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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8 06:53:33 조회 : 61         
서울의존강의20210916b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2.212.44.181)
서울의존강의20210916b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성도 자체가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어렵지 않죠? 거룩한 사람 (聖徒). 그런데 성도가 분명히 거룩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거룩해진다? 이거 뭐 이상하죠. 아니 거룩한 것이나 잘 지키세요, 거룩한 것이나. 주께서 거룩케 하신 것이나 감사하고 확인하라 이 말이죠. 그런데 아니, 모자라, 모자라. 더 거룩해야 돼.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성도 아니라는 티를 팍 내버린 거예요.

거룩을 내 선에서 처리하고 관리하려 하지 마시고 어떤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제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합세한 공간. 주님이 찾아온 공간.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났죠? 그럼 혼자죠. 분명히 탕자 혼자죠. 혼자인데 탕자가 혼자 있을 때 누가 거룩하겠어요?

탕자가 밖에 나가서 뭐 나쁜 짓하고 이걸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탕자가 혼자 있을 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잃어버렸다’고 해요, 잃어버렸다. 상당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혼자 자체는 완결된 거예요.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서, 독보적인 것.

인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악마의 마음을 품고 혼자, 인간이 나아가는 방향이 혼자에요. 집에 손자는 오되 4시간만 있어라, 이게 뭔 뜻이에요? 귀여운 손자가 오되 4시간 뒤에는 도로 갖고 가라 이 말이에요. 왜? 혼자 있고 싶다. 부부도 처음에는 같이 못 있어서 난리를 치다가 부부가 몇 년만 지나도 각방 써요. 각방 쓰기 때문에 원룸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곤란한 문제에요, 방이 하나기 때문에. 그런데 방 두 개만 되면 뭐 단호하게, 아니면 만약 원룸 같으면 시장에서 파는 가리개를 사서 하든지 꼴도 보기 싫다.

혼자 있는 게 이게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잃어버렸다. 아들인 탕자는 뭘 잃어버렸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양은 뭘 잃어버렸다? 목자를 잃어버린 겁니다. 동전은 뭘 잃어버렸다? 그 동전 주인, 처녀를 잃어버린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죠, 불의한 청지기.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이 세상에 지혜 있는 자보다 더 지혜 있다 했어요. 왜냐하면 불의한 청지기이니까 불의하다는 것, 정의롭지 못한 거예요, 나쁜 것=이 세상이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는 떠나야 될 세계를 대변해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인간이 희망을 둘 곳이 아니라는 것을 불의한 청지기가 도리어 떠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지혜롭다고 하는 거예요. 생각 잘 먹었다 이 말이에요. 생각 잘 했어, 생각 잘 했어.

회사를 이왕 떠날 거 회사 공금 횡령한 것, 잘 했어, 잘 했어, 이 불의한 놈아. 이상하게 앞뒤가 안 맞죠? 불의하면 이것은 잘못한 것이 되어야 되는데 불의했는데 잘했어요. 이 세상 자체가 모순을 야기하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 자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늘 나라에서는 의미가 없고 이 세상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는 의미이다. 떠나야 된다.

그러면 그 매카니즘의 원형, 그 과정의 원판은 어디서 왔는가? 주께서 하늘에서 오셨다가 떠났잖아요. 주님이 원형이에요. 모델이에요. 이 땅은 희망두지 마라는 것을 예수님이 몸소 오셔서 떠나는 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자, 그러면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격파됨으로써 작동한다. 이 세상의 의미 모든 것은 모순되었으니까 무너지는 거예요. 이 세상의 의미가 모순된다, 안 맞다는 것은 각자 각자가 혼자 살기 때문에, 각자 각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그 단어의 의미를 서로 자기가 회수해서 가져가버려요.

“자기, 나 사랑해?”, “그래, 사랑해.” 둘 다 사랑이라는 동일한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들어보면 양쪽 다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다른 의미로. 자기로부터 나온 의미가 자기에게 부메랑처럼 회수하는 용도로 단어를, 어휘를, 그런 의미를 자꾸 날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제 성경을 볼 차례지요. 성경에서 모든 인간이 그런데, 인간이 그게 한계인데, 안 그런 사람이 없는데 그럼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나를 제거하는 작업=거룩,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나를 제거해주는 게 거룩이에요, 나를 제거하는 것.

