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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14:21:37 조회 : 295         
20180514a 부산강의 : [시편]10(5편)-자기 통치 이름 : 한윤범(IP:14.39.134.25)

20180514a 부산강의 : [시편]10(5편)-자기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편에,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 다윗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은 시. 그런데 이 시는 나중에 성령으로 역사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되고 계시가 되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말씀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활동하게 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긴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요. 일찍 온 예수님, 그리고 그 시대에 필요했던 예수님.

 

그러면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는데 왜 다윗의 활동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다른 사람의 활동은 하나님의 계시가 안 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시를 통해서는 오시고 왜 다른 사람들이 한 행동은 참고로 하지 아니한가? 그 이유가 여기 시편 5편에 쭉 나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라고 돼있지요. 여기서 다윗만큼은 오만한 자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리고 다윗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오만한 자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오만한 자로 보겠어요? 안 보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루일정, 스케줄이 있지요. 일정대로 사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볼 일 보고 사는 거잖아요. 이게 오만입니까, 이게 교만이에요? 자기 하루 일정대로 사는데 교만이냔 말이죠. 절대로 교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이게 오만이고 교만인 거예요. 왜냐하면 주의 목전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장차 심판 날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심판 오기 전부터 일상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 앞에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지 않는 겁니다. 이건 오늘이 마지막이란 의식이 없단 말이죠. 오늘, 나의 마지막이에요.

 

아침에 기상했을 때는 나의 인생의 시작이고,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누가 이야기해주면 다른 사람이 있다가, “너는 너 혼잔데 누구로부터 심판 받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한다면, 내 목전에 주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면 되는 거죠. 살다보면 주의 목전에 있는 게 아니고 하루하루가 주의 목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언이 되는 거죠. 그럼 누가 원형적으로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늘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신약에. 그걸 앞당겨진 예수님이 다윗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쪽에선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계획대로 스케줄대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다. 존재지요. 있는 내가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음 속에서 나와서 존재에서 존재로 있게 하는 겁니다. 존재에서 존재로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오만이고 교만이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시편 5편에서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게 아니고 사명과 무사명, 사명 없음. 사명 우선이냐, 존재가 우선이냐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겁니다.

 

사는데 있으니까 산다.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장발장이야기도 있지만 길 가는데 제과점이 있다. 현재 내가 배고프다. 보니까 빵이 있다. 들어가서 빵을 먹었다. 뭐가 오만이고 뭐가 교만이고 뭐가 잘못된 겁니까? 내가 배고파서 먹을 걸 찾다가 눈앞에 나의 있음과 먹을 게 있기에 나의 있음이 먹을 게 있음을 취득해서 내 입속으로 집어넣었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이거 누가 봐도 나쁘지요. 자기 빵이 아니기 때 돈은 지불하고 먹어야 될 것 아닙니까.

 

왜 그러냐 하면, 빵이 있음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그 빵 주인이 따로 있거든요. 빵 주인이 빵을 구울 때는 돈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돈을 안 주면 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요. 그걸 지불하지도 않고 내가 여기 살아있기에 무조건, 무조건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빵 주인은 눈에 보이는 게 문제지만 진짜 주인은 우리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러니까 지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을 다윗은 파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5절에,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다윗에게 자기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자기 앞에 주의 존재가 더 중요하고 그 주님의 존재로부터 사명이 나와서 사명에 의해서 자기가 후차적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사명 없이 산다는 것은 그건 홀로 사는 건데 악이 되는 겁니다. 아담을 처음에 만들었을 때 주께서 아담에게 이미 사명을 줬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러면 따먹지 말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누구 입장에서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중간에 마귀에 끼어듭니다. 하나님 입장 생각하지 말고 네 입장을 생각하란 말입니다. “먹음직도 하지, 탐스럽지? 그러면 먹어.”

 

이건 누구 입장이에요? 하나님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인간인데 마귀는 그 순서를 바꾼 겁니다.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그 마귀의 뜻은 한결 같아요. 변함이 없어요. 욥기 1장에도 나오잖아요. 사탄의 말이 뭐냐 하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인간 쪽에서는 없다. 하나님을 섬기되 인간은 자기한테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기 사는데 도움 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제거 대상입니다.

