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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07:04:57 조회 : 73         
20220516a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0516a 부산강의 : [시편]48(32:1)-심판 속의 구원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2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의 개념이 더 심화되었다, 깊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시편 1편에서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여기에 말씀이 있고, 또는 율법이 있고. 말씀을 내가 지키게 되면 여기서 복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복을 받는다는 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좀 유념해야 돼요. 사람이 복을 받는 게 아니고요 복이 생긴 거예요. 이걸 복된 환경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소유가 곧 자아가 되지요. 자아를 이렇게 쪼개보면 그 안에 자기가 끌어 모은 것들이 다 들어있어요. 많이 끌어 모으면 자아가 단단해지고 적게 끌어 모으게 되면 자아가 허술하고 부실하지요. 부실한 자아, 현대인들은 이걸 견디지 못합니다. 반대말이 뭐냐 하면 풍부한 자아가 되는 거죠.

따라서 이런 자아로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럼 이 자아는 달라지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부실한 자아에서 풍부한 자아로 바꿔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환경이냐 하면, 나만을 위한 환경이 되겠지요. 또는 나 중심의 환경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나 중심의 환경이란 것은 성경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성경은 복된 환경인데, 복된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내 중심의 환경이 작살나고 복이 피어나오는 공통된 상황, 그게 복된 환경이에요. 네 것 없고 내 것 없고 모두의 공통된 환경으로 누리게 되는 그 상황 속, 그것이 복된 환경이에요. 이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는 우리가 아는 구원개념은 어디에도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 개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생산인데 뭘 생산하느냐? 예수 안이라는 복된 환경의 생산을 의미하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수 안,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사 정해놨습니다. 이거는 너 구원 받는다, 나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새로운 환경 속에 같이 놓이게 돼 있느냐? 그 환경은 네가 있는 환경, 내가 있는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한 가운데 계시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천국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작살나는 환경,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있으나마나한 환경, 그걸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범죄 함으로써 내가 제일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을 간다는 말은 내가 제일 중요한 이 거짓된 환경에서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생산된 환경의 변화, 전이, 또는 이동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환경 중심의 구원입니다. 날를 잊어버리고 예수님 가신 곳으로 가는 것.

그런데 이게 성경을 이 세상의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나 자신 중심으로 보게 되면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영원한 나라,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동일한 천국, 동일한 하나님 나라를 두고 서로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립되지요. 충돌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불신앙으로 보지 않고 뭔가 그럴싸한 살만 하고 풍부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자기만의 소기의 목적이 얼추 달성됐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이고, 더 이 이상 교회고, 하나님이고 관심 없습니다. 왜? 자기는 얼추 숨 쉴 만 하니까요. 이제부터 자기 계발과 자기 발전만 남아 있지, 나의 가치를 더 확산시키는 것만 관심을 두고 있지 내가 어떻게 이게 천국에 방해된다는 생각을 감히 하겠어요? 못하는 겁니다.

내 것 있고 추가적이고 새로운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내 것이 진짜로 계신 것을 훼방한다 이 말입니다. 대립되니까요, 충돌되니까요. 말씀이 더 이상 말씀 듣게 게 필요치 않고 말씀 안에 사는 그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때는 이건 자기세계에 자기가 지금 만끽하는 중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돈 되지 건강 되지 환경 되지 자식 잘 되지 가정 화목하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져가요.

무엇과 멀어져가겠어요? 천국과는 멀어져가면서 교회에서는 뭐라고 가짜 위로를 받느냐 하면 참 복되십니다, 라는 부러움과 위로를 받아요. 진자교회는 그냥 환경입니다. 하나의 조직체가 아니고 그냥 환경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환경이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환경을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환경의 특징은 예수님 중심으로 인하여 각자의 중심성은 전부 다 짓밟히게 되는 환경, 개인적으로 자기 의로움과 정당성은 용납이 되지 않는 그런 환경, 여러분 저를 바라보세요, 라고 입을 뗄 수도 없게 만드는 환경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대신 다른 분이 내 중심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받았다 할 때 아아 나라는 가치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뒤에 보면, 거기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환경의 주인이 개입돼야 돼요.

