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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08:06:04 조회 : 78         
광주강의20211126a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14.199.142.12)
광주강의20211126a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p.213 밑에서 6번째 줄부터 하겠습니다. 제목부터 봅시다. “언약과 주체의 발생”. ‘언약과 주체’에서 이 둘 사이에 ‘언약과 인간’이라 해도 되는데 왜 ‘주체’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언약의 안목에서 볼 때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과 주체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죄인으로 있어야 되거든요. 죄인으로 있는 것이 옳거든요, 언약적 입장에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죄인으로 있는 게 옳은데 인간들은 자기를 주체로 변장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류(類)가 되죠, 집단. 전체를 보편화시킬 때 인간류 또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는 무엇이 강렬하냐 하면 개별성, 개인성이 상당히 강렬해요. 신처럼 되겠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격화. ‘자아의 신격화’ 이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신이 되려면 신이 될 만한 내용들은 다 끌어 모아야 되겠죠, 신이 될 만한 것. 두 가지가 있으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고 또 하나는 장소에요. 힘과 장소가 있으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개를 한번 합쳐보세요. 힘과 장소가 있다는 말에서 장소는 내 장소에요, 내 장소. 내 장소가 남한테 침범을 받지 않으려면 힘으로 중간을 둘러쳐야 되겠죠, 힘으로. 그래야 나는 이 장소 안에서, 뭐 다른 장소까지 욕심낼 필요 없지만 내가 있는 이 장소만큼은 내가 신으로 살고 싶다. 이게 바로 주체가 겨냥하는 것 또는 바라보는 것이고 이런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 또는 주체는 역시 개인이에요. 여기서도 개별성이죠. 언약의 주체는 이름을 갖고 있어요.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또는 주의 이름. 언약에는 언약의 실시자가 따로 있다는 뜻에서 언약과 하나님의 이름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같이 있어요.

언약이 있는 곳에 주의 이름이 있고 주의 이름이 있으면 이 땅에서 주의 이름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언약을 줌으로써 ‘나 여기 있어’라고 주의 이름이 자기 존재성을 드러내요. 언약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제 어려운 것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언약의 주체에서 찾아올 때 주께서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어떤 이름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름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힘과 장소를 해놓고 거기다가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인단 말이죠. 이름은 개인적이에요. 이름 하나에 두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요. 한 사람당 이름이 하나씩입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하면 개인, 개체는 이미 독점하고 있어요. 우리 주님이 독점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쪽(인간 쪽) 전체 이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체 이름이 없는 것으로 하는 거예요. 이름이 없는 것으로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름이 인간에게 찾아올 때 동물로 와요. 동물의 특징은 이름이 없습니다. 동물의 특징은 이름이 없어요.

동물은 선악과를 안 따먹잖아요. 그러니 동물은 신이 될 필요가 없죠. 신격화 될 필요 없잖아요, 동물은. 인간에 아담에 그냥 붙어사는 거예요, 동물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힘, 자기만의 장소가 필요치 않습니다. 끌어 모아봐야 동물은 자기 이름 댈 곳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이름이 있는 곳, 인간이죠, 아담에게 빌붙어 있는 거예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올 때 동물로 찾아와요, 동물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월절의 양. 동물로 찾아오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할 동물을 줘요. 거기서부터 거룩함과 부정한 것이 시작이 돼요.

창세기 7장에 노아 홍수가 일어나죠. 홍수 날 때 방주를 만드는데 그냥 들어가지 않고 두 부류로 분류시켜서 방주에 들어갑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 방주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만들 때 거룩과 더러운 것을 분류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필연적인 하나의 요건이 돼요. 언약을 구성하는 요건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은 방주 안에 있는 동물을 보고 알죠. 홍수가 나버리면 다 죽어버리잖아요. 그럼 분류 자체가 의미 없어요. 소나 돼지나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면 누가 거룩했지? 누가 더럽지? 가 분간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방주라는 그러한 창조, 피조세계의 맛보기를 본을 따로 떠가지고 그 안에서 왜 노아언약이 주어졌고 왜 홍수가 주어졌는가, 왜 심판해야 됐냐하는 이유를 그 안에 같이 실어 담는 겁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왜 심판을 했느냐. 더럽기 때문에 심판한다면 애초부터 언약이 필요 없어요. 그 자리에서 다 죽이면 되니까. 그렇잖아요. 방주가 뭐 필요합니까? 아담 후손은 다 더럽고 인간 죽으면 인간 곁에 있던, 인간이 이름을 줬던 짐승도 인간과 같은 운명이라 해서 다 몰살시키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언약을 줬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더럽지만 다는 더럽지 않다는 것을 하늘에서 언약을 실어서 내가 새로 개시할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물 심판 받을 때 인간들은 홍수가 넘치는 것을 보고 잠시 잠깐이나마 물에 잠길 때까지는 물 심판을 경험했을 것 아닙니까. 경험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우리가 뭐가 잘못되어서 심판을 받지? 그런 생각이 들 거죠.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심판받는가. 그것은 본인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런 원칙이 있어요. 모를 때는 처음으로. 모를 때는 처음으로 가면 돼요, 모를 때는 처음으로. 그럼 처음, 스타트, 시작은 어디 있는가.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창조의 시작이 언약이라는 그러한 공간 안에 담겨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실시자가 이름을 가진 분이에요. 그 분이 주의 이름이라고 말해도 되고요. 이 내용대로 하면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분이 언약을 실시하고 처음 상태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겁니다.

