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18-05-13 19:35:47 조회 : 302         
서울의존강의20180511a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8.64)

서울의존강의20180511a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1-12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 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11절로부터 12절까지 이 두 절을 오늘 할 겁니다.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렇게 되어 있죠. 자기라는 것은 선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죠. 그러면 서로 다른 두 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간다? 아,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죠. 어떤 사람도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부부라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 속에 한 사람이 들어간다는 이것은 신약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근데 신약은 ‘그리스도의 영’ 정도가 아니고, 아예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고 우리가 또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러한 실제적인 경우를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거는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두 사람 같으면 숫자가 2, 두 명이거든요. 둘인데 그게 하나가 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어요? 손 잡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아예 하나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베드로전서 11절을 뭐로 보느냐 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봅시다. 말도 안 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가 없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믿자!” 이렇게 돼요. 그냥 믿자! 그거는 반칙이죠. 이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나올 수가 있겠어요? 결국 믿겠다는 말은 안 믿는다는 이야기예요. 못 믿겠다고 하면 성경이 이렇게 있으니까, 또 믿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그게 좀 기분이 나쁘니까 믿는다고 해요. 그러면 설명해보세요. 뭐 알아야 설명을 하죠. 믿지도 않는데 믿는다고 억지를 부렸으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설명을 해보세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게 설명이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특히 이 선지자들도 본인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나왔다. 이게 구약과 다른 신약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정답입니다. 설명서에요. 설명서. 어떤 전자제품을 택배로 받았는데, 쓰기는 쓰는데, 가동이되긴 되는데, 어떤 원리로 가동이 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가동은 되는데 어떤 원리에서 가동이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면 가동은 된다. 이건 신약. 어떤 원리인줄 모르겠다. 그건 구약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 신약에 있는 이 내용을 본인들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모르죠.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최종적이어야 해요. 최종적인 것에 도달될 때 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산이 있든지 또는 이런 건물이 있어요. 롯데월드타워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117층부터 121층인가 전망대가 있어요. 전망대. 전망대가 117층, 그 다음 계단 올라가면 118층, 또 계단 올라가면 119층... 이렇게 돼요. 목사님 가보셨습니까? 가봤어요. 가보면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전망대에서 보니까 서울 시내가 다 보입니다. 근데 이 롯데월드타워가 없다고 치게 되면 무엇이 날라 가느냐 하면, 높이가 500미터쯤 돼요. 한 500미터에서 보던 그 안목이, 이 빌딩이 없어지게 되면 그 안목도 같이 없어지느냐, 하는 그 생각을 해봤어요. 한번 올라갔는데 그 다음에 지진이 일어나서 롯데월드가 사라졌다. 그러면 자기가 올라가서 500미터에서 봤던 서울시내의 안목도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건물은 없어졌어도 안목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본 게 있으니까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 키가 1미터 70이고 80인데, 어떻게 500미터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느냐? 설명을 해보라고 한다면, 설명이 되려면 뭔가 걸쳐있어야 설명이 되거든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뭘 봤어요. 봤는데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설치한 건물이라는 이게 없어서 그래요.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고난과 영광을 보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잖아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그 다음에 “미리 증거 하여”, 미리 증거 한 거예요. 누가요? 선지자들이.

 

그러면 이건 선지자들에게만 해당이 되고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느냐, 오늘날 우리가 받은 영이 뭐냐 하면, 오늘날 성도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돼요.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롯데월드를 짓든지 해야 돼요. 근데 벽돌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짓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성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성도되려고 애쓰자. 그거는 뭐 교회마다 다 하고 있으니까. 하고 있는데 소용이 없죠.

