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8-02-11 22:05:29 조회 : 360         
서울의존강의20180209a 빌레몬서1장(소유권정리)-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8.64)

서울의존강의20180209a 빌레몬서1장(소유권정리)-이 근호 목사

 

오늘은 빌레몬서 1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11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절,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고 빌레몬은 오네시모의 주인이고. 여기 종과 주인 사이에 누가 끼어드느냐, 사도바울이 끼어듭니다. 사도바울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어요. 기능이 있다고요. 그 기능이 뭐냐, 복음 전파하라는 기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결국 본인의 위상을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고, 사도바울의 주인이 따로 있죠. 우리 주님의, 복음의 종이죠.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관계, 그 관계를 빌레몬과 오네시모와의 관계에다가 그대로 대입을 하는 겁니다. 대입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네시모가 너의 종은 맞는데 그걸 형제라고 할 수 없겠느냐?”라고 제안을 해요. 형제. 형제까지 돼버리면, 지금 사도바울과 빌레몬과 갖은 관계가 형제관계입니다. 예수 안에서 형제. 그 형제관계까지 오네시모가 격상하게 되는 겁니다. 신분이 격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현대사회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집에 강아지하고 고양이는 있죠. 그러니까 개(오네시모)한테 물어보지 않고, 사도바울이 빌레몬한테 “너희 집에 있는 개(오네시모)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쳐주면 안 되겠느냐?”하는,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인간을 개라고 보지 않죠. 민주주의 사회니까 형식적으로써는 인간위에 다른 주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이라는 것이 헌법상으로 용납이 되지를 않죠.

 

그런데 경제적으로 종속이 될 경우에는 종은 아닌데 흔히 종 부리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 부리듯. 상대적으로 정신적으로 박약하고 정상이지 않는 그런 사람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살살 달래서 계약서에 도장 찍게 만들고 나라에서 장애자들에게 주는 모든 비용을 자기가 가로채고, 그렇게 그 사람을 종 부리듯 하죠. 종 부리듯 한다고 해서 종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계약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언제든지 자유인이 될 수가 있고, 정신적으로 아이큐가 떨어지는 사람의 친척이 와가지고 내 아이 내놓으라고 하면 그건 고발감이 되는 겁니다. 종에서 다시 자유인이 되는 거죠. 그거는 무슨 관계냐 하면 경제적인 관계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신분 자체가 종이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옛날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신분 자체가 종이에요. 신분 자체가. 왜 그런가 하면 이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오게 되면 그게 종이 되고, 종들이 필요했다는 그 이유가 농경시대에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 가지고 오는 겁니다. 여자든 남자든 전부 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에요. 민수기 31장에 보면 미디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통해서 40년 뺑뺑이 돌고 애굽에서 올라온 사람 중에서 두 사람 빼놓고는 다 죽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고 난 뒤에 그 후에 태어난 사람을 데리고 모세가 요단강을 통해서 약속의 땅의 진입을 노리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 가는 길, 풀이 잘 나있는 길에 주인이 없을 리가 없죠. 주인이 있죠. 그 민족들하고, 미디안이고 모압이고 간에 전쟁을 하게 됩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홍해를 건너와서, 여기가 지중해고, 사해있고, 위로 100킬로 요단강 있고, 그 다음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여기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이고, 요단강을 통해서 공격한다 이 말이죠.

 

