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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9 22:12:41 조회 : 51         
101강-욥기 30장 24~31절(교체)210919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75.223.44.182)
101강-욥기 30장 24~31절(교체)2109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0장 24~31절입니다. 구약성경 789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별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하여 탔구나,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욥이 죽어가는 것을 아주 세세히 일기장처럼 쓰고 있지요. 이 죽음이 외부의 충격이 아니고 자기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특이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햇볕에 타서 살갗이 검어진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열기에 의해서 자기의 껍질을 벗기듯이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뼈도 녹아져 나가고 있습니다. 자기 모든 것이 해체되고 싱크홀처럼 무너져내릴 때, 있음이 없음이 되는 순간, 자기 과거에 했던 모든 것을 욥이 붙들 수밖에 없어요.

‘과거에 제가 이랬잖아요. 이렇게 무너지려고 살지 않았잖아요. 옛날 과거에 내가 있음의 가치가 이렇게 무너져 내리면, 그 있음의 가치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옳게, 정의롭게, 바르게 살기, 그 바르게 살기를 내가 어디서 찾겠습니까?’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또는 사람을 향해서. 이게 같은 뜻이에요. 사람을 향해 호소하는 거나,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거나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요청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24절에 보면 자기가 사람이 넘어졌을 때 도와줬다는 겁니다.

재앙을 당할 때 내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나는 내가 아팠을 때, 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하나님도 잠잠하고, 주위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다 저에게 마음 두지 않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25절에 보면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나오는데 자기가 가난한 것이 아니고 남이 가난해도 자기는 울어줬다는 거예요. 그들이 먹을 게 없어 고민할 때 내가 그들을 위해서 근심해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이건 복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여기서 자기 마음에 혼선과 혼란이 야기됩니다.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그 환란과 혼란 무질서함이 드디어 나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이게 정신적이라면 육체적인 것은 제가 아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게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어떤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재주가 뭐냐 하면 악기를 타는, 요새 같으면 기타를 치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 기타 치는 재주로써 내가 스스로 나에게 나의 처지가 한심스러워서 나를 위로하는 그러한 장례식 노래만 연주할 뿐이고 내 피리는 내 애통한 하소연을 그대로 소리로써 그대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이런 이야기를 한마디로 축약하게 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여,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뭡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뭡니까. 숨 끊어지는 순간이 죽음이 아니죠. 욥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자는 잠에 숨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욥은 마치 바닷물이 땅을 넘치지 말아야 하는데 바닷물이 바다에만 출렁이어야 하는데 땅에 넘어오면 안 되는데 바닷물이, 죽음이라는 바닷물이 욥에게만 특수하게 흘러 넘쳐왔어요.

넘쳐오니까 땅에서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동원되었던 모든 단어와 개념과 말과 자기 행위는 그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현상은 설명되는데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는지. 곱게 죽는 죽음도 있을 건데 왜 나에게는 곱게 죽는 죽음이 없고 마치 오징어 찢듯이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잔인함으로 나에게는 죽음이 찾아오는 건지 생소한 죽음에 대해서 살아오면서 자기가 평생 애썼던 모든 신앙과 지식이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게 된 겁니다.

욥에 이러한 말문이 막히는 이러한 지경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낯선 특이성을 욥이 앞질러서 선지자로서 이 성경에 박혀서 우리에게 죽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욥의 입장에서는 모른다가 되거든요. 죽는 순간을 일반적으로 연출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인생을 살았다. 나는 많이 안다. 하지만 관 안에 누워서 약간 관 뚜껑을 열었을 때 보이는 정겨운 풍경, 정경, 이거는 인간이 살면서 자기가 기껏 알았다고 하는 것의 전부입니다.

인간은 살다 보니 죽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관 속에 누웠다고 생각하셔야 하고 관 속에서 당장 죽어도 되는데 숨 좀 쉬자는 식으로 곧 나에게 덮어질 관 뚜껑을 약간 삐그덕 열었다고 칠 때 그 관 뚜껑과 관 사이에 보이는 정경, 풍경이 있잖아요. 그게 우리 인생이 볼 수 있는 전부예요. 뭐 유럽에 여행 다니고 북유럽 가서 봤던 것들이 그저 사이로 잠시 삐시시 보았던 풍경에 지나지 않아요.