 

그건 백날 해봐야 지옥 가는 거니까 소용이 없고. 천국가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되는데,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방법이 있다? 없다? 이게 없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과 연관되는 사항이 있어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됩니다. 그 연결되는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가 뭐냐, 그게 버림받는 것, 버림받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죠.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쫓겨나죠.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했던 그 체계와 구조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는데, “살기 좋았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금 뭐 살기는 좀 힘들어도 참으면 되지.” 이러는데, 그게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이루는 그 체계와 원리에서 쫓겨난 거예요.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체계와 원리는, 쫓겨나게 되면 두 번 다시 에덴동산에 갈 수 없는 원리를 장착하고 이 땅에서 사는 겁니다. “아이고, 뭐 좋은데 살았는데 호강했다 치고, 그 다음에 이 땅에서 살대로 한번 살아보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고생 더하느냐, 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뭔가 잃어버렸어요. 에덴동산을 구성하는 그 요건에서 인간이 배제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 물어내!”에요. “에덴동산 물어내! 에덴동산을 그대로 하는데 있어서 너희들은 범죄자야. 너희들은 책임이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는 인간들의 관심사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부모님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잡채를 만드는데, 소금으로 약간 간을 볼 타이밍에서 엄마가 잠시 딴 데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철없는 아이가 와서 소금을 붓는다는 게 잘못해서 팍 부었어요. 그러면 완전히 짜서 못 먹잖아요. 그럴 때 엄마가 와서 하는 말이 “이 잡채 물어내!” 이래 되죠. 그러면 아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엄마는 엄마가 만든 잡채만 신경 쓰고 아들이 손이 떨려서 소금을 퍽 부은 그 아들은 하나도 생각 안 하지? 그치?” 이래 되는 거예요. “엄마한테 참 섭섭해. 왜 이렇게 소금을 많이 붓게 됐는지, 쟤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물어내 이 잡채! 이렇게 하면, 엄마 잡채가 중요해? 아들이 중요해?” 엄마가 하는 말이 “잡채가 중요해!”

 

이게 소통이 안 되고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대화가.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의 대화가 뭐냐 하면, 성도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체제, 천국이 중요해요. 근데 성도 아닌 사람은 뭐가 중요하냐 하면 교회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가 돈 내서 만든 회사거든요. 자존심이고. 위신이거든요. 교회를 왜 만드느냐 하면 교회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설마 이 정도의 정성을 들였으면 주께서 내치지 않겠지.’라는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미 버림받은 인간성에서 나온, 잡혀있는 체계고 원리고 조직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았죠. 하나님이 만든 그 천국의 원리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된 상태인데, 인간은 뭐냐 하면 정성과 노력과 경건과 거룩을 다 끌어 모으면, 끌어 모은다는 그 시작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자기에게서 하겠죠. ‘설마 하나님께서 내치지는 않겠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정성과 거룩과 경건과 노력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미 내친 상태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이미 내침을 당한. 그걸 죄인이라고 해요. 이미 죄에서 나온 아이디어 하나가 경건이고 거룩이고 열심이고 정성이고 기도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알죠. 이슬람의 뜻이 뭐냐 하면 그냥 복종이에요. 복종. 그냥 알라신에게 복종하는 게 이슬람 종교입니다. 그런데 알라신은 하는 게 없어요. 알라신은 하는 게 없고, 인간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복종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복종해도 안 돼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종하게 되면, 성경에서 나오는 말로 순종인데. 복종, 순종해서 이게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이거는 이슬람교지, 인간이 만든 종교지, 복음이 아닙니다.

 

