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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5 07:50:58 조회 : 107         
202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여호수아: 없는 땅-우상다루기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022 겨울 수련회 여호수아 강해 제3강 : 우상 다루기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설명 못 합니다.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낙엽이 이렇게 있다면 그 낙엽이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할 때 어느 타임에서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잘라도요, 그 잘린 부분에서 변화되는 것, 잘린 그 부분에서 변화를 집어내도 그 부분 내에서 변화되는 것을 알려면 또 잘라내야 돼요.

그래서 수학에서 하는 방법은 이걸 미분(微分)이라 하는데 미분은 더 무한대로 가져가서 잘라 내고, 잘라 내고, 잘라 내고……, 해서 거의 무한대로 잘라 내서 ‘무한대는 변화를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같은 차원에서는요,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 예를 들게 되면,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사기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 문제에요. 우상이라 하는 이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것은 신이 아니다, 이거지요. 신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신이 아니다’ 하는 이것을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우상은 나중에 이사야에 가 보면 ‘신이 아니다’ 정도가 아니라 무가치하다, 가치 없다, 무가치하다, 다른 말로 하게 되면 허망하다. 이사야에서 좀 더 나가보면 이것은 ‘인간 그 자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 그 자체다.

그래서 인간이 있고 신이 있는데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해 가지고 ‘너희들이 신을 섬기지만 이것은 무가치하다’ 처음에는 ‘신이 아니다 → 무가치하다 → 허망하다 → 너하고 똑같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위에서부터. 그러니까 네가 허망해, 너 자신이 허망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우상을 맞닥뜨리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하고 이스라엘하고 같은 동급으로 서로 아는 사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은 인간이고 여호와는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동급이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급이 되려면 이스라엘이 어느 쪽으로 접근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보다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네 본성에 맞다, 그 말이에요. 네 본성에 맞는 거예요. 여호와를 섬기지 말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네 본성에 맞는 겁니다.

그게 네 본성에 맞다, 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고 오신 시간과 공간이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고 오신 시간과 공간. 아까 첫째 시간과 둘째 시간에 했지요. ‘저 땅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이지 사람이 거주하는 땅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하니까 마치 자신들도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과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이스라엘은 착각을 해가지고 이것이 동급이라고, 같은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을 알려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디로 가게 하느냐 하면, 여호와와 단짝이라는 그런 착각을 하지 말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 우상의 자리에 가서, 그 자리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래 보면 네가 생각하는 이 우상이라 하는 것, 우상과 너희들의 신 그리고 이스라엘, 이방, 전부 다 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에 뭘 설명 못 한다? 변화를 설명 못 한다 그 말입니다. 왜 세상은 이렇게 달라져야 되는가? 그 변화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못해요. 나는 왜 늙는가, 나는 왜 죽는가, 이 변화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천지 창조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독특한,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갖고 나와야 되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우상을 가지고 천지 창조를 설명한다든지, 마지막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어떻다든지,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허망한 사람들의 그 사고방식 속에서는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변화 있잖아요, 그 다른 차원의 변화를 설명을 못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뭘 감지해야 되느냐 하면, 여호수아에 나오는 전쟁, 그 뒤에 나오는 사사기도 포함됩니다만, 여호수아에 나오는 전쟁에서 인간이 예상한 변화 말고 인간이 예상 못한 변화를 우리는 집중해서 그것에 신경 써야 된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여호수아 10장 13절에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태양이 하늘에서 그만 스톱을 했어요. 태양이 어디가 고장 난 것 같아요. 도로에서 길을 잘 가다가 태양이 가지를 않는 거예요. 이 변화, 이 변화를 인간 차원에서, 우상을 믿는 그 차원에서는 설명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지요.