그게 뭐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내 이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은 네 이름 아니란 뜻이에요. 이름이란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지나온 나의 모든 가치가 소복이 담겨있는 걸 이름이라 합니다. 여러분, 이름은 무엇의 압축이냐 하면 이것의 압축이에요.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 지난 나의 이야기.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 아이유도 커버한, 나의 옛날 지난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누적돼버리면 그게 내 이름이 되어서 내 과거가 있는 한 내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내가 정의가 이름으로 용납지 아니하겠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스토리가 결합되는 거죠. 연애할 때는 서로 좋게 지내다가 어느 날 결혼한 지 21년 6개월 15일 만에 상대 배우자가 내 과거스토리를 건드리는 순간, 친정이라든지 시가 건드리는 순간 파토 나는 거예요. “네가 뭔데 내 스토리를 건드리느냐?” 이 말은 네가 뭔데 내 이름을 건드리느냐, 에요.

이것 작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엉뚱한 환경 속에서 구원 받았다고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스토리가 고속철로처럼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오늘, 내일 계속 해야 될 것은 뭐냐? 내 스토리를 건전하게 건전한 요소로 추가적인 건전함과 잘남과 우수함으로 계속 객차를 연결시키는 그 일만 우리는 이걸 소망이라고 이야기해요. 내 인생의 희망이라고 보는 겁니다. “네가 다 계획이 있구나.” 그 계획이 뭡니까? 내 스토리를 괜찮게 이어서 그 최종적 괜찮음은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나라까지 잇게 만들면 그게 최고라는 겁니다.

지금 무엇이 안 죽었어요? 무엇이 부정당하지 않고 있습니까? 나의 스토리, 내 이름이에요. 나, 나의 이름. 우리가 아니고요 두세 사람 자체가 왜 두세 사람이냐? 교회가 두세 사람이냐? 여기서 내가 삭제되기 때문에 두세 사람이에요.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받습니까, 주가 함께 계십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내가 해버리면 똑같은 나도 똑같은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이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이 안 돼요.

교회라는 것은 같이 모임으로서 저 사람이 나의 스토리를 훼방하는 경쟁자인지 아닌지 아니면 나를 위하는 협조자 되는지 보이지 않는 레이저광선 이런 게 경쟁성이 있게 돼 있어요. 그 가운데, “우리 경쟁 자체가 의미 없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이게 뭐냐? 교회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기도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환경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다는 그 신기함, 이게 교회입니다.

이름의 근원은 뭐냐 하면 있음이에요. 있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지시하기 위해서 이름이 있거든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뭔 뜻일까요? 주님이 내가 여기 있고 내 이름이 여기 있는 것과 똑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똑같이 계신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어제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무덤에 보초를 세웠잖아요. 그 보초가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었던가? 바리새인들이 군인을 보내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다 이 말이죠. 이미 죽어버린 분을 지켰어요. 그러니까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게 아니고 자기세계가 붕괴될까봐 자기가 꾸리는 나만을 위한 환경이 이게 무산될까봐 자기를 지키는 자기 경비원을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세워놓은 거예요. DMZ처럼.

그래서 제가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돌문 열고 나오려고하다가 거기에 경비원이 있으니까, “아이고, 지금 나가면 들키겠네. 도로 눕자.” 이런 주님이십니까? 인간의 환경을 개무시해버리죠. 경비원이 두 명이 세 명이 지키든 관계없어요. 똑같은 이야기가 열왕기 1장에 나오지요. 거기에 엘리야 나옵니다.