근데 복음을 가지고 복종, 순종해서 된다고, 영광 돌린다고 하는 기독교가 돼버렸으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복음과 분리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아까 롯데타워 이야기했잖아요. 롯데타워 건물도 없는데 500미터에서 서울 시내를 봤다는 그 안목, 그 경험. 그러면 구약선지자들이 그걸 보게 된 것은 그들의 복종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러면 노력해서 그런 거예요? 기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은 그것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 없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신이 임할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 빼고 기독교를 한번 만들어보세요. 우리가 아이디어를 한번 끄집어내보자 이겁니다. 몇 천 만 명 모여서 성령 받았다는 그걸 빼고, 성령 받은 것을 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한번 해보자 이 말입니다. 성령 빼고. 그러면 뭔가 있겠죠. 열심히 하자. 십일조 하자. 주일에 모이자. 모여서 찬송하고, 밴드 만들어서 하고, 심방하자. 뭔가 있겠죠. 만들었다 칩시다. 만들어놨을 때, 그 다음에 성령이 그 자리에 왔다고 한다면, 성령은 이미 만들어진 그거를 호응할까요? 안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부정할까요? 부정하죠. 그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이라고 보면, 성령이 왔을 때는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아이고, 기특하구나. 내가 없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네. 그렇다면 나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겠다. 그래. 너희들의 노력이 가상하니까 내가 뒤에서 약간 도와줄게.” 그래서 성령이 플러스알파(+α)하는 식으로, 그렇게 보태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이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아담을 내쳤잖아요. 아담을 내칠 때는 모든 인간이 다 내침을 당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뭐부터 하느냐 하면 인간이 내침을 당한, 버림받은 그 상태를 다시 우리에게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아이고, 이만큼 잃었다.” 이래 되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잃을 때는, 사실 모든 것을 잃고부터는 잃은 그 자리가 바로 원래 내 자리였어요. 내 자리기 때문에, 내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자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잃을 것도 없는 그것이 본래 내 자리가 돼요.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는.

 

강아지 집 나갔다. 잃어버렸다. 아쉽죠. 강아지 잃어버렸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강아지 없었잖아요. 강아지 어디서 구했든지, 사든지 해서 있었잖아요. 그렇죠.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 근데 이 강아지에서만 멈출까요? 나까지 포함시킬까요? 나까지 포함시키는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잡을 때, 지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걱정하는 거예요? 본인을 걱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신앙을,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이삭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아브라함 본인 신앙을 증거 하는 거죠.

 

그럼 본인을 증거 하는 그 증거의 자리는 자식이 있을 때에요? 없을 때에요? 자식이 없을 때죠. 본인의 자리는 자식이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게 내 자리다.”하고 니가 고백할 수 있느냐를 보이라는 그게 아브라함에게 한 신앙의 테스트에요. 그게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에요. 더 나아가서 내가 없다면 내가 없죠. 내 말 맞죠? 내가 없으면 내가 없죠. 그러면 내가 해야 될 걱정근심도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내 자체가 없는데. 걱정할 내 자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그러면 걱정근심은 결국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가 있다고 치고 나오죠. 그러니까 걱정근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뭔가 잘못된, 우리의 자리를 안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자리를 안 가고 어정쩡하게 남의 자리를 돌아다니니까 걱정근심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우리의 자리를 주님께서 보여준 게 뭐냐 하면 버림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그럼 버림받는 자리,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가,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요. 만약 버림받는 자리가 신월동이라고 하면 신월동에 다 모입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정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나는 내 자리를 못 찾아요. 왜냐하면 찾고자 한다면 내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본인이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어요. 세계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모든 신화라든지, 모든 글들, 시, 문학, 경전, 이러한 모든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자아 찾기입니다. 자아 찾기.

 

그걸 ‘옴파로스’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배꼽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배꼽, 중심이다. 이 말입니다. 중심 찾기. 달라이라마도 그렇고, 티베트(티벳)불교도 마찬가지고,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든 것이, 특히 인도의 힌두교 같은 경우에 아트만, 자아 찾기에요. 내가 곧 신이다. 진정한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거 찾아서 뭐하는데?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가 뭔가를 생각해볼 때, 반드시 거기에는 ‘이다’와 ‘아니다’가 같이 등장하니까, 이게 갈라지는 거예요. 선을 행하는 그 순간, 선을 행하기 전에는 악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선을 행하는 그 순간 그 옆에 뭐가 같이 등장하느냐 하면, 생각하지도 않았던 악이 같이 등장해요.

 

결혼을 했는데 아기가 없을 때는, 기저귀는 어떤 것을 쓰고, 애기 옷 빨래는 어떻게 하고, 애 유치원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 안 하다가, 애기가 생기고 난 후 그 다음부터는 부수적인 것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모든 아기들이 이쁘고 귀여워요. 근데 내 애기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가서 왕따를 당하는 순간, 내 애 빼놓고 나머지기 애는 다 경계대상입니다. 저 애가 내 애를 때리지 않을까, 저게 내 애의 빵을 뺏어 먹지는 않을까, 그리고 저 애가 내 애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 선생님한테 이쁨을 독차지해서 우리 애한테 돌아올 이쁨에 그만큼 손해나지 않을까, 이렇게 경쟁상대가 되는 겁니다.