 

그 일을 어디서 해야 돼요? 교회에서 해야지요. 이유가 있어서 온 사람, 병 낫기 위해서 온다든지, 복 받기 위해서 온다든지, 천국 가기 위해서 온다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하면 하나님께서 잘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나온 자들을 전부 다 지옥으로 돌려보낼 집념과 기능, 사명을 교회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업적이 필요 없어요. 몇 명 모였느냐, 몇 명 남아있느냐는 업적이 필요 없어요. 주님은 업적을 보지 않거든요. 차라리 몇 명 돌려보냈는지가 더 중요해요. 세상으로 다시 꺼지라고 얼마나 자주 보냈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가 없어요. 내 몸은 내가 세울 수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주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악마가 원래 아담에게 찾아왔던 사고방식과 정신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중간 연락장소를 만들자. 요새 말로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를 만들자. 이 말은 뭐냐? 교회를 인간이 만들 수 있다가 돼요.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는 완전히 가짜겠지요.

 

그리스도의 몸을 인간이 만든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인간은 성전도 만들고 교회도 만들 수 있다고 하니까 그 의식 배후에 결국 그걸 왜 만들겠어요? 물이나 의자, 테이블을 왜 만들겠어요? 하나님 좋으라고 만듭니까? 자기 좋으라고 만들지요. 그럼 교회가 왜 있어요. 성당, 교회를 왜 만듭니까? 누구 좋으라고? 만든 본인 좋으라고 돈 모아서 만드는 거예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갔을 때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했어요? 금가락지 빼서 금은방 했습니까? 신을 만들었잖아요. 신을 만들 때 반대한 사람이 없어요. 이건 모든 인간에 보편적으로 담겨 있는 정신 상태는 하나같이 동일해요. 전부 다 타락한 아담의 품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타락한 아담의 품성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백 퍼센트 찬성한 거예요. 애굽의 황소 만들기에. 그리고 이름을 여호와라 한 거예요.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그분이 누구냐? 바로 신이다. 신에게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서 그들이 애굽에서 익히 알던 신을 도입한 겁니다.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40일만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마음이 좀 어질고 사견이 있다면, 형태는 황소지만 마음까지 황소이겠느냐? 여호와를 묘사하기 위해서 어진 동물 중에 하나, 황소 만들자고, 그리고 여호와 섬기는데 정성을 보여준다고 제일 귀한 금을 뽑아서 주저 없이 자발적으로 헌금한 거예요. 요즘 같으면 성령으로 헌금했다고 하겠지요. 자발적으로 주저 없이 헌금해서 그 생각이 일치해서 황소로 했는데 설마 황소 자체를 섬기려고 그런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황소 섬기려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묘사하다보니까 괜찮은 비슷한 이미지로 황소 나왔구나. 그래 기특하다. 너희들 참 잘했어요. 이왕 잘한 김에 십계명 가져왔으니까 추가해서 십계명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문제잖아요. 사람을 배려한다면.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십계명과 짝을 이루는 하나님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존재의 형상이 아니에요. 십계명과 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제사, 곧 피입니다.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존재 형식, 어떤 형상으로 오는 게 아니고 피를 흘리는 기능으로만 십계명과 짝을 이룬다니까. 십계명과 황소가 결합될 수 없는 이유는, 그 황소에선 죽음이 없어요. 왜? 자기 정성을 죽이는 거잖아요. 이건 자기 부인과 관련돼있지요.

 

어떤 사람이 헌금을 해서 강대상에 봉투 올라왔는데 그런 목사 없지만 충격적인 이벤트를 벌입니다. 여러분, 이분이 감사 헌금했습니다. 감사 헌금 어떻게 받는지 보세요. 그 자리에서 수표가 들어있는지, 오만 원짜리가 들어있는지 모른 상태에서 봉투를 찢어버립니다. 헌금 낸 사람 경악하고, 재정 집사부터 졸도하고, 교회관리 걱정하는 장로부터 나자빠지고, 교인들은 저 목사와 함께 못하겠다고 쫓아낼 궁리하겠지요. 제일 충격 받은 사람은 헌금 낸 사람일거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헌금 낸 사람은 돈이 일단 자기 손에서 떠났기 때문에 충격 받으면 안 되지요. 자기 돈 아니니까. 충격 받을 일 없지요. 해선 안 되지요. 그 다음에 교인들과 목사 입장에서 헌금을 찢는다는 말은, 헌금 낸 사람의 자기 의를 찢은 것이 되니까 복음적 교회란 것을 확인한 점에 대해서 찬성해야 되겠지요. 말이 너무 꼬인다. 지금 제 논리에 무리가 많지요. 이건 납득이 안 되지요.