근데 이 땅이 괜찮은 땅이에요. 풀도 나고 목축하기 좋은 땅이에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그들이, 자기 아이들 많고 목축이 많으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다가 눌러앉고자 하다가 모세한테 아주 혼나죠. “니들은 어떻게 살 궁리부터 하느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은 여기에 있는 가나안 열 족속을 치라고 올라가게 했는데, 살 궁리부터 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 치고서 다시 이 땅을 차지해도 되냐고 해서, 그러면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 모압 암몬 미디안, 여기서 칩니다. 치면서 하나님이 승리케 하죠. 그럼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필히 포로가 생기는 거예요. 이 포로를 뭐라고 규정을 해야 하느냐 하면 진즉에 죽어야 될 존재가 포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죽여 버려라. 그런데 남자를 안 여자는 다 죽여 버리고 남자를 모르는 여자는 그냥 데리고 살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근데 그때그때마다 조건이 달라집니다. 토실토실한 양하고 이런 것들은 챙겨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외에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른 이방민족은 사람으로 쳐줍니까? 쳐주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간주를 하지 않아요. 이게 성경에서 참으로 기본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래 돼야 해요. 이스라엘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은 사람으로 쳐주지 않아요. 그냥 뱀의 후손들이에요. 하나님의 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사람 아니에요. 항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할 때는, 이게 조건부에요.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성막에서 제사 지낸다는 조건하에 동행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행이 안 돼요. 원래 동행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마을에 손승범씨가 질문을 했죠. 원래 동행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왜 동행이 안 되느냐, 동행할 가치조차도 없기 때문에 동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동행할 가치가 언제 생기는가, 그들 속에 하님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란 분이 거기에 같이 동행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보고 같이 동행해요. 그 이름이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표시와 사인이 있는데, 그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의 삶에, 현대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어요. 구약성경부터 죽 내려와야 하는데,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옆으로 기어들어갈라고 하는 거예요. 옆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삼위일체라고 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시다. 어디 앞에? 인간 앞에. 인간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으니까, 삼(三), 위(位)라고 해놓고, 이 분이 전부 다 하나니까 일체(一體)라고 해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그렇게 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세 분이니까 삼위고, 그 분이 전부 다 하나니까, 여기서 한 분이라고 하면 안 돼요. 하나라고 했어요. 하나니까 일체라고 하자고 용어를 붙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김밥 옆구리 터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위치가 없어요. 인간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십니까? 성자를 보내시죠. 성자.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죠. 그럼 아들은 몇 분입니까? 한 분이죠. 아들은 한 분이죠. 그럼 예수님을 누가 보냈습니까? 성령이 보냈잖아요. 한 분이잖아요. 신약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죠. 성령께서 한 분이고, 성자가 한 분이고, 성부가 한 분이고.

 

그럼 인간은 한 분만 믿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 분을 김밥 옆구리로 옆에서 보면 안 돼요. 이런 자리가 없다니까요. 이런 자리를 하나님이 허용한 적이 없어요. 성령이 한 분 오셔서, 성령이 한 분 오신다면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성자하나님 계시고 성부하나님 계시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무슨 삼위일체가 왜 필요합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을 지식으로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것은 언어의 나열이잖아요.

 

근데 그 언어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성사가 됩니까? 그거는 그 사회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통념에 의해서 언어가 만들어져요. 이게 병이다. 병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은 아는데 미국사람은 모르죠. 병이 뭐지? 병byung? 이러잖아요. 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끼리 통하는 단어를 동원한 겁니다. 예수, jesus도 마찬가지고. 예수아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거거든요.

 

