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그게 종속된 거예요. 무의미에 종속된 거예요. 마귀한테 종속된 거예요. 그것은 전혀 신기한 게 아닙니다. 너무나 상식적이에요, 너무나 일반적이고. 다들 그렇게 살아요.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아직 오늘 강의의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남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타인들을 포진시킨 이유가...... 타인에게 갉아 먹혀야 돼요. 그때 우리가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 타인은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에요. 타인에게 나의 의미, 나의 자존감이 갉아 먹혀야 돼요. 파 먹혀야 됩니다. 집에 또 뭐 쥐 키우라는 말은 아니고요. 쥐 말고도 다른 비슷한 거 많잖아요. 그들에게 파 먹혀야 돼요. 파 먹혀야 됩니다.

말썽꾸러기 손자가 있다든지, 손녀가 있다든지. 특히 연로하신 부모가 있을 때 나이 오십이나 육십 된 아들, 딸들은 자기 자존감 다 파 먹힙니다. 효도는 해야 되겠고 감당은 안 되고. 요양병원에 가려니까 월 200만원 줘야 되고. 돈 내라 하니까 지만 돈 내고 다른 형제들은 처음엔 좀 내더니 다음엔 십만 원, 이십 만원 내지도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이 정도 되면 자존감 다 파 먹혔죠? 좌로 해서 파 먹혀 들어가고 우로 파 먹혀 들어가고 아래에서 파 먹혀 들어가고 위에서 파 먹혀 들어가고.

그리고 그 치매 걸린 부모님은 나한테 달려들고. 달려든다는 말이 치매 걸린 노인네가 오줌 싸고 똥 싸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동네방네 나가서 아들, 며느리 욕하는 거예요. 억울함이죠. 온 동네가 불효자 다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면서도 버리지 않고 홀로 담당해야 돼요. 담당하면서 얼마나 자기 의를 지키려고 하겠어요? 그게 죄에요, 자기 의가.

그러니까 이거 빼도 박도 못하는 내 인생. 차라리 고양이 같으면 안락사 시키면 그만이잖아요. 안 되죠. 왜 내 곁에 있는 것이 내 자존감을 파먹느냐 이거에요. 파먹는다는 말은 여러분들 고구마 생각하세요. 고구마를 보통 주택에서 저 밖에 놔두면 쥐들이 와서 파먹죠. 아침에 가면 벌써 고구마에 이만큼 이빨자국 나서 다 파 먹혀 있죠.

인생은 노출된 거예요. 내 인생은 주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놈도 와서 파먹고 저놈도 와서 파먹고요.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얼굴 좋다. 아줌마, 많이 행복하죠?” 속으로는 ‘네가 우리 집구석에서 한 사흘만 살아봐라. 아주 미쳐버릴 거야. 이게 사는 건지 죽는 건지 아마 분간 안 될걸? 욕 한번 볼래? 바꿔서 한번 살아봐, 그러면?’

어떤 인간도 만족 못하는 이유가, 아까 공식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미가 없는 곳에 자기가 압침을 뿌려놓는 거예요. 지가 뿌려놓은 의미에 지가 밟히고 한 거예요, 지가. 거기다 또 교회까지 가니까 경건까지 해야 되니 이거 뭐 이중 삼중, 이제는 예수님한테 파 먹히게 생겼어요. 똑바로 해! 그게 신앙인이야? 자칫하면 지금 네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지옥 갈 점수야, 지금. 내신 성적 올려야 돼. 뭐 이런 식으로 막 들어오게 되면 여러분 어쩌려고요? 만사 놔두고 다 도망치죠.