 

이 모순점, 이 모순점이 원래 성경대로라면 모순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선악이거든요. 선과 악이라니까요. 선과 미흡 된 선이 아니에요. 어거스틴이 그렇게 억지를 부렸는데. 어거스틴은 잘못된 거예요. 악은 미흡 된 선이라는 그건 말이 안 돼요. 선과 악이 같이 있는 겁니다. 선과 악을 해소하려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본래의 내 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선하면 선하고, 악하면 악해지니까. 아예 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선이면 선, 악이면 악, 하나만 하기 때문에 모순된 점이 없을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아 찾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근데 자아는, 자아를 찾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자아가 이렇게 있는데, 자아 찾기라 하는 것은 뭔가 진정한 나는 진짜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점선으로 표시하면. 찾아가는데, 찾아가는 내내 뭐가 있느냐 하면 현재 있는 나를 계속 여기서 부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찾았다고 딱 붙들면 이것(점선으로 표시된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붙든 내가 또 여기서 주체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찾은 나와 찾게 된 대상과 분리가 일어나지 않아요. 분리가.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작아지고 그녀는 커져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만 살면 족해.” 이렇게 하는데, 그 여자가 만약에 떠나간다고 한다면, 없던 본인도 다시 등장하잖아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한다고요. 내가 해버리면 결국은 그 여자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대상이 되고 사랑하는 주체는 내가 되기 때문에, 나 없는 너는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나라는 이 진드기, 나라는 괴물은 아무리 나를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이거는 교회 기도할 때나, 헌금할 때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도한다고 하면서 제일먼저 생각나는 게, 지금 손가락을 모았는데 가지런하게 모아졌는가, 관절이 안 좋은데 오늘 계획은 3분내지 5분, 기분 좋으면 10분 끌어볼까, 온갖 생각을 다 한다고요. 그렇게 한 5분쯤 되어서 기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하고 기도하면서 스케줄 생각한다고요. 스케줄 생각한다니까요. 기도하면서 내가 휴대폰을 꺼놨는지, 누구한테 전화 올 때 됐는지, 온갖 것을 다 생각해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은 봉투 열 때부터 이거 너무 과하지 않는가, 한번 빼볼까, 빼면 천상에서 캡처해서 사진 다 찍을 거 아닙니까? “쩨쩨하게! 니가 만원을 빼? 삼심배로 갚아줄게.” 또 이런 소리가 들려와서 후딱 집어넣는다고요. 만원 빼다가 삼십 만원 날아갈 수가 있으니까. 헌금 봉투에 집어넣을 때 내가 헌금하는 것을 저 목사가 좀 봤으면 하죠. “우리 집사님은 참 착실해. 어려운 가운데 헌금도 하고”라는 칭찬을 받을 텐데, 하필 헌금할 때 목사가 화장실을 가요. 목사가 화장실 갈 때 헌금을 해버리면, 요즘 저 집사 헌금 안 한다고 오해를 받을 것 같고, 모든 설교가 나를 지적질 하는 설교로 들릴 수 있고.

 

