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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10:30:43 조회 : 53         
20181008a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이름 : 한윤범(IP:14.39.134.5)
20181008a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7편 6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성경을 보게 되면 어딜 봐도 비현실이에요. 고요한 사회생활에 무슨 심판을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비 거는 느낌, 하나님께서 인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신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편 7편 같은 내용들은 늘 그런 게 아니고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제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죠. 성격이 이상하죠. 사람도 한 번 화냈으면 그 다음엔 휴전하든지 쉴 만도 한데 하나님은 에브리데이에요. 매일같이 분노하시고 심판하셔요. 성경에서 이렇게 돼있으니까 사람은 성경을 외면합니다. 현실성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성경은 현실과 안 맞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살려고 덤벼들어보잔 말이죠. 성경대로 살려고 보는 순간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갖고 있는 정서와 너무 다르잖아요. 지난 강의 제목에 정서가 들어갔지요(구조와 정서). 우리 정서와 너무 다르니까 외면하고 싶고, 또 한 가지는 구태여 성경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관행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관습, 관행, 습성, 습속, 몸에 배였다는 말. 뭐가 몸에 배였냐 하면, 어느새 우리는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환경이,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이 교류가 돼버렸어요. 내 안에서 발생된 것과 외부의 것이 적응이 잘 되다보니까 세상 환경 자체로 사는데 충분하다, 모자람이 없다, 만족스럽다, 잘 적응했다. 그래서 고요하다.

어제 오후 설교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이 점을,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잖아요. 창조하셨다, 끝. 그렇게 되는 겁니까? 창조하고 난 뒤에 뭔가 하나님 쪽에서 창조 잘됐다, 못됐다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을 하나 따로 추가해서 마지막으로 만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안식일을 만들었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2장 넘어가면서 모든 걸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있죠.

안식, 그냥 쉬시는 것. 그냥 쉬지 않고 다음에 일하기 위해서 쉬면 안 되겠지요. 그럼 안식이 안 되니까. 만족스런 상태의 지속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자기 평가에 나서십니다. 내가 만든 것이 잘됐을까, 못됐을까 했을 때 그 평가를 어떤 식으로 측정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면 그건 누가 뭐래도 잘된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처럼 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있다는 말은, 무슨 상태를 유지하려는 하나님 자체적인 정화활동이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 만족스런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쉴 새 없이 전쟁과 심판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창조는 다 했어요. 창조 내부에 계속해서 뭔가 들썩거리고 아주 분주하고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안식하셨다는 틀을 깨지 않으려는 하나님 자체적인 시도가 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인간세계는 복잡하지요. 혼란스럽고. 하나님은 안식하는데 인간들은 안식합니까? 안식하지 않지요. 인간이 안식하든 말든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이 세상은 만족스런 안식 상태란 말이죠. 안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필히 하나님에 의한 작용이 세상 속에 계속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갈등과 혼란과 혼선, 태풍, 화산폭발, 지진, 그리고 해일, 그리고 휘발유저장고에 불이 난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자기만족과 자기 안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참 이기주의죠. 정말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밖에 몰라요. 그리고 피조물 보고 그걸 따르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만족만을 위하여 너희들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따라야 된다.

장기에 보면 상象이 있어요. 이게 코끼리죠. 그런데 코끼리를 문자로 얇은 판에 집어넣으니까 마음대로 부리잖아요. 그런데 장기판 상이 실제로 코끼리라면 장기판 다 부술 거예요. 그런데 실제 코끼리가 아니고 문자화해서 집어넣은 거죠. 그러니까 장기 두는 사람이 코끼리를 부리는 거죠. 그 다음에 말 마馬도 있지요. 포包도 있고 차車도 있고. 이걸 부리는 거예요. 일종에 가두는 거예요. 장기 알속에 코끼리와 말과 차의 기능을 묶어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아담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습니까? 아담이 아담이라고 지었습니까? 인간이 인간 이름을 짓진 않지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에요. 왜냐하면 이름을 지으실 때는 그만한 목적과 이유가 있단 말이죠.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내 인생 왜 이러나,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느냐, 도대체 존재의 의미를 모르겠다. 특히 남자들 가을 되면 호르몬 작용 때문에 굉장히 쓸쓸해하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하고. 아무도 편지를 받아주세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는 여자는 식상하기 때문에 모르는 여자는 다 아름다워요.

