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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6:39:21 조회 : 333         
137강-창 35장 27-29절(이삭의 죽음)180509-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49.39.243)
137강-창 35장 27-29절(이삭의 죽음)1805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장 27-29절입니다. 구약성경 54페이지입니다.

창 35:27-29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어떤 사람이 늙어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늙어 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삭이 늙어 죽었다는 것을 성경으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으로 기록한 거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여타의 사람들이 늙어죽는 것 하고 이삭인 늙어죽는 것 하고 그 차이를 너희들이 아느냐,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이 죽는 것과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이 죽는 것과 어떤 관련성이 있으면 구원된 자고 관련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극히 평범한 일이고 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요.

그러나 이삭이 죽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 이삭이 죽어서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라는 이 대목에서 세 사람이 나오지요. 이삭 나오고 야곱 나오고 에서, 이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이삭의 자식들이니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하다, 보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뭔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그것이 성경말씀을 믿는데 최후의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사람이 뭘 안다는 것은 아는 만큼 미래에 자기 힘이 되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와서 믿는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믿는다고 하기보다는 뭘 하나 새로운 정보를 알았다, 아는 것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왜냐하면 알게 되면 알기 전의 나와 알게 된 후의 나가 더 튼튼해져요. 아무 차이가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지적으로 더 증거 하는 거지요. 그런데 알던 것에서 믿게 되면 내가 산자가 아니고 이미 벌써부터 죽은 자라는 사실을 감 잡게 되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살아 있는 나에게 더 추가적인 가치를 더 부여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가? 더 똑똑하게 아는 것이 더 증가된 채 살아가는 내가 계속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데 믿게 되면, 나는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믿었다. 아하, 내가 살았다는 그것이 오해였구나. 믿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그 때 죽은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꾸준히 줄곧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믿는 그 순간 나 자신이라는 것이 있음으로서 나는 아는 것으로 계속 채워나가는 그 시도로 말미암아 정작 나 자신을 가렸고 나 자신을 모르는 상태로 자꾸 이어가게 했던 거예요. 그 아는 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임의상 그걸 개별자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한 사람인 개별자, 또는 개인, 더 쉬운 말로 각자각자. 그걸 약간 고상하게 말해서 ‘개별자’라고 하겠습니다.

개별자는 아는 것에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그 개별자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 제대로 살기 위해서 계속 아는 것을 필요로 하기에 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지요. 그런데 내가 개별자라면 성경에 나오는 이삭도 개별자고 야곱도 개별자고 에서도 개별자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나라는 개별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에서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특이한 것이 없게 돼요. 당신도 늙어죽고 나도 늙어 죽을 거야, 해서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이삭과 야곱이나 에서를 개별자로 보지 않고 보편자로 봐요. 보편자라는 이것은 개별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은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편자 속에 우리가 포함되는 순간 이 개별자 나는 죽어 있어요. 없어요. 성경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우리가 어떠하냐, 내가 어떠하냐, 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별자적인 안목에서 나는 어떠하다, 오늘 어떻게 살았다, 가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은 일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어떠냐가 아니라 아담이 어떠냐를 묻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은 우리 보기에는 개별자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보편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독 안에 든 쥐처럼 모든 인간은 그 큰 독 안에서 전부 다 새끼를 친 겁니다.

그 대표자가, 보편자가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오늘 행동 어떻게 했어,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있는 아담이 너를 통해서 어떤 행동을 지금 하고 있는가를 보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보편자 아담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개별자 나는 존재하지 않고 죽은 자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개별자인 내가 살아 있게 되면 아담은 옛날 사람입니다. 옛날 개별자가 되고 나는 지금의 개별자가 돼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가 돼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아는 것으로 내 인생을 계속 꾸역꾸역 이어나가겠다는 수작인 겁니다.