그리고 헌금을 하면서도 남들이 헌금하는 것을 좀 알아야 균형을 맞출 건데, 나만 쪼다같이 많이 하고 병신같이 헌금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은 벌써 교회 예산이 남은 것을 알아서 헌금 빼는 것을 모르고, 자기만 교회 예산 잘 몰라서 헌금 많이 했다. 보니까 돈 좀 남아있어요. 내가 미쳤다고 교회 예산 남아있는데 뭐 할라고 헌금했는지 또 후회하고. 후회하다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8장이 또 생각이 나가지고, 그땐 또 변명을 만들어놔요. 사실은 헌금을 더 하려고 했는데, 헌금대신 이만 원을 유니세프에 후원금으로 냈으니까, 그거하고 맞추면 얼추 맞습니다. 자기의 모든 변명거리를 다 집어넣어요. 그리고 십일조 목돈 낼 때는 가다가 차사고가 나면 안 돼요. 정신없이 하다가 돈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모시고 가기 때문에 그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모든 어떤 행함에서 인간은 자기를 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쉽게 합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버렸어요. 버렸는데, 인간이 악착같아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봐 주이소.” 봐달라고 하는 거예요. “내치지마시고 진드기처럼 붙어서 복종하고 순종할 테니까 내치지는 마세요.”라고 계속 시도하는 겁니다. 그 당시 그런 인간들 속에서 선지자는 말했던 것으로 외톨이가 되었고, 그들은 선지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말을 알아들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 치고, 어떻게 받습니까? 라고 하셔도 방법이 없어요. 이거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니까. 받았다 치고 차이를 이야기해야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아로나민골드를 먹는 날과 먹지 않는 날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선과 악을 하나로 바꾸려고 해요. 선과 악을. 바꾸는 방법은 악은 작게 선은 크게 해서, 많은 분량의 선으로 실수로 나오는 작은 악을 억누르면 해소할 수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실제로 보면 해소가 안 돼요. 왜냐하면 선이 커지면 비례해서 악도 같이 커집니다. 선을 행할 때에는 그런 악이 나에게서 같이 나올 줄을 상상도 못했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어린애는 천사와 같다. 그런데 내 애가 생기고 난 뒤에는 내 애만 천사고 나머지기 애는 천사가 아니다. 이래 되는 거죠. 내가 애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본인을,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새로운 사태,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을 상당히 우수하고 점잖고 훌륭하게 자꾸 인식하는 버릇이 있어요.

 

선과 악은 이렇게 결합이 안 됩니다. 어디에서도. 결합해서 이걸 선으로 또 바꿔도 또 거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이 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걸 또 합해서 선으로, 착한일해서 눌렀다 해도 거기서 또 악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보다 악이 속도가 빨라요. 악이 앞에 있으면 선은 쫓아가는데, 쫓아갔다 싶으면 벌써 저만치 앞서가요. 꼭 님 그림자 같아요. 저 만치 앞서 가는 님 뒤에~~♬ 따라가 붙으면 또 저만치 가요. 달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달은 또 저만치 앞서가요. 아무리 따라가도 나에게서 나오는 선이 나에게서 나오는 악을, 악이 없다고 하지 못할 정도로 악은 약 올리듯이 이만큼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원칙은 뭐냐 하면 선과 악, 선+악=죄. 선악을 알게 됐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자체가. 선 플러스 악이 죄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죄라고 하지 않고, 죄인데, 그래서 니가 선과 악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러면 선과 악이 분리가 되면, 분리된 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두려움이 나옵니다. 걱정과 근심과 공포가 나옵니다. 내가 나보기에 완벽하고 착한 것은 아는데, 내가 행여 실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면, 거기에 대한 처벌과 징계가 또 따라올 거니까,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로 완벽해야, 아예 애초부터 처벌도 징계도 안 받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미흡성을 갖고 있어요. 굉장히 불안합니다. 불안해요.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니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마귀한테 이렇게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니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럼 죽고자 한다면 이게 해소가 되느냐, 죽고자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죽고자 하는 것이 나왔기 때문에, 이 죽음도 살아있는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니에요. 죽음은 한 군데 있습니다. 이 죽음은 지정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정되어 있죠. 죽음은 십자가에. 십자가가 제대로 된 죽음이에요. 십자가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제대로 알려면 성령 받아야죠.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자, 성령 없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성령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성령 있는 사람은 아주 희한해요.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상상해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을 어디로,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자기가 지금의 아닌 나로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 몸을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몸을 고난+영광을 드러내는 몸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누구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누구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 이것을 드러내는 몸으로 활용하시고, 사용해버려요.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인간의 몸이 이렇다 칩시다. 이 몸은 누가 봐도 숫자1이죠. 영어로 One. 하나죠. 하나. 그런데 이 몸을 전기톱으로 세세하게 잘라봅시다. 가로로 잘라도 되고, 세로로 잘라도 돼요. 이 세세하게 자른 이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고난+주님의 영광의 사건이 들어있어요.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렇게 압축된 골판지 같아요. 골판지 알죠? 여러 겹의 물결 모양의 판지를 붙여서 만들잖아요. 인간의 입장이 골판지의 더미. 골판지로 누적된 거죠. 한 살, 한 살, 나이테의 순간순간이 전부 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과 관련된 사건들의 더미, 뭉치, 집합되어 있는 것, 눌려있는 것, 모아진 거예요. 인간의 몸은 곧 누구의 사건이다? 주님의 사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스타트랙이라는 외화가 있어요. 벌써 50년 전에 나왔는데, 그때는 칼라가 아니고 흑백으로 나왔던 미국의 SF드라마였어요. 우리나라에는 방송국이 없었고, 미8군에서 처음으로 방송한 것을 한국 사람들이 금성 텔레비전 알죠? 안테나 높이 세워놓고 미8군부대하고 연결해서 본 거예요. 아! 이런 세계가 다 있나! 너무 너무나도 좋아했던 적이 있어요. 그 스타트랙에서 보면 이쪽에 사람이 있고 기계가 있고, 또 이쪽에 사람이 있고 기계가 있어요. 원격으로 이쪽사람이 이쪽사람의 모든 것을 스캔해서, 여기 있는 사람이 수 광년을 지나서 이동한다고요. 이쪽으로 턱 등장해요. 그 장면이 나와요. 순간 이동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육이다. 육인데, 주님의 영적사건으로 잘라보면 육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자체가 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이 와 닿지 않는 순간이 없어요. 모든 우리의 몸 자체가. 자,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한다고요? 성령 없는 사람은 내가 갖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죠. 내가 뭘 갖고 있습니까? 선을 알고 악을 알죠. 내가 악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악을 알아요. 그러면 선악이 서로 분열되어 있으니까, 서로 대치가 되어 있으니까, 대치되게 되면 거기서 분열이 일어나니까, 정신분열증이 일어나요.