그럴 때 인간이 사는 목적과 이유를 묻기 전에 나에 대해서 하나님을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를 사람으로 불러주잖아요. 아담으로 불러준다고요. 아담으로 불러준다면 하나님의 게임 판에 우리는 이미 인간으로 장기 알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쉽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고 구약성경에 욥기가 바로 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영이 존재지요. 하나님과 천사니까. 악한 영 악마와의 내기에서 욥은 장기 알처럼 다뤄지고 있습니다. 욥을 장기 알로 봅시다. 욥을 옮기죠. 아픈 데로 옮기고, 자식 열 명 죽이는 쪽으로 옮기고, 모든 재산 다 날아가는 쪽으로 옮기고, 아내까지 자기를 원망하는 쪽으로 옮기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욥을 장기 알로 다룰 때 욥이 자기 위상을 모르고 내가 그냥 죽고 싶다고 이야기해요.

이것은 욥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의 기능 안에 본인이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살하면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거예요. 차라리 이럴 거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자꾸 자기가 장기 알이란 생각을 못하고 장기 알에서 족쇄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장기 알 상, 코끼리가 기호에서 벗어나면 장기 안 됩니다. 코끼리가 장기판을 밟아버리는데 장기가 되겠습니까?

인간은 못 벗어나는 게 인간이에요. 피조물이니까.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규정한 그 규정에서 못 벗어납니다. 욥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백성들이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가 성경에 포함돼있어요. 욥기를 통해서 나라는 것은 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의미나 나의 가치란 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생각해서 밝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욥이 발악을 해요.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이 왔다 갔다 해서 힘드니까. 그때 욥 주위에 같은 장기 알이 등장해요. 세 개의 장기 알이 들어갑니다. 친구들이죠. 친구들이 욥과 부지런히 대화를 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따로 논다는 사실. 참 이걸 알면 인간에 대해서 거의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과 하나가 안 된다는 사실, 이것 아시면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거반 다 안 거예요.

부부? 부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동거인이죠. 절대로 하나 될 수 없어요. 자식이요? 내 몸에서 태어났다고 내 것? 아닙니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거예요. 인생이란 것은. 아무도 같이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공유할 수도 없어요. 제가 수련회 때문에 아가서를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랑은 없다, 에요. 사랑은 없는데 사랑은 착오라 했어요. 루소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누굴 사랑한다는 것은 본인이 했던 착오에 불과하다. 본인의 생리작용이 남에게 상상력을 부여해서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착오를 일으킨 거예요. 착오는 고장 난 거죠. 내 몸이 고장이 일어나서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 겁니다. 루소니까 세상적인 안목이에요. 계속 공부하는 중입니다만 성경에서 아가는 이게 하나가 돼요. 그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사랑은 착오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건재하기 때문에. 30년, 40년, 50년 살아도 어젯밤에 나를 욕하거나 약간만 싫은 소리해도 우리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리 상대가 과거에 많이 해줬다 해도 내 가치를 훼손할 경우에는 달려들게 돼있어요. 마치 개한테 돌 던지면 덤벼드는 것처럼. 우리는 나를 건드리면 누구에게든지 덤벼드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걸 참는다고 언제까지 참아지진 않아요. 모든 참는 것은 무의식으로 가고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게 돼있어요. 정신과 의사들은 이야기하죠. 인간 행동의 90%가 무의식이라고. 그리고 무의식을 쪼개보면 거기에 과거라는 것이 흐르고 있다고. 과거에서 내가 의식, 참아야 됐기 때문에 양보했던 그것들이 없는 게 아니고 깊은 지하창고에 다 모이는 겁니다. 서양엔 포도주 오크 통 같은 게 있지요. 미국이라면 차 수리에 필요한 기구들이 있는 음침한 그 지하실에 우리의 과거가 다 모입니다.