개별자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개인이라 합시다. 사적인 개인, 또는 자아. 사적인 개별자, 나에게 유익이 되고 죽어서 천국 간다는 노림수, 목적, 기대, 그런 것을 갖고 성경을 천독 만독을 하고 신학을 해도 그것은 아는 것의 증가지, 다시 말해서 개별자가 더욱 더 개별자를 굳히고 개별자만 살면 그만이라는 자기의 탐욕을 정립하는 것이지 그것은 일체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만은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는 오기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삭같은 경우에는 왜 개별자가 아니고 보편자냐? 이삭에게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삭 머리를 처박고 거기에서 개별적 이삭이 죽어버리면 거기서 보편적인 이삭이 나오는데 그 보편적 이삭이 등장하게 되면 에서와 야곱의 두 개가 상반되는 속성으로 이 땅에 등장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살아 있는 한 보편적인 이삭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이삭언약이라 합니다. 이삭에게 준 언약은 살아 있다.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개별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여호수아의 모든 활동은 살아 있는 모세의 연속적인 활동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보편자와 개별자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지금 안 계신 분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이 계시려면, 그것도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보편자로 계시려면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도는 죽은 자가 되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계속 살아나려면 보편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개별자처럼 보이는 우리 자신을 보편자를 증거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사용하시는 중입니다.

이러한 인식, 보편자와 개별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인식이 우리에게 어떠한 안정감을 가져다주느냐 하면, 개별자적인 사고방식인 이상은 걱정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물론 그건 믿음이 아니지요. 믿음이 없다는 이유가 뭐냐? 내 생각을 할 때 믿음이 없어지는 거예요. 나는 나를 개별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순간 걱정근심이 그대로 생기고 안정감이 없어요.

그런데 보편자를 생각할 때 나는 보편자 앞에서, 예수님이나 아담 앞에서 나는 죽은 자가 되고 내가 죽은 자가 되는 동시에 나는 모든 일에 안정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 안정감을 신약의 로마서에서는 ‘화목’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해요. 화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개인이 우리라는 개인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언약과 모든 말씀과 모든 계시는 보편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가 던져준 보편자만이 상대해서 실현시킨 현실이에요. 진정한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개별자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백 살을 살아도 그 사람은 전혀 현실파악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현실도 모르고, 자기자신도 누군지 모르고, 그냥 개별자로 살아가요.

인간이 보편자에서 눈을 돌려서, 다시 말해서 믿음에서 눈을 돌려서 내가 뭔가 알아야 되겠다, 아는 것을 누적시키려 하는 순간,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악마가 노리는 순간입니다. 악마가 그 때를 노려요. 네가 그래서 밥 빌어먹고 살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가지고 네가 원하는 소망을 이루겠어, 라고 나와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 갔을 때 예수님은 보편자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그 예수님을 보편자냐, 라고 놀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보편자 개념을 사용하면서 ‘설마 네가 보편자 될 자격이 있어?’라고 개별자에게 추궁하든 그 문제를 예수님에게 던집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뛰어 내리라. 나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 그것은 바로 개별자인 내가 어떻게 하게 되면 보편자로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마귀가 계속 부추깁니다. 처음부터 어떤 경우라도 개별자가 보편자 되는 경우는 일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개별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뭘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라는 그 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예 성경에 그런 것은 성립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사도행전 16장 31절의 말씀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애초부터 개별자가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해야 될 보편자 안에 소속된 자인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죽었다고 했을 때는 이것은 개별자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개별자가 죽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죽음이에요. 그 죽음은, 모든 인간은 당연히 마땅히 늙어 죽는다, 가 아니라 마땅히 벌써 죽었다, 가 돼요. 벌써 죽은 것이 되는데 그 벌써 죽었던 그 내력, 이유, 근거를 하나님이 지정한 보편자를 통해서 그 이유가 지상에 펼쳐지고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이삭이 해야 될 역할이고 이유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왜 죽느냐? 그 이유를 이삭이 보여주고 야곱이 보여주고 야곱과 에서가 짝을 이루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는다는 것은 그냥 흔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보편자 삼아서 어떤 내용을 집어넣는가? 하나님의 죄사함이라는 것은 개별자에게는 죄사함이 없어요. 보편자에게만 죄사함이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죄사함을 받아버리면 그 사람은 개별자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오늘 내가 죄사함을 받더라도 내일이나 모레 범죄하고 타락하면 죄사함이 취소가 될 수도 있는 것에 개별자는 주눅이 들고 공포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자는 항상 믿음이 아니고 넉넉한 아는 것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개별자로 뭘 하면 됩니까, 하고 매달리게 되면, 다시 말해서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나아갑니까, 라고 했을 때는 마귀가 노리는 순간들, 마귀가 그 틈을 타서 쑥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너의 개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반면에 나는 이미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기에 뭘 해도 괜찮다. 이제는 막 살아도 괜찮다. 이것도 개별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마귀가 쏙 들어온 거예요.

