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01-13 08:47:19 조회 : 130         
1강-미가 1장 1-5절(밟히기)220112-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1강-미가 1장 1-5절(밟히기)22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1장 1-5절까지입니다.

미가 1:1-5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찌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또 체계를 갖고 있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묵시, 미가가 받은 묵시 또는 예언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체제를 갖추고 있는가는 전혀 모르게 되어있고 기껏 안다는 것이 자기네들이 눈에 보이는 인간세상이 어떤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가, 온종일 평생토록 거기에만 몰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고 있는 하늘의 것이 땅에 등장하는 계기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에 하나님께서 손을 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하시고 예언대로 그들의 나라가 멸망당할 때 비로소 그때는 ‘아, 이거 하늘나라 체제라는 게 따로 구성되어 있구나.’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아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가 하나님 믿는 백성들이 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겁니다.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여호와께서 처소에서 나온다는 것은 여호와의 처소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요. 나와서 그냥 유람하실 겁니까, 뭐 구경이나 하시고 관광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이 땅에) 강림하사” 오직 땅밖에 없고 인간밖에 없다고 자부하는 그 땅의 세계에 하늘의 요소가 하늘의 징후가 드디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성경 미가 예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와서 친히 강림해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라고 예언되어 있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오셔서 뭘 하느냐?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오셔서 하는 것이 그것을 “밟으실 것이라” 이렇게 돼요. 밟으실 것이다.

자,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하늘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뿐더러 아는 것도 없고 그리고 굳이 하늘에 대해서 하나님 세계에 대해서 꼭 알아야 돼? 라는 식으로 신경을 안 씁니다. 그냥 자기가 사는 세상, 땅의 것만 신경 쓰면 된다, 그게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의 본능이죠.

‘하늘의 것을 몰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렇게 인간들은 딱 정리가 된 겁니다. 이것은 타고났어요. 누가 뭐 네 것만 챙기라고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자기 것만 챙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나라는 어디까지나 인간나라만 알고 하늘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그저 그런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몰라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미가의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주목해보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충고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에 주목해보라.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묻죠.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이스라엘에는 사람이 밟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자기 백성을 밟으시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밟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그때 하나님께서 알려줄 것이다.” 이렇게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이 예언이 품고 있는 취지, 의미가 어떻게 아주 특별하고 인간세계에서는 참으로 낯선 것이며 신기한 것인지를 제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한반도에 나라가 세워진 고조선, 그다음에 고조선에 대해서 한(韓)나라가 와서 위만조선 세우고 그다음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세워지는데 그 고구려 있는 영토 북쪽에 가면 부여라는 곳이 있어요. 고구려는 활 잘 쏘는 주몽이 처음에 만들었지만 그 위에 부여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충청도 부여 말고 지금의 만주에 부여라는 곳이 있었거든요. 그 부여에 옛날 유적지, 삼국사기 등을 조사해보니까 이게 나와 있어요. 법이 나왔는데 일책십이법(一責十二法)에 이런 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하면 12배로 갚는다.’라는 법이 벌써 고대국가에 적혀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죽였다 이 말이죠. 내가 성질나서 어떤 사람을 죽였다 칩시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이 꼴 보기 싫어서 죽였고 그 사람은 뭐 내 칼이나 총에 맞아서 죽었다 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그 사람 없어서 속이 시원하다. 그럼 됐잖아요. 그게 정상 아닙니까?

길에 가다가 앞에 무슨 물건이 떨어져있는데 그 물건이 발길에 차인다. 그러면 그 물건을 치워버리고 내가 그 발길로 갈 때 편하게 간다. 그게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럽다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뭐 당연한 거죠. 그런데 내가 가는데 꼴 보기 싫은 인간이 있다. 좀 죽어줄래? 좀 죽어다오, 해서 치워버리고 내 갈길 갔다. 이게 뭐가 이상하냐는 말이죠. 나로서는 합당한 것이고 정당하잖아요.