처음에는 두꺼운 지상에 안 올라와요. 사회생활 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양보해야 하고 정치적 협상과 타협을 해야 되기 때문에 계속 지하실 문을 대충 뚜껑으로 덮어놓는데 건드리면 뚜껑 확 열리죠. 특히 술 먹을 때. 그래서 술 먹어선 안 되는 거예요. 속에 있는 귀신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그런 짓입니다. 술 먹고 운전해선 안 되지만 술 먹고 운전하는 게 뭡니까? 술 먹고 차를 모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몸뚱이가 차라면 술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자기 몸을 음주 운전하는 식으로 다뤄서 폭력적으로 완력으로 나가고, 배려가 없고, 상대방 생각하는 것도 없고.

지하실에 있는 물건들이 바깥으로 나오면 다음에 청소 다시 해야 돼요. “어제 내가 필름이 끊겼다.” 필름이 끊겼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바깥에 나온 걸 다시 지하실에 넣으려하니 혼자 알랑방귀 끼고 하지만 그것 소용없어요. 이미 지하실 문은 열려있어요. 한 번 술 먹은 인간, 두 번은 안 먹을까요? 인간은 갈라서는 게 없어요. 늘 갈라서 있기 때문에. 구태여 이혼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살아도 이혼이라. 늘 따로따로 놀아요. 좋은 게 좋으니까 같이 붙어사는 겁니다. 젊은 신혼한테 이런 소리하면 안 믿어져요. “옵빠, 옵빠~” 오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뭘 또 빼먹으려고 그런 소리하고 있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장기 알이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시 장기 알로 가둬져야 되거든요. 지금 하나님께서 욥을 건드리니까 욥이 성질나서 무의식중에 확 나왔어요. “나한테 너무 하는 것 아니십니까, 왜 이리 나오십니까?” 하나님께 달려들었어요. 달려드니까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인간이라는 문자, 인간이란 이름 안에 가두기 위해서 똑같은 장기 알 세 개를 둡니다. 여기서 뭘 하느냐? 이 세상 자체에 어떤 해답이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나는 나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욥은 대화해보니까 나는 의인 맞네. 문제는 의인인데 왜 고난 받는가? 고난과 의인이 잘 매치가 안 된다는 겁니다.

욥 이야기를 오늘날 현실에 적용시켜봅시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 매일같이 누굴 만납니까? 타인을 만나지요. 남을 만나면서 증명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나다. 이걸로 해답을 정해버립니다. 남들 만나면서 저 사람 만나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있을까 계산해서 그 이득을 내 소유로 전환시키죠. 그게 해답이에요. 같은 인간끼리 만나는 해답이 그거에요.

저 사람과 만나서 이런 이득을 취했고 그 이득이 돈으로 되었고 그 돈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고 그 에너지로 산다. 또 돈 벌어야지. 이렇게 또 나가는 거예요. 모든 해답은 이미 정해져버렸습니다. 나는 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니까 그들도 그들이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전부 따로 놀아요. 오늘 제목을 따로 논다로 일단 정해보자. 각자 따로 노는 거예요.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세상사는 것은.

그런데 제일 마지막 친구 하나 들어오죠. 엘리후가 와서 거침없이 욥을 책망합니다. 책망할 때 그는 따로 노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따로 논다는 것이 성립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해요. 네 번째 친구가.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욥은 따로 놀면 안 돼요. 그런데 다른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게 별 게 없으니까 점점 더 나는 의롭다고 것에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가 어떻게 단독적으로 의롭다고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평가는 하나님이 해야 되고 평가할 기준은 네가 하나님처럼 모든 변화를 다 읽을 수 있어야 의가 돼요.

