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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3 10:10:22 조회 : 39         
안양20220616a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212.135.128)
안양20220616a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사

스가랴12장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이상하지요. 은총인데.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줬는데 그 은총과 간구는 심령이 제시되고 있는 그 출발점, 그 출발점은 애통입니다. 슬픔이지요. 은혜가 슬픔에서 나온다 이 말이거든요. 은혜가 통곡에서 나온다. 상당히 어떻게 보면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입니다.

통곡의 특징은 상실에서 와요. 상실. 무슨 상실이냐, 나의 것의 상실이에요. 나의 것의 상실이니까 나의 것은 더 축소하면 곧 나가 되겠지요. 그런데 통곡에서 뭐가 나온다 했지요. 주님의 제대로 된 은혜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요걸 줄여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를 집중해서 공략한다? 어디를 만난다? 나. 결국 내 문제로 돌아오는 겁니다. 너는 너로 인하여 울어라. 너의 상실로 인하여 울어버려라. 너의 것이 강탈된 것에 의해서 니가 울어라. 너의 것이 모든 것이 없어졌다는 것에 울어라. 그 울음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내 것을 완전히 도려내는 그 능력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내 것에 내가 도려낼 거덜 낼 마음은 어느 누구한테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은혜가 나를 가위표 거덜 내는 거예요. 거덜 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그냥 일반인들의 다수 중에 그냥 다수로 흩어져버립니다. 다수들 중에 다수. 개인이라 할 것도 없어요. 다수들 중에 다수가 돼요.

어느 시에 보면 나와요. 박목월시에 나오지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하는 시가 생각나지요. 산산히 부서진 내 이름이여. 이름이 부서지니까 이건 어떻게 되느냐, 흩어지는 겁니다. 흩어지겠지요. 흩어져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혼돈이 되는 겁니다. 혼돈. 내가 내 자신에게 혼란스러워요. 혼란스러울 때는 사람들이 주로 오유영 박사를 많이 찾아요. 가정에 문제가 혼란스러울 때.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를 찾게 되는데, 지금 이 두 가지를 비교 해야 돼요. 질서를 혼돈스러워 했느냐, 아니면 혼돈을 질서스러워 했느냐,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원래 인간 자체가 주님이 보기에 혼란스러워요. 혼돈스러운 곳에서 자기 질서를 잡는데 무슨 질서를 잡느냐 하면, 나 중심으로 질서를 잡아요.

그런데 이건 내 혼자만 한 게 아니고 다수 중에 다수. 모든 다수들의 물결, 다수들의 넘쳐남들, 더 범람된 다수, 이 세상 전체가. 다수라는 것은 많다는 뜻이에요.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들이 한 풀장에 이렇게 같이 모여 있다가 연세 많은 다수들은 한 쪽 구석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96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송해는 송해대로 죽고, 동해는 동해대로 죽고, 남해는 남해대로 죽고 전부 다 죽지요.

