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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10:33:36 조회 : 41         
20181008b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이름 : 한윤범(IP:14.39.134.5)
20181008b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세계관이 바꿔져야 돼요. 어떤 세계관이냐 하면, 바로 언약 안의 세계관, 언약 속에 잠재돼 있는 언약 속에 구성돼있는 그 세계관입니다. 언약 안에 세계관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역사를 이용해서 펼쳐져요. 예를 들면 이걸 주름이라 하는데 부챗살같이 펼쳐지면 구체화되잖아요. 잠복돼있고 응축돼있는 내용이 다른 역사는 안 돼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고 꽃잎이 열리고 꽃이 피듯이 그렇게 언약이 열립니다. 열릴 때마다 전쟁이 벌어져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한 매듭이 열릴 때마다 세상은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나지요. 그러면서 무슨 정체가 드러나느냐 하면,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악마의 본색들의 펼 때마다 점점 뚜렷하게 되죠.

방금 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언약의 펼쳐질 때마다 죄의 깊이는 더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내 죄를 더욱 더 많이 체험하게 된다고 보시면 똑같은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장기 알로 다루시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게 해서 이 땅에 어슬렁거리게 하는 이유는, 이런 죄 때문에 내가 죽었었음을 보여주는 거죠.

어제 낮 설교 들으신 분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육과 영이 비로소 드러난다 하고, 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아래계층, 중간계층, 고급계층 가운데 육을 다 훑어간다고 했죠. 아주 충동적이고 세속적이고 건강을 찾는 그런 육의 욕심부터해서 자기의 생계, 생존, 세상에 떡을 주는 임금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르르 오천 명 따라온 그 이야기. 가장 고급진, 육을 영으로 바꾼 사람이죠.

그래서 제가 기도할 때 제일 나쁜 것은 진실이 거짓된 거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이 진실 행세하는 게 더 나쁘다는 거예요. 진실은 비판하고 분석해서 거짓으로 드러나면 그만이에요. 과학이 그런 짓하거든요. 과연 그런지 자꾸 연구하는데 더 나쁜 것은, 나쁜 짓이 진실 행세한다는 거예요. 이걸 노골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복음을 대체해버려요. 구원은 복음으로,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기독교가 뭐로 바꿨습니까? 교회 등록하고 교회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럼 복음을 가렸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교회를 긁어내야 되죠. 긁어내니까 여기서 마귀들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질겁해요. 무교회자니, 어떠니 유형교회, 무형교회 캘빈이 희한한 것 만들어서. 그들이 교회 안에 복음이 없잖아요. 없으니까 없음이 드러날까 봐 체계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법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어요. 조직 부수고, 법 부수고, 체계 부수니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회사 같아요. 복음이 없음을 안 들키기 위해서 교회란 걸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 모이면, 교인 몇 명이에요, 헌금 얼마 나와요? 자가입니까, 세입니까? 왜 이런 질문들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아는 천국은 복음으로 가는 게 아니고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간다고 교회가 유포시키니까 큰 교회가 천국과 가깝고 작은 교회는 천국과 멀어졌다고 그러한 오산이 오해가 온 한국 땅을 다 덮은 거예요. 그래놓고 그들은 선교했다고 합니다.

이것 이겨내야 해요. 이걸 이기려면 정말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면, 내 몸에서 예수님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나, 죄인 중에 괴수다. 천당 간다. 어쩔래.” 이게 나와야 돼요. “아이고, 독한 것!” “그래 독해서 천국 간다.” 그래서 천국은 강도가 가는 나라에요. 간음자가 가는 나라고 살인자가 가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고 둘 다 했지요. 천국 가 있어요.