사람들이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사형에 처하고 내가 사람 죽였는데 왜 내 가족을 노비 삼고 내가 저 물건이 탐나서 훔쳤는데, 보는데 훔치면 그 사람이 또 달려들기 때문에 그 사람 잠잘 때 물건을 훔쳤다 이 말이죠. 저쪽에 스마트폰이 한 200만 원짜리 좋은 게 있으면 그걸 하나 훔쳤다. 왜 훔쳤나? 내가 갖고 싶어서. 저기 있는 것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이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이 말이죠. 여러분,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어떤 여자가 있는데 총각이 돼서 어떤 여자가 탐이 난다. 너 좀 나하고 같이 내 아내로 살아야 되겠어, 하고 보쌈해서 집에 데려와서 밖에 못 나가게 해놓고 거기서 살림시켰다. 이게 나한테 무슨 문제가 돼요? 내가 좋아서 내 의도에 또는 내 욕구에 만족하기 위해서 내가 행동했다 이 말이죠. 남의 물건인지 알지만 내가 필요하잖아, 내가. 내가 필요해서 남의 물건을 가져왔잖아요.

지금 설교 진도를 나갈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돼요. 내가 훔치고 내가 죽였는데 나라가 뭔데 나를 사형시키고 내 가족을 노비로 삼고 왜 그 사람에게 12배, 그것도 11배도 아니고 7.5배도 아니고 왜 12배를 갚아야 된다는 법을 누구 마음대로 정했어요? 아니 누구 마음대로 정한 것보다도 왜 정하느냐? 왜 정하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내가 내 인생 살겠다는데 그래서 내가 배고파서 빵 훔치고 꼴 보기 싫어서 총가지고 사람 죽였는데 그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네가 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방해합니까?

사람들은 이 국가에 법이 있는 이유도 몰라요. 지금 평생을 살면서 이런 이유도 모르면서 태어나고 늙어 죽습니다. 왜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는지, 그 이유가 뭔데? 그걸 이야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걸 이야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건 부여의 왕이 있는데, 사실상 왕은 없죠, 동맹 체제이기 때문에 왕은 없지만 부족 연맹에서 돌아가면서 왕을 하니까 왕이라 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럼 내가 듣고 있다가 그러죠. “그래서?”

내가 이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부여 왕이 나를 잡아왔어요. “너 왜 죽였느냐?” “좀 죽이면 안 되냐?” 이렇게 나왔어요, 나는. 그러니까 부여 왕이 하는 말이 “내가 왕이거든.” “그래서 어쩌라고?” “왕은 백성들의 안정과 치안과 그들의 목숨을 보호할 책임자거든.” “그래서?” “그래서 이걸 벌을 안 내리면 네가 행동한 것처럼 남들도 너처럼 해서 네가 억울하게 되고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약탈하게 되면 나라 꼴이 안 되잖아.”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 임금이. 그럼 내가 있다가 “나라 꼴이 되든 말든 나만 만족하면 되잖아.” 그렇게 나오면 그쪽에서 무슨 말 합니까?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가지고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자본,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사상이 팽배해져요. 아, 내가 사는 것은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알던 서양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대신 내가 노동해서 얻은 돈이 나를 살린다는 쪽으로 바뀌어졌거든요, 모든 나라 분위기가.

내가 돈 벌겠다고 사기를 좀 치고 속여서 돈 벌면 그것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는 이게 나한테 맞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무섭게 내려다본다, 뭐 이런 구라 치던 그 때가 아니거든요. 지금 돈만 있으면 살잖아요. 돈만 있으면 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돈 있는 자가 더 오래 살 수 있고 그럼 나한테는 족하고 됐잖아요. 이게 뭐가 나쁘냔 말이죠. 너는 그렇게 안 사냐? 막 묻고 싶은 거예요.

제가 지금 쓸데없는 이야기를 계속 길게 해서 이 귀한 설교시간만 늘여가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다른 영역에 살고요. 인간들은 자기 영역 넓히는 것만 하고 살아요, 세상의 이방민족은.

아까 우리나라 고대 부여 국가의 법을 제가 이야기한 것은......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그리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고 도적질하면 12배를 갚는다는 것, 고조선의 8조법과 유사하다고 역사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왜 국가마다 법이 있느냐 하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학대하고 빼앗으면 치안이 문란하고 사는 게 법이 있을 때보다 법이 없는 게 본인에게도 그게 더 손해가 된다는 겁니다. 약한 남에게서 가져왔지만 더 센 것이 약한 것에게서 가져온 것을 강도질해서 가져가면 안 되잖아요. 그때는 내 재산 지켜주고 내 목숨 지켜주는 보호자가 필요한데 그 보호자의 최우두머리가 치안을 담당하는 임금, 왕이라 이 말이죠.