또 여호수아 5장 10-12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자, 만나가 그쳤다. 만나가 왜 그칩니까? 어떤 변화인데 만나가 왜 그치지요? 만나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여기 유월절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날짜가 그달 곧 1월 14일, 그날에 유월절을 지켰다면, 제가 적어 볼게요, 1월 14일, 며칠 안 남았네요, 1월 14일이라는 그 날짜는 같은 인간을 두고서 이방 민족의 1월 14일은 그냥 1월 14일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1월 14일은 1월 14일이 아니고 뭐냐 하면, 이 변화가 삽입된 1월 14일, 무슨 날이냐 하면, 유월절이에요, 유월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 접근하면서 무엇을 상실해 버렸느냐 하면, 유월절의 초월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이 개입한 그 변화를, 그걸 빠트리고 그냥 형식적인 유월절을 지켜버렸어요.

그러면 이 유월절이라는 시간은 뭐냐? 기존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1월 14일과 1월 15일 사이에 그냥 평범한 1월 14일이 된다고요. 율법에서 말하는 유월절 같은 것은 완전히 통째로 다 날라가 버렸어요.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설명 못 합니다. 변화를 설명 못 하기 때문에 설명 못 한다는 이 사실, 결국은 변화를 설명 못 한다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 합니다.

내가 이 약속의 땅에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 해요. 설명 못 합니다. “어디 살고 있어요?” 갑자기 공손 모드,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목포에 살고 있어요? 본인이 목포에 살아야 될 초월적인 설명을 해보세요.” 초월적인 설명 못 해요. 그냥 “대한민국 전라남도 지역 중 하나다” 이러면 그것은 차이점이 없잖아요.

그러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주님이 십자가 졌던 그 개념 가지고, 쉽게 말해서 목포와 십자가의 관계는 설명이 안 돼요. 목포와 십자가의 관계는?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십니까?” “예” “목사와 십자가의 관계는?” 설명이 안 돼요. “신학교 나와서 라이센스 자격을 주면 목사 된다.” 이것은 일반인들, 직장생활 위해서 자격증 얻는 것과 똑같은 건데요?

여러분, 만나가 그침으로 말미암아 만나 줬다는 자체가 초월적인 변화라는 사실을 새삼 그들은 받아들여야 돼요. 만나가 주어졌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러면 예수님이 살았다는 것이 뭐지? 죽음을 통해서 다시 소급해서 살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그냥 예수님의 죽음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당신 죽고 그다음에 나도 죽겠지. 끝. 그래 그것이 뭔데요? 그게 뭔데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편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네가 살았다. 그게, 일반들한테 그게 통하는 이야기입니까? 시소 놀이해요? 이쪽이 내려가니까 저쪽 올라가고, 뭐 시소 놀이하는 겁니까? 여호수아 해석한 주석들 보게 되면,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옛날에, 한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죄짓고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도 그 땅이 그대로 있잖아요. 시오니즘(Zionism) 그거 해서 땅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되었지요, 뭐.

우상의 입장에서는요, 하나님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설명이 없는 우상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허망하지요. 허망하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여호와를 믿든 예수를 믿든 성령을 믿든 이 변화를, 십자가에 담긴 그 복음의 변화를 설명 못 하면 그것은 예수니 십자가니 뭘 해도 그것은 허망하고 이것은 나 자신을 믿는 거예요. 나 자신의 생존과 나 자신의 미래 계획을 내가 믿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것이 우상의 실체가 되는 겁니다. 우상의 실체. 이스라엘의 그 정체가 점점 더 드러나는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잘 모르니까 사사기 6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오늘 세 번째 강의 제목은 뭐냐? “우상을 다루는 법” 하나님께서 우상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이니까, 무(無)와 무가치, 아까 무가치하다 했지요. 현재 우상의 이름이 뭐냐? 사사기 6장 25절에 보면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여기 ‘바알’, 이름 나오지요. ‘아세라’, 이름 나오는 겁니다. 상식이니까 알아 놓으세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과 대응이 되는, 이름과 연결 되어 있는 실체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실체, 실재로 뭐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이름은 허망한 이름이지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미디안이라는 이방 민족한테 점령을 당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여기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누가 포위했습니까? 사사기 6장에서 미디안이 포위했지요. 미디안이 우상을 섬기거든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지요.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 우상, 이스라엘 이 동네에 바알과 아세라가 심겨 있습니다. 이 세력, 지배, 이것은 실제상황이거든요. 실제상황. 홍콩을 실효적으로 누가 지배합니까? 홍콩이 지배합니까, 중국이 지배합니까? 중국이 지배하지요. 이게 실제상황이지요. 실제상황이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이 바알과 아세라를 무가치한 것으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무가치한 것, 실체가 없는 것한테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누가? 천사가. 천사가 그렇게 기드온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 이거 참! 우리 아까 여호수아 5장 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여호수아보고 신발 벗으라고 했지요. 그래서 신발 벗었습니다.