악해서 가는 게 아니고 용서받았지요. 용서받으려면 용서의 짝이 있어야 되죠. 그게 뭐냐? 용서에 의해서 죄가 더욱 더 죄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욱 더 죄답게 해서 그들이 죄의 종이었음을 알려주고 그 다음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는 거예요. 로마서 5장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하면서 다시 정리합시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가? 언약 안에 있는 세계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걸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안식했다고 했지요. 창조하시고 만족한 상태를 안식으로 본 겁니다. 그럼 안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에 의한 전쟁이 일어나야 됩니다. 안식의 내용이 보다 분명해지려면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그것이 안식이 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 백성들, 택한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택한 백성만 구원받아요. 그게 약속의 내용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이방인 있고 백성 따로 있어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만 생각하고 진짜 백성은 그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는, 백성이 분명히 두 종류로 나눠져야 돼요. 가라지 있어야 되고 알곡 있어야 되고, 양 있으면 염소 있고, 나쁜 고기 있으면 좋은 고기 있고, 천국 있으면 지옥 있고. 항상 이렇게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언약 대 비-언약이에요.

지금 부산 야구팬들 난리 났어요. 기아와 한 게임 차에요. 가을야구 하느냐 마느냐? 기아냐 롯데냐? 삼성은 6위로 떨어졌고. 그들에게 관심사가 뭐냐? 롯데가 한 번 더 이기면 동률 돼요. 어떤 목표를 향해서 대비될 때 이게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납니까? 우리가 성도 됐으면 인생 재미나게 삽시다. 약 올려가면서.

아니 무엇이 부러운 거예요? 누가 부러워해야 할 사람들입니까? 성도가 부러워야 할 사람이에요. 제발 착각하지 맙시다. 재벌을 부러워할 게 아니고 해운대 고급아파트, 고급빌라 올라가봐야 태풍 불면 밑에 1층 다 쓸려내려가요. 방파제 넘어서 파도 오는 것 보셨지요. 그것 넘어오지 말라고 공사해야 되는데 공사 반대. 왜? 1층사는 사람들 바다가 안 보인데요. 전경이 안 좋다고. 돈 있어도 문제라. 고민이에요.

성경을 보세요. 정말 누가 부러워할 사람인지. 천사도 부러워할(어머나, 너무 좋겠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발린 사람이에요. 툭 치면 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돼요. 몸 아파서 죽든 골치 아픈 것 관계없어요. 제일 부러워할 사람은 피가 나오는 사람이고, 정말 참 찌질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은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의 애씀과 노고가 나올 때 그건 언약 없이 혼자 사는 거죠. 마귀 이야기 나올 때 그거는 버린 자식이에요. 버림받은 자식이에요.

그러면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느냐? 그걸 결론부터 보는 게 좋겠어요. 너무 복잡하니까. 누가 마태복음 12장 39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절을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아멘.

여기에 물고기 나오지요. 니느웨 땅에 물고기가 도착하잖아요. 니느웨 앞 바다에 도착해서 토해내니까 요나가 나왔잖아요. 땅에 물고기 올라가면 땅이 흔들립니까? 아무리 고래가 커도 땅은 튼튼하죠. 그런데 땅이 없고 물고기 안에 있다면 어떻습니까? 늘 흔들리겠지요. 요나의 표적이란 이 세대가 물고기처럼 흔들리는 포획된 겁니다. 물고기 안에서 요나의 입장은 언약대로 움직여요.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시다. 세계관이 바뀔 때 세상 사람들은 땅에 교회 있고 땅에 예수님 왔다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시편 7편에서는 언약 안에서 모든 게 창조되었고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사람이 있고 전부 다 언약 안에 있는 거예요. 마치 요나가 물고기 배 안에 있는 것처럼. 물고기 배 안에서 요나는 요나의 기능, 역할을 다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 자체가 없어질 세상이에요. 왜냐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선 주께서 가만두고 보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부셔버려요.

호두는 호두껍데기 속에 있지요. 삶은 계란은 껍데기 속에 있고. 먹을 때 껍질 안 건드리고 먹을 방법이 없어요. 껍질을 깨야 돼요. 그래서 그 안에 호두를 끄집어내야 되지요. 요나를 끄집어내려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해체돼야 되고 깨져야 돼요. 그 깨는 작업을 망치로 징을 깨듯이 언약이란 망치로서 시편 7편이 기록됩니다.