 

우리가 납득을 못하는 것은 왜 귀한 돌 판을 깨느냐 말이죠. 그건 돈 주고도 못 사잖아요. 하나님의 친필로 새겨진 열 개의 계명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든지 해야지 보여주지도 않고 깨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모세만이 하나님 편에 서있음을 시내 산 내려오면서 확인하는 겁니다. 이들과는 말이 통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이들이 누굽니까? 인간이거든요. 인간과 하나님이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모세는 새삼스럽게 느낀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난 이 백성과 안 놉니다. 감당 안 됩니다. 더 이상 지도자 노릇 못한다고 선언해버리죠. 그래서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하면, 너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내 사자 보내줄게, 천사 보내줄게.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지요. 세 가지 시험 끝나고 난 뒤에 누가 찾아옵니까? 떡 주고 물주면서 원기 회복하라고 돕는 수호천사들이 오지요. 이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 시험 받는 걸 다 지켜보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은 수호천사를 평소에 얼마나 느낍니까? 수호천사의 현존, 임재를. 예수님이 수호천사를 느끼는 것은 바로 마귀로부터 시험 받을 때에요. 우린 매일같이 마귀한테 시험 받습니다. 이 말은 매일같이 수호천사나 성령이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누가 옥문을 열어줬습니까? 천사지요. 그러나 베드로나 그 사람들이 그걸 의식했겠어요? 수호천사가 있으면 아예 옥에 안 갇히도록 조치해야 되지.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말이야.

 

수호천사가 우리 말 안 들어요. 수호천사는 철저하게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지시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사라 하면 천사 붙들고 하는 말이, 내 스케줄 도와주세요. 내 계획 도와달라고 성질 급하게 천사들에게 부탁할 인간들이에요. 물론 수호천사는 우리 말 안 듣지요.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지요. 궁지로 몰아넣어야 내가 우기고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계획이라든지 하루스케줄이 이건 전혀 주의 목전에서 이뤄진 게 아니고 진짜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욕망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난감한 상태가 돼요. 이 상태가 매일같이 주의 목전에 서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설 수 없는 상태, 내 힘으로 하루 시간을 더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 잠을 자야 되는데 새벽 2시고 3시고 간에 정신이 맑아도 도를 닦아도 그렇게 맑을 수 없어. 잠이 안 오는 그런 상태, 난감한 상태에요. “주여, 잠이 오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해봅시다. 그럼 주님의 응답은 간단해요. 네가 뭔데 잠자야 되느냐? 잠이 안 들면 잠이 안 오게 한 줄 알고, 잠들면 잠을 주셨다고 할 입장이고. 너는 잠드는 사명과 잠 안 드는 사명을 번갈아 하든지 사명의 문제지 네가 그런 권리도 없는데 잠자야 되겠습니다. 잠자서 뭐 할 건데? 잠 푹 자고 뭐 할 건데? 잠 잘 자고 또 자기 스케줄 추진할 거예요. 난감한 상태에서 벗어나면 자기밖에 몰라요. 지 잘나서 사는 줄 알고 있다고. 지 훌륭해서.

 