이렇게 천사가 개입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천사가 왔습니다. 천사가 되어버리면 이 차원이 중첩이 돼요. 이 땅에서는 여호수아, 그걸 위에서 지배하는 것은 군대장관, 이게 중첩이 되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에 대해서 같은 차원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그게 설명이 되는 거예요.

아까 태양이 멈춘다 했지요. 태양이 멈추는 그것은 이 지상에서는 설명이 안 되지만 하늘에서는 이게 설명이 되는 거예요. 왜 설명이 되느냐 하면, 땅에 있다고 땅의 사람이 아니고 땅에 있어도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백성이다, 라는 점을 집어넣으면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죠? 설명이 되지요.

설명이 되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때는 설명이 되었는데 왜 사사기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미디안한테 지배를 당합니까? 뭘 양보해서 그래요? 어떤 점에서 양보해서 그렇습니까? 변화를 설명해야 될 텐데 이 이스라엘은 뭘 설명하냐 하면, 본인의 생계, 생존, 가진 것, 이것만 있으면 더 이상 다른 차원, 이미 얻어먹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해놓고 자기 것 챙기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떨어져 나가요? 중복된 하늘의 차원이 떨어져 나가지요. 한 달 수입이 한 2천 5백만 원 된다. ‘2천 5백 원’이 아니고 ‘2천 5백만 원’입니다. 그런데 한 달 수입이 ‘2천 5백 원’인 사람이 있다. 둘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2천 5백만 원’ 받는 사람이 간절하겠습니까, ‘2천 5백 원’ 받는 사람이 간절하겠습니까?

‘2천 5백만 원’ 수입되는 사람이 ‘하나님, 3천만 원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이렇게 하겠어요? ‘2천 5백 원’ 받는 사람이 ‘그저 한 하루에 5만 원이라도……’ 할 때 어느 것이 더 간절하겠습니까? 없는 사람이 더 간절하지요. 넉넉하게 있는 사람은요 별로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하지 않아요.

그게 아까 읽었던 신명기 8장에 나오는 겁니다.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 때 필히 뭐가 온다고요? 바로 우상숭배가 거기서 끼어들게 돼요. 스스로 본인 생각에 이만하면 내 생각에 내가 넉넉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차원이 필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실체가 뭐로 바뀌어요? 실체가 하나님의 지배가 실체가 되었던 것이 그다음에 실체가 뭐로 바뀝니까?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이 뭐가 돼요? 이게 실체로 바뀐 거예요. 이게 실체로 바뀌면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차원을 떼 내 버리고 하나님이 있든 말든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으로 나는 족해, 라는 이 실체가 무슨 실체냐 하면, 바로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이 믿던 그들의 실체하고 이게 동급이 된다 그 말입니다. 똑같은 거예요.

‘잘 먹고 잘 사는데 하나님을 왜 믿어? 안 믿어도 되는데.’ 이렇게 생각할 때 이게 동급이 되는 겁니다. 동급이 되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것이 진짜 내 목적이고 사는 이유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든, 바알이 도와주든, 아세라가 도와주든 누가 나를 도와만 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얼마든지 나는 좋은 관계로 지낼 용의가 되어 있다. 이게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용의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장난삼아, 안 그러면 진실 삼아 슬슬 미디안이 믿었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거예요. 그 바알과 아세라의 이름을 바알과 아세라로 하지 말고요,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으로 바꿔봐요. 그러면 이름은 예수, 하나님이지만 실제는 목적이 뭡니까? 내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그렇고 그런, 그다지 시급하거나 절박하지 않은 신,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러면 자, 만나가 그쳤다. 만나가 그쳤는데 만나가 그친 시점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그치는 것이 절박합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만나가 끊어지는 것이 절박합니까? 어느 쪽이 더 절박하겠어요? 광야가 절박하지요. 그곳은 만나 아니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때 만나는 우리의 생존권을 누가 쥐고 있다? 만나를 주신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존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변화에,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거예요. 만나가 주어질 때.