온 세상을 다 알겠다고 지혜를 알겠다고 그렇게 설쳐댔지만, 그것으로는 죽음의 세계를 몰라요. 죽음의 세계를 모르면 어떤 경우냐 하면 바로 나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도 모를뿐더러 나 자체도 누군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사람 같으면 모른다, 모른다, 끝나면 되는데 하나님이 이런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욥에게 죽음 세계에 특이성을 알려준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겁니다.

‘그래, 아는 것부터 하자. 죽음에 대해서 모른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고 아는 것부터 하자’ 그 아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 그게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특이성과 인간의 알고 있는 것 사이에 갭이 욥을 통해서 갭을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가 자기 밥그릇 보고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어디에서 애국가 소리가 들리면서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시간이 왔을 때 개가 자기 밥그릇을 미루고 고개 떨구면서 순국선열을 위해 묵념하겠습니까? 개가?

도저히 있을 수 없죠. 개는 눈앞에 맛있는 거 보면 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 개 못잖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만큼 뭐 모른다고 거창하게 하지 말고 우리 아는 것부터 하자는 거예요. 아는 것부터. 인간은 개만도 못해요. 욕하는 거 아닙니다. 인간은 개만도 못하는 거예요. 개만도. 성경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표범이 자기 피부에 반점을 없앨 수가 없는 것처럼 이미 고착되어있는 우리 욕망과 죄, 나 중심을 인간이 자체적으로 벗어버리고 뛰어나갈 수 있는 재주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온 것은 죽는 순간까지 욥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면서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건 계속 자기가 아는 것을 내가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제가 욥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는데 정답은 이거예요. 교체입니다. 욥은 교체를 몰라요. 다른 몸과 교체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들 사이에 아이디어에는, 그리고 욥에게도 없습니다. 욥에게만 없겠습니까.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죠.

교체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욥은 오늘 하소연에 보면 이렇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이게 가짜라니’라는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나의 죽음을 나에게 미리 알리지 마라’라는 이런 뜻이죠. 그런데 성도에게는 나의 죽음은 물론이고요, 예수님의 죽음을 먼저 우리에게 알려버렸어요. 이순신 장군의 법칙을 넘어서는 거예요. 불멸의 이순신을.

이순신 장군이 불멸이 아닙니다. 주님이 불멸이죠. 나의 죽음을, 나와 상관도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는 거예요. 우리 관심은 뭐냐 하면 추석날 집에 갈 때 차가 막히느냐 지금 그게 관심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은 알려줘도 나에게 소용없다는 거예요. 욥이 끝까지 사수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게 필요한 것만, 나는 챙기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모른다는 것은 일단 챙길 것은 챙겨놓고 내가 챙겼다는 그 기준 하에서 미흡한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잘못되게 살아가는 이유예요. 교체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 이유는요, 낯선 것이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늘 살던 삶은 지루하고 상투적이어서 사는 재미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일단 게워놓고 비워놓고 빈자리 만들고 그 빈자리에 뭐가 들어설 때 새로움이 주는 쾌감같은 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여행을 할 때 한 번도 와보지 않는 장소가 아주 매력적이에요. 이게 거창한 유적지가 아니고 사진으로 본 거 말고 아무 데나 차를 대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고향에서 벗어나서 남들이 사는 곳에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게 꼭 외국을 가지 않더라도 거기에서 은근히 신비로움이 고대가 된다니까요. 여기서 뭔가 새로움을 줄 것 같아. 차 세워놓고 끝까지 한 번 걸어봐? 이런 경험들, 풍경들.