인간의 지식은 단어에 담겨서 지식이 오게 되고, 그 단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인간이 알 수 있는 그림으로써 만들어져요. 그림부터 먼저 구상이 되고 그 그림에 단어를 맞추는데, 그림과 단어가 이게 일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비슷하게 맞추지 일치되는 것은 없습니다. 코끼리도 마찬가지고 개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고. 고양이 당사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편리에 따라서, 자기들의 분류방법으로 제 3자의 대상을 일방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한테도 그것이 안 통하는데, 하나님에게 성부성자성령을 붙인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요? 통하겠어요? 안 통하죠. “하나님 어떻게 부르면 좋겠습니까?” “니가 알아서 뭐할래?” 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고 하죠? 모세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름을 알아버리면 그걸 결과적으로 딱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병인데, 병이 무엇입니까? 아, 이게 병이구나! 하고 가져올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근데,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호와다. 아, 여호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소유대상이 될 수가 있어요. 안 되죠.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쪼르르 쫓아와야 됩니까?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은 인간들끼리 부르는 이름이에요. 호명하고 호칭하면 쪼르르 앞에 달려와야 할 이름. 전화하면 전화 받아야 할 이름. 여러분 전화번호부에 하나님의 전화번호 있습니까? 하나님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 010- 그 다음에 몇 번입니까? 2384- 뭐 이렇게 되는 겁니까? 호출하면 오는 겁니까? 전화번호부에 성부성자성령 전호번호 뭐 이런 거 없죠. 이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내가 저쪽을 부를 때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건사하는 거예요. 내가 굳게 토대를 잡고 있는 마당에서 누구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버리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렇게 이름 부를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시 생각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죽은 존재기 때문에 이름 부를 자격도 없어요. 미친 사람이 중얼중얼한다고 다 내려올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왜 부르는지, 뭣 때문에 부르는지, 왜 불러야 되는지 아무 이유를 몰라요. 그냥 어느 유력한 타인 부르듯이 그냥 답답해서 불러보는 거예요.

 

인간을 부를 때는 정확하게 누구누구라고 불러야 됩니다. 이름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이~! 해가지고는 여러 명이 올 수가 있고 아무도 안 올수가 있잖아요. 정확하게 김OO 이OO, 라고 불러야 오듯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는 정확하게 불러내야 하는데, 불러낼 수 있는 그런 걸려있는 이름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하나님의 이름은 그게 따로 계셔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상대할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만 상대하지, 그 외에는 상대를 안 하는 겁니다. 인간은 죽은 존재기 때문에 상대를 안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속에 삽입을 시켜놓고, 이름이 있다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겁니다. 주님을 보고, 동행하시는 분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내 인간요소 말고 주님의 요소를 심어놓고 우리와 동행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는 겁니다.

 

죽어라 철야하고 금식하고 웃기지도 않아요. 부르면 부를수록 누가 오겠어요? 귀신만 들끓죠. 귀신만 와요. 귀신만. “그래, 왜 불렀느냐?”하고 호리병 속에서 나타나고, “왜 불렀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부른 예수잖아.” 마귀가 예수를 왜 인정을 못하겠습니까? 마귀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데. 예수를 원하면 예수를 주고, 뭐 하면 다 주는 거예요. 예수 만났다고 좋다고 하고. 진짜 하나님을 만났으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고, 부를 필요도 없고, 내 죄 때문에 그냥 지옥가도 합당합니다, 라는 그러한 느낌으로 다가와요.

 

그게 바로 사울(바울이 되기 전)이 예수님을 만날 때 이미, 사울이 예수님에게 제시하기도 전에 예수님 쪽에서 이미 사울을 규정해버렸습니다. 뭐라고? 니는 나를 뭐하는 자라고 했습니까? 핍박하는 자. 핍박하는 자예요. 핍박하는 자를 주님께서 안 만나도 되는데 만나주시잖아요. 안 만나도 돼요. 근데 만나주시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뭔가 안다는 것이 문제인데, 아는 것 때문에 인간은 엉터리 하나님을 부르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알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봉사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아무것도 안 한 짓이 되기 때문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항상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거부할 수밖에 없는 짓이에요. 그런 짓거리를 하고 온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평생을 아무것도 안 하다가 늙어 죽어서 지옥가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 라고 생각이 되겠죠. 나만 손해라고. 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찔러야지, 뭐 아무것도 안 하고, 해봐도 소용이 없지만 답답하잖아요. 참을 수가 없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에게만 참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동은 반드시 참을 수 없어서 나온 행동들만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게 소변 누는 것. 그 다음에 집에서 밥하는 것. 사흘 동안 밥 안 한다고 하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밥해요. 모든 행동은 하고 싶어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주님에 대해서 마중나간 것도 주께서 먼저 건드려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을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 쪽에서 먼저 건드려줬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테스트해보라고 해요. ‘이제부터 내가 예수 믿으면 나는 개다. 안 믿겠다.’하고 한번 테스트 해봐요. ‘교회도 안 나오고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고 나는 그냥 나쁜 친구와 같이 살래.’ 같이 살든지 한번 해보란 말이죠. 해봐가지고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거든, 편하거든 그건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동안 남 믿는 것 시늉이나 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유발한 ‘가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뭔가를 하게 됩니다. 뭔가를 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답답증을 준 겁니다. 답답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기도가 아니에요. 인간은 뭘 해도 인정 못 받아요. 다만 내가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그것이 바로 그동안 꿍하고 참고 있었지만 비로소 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만 짓고 구원받는 거예요. 의를 한 번도 한 적도 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구원받는 사람의 보편적, 모든 공통점이에요. 진짜 천국 간 사람의 공통점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그게 분명해지고, 그러니까 감사에 감사의 꼬리를 물고 계속 터져 나오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힘들게 일하고 돈 벌어서 밥과 반찬을 했다. 그래서 이거는 내 공로라고 생각을 했는데, 일하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진수성찬을 차려줬다는, 그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러한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사시간을 통해서 주시는 겁니다. 식사시간을 통해서.