세상은 격파되어야 되지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로 나를 격파해줍니다. 나를 깎아버리죠. ‘나’라는 껍질을 자꾸 떼내어 버리는 겁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는데요. 방금 이것과 관련해서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사전에 방비하는 순간 거룩은 날아간다.’ 거룩은 사라져버리죠. 거룩은 사라지고 그 대신 걱정과 근심이 찾아들죠.

걱정과 근심은 왜 찾아오는가? 그 일이 벌어지면 누가 난처하기 때문에? 내가 당황스럽고 내가 난처하고 내가 몸둘 바를 모르기 때문에 ‘아, 끔찍해. 절대로 그런 상황 오면 안 돼.’ 라고 지가 사전에 몸을 바들바들 떨어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야구 팬이 야구장에 갔는데 꼴찌 하는 한화가 간만에 9대 3으로 이기고 이제 야구 마지막 9회 말 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2아웃에 만루가 되어가지고 자칫해서 홈런 치게 되면 역전될 판인데 그 다음 타자가 나와서 공을 쳤다 이 말이죠. 오래 가요. 멀리 가요. 그럼 한화 팬들이 뭐라고 합니까? “안 돼~ 안 돼!” 2시간동안 햄버거 먹으면서 응원한 게 다 날라가요. “안 돼~ 저 공 잡혀야 돼, 안 돼!” 그 때, “홈~런! 역전!”, “안 돼~”

학생들이 시험 준비할 때 요령 부린다고 내가 준비한 것에서 문제가 안 나와 버리면 안 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마주하고 만나고 부딪치는 모두가 무슨 괴성을 유발하느냐 하면 “안 돼~”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안 돼~”가 되고 사전에는 근심, 걱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심, 걱정.

그럼 뭐가 날라갑니까? 초조, 불안해지면서 뭐가 날라가요? 거룩이 날라가죠. 거룩이 날라가면 신의 성품이 날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신의 성품은 공간에서 제공하는 것이지, 내가 관리하고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거룩은 소유가 아니고 내 자체가 성도에요. 내 자체가 거룩이에요.

이것은 베드로전서 1장에도 나오는데요. 이것은 찾지 마시고 내가 일방적으로 읽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만 뿌려지면 거룩이에요.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와서는 그것이 신의 성품이거든요.

이렇게 근심, 걱정이 되어서 신의 성품이 날라가 버리면 아까 얘기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같이 다 날라갑니다. 다 날라가 버려요. 또 날라가는 걸 붙잡겠다고 흉내 내고 있어요. 덕, 지식, 절제 흉내 내면요, 마귀가 같잖아서 웃습니다. 내가 너 아는데 흉내 낼 게 따로 있지. 그걸 흉내 내나? 뭐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아이고, 내가 확 한번 쑤셔봐? 어디 인내가 되는지.

드라마 같은데 보면 이러한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이런 게 많이 나와요. 재벌 집 며느리로 시집 와가지고 재벌 코스프레 한다고 굉장히 말도 고상하고 점잖게 하죠. 점잖게 하는데 재벌 집에 며느리가 시집오기 전에 알던 남자가, 마약 좀 하는 남자가 와가지고 1억 내면 내가 입 다물게. 이렇게 나올 때 드라마 1회, 2회 되면 벌써 걔 죽었어요. 사람 써가지고 죽여 버리죠. 그 죽인 것을 감춘다고 한 5회까지 넘어가요. 나도 작가처럼 드라마 쓰겠다.

그러면 7회쯤 되면 남편이 그걸 알아요. 나중에 12회 넘어가서 마지막쯤 되면 남편이 지보다 더 나빠. 고게 반전, 고게 재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남편한테 농락당했구나. 마지막에 그렇게 괴롭힌 사람은 어디 가느냐. 나쁜 사람은 교도소 안 가요. 정신병원에 가요. 그게 펜트하우스. 딱 보니 스토리가 뻔하네, 뻔해.

