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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13:15:52 조회 : 43         
312강-갈 6장 15-16(새로운 자)18110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312강-갈 6장 15-16(새로운 자)181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5-16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15-1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할례받은 자 - 유대인, 무할례자 - 이방인, 둘 다 아무것도 아니다. 둘 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모든 인간은 다 아무것도 아닌 거(nothing)예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둘 중에 하나거든요. 할례 받은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 두 종류밖에 없는데 둘 다 아니라면 인간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끝부분에 와서 사도바울은, 성경해석을 이렇게 해야 된다고 아주 끝판왕, 끝장을 보여줍니다. 성경해석은 이렇게 하라. 그동안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말씀을 행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해석을 내놓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이야 자기 맘대로 사는 게 당연한 거지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해석의 끝장을 보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 인간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성령 받은 성도라면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몸은 이미 율법 앞에서 저주로 판정이 났습니다. 불합격으로 판정이 난 거예요. 기존의 몸이. 그러면 불합격된 몸 가지고 기도를 한 들 그것이 불합격이고, 헌금을 한들 불합격이고, 예배를 한들 불합격이고, 성경공부를 한들 불합격이고, 전도한들 불합격이고, 교회 예배참석해도 불합격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몸 자체가 그냥 있을 때는 괜찮아 보이지요. 그러나 율법과 결부가 되어버리면 율법은 주님의 수능이거든요. 수능, 확 와 닿지 않습니까? 주님의 수능인데 하늘나라에 통과하지를 못합니다. 이미 저주로 판정이 난 거예요.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율법을 가지고 있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지만, 이방인한테는 그들이 내세우는 양심이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로마서 2장 13절, 14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기 양심에 비추어도 불합격이고, 문자적인 율법에 비춰도 불합격이고, 이래도 저래도 그것은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해석의 끝판 왕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마지막 대목에 와서 아주 끝장 보자는 식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인간의 행복 같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무엇이 있느냐 하면, 진리냐 거짓이냐, 여기에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진리냐 거짓이냐. 진리냐 거짓이냐, 할 때에 그것은, 인간이 진리도 행할 수 있고 거짓도 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온 것이 기존의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이었어요. 인간은 어떤 가능성이 있는데 착할 가능성도 있고 나쁜 짓 할 가능성도 있다고 제시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래서 성경해석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자기주제파악도 안된 상태에서 성경을 보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해석을 했고, 그 해석은 어떤 의도가 있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해보자, 라는 식으로 나온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저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걸 가지고 무슨 나라라 하느냐 하면, 최선의 나라, 최선의 나라라고 저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또는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최선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들이 분간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최선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최선의 나라에서는 뭐가 자꾸 거기서 만들어지느냐 하면, 자기과오에 대해서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그걸 교회에서는 회개라 하지요, 회개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반성하고, 그걸 되풀이하는 나라에요.

평소에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무슨 행동을 해놓고는 그걸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은 다음에 잘할 수 있게 수정하도록 하겠다는 것, 그것이 반성의 세상,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세상, 또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갖고 있는 양심에 괜찮은 것은 다 동원해서 하늘보기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그런 인생 살아가는 것, 그게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해왔던 겁니다.

유대인들이 알아요. 인간의 힘으로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최선만큼은 주께서 알아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거예요. 최선의 나라입니다. 과오에 대해서, 오류에 대해서 반성하면 된다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최선의 나라에 의해서 버림받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로 오른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당했느냐 하면, “열심히 하는데 왜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느냐?”라고 화난 그들에게 밀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서 주님께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면 그 하늘나라는 뭐냐? 그것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용서의 나라에요. 그리고 긍휼의 나라에요.

더 쉽게 말해서 봐주고 또 봐주고 또 봐주는 나라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조금 전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들은 뭔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만 관심이 쏠려 있어요.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기가 그걸 해 내게 되면, 자기 가치가 높아지고 최선을 다한 그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줘버리면 그것은 내가 어떤 짓거리 한 것과 사랑이 관련성이 없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랑을 더 받고, 그런 것이 없거든요. 사랑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불쌍히 여겨주고 사랑하셔서 구원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뭘 멈춰야 되느냐 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를 멈춰야 돼요. 어제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용기를 내서 자기 이름까지 밝히면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이 참 귀한 질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막 살아봤는데 일이 잘 안 풀립디다.” 그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답변을 보면 나오지요. 답변을 해드렸습니다. 막사는 그것이 아니라 좌절했다고 여기는 본인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본인이 좌절했다는 것은 벌써 노렸다는 말이지요. 막 살면 내 뜻대로 해주겠습니까, 라는 그것은 막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하고 거래하는 거지요.

좌절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왜 못 갖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좌절 뒤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하기를, 노력을 해도 소용없어서 노력할 마음도 안 든다고 하는데, 나의 노력도 주님의 노력의 일환입니다.