 

한 가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식이 세 명이 있다. 세 명인데 우연히 자식 한 명 주워가지고 네 명이 됐다 칩시다. 하나는 재벌 집 아인데 훔쳐 와서 네 명이 됐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들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저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이만큼 누가 키웠다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키웠다고 생각을 해요. 본인이. 이게 바로 죄인 거예요. 본인이 키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자식은 절대로 부모가 키웠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아무리 아빠엄마가 밥을 해줘도 그 밥을 먹고 안 먹고는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한다는 것을 세상에! 두 살도 안 된 애가 그걸 보인다니까요. 두 살도 안 된 애가. 난지 3개월도 안 돼서 그 모습을 보여요. 6개월 되서부터 으음~ 싫다고 고개를 돌리죠. 엄마는 김치하나 얹어가지고 쫓아다니고, 애는 도망치기 바쁘고, 밥 한 번 먹어주면 뭐 하나 줄게, 라는 거래가 형성되어가지고 그래서 밥 한 번 먹어주고. 또 해주고. 모든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착각하기를 저 자식은 내가 키웠다는 거예요. 자식은 거기에 절대 수긍을 안 합니다.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아버지라고 대해주고 고맙게 여긴다고 하죠.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다른 자식 같으면 아버지한테 효도를 안 하는데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아가지고 아버지한테 효도한다는 거예요. 엄마한테 효도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뤄버리면, 거기에 각자의 정답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존재함이 유일한 진리고 그게 정답이에요. 각자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민족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진리고 정답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모압 민족을 맞닥뜨리죠. 여러분 광야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해한 것은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천국이기를 원했어요. 약속의 땅이기를 원했어요. 그러한 텀이 있는 것을 몰랐어요. 광야라는 텀.

 

사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언질을 준 적이 없어요. 착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각한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말하는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애굽에서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살았잖아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뭐다? 나를 살리기 위한 땅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땅. 나를 살리기 위한 땅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를 죽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오해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오해를 털어내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사도바울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죠. 사도바울은 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대우를 받았지만, 자기들은 종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비록 바로한테 압제를 받았지만, 노예 생활을 했지만, 그들이 억울하다고 반발하는 것은 종도 아닌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반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부르짖은 거예요.