엘리야 체포하러 가는데 처음에 50명 군사 가지요. 다 죽었습니다. 50명 갔는데 51명 죽었지요. 중대장까지 합쳐서 51명. 그다음에 또 왕이 화나서 51명 보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세 번째 중대장의 태도를 보세요. 세 번째 엘리야를 체포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 중대장이 발발 기면서 가요. 왜냐하면 건드리면 누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자기가 알아요. 다시 말해서 중대장의 스토리, 중대장 입장에서는 나라는 존재보다 이 하나님 보시기에 누구 존재가 우선이다? 엘리야의 존재가 우선인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함유된 의미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살았는지 관계없이 나의 스토리보다 예수님의 스토리가 우선이고 선행된다는 겁니다. 이게 신아이잖아요. 이게 신앙 아닙니까. 나는 남들이 나 이야기 듣는 것보다도 지금 함께 계신 주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셔 일하시는 그 주님이 나에게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계셨다는 말을 아까도 했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무엇이 살아 있다는 거냐? 주님의 스토리가 주의 이름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다른 말로 지금 누구든지 부활하셔서 활동하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님과 공동의 환경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그것 찾지 마세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내 안에 있는 아니면 내 밖에 있는지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그 사람에게 협박과 공갈을 시켜보는 테스트를 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에 더 관심 있고 시선에 평가에 관심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고 보기에 곤란하다 이 말이죠.

“당신, 당신 부서에 있으면서 돈 200억 횡령했지? 특별검찰이 당신을 체포합니다. 언제까지 검찰청에 나오세요.” 그 사람 검찰청에 그때 안 나오고 관악산에 가서 자살하지요. 검찰청에 나올 시간에 관악산에 가서 자살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랬습니까? 누가 그 사람 집이 세 끼를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어디 딸이 의대 탈락해서 간 거예요, 뭐예요, 왜 죽었어요? 누가 죽으라고 떠밀었습니까? 박원순이 왜 자살했어요,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상대방 여자가 죽으라고 해서 죽었어요?

왜 그런 자살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거는 자기 고유의 환경이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용서할 줄 몰라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용서라는 게 없어요. 용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용서는 어떻게 되느냐? 용서는 내 대신 누군가 나처럼 망가진 분이 있어야 용서라는 게 실효성이 있습니다. 그게 32장 1절이에요.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1절은 넘어가고 내가 말하는 것은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예수님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고 단순하게 묻게 답한다면,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주의 변화와 관련성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백날 행동 해봤자 태양이 내일은 30분 늦게 뜨겠습니다. 이런 것 없거든요. 예수님은 창조주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여가 가능해요. 그것도 실효성 있게 실효적으로.

실효적이란 말은, 말이 어떻게 됐든 어떤 이론이든 관계없이 지금, 지금 실정, 지금 이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가 실효성이라 하는 거예요.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 독도는 누구 땅이라 해요? 일본에서는 일본 땅이라 하지요. 그러나 한국에선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실효적 지배. 현재 독도의 실효적 지배는 한국정부다. 됐냐?

다케시마의 날이라 정하든 말든 간에 실효적 지배, 지금 우리에 대한 나는 내 인생, 내 스토리 따로 있고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게 일본의 망언과 동일한 거예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햇볕 안 쬐고 공기 안 마셨습니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모든 심장 뛰는 것, 당뇨 없어지는 이런 모든 것 누가 관여했어요? 발걸음을 누가 셌어요, 머리카락 누가 했습니까? 지금 많이 빠졌습니다만 그것 누가 한 거예요? 누가 실효적으로 내 육신을 관리하셨습니까? 필라테스 원장님이 했습니까, 누가 했어요? 실효적으로? 그걸 우리는 까맣게 몰랐지요.

내가 날 관리했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껏 백합과 장미를 주께서 키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소급을 해보는 거예요. 소급을 해보면 우리의 출생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출생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예레미야 1장에 나와요. 네가 엄마 태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너를 알았노라. 그때 예레미야가 저도 압니다, 라고 했겠어요? 몰라요.

무지 상태에요. 무지 상태이면서 그 무지 상태를 메워온 것은 인간들의 죄가 지배하는 환경이 나로 하여금 잘못 길로 이끌어간 거예요. 어떤 환경? 나만 잘 되면 그게 행복이고 복이라고, 내가 못 되면 저주라고 가르쳤던 이 환경이 나로 하여금 점점 더 진짜 천국과 멀어지게 만든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기존의 교회라는 게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왜? 교회는 손님 없으면 운영이 안 되니까, 돈 없으면 안 되니까. 돈 들고 온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복 달란 말이야, 이러고 온다고. 복 줄게. 그러니까 옛날에 조상 섬기고 칠성당 섬겨서 복 얻으려 한 그 민중들이 이제는 껍데기는 기독교인데 안에는 불교고 천지신명이고 똑같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요.