그리고 그 범벅이 된 다수의 범벅이 된 그 안에서 또 응애하고 애기가 태어나고, 한쪽은 생일잔치한다고, 돌잔치한다고 하고, 한쪽은 태어나고 한쪽은 사라지고 이건 뭐 부대찌개 센 불에 하게 되면 뽀글뽀글 끓잖아요. 한쪽은 죽고, 한쪽은 살고. 이쪽은 돌잔치한다고 웃고 있는데 바로 옆집에는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울고 있고, 요새 할머니 죽었다고 울지는 않습니다만 애고, 애고 폼 잡고 하는 곳 있고, 세상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질서는 잡았지만 정돈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게 질서가 아니고 무질서의 그 자체. 혼란이 질서를 잡으면서 혼란이 제거되는 게 아니고 혼란이 가중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학자들은 또는 신학자들은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은 이 혼돈을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로 설명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방식이 다수에요. 또. 니는 니대로 설명해라. 나는 나대로 설명할게. 니가 니 설명에 꼭 복종할 의무는 없잖아. 이런 식으로 서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건 니 주관이지. 나는 내 주관 따로 있어. 그래. 니는 그 식대로 살아.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야. 친구야! 그게 아니고 내 말 들어봐라. 이래야 전체가 한 바구니에 모을 수 있잖아. 한 바구니에. 과일도 여러 가지 과일이 있지만 한 바구니에 담아야 이게 정돈되고 정돈돼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인간을 안정감 속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러면 상대방이 “안정감을 얻는데 니 방식 말고 내 방식으로 안정감을 얻을 수도 있잖아. 니 왜 그 생각 못해.” 월요일날 소주 먹고, 화요일날 막걸리 먹고, 수요일날 딴 거 먹고. 일주일 내내 저녁에 술 먹는 식으로 나름 안정감을 찾는다. 왜? 니 방식 아니라고 해가지고 니가 나를 지금 무시하나. 그것도 내 방식이지요. 매일같이 술 먹는 방식으로 자기의 정서를 안정화시키는 그것도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는 방식이다. 이말이지요.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방금 이야기 들어보면 다수를 일자(一者) 하나로 바꾸려는 시도를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가 먹힐 수 있는 하나입니까. 그 하나가 누구한테는 먹히고 타인한테는 안 먹히겠지요. 자기한테는 먹히겠지요. 왜? 처음부터 그 질서를 질서잡기를 내 편한 쪽으로 질서를 잡아넣었기 때문에 나한테는 적용이 되는데 옆 사람한테는 적용이 안돼요.

아내한테는 적용이 됐는데 적용이 남편한테는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여보, 앞으로 우리 가정 이렇게 살자.” “니나 해! 니나. 너나 잘하세요. 나는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왜 사람이 강요를 해. 강요를. 나를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야.” 티박만 대빵 듣고 있지요. 티박만.

그러면 이 다수를 하는데 또 두 종류가 생겨버립니다. 두 종류가 자꾸 분류가 돼요. 다수가 그래요. 일관성 없는 다수. 일관성 있는 다수. 이 일관성 있는 다수는 구성적 다수라고 합니다. 구성적 다수. 일관성 없는 다수는 그냥 실존하는 거예요. 일관성 없는 다수는 실존이고, 일관성 있는 다수는 존재인데요. 예를 들어서 버스 서는데 여러 사람이 아주머니하고 애들하고 할아버지하고 이렇게 서 있다. 그러면 길 건너는 사람이 저기 열 사람 서 있네. 할 때 그럼 열 명이 하나입니까? 전혀 모르는 사이지요.

그런데 버스 기다리는데 다섯명의 한 식구가 애들하고 서 있다. 그러면 그냥 다섯명이 아니고 일관성 있는 다수겠지요. 가족으로 구성된 다수가 되는 겁니다. 일관성 없는 다수는 그냥 실존하는 거예요. 돌멩이가 놓여있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교회 교인들도 그래요. 와봤자 이야기도 안 하고 끝까지 있다가 이야기도 안 하고 그냥 예배보고 쓱 가는 사람 실존입니다. 일관성 없어요.

만나가지고 오늘 복음 어땠어? 이렇게 하면 구성적 교회가 되지요. 그러나 어쨌거나 이건 하나의 구성적 다수했지만 일관성 다수의 문제는 여기서 공통점, 공통점을 임시적으로 끄집어내서 임시적으로 구성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다수 자체가 공통점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수는 공통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다수 중에 나가 있어요. 나는 안에서는 내 안에는 전부 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수 중에 다수에 섞여버리면 결국 그 다수가 내 의견에 내 뜻에 맞출 수 있는 그러한 근거는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의 사건에 통곡하지요. 상실을 느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어디를 겨냥한다? 나를 겨냥해서 와요. 나를. 왜냐하면 내가 행해봤자 구성적 다수 그것도 그 때 그 때 다수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형태, 색깔, 향기, 꽃다발 만드는데 형태, 색깔, 향기, 가격, 그리고 어느 농원에서 만들었느냐 이런 것들이 하나의 꽃다발을 형성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나는 뭐로 형성됩니까? 나는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 나는 그 중에서도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키가 얼마냐, 더 분석에 들어가서 나의 DNA 구조는, 내 세포수는, 내 혈액형이 얼마냐, 이러한 여러 가지의 다수의 요소가 우연하게 조립되고 결합된 게 그게 누구라는 말이죠? 나지요. 나 자체가 단일체가 안되고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겁니다.