 

그러면 이거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합쳐야 되거든요. 합치는 방법은 선을 많이 해가지고 악을 무시하고 덮치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선을 많이 해서 악을 덮치는 방법. 선을 행하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고. 악을 행하는 당사자도 누구죠? 본인이죠. 본인이 본인을 억제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슬람은 누구한테 복종한다는 겁니까? 알라신에게 복종한다고 하죠. 거짓말입니다. 본인의 선이 본인의 악을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알라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알라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알라신에 대적되는 나를 못살게 억압을 하는 거예요. 자기를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마호메트가 썼던 그 코란의 주 내용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때려서, 악하지 않고 선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내용이 코란의 내용입니다. 다섯 가지가 있어요. 기도해야 되고, 금식해야 되고, 1년에 한 번씩 성지순례 해야 되고, 가난한 사람 도와줘야 하고, 코란 읽어야 되고.

 

코란을 읽을 때 읽는 주체가 본인이 읽어요. 그럼 본인이 코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떻다? 선한 내가, 코란을 읽지 않고 게을리 하는 나를, 내가 나를 나무라는 겁니다. 나무라면 내가 신이 되고, 내가 그 신의 충실한 신자가 되는 거예요. 각자 교인 한 명은 다 있는 거예요. 각자 교인 한 명 다 있습니다. 목사가 있든 뭐든 간에 내가 나한테 교주가 되고, 내가 나한테 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결론은 “나는 지옥 갔다.” 이게 아닙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래, 훌륭해! 천국가자!” 결국 모든 인간은 어떻게 살았든 간에 최선을 다했어요. 사람을 죽이든, 뭐 성폭행을 했든 관계없어요. 자기한테는 자기가 그렇게 관대하고, 자기한테는 그렇게 자기의 나쁜 것도, 자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옹호해주고 변호해주고. 자기가 변호사 됐다가 검사 됐다가 다해요.