시편 7편에 누가 들어있냐 하면, 언약 사람이 들어있어요. 시편 7편 저자가 다윗이죠. 다윗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윗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그 당시 사울의 세계 또는 가짜 이스라엘, 다윗이 처했던 모든 정치적 환경, 땅의 환경을 주님께서 주의 이름과 주의 의를 걸고 언약의 이름으로 여기서 전쟁을 벌인다는 겁니다.

시편 7편 6절을 볼까요,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심판해서 대적들을 처단해달라는 겁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아이들 장난질 때 아이 하나 밑에 깔리면 위에 덮치고, 덮치고, 재미있다고 몸을 던져 또 덮치죠. 두 겹, 세 겹 계속 덮치잖아요. 그러면 제일 밑에 깔린 게 자기자식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위에서부터 하나씩 걷어내야 되겠지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해서 하신다 이 말입니다. 제일 밑에 깔린 사람이 다윗이에요. 이런 주님의 고백을 하는 거예요.

다윗의 세계관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에 깔려있다는 그런 구조로 이 세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안목으로. 그래서 질식해서 못 살겠다는 거죠. 구약이니까. 신약 같으면 우리는 이미 거기서 빠져나와서 도대체 내 몸이 어디에 눌려 살았는지 다시 어슬렁거리면서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미래에서 과거로 오기 때문에) 몸소 체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창세전에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창세전에 구원받은 사람을 이 세상에 현실세계에 보내는 이유는, 창세전에 어떤 계획이 있었고 그게 예수님에게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해주기 위해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우린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사명 끝나면 우린 물방울처럼 사라져야 되죠. 이 땅에 잠시 소풍 왔다 가야 되지요, 뭐. 귀천해야 되죠.

그런데 소풍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소풍이 도시락만 까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힘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집착하는 것을 활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간편하게 설명 드렸는데 간편한 것이 오히려 상당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세상 사람이 알고 있는 안목이 아니라면, 성경책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냐 하면, 세상 문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를 해결하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이해해줘야 돼요. 내 주관이 시작점이 되면 안 된단 말이죠.

왜 성경을 봐야 되느냐?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과정에 성경보기가 있어요. 내가 왜 기도해야 되고, 성경 보고, 왜 말씀을 전하고 또 말씀을 받아야 되느냐? 주의 일의 일환이에요. 과정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 일이 아니에요. 나는 왜 살아야 됩니까, 나는 왜 죽으면 안 됩니까? 주님의 일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요. 누구처럼 성질 급하게 자살하면 안 돼요. 넥타이는 폼으로 매는 거지 목 조르라고 매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 심하게 매서 죽었잖아요.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책임지지 말고. 책임지면 윤리 귀신, 도덕 귀신 달라붙어요. 인생, 똑바로 살란 말이야. 이런다니까요. 자꾸 책임지려는 마음이 있으니까 마귀가, 일곱 귀신이 달라붙는 거예요. 책임지려면 제대로 책임져서 네 의를 빛내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협박, 공갈과 더불어서 우릴 힘들 게 만들어요.