그게 무엇의 실패입니까? 나의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지를 들추어내는 거예요, 이 세상의 드라마들이. 인간의 인내, 절제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껍데기 같은 의미로 그냥 포장만 하는 거예요. 그걸 벗겨버리면 그 안에 인간의 고유한 자기 비밀이 나오고 그 비밀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죠. 난처한 입장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적 비밀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원리는, 거룩을 날려버리는 원리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잃어버리기 싫다’. 이것을 두 자로 하게 되면 ‘홀로’. 네 자로 하면 ‘홀로 살기’. 국민학교 2학년 아이들도 이렇게 삽니다. 홀로 살기. 안 가르쳐줘도 홀로 살아요, 홀로 살기. 그런데 성경에서는 홀로 살기란 잃어버림이라고 했죠, 잃어버림.

그러면 구약으로 가서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찾을 때 무엇을 동원시켜서 찾는가? 그것은 바로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 언약이 바로 거룩이에요. 할례 언약의 특징은 제거하는 겁니다. 무엇을 제거하느냐? 육을 제거해버려요.

할례 언약이란 육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 이게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라는 말이 그거에요.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끊어냄으로 말미암아 남성의 힘으로 생산되는 모든 육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겠다고 선언한 언약이 할례 언약이에요.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때 당시에 모세의 아들을 죽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죽입니까, 출애굽기 4장에서? 아버지 되는 모세를 숙소에서 죽여버리죠, 아들 할례 안했다고. 그럴 때 아내 십보라가 후딱 (아들의) 아버지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인공호흡을 하던지 이래야 되는데 아버지는 놔두고 아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요소가 누락되었는지 그걸 살피다가 할례 언약을 행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할례를 행했거든요. 했으면 그 포피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표피를 모세의 가랑이에다가 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어요.

그것은 왜냐하면, 아까 배웠죠, 촉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낼 때 모세를 하나님과 일직선상으로 보내는 게 아니고 촉매니까 화학방정식에서 화살표 위에다 쓰는 거예요. 촉매라고 해도 되고 또는 아까 한 것처럼 사라지는 매개자, 라고 할 때 여기서 애굽에서 나와서 아들을 만들어요.
모세 (촉매 또는 사라지는 매개자)
하나님 ----------------------> 아들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기 아들, 이 아들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낸다. 모세를 촉매로 해서 보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촉매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세와 아들의 관계 사이에 진짜 모세도 살고 아들도 사는 방법은 여기에 할례 언약이 들어가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이 모세와 아들 사이에 할례 언약이 들어간다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할례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 언약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것이 벗겨졌다,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거룩이고 신성한 거예요. 신성하다는 말이 거룩이라는 뜻이에요. 신성한 것, 거룩 또는 다른 말로 하늘의 요소.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린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 들고 여리고성을 함락했다는 얘기 아시죠? 여호수아 5장을 보게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은 6장이에요.

그럼 사람들이 우르르 가서 여리고성 몇 바퀴 돌고나서 무너뜨리라 하면 될 텐데 5장에서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 하면 길갈이라는 곳에서 단체로, 균질성입니다, 아까 균질성이라 했죠, 균등성, 단체로 모든 남성들은 할례 언약을 해야 돼요.

할례 언약은 더러운 것이 벗겨지는 것. 그 더러운 것을 한 자로 하면 육. 육이 벗겨지는 약속이에요. 계약이에요. 어렵지 않죠? 육이 벗겨져야 이게 거룩이 된다 이 말이죠. 바나나를 먹으려면 바나나 껍질을 벗겨내야 되죠. 자, 두 식품 회사가 있습니다. 바나나 우유는 노래야 된다, 아니면 하얘야 된다. 바나나 우유가 노래야 된다는 것은 빙그레, 하얗다는 것은 롯데에서 나온 바나나 우유, 어느 게 많이 팔렸겠습니까? 먼저 나온 게 많이 팔렸죠.

‘거룩하라’가 아니라 벗겼다는 증거를 가져와라. 이게 바로 거룩이에요. 저, 육 벗겨졌습니다, 십자가로. 이거거든요. 제가 성경 찾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것은 찾아봐야 돼요. 성경에 이토록 어려운 게 박혀 있다는 것이 여러분한테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한테는 굉장히 참 낯설고 신기해요. 골로새서 2장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러면 칼 가지고 자기 몸을 면도날로 째가지고 머리 위에는 십자가를 내고 다리에도 십자가를 내서 한꺼번에 확 벗겨내서 짐승 가죽 벗기듯이 하면 되느냐? 그게 아니고 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면 이것이 바로 육적 몸을 벗는 거예요.