예를 들어서 제가 픽션으로 소설을 쓴다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그냥 주시지 않고 말을 건넨다 칩시다. 자, 제가 하나님입니다.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줍니다. “너 만나 먹으니까 말해보라. 너 어떻게 살 수 있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있어야 삽니다.” “혹시 내가 당부하는데 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는 그런 마음을 유지할 거냐, 유지 안 할 거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뭐라고 합니까? “유지하겠습니다! Yes, ser! 충성!” 이럴 거라는 말이지요.

‘지금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분인데 혹시나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못살아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 때문에 살았습니다.’ 분명히 이런 자부심을 가질 거라 이 말이지요.

베드로처럼,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어떤 조건 하에? 예수님이 약해 보이지 않을 때, 예수님의 권력이 실체라고 믿어질 그때,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보다 더 세다는 것을 눈으로 나에게 보여줄 때, 그때는 예수 믿지 말래도 믿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끌어가셨습니까?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약하디약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약하디약한 모습으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 완전히 원심력처럼, 쥐불놀이 하는 것처럼 돌리니까 다 튀어나갔어요. 다 튕겨져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홀로 돌아가셨어요. 그것이 사도바울에서는 뭐냐 하면, 그 변화를 너희들이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편지가. 성령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의 그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자,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우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무가치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냐? 놀랍게도 ‘없음’이 돼요. 왜냐하면 ‘있음’은 이 무가치에 이미 함유된 상태이기 때문에 있음을 가지고 우상을 읽을 수가 없어요. 우상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뭡니까? 이미 있기는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아무리 ‘있음’을 해줘도,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서 살려줘도 계속해서 그들은 어디를 찾을 겁니까? 있음 자체가 이미 무가치함과 동급이기 때문에 계속 있으면 있을수록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게 분명하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이방 민족, 이방 민족,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데 이방 민족을 이해하려면 앞에 붙은 ‘이방’ 이것을 떼야 돼요. ‘이방’ 떼고 그냥 민족이에요.

그냥 민족이라면 민족의 속성이 뭐냐? 한 문장으로 쓸게요. “부모가 일하는 이유는 ( )다.” 너무 어렵지요. 주관식이라서.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뭐냐?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상속하기 위해서 일해요. 상속하기 위해서. 자식이 있는 부모가 일하는 보람이 상속하는 겁니다.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기 위해서 오늘도 찬바람 부는 데서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계속 여분의 것.

자, 상속을 하게 되면 자식과 부모 사이가 뭐가 되느냐? ‘있음’에서 계속 ‘있음’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있음’에서 ‘있음’으로. 그러니까 그 ‘있음’에 대해서 아무리 해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이게 우상이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예수님이 되었든 뭔가 도와주게 되면 자기의 의도를 달성하게 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충성을 다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 우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무가치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자식은 또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자식한테 또 물려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혈육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한테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베드로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할 때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뭐가 아니고? 네가 고백하는 그 변화에 대한 설명은 ‘혈육’에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혈육이 아니라면 그다음에 뭡니까? 혈육이 아니면? 혈육이 전부인데요. 사람이 일하는 이유가 자식에게 재산 남겨주려고 하는데 혈육이 아니면 여기는 뭐가 되겠습니까? 여기는 뭐가 돼요? ‘없음’이 되지요.