 

여러분, 뭔가 부르짖을 때는 뭡니까? 현재 이 상태가 내가 보기에 내 가치와 일치되지 않는다, 균형이 안 맞는다고 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거예요. 수능을 앞두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하잖아요.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좋은 점수가 나오도록 기도하잖아요. 근데 좋은 점수를 그냥 달라고 하면 이거는 염치없고 도둑놈심보기 때문에, 뭐라고 앞에 단서를 붙이느냐 하면 아주 온화하게 붙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공부한대로 나오게만 해주시고, 실수 없이 답 밀려 쓰지 않고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실수 없이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해달라고 해서, 공부한대로 나온 것이 500점 만점에 75점 나왔는데요. 공부한대로만. 그래놓고 기도했는데 점수가 이거밖에 안 나왔다고 또 난리에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요. 다만 그들이 아는 것은, 어떤 존재라는 것은 완전히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나는 가치 있게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하는 것이 자기의 진리에요. 이 진리는 손톱을 가지고 흠집 내면 난리가 납니다. 난리 나요. 모닝차타도 벤츠한테 기 안 죽습니다. 왜? 언젠가는 벤츠를 타고 말거야, 라는 그런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내 존재를 무시하지 말라고 이래 나와요.

 

인간은 누구의 종이 아니에요. 본인이 인간이라니까요. 주님께서는 이 인간을 종으로 바꿉니다. 지금 이 텀이 뭐냐 하면 광야40년이에요. 광야를 통해서 니가 인간이냐고 한번 스스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니가 인간이냐? 쉽게 말해서 니가 인간이라는 조건을 니가 어디서 얻었느냐 이 말이죠. 어디서 배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거 어디서 배웠겠어요? 애굽에서 배웠겠죠. 그렇죠. 애굽에서는 인간들끼리 같이 살았잖아요.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면서 살았다 이 말이죠. 히브리인들이.

 

그런데 바로 왕이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압제를 하니까, 자기는 부당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에 부응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굴 보냈습니까? 모세를 파견근무 시켰잖아요. 모세를 파견했다고요. 모세를 파견할 때 모세는 인간이었습니까? 종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종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신발 벗어라!”에요. 떨기나무에서. “신발 벗어라!” 그럼 이거는 모세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면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겁니까?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성도가 그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수능 쳐서 75점 나왔다. 누구 점수에요? 본인점수 아니에요. 누구 점수입니까? 하나님의 종 아무개의 점수에요. 하나님의 종의 점수에요. 참 하나님 점수 안 주죠. 500점 만점에 75점. 어쨌든 간에 감사해야죠. 75점을. 점수가 좋아서, 나빠서 감사가 아니고, 계속 주의 종으로서 수능을 치게 했고, 그 점수가 나오도록 하는 그 상황을 통해서 종 됨을, 종의 관계를 견지한다는 것. 그걸 계속 지켜준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했다가 아니라, 종한테는 개인적인 자기의 위상이라든지, 위신, 체면, 명예, 이런 것은 허용이,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종에 대해서 성경에 이야기가 참 많은데,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시간이 되는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제자들을 철저히 밟습니다.

 

35절부터 보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절,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절,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종이죠. 예수님께서 주인이라면 제자들은 뭐가 돼야, 무슨 역할을 해야 예수님의 사역에 적합한 역할이 됩니까? 종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종의 역할.

 

다시 말해서 “니가 내 종이 됨을 영광으로 알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영광스러운 지위로서 니가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주님의 종이 되면 반드시 이거는 기능이 돼야 돼요. 종은 개인적인 목적이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 됩니다. 개인적인 목적이나 계획이 용납이 안 돼요. 자기 인생도 없어요. 주님이 오면 문열어줘야 해요.

 

그러면 주인의 시기에 종속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타이밍에 종속이 되는 거예요. 언제 올지 누가 알아요? 주인의 시간에 종속이 된다면 그러면 종은 개인적인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적으로 자기만의 보람과 자기만의 인생가치를 따로 챙길 수 있는 시간이 허용이 돼요? 허용이 안 돼요. 그러면 자기 시간이 없죠. 자기 시간이 없으면 자기 역사가 없죠. 자기 역사 없으면 자기 인생사 없죠. 그러니까 자기 인생사가지고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내 인생 왜 이렇게 됐냐고 스스로 자기 인생보고 그걸 감사하지 않으면서 탄식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모든 유행가를 보세요. 전부 다 자기의 시간대가 있어요. 모든 유행가. 어찌합니까,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모든 유행가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지금 나훈아 리사이틀 하고 있어요. 모든 끝이 자기 시간이 확보되어 있다니까요. 자기 시간이. 자기 스케줄. 그게 지금 종이에요? 아니면 자유자 흉내를 내는 겁니까?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미리 땡겨서 천국에 들어오지 않으면 죽어서 천국 못 갑니다. 미리 땡겨서 지금 죽기 전에 천국에 입성해야 해야 해요.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성령을 받아야 돼요. 가서 성령을 주는 것이 아니고.