그래서 그 부여 왕이 나한테 “나는 이 나라의 치안과 안전과 여러분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책임자입니다.”라고 하면 제가 그 왕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네가 살인하면 처벌은 누가 하냐?”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네가 살인하면 처벌은 누가 하느냐. 자기가 법을 제정했기 때문에 처벌할 사람이 없죠. 자기가 법을 제정했잖아요, 자기가.

아버지가 돼서 “이제부터는 밤 10시 이전에 들어와야지 10시 이후에 들어오면 너는 이제 바깥에 내보내서 안방에서 못 자고 바깥에 추운 데서 자게 한다.”라고 할 때 아들이 손들고 “아버지, 질문 있습니다. 아버지가 10시 이후에 오면 아버지도 밖에서 잡니까?” “아니지.” 왜? 난 아버지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법을 한번 봅시다. 민수기 15장 32-36절,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안식일에 나무해서 안식일 위반죄로 잡혀온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안식일날, 안식일날 나무한 거예요. 도적질한 게 아니고 남을 죽인 게 아니고 나 자신의 만족과 욕구 달성이 아니라 안식일을 어겼다고 죽여버리라 한 거예요. 지금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니까 지금 토요일에 일 한 사람들은 다 죽고 지금 우리나라 5천만 중에서 산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지금. 다 죽어야 돼요, 다 죽어야 돼.

그러니까 우리가 미가 예언서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것부터 한번 정리합시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삽니까? 어떤 영역에서 삽니까? 나를 위한 영역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영역에서 일하는 분들입니까?

아까 부여 법같이 “당신이 살인하고 도둑질하면 기분 나쁘지? 그럼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서로서로 살인하면 벌 내려서 살인 못하게 하고 도둑질 못하게 해야 다들 평화롭게 사는 좋은 나라가 되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협상이고 타협이에요. 그걸 가지고 루소라는 사람은 사회적 계약이라 했습니다. 사회 계약설이라 한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이 모여가지고 아는 지식대로 협의해서 꾸역꾸역 꾸려나가는 영토, 영역, 그게 바로 인간들에게 딱 맞춘, 맞는 영역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성전에서 나와서 그 이스라엘을 밟을 것이라 했거든요. 오늘 말씀의 논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이럴 때는 간단하게 간편하게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밟히지 않거든 성도 아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것도 늘 매일같이 하나님에게 밟히지 않으면 성도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미가의 예언이 그 당시 이방민족보고 한 것이 아니고 저 러시아, 미국보고 한 게 아니라 그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나타내는 것은 이방민족부터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오는데 어떤 식으로 오는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기 민족을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발로 밟아버려요.

발로 밟는 이유가 이겁니다. “너는 뭐 안 해도 그만이고 네가 더 안 살아도 괜찮아. 왜 자꾸 나대?”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너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어. 너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아. 내가 너희들을 만든 것은 있다가 없어져도 하나님 일에 너희들이 방해가 될 뿐이고 그래서 방해가 된다는 표시로서 하나님께서는 있다는 것들에 대해서 사정없이 짓밟아버리는 식으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게 이 세상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과 얼마나 다른 이야기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누구한테 밟히면요. 미쳐버립니다. 차라리 자기가 힘 없으면 죽어버려요. 2차 대전 때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라고 아주 괴이한 사람인데 히틀러 다음 2인자가 있어요.

2차 대전 때 나치의 1인자인 히틀러가 동쪽에서 러시아가 침공해오니까 자긴 베를린을 떠나지 않겠다 했고 부하에게 물어요. “몇 시간 견딜 수 있나?” “길어도 12시간밖에 못 견딥니다.” 이렇게 하니까 벌써 히틀러 있는 곳에 야포가 떨어지고 이랬어요. 히틀러가 뭘 생각했느냐 하면 무솔리니라고 이탈리아와 독일이 협약해서 전쟁을 했는데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재자가 먼저 망하고 죽었어요. 그런데 무솔리니가 독재할 때 무솔리니 시체를 사람들이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가지고 죽였어요.