거기다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그러한 성과물도 결합이 돼요. 초등학교 때 1등 했다. 초등학교 때 개근상 탔다. 전국사생대회에 나가서 내가 입상했다. 그런 것들을 조합해서 그게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 볼 때 상대방 여자보고 “나, 중학교 3학년 때 사생대회에서 1등했어요.” 그러면 “아, 나도 미술에 취미가 있는데” 마음 맞아가지고 둘이 결혼했다 칩시다. 결혼하고 난 뒤에 대학교3학년 때 전과가 있다는 거. 전과가 하나 있어가지고 마약해가지고 전과가 있다면 그 사실은 여자가 몰랐지요. 그걸로부터 갈라서게 됐지요.

그리되면 결국 무슨 뜻이에요? 나를 구성하는 요건이 내가 아는 것도 있고, 그리고 내가 모르게 우연적인 것들이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챙긴 것 보다 더 많이 내 안에 조립돼 있고 결합돼 있는 거예요. 요소로서. 내가 원치 않는 다수의 요소들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대로 크게 쓸게요. ‘권력이 주체를 만든다.’ 나는 권력이 만드는 거예요. 권력이라는 말이 주체하고 너무 어려우면 쉬운 말로 하면 환경이, 내가 살아온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그 환경은 뭐냐, 다수들의 다수지요. 넘치는 다수. 범람하는 다수. 그 다수 중에 나도 하나의, 아까는 다수 중에 내가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가 아니고 나 자체도 분해해 보면 다수의 요소로 산산히 부서질 요소들이거든요. 다 헤아리다가 못 다 헤아릴 이름이여. 평생을 살면서 내가 누군지 다 마스트 못하고 죽어버리는. 이거 억울해해야 되겠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 역량이 어느 정도이며, 나의 장점과 약점도 제대로 파악 못한 상태에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도 모르면서 그냥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산 거나 죽은 거나 똑같아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은 산 것의 그냥 연장이고. 애초부터 죽었다가 그냥 때 되면 죽는 거예요.

점을 영 차원이라 하고, 선을 1차원이라 하거든요. 그렇지요. 점을 영 차원, 제로차원이라 하고, 선을 1차원, 선이 모이면 면적이 되니까 이걸 2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1차원 선에서 영 차원은 어디 있는가, 끝에 있지요. 선의 단면도가 점이 되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1차원과 영차원이 동일한 거예요. 차원을 따져서 굉장히 복잡성을 유지했지만 복잡성은 전부 다 단순성으로 다시 회귀되고 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라지는 거예요.

애곡한다고요? 통곡한다고요? 운다고요? 그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종점입니다. 인간은 나라는 것, 나라는 다수에서 인간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울음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내 것으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럼 웃는 건 뭐냐, 그건 착각이죠. 잠시 혼돈이 온 거예요. 뭐 일이 잘된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우는 것이 기본이에요.

지금 스가랴12장10절은 바로 인간에게는 마땅히 울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해야 되고 슬퍼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례지요. 불세례. 불과 영원히 만나야 될. 불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존재. 그러한 대상. 불세례는 그 대상이 차지하는데 그 대상이 뭐냐, 인간이에요. 인간과 악마를 불 질러 버리는 태워버리는 소실되지 않도록 태워버려서 영원히 고통을 주는 그 저주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전에 나로부터 탈출해야지요. 마치 우주선이 캡슐 안에서, 우주선이 아니고 제트비행기가 전투기 비행사가 전투기가 엔진이 꺼져서 불붙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레바를 잡아당겨가지고 공중탈출 해야 돼요. 정들었지만 탈출해야지요. 이건 뭐냐 하면 환경으로부터 탈출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알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예수님이 만들었던 시간과 공간속으로 이동시키는 그 작업을 주의 영이 와서 심령, 주님의 영이 와서 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주님의 영이 온다는, 주님의 영은 뭐냐, 주님께서 몸소 체험을 했어요. 사람의 몸으로 왔다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아픔과 어떤 모순 속에 살아있는가, 그 모순의 세계에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친절에 친절을 더하셔서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주님이 데려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불속에 있는 애 보고 “나와라. 뜨거워. 빨리 뛰어!” 애가 걷지도 못하는 애가 우애 뜁니까. 뛰고 싶지요. 아주 걸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뜁니까. 안되겠다. 내가 가야겠다. 부모가 뛰어들 듯이 주님께서 아예 우리가 걸음마 수준인 것을 아시고 우리가 스스로 불의 세례에서 불세례, 불 세계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아시고,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아시고, 직접 지옥까지 찾아와서 극한 친절을 베푸시는 겁니다.