 

ROTC에 보면 가입대가 있어요. 3(육해공)사관학교나 여사관학교나 이 모든 군에 갈 때는, 이 사람이 군대훈련을 견딜 수 있는가를 추려내기 위해서 가입대, 입대가 아니고 가짜 입대를 해요. 그래가지고 인간을 아예 기계로 만들어요. 그거 자존심 상해서 못 견디면 나가라 이 말이죠. 퇴교조치 당합니다. 월급도 요새 많이 주는데, 돈 많이 나가는데 억지로 뭐 하려고 다 입대시키겠어요. 그런데 군에 징병은 가입대가 없어요. 왜? 자기가 자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월급제직업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강제입대하기 때문에.

 

만약에 강제입대 했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나가라고 하면 전부 다 병신역할을 한다고요. 이럴 게 빤한데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군에 수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에 인턴제도가 있는 겁니다. 인턴제도. 인턴제도 해가지고 휴가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보너스도 없어요. 하도 왔다 갔다 하니까. 회사에서 키워놓으면 딴 회사로 가기 때문에. 회사입장에서는 노무자한테 놀아나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주인인데. 철저히 인턴해가지고 미생 만들어서, 미생에서 완생이 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종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 12장 38절에 “주인이 혹 이경에나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로다” 39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니까 종은 철저하게 사전에 주인이 어느 때에 온다는 정보를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절대로 몰라야 돼요. 알게 되면 이거는 종이 같은 급인 줄 알고 착각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제자나 성도들을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로마서 6장에도 우리를 의의 종이라고 해요. 그러면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이래 질문할 수가 있죠. 레위기 25장 5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품꾼이라는 말은 같이 지내려고 해서 뽑아낸 것이 아니고 일을 맡기려고 이스라엘을 뽑아낸 것입니다. 그 일은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 왜 약속의 땅이냐를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맡아야 해요. 역할을. 그럼 약속의 땅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는다는 말은 간단히 해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야 돼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너의 것. 내 인생은 너의 것~♬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당신에게 주춤주춤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아낌없이 몽땅 다 그대에게 드리죠. 다 드려야 돼요.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거예요. 참 이러면... 만약에 자기 딸이 어떤 남자를 알았는데, 남자가 너무 좋아서 나 그대에게 모든 걸 다 드리리, 라고 하면 친정에서 등짝 때립니다. “이 등신아! 애 없을 때 좀 살아보고 아니거든 헤어져라! 등신도 아니고 어떻게 남자를 믿어도 그렇게 허술하냐? 나는 니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등신인줄 몰랐다.” “엄마 나 그이 없으면 못 살아요.” “이 등신 하는 짓 좀 봐라. 니가 지금 결혼생활 몇 개월이나 됐다고, 애 낳고 한번 살아봐라. 니가 지금 하는 소리가 얼마나 바보짓인지 알거다.” 그러면 딸이 “엄마는 격려는 안 해주고 왜 자꾸 초를 치느냐”라고 하죠. “나도 다 살아보고 다 해봤거든. 인간은 믿을 것이 못되더라.” 막 이런 것. “그럼 엄마는 왜 아빠하고 사는데?” “이 나이에 돈이 어디서 나오노?” 결국 연금보고, 돈보고 그냥 각방 쓰면서도 한집에 있는 거예요. 돈보고.