다윗은 철저하게 사명 위주로 나갑니다. 그럼 그 사명이 뭔지 알아야 되겠지요. 그 사명은 이겁니다. 천국 없음이에요. 천국 없으면 지옥 없음이에요. 천국, 지옥 없음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존재위주의 하나님 나라에요. 여기 있다가 죽으면 저 하나님과 합세한다. 그럼 내 존재는 미래에 천국 가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게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잘 보존해야 돼요. 왜?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다윗을 통해서 준 사명은 천국이란 것이 없고 지옥이란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해하는 천국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내 존재를 위해서 사는 그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고 이해가 되는 천국은 애초부터 없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없으면 지옥도 없지요. 사람이 서로가 통한다는 것은 백 프로 가짜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선지자거든요. 선지자 특징이 의사소통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선지자는 미리 대비하라고 예언하는 게 아니고 현 상황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끝장내도 너희들은 할 말 없어. 심판의 기능으로 선지자가 작동합니다. 이러한 사명을이야기하지 전에 먼저 다윗 자신부터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은 변형을 당해야 되는데 다른 생각으로 달라져야 되고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그런데 다윗이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혼자 도 닦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변화되려면 다윗 존재 자체가 개무시 당하는 사건이나 사태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시편 5편에는 안 나와 있지만 어쨌든 이 시는 다윗의 시거든요. 여기서 다윗이, “통촉하소서”라고 돼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알아서 꾸려나가는 그러한 상황은 지금 지장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원활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1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자기 편들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돼있지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이 통치할 때 어떻게 통치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돼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통치를 생각해봅시다. 현대 국가는 변질 됐고,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를 봅시다. 전제정치하던 그런 시대를 봅시다. 왕이 지침을 내립니다. “여봐라!” 지금 김정은 생각하면 딱 맞지요. 휴대폰 금지, 하든지. 어느 고을의 특산물을 바쳐라. 지침을 내리는 겁니다. 그게 왕의 통치가 되겠지요. 그건 여러분이 이해되시죠.

 

그러면 지침을 내리면 자율성이 없지요. 타율적입니다. 지침이 내려질 때 그대로 행하면 통치기능이 유지된다고 보통 생각하겠지요. 다윗이 왕이 될 사람이고 왕이고 그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백성들이 왕을 미리 알아버려요. 미리 알면 그 안다는 것이 인간들 마음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왕이니까 알아서 기어야 돼요.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기쁘겠어요, 왕과 하나가 되겠어요? 아니면 다른 것을 의식해서 더러워서 지켜주자, 이런 식이 되겠습니까? 고객이 왕이잖아요. 그러나 고객을 좋아하지 않지요. 마구잡이로 갑질하는 고객을 싫잖아요. 아내가 아내란 이름으로 잔소리를 해댄다. 그러면 기뻐요? 제발 결혼생활 3,4년 했으니까 홀로 있고 싶다. 이제 밥 먹여줄 만큼 했으니까 싸나이도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오잖아요. 이게 억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부터 통치가 뭐냐? 다윗은 왕이니까 통치가 뭔지 먼저 배워야 돼요. 왕은 아무리 명령하고 지시하고 폭력을 행해도 절대로 백성들은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왕의 명령을 듣지요. 이것은 종과 주인의 관계지 진정한 왕이 아닌 거예요. 나라가 되려면 지시와 명령이 있어야 되니까 억지로 따라주는 거예요. 다윗부터 하나님은 명령하고 나는 따른다는 생각이 철폐돼야 돼요. 그럼 어떻게 돼야 돼요? 다윗 안에서 자발적으로 정말 사랑해서 감사해서 자율적으로 나의 왕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알아서 희생하는 마음이 절로 나올 때 그 사람이 왕의 통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거든요. 자기가 제일 소중하니까.

 

이걸 저는, 내가 나를 통치해야 된다. 이 말은 내가 보기에 내가 어설프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어설픈지 그 기준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돼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해야 될 텐데 내가 말을 안 들어요. 순간 돌아서면 내 기쁨이 전부고 내 즐거움에 헤헤거리고 그게 최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다윗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뭘 줬습니까? “통촉하소서”란 말을 볼 때 뭔가 난감한 “하나님이여, 도와주서서”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힘든 상황에 이르렀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기도를 하고 시를 썼지요. 힘든 상황을 보면서 그 상황을 벗어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문제라는 것, 내가 말썽꾸러기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걸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예수님 앞에 그리스도란 말이 붙지요. 그리스도란 말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 일상의 모습이 기존에 교만하기 짝이 없는 본디오 빌라도라든지 민족의 왕으로 사셨던가요? 그게 아니죠. 세상 권세자들은 지배하는 재미로 살지만 나는 어떻게 한다? 나는 너희를 섬기려 한다고 하지요. 누가 높으냐고 제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날 때 나는 이 땅에 섬기려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섬기러 온 그분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왕이 되는 거예요. 겸손하게 나귀 타고 오시는 거예요.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고 일반 백성들이 생각했던 왕의 개념과 왕의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사람이 누구로부터 통치를 받고 지시를 받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그 통치의 자리가 언젠가는 자기 자리가 되기를 은근히 노리는 겁니다. 지금 더러워서 참아주면서 내가 나중에 대한항공 가족이 되면 정말 갑질뿐 아니고, “어딜 상무한테 대들어?” 설계도면 던지고, “너,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나?” 이러면서.

