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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4 03:59:56 조회 : 60         
광주강의20211022a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2.212.44.181)
광주강의20211022a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

p.212 위에서 6번째 줄 보겠습니다. “땅의 백성들이 추구했던 정치적 권력은, 평소에 짐승이 작업 해 놓은 업적이다. 즉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는 땅의 백성들이 요구하는 메시아. 주님이 스스로 나타나는 메시아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고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메시아. 그런데 땅의 백성들은 지금 배후에 짐승의 지배를 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이 원하는 메시아. 그 메시아를 땅의 백성들이 원했고 정작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고. 여기서 그 관계가 순조롭게 만날 수 없죠.

그래서 p.212 밑에서 10번째 줄 보면,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 점을 파악해야 돼요. ‘천국가려는 자를 막는 자. 어떻게?’ 어떻게 막느냐? 막는 방법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다, 간단하죠.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이들의 말이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이기느냐, 이 땅에서. 이 땅에서는 천국가려는 자를 막는 자가 이깁니다. 예수님도 졌어요. 예수님도 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제거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제거당해요. 그러면 모든 돌아가는 상황은 아무 일도 없죠. What happened?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 없는 거예요.

복음을 증거 하나 안하나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아무 일 없으니까 인간들은 역사에서 그냥 그대로 역사로, 역사에서 했던 일을 수행하면서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면 그만인 거죠. 아무 일도 없으니까. 역사 자체가 변화될 조짐이 없어요. 아주 고요하고 잠잠합니다.

우리는, 중간에 무슨 일 있었어? 없었어. 그 당시 사람들은 수군수군 거렸죠.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메시아가 왔다고 했던데? 그 사람은 죽었어. 죽고 난 뒤에 끝났어. 뭐 부활됐다는 가짜 뉴스는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짜 뉴스고 우리는 다시 엠마오로 가든지 예루살렘으로 떠나자. 그래서 제자들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거기서 누굴 만났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죠.

역사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오기 전에 무슨 큰 대격변과 이변의 역사가 땅에 일어난다고 했는데 아무 조짐도 징조도 징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은 하나의 이벤트, 해프닝으로 끝났죠. 그냥 해프닝이죠. 역사 자체가 변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는 겁니다. 모든 주도권은 역사한테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럼 묵시란 것,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다 구라이고 거짓말이냐. 여기에 무슨 약간의 일이 하나 첨가가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관한 겁니다, 예수님의 몸. 몸이 부활의 몸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지고 이랬어요. 이 부활의 몸이 등장했다는 것은 바로 역사 위에 묵시세계가 따로 완성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이 부활로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찾아왔는데요. 누가복음 24장 13절,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촌에 가는 겁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몸이 등장해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이죠. 같이 있어도 못 알아봤는데 묵시세계에서 알려주니까 ‘아, 예수님이구나.’ 하고 저녁 먹을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겁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6차선 도로에 헝겊으로 된 인형이 굴러다닌다고 생각합시다. 그 인형 하나가 도로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차에 치일 때 그 인형을 보고 막 가슴 아프고 찢어지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인형은 헝겊쪼가리 뭉쳐놓은 거잖아요. 봉제된 것 아닙니까, 그렇죠? 누가 인형이에요? 예수님이 인형입니까, 우리가 인형입니까?

예수님의 소식이 이렇게 성경 누가복음, 마태복음에 있어도 지금 예수님을 헝겊쪼가리처럼, 인형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말은 그 예수님의 몸과 내 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내 몸이 급선무이고 내 몸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헝겊 쪼가리라면... 어떻게 돼요? 우리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이잖아요. 부활의 몸이 있고 또 우리 몸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몸을 더 중요시 여기겠어요? 당연히 예수님 부활의 몸이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몸은 역사에서 역사로 계속 아무 조짐이 없으니까 지금 자기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묵시의 몸으로 나타났을 때 약간 억지스럽지만 그림을 그려보면, 역사층이 있고 그 위에 묵시층이 있잖아요. 묵시층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면 역사 위 묵시와의 경계선에 묵시가 만들어내는, 초(超)역사가 만들어내는 안감이 깔려요. 안감 알죠? 옷에, 겉옷 말고 안쪽에 안 비치도록 붙어있는 안감 또는 내재면(內在面). 바깥에 속하지만 역사 안쪽에 딱 달라붙어있는 내재면. 이것은 역사하고는 다른, 묵시가 자아내는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역사성(歷史性).