 

종이 된다고 할 때, 인간 입장에서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아이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놓고서는 인간을 종으로 삼다니! 내 나름대로 고유의 계획도 인정 안 해주고, 나의 희망도 인정 안 해주고, 주인이 시킨 대로만 해야 되니까, 에이, 나는 이게 뭐지?”라고 이렇게 하는데, 이 종이라는 원형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종이 된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의 종이 되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이 땅에서는 종이 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해요. 여호와의 종이라. 이게 바로 이사야 53장이 아닙니까? 때리면 때리는 대로 군말 없이 맞아야 되고, 마치 도살할 양 같다고 했습니다. 도살할 양같이.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모가지 쥐고 올무해서 질질 끌고 가죠. 어디로 갑니까? 죽는 곳으로. 죽기까지 복종해야 할 종.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서 무슨 자리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비로소 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자리가 확보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자리가.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우리를 모가지 쥐고, 목덜미 쥐고 질질 끌어서 구원의 자리, 주님이 가셨던 그 구원의 자리, 십자가 자리까지 끌고 옵니다. 쓴잔을 마시게 하죠.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이 말은 바로 예수님이 시범조로 그 코스를 먼저 갔다 이 말입니다. 갔으니까 그게 way,길이 되는 거예요. 없는데 길이 만들어졌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그 진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만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질 끌고 간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발적 의지는 하등의 소용이 없습니다. 자발적 의지는 소용이 없어요. 인간들은 자발적 자기의지로 가게 되면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거기는 숫자가 많은 거예요. 숫자가.

 

어느 교회든 숫자가 늘어나거든 그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설교가 뭐 잘못 되었나? 분명히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닌데, 뭔가 내가 사람을 좋게 한 요소가 섞여 있었나?’ 왜냐하면 종한테는 소유개념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거든요. 어차피 종은 주님의 소유잖아요. 종 소유가 따로 있습니까? 그런 게 없어요. 종이라는 말은 자기 것도 주의 것이니까. 내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내 교인, 내 수입, 이게 종한테는 기쁨의 대상이 안 된다니까요. 기쁨의 대상이.

 

종이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라고 해서 죽을 정도로. 그만 살라고 해서 지진이 일어나 깔려가지고 한 서른 세 살 살다가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죠. 근데 40대 쯤 된 모르는 사람이 와가지고, 사실은 니가 모르지만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나는 니 할아버지가 보내서 온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다 생각이 있어서 너를 마음속으로 양자삼아서 니 허락 없이 호적에 올려놨다. 너에게 뭐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죽을 때가 됐으니까, 할아버지 유산 176억을 너한테 몽땅 다 준다.

 

그래서 난데없이 세금 빼고 한 150억을 받았어요. 오직 너밖에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럼 그 사람은 푹 고민에 잠기는 거예요. “내 것도 아닌데 왜 집을 또 주십니까? 이 150억을!” 그럼 하나님께서 “그동안 골프 못 쳤지? 골프 치고. 여행 못 갔지? 1년에 2번씩 여행가고.” “아휴~ 나 비행기 못 타는데?” “미국 LA에 수영장 두 개 딸린 저택사가지고 팔아먹을 때 좀 괜찮거든. 산불 난데 말고 산불 안 나는데 해가지고, 한국이 춥다 싶으면 거기 LA에 좀 쉬었다 오너라.” “아, 나 LA이 거기 싫은데?”

 

이게 종입니다. 이게 종이에요. 어차피 내 게 아니니까.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십일조 낸다는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몰라요. 십일조 내게 되면 나머지기 십의 구는 뭐다? 누구 것이다? 세상에! 자기 것이라고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십일조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데 십분의 일을 내게 되면 나머지기는 내가 알아서 처분하겠다는, 자기 처분이 거기에 개입되기 때문에, 이거는 갑자기 종이 아니죠. 종이 아니면 어디를 안 거쳤다? 광야라는 지대를 지금 안 거친 게 돼요.