12절에 설명한 게 더 어렵죠. 그렇죠? 사도 바울이 11절 이야기하고 12절 이야기해놓고 우리보고 이해하라고 지금 독촉하는데 이게 이해될 문제입니까? 아니, 너희는 함께 죽었다는 말이 이해가 될 문제에요, 이게?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해 안 되는 게 네가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자기 자신의 육의 행함에 대해서 일체 기대하지 않는 것. 벗겼다는 말은 갔다 버렸다는 뜻이거든요. 속된 것을 벗겨서 거룩한 것을 드러냈잖아요. 그러면 속된 것이니까 쓰레기잖아요. 쓰레기에 대해서 미련 갖지 않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세상의 의미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은 왜 의미 없는가. 내가 세상을 꽃다발처럼 내가 구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필요한 내 세상, 내가 기대하는 내 세상은 나, 이 육에서 나온 거예요. 똑같이 풍경을 보고 쌍둥이가 아무리 똑같이 인생을 살아도 각자 보는 현실관이 다른 이유가 자기가 보는대로 필요한대로 그것을 챙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챙기는 거예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욕해도 경상도 사람 중에서 전라도 사람 욕 안하는 사람 있어요. 왜냐하면 전라도 사람한테 특별한 큰 혜택을 입은 사람 같으면 입을 다물죠. 그렇잖아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이 체험한 것과 체험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래요. 체험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자기의 자아성, 본성을 낳아요. 인간의 본성은 본인이 기억한 것의 집합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믿는다는 이것은 정말...... 그 거짓말 그만 해라, 할 정도로 엉터리 중의 엉터리에요.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일방적이잖아요. 나를 믿는 것이 어떻게 절대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어요? 남들은 각자 자기 믿는 게 있는데요. 그래서 남녀가 둘이 만나서 사랑한다는 말, 믿지 마세요. 사랑을 믿지 마세요. 각자 노림수가 다른데 무슨 사랑을 해요?

제가 아까 안양강의 할 때 했던 예를 여러분들 안 들었으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물론 안양강의, 서울 강의 다 들은 사람은 지겹다, 고만 해라, 하겠지만. 남녀 사이가 너무 사랑한다고 확인된 이상 여자가 넌지시 남자의 마음이 정말 어느 정도인지 떠보기 위해서 여자가 남자한테 “오빠, 나와 같이 죽을 수 있나?”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남자가 그 전에는 사랑한다 어쩐다 하더니 갑자기 심각해져가지고 근육이 경직되면서 얼굴이 긴장되어 가면서 “나는 말이야, 어릴 때부터 내 인생의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거야.” 미쳤나. 내가 너하고 죽게? 이런 뜻이에요, 그게. 지금 4년 간 사귀었던 사랑이 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순간에 다 날아갔어요.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도 결코 지 목숨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김세환이 노래 불러 봐도 찬송가까지 나와도 소용 없어요.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 하면 난처한 일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한테 잘 보여야 나한테 손해되는 짓은 안 할 거라는 뜻이겠죠.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거룩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본성이 우리 본성이거든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니까 숨기 바쁘잖아요. 숨었습니다. 어디 있느냐? 했더니 숨었다는 게 말이 돼요? 주와 함께 있다고 왜 말을 못해?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왜 말을 못해? 끝까지 자기만 챙겨. 벗었으므로, 핑계 대면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부끄러워서 못 나오겠습니다, 이 말이거든요.

할례 언약은 그걸 공략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면 약속의 땅에서 그냥 사는 것은 이스라엘인 내가, 각자 자기가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럼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과 기대, 목표가 뭡니까? 이 땅에 우리가 살았으면 좋겠다. 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니까 살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No! 안 돼. 안 된다. 더러운 인간은 여기 산다, 못 산다? 살 수가 없어요.

약속의 땅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장애물은 뭐에요?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간단해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여리고성을 차지하고 정복한 사람은 누구냐? 할례를 받은 사람이죠, 할례를 받은 사람.