열 문제 나왔는데 다 맞췄다. 우린 백 점이라 하지요. 하지만 천 문제 나왔을 때 다 맞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맞췄다고 해서 나는 모든 걸 안다고 절대로 자부할 수 없습니다. 바로 네 번째 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네 번째 친구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친구한테 이야기하게 하셨어요.

순서가 친구를 통해서 욥을 질책할 때 세상 친구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1번 타자, 2번 타자, 3번 타자 보냈고 제4번 타자는 같은 친구면서도 하나님의 말을 대변하는 친구로서 가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욥기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철딱서니 없는 세 친구를 위해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라 했지 네 번째 친구를 위해서 죄 사함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란 말은 없거든요. 그걸 봐서 네 번째 친구는 개인이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욥에게 마지막으로 보내줬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친구가 나이가 제일 적어요. 욥보다 나이 더 적어요. 소위 인간세계에 경륜이 많다, 인간세계에 시간을 많이 보낸 자들의 말을 듣게 해서 결국 인간세계의 속성이란 것이 욥을 질책할만한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이나 욥이나 똑같이 따로 노는 겁니다. 따로 놀 때 해답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해답은 다른 게 아니에요. 망나니처럼 따로 노는 인간을 다시 어떻게 장기 알속에 도로 가두느냐, 그게 해답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나섭니다. 욥을 다시 장기 알속에 집어넣을 때 어딜 통해서 집어넣느냐 하면, 창조전의 시점으로 욥을 데려갑니다. 별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어요. 이건 말해선 안 되는 거예요. 왜? 너 태어나기 전에 넌 어디 있었지, 묻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창조전의 시점은 욥이 없음의 시점이죠. 없음의 시점이 태어났다는 이 말을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해서 욥을 없음의 시점에 집어넣어요. 욥이 존재하더라도 있음이 있음을 낳은 게 아니고 없음에서 있음이 나왔기 때문에 있음의 모든 의미와 가치는 없음으로 되돌아가야 비로소 그 비밀이 밝혀진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제 어머니 돌아가셨잖아요.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 성도라는 것은 살아있으면 죽음을 맞이해선 성도가 아니란 걸 느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죽음의 세계를 일단 경험해서 죽은 상태로 도로 내가 살았던 곳으로 다시 등장해야 그게 성도에요. 그걸 로마서 6장에 나오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자만이 성도라고요.

이 말은 살아있는 인간이 어떤 행위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착오고 오산이에요. 그건 본인의 종교적인 열망, 상상에 불과하고, 사실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부채질하지만. 내가 죽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악마의 이바구에요. 악마의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천국은 가짜거든요. 왜냐하면 살아있는 나를 위한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앙 좋은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모리아 산에 죽게 만듭니까? 니가 죽이란 소릴 왜 해요? 하나님이 죽일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벼락 떨어져서 이삭을 죽일 수 있는데 네 손으로 죽이란 말은, 너의 근원은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아니고 오히려 근원이 시간적으로 바뀝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이 나오는 근원이에요. 아브람은 데라에서 나왔지만 아브라함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요. 아브라함은 이삭에서 나왔습니다. 이삭은 없는 자식이에요. 이스마엘은 있지만 이삭은 혈통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자식에서 아브라함이 소속이 돼야 천국 백성이에요.

구원받는 것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도된다는 것 간단한 문제 아니에요. 교회가 전부 거짓말해서 교회 와서 예수 믿습니다, 하면 성도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오죽했으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만이 영이 되고 하나님을 본다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런 선물을 받았으면 세상에 살면서 궁시렁궁시렁 할 게 없어요. 이런 선물 받아놓고 자기 인생 불평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달고나 선물 받았으면 좀 달면 안 먹으면 되고 맛있으면 먹으면 돼요. 달고나 같은 선택은 적어도 우리한테 있단 말이죠. 그러나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았을 때는 우리가 걷어찬다고 떠나는 게 아니고 타락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이건 일방적으로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그 안에 완전히 포섭된 거예요. 사로잡힌 겁니다. 마치 아담이 악마한테 사로잡힌 것처럼. 두 번째 아담 되시는 예수님의 의의 나라에 우리가 완전히 포로가 된 겁니다. 체포된 거예요. 점령당한 겁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천국 안 가려고 발악을 해도 갈 수밖에 없어요. 너무나 충격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말로 평생을 다해도 고마움을 다 표현을 못합니다.