그때 아직 살아있던 히틀러가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죽어도 저렇게 치욕스럽게 죽으면 내 자존심이 용납 안 된다 해서 그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고 내 시체를 남들이 찾아서 능욕하지 못하도록 아주 시체를 없애버리라고 했고요. 괴벨스부터 그 부하들이 그 시체에 휘발유를 부어서 그 근처 땅을 불 질렀어요. 그리고 난 뒤에 괴벨스가 이제 자기 차례잖아요. 자기는 어떻게 했느냐. 애가 6명 있었는데 그 부인이 모르핀으로 애들 6명 전부다 잠들게 해놓고 잠든 아이들한테 입에 강제로 청산가리를 집어넣어서 6명 애를 다 죽였습니다. 죽고 난 뒤에 남편 괴벨스가 아내를 권총으로 죽였고 자기도 권총 자살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히틀러는 왜 자살하고 괴벨스는 왜 자살합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남을 괴롭혔다, 유대인을 학대했다, 뭐 그런 죄가 있다 이런 죄가 있다... 자꾸 그 사람이 남한테 나쁜 짓한 것만 골라서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 하는데 한번도 평생에 남한테 침 한번 뱉어본 적 없고 남이 오면 막 피해가고 혹시 신발신고 가다가 무슨 개구리나 바퀴벌레 밟힐까봐 신발 털고 가는, 그 정도로 평생 동안 남한테 나쁜 짓 한적 없고 해코지 한적 없는 인간들, 그 인간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연결된 영역에 살지 않는 거예요. 자기 영역에 살았던 겁니다, 자기 영역에. 자기 영역에 사니까 자기가 보여줄 게 없어요. 자기 자신은 ‘나는 이렇게 살았다’만 보여주지,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못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가서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 백성다움은 뭐냐? 밟혔다. 누구한테? 하나님이 날 밟더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 성도가. 성도는 인간 아닙니까? 자기 만족 때문에 살지 않습니까? 자기 잘난 척하지 않습니까? 저 지옥 가는 인간이나 성도나 둘다 지 자랑하고 자기 편하고 자기 야망과 야심을 은밀하게 도모하고 하루 왼종일 생각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성도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역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시로 쉬지 않고 꽉꽉 밟아줍니다. 오늘 제목은 ‘꽉꽉’입니다. 야무지게 밟아줘요, 야무지게. 야무지게 밟아줍니다. 밟아주면서 이유를 댑니다. 너 왜 우상 섬겼어? 왜 우상을 섬긴 거야?

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약에 와야 최종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아직 신약시대가 아니고 구약시대에요.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보여줘도 완성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전부를 아는 게 아니에요. 덩치 큰 코끼리 밑에 소경 일곱 명 집어넣어놓고 만져본 뒤에 소경에게 이야기해보라 하면 각각 자기가 만졌던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전체를 이야기하지 못해요.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이고 소경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소경이 안 되어봐서 모르겠는데......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미가 당시의 이스라엘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가 아는 그 부분만 하나님에 대해서 섬길 요량이에요, 자기가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참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필수적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이것은 들으면 좀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지키라 하잖아요. 그러면 일곱째 날을 지키면 인간은 이래요. 하나를 지키게 되면 나머지 그다음 6일은 자기 날로 여기게 되어 있어요.

기도하라 하면 기도하는 시간만 하나님 시간이고 기도 안하는, 화장실에 가는 그 시간은 자기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몰라서 나온 태도에요. 아이고, 귀찮아 죽겠다. 에이, 드릴 것 드리자. 줘서 보내라 하는 식이죠. ‘아이, 귀찮아 죽겠다. 예 예, 드리겠습니다. 예, 바칠게요. 예, 기도할게요. 됐죠? 나머지는 내 자유를 좀 누립시다. 나도 숨 좀 쉽시다, 숨! 아이고, 사람이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무리 하나님 좋지만 잔소리가 우예 그리 많노? 나도 좀 한숨 돌릴 여유는 줘야 되지 않습니까? 성경 봐라, 기도해라, 예배 나와라, 헌금해라, 전도해라... 사람이 몰아붙여도 정도껏 몰아붙여야지. 아니 살 수가 있어야지.’라는 마음이 있지만 차마 그 말을 못하죠.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요령을 부리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되 율법과 율법의 틈 사이에서 쉬는 시간, 나만의 개성과 나만의 욕구를 달성하는 그 시간이 더 기다려지는 시간처럼 되는 거예요.