왜 지옥 가느냐? 십자가가 없으니까 지옥 가는 거죠. 육의 몸이 있으니까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럼 천국은 왜 가느냐? 육의 몸이 벗겨졌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육의 몸이. 그러면 죽음에 두 종류가 있겠죠. 육으로 죽는 죽음, 그 다음에 육의 반대가 영이니까 영으로 벗는 죽음이 있습니다.

영으로 벗는 죽음은 자살하면 안 돼요. 이것은 주와 함께 죽는 거예요. 주와 함께 죽는 방법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이미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살렸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는 것,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면 그게 영으로 사는 사람이고 내가 악착같이 살았다, 내가 부지런히 노력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악착같이 살았다 하면 그건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살다가 지옥에나 가라.

약속의 땅이 얼마나 거룩을 강조하는 땅인지를 레위기 19장 23절, 이것은 또 한번 찾아봐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참 애 먹여서 일단 사과드리고... 다 여러분 좋으라고 하는 건데.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레위기 19장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아니, 할례는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 보니까 각종 과목, 복숭아, 자두, 사과, 각종 과목도 할례 여부를 따지는 거예요. 3년 동안 그 과목을 먹지 마라. 그 과목이 나쁩니까? 사과나무가 나쁜 짓 했어요? 아니죠.

무화과나무가 나쁜 짓 했습니까? 그래서 주님한테 저주 받았어요?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은 바로 심겨진 그 땅 있잖아요, 이 땅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버려질 땅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무화과나무.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열매 보려 하다가 열매 없으니까 저주했잖아요. 말라죽었잖아요. 사람들의 관점은 뭐냐 하면 나쁜 짓 했으니까 저주 받았다는 건데 아니,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땅 그 자체가 주님 앞에 버림받을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 땅이 버림받을 땅이라는 주님이 제시한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주님의 피가 이 땅에 흘려졌기 때문에. 이 피는 하늘에서 흘린 피가 아니고 어디에서 흘린 피입니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데서부터 시작해서 그 피, 그 피 속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지상의 인간들이 이 하나님한테 어떤 짓을 했는가가 하나의 녹음 테이프 정보처럼 USB처럼 거기에 다 입력되어 있어요. 그래서 피를 앞장세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나오죠. 주께서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주님께서 뒤끝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입 닦고 그냥 포기하고 가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너희들은 멸망당해도 싸다고 계시한 겁니다. 이것이 제가 수요일에 얘기한 하나님의 현장성이에요. 하나님의 현장성, 하나님의 현실 감각이에요.

참 오늘도 이런 말씀 안 듣는 것 보면요. 사람들이 자기 의미를 포기 안 하고 나는 내가 평생 긁어모은 그 의미 안에서 내 나름대로의 현실을 즐기면서 살래. 이런 식이에요. 내가 뭐가 나쁜데?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내가 뭐가 나쁜데?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남한테 해코지 안 하면서 이만큼 건사한 것도 얼마나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장하다, 훌륭하다, 대견하다. 나는 그렇게 자부하고 싶다 이 말이죠.

오늘 9월 16일이죠? ‘9월 16일, 오늘 이상하게 맑음. 아침부터 나는 착한 일을 했다. 나는 평소에 생각했다.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고 왜 이렇게 착하게 사느냐. 마지막에, 그래 착하게 살자.’ 그게 육이거든요. 그걸 찢어야 돼요. 그 일기장을 찢어야 돼요. 만약에 그 일기장 내가 찢어버리면 그 사람들은 “안 돼~” 그게 사는 보람인데 그걸 찢어버리면 그럼 나는 어디 있는데요? 내가 없잖아요.

그래서 할례 언약이 세례가 된 것은 세례는 함께 죽는 거예요. 함께 죽되 하나를 탈락시키고 하나를 등장시키는 거예요. 나의 육을 탈락시키고 예수님의 몸을 나 대신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몸은 죽었다가 부활한 몸이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사도 바울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냥 언어에 불과하지, 현실로 와 닿지가 않죠. 와 닿지가 않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

우리가 아는 죽음이라는 의미는 육의 죽음, 내 목숨, 헥헥하다가 꼴까닥하는 것 있잖아요, 심정지 되는 것, 그 죽음의 의미만 계속해서 우리가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어제 수요일에 설교했어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무엇을 갖고 있는가. 현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현장성의 결과는 뭐냐 하면 분노하는 거예요. 나는 매일같이 분노한다. 분노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분노해요.