그 충격을 기껏 제가 표현한다면 이미 죽은 자가,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지, 하고 시간 여행하듯이 어슬렁거리면서 해운대 돌아다니는 똑같아요. 이미 죽었는데 잠시 또 이렇게 살았었다고 우리의 과거를 보여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흐르기 때문에, 이삭에서 아브라함이 나왔기 때문에.

이걸 우리말로 하면 주님으로부터 이미 천국까지 도착하시고 하늘나라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품안에 있으면서, 그걸 예수 안이라 해요. 사도 바울 편지에. 예수 안에 있으면서 어슬렁거리면서 부산, 대구 바닥에 노는 겁니다. 울산 바닥에 노는 거예요.

세상 어떻게 돌아가기에 주께서 죽고 세상은 어떻게 심판받아야 되고 불 심판되는가? 내가 그 이유나 알아보자는 식으로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어슬렁거리다보면 물기가 빠지고 너무 어슬렁거렸어. 독하게 어슬렁거렸어. 너무 열심히 어슬렁거릴 수 있지만 이게 주님의 안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겐 주님의 안목인데 주님의 시선이죠. 하나님 우편에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 우편의 자리가 최초로 알려진 것이 다윗언약이에요. 지금 우리가 하는 시편이에요. 시편 110편의 이야기를 사도행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그걸 따서 예수님의 현재 위치를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그 위치와 동일한 위치가 바로 성령이 임한 성령으로 세례 받는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위치는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이야기해주죠.

그렇게 하면 여러분 골로새서 3장 1절 생각나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안 보이는 식으로 감춰졌어요. 안 보인다는 것은 없다는 게 아니고 있는데 밑에서 보면 내 생명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명이 안 보이는 하늘에 있다면 이쪽 목숨은 생명이 아니죠. 그냥 버릴 용도지요. 화투에서 버릴 패, 가치가 제일 떨어진 것, 그걸 들고 전전긍긍하다가 나중에 나이 90되서 요양병원에서 역시 피싸리구나, 아무 쓸모없구나.

그러니까 쓸모없는 젖먹이와 어린아이처럼 주께서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 어제 낮 설교에선 쓰레기와 더러운 것,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쓰레기와 더럽다는 자기 위치를 갖고 우리의 본래 귀한 것은 다 안전한 금고에 올려놨어요.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지상에 있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지진이나 태풍이나 북한 핵이나 어떤 것에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악마가 아무리 물고 뜯어도 손끝 하나 못 건드리는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은 끄떡없습니다. 악마가 백날 설치고 마귀가 백날 설쳐도 손 탈 수 없는 곳이에요. 그냥 껍데기만 찢고 난리고 뒤에서 험담하고 하죠.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전에는 그 놈에 껍데기 쥐고 이것 바칠게요, 이것 바치고 주님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껍데기 자체를 육으로 활용하시는 거예요. 네가 이랬던 인간이었었어,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과거로부터 지속되는 것도 표현하고 있고 이미 완료된 것도 표현하고 있고 문법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은 네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확인하고, 이미 너는 살았고, 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진짜 내 모습을 병행해서 보게 하는 거예요. 구원되지 못한 내 모습과 구원된 내 모습을 비교합니다. 어느 쪽이겠어요? 결국 결론은 어느 쪽입니까? 미래에서 왔기 때문이 이미 구원된 입장에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됐고, 무엇 때문에 용서받아야 될 대상이고 이런 것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천국이란 것이, 내가 예상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육에서 예상한 나라는 육의 나라입니다. 그렇겠지요. 육에서 나왔으니까. 육이 이해한 나라는 천국이 아니고 사실은 지옥의 또 다른 모습이죠. 그러면 천국, 지옥이 착오가 오해가 없으려면 육이 영으로 바뀌어야 되죠. 육이 생각한 영은 영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생각하는 육 자체를 죽어야 되죠. 죽을 때 세상 마귀가 많이 도와줍니다. 우리 자신은 죽어 마땅함 깨닫게 하실 때 그렇게 하게 하신 영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어제 낮에 설교했잖아요. 세상을 볼 때 세트로 보라고. 십자가 세 개 이야기했죠. 강도가 생각했던 천국은 자기가 강도란 직업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천국입니다. 강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습니까. 그 사람이 살인강도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 잃었어요. 세상 같으면 양심 백 개라도 다 끄집어내서 반성해야 되고 사죄해야 될 문제지만 강도는 주님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그 나라 주님의 나라잖아요, 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에 죽는 것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는 것의 취지에 부합하다고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된다는 것이 주의 뜻이기에 저는 고맙게 여기면서 같이 죽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오늘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게 바로 강도는 장기 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장기 알. 그냥 장기 알이 아니고 본인의 잘남을 보여주는 장기 알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와 의가 담겨있는 장기 알이 되는 겁니다.