그래야 이웃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 비유잖아요. 이웃은 누구냐, 자비를 베푸는 자에요. “야, 강도 만난 사람아, 빨리 일어나라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이게 안 되지요. “친히 내가 돌봐줄게. 단 너는 강도 만난 자가 되어야 돼.” 스스로 자아에서 못 벗어나오고 허우적대는 그러한 장애자 그 모순 된 자 그걸 우리는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걸 부상강의에서인가 그걸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의인이면서도 죄인 연기를 하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재미있겠지요.

이미 합격했는데 서울대학 합격했는데 떨어진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아휴, 두 문제 맞췄으면 되는 건데. 이미 합격은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떨어진 코스프레를 하는 거예요. 이미 천국에 합격했기 때문에 지옥 갈 행위만 하는 거예요. 즐겁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가지. 호호호. 이런 식으로. 주여, 어떻게 하면 지옥갈 수 있습니까. ㅎㅎㅎ 제발 ㅠㅠㅠ 좀 하지 말고요. ㅎㅎㅎ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 답이에요. 이미 답을 얻었기 때문에 이젠 충분히 망하는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통곡하는 척하시기 바랍니다. 심각한 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심각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심각한 척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주님! 이 타이밍이 심각해야 되지요? 타이밍이. 주님과 인간의 만남은 연이은 통곡에서만 만납니다. 그게 은혜이기 때문에.

이 심령이 이 통곡하는 심령이 누구 심령이냐, 바로 주님의 심령, 주님의 심령이 바로 우리의 심령이 돼요. 왜냐하면 이게 주님의 심령이 성령이 우리의 통곡을 미리 같이 맛본 그 맛본 통곡의 심령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탄식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울게도 하시고 때로는 웃게도 하시고 우리를 불속에서 다독거려주시고 데리고 나옵니다.

그 방향이 뭐냐, 방향이 누군가 이 자리를 탈출하신 분이 계시는 그 십자가가 그 분이 크게 느껴지는 쪽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불에 탄 거슬린 우리를 뽑아내주지요. 우리는 뭐 온 천지가 모순덩이고 지저분하고 더럽고요. 자기가 자기 완벽을 구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무릇 28가지 영양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에스더처럼. 영양제가 한달에 이백만원이 넘도록. 영양제를 그렇게 지가 지를 살려보겠다고 애쓰는 그 모습을 우리로 하여금 수시로 하게 만들어요. 그게 우리의 한계니까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느새 이 다수 중에 다수. 다수들의 다수에서 하나 쪽으로 뽑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수에서는 빠져나가지를 못하지요. 그러면 다수에서 다수는 못 나온다 했지요. 왜냐하면 내 중심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내 중심이 있는 이상은 내가 아무리 “여러분, 제 말 들어보세요. 이리야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 따로 있어.” 이러면 이야기는 끝나는 문제에요. “니 인생 니가 살고 내 인생 내가 이리 살게.” 그런데 여기 내 중심이 빈자리에 빈자리를 공백이라 합니다. 내 중심이 통곡을 통해서 그 순간 내 중심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도려냄을 당한 거예요.

자, 통곡은 아까 처음에 했지요. 통곡은 뭐라고 했습니까? 상실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는데 갑자기 비행기 바닥에 화물도 실어 넣는데 화물칸에 갑자기 중간에 뭔가 잘못돼가지고 나사가 빠져가지고 동그랗게 떨어져 나갔다면 그 바닥 하나가 떠나갔다면 그럼 그 화물칸에 안에 뭐가 있어요? 빈자리가 있지요. 이 말 자체가 모순돼요. 빈자리가 있다가 되면 곤란하지요. 그냥 합쳐서 빈자리 있다 하지 말고, 그냥 뻥 뚫렸다. 이걸 무라고 하는 거예요. 무(無). 없음이에요.