그럴 때 바로 창세기 3장이잖아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지? 바로 공간 문제에 있어서 주님이 찾아오는 공간이 의미가 있는 공간이고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공간은 의미 없는 공간입니다. 나 혼자 욕 보고 나 혼자 설쳐대고 나 혼자 온 오지랖 다 떠는 공간, 그거 아무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아무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그 상담했던 아저씨, 나이 한 40대 중반정도 된 거 같아요. 그 사람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누가 남한테 욕을 듣는다는 말은 그 사람한테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딱 보면 밉상같이 생겼거나 밉상 받을 짓을 했거나 호감이 아니고 호불호가 완전히 갈라진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안 찾아오면 난 마귀한테 속한 건데 주님이 찾아와야 되는데 그럼 어떻게 찾아옵니까? 이게 또 관심사가 되죠. 주님이 안 찾아오면 안 되는데 찾아와야 되는데 그럼 찾아올 때 어떻게 찾아오는가. 세상은 격파되면서 작동하는 거예요. 깨지면서 작동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찾아온 주님이 위에 계신 게 아니고 주님이 남기신 흔적이 이 세상의 단면 속에 있기 때문에. 격파되어서 쪼개져야, 단면이 드러나야, 십자가의 흔적이 거기에 다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단층 생기죠.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보이던 표면이 갈라져버리면 지층이 보이듯이, 칼로 통으로 잘라버리면 그 내부가 드러나잖아요. 그 내부 안에, 저주받은 세상 안에만, 어두운 세상 안에만 빛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빛이. 그 안에 빛이 들어있다고요. 이 빛이 신기한 능력이죠. 이 세상이 아직도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이 신기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온다는 것은, “아담아 어디 있냐? 손잡고 집에 가자.” 하고 엘리야처럼 하늘로 붕붕 나는 게 아니고 세상을 격파해버려요. 너를 험담하고 너를 공격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의 세계를 감추는데 급급하지 말고 노출되어야 돼요. 쪼개져버려요.

쪼개지니까 딱 쪼개보니까 진짜 의미, 바로 십자가, 십자가의 거저 주시는 용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의롭게 하시는 그 내용과 그리고 내 힘으로 그동안 악착같이 이만큼이나 됐다고 모아뒀던 쓰레기 있잖아요, 그 쓰레기와 주님의 은혜가 같이 섞여있던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내가 성과 이뤘던 그것가지고 사는 보람과 즐거움을 얻었던 겁니다. 이만큼 나처럼 잘 살기도 힘들어. 너희들이 나처럼 노력해야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거야. 이렇게 으스대다가 옆에 원치 않는 타인, 아까 타인이라 하면 치매 걸린 부모님부터 해서 원치 않는 타인, 갑자기 딸이 결혼해놓고는 아이 좀 봐주세요. 나도 맞벌이해야 되겠습니다. 해가지고 장난꾸러기 쌍둥이 아들 둘이 맡기고 가는 이런 경우 있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몸살나가지고, 아이 가볍게 보고 들다가 나중에 오십견 걸려서 아이 들지도 못하고 이런 경우들. 딸은 지 돈 번다고 재미있고 조선족 아줌마 데려오면 최소 150만원은 줘야 되는데 엄마는 하루 종일 보고 돈 한푼 안 주고. 아이들 간식 값은 엄마 돈으로 다 나가고. 자기네 가정은 돈 벌었다고 좋다고 희희낙락거리고. 엄마는 골병 드는데. 엄마한테 용돈 준다는 게 어버이날 5만원 주고 추석날 5만원 주고. 엄마는 뭐 돈 없이 살아요? 조선족 250만원 주면 이것도 250만원 줘야지. 뭐 부모자식 간에, 엄마 나 사랑하잖아? 그걸로 다 떼워 버려요. 사랑하면 골병 들어야 돼요? 골병 더 들어야 더 사랑스러운 거예요?