혈육만 있는데 혈육이 아니면 그 나머지는 뭐냐?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이 없음의 자리에 누가 옵니까? 이 없음의 자리에 천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 없음의 자리에. 여호수아 여러분, 어떻게 읽으렵니까? 이방 민족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그것과 하나님께서 싸운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방 민족, 저건 아니야. 저주받아 지옥 가.’라고,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래서 그걸 단정 짓고 규정하려면 하나님 쪽에서 내미는 카드가 뭐이어야 하느냐, 그 말입니다. 뭐이어야 해요? 하나님의 카드?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뭡니까? ‘없음’이에요.

‘없음’이라는 말은 ‘들쑥날쑥’ ‘있음’이 붙잡을 수 없는 ‘들쑥날쑥’ ‘있음’이 붙잡을 수 없어요. 부르면 쪼르르 나가고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쑥날쑥’ 이것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 ‘있음’은 뭐냐? 이것은 존재고.

사건을 어떻게 인간이 붙들고 있습니까? 사건은 바람 같은데요. 바람을 어떻게 붙들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이스라엘이 “오케이, 압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도와줬다. 만나를 줬다.” “오케이, 입니다” “그게 하나님 믿는 게 아니야. 하나님 믿으려면 네가 이방 민족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과 어떻게 차이 나는 것을 네가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과 자꾸 붙여주고, 이스라엘 옆에 이방 민족을 물러가지 않게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도 봤지요, 이방 민족을 내보내라고 했는데 그들이 제대로 내보냈습니까? 지도 보면 분명히 내보내라고 했는데 내보내지도 않아요.

그리고 엉뚱하게 르우벤 지파와 갓지파와 동므낫세 지파는요, 원래 차지하지 말라고 한 그 엉뚱한 곳이 좋다고 자기 맘대로 거기 차지했어요. 자기 맘대로 약속의 땅이라고 차지한 그 이유가 뭡니까? 아까 상속 이야기 했어요. 대대로 자기 자손에게 좋은 것 남겨주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3, 26일~)라는 사람이 그걸 <이기적 유전자>에서 밝혀냈어요.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는 DNA가 스스로 불멸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죽어도 DNA는 계속해서 조금씩 영원불멸,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자식 번식에 나서는 거예요. 도킨스가 이야기한 그것이 맞는 이야기도 아닌데요, 사실은.

DNA(deoxyribonucleic acid)라는 것은 염기서열이잖아요. 염기라는 것이 있어요. 분자구조식이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원자가 되고, 원자는 핵하고 전자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전자라 하는 이것은 면적도 없고 부피도 없고, 없어요. 면적도 부피도 없는데 영향력을 주니까 이것은 뭐냐 숫자로 1, 이렇게 하는데 그 1도 안 맞아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1도 안 맞다. 영향력을 서로 반분한다. 즉 s(운동량)=1/2에 대해서는 1/2, −1/2의 두 양자수를 갖는다.” 이걸 스핀이라고 물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데 이것들이 모여서 DNA를 구성해서 이게 성경에서 뭐가 되었습니까? 이게 육이 된 거예요. 참 희한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육이 되었다고요. 그러니 육을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육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육의 원형은 뭐다? 육의 원형은 예수님이지요. ‘육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죄 있는 모습으로 있다’가 될 때 이게 육이 된다 그 말이에요. 죄 있는 모습으로.

점점 지금 난국에 빠져버렸는데요. 난국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가 이방 민족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본인이 이방 민족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 설명에 대해서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런 설명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요, 이방 민족과 혈육에 대해서 대립 관계에 있어요. 원래 이스라엘, 성경에 있는 그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은.

그런데 그냥 겉멋만 이스라엘은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그 차이를 나타내기도 부끄러울 정도에요. 이방 민족과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는 누가 만드는가? 그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자, 우상을 한번 정리해볼게요. 우상을 다루는 법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누가 개입, 다른 차원의 천사의 개입으로 비로소 우상이 우상답게 노출되는 겁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하려고 길게 이야기했는데 우상이 우상답게 등장해서 ‘이스라엘은 이래야 되고 이건 이방 민족이다’ 하고 분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천사가 와서……, 사사기 6장 27절에서 천사가 이걸 하라고 이야기했는데 27절에 보니까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언제 했습니까? “밤에 행하니라” 밤에 했지요.