그러니까 나에게서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없는 자리가 나한테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없는 자리가. 그리고 그동안 나를 질서 잡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이 뻥 뚫린 자리에서 이렇게 쏟아지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인도함을 받으면서. ‘참, 이거 내 일 아니잖아. 주의 일이잖아. 아이구, 내 자식 아니잖아. 주의 자식이잖아. 어이구 내 남편 아니잖아. 주의 남편이잖아. 이거 내 거 아니잖아. 주의 것이잖아.’ 자꾸 내 것이 쓸려서 빠져나가버려요.

그럼 나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게 없어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을 여러 가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만 그 표현 중에 간단하게 표현 하는 방법 중에 이게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는 특징은 이게 바로 불신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불신자들의 특징은 ‘자기 정화 장치가 깨졌다.’ 자기 정화 장치가 깨졌어요. 자기 정화 장치. 인간은 자기가 계속해서 개선과 발전을 시도합니다. 정화하는 거예요. 왜 사람이 정화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뭐냐 딱 하나에요. 발전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인간 차원에서 신의 차원으로 발전을 시도하는 거예요. 그 선악과 따먹고 싶다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간격과 결핍을 마저 채우겠다고 개선의 노력을 하는 거예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이걸 시도하는 겁니다. 시도하려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하게 되면 내 뜻대로 발전이 가능하고 내가 만약에 악을 전하면 퇴보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이게 꽉 원력으로 박혀버렸어요.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가 뭐냐 하면 바로 권력이라는 겁니다. 어떤 권력? 선한 권력. 선한 능력. 그 능력이 지금의 나를 더 낫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이러한 내 희망을 포기 못한다. 그럼 뭐가 돼요? 상실이 없지요. 자기 자아 내부에 뻥 뚫
리지 않았어요. 사람이 뻥 뚫려야 바람이 들어와 시원합니다. 그런데 꽉 막히니까 더러운 냄새만 밀폐된 자아 안에 더러운 기체가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방귀도 뀌고 트림도 하고 지저분한 가스는 다 끌어 모아 놓고 그걸 자체적으로 쓰레기통을 마련해 놓고 자체 정화를 하는데 그 쓰레기통이 쓰레기에요. 쓰레기통 자체가 쓰레기에요. 나중에는 쓰레기통 한 개 가지고는 안 되니까 두 개, 세 개, 네 개까지 다섯 계속해서 쓰레기통을 증가시키는 겁니다.

그건 뭐냐, 도대체 안 망하겠다는 거예요. 안 망하겠다고 하니까 점점 더 이게 사태가 심각해지는 거예요. 쓰레기통을 자꾸 설치하니까 중량감이 늘어나는 겁니다. 75, 78, 80, 90 막 넘어가시는 거 경험하셨지요. 지금 4Kg 뺐겠지만, 아~ 계속 쪄보세요. 심각합니다. 살 찐 사람 90넘어보세요. 여기서 무게 얘기하면 안 되겠다. 나 예상도 못했다.

다수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방법이 없어요. 신을 믿는다 해도 나를 위한 신이에요. 전부를 한분으로 뽑는 신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다수에서는 나가 이미 하나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신은 나의 그저 보조지요. 시다바리지요. 역시 내가 신이에요. 그리고 이 범주 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정화장치를 하는 거예요. 소위 종교, 교회 다니기, 내가 깨끗하게 하는데 그게 환기가 안돼요. 창문이 있어야 환기가 되는데 온 사방이 꽉 밀폐되어있는데 환기가 되겠어요? 내가 토한 걸 내가 먹고. 아이고야! 죄송합니다. 내가 회개기도 해놓고 회개했다고 지 자랑질하고. 이게 정화가 됩니까? 지가 토한 것을 지가 섭취하는데 그게 무슨 정화에요. 말이 안 되지요.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상실이라고 했는데 그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창조’지요. 크게 쓸게요. 창조.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구원자만 되는 게 아니고 구원을 할 때 자신의 창조 기술을 삽입해서 구원을 해버려요. 그리고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너를 잊어라.” 왜 잊어야 되는가, 옛것이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술은 안 잡숴도 그 정도는 알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부대에 새 부대만이 새롭게 창조를 담아낼 수 있는 포대기로서 주께서 우리를 뽑아내서 차출하신 거예요.