 

갑질을 당해서 뒤늦게 몇 년 뒤에 고발한다는 말은, 그것도 <브이 포 벤데타> 영화처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한다는 것은 그 자리가 부럽다는 거예요. 직원들이 나빠요. 왜 그러냐 하면 조현민이 컵을 던졌잖아요. 그 자리에서 던지면 되잖아요. 미투가 왜 나쁘냐 하면 뒤늦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나한테 몸 바치면 조연급으로 써줄게. 이럴 때 “아이고, 인간아”라고 왜 그 자리에서 못했습니까? 그 감독의 자리가 언젠가 내가 차지할 자리기 때문에 지금 꾹 참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나라의 통치의 기능이에요. 그게 통치 방법이에요.

 

힘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갑질하지 않으면 질서가 안 돼요.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없는 질서를 만들어요. 인간의 머리론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걸 자율적 통치라 해요.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겠습니다. 이 수준이 아니에요. 주께서 못된 나에게 헌금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나는 남을 지배해야 성질이 풀리는 본성인데 더러워서 참아주는 데. 이 말은 스프링이 눌렸다는 거예요. 그 욕망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벨탑 왜 만들었습니까? 바벨탑 만들 때 이의 건 사람 있어요? 없지요.

 

만약에 서울 롯데월드가 127층인데 그것 만들 때 사장님한테 지하 127층 하자고 건의하는 직원 있겠어요? 없지요. 높이 솟구치겠다는 말은 우리 이름을 지하에 묻는다? 아니에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겠다는 것이 바로 바벨탑의 취지였고 그것은 언어 통하는 정도가 이구동성으로 언어도 같을뿐더러 통해도 너무 통해요. 마음이 한결 같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최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왜? 부자 될 여분이 있기 때문에. 부자만 지옥 가는 것 아니에요. 가난한 자도 지옥 가요. 병들고 어려운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가 뭐예요? 병들고 어려운 것이 내게 합당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장애자로 사는 게 합당한 게 아니고 나는 멀쩡한 게 합당한 데 하나님께서 행정을 잘못해서 도깨비한테 물어야 돼. 내가 죽을 것도 아닌데 이름이 같아 헷갈려서 행정착오로 그 사람이 죽은 내 몸을 사용해서 나는 중국집 주방장이고 은행 지점장 아닌데,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그게 불만이라. 도대체 인간이 살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게 하나님 앞에서 불만이에요. 자기 통치가 안 돼요.

 