시편 7편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보세요.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내 이름 없어지고 여호와의 이름이죠. 내 의가 없어지고 누굴 따라 산다고요? 여호와의 의죠. 그러면 오늘날 육이 뭐냐 하면, 반대로 하면 쉬워요. 나는 내 의를 고수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나는 내 이름이 다치지 않고 내 이름이 손상 받지 않고 내 명예가 존중되는 쪽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움직이죠.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육입니다.

돈 뺏는 것만 나쁜 게 아니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도 분노하잖아요. 그게 아직도 나는 남한테 꿀릴 정도의 의가 내 가치를 지킬만한 의가 지하실에 많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 왜 그런 소리해요? 너와 견주어서 너 못지않은 나의 잘남과 의로움과 성실함과 나만의 고귀함이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가치 있다고 세상에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찾아오기 전의 욥처럼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육은 내 이름과 내 명예와 이름 자체가 우리 과거 인생 살아온 역사니까. 내 인생이란 가치와 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주의 일은 뭐냐 하면, 그걸 뭐로 바꾸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꿔주는 데 주님께선 개입하신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 말도 길고 복잡하게 여기신다면 더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몸에 예수님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내 몸에서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십자가 사건의 새 언약의 완성이니까. 십자가 사건이 나오는 것과 예수님의 존재가 나오는 것이 달라요. 예수님이 나온다는 것은 천주교나 청교도나 그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라 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새와 노래하는 사람 있고. 프란체스코.

그 사람이 청빈하잖아요. 프란체스코에 이런 예화가 있어요. 그 집이 원래 잘 살았던 집안이거든요. 아버지를 만나니까 옷을 홀랑 벗어서 내가 아버지한테 빚진 것은 이걸로 끝입니다, 아버지 앞에 던져버렸어요. 교만이거든요. 왜? 옷 벗어서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프란체스코가 처음에 활동할 때 천주교가 굉장히 반대했어요. 프란체스코처럼 청빈한 동료 열 명을 이단으로 처형했습니다. 자기와 레벨이 너무 고귀해서 꼴사납다 이 말이에요.