자기 집에 개 있으면서도 남의 집 개를 보면 뭔가 신비로움이 있는 거 같아요. 사람은 과정적인 것에 아주 짜증을 냅니다. 식상하다고 하죠. 같은 음식을 자꾸 해주면 먹기 싫어요. 아무리 튀김이 맛있지만 두 번 먹으면 그다음부터 먹기 싫거든요. 새로운 것이 계속 들어올 때 살맛이 난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상태,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계속 미흡함이 남아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제가 묻고 싶어요. “당신은 이 낯선 동네에 와서 이 볼 것 별로 없는 동네를 보러 왔습니까?”라고 하면 인간들은 진짜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을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고 싶다는 것은 나는 모르는데 무엇을 보고 싶은지 몰라서 답답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러니까 기다리고 싶다는 겁니다.

인간의 심보가 참 희한하죠. 사랑하는 사람이 이야기할 때도 처음에야 좋다고 까불다가 3년 지나고 나면 식상하거든요. 그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창 넒은 카페에 앉아서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것이 좋게 시작해서 나중에 싸움으로 끝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자가 남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뭘 원하는지를 나에게 좀 알려주면 안 됩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남자는 말은 못 하고 속으로 그러죠. ‘점점 미쳐가는구나. 너도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여자는 그러는 거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당신은 알아줘야 이것이 사랑 아니냐고. 이건 억지도 아니고 그냥 미친 거죠. 이게 미친 것을 알면서도 ‘이런 하소연이라도 늘어놓는 대상이라도 되어라. 이 오빠야’라는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래서 요새 남자들이 결혼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요구인 것을 여자가 알아요. 말도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말이라도 해야 약간 시원하겠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도 안 되는 거 듣는다고 여러분이 애 많이 썼습니다만. 교체문제에 대해서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뭘 주었느냐 하면 가죽옷을 줘요. 가죽옷을 준다는 이야기를 아담에게 사전에 한 적이 없다고요.

가죽옷이 뭐냐 하면 옷 바꿔치기가 아니고 몸 바꿔치기예요. 아담의 몸이 가려야 할 몸이라면 가죽옷은 그 가죽옷 자체에서 몸이 나오기 때문에 더이상 가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가죽옷 이야기를 사전에 아담에게 한 적이 없어요. 가죽옷을 그냥 만듦으로 말미암아 아담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겁니다. 네가 기도해도 뭘 해도 가죽옷보다 가치가 없어. 저리가! 교체예요. 교체는 한쪽을 버리면서 교체하는 거예요.

그래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상투적인 주특기인 가사가 나와야 하죠.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그다음이 중요해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게 말이 됩니까?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여자를 비워놓고 기존의 여자보다 월등한 나를 기쁘게 하는 여자가 올 거라고 생각 하면서 일단 있는 여자는 통을 비워버리는 겁니다. 저리가! 식상해서 버리고 비워놓고 아무나 내 편지를 받아 달라는 거예요. 가을편지인데 이 작사가 누구냐 하면 ‘고은’ 이에요. 고은 하니까 딱 떠오르는 사람 없습니까? 여자 건드리고 욕 얻어먹은 사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서’ 그다음에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남성호르몬 영향입니까? 끊임없이 채우고 식상하다고 버리고 또 채우고 버리고 그래서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요? 이게 살아있으면서 보여주는 죽음 현상입니다. 이게 죽음 현상이에요. 안다는 것이 결코 나를 기쁘게 하지를 못 합니다. 소유했다는 것이 가졌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결혼해서 살면서 짜증 내고 결혼 그만두고 싶어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짜증 나고. 이래도 정답 없고 저래도 정답 없고 아무 해결책, 대책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교회를 다니는 거예요. 교회를 다니는 것이 시험입니다. 아, 제가 수십 년간 이런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교회 다니는 것이 시험이에요. 교회 다니는 것이 함정입니다. 함정. 그걸로 뭐라도 된 것처럼 자기를 큰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 교회 다니기예요.