마치 오늘날 양력 3월 되고 4월 되면 고난주간 있고 고난주간 끝나면 그다음에 부활절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일 년에 한번씩 주님의 고난을 본받게 해가지고 월요일부터 주께서 십자가 졌던 겟세마네 갔던 금요일까지 금식하라는 거예요. 물론 금식을 다하면 안 되죠. 사람들 야위니까 하루에 한끼라도 금식하고 그거 모아서 북한에 수제비 끓여먹으라고, 실제입니다, 밀가루 모으고 이렇게 하는데...... 그러니까 밥을 첫째, 둘째 굶을 때는 굉장히 자기가 대견한 신앙인인 줄 알았는데 수요일, 목요일 넘어가면 밥에 이제 미치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게 있기 때문에 언제를 기다리느냐 하면 금요일 저녁 지나기만 해봐라. 그럼 금요일 저녁이 11시 59분에 끝나요. 12시에 배달의 민족 전화해서 치킨하고 피자하고 시켜가지고 일주일동안 못 먹은 거 그다음 날에 다 먹어서 폭식해가지고 살이 쪄서 다이어트 한 거 소용없이 되어버렸어요.

인간의 속성이라 하는 것은 이런 거예요. 구약적이에요. 우리 인간은 구약적이에요. 하나님을 귀찮게 해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한다잖아요. 하여튼 하나님을 믿어야 천당 가기 때문에 믿기는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자꾸 귀찮은 거예요. 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추 계약해요. 협상과 타협에 나서는 거예요. 지금 내 나름대로는 이게 최선이니까 고만 이정도 섬기는 걸로 눈 한번 질끈 감아주시고 나머지는 내 시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또 힘 길러야 섬길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데 하나님은 이리 와, 이리 와. 위에서 밟아버립니다. 밟아버립니다. 너는 밟히는 기능으로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밟히는 기능으로. “너 같은 인간은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고 너는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이고 그냥 사라져버려, 인간아.”하고 밟아버리는 거예요. 그냥 사라지면 안돼요. 자살하거나 그렇게 사라지면 안 되고 주께서 밟아줄 때 사라져야 되고 밟아줄 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이 바로 시편 22편 때문에 그래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인가.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진짜 하나님입니다. 가짜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서 진짜 성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관계.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나타날 때 진짜 성도를 버리는 식으로만 오직 성도를 버리시는 방법으로만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우상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할 때 자근자근 밟아주시는 하나님. 뭐 마른 오징어만 신발 신고 밟는 게 아니에요. 자근자근 밟아주는 거예요. 밟히는 것이 만약에... 하나님, 우리 좋은 게 좋은 건데 나도 남 도둑질한다고 욕했지만 나도 뭐 안 볼 땐 훔치고 남들은 아무데나 함부로 용변 본다 하는데 우리도 뭐 평생 살면서 한 1500번 정도는 그냥 아무데나 용변 봤어요, 특히 남자들은.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일단은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 맛있는 것 보면 먹고 싶다는 것, 잠잘 때 자야 된다는 것, 그리고 없는데 탐이 났을 때는 훔치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서 문방구에 가서 안 훔쳐본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문방구는 훔치라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좋아요. 훔칠 때 12배나 갚아버리면 주인은 남는 장사죠. 네 집에 가자. 네 엄마한테 가자. 네가 훔쳤으니까 12배로... 물론 12배 갚으라는 법은 없지만 주인의 마음 상처까지 해서 500원 짜리는 1500원으로 해서 500원이 본전인데 1500원 받아내고 그런 식으로 대처를 하죠. 그런데 문방구집 애들이 훔칠 때는 과연 엄마가 아들한테 보상받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 자기들은 부여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왕족이기 때문에.

인간의 법은 오직 자신의 정당성입니다. 안 밟히려고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나를 밟을 자격이 없다. 그걸 과시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자기 나름의 법을 가지고 바깥에 있는 국가 법에 대처하는 겁니다, 인간은. 나는 아파서는 안 되고 나는 가난하면 안 되고 늘 내 주장만 하나님께서 응답해줘야 되고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야 되고 그런 겁니다.