분노한다는 말은 감사가 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아까 감사가 나오는 방법을 이야기했어요. 감사가 나오는 방법은 바로 타인에 의해서 내가 파 먹혀야 돼요, 타인에 의해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남들이 파먹어야 돼요. 그러면 감사대신 격분이 나오죠. 너는 죽었다. 너는 내 손에 죽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손 본다. 죽여버린다, 내가. 가인이죠. 죽여버린다는 말은 내가 일단 살아나야 남을 죽일 게 아니겠습니까. 너는 죽고 나만 살겠다. 나만 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의 노림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사도행전 9장으로 이야기하면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하던 너다. 조를 맞추자. 너는 나를 핍박하고 나는 핍박 당하고. 이렇게 한 조가 되어서 구원 받자. 천국 가자.”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를 괜찮은 인간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핍박한 자로 받아줌으로써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책임도 짐 지우지 않는 주님. 책임 줘봐야 또 핍박할 건데요, 뭐. 뻔하거든요. 책임 줘봐야 잘 해보려 해봐야 또 내가 절제 하려고 하는데 절제 못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그런 환경에 몰아넣어서 못했습니다, 이런 거. 또 또 주님 탓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일체 어떤 책임이나 의무와 어떤 삶의 목적 같은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가 구성된다는 것은 기존에 떠돌아다니는 의미들을 주워 모으는 거예요, 떠돌아다니는. 마치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카트에 담듯이 괜찮은 것을 자꾸 뽑아요. 할 일 없는 재벌 며느리들 보면 심심하다 싶으면 강남에 있는 백화점 가서... 백화점 광고 보면 나오잖아요. 양쪽에 쇼핑백 들고, 한쪽에 다섯 개, 다른 한쪽에 다섯 개 해가지고 그것도 원피스 입어야 돼요. 바지 입고 그런 거 없어요. 원피스 입고 활짝 웃으면서 나오는 거요. 양쪽에 다섯 개씩 들어야 균형이 맞춰져요. 한쪽에 세 개하면 삐딱하게 되잖아요.

자신에게 난처한 입장, 그걸 주님께서 계속 우리에게 주입시킵니다. 난처해라. 난처하고 그것도 방비하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거룩이 사라졌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감사가 없는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요. 돈 있고 자식 잘 되고 다 되는데 이상하게 감사가 어느 날 뚝 끊어졌어요. 이거 뭐 단수조치도 아니고 정전된 것도 아니고 감사가 없어요, 감사가.

자기 지킬 용도로 돌아다니는 의미를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리고성에서 할례란 뭐냐. 할례 받았다는 것은 육이 떨어졌다는 거잖아요. 그럼 육에는 야곱 요소가 있었어요. 야곱 요소가 있고 이스라엘 요소가 있습니다.

야곱 요소는, 나는 형도 이기고 아버지도 속이고 이 모든 재산은 내 힘으로 얻었다. 내가 꾹꾹 참아가지고 이렇게 많은 아내와 자식들과 재산을 얻었다. 이게 야곱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요소는 야곱 요소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 요소를 죽여 버리고 나오는 게 이스라엘 요소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되고 난 뒤에 야곱은 야곱 요소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요청하면서 하나님의 복과 내가 정면으로 맞장 떴었구나. 나는, 하나님은 내 편이고 나의 적은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바로 죄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야곱이 따로 있었어요. 준비된 야곱이 있는데 기존에 육적인 야곱이 계속 이걸 끝까지 가겠다고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제는 그 용어를 그만 쓸려고 해요, ‘불멸의 위신’이라는 말을 그만 쓰고 싶은데 자기의 위신이 있잖아요, 위신. 습관에서 나온 위신, 그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였어. 내가 어떤 존잰데. 이미 남들은 내가 이렇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걸 억지로 고집하는 거예요. 고집하다 보니까 경직되고 긴장되고 감사가 날라가고 거룩에 대한 고마움 다 날라가 버리고 그저 누가 나 험담할까봐 늘 이렇게 초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촌한테 욕이나 먹지. 조카가 이쁘면 가만 있어도 삼촌이 잘해줘요.