그러면 기드온은 지금 우상을 정면으로 대면했습니까, 비대면했습니까? 마스크 쓰고요, 비대면 했지요, 비대면. 이 말은 뭡니까? 우상은 결코 실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재적이다, 그 말 아닙니까?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은 그냥 아무것도 허망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뭘 가졌다? 실제로 권세와 권력을, 군사력을, 경찰력을 가졌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렇지요.

중국에 있는 지하교회한테 “예수님이 세요, 중국이 세요?” 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은 곤란해요. 배운 대로 하면 뭐가 세요? “예수님이 세요”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뭐가 셉니까? 우상이 세요. 공산당이라는 그 정치제도가 군사력도 있고 세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면서, 시편 20편에 그런 것이 나옵니다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칼이나 창이 아니고 말도 아니고 우리의 싸움은 뭐로 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싸움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여러분, 이런 말씀 성경에서 들은 기억 나지요? 시편에 보면 나와요.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고 많이 나와요. 그런 것 볼 때 후다닥, 마치 뭐 안 본 듯이 그냥 넘어가 버려요. 안 본 듯이. 성경 보는 이유가, 내 생존에 더 보탬이 되기 위해서인데 이런 말씀은 전혀 생존에 보탬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 저 안 싸울래요. 저 안 싸울래요.’ 지금 기드온이 그 꼴입니다. ‘천사님이여, 하기는 하는데 내가 안 싸우는 방법으로 밤에 할게요. 몰래. CCTV 없는 데서 몰래 밤중에 행하겠습니다.’ 밤중에 행하니 뭐합니까? 몇 시간 지나면 아침이 되는데요.

사사기 6장 28, 29절에 보면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어찌 알았지요? 지문조사 했는가? 자기는 몰래 했는데 이걸 어찌 알았지요? 그다음에 30절에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지금 기드온이라는 이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은 기드온 본인 때문입니까, 아니면 천사 때문입니까? 천사 때문이지요.

천사가 와서, 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했는데 천사가 와서 아예 날 잡아버려요. 우상은 이게 무가치하잖아요. 우상은 무가치하잖아요. 그런데 천사는 뭡니까? ‘없음’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무가치하게 있는 모든 ‘있음’에 대해서 지금 ‘없음’ 쪽에서 뭘 한다? 공격을 하고 전쟁을 한다는 뜻이에요. 없는 쪽이 ‘있음’ 쪽을 공격하는 그것을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은 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그걸 해 냈어야 했다는 말이지요. 이 약속의 땅에서.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만나만 있고 땅은 없는 땅이어야 이게 정상이다, 그 말입니다. 만나만 있고 땅은 없는 땅, 이게 뭐예요? 광야지요, 광야. 그때 그 시절의 처음 사랑을, 그때 그 처음 마음을 왜 유지를 못 했느냐, 따지고 있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세 번째 시간에 벌써 결론 나오면 곤란한데요. 약속의 땅에 만나만 있으면 된다는 이것을 그대로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만나가 뭐냐? 말씀이지요. 말씀대로 산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나머지 모든 사람은 허망한 그냥 우상이지요. 허망한 우상입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성도는 여기에 대해서 흔쾌히 동의합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게 알고 싶었던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니까, 예수님이 진짜 하늘의 차원, 모든 변화를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니까 예수님 앞에서 나는 뭐로 드러납니까? 나는 바로 무가치한 우상으로 드러날 때, 예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우상으로 드러날 때 성도가 뭐냐, 아주 신이 난 거예요. 아, 정말 신났어요.