사람이 편하게 산다는 것이 맛있는 것 먹어서, 잠 잘 자서 편한 것도 있어요. 하지만 전혀 책임질 필요 없이 사는 것도 진정한 안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잠 잘 자도 사는 게 힘들고 불편할 경우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 책임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파리, 모기가 너무 끓어요. 잡귀신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자기 몸과 마음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내가 똑바로 살았나, 안 살았나? 매일 점검해요. 그걸 노이로제라 하는데 가스 불 껐는데 집 나가서 안 껐을 거야, 하고 집에 와보니까 꺼져있어요. 아니야. 안 그럴 수 있어. 또 왔다갔다, 왔다갔다. 이게 뭐예요? 정신병 수준이죠. 나이 들면 다 그래요. 자기 기억에 없으니까 안 한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은 여기부터입니다. 다윗을 걷어낼 때 적들을 거쳐서 자기 백성에게 준 하나님의 장기 알 역할을 하게 하신다. 그건 되는데 그걸 심판과 진노, 아까 11절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했는데 매일 분노까지 할 필요 뭐가 있나, 그냥 힘으로 배트맨, 엑스맨, 앤트맨 등등 영웅들 보내서 끝내면 되는데 왜 분노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점을 생각해봅시다. 그 점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신약을 봐야 되겠네요.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51절,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돼있지요. 예수님과 다른 사람의 차이점은 뭐냐? 요한복음 1장 51절을 본 사람은 그 차이점은 우리 인간은 대체로 혼자 살잖아요.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고 못했으면 회개하고 잘했으면 건방진 포즈 취하고 그런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뭔가 연락하는 사람이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1장 51절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야곱이 벧엘에서 있던 그 이야기죠. 지금 제가 문제로 던진 것이, 하나님이 힘으로 악마를 끄집어내면 되지 왜 분노하는지 그걸 제가 이슈로 제기했잖아요. 힘으로 끄집어내면 되는데 분노, 매일같이 분노하신다는 데 그 이유가 뭐냐? 매일같이. 한 번 분노하고 한 달 쯤 쉬시면 되지 매일같이 분노하는 이유가 뭐냐? 시편 7편에 나오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미리 말씀드릴게요. 끄집어내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자기 때문에. 야곱이 벧엘에서 잠을 잤습니다. 돌 배게 있어요. 제가 가봤잖아요. 이게 단체로 가면 패키지로 가면 이스라엘에서 못 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팔레스타인 지역이에요.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따로 있어요. 여기 들어가려면 철조망 쳐있는데 검문 받고 들어가게 돼있어요. 그리고 검문이 이 지역 주민이 아니면 못 들어가게 돼있습니다. 이 지역 정상에 벧엘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들어갔는가? 우연히 에발산과 다볼산 사이에 세겜에서 여기 정착촌 주민을 만났어요. 25살 청년을 만나서 그 집까지 가다보니까 벧엘에 간 거예요. 안 그러면 못 들어가는 거예요. 어두워서 화면이 어둡게 나왔는데 벧엘에 돌 베게 있고 돌 베게 잤을 때 천사가 야곱 머리 위에 오르락내리락했다고요. 야곱은 자기를 위해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한 줄 알았어요.

세상 사람들은 혼자 살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은 혼자 있을 수가 없어요. 인생이 그리스도로 변하기 위해서 항상 줄기차게 작용하는데 작용할 때 야곱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야곱은 육적인 본성만 드러낼 뿐입니다. 라헬을 사랑하는, 자기 자식 사랑하는 그런 것밖에 못해요. 그러나 그런 것 안 해도 괜찮아요. 언약이 사다리로 돼있고 사다리 위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마치 일개미가 모든 궂은일을 다 하듯이 끊임없이 천사가 와서 해주는 겁니다. 물론 천사도 하지만 신약에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셔요.

그럴 때 야곱은 잘못 생각해서 여기가 하늘나라 문이다. 다시 오게 되면 십일조 드리고 하겠다고 자기 인생 보호해달라고 자기 인생을 먼저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야곱 인생이란 없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꿔야 돼요. 이스라엘은 자기 이름이 안에요. 이건 오실 예수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 있는 인자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재료로 사용해서 야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통해서 야곱언약을 그 시대에 적용한다는 차원에서, 그래서 죄를 드러내는 차원에서 야곱을 통해서 미래의 예수님께서 일을 벌이신 거예요.

야곱을 통해서 무슨 일을 벌이셨느냐? 야곱으로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야곱의 몸에서 무려 열두 명의 자식이 나왔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봅시다. 열두 명의 자식이 야곱 안에 있고, 야곱은 열둘의 응축체가 됩니다. 그걸 한 바구니에 담는 거예요. 예수님도 오병이어에서 바구니가 몇 개였어요? 열두 광주리죠. 보세요. 벌써 예수님 안에 남은 자 열두 지파가 들어있단 말이죠. 예수님이 축복해서 얻은 그 떡은 열두 명에게 전할 떡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니까, 자기도 인간인 줄 알고 떡을 먹었어요. 떡을 먹고 예수님 따라간 이유가, 진정 예수님이 생각한 이스라엘은 따로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사람, 자기가 지금 배고프니까, 배고픔을 해결하는 잘못된 기존 세계관을 위해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오늘날 교회처럼. 교인들이 교회 오게 되면 예수님이 자기 인생 책임져줄 줄 알고 오는 것처럼, 자길 포기할 생각은 안 하고.