그러면 이 묵시라는 것은 순간 나타나면서 그 접촉지점이 역사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역사성을 드러내면 역사 따로 있고 역사성 따로 있겠죠.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몸을 중심으로 하니까 역사는 하나의 (계)층을 이루는 거예요. 층이라 하는 것은 단층에서 암벽 절단면이 있을 때 차곡차곡 층이 있잖아요. 각자 고유의 층이 있는데 이 층은 고정적이죠, 고정적. 인간들은 고정적인 층을 이뤄요. 자기들 아는 사람들끼리 단단하게 뭉쳐지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성은 층이 아니고 계열이 되는 겁니다. 계열은 고정적이 아니고 우발적이 되겠죠. 예를 들면 요셉의 꿈 같은 것. 자,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묵시성을 갖고 있습니다. 묵시성이 있지만 요셉의 몸을 가지고 애굽의 역사 안에 요셉이 설쳤잖아요. 그럼 누가 봐도 요셉이 설치는 것으로 보이지, 요셉의 꿈이 요셉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하죠.

애굽의 역사에 하나님 보시기에, 묵시세계에서 볼 때, 꿈의 세계에서 볼 때, 예언의 세계에서 볼 때, 언약의 세계에서 볼 때 애굽의 역사(아래)와 묵시층(위) 사이 경계선에 안감이 생기는 겁니다. 이 안감을 역사성이라 합니다. 애굽의 역사는 하나의 층을 이루지만 역사성은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거예요, 계열.

요셉의 꿈이 나타났다는 것은 요셉의 꿈 이전에 야곱 언약이라고 합니다. 야곱 언약의 그 묵시적 요소가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났죠. 애굽의 역사, 인간의 몸의 역사가 층이라면 역사성은 하나의 계열로서 나란히 가고 있는 거예요. 계열로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열. 우발적이죠.

다 아시다시피 야곱 언약의 경우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밤중에 꿈을 꾸죠. 28장 12절에 보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야곱이 28장 12절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사닥다리, 사다리가 등장합니다.

누가 거기서 와르르 쏟아집니까, 야곱한테? 천사가 쏟아지죠. 천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인데, 야곱 몸은 하나인데 천사가 야곱에게 막 쏟아지는 거예요. 오르락 내리락 바빠요. 그리고 창세기 32장에 유명한 ‘마하나임’이라는 게 나오죠. 창세기 32장에 보면 마하나임이 나오잖아요. 32장 2절에,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많은 천사가 한 몸에 집중한다고요, 야곱의 한 몸에. 천사가 야곱에게도 나타나고 에서에게도 나타나고 그러지 않잖아요. 사다리가 누구에게만 집중된 사다리입니까? 야곱에게만 집중된 사다리에요.

귀신들린 청년 이야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청년이 있죠. 청년에게 귀신이 얼마 들어갔어요? 한두 귀신이 들어갔습니까? 얼마나 많은지 숫자가 군대귀신, 이천이 되는지 이만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엄청나게 들어왔죠. 그들이 청년의 몸을 떠나서 돼지한테 들어가니까 그 동네 돼지 한 마리당 하나씩 들어갔는지, 귀신이 둘씩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귀신들이 떼쓰리로 와라락 들어갔잖아요. 그러니까 청년의 몸은 하나인데 몸에서 나왔던 귀신들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숫자는 엄청난 거예요.

묵시의 세계가 어떤 특정 몸을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 천사를 만났을 때 야곱은 역사적으로 자기를 생각했어요. (계)층으로, 역사층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한테는 누가 있습니까? 야곱이 있고 야곱의 부인 둘이 있고 애들 11명 있고 뭐 그렇게 있죠, 자녀 11명. 그 자체가 단단하게 뭉쳐서 한 가정을 이뤘잖아요. 이게 고정적이에요. 이런 가정을,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지켜주리라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천사는? 천사는 왜 야곱을 겨냥했는지 그게 나타나지 않죠.

유명한 창세기 32장에서 드디어 얍복 강가에 24절에 보면 천사가 야곱을 만나죠. 야곱을 죽여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원래 천사의 일은 묵시세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죠. 묵시세계 입장에서 역사라는 것은 없죠.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세계가 펼치는 역사성은 있는데 역사라는 것은 없어야 돼요. ‘없다’보다도 ‘없어야’ 됩니다. 없어야 되는데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지워야 되겠죠. 천사의 기능은 심판이에요. 이 세상 마지막에 추수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사들은 마지막 추수꾼입니다.