‘주님, 취직하게 해주세요.’ 이것 자체도 아,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냥 굶는 가운데 ‘밥이라도 한 끼……’ 아, 이게 기도할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는데 이번에 장사라도 좀되어서 그래도 아버지 값한다고 ‘이리 오너라. 그래도 너 준다고 땅 세 필지 해놨다. 큰아들은 큰 것 가져가고 둘째 아들도 이거 가져가라. 자, 내가 아버지 값 하고 있잖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라.’ 이런 식으로 위신 좀 세우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었다는 사실, 그것을, 그 무가치함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도록 노출 시키는 겁니다.

‘없음’의 차원에서 볼 때 ‘있음’은 왜 그게 허망하냐 하면, 그 있게 하는 그 무엇, 있게 하는 그 원판, 바탕에 대해서 우상은 아무런 설명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 우상은 전혀 설명을 안 하고 있으니까 있어 보자는 식이에요.

이제 여러분이 복음을 들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지요? 나의 민낯, 나의 뒤통수, 나의 뒷면, 내가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는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를 도대체 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완전히 밝혀주는 거예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 없으면 죽은 거예요. 누구, 누구 없으면 죽은 거예요. 누구, 누구 없으면.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생겨난 게 이스라엘이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분 없으면 없는 거니까.

그런데 그 말과 같은 말은 뭐냐? 그분이 있다면, 놀랍게도 그분이 있다면 내가 있는 거잖아요. 주님이 십자가로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있다? 나는 죄인으로 관계되어 있잖아요. 이 얼마나 제대로 있음, 그 바탕을 아는 있음, 나의 미래를 아는 있음, 그러니까 이것은 무가치한 게 아니지요. 왜? 십자가가 들어 왔으니까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상을 붙여준 이유는, 왜 인간들이 우상으로 변해가는지, 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상을 다뤄야 되는데 드디어 이제 기드온이 위기에 빠졌지요. 죽여라, 했을 때에 그때 사사기 6장 31절에 보니까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자, 아버지가 나서는 거예요.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찐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이 말은 “바알이 실제로 신이라면 이쪽에 내 아들에게 찾아온 신은 찾아왔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바알을 섬기면서 어젯밤에 바알이 찾아왔어?”라고 묻는 거예요. “바알이 찾아왔어? 너희들은 바알을 만들었지 바알이 너히들에게 찾아오지는 않았잖아.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왔어. 어느 것이 진짜 신이냐?” 하고 아버지가 그제야, 가만있다가 왜 그제야 나서는지 모르겠지만, 아들 죽으니까 유산 물려줄 혈육이 잘릴 것 같으니까 답답했던 모양이지요.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34절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제가 이렇게 죽 설명해 보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상당히 이런 말은 한국말이지만 참 어려워요. ‘움짐달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움짐달았다. 불편했다, 안절부절한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나 알지 다른 사람은 모르느데 움짐 달았다, 아주 표현이 좋아요. 움찔대면서 아주 어쩔 줄을 모른다. 늘 조급증 가지고 그 땅에 살아야 된다, 그런 거예요. 약속의 땅이.

그러니까 36절부터 기드온이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내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어쨌든 간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우상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만들어진 신이 찾아오지는 않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없어요. 없는데 찾아왔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이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사건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뭡니까? ‘이스라엘 있음’이 되거든요. 이 사건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유월절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 한마디로 여기에 크게 쓸게요. 뭐냐? 이게 뭐냐? “차이남”이에요. 유월절 사건은 피 발라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차이남”이에요, 차이남. 차이, ‘차이남’ 하니까 꼭 사람 이름 같다. 차이! 이 차이를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걸 거룩이라 해요.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과의 차이를 계속 유발하면서 그들을 천국과 지옥에 보내는 겁니다. 차이 나는 것. 차이가 어떤 차이가 나느냐? 지금껏 세 시간 강의를 했는데 답변이 잘 안 되지요. 어떤 것이 차이가 나느냐? 바로 변화를 다른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냐, 안 가능하냐를 묻는 거예요.