그걸 결별해야 되는데 결별하는 방법이 뭐냐?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니까 그들은 다 갔어요. 아버지가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 보내버리는 겁니다. 보내는 것이 선교에요. 선교를 한 자로 하면, 가. 가란 말이야, 가. 네가 와서 되는 일이 없어. 가란 말이야. 그래도 안 간다면 아버지가 보낸 자지요. 노골적으로 가라 하면 안 되지만 복음만 전하면 되지요. 복음 전하면 다 떨어져나갑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는 다 떨어져나가요.

야곱이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냥 야곱이라 하면 안 돼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돼요. 그 가운데 누가 죽느냐?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게 야곱한테는 천만다행한 일이에요. 나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우려 했고 놀라운 사실은 나는 때려죽여도 되는 하나님의 원수 같은 나를 오히려 살려서 그래서 원수에서 기어 나온 게 나다. 그러면 아래 갇혀있는 이 인간이나 덮고 있는 마귀나 둘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 다.

시편 7편 다시 봅시다. 12절에 보면,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여기 “나를 위하여” 나오지요. 이게 얼른 보면 다윗이 썼으니까 다윗을 위해서죠. 그런데 궁극적인 해답은 뭡니까? 다윗이 아니고 다윗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지요.

사도행전에서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다윗 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없었던 적이 없다. 언약이 나타나는 현장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계시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그 예수님 안에 열두 지파가 들어 있잖아요. 14만 4천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12*12*1000은 한계치에요. 그래서 합하면 14만 4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택하고, 택하고, 택하고 끝, 마감. 이게 14마나 4천이에요. 그게 무수한 성도들, 택한 자의 총집합.

그게 바로 요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부터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시작해서 열두 지파 14만 4천 나오지만 이걸 구약으로 거꾸로 들어가면 예수님 오기 전에는 바로 야곱에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그러니 야곱은 착각한 거죠. 제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그러니까 형을 이기게 되면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지금 형과 문제가 아니에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요.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특징이 뭡니까? 싸우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대해서 싸운다, 하나님이 싸운다, 여러 가지 있지만 어쨌든 싸움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싸우는데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타난다?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이 나타났다. 이게 하나님이 전쟁 중이다.

그리고 야곱의 주변에는 마하나임이라고 있어요. 마하나임은 창세기 32장에 나오죠. 얍복 강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그게 하나님의 군대에요.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그 이름이 마하나임이에요. 마하나임은 나이 들어도 잘 안 잊어버려요. 왜냐하면 내가 청년회 일을 했는데 청년회보를 만들라 해서 이름을 뭐로 지을까하다 마하나임이라 지은 게 기억이 나서. 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진노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죄밖에 없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 기존의 아담에서 아담이 아담을 낳고, 아담이 아담을 낳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을 낳아봐야 죽어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왜 죽는가? 하나님이 분노하고 진노해서 죽는다는 거예요. 그냥 죄를 보고 죄를 쓸어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하나 죽이다가 나중에 노아 때는 ‘노아’란 자체가 안식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이럴 때 만족스럽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예 싹쓸이, 땅에서 인간의 씨를 다 말려버립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뭐, 우리 애가 대학에 들어가는 게 뜻이라 하는데 싹쓸이가 뜻이에요. 에브리바디, 에브리데이 모든 인간을 싹쓸이가 주의 뜻이에요. 그리스도 안 또는 그리스도 빼놓고 다 죽어라. 이게 명확한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니는 왜 사느냐? 이미 죽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은 자로 움직거리고 있는 거죠. 주님의 장기 알로서. 안 죽은 게 아니고 죽었는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해운대나 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겠느냐, 이 말이죠. 롯데가 올라가도 가을야구도 괜찮아요. 롯데는 몇 년째 가을야구가 소원인데 부산은행에서 롯데가 올라가면 이자율이 높아져요. NC도 마찬가지고. NC는 이미 끝났어. 꼴찌 됐어. 롯데든 기아든 아무 의미 없어요. 다만 롯데, 기아의 편을 든다는 것은 아직도 이왕 이 땅에 어슬렁거리는 것 좀 재미나는 일 없나 해서 다시 우리의 육적인 요소가 살짝 연결된 겁니다.