지금 인간의 몸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낸 역사는 자기들이 실제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1차 대전 시작이죠. 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제로? 실제로 있죠. 폴란드 유대인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죽고. 실제로 있잖아요. 있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몸이 천 조각으로 만든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그냥 죽어야 마땅한 인형이기 때문에 그래요.

야곱은 자기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천사가 왜 그리 바쁘게 나한테 집중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겁니다. 천사가 와서 나를 도와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 오게 되면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했지...... 천사의 기능이 마하나임이거든요. 마하나임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군대가 할 일은 뭐예요? 전쟁하는 거예요. 적이 있는 거예요. 적을 쳐부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묵시적 입장에서 적은 이 역사가 적이 되는 거예요. 없어야 되는데 인간들이 하나의 드라마를 꾸며놓은 거예요, 배후에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악마라는 묵시적 존재가 했다는 걸 모르고 자신들의 몸이 그렇게 역사를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 몸이 뭔가 살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하루하루 살면 이걸 생명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생명.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에 의하면 이 층, 계열 말고 층은 생명을 얻을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그들이 계열에 속하지 않는 한. 그냥 층에 있는 한.

우리나라에서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 사이에 ‘경’자, ‘신’자를 따서 경신대기근이라는 큰 일이 있었어요. 한민족 오천 년 역사에 제일 큰 재난이 왔었습니다. 그 때 지구의 평균 온도가 0.6도 내려가서 냉해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걸 소빙하라고 하는데 1670년과 1671년 사이에 그 때 우박 내렸고 지진 일어났고 가뭄 일어나가지고 2년 동안 기근이 굉장히 심했어요, 조선시대 현종 왕 시대인데. 이거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에요.

역사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 살아야겠다는 것을 추구한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어디에 딱 붙어 있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붙어있는 게 역사에요.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그러나 성경을 언약적으로 보게 되면 생명은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듯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생명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에요. 거기서 살과 피가 나오니까. 생명의 피가 나오니까.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면 다른 인형은 생명이 없어야 돼요. ‘없다’ 정도가 아니라 ‘없어야’ 되는 겁니다.

생명도 아닌 게 생명 얻겠다는 것에 대해서 유일하게 생명으로 확정된, 완료된 분이 자기 몸 빼놓고 나머지는 천사를 보내서 다 없애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 작업이에요. 뭐 섭섭하십니까, 기분 좀 나빠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했거든요. 야곱은 죽어야 될 몸이고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생명을 가진 자는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소유성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더 이상 뭐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가지겠다는 것은 목숨과 생명을 부지하려고 가지거든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 자체,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 같으면 그 생명과 언약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해있는 성도는 이미 그 자체가 생명에 속해졌어요. 예수님의 몸이 교회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이에요. 사지이고 지체에요.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더 이상 뭘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사는 것은 이 지상에 이 역사세계에 역사 속으로 역사성을 가지고 묵시와 역사 사이에 있는 안감으로써 움직이는 거예요. 마치 요셉이 꿈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움직여나가게 되면 역사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꿈에 의해 움직이는 요셉과 그리고 요셉 말고 여타의 사람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거죠.

아, 인간이라는 것은 생명이 아니구나. 6차선 도로에서 차에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는 그냥 헝겊쪼가리로 대충 인간 모습을 한 그냥 인형 같은 인간 모양을 한 헝겊쪼가리 또는 흙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여기 p.212 8번째 줄에,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인자라는 묵시의 몸, 이 몸은 기존의 몸 따로 있고 인자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인자의 몸은 완전히 이 땅의 역사적 몸을 다 심판해버리고 없애버리죠.

그렇게 되려면 야곱과 야곱의 자손들, 야곱의 후손들은 층이라는 고정성, 내 가정이라는 고정성이 깨어져서 계열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야곱의 두 아내부터 해서 열두 아들까지 그들은 이제 야곱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 언약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돼요. 그것 때문에 꿈에 의해 움직이는 요셉이 아버지, 엄마와 열한 형제들을 계속 살려주잖아요. 너희들만큼은 역사 속에 살지 말고 역사성 속에 살아야 된다.