왜 심판 받아야 되는가. 거룩이 돋보이기 위해서. 거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술사가 마술 주머니, 상자 안에서 손을 움직이다가 다른 건 놔두고 비둘기 하나가 쏙 올라오잖아요. 비둘기를 돋보이기 위해서 마술 상자가 필요하듯이 방주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거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거룩이 거룩 되게, 거룩의 취지를 자신의 온 피조세계에다가 전파하는 거예요.

그럼 거룩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분류가 되어야 됩니다. 무엇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세계에 들어오지 못할지. 아, 이게 더럽기 때문에 못 들어오는구나. 더럽기 때문에 못 오는 거예요.

여기서 귀찮겠지만 성경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69편 27-28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전도를 하는 게 아니고 쉽게 세 자로 이야기하면 ‘오지 마’. 오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지 마! 훠이, 오지 마!

뭔가 적극적으로 전하는 게 아니고 강력한 수비 태세를 누가 취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비유로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 한번 봅시다. 28절에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생명책이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책이 되는 겁니다. 생명책의 취지를 높이기 위해서 악인과 함께 생명책에 기록시켜놓고 기록된 그것이 생명책의 완성이 아니라 서서히 생명책은 그 기록된 시점으로 이제는 진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누가 생명책에서 탈락인가를 생명책을 중심으로 하면서 제거해나가는 거예요. 뭐라고, 세 자로? 오지 마. 들어오지 마. 오지 마. 여기 오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의인 곁에 두면서 어떤 이유를 달아서 강제로 어떤 빌미와 핑계를 다 대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죄인을 ‘들어오지 마! 오지 마!’ 하는 식으로 후쳐내고 쫓아내는 기능이 생명책 자체 내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할 때 이걸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잊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강의 완전히 다 무너져요.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 하시죠. 이름 있는 분이 일할 수 있는 자격자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하죠.

그러면 우리는 ‘오지 마!’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름이 없죠. 이름이 없으니까 ‘오지 마’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에게 갈 때에 우리의 이름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겠다는 조건 하에 이름 없는 동물을 우리 앞에다가 딱 제시하는 거예요, 동물을.

shofar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팔이에요. 숫양 뿔을 잘라서 나팔을 만든 게 소팔(쇼파르)입니다. 이 소팔이 뭐냐 하면 여리고성 돌 때 양각나팔을 불었잖아요. 이것은 공동체를 한 곳에 집합시키는 하나님의 소리에요. 그런데 그때 무엇을 악기로 분다고요? 동물의 뿔로서 양의 뿔로서 그걸 부는 겁니다, 양의 뿔로서.

그 시작이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제사 드릴 때 그 옆 수풀에 숫양이 있었잖아요. 그 양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름 없는 양이 이름 있는 우리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난 이름 있는 너희하고 상대 안 해. 이름 없는, 내 쪽에서 언약대로 죽여준 그 양과 나는 대화할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약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크게 쓸게요. 색다르게 녹색으로 써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거든 죽음 안에서 만나라’ 이 뜻이에요. 하나님을 만나거든 죽음 안에서 만나라, 죽음 안에서.

이것은 또 다른 색으로 써볼게요, 녹색 잘 안 보인다 하니까. ‘잠은 직전까지 하던 일을 다 놓을 때 놔 버릴 때’ 이걸 잠들었다 하는 겁니다. 잔다고 해서 잠 오는 게 아니잖아요. 자면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는 그것도 아직까지 잠 아니에요.