교체가 안 된 상태에서 거기에다가 뭘 뒤집어씌우고 뭘 하고 싶어도 정착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냥 목마른 사슴처럼 계속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주는 거예요. 주께서 줘도 이걸 보고 싶었냐고 하면 ‘아니다’라고 확 갖다 버리고 이거 말고 다른 거 달라하고. 주님이 ‘줬잖아’라고 하면 ‘아니, 이거 말고, 이건 이미 내가 아는 거고, 다른 거 주세요’ 뭘? ‘뭘 달라고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주세요. 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냥 주세요’

이러한 요구는 이러한 기도는요, 무엇이 무너지지 않았느냐 하면 기도하는 나, 나 자신이 교체가 안 된 상태에서 발현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설교 들으면서 제가 지금 하는 문장을 공식으로 하나 외워주세요. 우리 몸속에 들어온 병은 결코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이미 내 속에 들어온 저주는 손으로 못 고칩니다. 그런데 그점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며 내가 새로운 것을 얻을 권한은 없고 내 새로운 권한을 밟아 버리면 나라는 것이 입체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가 밟혀버리면 플라스틱이나 맥주캔처럼 밟아 버리면 납작하게 평면이 되면서 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됩니다. 누구누구의 그림자가 된다고요. 욥이 바로 주님의 그림자예요. 본체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잔혹하게 밟혔잖아요. 주님이 밟혔다면 그 그림자도 따라서 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밟히는 것은 이 땅에서는 패배를 말하는 겁니다. 졌다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지는 것을 과감하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33장 3절에 보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밟히고 난 뒤에 기존에 바꿔치기 전에 나는 ‘나’이고 싶다는 그 야곱이 하나님 만나서 이름이 교체되면서 이스라엘 되거든요. 이스라엘 되면 야곱은 뭐냐, 기존에 내가 그렇게 지키고 싶은 ‘나’라는 야곱은 뭐냐, 뭐 하는 용도이고 물건인가.

3절에 보면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그러니까 야곱이 얍복강에서 주님 만나고 이름 바뀌고 나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형을 만나요. 그런데 전에는 형과 싸우고 하나는 죽인다고 하고 하나는 도망가고 이런 사이였거든요. 그런데 그 형 앞에 일곱 번 절을 해요.

이게 야곱이 에서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고 에서에게 나타난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거예요. 주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앞에 패배케 하시는 지도록 하신 그렇게 교체한 몸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절을 하는 겁니다. 에서가 있다는 것은 같은 레벨의 야곱이 있다는 말이에요. 야곱이 있다는 것은 그 옆에 에서가 있다는 말이에요.

거기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 자기의 옛 모습에 대해서 주께 감사하듯이, 이런 야곱의 몸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듯이, 에서에게 일곱 번 절을 하는 겁니다. 완전한 일곱 번, 여덟 번 안 해도 일곱 번으로 ‘나는 졌습니다. 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 이겨도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 사는 거, 인생 사는 거, 제가 아는 지혜는 그냥 승부욕에 연속이에요.

제가 아는 한 인생이란 뭐냐, 지기 싫어하는 거. 겸손 떠는 것도 지기 싫고, 선교하는 것도 지기 싫고, 고난받는 것도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 짓거리고 교만이고, 모든 나타나는 말씨, 몸짓, 행동, 하나하나가 너에게 내가 지고 못산다는 것을 그대로 욕망으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지고는 못산다는 거예요. 자식 자랑, 손자 자랑, 손녀 자랑, 전부다 ‘이 만큼 했으면 이길 만하잖아’라는 그런 표현들이에요.

지금 욥은 죽음에 지기 싫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 졌어요. 그래서 욥이 아는 죽음을 욥이 체험하지 못하게 하고 장차 십자가에 죽는 처참한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욥에게 체험하게 해서 욥으로 하여금 내 죽음 앞에 내가 졌고 죽음 앞에 졌다는 것은 나는 모른다는 것 앞에 져버렸다는 것이고 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에 절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세세하게 적은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우리 집사님이 글을 올렸듯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요. 살인 사건에. 좀 객관적으로 생각하세요. 지금 내 기분이 어떠냐, 내 만족으로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하고 싶은 그런 것 좀 따지지 말고, 지금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 세상 우주의 중심은 내 문제가 아니고, 나 야곱의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문제라니까요. 주님의 십자가 살인 사건 문제예요.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설교 끝내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와 상관없는데 상관있다고 우기는 그 옛 성품이 문제였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관련되어있는 일이 선지자로서 우리 몸에 일어났다는 그 사실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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