자기를 지키다 보니까 여기에 원수, 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가 원수 갚을 잽이 안 된다. 네가 원수 갚을 권한이 없어. 네 육 자체가 원수인데 무슨 원수가 원수를 갚아? 그런 짓 하지 마.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정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정치라는 것은 원수 만들어가지고 원수를 이길 때 자기가 그 정권을 쥐는 시스템이잖아요. 그렇죠? 적이 없는데 정치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것 봤습니까? 죽어라, 이낙연. 죽어라, 이재명. 아니, 그래놓고 공정하게 욕했다 이 말이죠.

로마서 12장 20절,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이 말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산상설교에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이미 네가 바로 나의 사랑이 되었다.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사랑이니까 사랑으로써 그냥 살면 자동적으로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나의 원수마저 주님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죠.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 사랑해보니까, 드라마 제8회쯤 가니까 그게 원수였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죠. 친구 되어가지고 어린 애 공부할 때 도와줄게,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 남편의 숨겨진 여자였어요. 하이클래스 제4회.

주께서 가는 곳마다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켜주는 그런 현상들로 오는데 그게 거룩이 없고 성령이 없어버리면 이건 내가 감당해야 될 문제에요. 그러니까 맨날 주께 원망하기 바빠요.

“좀 조용히 좀 삽시다, 주님이여.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뭐, 뭐, 뭐? 일 있었나?” “나를 못 지키잖아요.” “그럼 네가 살아있다는 뜻이야, 지금? 너 지금 고집 부리고 있는 거야? 나는 너보다 더 힘들었어. 네가 뭔데 지금 포시라워서(호강스러워서) 먹을 거 입을 거 있는 중에도 뭐 이렇게 불만이 많으냐? 더 하면 돈을 전부다 뺏어버리던지 해야지. 가진 게 마땅히 지 건줄 알고 착각해가지고는. 이게 지금 아이 공부 잘 하지, 건강하지. 네가 뭐가 문젠데?” “아프가니스탄 여자들 구박 받잖아요.” 남의 나라까지 신경 다 쓰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당해도 싸요. 미국이 그렇게 도와줄 때 복음을 받아들이던지 말던지 했어야지, 이슬람 두건 쓰고 다니면서 남자들한테 몰살 다 당하게 생겼어요.

자, 할례 언약을 마무리지어야 되는데요. 과목도 따먹지 못한다는 것은 그 땅 자체가 뭔가 이 땅은 애굽에 있던 이 땅이 아니라는 그 티를 내라는 거예요. 그 티가 3년 동안 먹지 않기. 감 안 따고 포도 안 따고 과일 안 따기.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에 있던 그 땅과 이 땅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의 눈으로 보면 SiO₂에요, 산화규소에요. 산소가 된 규소. 성분은 똑같아요. 똑같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할례 받지 못한 과학의 시선이고요. 과학해서 천당 못 갑니다. 집사님, 맞죠? 과학에 관심 있으시니까. 과학에서 십자가 이야기하던가요? 안하죠.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것을 세상의 지혜라고 해요.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로 볼 때 어리석고 과학으로 볼 때 십자가가 어리석어요. 그게 바로 구원을 가로막는 거예요. 과학이 진리인 줄 아는 그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땅 자체가 약속의 땅이 될 때 그럼 그 과일을 먹을 때 먹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해야 됩니까? 신명기 10장 16절,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이건 더 추가된 거예요. 분명히 그 전에는 그렇게 이야기 안했어요. 몸의 할례로 그만 됐다. 이런 것처럼 됐는데 신명기 10장 16절에 보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아, 이건 진짜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랬죠. 오후 설교 제목이 뭐였습니까? <추가적 계시>. 기존의 계시는 내 몸이 다 알아먹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살면 되죠, 하나님? 그럼 나한테 벌 안 주실 거죠? 나 천당 가겠죠? 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계시가 추가되니까. 이 새로운 계시는 누가 가지고 오느냐 하면 바로 이 땅 지층에 박혀있는 선지자의 고난으로 오죠. 올 때 이 기존의 것이 선지자를 핍박하니까 고난이 발생되는 거예요. 새로운 계시는 인간이 뭘 지켰다는 전체를 죄로 규정해서 추가적인 계시가 주어져 버립니다, 추가적인 계시.