너무 튄다는 이유로 처단해놓고 프란체스코가 죽고 난 뒤에는 프란체스코의 명분을 천주교가 도용해요. 그래서 천주교는 하나님 뜻대로 이웃사랑을 보여주는 단체라고 선전합니다. 못됐지요. 이게 정치적 사업 안목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업의 아이템이 중요하거든요. 교회도 성당도 아이템 싸움이에요. 좋은 이미지 싸움이라니까요. 그 이미지 해서 뭐하려고? 그 사업체를 키우려고 하는 겁니다. 키워서 뭐하는데? 그걸로 끝이에요. 키웠다는 말은 조직에 자기 이름과 명예가 더 높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착했으면 하나님이 키웠겠는가. 그런 것을 대외적으로 광고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작은 교회 가지 말고 우리 교회 오면 천당 갑니다. 하나님이 알아주는 단체기 때문에. 그런 선전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 전하니까 초라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게 문제 되는 겁니까? 교회가 거지같아. 거지같은 게 문제 돼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선물이 있잖아요. 감당 못할 선물이 주어졌잖아요. 선물도 없고 교회도 안 크고. 그러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뭐. 교회 크나 작으나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받은 선물이 없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작은 것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발산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 앞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냥 괴수라 하면 이것도 하나의 겸손이죠. 그게 아니고 나는 나의 의를 포기 못하고 내 이름, 내 명예를 죽어도 포기 못하는 그런 껍데기를 안고 나는 요양병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너 같이 이기주의고 너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글쎄 그게 선물이라니까. 그게 십자가에 주신 선물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특정 사람이 강도가 아니고 우리가 이 땅에 제2, 제3의 강도처럼 사시면 그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당 간다고 했잖아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감 홍시 한 상자에 만원이라 하잖아요. 이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살 이유 있나, 없나? 없어요. 왜 살려고 하나? 남들이 다 그렇게 살려고 하니까. 자, 여기서 세상이란 것을 시편 7편을 우리가 하고 있잖아요. 성경이 자꾸 비현실적이고 이건 안 봐도 되고 감 홍시 만원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고 자꾸 배척하고 싶은데 시편 7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관이 언약적 차원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거예요.

언약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과 달라요. 그들은 언약백성입니다. 출애굽기 19장.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어요. 언약이란 말이 어려우면 그냥 계약이라 합시다. 하나님이 계약할 때 하나님 쪽에서 나온 계약자는 주의 이름이에요.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이름이 나오신 거예요. 이름은 이름 안에서 주어진 것만 하는 기능이 있어요.

하나님이 전 세계를 다 구원하는 기능은 언약 속에 없습니다. 오직 택한 백성만 건진다는 게 하나님이 스스로 내세운 자기 계약이에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한다? 이런 계약은 아예 하나님 계약 속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오직 택한 자만, 또 남은 자만 구원해요. 불교는 그렇게 보지 않고 부처는 대자대비해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건 지 계약을 모르면서 한 소리에요.

그 계약자가 이스라엘이라 하는데 이스라엘이 원래 없어요. 없는데 없는 이스라엘을 만들어 갑니다. 어떤 사람이 아기 낳고 아기 키우기 싫다고 아기를 고아원에 맡기고 자기는 도망갔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40 가까이 돼서 아버지라고 찾아왔어요. 가족이란 낳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 만드는 과정을 그 아버지는 40년 동안 하나도 안 했습니다. 만들어짐에 관여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닙니다. 만나면 안 돼요. 그건 남이에요.

주님은 거듭났다. 끝이 아니에요. 어제 오후 설교에서 했지만 끝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만들어내십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육이란 사실을 알아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육이 아니고 그냥 사람이에요. 너, 나가 돼버려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영을 위해서 증거하기 위한 육의 기능을 하는 장기 알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홀로 있는 게 아닙니다.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와 함께 있어요. 불신이란 말은 혼자 있는 게 불신이에요. 나쁜 짓했다고 불신이 아니고 혼자 사는 것. 혼자 사는 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우기는 거예요. 참 건방지죠. 혼자 산다. 요새 젊은 사람도 혼밥, 혼술 하잖아요.