만약에 내가 롯데 팬이다. 한 게임 차, 한 번만 이기면 되는데 이대호 한 번도 못 치고 졌다. 그러면 화나지요. 보세요. 주님이 화내는 게 아니고 우리 쪽에서 화내고 있다니까요. 전쟁은 그래서 이뤄지고 있는 거예요. 양쪽 다 화를 내고 있어요. 주님 보고 화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쪽이 평소에 주님을 향해서 매일같이 늘 화내고 있었습니다. 저 남자 왜 만났을까, 내 청춘 돌려달라고, 자식 하나도 내 마음에 드는 게 없고. 우리는 이렇게 늘 모든 일에 화내고 있습니다.

이걸 앵그리버드라고 했는데 만화캐릭터에요. 화내고 있는 모습. 현대인들은 매일같이 화내고 있어요. 그리고 잘되면 당연한 거고. 무탈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조금만 뭐하면 짜증내고. 그래서 현대인들의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모든 투정을 다 받아줄 수 있는 하나님을 교회 와서 찾고 있습니다. 자기는 투정만 부리겠다는 거예요. 그 투정을 세상은 안 받아주니까 자비하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은 다 받아달라는 거예요.

그 가운데 나, 구원이 있어요. 인간은 나, 구원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받지 내 이름으로 받는 구원은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다윗도 오해한 거예요. 다윗이 무덤에 갔다는 말은, 다윗이 죄인이란 뜻이고 그 다음에 다윗에게 준 언약을 이루는 것은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이 죽었다는 말은 다윗에게 주어진 계시마저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팍팍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성도의 역할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네 자식 잘됐다며? 주의 은혜야. 네가 기도하고? 아니야. 자식이고 뭐고 내 몸 하나 간수할 능력은 전무한 거예요. 주께서 필요에 따라서 이만큼 주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성도다움의 모델을 어떤 사람이 모델일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까칠한 사람은 안 돼요. 너무 예민해도 안 돼요. 앵그리버드 늘 화내고 있어요. 너무 무덤덤한 사람은 말씀 보지도 않아. 말씀은 관심도 없어. 팔자려니 이렇게 살아가면서 말씀에 대한 예민함도 감각도 없어. 그것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가장 성도다운 모습일까? 세상일에 예민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현실이 돌아가는 그것을 뽑아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 그게 성도에요. 다 여러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과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뭘 이야기하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네요. 자기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사람, 성도 대빵이에요. 물론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하지요. 건방진 홀로 사는 인간도 그렇게 하지만 홀로 살지 않으면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떤 일이든 간에 나는 감수할 용의가 있다는 마음자세.

그래서 그걸 정리해봤어요. 별반 놀라지 않는 사람.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성격이 아니고 정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왜 놀라지 않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거든요.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 은혜로 죄인 된 걸 알았고 따라서 은혜로 인도하기 때문에 별반 놀라지 않아요. 그렇다고 돌부처 이런 건 아니고요. 늘 고맙고 감사하지요. 돌부처는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잖아요. 죄인인 걸 알면서도 별반 놀라지 않는 것, 그리고 내일 일을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 거예요. 내일 일을 기대하거나 목표나 소망 같은 걸 만들지 않는 사람. 그것 만드는 순간 잡귀신 열댓 달려들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성도답다는 것을 사돈끼리 상견례 할 때 별로 놀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없는 줄 아는데 극단적 예를 들면, 상견례 할 때 별로 놀라지 않는 사람. 정말 삐질삐질 땀이 납니다. 벌써 그 날 전부터 옷은 뭘 입을까부터 시작해서 잠 못 이뤄요. 말은 교양 있게 하고, 파토나면 안 돼. 바짝 긴장하고 젓가락 벌벌 떨어요. 아예 안 먹어. 항상 물수건 옆에 두고 닦아가며. 평생에 그런 긴장을 양쪽 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거기서 삐져서 혼사 없는 걸로 하자고 나오면 낭패잖아요. 요새 시집장가보내기 그렇게 힘들어요.