잠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딱 잠드는 그 순간, 잠들기 직전까지 했던 것을 순간적으로 다 놔버립니다. 그러면 진짜 깊은 잠에 들 때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하거나 명령하거나 가할 수 있습니까? 없죠. 이게 바로 주님께서 맛보기로, 시식코너 알죠, 맛보기로 매일같이 집어넣어준 잠입니다. 죽음입니다.

이게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요. 시편에 보게 되면 나와요. 시편 73편 20절이요.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죠. 꿈이 무시되니까 그 간격만큼은 누가 누구를 무시해요? 본인의 시간을 본인이 무시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계속해서 연속성, 인간이 자기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다. 하나다. 나는 끊어짐이 없다. 이게 계속 되어줘야 내가 뭔가 나는 나라고 남한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이런 이야기하면 참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렵지만 광주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실력들이 있기 때문에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한번 길게 쓸게요. ‘나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조건 하에 언약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지 존재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아예 오지 마! 저리 가! 사람이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자기 구원을 인식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은 곧 신격화입니다. 다시 한 번 쓸게요. 자기 신격화의 조건은 힘과 장소의 결합이에요. 내가 있는 그 장소가 천국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는 힘만 둘러차면 나는 영원히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영원히 신이 되는 방법이 뭐 있겠어요? 천국 가면 완전히 천사와 같은 신인데요. 뭐 신바람 났죠.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어떤 사람이 이런 가사를 썼어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갔는데 매직, 매직, 몽키 매직이에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갔죠. 나무는 뭡니까? 지 나와바리, 장소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까부는 거예요. 아주 요술을 부리죠. 몽키 매직. 아, 노래 막 부르고 싶은데. 원숭이 나무에 올라가~ 이박사가 부르는 노래 아닙니까? 이렇게 촐싹거리고 깐족거리는 거나 교회 교인들이 깐족거리는 거나 똑같이 원숭이죠. 이름도 없는 짐승이 하는 짓이에요. 나무 하나 주니까 나무 좋다고 거기 교회 가서 노는 거예요. 갑자기 이박사가 고마워지네. 진짜 박사인가.

나의 존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조건 하에 언약으로 들어옵니다, 나의 존재를. 만약에 너라는 존재를 우기면, 나는 천국가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을 유지한다면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오지 마! 저리 가! 오지 마! 훠이 훠이.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죽음의 징후들을 밤마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꿈에 집어넣은 주의 기능을 무시하고 마치 꿈 안 꾼 것처럼 마치 죽음이 나한테는 삽입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꿈처럼 죽음처럼 삽입될 때 그 인간은 이제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고 그 죽음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나를 죽게 하신 분이, 죽음이 나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일반 인간들은 다 꿈을 꾸고 잠자기 때문에 잘 때는 손을 놓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는 그게 그냥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앞장 선, 언약이 들어있는 죽음이 우리 인생에 삽입되어 들어올 때에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평범해 보이는 모든 일상이 무엇으로 전환되느냐 하면 언약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주님의 장소로 이게 전환돼요. 이게 내 장소가 아니고 내 힘이 아니고 주의 힘이 들어와요. 만약에 내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주의 부활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힘이 들어와 버리면 그 장소는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나의 구원의 자리가 아니고 그게 내 자리가 아니고 이게 주의 자리이고 하나님 나라에요. 내 나라가 아니에요, 그게. 내가 기대했던 내 나라가 아니란 말이죠. 기대했던 내 나라, 내 천국은 어젯밤 10시 52분에 죽었어요. 잠들 때 죽었어요. 우리는 기껏 그것밖에 안됩니다. 그냥 꿈같아요. 시편 73편 20절 말씀처럼 그런 겁니다.