싯다르타(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 들어본 적 있죠? 인도의 어느 서파키스탄 지역에 있는 작은 왕국의 왕자였죠. 왕자인데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왕궁에 살아가지고 왕궁 자체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죠. 그런데 우연히 바깥에 나갔다가 지질히 못사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기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왕궁을 탈출했습니다. 가출한 거죠, 가출. 가출해서 도대체 인간은 왜 죽고 왜 고통스럽고 왜 아프고 왜 태어났는가, 그 생로병사의 진리를 얻겠다고 돌아다닌 사람이 바로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 아닙니까? 깨달은 사람을 석가모니 부처라 하고요.

그런데 싯다르타 그 부처가 뭘 잘못했느냐. 잘못된 반대편을 놓은 거예요. 병듦과 가난, 화려한 왕궁과 서민들의 가난함과 같은 (수평적인) 대조가 되었지, 하나님의 영역이 어떤 쪽이며 땅의 영역은 어떤 쪽인가 이런 (수직적인) 반대편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왜? 인도는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이방민족이거든요.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과 욕심에 준해서 아이고,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이 문제구나. 그럼 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인간 된 도리지. 그것뿐이에요. 인간에게 나왔던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고. 그야말로 선악과 따먹고 저주, 지옥 갈 그 표시를 불교가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고맙다, 불교야. 그러니 지옥은 이런 자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

제가 대통령 된다면, 물론 대통령 나가는 거 아닙니다, 대통령 된다면 청년들에게 천이백만 원씩 줍니다. 한 달에 백만 원씩. 왜 그런 소리 합니까? 눈에 보이는 영역이 다이기 때문에. 이 영역은요, 내가 밟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밟는다는 그런 긴장관계로 엮어져있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 세상 영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없는 다른 영역에서 종사하는 직원들이에요. 직원들입니다. 일꾼들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느냐? 늘 밟히는 거예요. 일꾼들이라 해가지고 착한 게 아니거든요. 아담의 후손들이 뭘 착하겠어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러니까 그들의 역할은 뭐냐? 밟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형적인 밟힘을 누가 보여주는가.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 시편 22편에 16절에 보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18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9장 24절에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시편 22편이 예언이에요. 다윗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원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에도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그러니까 미가도 그렇고 시편도 그렇고 요한복음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렇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겁니다.

찬송가에 보면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찬송이 나오죠. 묻고 싶어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뜻이 뭐더라? 뜻이 뭐였지? 제가 알려 드려요? 주님이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를 매일같이 짓밟아버리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그 밟히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안 밟히면요, 그다음에 자기 인생이 자꾸 살아나가지고 이 살아난 나를 또 아침부터 뭘 먹여야 되나, 점심엔 또 뭘 해야 되고 심심한데 어떤 만화책을 봐야 되고 또 어떤 게임을 해야 내가 나를 즐겁게 해줄까... 이게 안 밟히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찬송가 못지않게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나훈아의 <잡초>. 뭐 테스 형보다 잡초가 더 중요해요. 잡초형 삶. 잡초형 인간. 이게 바로 이 땅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른 성도의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고마운지요. 안 밟아줘서 이상해요. 오늘 내가 왜 안 밟히지? 사람이 안 밟히게 되면 자꾸 내가 스케줄 짜야 돼요. 어떤 목적을 내가 만들어야 돼요. 이건 피곤한 짓입니다. 주님, 또 뭐 어떻게 살아야 돼요? 다른 세상 친구들이 이야기할 거예요. 네가 왕이잖아. 네가 부여 왕이잖아. 세상 왕이잖아.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요.