어제 수요일 차출 이야기했잖아요. 뽑아내는 것. 뽑아내서 새로운 창조를 우리라는 포대기에 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동적으로 내 것 있잖아요. 옛 것. 내 것은 밑에 있는 바닥난 공백, 뻥하고 뚫린 구멍으로 그것은 쏟아버려야지요. 그게 하루입니다. 그 다음날 되면 어제의 구성된 내가 또 하나의 폐기물이 돼요. 그 날 구멍에 대해서 빨리 나는 없애버리는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을 하셔요.

그러니 주의 일은 하루치 산 나를 그날 저녁으로 소멸시키는 일이 주의 일입니다.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걸 생각해볼 때 이렇게 내가 나를 위해서 매일같이 목숨이 유지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건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은 내 고집이지 나만의 고집이거든요.

다른 사람이나 앞집이나 옆집 아저씨에게 “아저씨, 혹시 저를 살리셨습니까?” 물어보면 답변 안합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뜻이지만 뭐든지 내 뜻대로 된 적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닌데 왜 삽니까?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한 번 해보셔야 돼요.

내 뜻은 살고 싶지만, 첫째는 1번, 내 뜻은 살고 싶다. 2번, 내 뜻은 된 적이 없다. 3번, 그렇다면 내가 왜 사는가, 왜 사는가, 그게 창조주가 옛날에만 창조주가 아니라 지금도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자기 창조를 발휘하셔서 자기 창조를 옛포대기에는 우리 같은 여기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 육신은 옛 부대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광야의 만나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음식을 먹게 되게 되면 그 다음 우리의 몸도 그 만나의 새로운 몸의 의미를 유지시켜 주는 하나의 술독, 포도주를 담는 독처럼 새로운 독으로 주께서는 새로운 독이 되라고 하루치를 주신 겁니다.

누가 한 번 마태복음6장34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참새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들에 핀 꽃이라 생각합시다. 들의 백합화. 그렇다면 들의 백합화가 내일을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참새가 내일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불쏘시개 될 수밖에 없는 그 들풀도 오늘 주께서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3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은 하나님이 충실하게 지키는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의 창조물이 아니고 주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가운데서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아픈 심령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냥 내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해먹을 생각만 한 사람이 제자들이었어요.

지금 말씀은 이렇게 해도 말씀을 깨달은 성령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이 왔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 계셨구나! 하는. 내 안에 주님 계시는 방식으로 나를 죽을 때까지 계속 이끌고 가시는구나! 라는 사실. 내 일을 버리고, 버리는 동시에 주님의 일을 내 일에 채우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주의 일이에요.

내가 창조주고 내가 창조하는 방식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걸 증거하고 그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친히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사용하려면 우리는 바로 은혜를 알아야 되고 그 은혜는 내 것에, 옛 것, 내 중심, 잘난체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은혜가 공격을 하고 공격한 그 만남의 장소에서 우리는 애곡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어요.