시편 78편 39절 보겠습니다. 이것은 마음 같으면 다 같이 읽어보자 하겠는데 누가 대표로 한번 읽어보세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이라. 바람은 이름을 붙이면 안 되죠, 멈출 수가 없는데. 이름을 딱 붙이는 것을 고정화라 하는데, 고정화될 수 없는 대상은 이름 자체가 사치입니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있죠.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와서 하나의 몸짓이 되었다. 또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에. 보통 이름은 부모가 불러주잖아요. 부모가 지어주잖아요. 하지만 의식하는 것은 지음 받은 본인이 본인 이름을 지키려고 해요, 본인 이름을. 자기는 바람이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주님께서 이걸 해체시켜버립니다. 너는 이름붙일 자격도 못돼. 이름도 너한테는 과분하다는 거예요. 바람 주제에 이름을 왜 붙여, 바람 주제에. 어디 갔나? 없어졌네. 이게 바람이거든요, 바람. 바람 같은 남편을 한번 만나봐야 돼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요. 잘 있나? 아는? 자라. 해놓고 그 다음날 다른 데 소리도 없이 갈 때 바람 같은 남편이라 하죠. 그럴 때 옆집 아줌마가 댁의 남편 이름은 뭡니까? 우리 남편 이름은 바람이어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다시 말해서 이름 붙일 가치도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p.213에 ‘언약과 주체의 발생’이라 할 때 뭔가 수상하죠. 언약 안에 유일한 주체가 들어있는데 그 바깥에 따로 인간이 주체노릇 한다는 것은 악마가 주님을 흉내내가지고 인간들을 전부다 악마가 “예수 당신만 신이야? 얘들도 전부 신으로 다 만들어줄게.” 하고 악마가 인간을 신으로 다 만든 거예요.

신으로 만들었다는 증거가 뭐냐? 이것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내 명예와 내 체면과 가치가 유지될 내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내 이름을 위해서. 싸인하고 내 시그니처,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나는 바람이 아니어야 해요. 나는 영원히 고정되어야 돼요, 이름과 더불어서. 나는 이름의 내용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영원하여라.’ 그거 주장한다고 이름이 있는 겁니다. 오지 마!

이름이 있으니까 그때부터는 이름의 가치, 의미의 경쟁마당에 들어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악마의 어떤 농락에 빠졌는데 나는 누구와 상대하느냐. 바로 남과 상대해요. 이게 모든 파멸의 원인입니다. 인생이 비극적인 이유가 남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남이 있기 때문에. 비교대상인 남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바로 남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나 저 사람 되고 싶어.’ 하는 순간 인간은 결핍을 느껴요.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영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같은 고등학교 나왔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살고 왜 난 못 살아. 이렇게 남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여기서 지옥입니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다.’ 이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이야기했어요. 남은 지옥이다. 문제는 그 지옥이, 그 남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남이 내 안에 들어있어서 나를 지옥으로 변화시킨다. 저 남만 없으면 나는 천국인데 남이라는 저 의식 때문에 나는 날마다 편안할 길이 없는 거예요. 고통이에요. 남처럼 되고자 자유를 내가 마음껏 발휘하면 할수록 그 자유가 지옥으로 변하는 동력, 에너지를 공급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과 나의 자율성이 나로 하여금 더욱더 지옥 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그걸 보고 주위에 유명한 폴 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라는 목사요 철학자가 있었는데, 사르트르의 후배나 제자쯤 될 거예요. 그 사람이 사르트르를 보고 한 마디 했어요. “왜 네 인생에는 은총이 없느냐?” 그걸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네 인생에는 이것이 없느냐. ‘선물’이 없느냐.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선물을 받았다’가 아니에요. 내가 나 된 것은 내 자체가 선물이에요, 내 자체가. 지금 눈이 좀 안 좋죠? 주의 선물입니다. 내 자체가 선물이에요, 내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남과 나, 이 고리, 이러한 형성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인정 안 해요. 왜냐하면 이 선물의 원천은 아버지께서 아들 자체를 선물로 주는 거기에서만 선물이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선물 받을 자격도 없고 선물을 요청할 권한도 없고 선물을 기대할 아무런 근거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바람인데 뭐 바람에게 무슨 선물이 있습니까?

그래서 강의를 다시 하게 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동물을 앞장세워서 동물하고 하나님하고 언약을 세웠습니다.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동물을 앞장세워놓고 그 동물에서 동물 기능을 갖고 있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거기서 발생하도록 언약이 훅- 바람을, 언약 자체를 주의 이름께서 고무풍선에 바람 불듯이 훅 불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공기를 훅 집어넣어서 풍선이 볼록하게 되었다면 그 풍선 안에 들어있는 모든 바람과 공기는 누구 거예요? 그건 누구 겁니까? 그 자체가 주님의 선물이죠. 그 자체가 언약의 선물인 거예요.