보이지 않는 나라, 묵시가 역사에 같이 섞여버리면 그것은 역사성으로 나타나죠. 하나의 고정된 층이 아니라 계열로 흘러가게 되는 거예요. 언약적 흐름과 동반해서 계열로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언약 속에 있는 인물들은 천사 같은 존재로 달라져야 돼요, 천사 같은 존재.

아까 천사가 하는 일이 뭐라 했습니까? 마하나임이 하는 일이 군대죠. 이스라엘 일은 뭡니까? 싸우는 군대역할이죠. 천사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면 그 당시 언약의 백성, 성도들도 천사의 일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 땅을 심판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일을 해야 됐어요. 그래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등장했을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등장하죠. ‘네 일 할래, 천사의 일 할래?’ 이렇게 묻는 거예요. ‘천사의 일 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사람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이 흔히 역사 속에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한테 시킨 일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할 때 누가 도와줬어요? 천사가 도와주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니까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묵시적 몸만 생명이에요.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아서 묵시적 몸이 되어야 우리는 생명, 그 몸에 붙어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열두 제자 전부다 도망쳤죠. 다 도망쳤잖아요. 한 사람은 또 배신하고.

그래서 예수님 일은 뭐냐 하면 인간을 천사 같은 묵시적 존재로 바꾸는 거예요. 성도를 천사로 바꾼다 하면 또 오해할 사람 있으니까 그냥 천사 같은 묵시적 존재로 바꾸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지만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천사 같은 존재로 바꾸는 거예요.

그렇게 바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지상에 역사 속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곧 성도라면,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지체니까, 악마의 몸이란 이 세상 성도 빼놓고 모두 다에요. 성도 빼고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악마 몸의 지체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악마의 몸은 역사를 추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묵시를 추구하는 겁니다. 야곱에게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와르르 쏟아진 것처럼. 야곱 몸은 하나인데 천사가 많이 왔다는 말은 야곱이 앞으로 번식할 자손들, 하늘의 별같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제2의, 제3의, 제4의, 제5의 천사 역할들을 다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하나하나가 딱딱 떨어내면 전부다 하나하나가 천사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그러한 단체가 되고 그걸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었던 시대에 개인적인 소망이나 여망은 용납이 안 되죠. 하나님께 허락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어있으면서도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살았잖아요. 이미 다 이루었다가 되고 이미 하늘에 앉혔잖아요, 에베소서 2장 5절-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죽은 자를 살려서 하늘에 앉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아니니까 생명인 거예요. 이미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성도한테는 영향을 못 입히니까. 죽을까? 하는 게 없어요. 이미 살아버렸어요.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움직이니까요. 이미 완료되었으니까.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보면 666나오죠, 숫자 666. 이 666 숫자가 둘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사람의 수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수, 곧 짐승의 수에요. 사람=짐승, 짐승=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666에 속한 자들이 악마로부터 표를 받은 자라 하는 거예요, 표를 받은 자.

요한계시록 한번 볼까요? 666 한번 풀어봅시다, 이참에. 그렇게 기다렸던 666, 말썽꾸러기 666. 이것 때문에 마트 겁나서 못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여기 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잖아요.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에요. 숫자가 단수적인, 하나밖에 없는 악마를 표현하는 동시에 다수의 인간을 표시하는 숫자가 666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악마한테 매여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16절에 보면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절,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자, 매매라는 것은 경제활동을 말하죠, 경제활동. 경제활동을 왜 합니까? 죽어가는 내 육신이 매매를 해야 생명을 얻잖아요.

그러니까 악마에 종속된, 예속된 인간들은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어서 계속해서 누구한테 굴복하고 복종하든지 간에 우선 살고 봐야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살고 봐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땅의 권세에 복종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땅의 권세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내 말 안 들으면 ▭다’ 죽는다, 이거거든요.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조퇴하기만 해봐라.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이게 권력 세계입니다.

나라의, 국가의 권력이 바뀌면 권력은 그 산골짝에 있는 할머니나 외딴 데 사는 사람들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어느 편이냐를 강요해요, 어느 편이냐를. 상 받았던 유명한 영화, <폴란드>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폴란드 어느 유대촌에 독일군이 왔을 때 ‘너희들 우리 독일 편이야, 아니면 폴란드 지하 저항단체 편이야?’ 묻고요. 그들 나가고 난 뒤에는 저항단체가 와가지고 ‘너 어느 편이야?’라고 물어요.