혼자 살 때는 뭘 각오하느냐 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요. 혼자 비어있는 이것을 채워도 내가 채우고, 제거해도 내가 제거한다. 내가 제거하는 이것을 두 자로 자살이라 합니다. 살아온 모든 기억을 자기가 delete하는. 헤어지고 난 뒤에 남자친구 다 지워버리잖아요. 모두 선택해서 delete하면 한꺼번에 다 날아가잖아요. 마치 컴퓨터에 일어나는 모든 기능이, 인간이 원하는 기능을 컴퓨터에 다 옮겨놨다고 보시면 돼요. 평소에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와 컴퓨터에 어떤 기능들이 있는 것과 동치가 돼요.

채우는 것도 내가 채우고, 자기 역사가 되겠지요. 내가 채웠으니까 지우는 것도 내게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불신입니다. 그게 혼자 사는 거예요. 감 홍시 한 박스에 만원이라고 외쳤는데 집에 가서 돈 오만 원 번 걸 감사한다면 그것은 주께서 오만 원 벌도록 만나게 해줬다는 것을 고마워하죠. 이건 혼자 사는 게 아니죠. 감 홍시 만원한다고 나쁜 게 아니에요. 이것은 혼자 장사하면 안 되고 주님과 같이 장사해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7편은 인생관 자체가 바뀌어야 됩니다. 전에는 어떤 인생관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내가 인생 알아서 하고. 이 말은 힘들 때는 나 자신을 제거해버리면 그만 아니냐는 그게 마음에 준비돼있어요. 마치 자기 안에 시한폭탄이 있어서 여차하면 방아쇠 당겨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범죄자들이 그렇잖아요.

범죄자들이 피해자에게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교도소는 가도 사과는 하지 않아요. 왜? 내가 사과하고 싶을 때 사과하겠다는 거예요. 피해자가 있다, 없다는 나와 상관없다는 거예요. 내가 미안한 마음 들 때만 할게. 나한테 사과 요구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대로 감옥에 20년 살아줄 테니까 사과는 나한테 요구하지 마라.

혼자 살다 나중에 책임 못 지면 죽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책임진다, 안 진다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결정하는 게 더 나빠요. 내가 뭐 어쨌다고. 이건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결정해버리면 그건 책임 없는 게 돼요. 남들에게. 혼자 살 때 모든 판단과 책임을 자기 선악구조에서 자기가 하거든요. 양심에 가책되면 착한 일 좀 더하고 거지나 노숙자한테 돈 천원 더 주면 깔끔하게 마음에 정화되고 좋지, 뭐. 이런 식으로 모든 걸 자기가 처리해요.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성령 받아서 성도입니다. 한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구태여 헤어질 필요는 없어요. 같이 살아요. 그러나 세상관이 달라요. 세상은 내가 수집한 그게 세상이란 겁니다. 내가 수집한다는 것은, 내가 책임질 자신이 있기 때문에 수집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날 자꾸 몰아넣잖아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럼 내가 죽어버릴까?” 이게 육십 돼서 아니라 열 몇 살 아이들도 그런 소리해요. 선생이 남으라 하면, “선생님 창문 열고 뛰어내립니다.”

내가 죽을게.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내가 너 사랑하니까 네가 꼴보기 싫어하니까 내가 죽어줄게. 죽는 게 협박용이에요. 그게 협박해서가 아니라 평소에 나는 누구 때문에 산다? 나는 나 혼자 산다는 것을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남자, 여자와 못 살아요. 못 살면 갈아치우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사랑론에 보면 이런 게 나와요. 조건 바뀌거든 갈라서라 했습니다. 처음에 사랑하더라도 나중에 그 사랑의 조건이 변질되거든 언제든지 헤어지라 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진짜 짱이에요. 구애받지 마라. 사랑이란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다. 니가 결정한 거니까 그 조건이 결정한 거예요. 조건이 부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갈라설 자유가 있는데 왜 쓸데없이 바보같이 얽매여 있느냐, 갈라서라고 해요. 그리고 다음 조건 맞는 사람에 가라 이 말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르는 게 있어요. 지 조건에 맞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지가 만든 조건이기 때문에 남은 내가 아니잖아요. 남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강의가 재미있어서 3분 초과,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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