인간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구호처럼 제가 문장 하나를 쓰겠습니다. [내가 달라지면 모든 인간의 운명도 달라진다.] 이게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육신 됨으로 달라지면 모든 인간의 운명은 거기에 그 판을 따라서 다 재정립되고 뒤바뀌게 되는 거예요. 안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 오세요. 오면서 하나를 추가해야 돼요. 이런 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내가 복을 얻는데 기존에서 복을 더 달라고 하는 나, 그 나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뜻은 내가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면 그 환경 안에서 너는 달라질 것이다. 환경문제로 다가가지요. 그걸 예수 안에서 달라질 것이다.

기존 환경은 이렇습니다. 여자가 집에서 놀면서 살림 안 살면 이건 잘못된 것이다. 틀린 것이다. 결혼한 남자가 바깥에서 돈 안 벌어오면 그거는 틀린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부정할 인간은 없지요. 돈 있어야 사니까 부정할 인간은 없지요. 노는 여자가 살림 안 살면 집구석 엉망 되잖아요. 누구나 동의하지요. 바로 이 환경을 주께서 바꿔버립니다.

너무나 이거는 맞는 이야기고 너무나 옳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것, 그래서 내가 바뀔 생각을 추호도 하질 못하는 식으로 우리는 평생에 자기 스토리, 자기 이야기를 꾸려오고 있었던 거예요. 나 맞는데 나 항상 옳은 것만 생각해. 여기서 시편 32편 1절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32편 1절이 뭐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허물의” 그다음에 뭡니까? “사함을” ‘허물’이란 단어가 출현됩니다. 등장해요.

어디서 등장하느냐? 주의 이름에서 등장해요. 허물은 쉽게 말해서 죄거든요. 죄라는 것, 기존의 우리 인간 환경에서 틀렸다는 말은, 이런 것을 죄라고 보고, 남자가 돈 안 벌고 여자가 살림 안 살면 이건 틀렸고 죄고 그 여자, 그 남자의 허물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규정해왔다 이 말이죠. 그게 우리가 용납하는 환경이었어요.

그 환경 말고 진정한 복은 시편 1편에 보면 율법과 관련돼 있습니다. 율법. 율법에 의해서 보면 그동안 허물과 죄, 다시 말해서 잘 들으셔야 돼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으로 오는 식으로 달라졌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발생된다? 제대로 된 죄가 뭐냐, 의가 뭐냐? 그것이 예수님 홀로 달라짐으로 다른 모든 피조세계가 달라지게 돼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우주의 모든 활동을 관장한다 이 말이죠. 창조주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달라진다는 것은 죄를 비켜가요. 왜? 워낙 본인이 잘났으니까. 본인들이 어느 정도로 잘나게 살아왔느냐 하면 나쁜 짓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혹시 실수해서 나쁜 짓하게 되면 보다 많은 착한 일로 상쇄시켜서 더하기, 빼기해서 항상 착한 존재로 자기를 견지하고 유지해오면서 남들 앞에 나갔을 때에 기죽지 않는 것으로 버티면서 평생을 지금 조심스럽게 살아왔잖아요.

그래서 남은 것은 뭐냐? 나 잘남을 증명해주는 그것만 달랑 남아 있지요. 그런데 그동안은 이렇게 윤리적으로 잘 살다가 나중에 나이 한 서른 되어 친구 따로 교회 갔더니만 내가 빠뜨린 게 있네. 뭘 빠뜨렸어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것 빠뜨렸네요. 그것 뭐 추가되면 되지요. 현재도 잘났는데 거기다가 예수 믿는 하나님 믿는 것 추가해버리면 잘난 내가 더욱더 완벽을 기하게 된 거죠.