그 선물 안에 주께서 창조했던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챙기고 더러운 것은 오지 마! 밀어내는, 밀어냄으로써 거룩을 돋보이게 하는 그 창조의 계획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 소리는 애초부터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나에게 나라는 것을 붙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과 주체의 발생’에서 언약에서 나온 주체와 악마가 배후에서 작동해서 나온 주체라는 영역과 대판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집니다. 뭐 코로나 변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아프리카에서 코로나 변이 생겼죠. 2년 간 고생했으니까 사랑의 하나님 살아계시니까 이제는 숨 좀 쉬게 해주겠지, 했는데 더 센 변이가 와버리면 다시 봉쇄. 언제까지? 기약도 없이. 인간에게 제일 절망적인 것은 희망이 없다는 거죠. 만약에 변이된 코로나가 한 3년 되고 5년 간 감옥생활 한 뒤에 이제 숨 좀 쉬겠지, 했는데 새로운 변이. 이젠 7년. 이렇게 나오면 내가 사적으로 갖고 있던 모든 계획은 다 무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계획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바람 부는 대로 바람 불면 되지. 도대체 그 계획 세운 거 하려면 칠백 년, 천 년 살아야 돼요? 기껏 짧은 인생 살면서 어쩜 그런 계획들이 많은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계획이 그냥 말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바람을 훅 불어서 실제적인 자기 백성, 언약의 백성을 실제로 이 땅에 출현시켰습니다.

이제 두 번째 중요한 것, 출애굽기 19장 17절 보겠습니다. 상당히 짧은 거고 보기에 굉장히 간단해보이죠.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그렇게 되어있죠. 이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받기 위해서 산 기슭에 선 겁니다. 율법을 받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내 손에 달리지 않는 운명적인 것, 필연적인 것이라고 되는 거예요. 율법을 준다는데 안 받을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만약에 율법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에게는 오직 죽음밖에 없어요. 저주밖에 없습니다. 무슨 수로 율법을 지킵니까? 못 지키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수풀에 갇혀있는 숫양을 이삭대신 바치라 할 때 우리가 숫양의 마음, 숫양의 입장이라 봅시다, 숫양 입장. 숫양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친구들 다 도망갔는데 자기 혼자 수풀에 걸렸어요. 2년 코로나 겪었으니까 3년째는 자유를 얻겠지 했는데 갇혀 있다가 갑자기 여기서 아브라함이라는 어떤 인간이 등장해서 자기를 잡아가지고 자기 아들을 죽여야 될 그 제단에 자기 자신을 여기다 놓고 그냥 토막내버립니다. 그냥 죽여 버렸어요. 이게 율법을 강제로 수납해야 될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방주 만들 때 노아는 신났죠. 야, 이거 방주 뭐 널널하게 여덟 식구 더 들어가겠다, 동물하고. 신나고 재밌고 안심 놓고 그렇게 했는데 방주 만드는 것도 언약이지만 율법을 받는 것도 언약이에요. 그 언약이 바로 모세언약이라는 겁니다.

율법의 기능은 파괴입니다, 파괴. 파괴시키고 파멸시키는 거예요. 파괴시키고 파멸시키는 그 하늘의 무기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넙죽 받든 우리가 억지로 받든 무조건 치고 들어오는데 안 받을 재주가 없어요.

율법의 기능이 파멸, 파괴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게 되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옥경이한테 묻고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어요. 신분 조회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 신분 조회는 나를 쳐다보는 타인이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본인이 원해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외형적인 그러한 과거의 내력을 조사하고 탈탈 털지만 내가 누군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거 수상합니다. 알아서 뭐 하는데? 키가 어떻게 되십니까, 몸무게는 어떻게 되십니까? 그럼 설교시간에 또 뭐 걸어다니는 해골 이야기하려고?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아이고, 미안해서, 오목사님......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나. 그런데 오목사님 한 사람 뿐만 아니고 여러 사람이 된다는 것에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곳곳에 많아요. 대전에도 있고 있어요. 대전에는 앉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까 얘기 다시 합시다. 지금 모든 인생이 괴로운 것은 남을 의식해서 나를 구축해야 된다는 거예요. 따로 구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사람 따라서 타인에 따라서 내가 옷차림부터 다 신경 써야 되는 이것 때문에 인간은 지옥 같은 겁니다. 그러지 말고 이왕 지옥 갈 거 내가 안 찾아가도 지옥인데 찾아와서 아예 너 자신을 없애주마. 어찌 고맙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예 없애줄게.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어요.

율법이 나를 점령한 거예요. 저벅 저벅 저벅 군화발로 들어오듯이 나를 점령한 겁니다, 율법이. 나를 접수한 거예요. 그게 언약의 특징입니다. 방주가 누구를 접수했어요? 노아 식구 여덟 명을 접수하듯이 언약의 특징은 그냥 침략꾼이에요. 침노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침노해서 점령을 해버리면, 난 뭐 나중에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하는 그런 계획조차도 짓밟아버려요. 그건 너라는 게 있을 경우에 나오는 상상력이고 그 상상력에 내가 기분 맞출 그런 여력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그런 기분이 아니야, 지금.