 

광야지대를 안 거치게 되면 어디에 못 갑니까? 광야지대 안 거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이 없어요. 자기가 주인공인데 뭐.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무슨 시간이 없다? 내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송재원씨가 저한테 질문했는데, 뭐냐 하면 나의 모든 시간은 누구의 시간으로 채워야 하는가, 주님의 시간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싫든 좋든, 내가 힘들다, 좋다,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어디 지옥에 와가지고 쉬려고 합니까? 쉬려면 천국 가서 쉬지, 지옥에서 왜 쉬려고 해요? 지옥은 쉬는 곳이 아닙니다. 고생해야 할 곳이고 천벌 받아야 할 곳이지, 쉬는 데가 아니에요.

 

그러면 예를 든 LA이 별장은요? 그건 쉬는 곳이 아니죠. 그냥 수영복입고 고생하는 거죠. 따뜻한 햇볕 받으면서. 맨날 바비큐 해먹으면서 고생하는 거예요. “에이, 바비큐만 해먹으니까 지겹다. 바비큐보다 더 맛있는 거 없나?” 그걸 고르는 고생, 고난. 주가 주신 고난입니다. 여러분,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에게 메뉴판 들이대보세요. 가뭄 때문에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메뉴판 들이대면 그건 모독이잖아요. “뭘 잡수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된다니까요. 뭐든지 먹죠. 뭐든지 감사해야지 않겠습니까? 왜 메뉴판 줍니까? 선택할 게 뭐가 있다고?

 

내 인생이 아닌데? 판사 되라면 판사 되어 종. 검사되라고 하면 검사되어 종. 의사되어서 종. 판사, 검사, 의사, 내가 맡은 종이에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워요. 아무 때 시험 봐도 백점이에요.” 그건 주께서 맡긴 종이에요. 니는 공부가 제일 쉬우니까 공부하라고 해서 판사 되는 것, 그건 그 사람이 맡은 종이라니까요. 집안 좀 잘 살고 얼굴 좀 된다는 여자 분들은 꼭 시집을 판사, 검사, 의사, 재벌, 삼성임원들한테 시집을 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 전부 종이에요. 물론 성령 받아야 종이지만. 종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내감을 고를 때는 자기 맘대로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에게 국한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 지금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끼리. 저쪽 말고 우리끼리. 그래서 남자 쪽이 결혼해줄 때 내가 조건이 맞아서 했다고 하지마세요. 그 사람은 주의 지시에 따라서 나라는 아내를 맞이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이 좀 산다고 해서 기죽지 마세요. 벌써 기죽었어요. 기죽어서는 안 됩니다. 기죽어서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80209a 빌레몬서1장(소유권정리)-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게시물7,483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315
공지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영상 안… 최지영 18-07-30 429
공지   [책]2018 신간 '하늘의 징조'출간&구입안내 (1) 최지영 18-05-31 488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754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1479
공지   실시간 생방송 새주소 입니다. 관리자 17-02-19 4134
공지   이 근호 목사님 저서 안내 관리자 14-07-11 5009
7986   255강-YouTube강의(행복)20181016-이 근호 목사 이미아 18-10-17 21
7985   254강-YouTube강의(자살)20181016-이 근호 목사 이미아 18-10-17 25
7984   정석훈 목사님 10월 집회안내 이명직 18-10-16 45
7983   309강-갈 6장 9-10(믿음의 가정)181014-이 근호 목사 오용익 18-10-15 46
7982   206강-여호수아 7장 10–12절(실패한 원인)20181… 송민선 18-10-14 57
7981   강남 모임 안내(10. 16. 화) 이명직 18-10-14 38
7980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18-10-13 28
7979   20181008b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한윤범 18-10-12 39
7978   20181008a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한윤범 18-10-12 52
7977   159강-창 41장 25-31절(바로꿈해석)181010-이 근호 목… 오용익 18-10-11 48
7976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181002b-이근… 홍민희 18-10-11 36
7975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181002a-이근… 홍민희 18-10-11 54
7974   서울 강의 안내(10/12/금) 이미아 18-10-11 32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