완벽한 나는 가만있지 않습니다. 다른 완벽한 경쟁자와 너 나와, 해서 시합 붙지요. 네가 흠집이 적은지 내가 흠집이 적은지 한 번 해봐? 으르렁, 으르렁. 항상 으르렁거리죠. 이거는 타인과의 관계만 아니고 심지어 부부지간에도 으르렁거리고. 그래서 으르렁 부부에요. 심지어 형제들, 자식들, 친척들 가운데서도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느 정도 지금 위치에 있고 어느 정도 순위에 올라와있는지 늘 확인하는 그 재비로 하루 온종일 다 보내요. 뉴스 보면서 다 보내요.

“너거 아버지 고위공무원 안 돼도 봐라. 얼마나 착실하나. 저 고위공무원 걸린 인간들 봐라. 국회의원 되어 제명당한 것 봐. 너희 아버지 얼마나 훌륭하노. 그렇게 네 아버지 칭찬하는 나(엄마)는 얼마나 훌륭하나.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가족이란 것을 잊지 말고 파이팅!”

이런 식으로 그게 하루일과가 눈에 들어와 보이는 것은 전부 다 내 안에서 편집되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체적인 그게 다인 거예요. 창조주는 바뀌었는데 우리는 안 바뀝니다. 그래놓고 어디를 가요? 주의 나라에 누가 넣어주는데요? 주의 나라 가지 말고 네가 하는 네 나라나 그냥 폭주해. KTX 열차면 네가 기관사해서 나 이 조시로 간다 해서 그냥 달려가요.

이걸 죽음을 향한 폐달, 그냥 폐달 막 밟아. 갈 때까지 가보자~~ 하루하루가 어느 방향인 줄 모르고 갈 때까지 그냥 액셀러레이터 밟는 거예요. 가봤자 낭떠러지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저주의 세계지요. 천국이 아니고 반대 장소, 웰컴 지옥. 여기서부터 지옥입니다, 이런 팻말 보이면서 끝났지요.

누구 탓이야?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고 본인이 그걸 선호해서 그래요. 본인의 의지가 결정해서 그래요. 왜? 자기 본성은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뀐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바뀌심이 어떤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고 이 환경이 우리의 내부로 들어옵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 화살표는 어디까지나 주님 쪽에서 하는데 모든 과정에 무엇이 관여하느냐? 바로 말씀이 관여해요. 말씀 안 들어도 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방향타, 방향조절을 해줘요.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우리 애가 또 1등 했어요.”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뭔가 투자를 했더니만 열 배나 불었습니다.”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야.” 그쪽 아니란 게 내용이 어디 나와요? 성경말씀에 다 나와요.

그럼 성경말씀은 누가 썼습니까?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누가 계십니까? 물어야지요. 성경말씀을 누가 기록?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되도 않은 그런 신학적인 것 하지 말고 그 안에 누가 사십니까? 성경말씀은 주께서 타고 다니는 나는 양탄자에요.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데 그 말씀이 집약돼 있어요.

이미 예수님은 완성됐으니까 말씀이 집약된 채 오시는 그 집약체가 시편 1편에 보면 말씀 지키는 자가 뭐였습니까? 복이 있지요. 그러니까 말씀의 집약체 안에 뭐가 돼요? 복이 있겠지요. 이 집약체 안에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가복음 9장 43~49절 누가 읽어보세요.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9절까지 제가 읽어보면,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렇게 돼 있지요.