꼭 우리나라 지리산 빨치산 같아. 저 순천, 벌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지역들 있잖아요. 지들끼리 싸우고 가만 놔두면 되는데 꼭 찾아와요. 너 어느 편이냐? 쌀 내놔라. 반찬 내놔라. 한번 확 휘저은 다음에 너 어느 편이야? 네 아들 어느 편에 섰어? 우리 빨치산이야, 아니면 국군 편이야? 이렇게 따지듯이.

권력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너 어느 편이야? 그런데 그 자체가 이미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있는 거예요. 하수인이 되었으니까 이걸 가지고 사람의 수니 곧 666이다. 여기에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다 하는데 이 원형은 바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미 표를 주시고 인을 쳤어요.

아까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왔잖아요. 이게 언약사람들에게 천사를 집중적으로 보내는 거예요. 야곱 세 명, 네 명이 아니라 딱 야곱에게 다 보내서 이름을 야곱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야곱을 이용한 거예요. 야곱을 이용하고 천사들이 와락 달려들면 야곱에게서 열두 아들이 나오겠죠. 열두 아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럴 때 작용하는 것, 주님께서 이미 묵시적 존재로 딱 집어놓은 사람에게 하는 이것을 선택이라 하는 거예요, 선택(選擇). 선택이라는 말이 너무 식상하면 선별(選別). 선별한 거예요. 선별했다 이 말이에요. 선택하고 선별한 거예요.

요한복음 6장 70절-71절, 이것은 다 같이 한번 찾아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주님께서 선택, 선별을 먼저 하셔요.

그 앞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해서 (요한복음 6장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됐고요. 아버지가 택하신 자를 예수님이 찾아가서 ‘너,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널 택했어,’ 라고 고지하고 딱 선택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선별했다, 선택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밥이라는 뜻이에요.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한테 선별당했다는 말은 선별당하지 않은 인간은 그냥 중립이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 빼놓고는 악마가 이미 그 인간들을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악마도 베드로를 어떻게 해보려고 자꾸 삼키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주니까 악마가 베드로는 넘어뜨리지 못하게 한 거예요.

가만 들어보니까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따로 더 센 두 세력이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갖고 노는 거예요. 지금 형편이 이런 형편입니다, 지금. 주님의 통치 방법은 선택하는 거예요. 선별하는 것이고.

이제 어려운데요. 선택을 할 때, 선택하신 분이 악마가 인간을 선택하는 것과 차별화가 돼요. 악마가 인간을 딱 선택했을 때는 무조건 복종시키기 위해서 다루기 위해서 선택했지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선별할 때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는 자라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그 중 하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자로 되어 있죠.

이슬람교나 소위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님의 주권사상은 악마가 선택하는 거예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 전부다 하나님이 예정하사 구원해서 선택했다는 거예요. 뭐가 빠졌습니까? 정작 우리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 속에는 선택당한 자에게 도리어 버림받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선택하는 거예요. 선택하는 자가 선택받은 자한테 버림받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택한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잘 되려고 하는 것, 그 예수님은 본인이 선택했잖아요. 그것은 악마가 만들어낸 예수에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내가 예수님이 선택한 그 요소와 연결되려면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 버림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택과 동일한 선택이라면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에서 누가 희생되어야 됩니까? 내 선택에 의해서 내가 희생되는 요소가 있어줘야 이게 주님의 선택이에요.

그 선택이 주님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의 인치심. 성령이 찾아와버리면 주님처럼 우리가 버림받는 그 코스를 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을까요? 선택한 나한테 내가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선택한 나한테 내가 버림받아야 돼요, 내가. 우리는 믿을 때 잘 되려고 믿죠. 버림 안 받으려고 믿잖아요. 이게 주님의 선택의 원칙과 위배되는 겁니다. 맨날 뭐 다 잘 될 거야.

생명은 예수님이 생명인데 어디 있느냐. 버림받는 데서 생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는 데서. 누구한테? 모든 인간이 악마에 속해가지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수를 다 하거든요.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라 하면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라 하면 삼위일체 믿고 예정론이면 예정론 믿고 십자가 믿으라 하면 십자가 다 믿잖아요. 그런 인간에게 버림받는 그 쪽에 생명이 있어요.