그냥 침략해서 그냥 접수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구원 받아야 시편 78편 39절의 말씀이 내 안에 실현되는 겁니다. 나는 바람이구나. 나는 굳이 내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조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형편이에요.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형편인데 여기에 대해서 세상 주체는 어떻게 만드는가. 악마가 배후에서 작용하는 세상의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무한한 현출(現出), 어렵죠, 무한한 현상들의 계열. 짜맞추기 하는 거예요.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역사가 필요하거든요. 무한한 일어났던 기억들, 내 생각들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들을 무한하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무한을 집어넣었는데 그래봤자 나온 결과는 유한이에요. 출생에서 죽음까지 유한입니다. 인간의 주체는 유한이에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계 밖에 뭐가 있는지를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주체를 우깁니다. 우긴다는 말이 맞아요. 자기 바깥에 뭐가 기다리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기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요한복음 5장 26-28절 이야기했죠. 다시 설명드릴까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잖아요,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그러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도 동질성을 유지하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었던 주님을 부활시켰잖아요. 그러면 주체의 동질성은 모든 인간은 배제되고 오직 주체가 주체값을 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당사자 그분뿐이에요. 그분뿐이에요. 그분이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계열, 주의 이름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죠.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은 네 이름은 포기해라 이 말이죠. 네가 인정받는 조건하에서는 주님께서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해요. 주의 이름이 하는 작업에 흡수, 통합되어야 되는 겁니다. 흡수, 통합되어야 돼요.

여러분, 이 기업 이름을 압니까? 한솔기업. 광주에서 공사하다 무너진 기업이 한솔기업이잖아요. 그 한솔기업은 건물 부수는 전문이거든요. 그럼 5층 건물을 봅시다. 5층 건물은 처음에 부서지지 않을 때는 1층, 2층, 3층, 4층 다 구분되어 있고 5층 내에도 방마다 다 구분되어 있고 과장실, 사장실 다 구분되어있죠. 그 구분된 구분요. 각자 주체가 있잖아요.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한솔기업이 들어가서, 그것도 너무 성급하게 무너뜨려서, 물 뿌려가지고 그냥 기둥부터해서 다 무너지게 만들어버리니까 그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쓰레기 더미 안에 구분을 어디서 찾아요? 못 찾죠.

인간들의 구분은 바람 같은 거예요. 일시적인 겁니다. 이게 무한하지 않아요. 오래 안 갑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맛있게 음식 먹으니까 먹어라, 다. 먹으면 다 똥 되는데. 한솔기업입니다, 한솔기업. 먹으면 다 똥 되는데 뭐. 그렇다고 똥을 먹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일단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구분해야죠.

주님께서 이 세상에 부정한 것들, 더러운 것들, 천국 오지 못하는 것들, 생명책에 탈락될 사람들을 계속 생산하는 이유가 짝이 있어줘야 주님의 주체에서 나오는 자기 백성을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율법은 그냥 과격한 선물 같은 거예요. 그냥 주시는데 다 죽여 버리죠. 그러면 죽일 것 같으면 폭탄이나 주지, 율법을 왜 주느냐. 율법에 보면 조건이 있어요.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못 지키는 자는 저주 받는다’라는 것을 주셨거든요. 그럼 여기서 이 저주를 안 받고 복 받기 위해서 인간들이 자기 주체의 능력을 발휘하겠죠.

자, 인간은 장소를 원하고 장소는 내 선한 능력, 나에게 복이 되는 힘이 있을 때 내 장소가 확보된다는 식으로 지키겠죠. 지켜봤자 뭐에요? 저주에서 저주 아닙니까? 그렇게 해줘야 복이라는 것을 못 따낸다는 말은 ‘나 자체가 처음부터 이게 문제가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하나의 기능이 율법 기능입니다. 모세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것은 로마서 3장에 보면 그들로 하여금 입을 틀어막게 하기위해서이다. 말 하지 마. 글도 쓰지 마. 글 쓰세요. 난 아무 글도 못 쓰겠다. 아무 글 쓸 자격도 없다는 글을 쓰세요. 설교 하세요. 입 다물고 아무 소리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설교 하세요. 난 설교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숙성되어야 돼요. 그 때가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망할 때까지 숙성되어야 됩니다. 숙성될 때까지 우리는 10분만 쉬면서 또 숙성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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