여러분들이 여기 들어야 될 것이 찍어버려라, 빼버려라 자기가 자기를 그냥 용납하지 않는 그 모습이 주께서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한다?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나의 스토리가 나의 구원을 방해해요. 내 스토리가 주님의 스토리를 방해했던 거예요. 찍어버리는 거예요. 이 못된 놈, 이런 식으로. “이 구더기한테 다 씹힐 인간아.” 누가 누구보고? “영혼은 지옥 불에서 씹힐 인간아.” 누가 누구에게 지금 욕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욕하되 화내고 하지 말고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가볍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치 않은 쓰레기에 대해서 애착 갖는다는 것은, 그것은 일종의 정신병이죠. 치매 걸린 할머니들 구청에서 가끔 들어가면 1톤짜리 쓰레기 다 나옵니다. 동네에 있는 스티로폼 다 끌어 모았지요. 그러나 할머니한테는 인간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소유지요. 소유가 많아지면 자아가 풍부하다 하잖아요. 빈 스티로폼은 치매 할머니한테는 쓰레기가 아니고 상당히 소중한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멀쩡한 재벌들이나 공직자들에겐 스티로폼 안에 현찰 들어있으면 그건 소중한 거지요. 웬 스티로폼을? 전복 드시라고. 전복 열어보니까 오만 원짜리 둘둘 말아서 있단 말이죠.

힘. 도대체 이게 누굴 위한 힘이에요? 나를 어떻게 하려는 힘이냐 말이죠. 성경말씀에 마가복음 9장 43~49절 말씀은 지옥에서 우리를 천국으로 빼내기 위한 힘이 되는 거예요. 그 힘은 나를 키워주는 힘이 아니고 쓰레기통에서 나를 찢어버리고 빼내버리고 아주 박살을 내시는 그 압도적인 힘, 어찌 이것이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있습니까. 즐거운 소식이죠.

우리는 남들이 내 손 하나 건드리는 것도, 그리고 내가 나를 건드리는 것도 불쾌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길 가다가 조금만 머리카락 건드려도 용서하지 않잖아요. 귀한 나의 머리카락을 왜 터치하느냐? 용서하지 않지요. 만약에 남자라면 성추행으로 걸려요. 그 정도로 우리는 아주 민감해요.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고.

그러니까 이거는 꼭 정신병동에 안 가도 늘 우리는 예비 우울증 환자로 살고 있습니다. 쓰레기에 대한 집착, 자기라는 쓰레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나니까. 이게 모순이잖아요. 모순이라 하는 것은 원인도 없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는 그게 모순이잖아요. 나는 버려지면 안 돼. 왜? 나니까.

나는 왜 버려지면 안 되는데? 버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나야.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그냥 뺑뺑이 도는 나 중심의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거예요. 이게 정신병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했지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고. 현대 모든 인간은 정신병이에요. 정상적인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이 말이에요.

안 바꿔서 그래요. 바뀔 생각이 없어서 그래요. 그럼 바뀔 생각도 없는데 바꾸란 말 자체가 이것도 모순되지 않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버립니다.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면 내가 바뀐다, 라는 이 문장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내 안에서 귀신 나갔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동안 내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던 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악마의 힘, 악마가 스스로 제국을 유지하는 그 힘에 우리가 농락당한 거예요. 악마의 제국에 우리는 제국인 줄 모르고 농락당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일하기 전에 제일 먼저 어딜 가느냐? 광야에 가서 누굴 만나는가? 광야란 일종의 링이거든요. 아무도 없어요. 일대 일로 최종 매치를 벌이는 거예요. 마지막 결승, 너, 나와. 광야에 아무도 없는데 사람이란 없어요. 오직 누구만 있느냐? 예수님 홀로 있었던 겁니다. 이건 어떤 인간의 눈으로 봐도 2.0, 2.0 눈으로 봐도 그렇게 보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2.0 눈으로 보지 못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거기에 악마가 예수님 만나러 나온 거예요. 악마는 우리 인간을 안 만나줍니다. 어떻게 종이 주인을 함부로 만나요. 안 만나주는데 예수님은 악마가 자진해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나러 나옵니다.

만나서 악마가 인간세계를 어떠한 이념으로 사상과 정신구조로 그동안 꼼짝 마라는 식으로 다스렸는지를 세 가지 양상으로 알려줬지요. 사람은 떡으로만 못 산다. 사람은 남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못 산다. 사람은 소유의 힘이 없으면, 권세, 자기 것이 없으면 못 산다. 결국 그 세 가지를 종합해보면 사람은 떡 없으면 못 산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하거든요. 못 산다. 소유된 힘이 없으면 못 산다.