그만큼 인간은 육이 혼자 사는 게 버릇이라서 누가 나한테 내 이름과 내 의에 치명적인 타인을 만나게 되면 90%의 무의식에서 올라와서 지하실에서 올라와서 치밀어 오르게 돼있습니다. 이건 평소에 우리의 모든 행동에 항상 지하실에서 화낼 준비가 돼있단 뜻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공격이 우리의 지하실까지 내려가야 돼요. 철저하게.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주께서 사태를 일으켜줘요.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참다 참다 욱하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서 우리 지하실마저 얼마나 시커먼 동네란 것을 드러내게 하는 그 작업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매일같이 분노한다는 것이 비로소 납득이 되는 거예요.

이게 다윗에게 하는 이야기거든요. 여기 13절을 봅시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이 말은 모든 세계가 가만있지 않고 요동친다는 겁니다.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해서. 주님께서 잠재돼있는 14만 4천 언약백성들 건지기 위해서 세상을 흔들어댄다 이 말입니다. 이걸 알기 쉽게 이렇게 보면 돼요.

이번에 부산도 비 많이 왔잖아요. 낮에 창문 열어보니까 빗줄기가 얼마나 센지 하얗게 됩니다. 하얗게 된 빗줄기가 땅과 분간이 안 돼요. 땅인지 비인지 모호해요. 그 모호한 빗줄기를 비 안 맞고 사이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태풍처럼 빗줄기처럼 쏟아지는데 진노를 피할 길 없어요.

그러나 이미 죽은 자에 한해서는 느긋하게 온 몸을 온 비를 다 맞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쏟아지는 비가 율법에 의해서 오거든요. 죽으라고 멸망하라고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저주와 진노, 심판. 여기에서 성도는 이미 율법에 죽은 자기 때문에 즐겨 구경하는 셈이죠. 이래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주님 만날 때는 벌벌 안 떨면서 사돈 만날 때는 벌벌 떠는구나.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복음 들을 때는 기쁘지 않다가 롯데 한 번 이겨서 가을야구 하다면 부산시민이 들고 일어날 거예요. 그 정도 우린 그럴 준비가 돼있어요. 그리고 평소에 말씀엔 시큰둥하다가 자식이 잘됐다든지(방 네 개짜리 집을 샀다든지) 아주 유명해진다든지 하게 되면 갑자기 사는 보람을 뿌듯하게 느끼면서 우리의 지하실에 있던 본모습을 보게 해주시는 거예요. 지하에 감춘 우리의 진짜 육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들추면서. 그게 우리의 기쁨이고 즐거움이에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데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로서 하나님이 선물로서 주의 백성으로 간주하시고 살게 하셨다는 걸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쭉 읽어보세요. 제자들이나 예수님 만났던 사람들이 십자가 전에 메시아를 오해해서 좋아했고 만났던 사람들이 정리돼있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그들을 다시 보게 되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어떤 식으로 건져냈는지 그야말로 용서함이고 긍휼이고 사랑의 이름으로 그들을 다 건져냈다는 사실.

똑같은 원칙과 방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뭐냐? 바로 언약입니다. 이 모든 이약기가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을 계약 속에 있는 세상으로서 일하시고 그렇게 해서 주님은 만족하시고 영원한 안식, 천국이죠. 천국은 이미 마련돼 있습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아무 무섭거나 두렵거나 겁내지 말고 죽은 인간인데 그냥 놀러온 사람, 죽었지만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떠나도 되는 세상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자신을 언약 안에서 보지 못하고 말씀 안에서 보지 못하고 남과 견주었습니다. 욥처럼 오해했습니다. 이런 세상과 견주지 말고 주님의 다 이루심 십자가 옆에 강도처럼 그런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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