모든 구원론신학이 개별자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마귀가 제공한 아이디어에요. 마귀가 제공한 아이디어를 인간은 벌써 처음부터 범죄 했기 때문에 그것만 수긍이 되고 나머지는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왜?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는 것으로 믿음을 자아내려고 하고 아는 것을 뭉쳐서 믿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이거가지고 모자라지. 더 알아야 되지. 더 알아야 되지.’ 계속 알고자 하는 겁니다. 알다 보면 언젠가는 믿음으로 뭉쳐지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지는 그 눈을 뭉치면 눈사람이 되잖아요. 꼭 그런 발상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개별자가 보편자로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없습니다. 없어요. 왜냐하면 보편자는 이 지상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편자로서 구원될 사람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저는요?” 이렇게 할 거예요.

본인은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개별자로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 안에 보편자로서 있는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보편자적인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어요? 뭐가 있어야 구원이 있잖아요.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없는데 뭐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 이삭이 품고 있는 언약적인 내용은 뭐냐? 이삭은 알다시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있는 사람이 있었지요.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있었고, 사라가 있었고, 하갈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고, 사라 있었고, 하갈이 있었고 그래서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 사람 이스마엘이 추가되어서 그렇게 네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 네 사람 어디에도 보편자가 없어요. 아브라함도 아니고 사라도 아니에요. 이 땅에는 보편자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제키고, 하갈 제키고, 배제했다는 말입니다. 사라 배제하고, 아브라함배제하고 그들 가운데 천사 세 명이 나타나서 꽝 하고 도장 찍듯이 사인하고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인물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소급해서 아브라함은 언약의 사람이 되고 사라는 언약의 어미가 도 되는 거예요. 이삭이 있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천사가 이야기한 약속이 먼저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 땅에 약속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약속만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스마엘과 하갈이지만 실제로 약속의 보편자는 그 네 명중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구원은 어디에 있느냐?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 때문에 추가적으로 추후에 생겨나는 것이 구원받을 자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출몰하는 겁니다. 이게 이삭이에요. 이삭의 보편성입니다.

이삭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삭이 없는데 이삭은 나중에 태어나니까, 없을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 태어나잖아,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에요. 태어났을 때 이삭은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 25장 7절에서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아브라함과 나중에 사라도 여기에 묻히고 나중에 야곱도 여기에 묻혀요. 오늘 본문 35장 27절에 보면 이삭이 어디에서 죽는가 하면 헤브론에서 죽어요. 헤브론은 막벨라 굴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없는데서 태어났는데 그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없는데서 태어났는데 이삭이 죽기는 어디서 죽느냐 하면, 막벨라 굴에 죽더라.

보편자가 죽어 집합하는 장소, 그 집합된 막벨라굴에 합류해서 죽을 때 그렇게 죽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어버리면 뭘 의미하느냐? 이삭은 살아 있으면서 이 땅에서 죽음만이 보편자로서 행세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은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인데 보통 우리 생각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죽어 없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에게 죽음의 뜻은 뭐냐 하면, 죽음 자체만을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죽음 자체만이 유일하게 활동하는 진짜 살아 있는 실체로 보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살아 있을 때 활동하고 죽으면 그만이잖아, 하는데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야곱과 에서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야곱의 머리를 파묻으면, 죽으면 나와야 될 인물들. 그런데 죽기 전에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삭에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삭도 개별자가 되어버리고 야곱과 에서도 개별자가 되어버려요. 연관성이 없어요. 너는 네 죽음이고 나는 내 삶이다. 이렇게 따로 분리되어 버립니다.