인간은 뭔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 내 선택과 내 결정이 주님의 선택과 주님의 결정하고 딱 이렇게 손가락까지 마주쳐야 되거든요. 다빈치가 <천지창조>할 때 그림을 잘못 그렸어요. 하나님께서 KFC 치킨집 할아버지처럼 나타났을 때 이거 뭐 E.T.도 아니고 아담도 손가락 내민다고요. 아담이 손가락 내밀면 안돼요. 손가락 부러뜨려버려야 돼요. 지는 손가락 내밀 잽이 못됩니다. 손가락 치우고 내가 너를 집었다, 이 말이죠. 내가 선택한 자에게 내가 버림받기 위해서 선택한 거예요. 주님의 선택이 모든 구원의 선택의 원형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어요.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줬잖아요. 꿈을 줬는데 요셉이 그냥 애굽으로 갔습니까? 자기가, 아버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갔습니까? 누가 내몰았잖아요. 그 가정에서, 가정이라는 층에서 몰아냈잖아요. 몰아내니까 요셉에게는 이 고정된 자기 가정이라는 층이 날아간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층에서 버림받으니까 이게 계열이 된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뒤에 예수님의 층, 예수님의 고정된 가족이 왔죠. 동생들하고 엄마가 왔잖아요. 동생들하고 엄마가 왔는데 듣는 엄마, 듣는 동생 기분 되게 나쁘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그들은 나 예수, 형님을 보러 왔지만 그들의 선택에 나는 호응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하는 모든 시도는 죽어가는 나 자신을 어떻게든 수완과 방법을 통해서 살려보겠다 하는 그 짓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인 몸은 버려야 되는데 역사적인 몸을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천국까지 이걸 탁 올려 보내려고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왔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선택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피해버리죠.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문장으로 하게 되면 ‘목사님, 묵시세계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할 때 묵시세계를 알려면 역사의 현실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가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뭘 위한 몸부림이고 무슨 목적으로 몸부림치는지를 똑똑히 생생하게 자기를 봐야 돼요. 몸부림치면서 내놓는 믿음, 소망, 사랑, 선택, 예정, 모든 신학, 교리 전부다 이것은 나를 어떻게 한번 살려볼까, 하는 악마의 표를 받은 666의 일원이에요. 팔에 완장을 차야 돼요. 완장 알죠? 666. 아니면 가슴팍에다 붙이든지.

이 세상은 오징어게임입니다. 모든 드라마는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연장하느냐, 전부 그게 주제에요. 하나 예를 들면 어떤 결혼 안한 아가씨가 자기의 남자 이상형을 스스로 한번 뽑아보죠. 누구나 다 그렇게 하니까 뽑아보는데 남자가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성격 되고 키 되고 돈 되고 건강하고 나한테 반하고. 뭐 빠진 거 없죠? 다시 할게요. 성격 좋고 키 되고, 후손을 생각해서, 돈 많고 그 집안에 병든 유전병 있으면 안 돼요, 골치 아파요, 건강하고 그다음에 나한테 반했나? 오직 나에게만 관심 두고 집중하는 것. (인물?) 요새는 인물 안 봐요. 돈 되고 키 되면 다 넘어가요. 키가 인물을 대표하니까. 키만 크면 인물 못 되도 괜찮아요. 건강미 있으니까.

거기에 비해서 자기는 어떠냐. 성질 더럽고 먹으면 살로 가고 돈 생기면 다 써버리고 자기는 불면증 걸려있고 자기는 자기한테 반해있고. 이게 현실입니다. 이게 묵시세계를 생각하기 전에 이게 현실이에요. 자기는 성질 더럽게 있으면서 묵시세계에 기도하기를, 성격되고 키 되고 돈 되고 건강하고 나한테 반했고 나만 생각하고 그거 찾고 있는 거예요. 왜?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결정하니까, 내 인생은.

여기에 내가 그 남자에게 버림받는다는 요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누가 그렇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요소를 빼는데 있어서는 악마가 그것만 노리고 있습니다. 버림받는 그것만 빼면 내가 용납 다 해줄게. 내가 다 들어줄게.

이런 남자 만나서 잘 되겠다는 말은 계열이 아니고 층, 하나의 지층이 되죠. 단단한 암석층, 단층들 있잖아요. 그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이거 단단하게 해가지고 그냥 세월 보내다가 늙으면 요양병원에 가서 죽으면 괜찮다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 이 내 것이 단단할수록 생명을 많이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 생명은 단단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 이것을 층이라고 했는데 너무 어려우면 이걸 쉽게 하겠습니다. 자기 고유성. 자아성이라고 볼 수 있죠. 10분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11022a 요한복음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hwp (61.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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