내가 여기 하루하루 사는 이 변화를 주님 입장에서 설명이 되느냐, 아니면 주님 입장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하듯이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냐, 라고 묻는 겁니다. “너는 왜 그렇게 좋은데 취직을 했느냐?”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어요” 이게……, 그 이야기는 이방 민족들도 다 이야기해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거예요. “공부를 왜 그리 잘했어?” “아버지하고 엄마가 머리 좋아서 타고나서 공부를 잘했어요.” “그런 설명 말고 뭐 어떻게……, 아……, 십자가와 관계가 없는지……” “관계없는데요?” ‘아이고, 답답해라. 아이고, 답답해라.’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또는 “하여튼 내 취미는 책 읽기에요.” 그런 사람 여기도 있습니다만 취미가 책읽기에요, 할 때는 맞아요. 내 취미는 책 읽기입니다, 할 때 반드시 그 바탕을 설명해야 됩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만 붙이면 되잖아요.

이것도 뭐 repeat! 따라 하세요, 해야 돼요? 어떤 경우라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훌륭하고 안 훌륭하고 관계없이 차이 나는 이 두 영역에서는 더 훌륭하다, 덜 훌륭하다,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영토가 다른 거예요. 사는 동네가 달라요. 이쪽은 무조건 천국, 이쪽은 무조건 지옥이에요.

인간들이 경쟁하는 것, 그거 의미 없습니다. 윤석열 찍으나 이재명이 찍으나 안철수 찍으나 그거 차이도 의미도 없어요. 세 사람 중에서 “내가 대선에 나가게 된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이야기 하는 사람 있던가요? 없지요. 거룩하지 않은 거예요. 차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 6장에서 그 끝부분에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 도저히 기드온이 움짐 달아서, 다시 말해서 조마조마 해가지고 다시 한번 하나님을 테스트합니다. 37절에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줄 내가 알겠나이다”

즉 “다른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찾아왔음을 내가 인정할 테니까 내 선에서, ’있음‘이지요, 또는 나의 무가치선에서, 그 무가치선에서 이해되는 식으로 할 수 있도록 문제를 내가 출제하겠습니다. 내가 출제하고 맞추면 하나님께서 날 찾아온 것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그다음에 마른 땅에는 이슬이 없는 것, 맞지요,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온 것을 믿겠습니다, 라는 이 말을 왜 합니까? 전에 찾아온 것이 뭐가 되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은 손에 쥘 수 없거든요.

본인이 이 존재성 자체를 문제 삼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찾아온 것이 너무 감질나게 찾아왔다는 거예요. 자기 무너질 생각 안 하고 사건이 너무 갑작스럽게 왔다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리니까 ‘내가 그게 환상인지 꿈인지 내가 착각을 했는지 모르니까 주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혼자서 구시렁구시렁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우상성이에요, 우상성.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이게 소설은 아니지만 이 소설이 여기서 끝난 줄 알았지요. 딱 됐거든요. 딱 되고 나니까 기드온이 이게 왜 이루어지느냐를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있음, 자기 있음으로 자기 무가치선에서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드온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성은 결국 어디까지 번졌다? 바로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퍼졌다. 이 전염병이 퍼졌다고 봐야 돼요. 왜냐하면, 그 중 하나가 누구냐 하면, 기드온이거든요. 사사라는 기드온 마저 하나님을 측정하고 시험해서 하나님을 내가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하나님, 자꾸 도와달라 하니까 이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조금만 하고 쉬겠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이번에는 뭐라 합니까? 이번에는 더 어려운 문제를자기가 내요. 양털 뭉치, 이게 솜이니까, ‘솜이니까 과학적으로 따져서 이게 흡수력이 더 당길 수 있다. 내가 문제를 잘못 냈네. 그러면 양털은 바짝 마르고 땅에는 이슬이 축축하고 이러면 문제 됐습니까’ 하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요구하는대로 40절에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솜에는 이슬이 없고 땅에만 이슬이 축축했어요. 이 말은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미 우상에서 너희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차이남’ 그리고 사건, 하나님께서 어떤 변화를 주시되 그 변화에 대한, 결과에 대한 공로자를 절대로 인간에게 넘겨주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십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22 겨울수련회 여호수아강해 제 3강.hwp (98.5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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