이게 연결이 안돼요. 그러면 우리가 아담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아담이라는 개별자는 이미 우리 보기에 죽었잖아요. 죽은 것이 아니고 아담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같이 죽어 있다는 보편자적인 기능과 역할이 살아 있는 우리를 통해서 지금 발휘되고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어차피 죽으니까.

내가 죽는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죽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아담의 살아 있는 약속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개별자가 아니고 보편자가 되면서 구원된 사람이 돼요.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지금 언약은 전쟁용이거든요. 싸운다는 말이지요.

여기 보면, 평소의 수요일과 다르지요. 여기에 허연 벽체가 있고 시커먼 게 있다는 말이지 요. 뒤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이는데 잘 안보일 거예요. 이것은 커튼의 뒷모습이에요. 커튼이 뭐냐? 개별자입니다. 개별자속에 보편자가 늘 감추어져 있고 가려진채 살아가는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마귀는 우리에게 계속 독촉합니다. “예수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밥 먹고 사는 네가 제일 중요해. 너보다 중요한 것이 없어. 너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야. 너는 신 같은 절대적 존재야.” 이것을 계속해서 심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개별자로 살아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남을 밀치기 시작합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나 당신이 건드리면 힘듭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이 되게 되면, 자기가 개별자, 절대자가 되어버리면 언약위주가 아니에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위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고 뭐 고상한 복음적 내용은 전부다 자기 살리기 위해서 그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더 추가적으로 정보를 입수해서 알게 되면 아는 것이 나를 계속해서 절대적개별자로 행세하게끔 도와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안다는 것은 뭐가 미래에 힘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노리게 만드는 것은 아는 것이고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어차피 죽은 존재이기에 그것은 나의 미래와 무관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믿음이에요.

보편자가 결정하지 개별자인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말이 어려워졌지요.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어느 광양김씨 집안이 있어요. 광양김씨 집안에 가보로 물려받은 것이 있는데 그게 고려청자입니다.

인터넷 들어가서 고려청자 진품이 15억에서 20억이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고려청자를 고이 품고 <진품명품>이라는 프로에서 감정하는 전문가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봤어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었어요. 그 사람을 찾아갑니다. 자기 부인이 “너무 꿈꾸지 마세요. 5천만 원이나 되어도 만족합시다.” “그러면 형제가 열 명이니 나누면 5백밖에 안되는데 그래도 참아야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아들하고 셋이 감정전문가한테 찾아가서 가보를 내놨습니다. 감정사가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만약 진품이라면 이것은 수억 짜리입니다. 아주 고가입니다.” 하니 앉아 있던 사람이 너무 좋아라, 했어요. 죽 보더니만 “이거 누가 샀습니까? 선친께서 사셨지요? 속았습니다. 이거 십 원도 못 받습니다. 빵입니다.”

귀한 가보, 십 억짜리, 십억까지는 아니어도 몇 억짜리 가보인줄로만 알고 그 아름다운 시간이 나중에는 0원, 빵, 가치가 한 푼도 없어요. 개별자, 한 푼도 없습니다. 가치가 없어요. 교회 다닌다고 충성하고, 참 십일조도 많이 냈겠지요. 서로 봉사하고 커튼 빨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데 빵입니다. 제로입니다.

나쁜 짓 안하고 “사탄이 물러가라!” 얼마나 외치면서 경건의 경건의 도를 더했겠습니까? 남보다 더 오래 기도하고, 자녀의 믿음을 위해서 중보기도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빵입니다. 제로입니다. 믿음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개별자는 개별자가 다독거려서 구원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제시한 적이 없어요.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제시한 거예요. 마귀가, “믿어라. 믿으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아니다. 십자가피로 구원받는다.” 마귀가 계속 우리를 개별자로 만들고 이 가짜를 계속 진짜 될 수 있다고 격려에 격려를 다 한 거예요. 얼마나 그동안 조심스럽게 살아왔습니까?