오늘 본문 미가 다시 한번 봅시다. 미가 1절에 보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되어 있고 5절에 보면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이 대목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사마리아에 집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마리아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열왕기상 16장 전체를 봐야 돼요. 열왕기상 전체를 보게 되면 16장 1절부터 마지막 34절까지 사마리아라는 곳이 무슨 일이 벌어진 곳인가를 알 수 있어요.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이 원래 수도가 사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디르사라는 곳인데 이것은 6절에 나와있고요. 16장 보면 다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그 뒤에 뭐 쿠데타 일으키고 바아사와 싸웠는데 거기에 오므리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오므리라는 사람이 앞으로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무엇의 전당으로 만드는가. 우상의 전당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므리라는 사람이 반드시 북쪽 이스라엘을 통치해줘야 돼요. 이것은 예후라는 예언자가 예언을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낼 때 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밟는 일을 하거든요. 밟는 일을 할 때 출애굽기 20장 3절의 말씀처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그 말씀과 동반해서 하나님이 나타나려면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러한 일을 하는 자들이 북이스라엘, 나중에 남쪽도 마찬가지지만 북이스라엘에 특화되어서 나타나야 되는데 그 특화된 지점이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열왕기상 16장 24절에 보면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된 것은 그 산 주인 이름이 세멜이었기 때문에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가 되었다 하면서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그 사마리아는 오므리 이 사람부터 해서 그 아들 되는 아합이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 하면 우상을 섬겨야 돼요, 우상을. 열심히 우상을 섬겨야 돼요,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본인의 뜻이 아니고 예언이 더 우세하거든요.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우상을 섬겨야 돼요. 우상을 섬기고 자근자근 밟혀야 돼요. 그래서 열왕기상 16장 32절에 보면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아세라와 바알은 부부 사이이고 남편은 바알이고 아내가 아세라입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다고 되어 있어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 그러면 우상은 무엇을 가지고 우상이라 하느냐. 여호와하면 우상 아니고 다른 거 뭐 부처 섬기면 우상이라 하느냐. 그게 아니고 우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밟혀야 될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 우상적 행동입니다. 우상적 행동이에요.

우리 교회는 밟혀야 되고 여러분의 가정도 밟혀야 되고 광주의 아파트만 무너지면 안돼요. 다 모든 게 무너져야 돼요. 왜냐하면 바로 무너진 곳에만 무너졌음이 주의 일인 것을 안 그곳에만 생명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에스겔 37장이 바로 그거죠. “인자야, 저들이 뭐냐?” “뼈다귀입니다.” “그래? 저 뼈들이 어떻게 살게 되겠느냐?” “저는 모르지만 주께서 말씀하시면 살겠습니다.” 그래. 그들이 살아나서 곧 군대가 되었더라. 여기 에스겔 37장 11절, 12절을 죽 보면 우리는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죽여놓고 죽인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을 ‘거기서 나와’해서 무덤을 열고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죽은 데서 밟힌 데서 다시 나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되어버려요. 날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날마다 밟히는 일의 반복으로써 하나님을 그때마다 새롭게 이해하는 겁니다. 아, 이 세상 모든 일은 내가 꾸미고 내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철저하게 이용하시고 사용하시는 것. 바로 나는 이 세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국의 영역에서 일하는 그런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바로 밟힐 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 밟히게 하는 것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해서 영광 돌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해주시고 오히려 밟히는 것이 매사에 밟히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일관되어 있는 주님의 원하는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강-미가 1장 1-5절(밟히기)220112-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5
게시물9,570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2022 신간소식 '왕의 무대'사무엘하 속의 그리스도 최지영 22-01-05 207
공지   생방송 관련 관리자 20-09-30 694
공지   주일 오전, 오후, 수요예배 유튜브 생중계 예정입니다 관리자 20-09-02 679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2843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2583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3495
10119   서울의존강의20220519b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 이하림 22-05-21 17
10118   서울의존강의20220519a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 이하림 22-05-21 20
10113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22-05-20 9
10112   19강-미가 5장 10-15절(심판하시는 하나님)220518-이 … 오용익 22-05-19 30
10111   20220516b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한윤범 22-05-18 27
10110   20220516a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한윤범 22-05-18 46
10109   서울 강의 안내(임시 장소 변경) 이미아 22-05-17 58
10108   여름 수련회 서경수 22-05-17 76
10107   안양모임 안내(5. 19. 목) 공은주 22-05-16 24
10106   10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벅찬 오해)220515 -… 오용익 22-05-15 48
10105   135강-욥기 42장 7~9절(중보자의 모형)220515 이근호 … 송민선 22-05-15 27
10104   주일학교 설교 / 나의 목격자 / 220515 정인순 22-05-15 28
10103   서울 강의 안내(임시 장소 변경) 이미아 22-05-14 68
10102   5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이창섭 22-05-14 29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