 

기어이 평가를 집행유예로 해서 계속 빼돌리는 거예요. 집행유예로. 마약을 해도 집행유예고, 살인을 해도 자기가 판사라면 집행유예에요. ‘그래. 내가 나쁜 짓은 했지만, 사회가, 이 사회가 나를 그냥 나쁜 길로 몰아넣었어.’ 어릴 때부터 부모 밑에서 조신하게 살았다고, 온갖 변명을 다하는 거예요. 그렇게 변명거리를 구시렁거리면서 본인이 본인에 대한 긍정, 그것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본인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의 작품은 주님의 작품이에요.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몸에 대해서 손댈 게 없어요. 뭘 손댑니까? 내 몸도 아닌데 왜 손대요? 그리고 내가 손대면 내 몸이 가만히 있습니까? 주님이 놀아요? 노세요? 주님은 노시지 않습니다. 어떤 원리가 있어요.

 

자, 그 원리가 뭐냐, 제가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고생하느냐, 고생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에덴동산을 살려내라는 거예요. 니가 그거 못 살려내면 니는 죽었다는 겁니다. 느헤미야 1장 9절을 한번 봅시다. 느헤미야 오랜만에 보죠. 성경에 느헤미야라는 것도 있습니다. 구약 727페이지, 제가 읽어볼게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 하옵소서”라고 이야기해요.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약속을 대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계명에게로 돌아오는 겁니다. 계명에게로. 근데 이 계명은 우리가 스스로 선하기 위해서 내가 지어낸 계명입니까? 아니면 외부에서 준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외부에서 준 거죠. 외부에서 줬다는 말은 우리가 계명을 안 만들었다는 거죠. 그럼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우리가 안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계명의 취지를 제대로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유명한 셰프가, 요리사가 요리를 해서 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먹어보고 “아, 맛있다.”라고 그러면 그 요리사가 일단 기분은 좋죠. “어떻게 맛있습니까?” “아, 이 채소가 아주 상큼한데요.” 그냥 맛있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맛있는 이유를 대라고 한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요리의 주안점은 그게 아닌데. 채소가 아니고 고기의 향과 미각을 돋우기 위해서 그냥 붙여놓은 건데. 이 사람은 채소가 상큼하다? 아, 이거는 내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인간은 누구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모르는 게 당연해요. 왜냐하면 그 요리를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내가.

 

계명은 누가 만들었어요? 내가 만든 게 아니라고요. 계명을 만드신 분이 계명을 지킵니다. 그 분이 누구이게요? 예수님이죠. 예수님만이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요. 짜고 치는 고스톱. 이거 명언 아닙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 지금 마귀가 인간을 선악구조에 가두어뒀죠. 선악에. 마귀가 여기에서 설치잖아요. 선악을 가지고 있는 이 인간을 가지고 주님하고 협상이나 타협을 안 합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내버려두고, 율법과 계명을 지킨 분을 이 속에 투입을 시킨다니까요.

 

투입을 하게 되면 선악구조에 있는 이 인간과, 투입된 새로운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다르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분이 영이 되고 나머지기는 육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이미 범죄 한 이상, 범죄의, 범죄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를 자력으로 믿을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아무도 없게 함으로써, 너라는 인간군(群)과 예수님과 이렇게 갈라지고, 단절되어 있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주님이 오시면 내가 믿어줄게.”라는 이 말 자체를 주님 쪽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야, 메시야다.”라고 알아보는,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예 만들지를 않았어요. 메시야가 오신 것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뜻이거든요. 어디에? 선과 악에 갇혀있는 거예요.

 

선과 악에 갇혀 있는 이 구조, 선과 악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을 한 자로 하면 죄죠. 선+악=죄. 죄인이 예수님을 알아볼 리가 없어요. 죄인이. 알아볼 리도 없는데 그들은 선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여기에다가 주님께서는 고정지점을 만들어버려요. “죄인 맞잖아!”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그 확정지점을 이 안(선악구조)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이게 뭐냐,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

 