딸 시집보냈으면 끝난 줄 알았는데 시집보내고 나니까 더 치대죠. 아들 장가보내고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더 치대죠. 세상에 며느리 생일잔치 해주는데 얼마나 호사스럽게 생일상을 해주는지. 시어머니 생일도 몰라. 그런데 며느리 생일은 사진 찍어놓은 것 보니까 온갖 해물로 가득 찼어요. 그저 비나이다. 우리 아들 바가지 안 긁게 해주세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여전히 그렇게 당하면서도 십자가보다도 내가 얻었던 성과를 더 의미 있게 챙기는 그것, 그게 절제입니까? 그게 인내에요? 그게 경건입니까? 그게 형제 우애에요? 그게 사랑입니까?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과시에요. 나 이 정도 하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자기 과시입니다. 이게 계속 숨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미 주기 위해서 찾아왔건만 도망을 치는 거예요. 주님의 의미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의미로 살겠습니다, 하고 내빼는 거예요. 복음이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려요. 복음이 들리지 않는, 십자가가 들려오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려요. 십자가가 너무 부정적이고 긍정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내빼기 바쁘고 도망치기 바빠요.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구원 받으세요.’가 아니라 나처럼 신기한 능력 받은 사람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만 편지한다. 왜?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이 너희가 누구냐, 너희에게. ‘너희에게’라고 했으니까 제가 수요일에 한 표현으로 한다면 ‘균질성’. 똑같아요. 너희 안에 다 포함되어요, 너희 안에.

니느웨 안에 어린애 12만 명이 다 포함되듯이 니느웨는 잘나고 부자이고 배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만약 예를 들어서 아프가니스탄에 그들이 회개해서 다 같이 그 순간 심판이 면제되었다면 아프가니스탄에도 의사가 있고 배운 사람이 있고 못 배운 사람이 있고 다 있지 않습니까? 아프가니스탄에 지금 성장산업이 뭐냐 하면 양귀비 마약입니다. 마약 재배가 성장 산업이에요. 왜냐하면 거기에 고용인원이 11만 명이거든요. 여기 탈레반 자금의 60%가 마약재배에서 나온 수익입니다. 이걸 미국에서 동결시켰어요. 그러니까 탈레반이 보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자기들 테러 자금 대주는 쪽이죠.

마찬가지로 균질성으로 너희라 하는 것은 우리들끼리 잘났다, 못났다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그게 뭐냐 하면 신기한 의미 속에 다 같이 동질하게 균질하게 예속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잘하고 못하고 없습니다. 다 은혜와 평강은 주님의 선물, 그 선물은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만 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선물이 뭐냐. 새로운 공간으로의 초청받음.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니고 새로운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4절 끝에 “신의 성품”에 참여가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10916a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6
게시물9,238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2021 신간소식 '두 개의 구원'사무엘상 속의 그리스도 최지영 21-07-19 244
공지   생방송 관련 관리자 20-09-30 551
공지   주일 오전, 오후, 수요예배 유튜브 생중계 예정입니다 관리자 20-09-02 562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2631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2428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3283
9778   광주강의20211022b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 이하림 21-10-24 4
9777   광주강의20211022a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 이하림 21-10-24 10
9776   5강-요엘 1장 15-20절(자기로부터의 구원)211020-이 … 오용익 21-10-21 40
9775   대전강의 안내 김성은 21-10-21 20
9774   369강-YouTube강의(홀로 살기 이사야 47:8)20211019-… 이하림 21-10-20 33
9773   368강-YouTube강의(끊어진 과거 마태복음 14:10)20211… 이하림 21-10-20 35
9772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b-이근호 목사 홍민희 21-10-19 24
9771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a-이근호 목사 홍민희 21-10-19 31
9770   광주 강의 안내 김을수 21-10-18 38
9769   105강-욥기 31장 24~30절(전과 후)211017 이근호 목사 송민선 21-10-17 27
9768   8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언어에서 기호로)211017… 오용익 21-10-17 33
9767   주일학교 설교 / 물위를 걷다 / 211017 정인순 21-10-17 24
9766   강남 모임 안내 (장소: 양재동, 10. 19. 화) 이명직 21-10-17 24
9765   서울의존강의20211014b 베드로후서1장 4절(문제없음)-… 이하림 21-10-16 18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