그 귀한 내 것. 그 내 것이 상실하니까요. 우리는 평소에 주님의 영이 오기 전까지는 내 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키워서 내 것을 천국 집어넣으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그쪽에 집중되어있었어요. 남이 뭐고 치우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그 것. 그 것 뿐이었는데 거기다가 러시아 미사일처럼 은혜가 날아와서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그게 나오지요.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자, 이제 성경의 난해한 구절에 드디어 도달했습니다. 정말 난해한 구절이에요. 이 난해한 구절 해석하기 어려운데, 다른 것도 해석하기 어렵지만, 참 불가능한 이 해석을 위해서 제가 이 창조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신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잔혹하게 죽였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을 죽였으니까 여기에 아버지의 아픔이 들어가 있고, 아들의 아픔도 있고, 성령의 아픔도 이 아들의 죽음에다가 다 들어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니 손으로 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장차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바칠 때 그 심정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전이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떤 강도가 와서 죽이는 게 아니고 니 손으로 내 아들을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는 거예요.분명히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 때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시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죽이신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해 본적이 없을 겁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의 생각은 이래요. 여러분, 모세가 홍해 나올 때 자기가 약속의 땅 못 들어가는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모세가 못 들어감으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 자기 하나님의 백성이. 참 신기하지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못 들어가도 그분은 들어갈 만한 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만난 유일한 분이고. 그리고 그동안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대행자고. 그리고 그 분이 없는 이스라엘,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모세 덕분에 우리가 들어갔다. 그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은 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을 인간들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은 그 하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이건 뭐 하나님의 심술이 아니고요, 진리입니다. 진리. 엄마가 선반에 맛있는 케이크를 올려놓고 출타했을 때, 학교 마치고 온 애가 그 케이크가 있는 걸 발견하고 케이크 지가 키가 안 되니까 의자해서 안되니까 옆에 보면 가구가 있어가지고 가구 서랍을 열고 그 가구 서랍을 계단으로 삼아서, 가구가 높으니까 케이크를 건지기 위해서 그 가구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이케아 가구로 넘어져 죽은 사람이 애들이 한 두명이 아니에요. 이케아 사고요. 조립식에 넘어져가지고 애들이 죽은 게 한 두 건이 아닙니다. 그 이케아 사고가 왜 났을까요. 높은데 기어올라가다가 넘어진 거예요.

그 애가 케이크 탐을 내면서 애가 자기 부인이 됩니까? 나는 안 먹어도 돼! 나는 먹을 가치도 없어. 이럽니까? 그럴 거 같으면 애초에 올라가지도 않지요. 인간의 종교라는 게 뭐예요? 누구를 위한 거예요? 멀쩡한 살아있는 자기를 위해서 더 살기 위해서 더 온전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라는 걸 갖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의지하고 딛는 그 분이 딛는 순간 내 쪽으로 넘어와서 같이 죽자고 이케아 가구처럼 나를 덮쳐버리면 서럽에 얼굴을 바치고 덮쳐버리면 결국은 성공을 못했잖아요. 내 시도가 내 구원시도가 성공을 못하지요. 그래서 구원 실패하라고 교회 다니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 믿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서 애통해하지요. 그게 은혜에요. 어디 감이 옛 술이 옛 부대에 담아서 새 술 행세하려고. 덮쳐버린 겁니다. 뭐 금식한다. 뭐한다. 뭐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시도한 우리에게 덮쳐서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낙타가 바늘구멍에 못 들어간다. 주님이 알아서 바늘구멍 되게 하신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모든 인간을 낙타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는 주님 자신이 바늘구멍 되신 거예요. 아무도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그거다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창세기3장24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그 취지를 살려줘야 그 취지를 유지해 줘야 악마가 그 뒤에 입을 다물어요. 악마는 고소하는 자이기 때문에. “제 천국가면 안됩니다. 정당하게 고소하거든요.” 악마의 입을 다무는 방법은 “그래, 니 뜻대로 죽여버렸다. 됐냐! 이제. 악마야.” 악마는 자기도 못 들어가거든요.

못 들어가는 감 찔러나 본다고 지도 못 들어가고, 인간을 유혹해가지고 인간도 못 들어가게 만들고 악마는 게임 끝났다 본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뭐냐, 하나님을 사람 만들어서 마지막 아담 만들 줄은 계산을 못한 겁니다. 나중에 마지막 아담 오니까 악마가 악을 쓰면서 유혹해서 아버지를 시험하고 아버지를 의심하도록 그렇게 광야에서 의심을 했던 거예요.

옛날 아담, 옛 부대입니다. 옛 포도주지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 새 포도주고, 그 새 포도주가 창조를 했어요. 뭘 창조를 했는가, 새 부대를 창조했습니다. 그 창조한 거 그 교체하는 작업에서 하나님은 가차 없이 아들을 죽였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가 죽는 거 보고 애곡하고 슬퍼하는 거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220616a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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