삐딱하게 살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은혜와 믿음도 다 쏟는다고. 한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자는 다시 구원 못 받는다는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개가 한 번 토한 것을 다시 먹으면 더욱 더 나쁜 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모든 성경말씀의 정보를 파악하면서. 아무리 신앙생활 잘해도 손목에 666받으면 안된다고 얼마나 조심했습니까?

깨어라, 해서 정신없이 중동지역의 정치상황을 들여다보면서. 언제가 마지막인지,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름준비 한다고 기도원에 가서 성령으로 기름통 채우고, 얼마나 그렇게 했습니까? 그런데 그 주인공이 누구에요? 주인공이 어떤 사람입니까? 개별자라니까요. 있지도 않은 죽은 자잖아요.

죽은 자가 성경정보를 몇 천 독을 해서 그걸 살려내겠다고요? 그런 식으로 마귀한테 다들 속고 있어요. 개별자가 하는 일체의 모든 행동은 죄사함의 대상도 안돼요. 죄사함이라는 것은 보편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지 개별자에게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뿐이에요.

따라서 구원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일 뿐이에요. 예수님과 지체 사이에는 성령이 와야 될 문제지 내가 노력한다고 연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가짜는 가짜. 16억? 고려청자? 빵입니다. 가짜였어요. 그냥 흙덩어리였습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가짜입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그냥 흙 정도가 아니고 마귀에 시달리게 되어 있고, 마귀의 내용을 증거 하는 마귀의 앞잡이로 살아갈 뿐이에요.

우리 보기에는 이 이삭, 야곱, 이 에서, 이순신장군, 세종대왕, 그냥 우리하고 똑같은, 그는 그고 우리는 우리이지 싶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 안에 구원받는 사람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고 에서 안에 지옥 갈 모든 사람의 정보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야곱과 에서는 보편자고 그 야곱과 에서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삭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것처럼 야곱과 에서도 이미 이삭을 태어나게 한 하나님 나라의 에서와 야곱의 정보가 다 들어 있어요.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개별자의 사고방식을 떠나서 보편자 되시는 예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이름이 창세전에 이미 생명책에 박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널리고 널린 그 개별자와 보편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시 말해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지를 그걸 이 땅에서 실습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개별자로 접근하느냐, 아니면 보편적 안목을 가지고 접근하느냐? 보편적 안목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개별자로 접근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아요.

참,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이삭의 출생과 죽음, 야곱의 출생과 죽음, 에서의 등장,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될 그냥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언약사건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자의 내용을 인식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나 위주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에게 필요해서 나에게 성령 줬다는 보편적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만 막벨라굴의 의미, 그리고 에서의 의미, 야곱의 의미를 확정된 진리로서, 이것은 변경되지 않는 확정된 지리로서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안정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끝으로, 그러면 이 막벨라굴이 뭐냐? 오늘날 십자가입니다. 모든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의로움을 받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영생을 얻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그 보편자의 죽음, 그 죽음이 오늘날 살아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반복적으로 전달되게 되도록 우리는 죽은 자지만 남들 보기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지요.

그걸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삭도 오해했고, 야곱도 오해했고, 에서도 물론 오해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야곱과 이삭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기어이 사다리 보내주시고 천사 보내주셔서 아, 이것은 아버지가 날 낳은 것이 아니고 아버지 안에 있는 그 약속이 오늘날 우리를 있게 했다는 그 사실, 따라서 보편자가 보편자를 낳고 그 보편자속에서 결국은 통합이 되고 하나가 되는 거지요.

이제 남은 것은 커튼을 들추는 겁니다. 이 세상 개별자라는 커튼을 활짝 들춰서, 본인부터 먼저 커튼을 거둬서 “저는 이미 죄 가운데 죽은 자고 주님의 의 가운데 의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를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의인입니다.”를 전파할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삭과 야곱 그들이 그냥 하나의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움직이는 언약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남들 대할 때 얼마나 나의 이익과 나 좋으라고 개별적으로 다가갔습니까? 이제는 보편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시로, 주님의 예언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37강-창 35장 27-29절(이삭의 죽음)180509-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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