사무엘하 15장 31절 봅시다. 그 구절이 어떤 대목이냐 하면,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거든요. 가만 보니까 백성들도 다윗이 지겨워. 지겨울 때는 “지겹다, 갈아보자.” 이렇게 되잖아요. 젊은 사람으로 하자. 다윗의 족보니까 압살롬도 괜찮다. 또 압살롬이 굉장히 미남이고 머리숱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이에요. 다윗이 쫓기는 입장에서 어떻게 반란군이 망할까? 그쪽의 지략가가 아히도벨인데 그의 지략을 무효로 돌려서 어서 반란군이 진압되게 하옵소서, 라는 그런 내용으로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더 이상 끄집어낼 것 없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아히도벨이 자살해요. 아히도벨의 계략이 실패로 끝나거든요. 다윗이 숨겨둔 이중첩자 후새의 계략을 압살롬이 더 낫다고 이야기해요. 후새의 계략이 굉장히 스케일이 커요. 사람을 붕 뜨게 만들어요. 아히도벨은 지금 즉각 다윗을 잡읍시다. 힘 모으기 전에. 그런데 후새의 모략은 임금의 실력이면 나머지 모든 나라를 다 빼앗을 수 있고 그래 놓고 나중에 다윗을 잡아야 다윗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합니다. 지금 다윗을 잡으면 다윗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적들에게 승리했던 전략가기 때문에 지금 만약 초전박살나면 백성들 마음이 흩어지게 되니까 임금의 계략이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압살롬이 붕 떠서 후새의 계략대로 하니까 아히도벨이 자기 고향에 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 대 인간의 전략 싸움이라든지 그동안 전쟁했던 노하우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데 이걸 유일하게 하나님의 일로 본 사람은 다윗 본인이에요. 그것은 반란의 본질이 누가 봐도 압살롬이 다윗을 공격하는 것이 반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다윗에게 반란의 본질이 거기 있는 게 아니에요. 대신 왕국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이건 다윗 말고 아무도 몰라요. 요압도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왕 되신 하나님이 함께 있어요. 자기가 왕이 아니에요. 누가 왕이냐? 여호와 하나님이 왕입니다. 그러면 누가 백성이에요? 다윗은 백성의 대표자가 돼요. 왕과 백성 사이에 통치하는 통치원리를 뭐라 했습니까? 섬김이죠. 다윗은 지금 하늘의 명대로 백성들 위해서 섬기고 있는데 압살롬이나 백성들 눈에는 다윗이 자기를 갑질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모든 인간, 통치 받는 그 나라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겁니다. 잔소리를 해대니까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지 인간들 마음은 자기가 자기에게 왕이 돼요. 이건 인간들 본인이 자율적 통치가 돼요, 안 돼요? 자율적 통치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과 반대되는 본질, 반대되는 원리가 각자 인간들 속에 강렬하게 작열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 그렇게 작열하는 다윗의 섬김을 보고, 다윗이 저렇게 섬기니까 우리도 본받아서 다윗처럼 섬기는 자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명이 먼저지 내 존재가 먼저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고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바꾸자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게 안 됩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강물이 내려온다고 합시다. 어떤 연인들이 장난하다 물에 빠뜨렸어요. 장마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물이 깊지는 않아요. 그런데 물살이 센 걸 예상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걸 측면에서 보면 서울에서 보면 강원도가 높겠지요. 중력에 의해서 서울로 올라가겠지요. 갈수록 물은 많아지고 물살은 세지지요. 자기 힘으로 못 빠져나오지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못 빠져나오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래요. 자력으로 못 빠져나와요. 십일조 하라면 해요. 선교 하라면 선교 갑니다. 봉사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안 바뀌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준 마음이 물살이 세도 너무 세요. 무슨 수로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내가 지어낸 거지만 결국 어디 도착했는가? 제3한강교. 그 정도 되면 죽었겠지요.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죽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은 넓은 길이라 해요. 넓은 길을 사람이 찾는 이유가 하나하나 따져서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방탄소년단이 좋다. 하나하나 따져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한두 명 방탄소년단 좋다고 하면 그 물살에, 방탄소년단 이야기 안 하면 친구들끼리 대화가 안 돼요. 이미 물살에 들어갔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내가 나중에 나이 들면 교회 다녀야지. 그게 안 돼요. 돈 좀 벌어놓고 교회 나갈게. 이게 안 된다니까.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물살에 포위돼있어요. 내일 잘할게요, 모레 잘할게요. 안 돼요. 오늘이 최후의 날이에요. 오늘이 주의 목전에 심판 받는 날이라니까요. 나만의 생활, 나만의 터전, 영역, 그 ‘나만’이라는 게 없어요. 전부 외부의 물살이 다 만들어낸 소용돌이에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작은 건 될 수 있겠지요. 눈앞에 물. 나는 물을 마실 수 있다, 마신다, 마셨다. 봐, 내 마음대로 되잖아. 그러나 인간의 통치란 것은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인간에게 덮쳐있는 악마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성 때문에 정신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어떤 화살표가 있다고요. 교회 가도 노리는 게 있고요, 찬양해도 얻고자하는 기대함이 있고요, 헌금은 물론이고, 봉사는 물론이고. 행동 하나, 부모 효도하고 섬기고 누구와 친하게 지낼 때 뒤에 은근히 노리는 게 있다니까요.

 

그게 뭐냐?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그 물살이 뭐냐? 인간이 임의대로 자기중심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있다는 그 점이 문제입니다. 선과 악이란 물살을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다윗은 선과 악을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봤는가? 7절, 8절 읽어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7절에서는 주의 풍성한 인자하심,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죠. 주님의 사랑으로. 8절에는 주님의 의로.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벗어난 사람만의 고백이다? 선과 악을 본인이 선택하는 그 물살에서 벗어난 사람이 보는 세상보기입니다. 이것 10분 쉬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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