악마가 이걸 인간세계를 이런 식으로 충분히 다스렸던 이유가 뭐냐 하면 살아야 사는 것이라는 여기에 모든 인간은 묶여버렸던 거예요. 인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그냥 사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그걸 최고의 중독은 뭐냐? 그냥 사는 것, 사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치 않다. 이거는 수학의 공리 같은 것이라서 따지지 말자. 무조건 받아들이자. 너도 살고 싶잖아. 나도 살고 싶어. 그런데 우리는 살 이유도 없이 살아야 된다는 것, 그러한 공통 환경 속에 악마에 의해서 조성된 환경 속에 우리는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그냥 거기서 살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것 봐. 죽어도 살잖아.” 죽어도 살잖아, 이 정도가 아닙니다. 죽어야 산다. 그것도 아니에요.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우리는 살고 싶은데 악마 때문에 못 산다. 이렇게 되면 질문을 그렇게 해버리면 뭐가 아직 탈락이 안 되고 있어요? 예수고 부처고 간에 살려주면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삶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것 남아 있는 이상은 그 예수, 그 하나님, 그 부처는 전부 다 마귀의 또 다른 가면이에요. 마귀가 가면 쓴 거예요.

내가 부처 믿어서 지옥 가는데 그럼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까? 이 말 자체가 잘못된 건데 왜냐하면 천국 간다는 그 뒤에 뭔가 생략돼 있지요. 천국 가서 살 수 있습니까? 산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끝까지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해답은 요한복음 11장에 잘 나와 있어요. 내가 곧 산다. 내가 너를 살려주는 게 아니고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 내가 산다, 내가 생명이다. 네가 지금 시선을 너한테 보지 말고 나한테 보면 되잖아. 그거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게 되면, 잠시 보고 가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지어진 나의 생명을 보장하세요, 라는 것은 마귀 말이고, 주님이 계신다면 주님이 필요한 것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낼 그러한 권한은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라고 인정해버리면 그게 생명이다 이 말이죠. 왜? 예수님이 생명이고 부활이기 때문에.

그다음에 4절 보세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네가 죽은 것 생각하지 말고 생명의 빛,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이미 너는 살았다. 죽어도 살았고 살아서 나를 인정하는 자 이미 죽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기 것을 자기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것을 우리가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 우리를 그릇이라고 해요. 뭔가 담는 용기, 그릇.

그래서 그릇이 되게 되면 집에서나 교회 오나 무엇의 이동수단이에요? 예수님의 빛의 이동수단이에요. 새로운 환경, 주님이 주인이 되는 환경 이동 그러니까 교회는 환경입니다. 교회 자체가 환경이어야 돼요. 그 환경을 환경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말씀밖에 없어요. 복음은 뭐냐? 너희들은 고집스럽게 안 바뀌었지만 주님은 바뀌었다.

어떻게? 죄 없으신 분이 뭐 됐다? 죄인 됐다. 왜 우리는 그렇게 안 바뀝니까? 우리가 죄인 되면 되잖아요. 주님이 하신 것은 그대로 답습하면 되잖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죄 없으면서 죄인 됐고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아닌 척하기 때문에 우린 본색을 드러낼 필요 있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죗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주님의 아주 적절한 복된 조치지요. 우리가 끝이 난다는 게 우리 스토리가 끝이 있다는 게 세상에 희대의 기쁜 소식이에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 없습니다.

사람 죽일 때 교도소 가서 사형당하면 되지. 사형당해서 끝나면 이게 나도 사람 죽이고 사형 대신 내가 알아서 자살하면 되겠다 싶지만 이게 성경에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게 안 죽어요. 지옥 가서 또 살아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그러니까 아까 마가복음 9장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은 결국은 두 영토로 그렇게 종결되거든요. 마지막 웃는 자가 뭐가 됩니까? 승자지요. 마지막이 되면 앞에 있는 것은 마지막 그것만 보고 나머지는 무효화시킵니다. 얼마나 출세하고 성공하고 그것 다 아무 관계없고 내가 어느 공간, 어느 환경 속에 놓여있는가? 그것은 주께서 나에게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제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10분 후에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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