성도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고난을 유발시키는 자라는 것을 자기가 아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아니까 저 천국 갈 자 맞죠? 라고 그렇게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도 해당사항이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천국은, 천국 만들기는 저쪽 과제에요. 우리의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라니까요. 천국은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소망이고 주님의 믿음이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는데, 내가 제일 미워하고 싫어하는 인간도 같이 와보세요. 성질나서 자진해서 도로 지옥 불에 떨어지죠. “나 저 인간하고 못 산다. 꼴 보기 싫은데 영원토록 어떻게 보나, 나 안 볼란다.” 안 볼란다 하고 지옥으로 들어가 버려요. 사람이 참 좋다. 사람이 성격 좋고 인품 좋다고 하죠. 근데 그 사람에게 화나는 요소가 등장해버리면 그 사람은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성질나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제일 사랑했던 자식이 이삭이죠. 주님께서는 이삭을 뺏어버리잖아요. 이삭을 뺏어버린다고요. “나는 이삭을 사랑해도 되는 자격이 됩니다.”라는 그러한 아브라함인지, 아니면 “내가 이삭을 사랑한 것은, 이것은 주님께서 이삭을 사랑하도록 사건을 유발하신 것입니다.”라고 하는 아브라함인지를 측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 것은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게 된 모든 원인을 내 쪽으로 귀소 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겁니다.”라는 고백을 털어놓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 쪽에서 새삼스럽게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느헤미야 1장 9절에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하늘 끝에 있더라도 거기서부터 모으죠.

 

자, 이 대목 한번 보세요. 하늘 끝에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계명을 완성시키고, 율법을 완성시키고, 십자가죠. 하늘 끝에 있더라도 그것을 이 고정된 지점, 십자가 지점으로 끌어 모은다 이 말입니다. 느헤미야 1장 9절에. 그럼 모을 때, 끌어당기는 이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가 돼요. 이 사람은 지금 어디로 끌려오는지를 모르고, 그냥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끌려와서 보니까, 자기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는 끌려온 거예요. A라는 지점에서 끌려왔다면, B에서, 또 어떤 사람은 C에서, D에서... 이 모든 곳에서 끌려왔다는 것은,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 ‘나’라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누가 구원해줬는가가 중요하지,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돼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잊어버리면 뭐도 잊어버린다? 걱정과 근심도 다 잊어버리죠.

 

만약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을 해버리면,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는데, 진짜 구원받고 싶은데, 구원받겠나? 안 받겠나?’ 이게 계속 끌려오면서도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자기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일방적으로 끌려온다는 것은, ‘나 같은 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다고?’ 이러면서 끌려오는 거예요. ‘나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짝도 없는데?’ 이러면서 끌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같은 구원받은 사람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80511a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hwp (67.0K), Down:8
게시물7,576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공지   2019 겨울수련회 안내 관리자 18-11-08 227
공지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근호목사님 저서를 다량 구입했… 관리자 18-08-25 486
공지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영상 안… 최지영 18-07-30 544
공지   [책]2018 신간 '하늘의 징조'출간&구입안내 (1) 최지영 18-05-31 609
공지   이스라엘 유적 답사 동영상 (1) 이근호 18-03-10 851
공지   십자가마을(도서출판)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김종인 17-05-29 1599
공지   실시간 생방송 새주소 입니다. 관리자 17-02-19 4541
공지   이 근호 목사님 저서 안내 관리자 14-07-11 5131
8080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18-12-15 21
8079   강남-요한복음 19장 10절(나와 너)181204b-이근호 목… 홍민희 18-12-14 23
8078   강남-요한복음 19장 10절(나와 너)181204a-이근호 목… 홍민희 18-12-14 28
8077   168강-창 43장 1-5절(자식담보)181212-이 근호 목사 오용익 18-12-13 30
8076   서울강의 안내 이미아 18-12-13 24
8075   20181210b 부산강의 : [시편]16(9편)-배제 한윤범 18-12-12 35
8074   20181210a 부산강의 : [시편]16(9편)-배제 한윤범 18-12-12 39
8073   안양모임 안내(12. 14. 금) 공은주 18-12-11 24
8072   20181207 울산천상우리교회특강-판결 한윤범 18-12-11 70
8071   20181207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한윤범 18-12-11 30
8070   20181207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한윤범 18-12-11 28
8069   4강-엡 1장 7-8(피로 말미암아)181209-이 근호 목사 오용익 18-12-10 44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