그럼 제일 마지막 계시가 무슨 계시입니까? 십자가죠. 그럼 십자가 이후의 계시는 무슨 계시일까요? 십자가의 반복이에요. 매일같이 근심되고 매일같이 웃고 감사하고. 또 돌아서서 다음 날 되면 다음 날 치의 근심, 걱정이 또 찾아오고 저녁쯤 되면 또 은혜 받아서 감사하고 웃고. 이거 미친 것도 아니고. 아침에 왕짜증, 저녁에는 잘못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회개하고. 그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또 마찬가지고 또 마찬가지고.

그래도 그 내면에 흐르는 잠재된 회로인 그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하루 치의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항상 최후의 용서는 앞에 있는 모든 과거 사건을 항상 일괄처리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일괄처리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할례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자, 마음의 할례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설명하기 전에 이사야 52장 1절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아,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할례를 고집하십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는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사도들이......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의도적으로 할례를 안 행했어요. 안 하니까 그들이 뭘 내밀었겠습니까? 이 이사야 52장을 딱 내밀었겠죠.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까지 행하고 예수 믿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할례는 그 할례가 아니다. 이 말씀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사야 52장 말씀을 다 이루어서 예수님 안에서 할례가 완성되었고 완성된 할례를 그냥 이방인에게 선물로 줘버리는 것이다, 선물로.

홈쇼핑에서 요새 뭘 파느냐 하면 8만원 선으로 해서 모든 제사에 필요한 전, 지짐, 튀김을 팔아요. 그 안에 종합 선물, 제사 음식 다 들어있어요. 8만원입니다. 과일까지 나중에 따로 사면 기껏 해봐야 20만원. 집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머리에 땀 닦고 돈 들고 맛없다고 욕먹는 거보다 이건 MSG 들어가서 맛 되게 좋거든요.

주께서 다 이룬 거예요. 주께서 다, 마음의 할례까지. 그거 뺀 홈쇼핑 아니에요. 마음의 할례까지 다 집어넣은 거예요, 마음의 할례까지. 그러니까 우리 육의 마음은 날마다 찾아오시는 성령에 의해서 매일같이 쪼개지는 겁니다. 쪼개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잠재되어 있는 은혜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자꾸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이 모든 말씀은 손댈 것 없이 다 이루었다. 확인시켜 주니까 감사로 수납하죠. 몇 분 가지도 않지만. 왜 몇 분 안 가느냐 하면 주께서 준비하신 사건을 또 일으키거든요. 계속 사건이 일어나요. 이 구멍 막으면 저 구멍 터지고, 저 구멍 막으면 이 구멍 터지고.

여호수아 5장 4절-5절, 그것도 제가 일방적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아까 이야기했지만 길갈에서 할례 행했잖아요. 할례 행하고 난 뒤에 6장에 가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데 5장 끝에 14절, 15절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늘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하늘의 요소, 천사가 등장하거든요. 자, 여러분 물어보겠습니다, 끝부분이니까. 유월절에 천사가 사람 인품보고 죽였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를 무엇을 보고 결정했습니까? 유월절 피보고 했죠.

그렇다면 여호수아 5장 끝에 나오는 군대 장관은 무엇을 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까? 5장에서 할례를 행했잖아요. 할례 행한 자들만이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약속의 땅에는 이스라엘만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이 함께 살기 때문에 그런 조건이 필요한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려면 육은 버리고 영으로 살아야 주와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살아야 주의 영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 장관이 와서 “누구야? 네가 무릎 꿇어.” 하니까 여호수아가 “예.” 하고 무릎을 꿇죠. 그러니까 “나는 너희가 할례 받은 조건 보고 내가 이 약속의 땅에 모든 적들을 물리쳐 줄게.” 이게 하나님께 지시 받은 군대 장관이 해야 될 일이에요.

쓰잘데기 없이 자기 잘난 것으로 천사 일을 주제넘게 방해하지 마세요. 지금도 천사는 십자가 중심으로, 성령께서는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주님의 현실이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령하고 신성하고 거룩하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일괄적으로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이게 얼마나 신기한 능력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10916b 베드로후서1장 3절(신기한 능력)-이 근호 목사.hwp (99.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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