내 노력을 통해서 좌절을 맛보게 하고, 나는 좌절해야 될 인물로 태어났다는 것, 태어난 것부터가 내 행함으로 되는 일이 없음을 깨닫게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는 거예요. 안 행해도 되는데 뭔가 뒤에 수상한 권세가 자꾸 나를, 인생을 힘들게 한 거예요.

그동안 속아 온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차피 죽기로 확정되었어요. 하늘나라에서 확정 날짜 받아놨어요.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생은 뭐냐?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신나는 일인 것을 내레이션, 그걸 설명하는 기간이 인생이에요.

폭포에서 공이 바로 떨어지나 지그재그로 떨어지나 땅의 저항력, 공기의 저항력이 없으면 동시에 같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거 발견한 겁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지그재그로 가나 똑바로 가나 죽음을 향하여 자유낙하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이왕 자유낙하 하는 거 중력을 즐깁시다.

옛날에 <비트>라는 영화에 보면 정우성이가 오토바이 타면서 손 놓는 장면 있잖아요. 이거 안보셨어요? 17대 1로 싸우는 영화 있거든요. 오토바이 타다가 손 놓으면 진짜 죽습니다. 그러다 너무 빨리 가는 수가 있지만.

죽음의 기운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유거든요. 안 죽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이왕 죽는 거 위키리스트, 하고 싶은 것 적어서 어차피 내레이션이거든요, 저렇게 죽든 이렇게 죽든, 대통령 하다 죽든 떨어져죽든 어차피 죽음이 골인지점이라면 원 없이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라.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저의 추천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이에요. 네가 선해봤자 악인들이 받는 벌을 그대로 받을 것이고 남 악하다고 욕해봤자 고난도 없이 너보다 더 잘 살 것이다. 세상이란 그런 모순의 세계다. 네가 헤아리고 네가 측정할 그런 세상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과학에 속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현미경에 집어넣고 혈액검사 해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서 압니까? ‘예수님은 당뇨가 없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진 모습을 다 알 수 있어요? 과학은 행하는 겁니다. 행함으로 예수님을 몰라요.

과학으로 모른다는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만큼 인간은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이 자체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인 겁니다. 거짓에 너무 휘둘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진리는 어떻게 압니까?”

진리는 이스라엘이 대표로 나섭니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 차이점이 이거예요. 이스라엘은 율법과 결부된 민족이라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율법과 결부되어 있어요. 다른 민족은 율법과 결부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십계명을 받은 거예요.

십계명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 독대한 거예요. 독대해서 유일한 통로로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대한 자부심, 그 받은 것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이 커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면서 모세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든 민족, 그 많은 민족 가운데 유독 너희들만 내가 알았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과 직결된, 연결된 상태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같은 아담의 몸이니까, 몸, 신체가 있잖아요. 신체에 율법을 둘둘 감았다고 보시면 돼요. 율법을 둘둘 감은 거예요. 마치 자석에 전선 감은 것과 비슷하게도. 거기서 전기가 생산되지요.

자석에 코일을 감았듯이 몸에다 율법을 칭칭 감았습니다. 감았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곡해했어요. 해석을 잘못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려고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필히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면 이 세상 민족가운데서 유일한 택한 민족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 해석은 이스라엘만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대표로 해서 해석을 잘못했다는 말은, 다른 민족도 동일하게 해석을 잘못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다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대표로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사도바울은 질책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거짓이 네 안에서부터 이미 자생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여러 성경의 편지를 종합하면, 율법에 대해서 세 가지로 요약을 했어요.

첫째는, 율법과 몸의 만남은 도망 못 치게 율법이 묶어 놨다고 이야기해요. 첫째로 율법의 기능은, 인간이 율법 밖으로 도망 못 치도록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거예요. 첫째 나오면 둘째와 세 째도 있거든요. 둘째가 뭐냐? 그 묶어 놓은 율법 안에서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몸부림 쳐봐도 너 자신을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게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제대로 해석해서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하는 이야기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바리새인이 이 수준이라면 플러스알파,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은 못가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한 발짝 다가다면 천국은 두 발짝 물러나고. 한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을 물러가는 거예요.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못 따라가요. 아무리 애써도 못 따라 가는 겁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최종판결을 네가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지옥 간다, 라는 하나님의 수능시험의 최종판결을 이제는 내가 육체가 있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게 율법의 세 가지에요. 세 가지니까 제가 벌써 걱정됩니다. 첫째 와 둘째 다 놓칠까 싶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는 뭐냐? 인간이 몸이 있는 한 율법 밖으로 못 벗어나요.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어요. 모든 육체는 율법 아래 있다고 했으니까요.

율법으로 모두 가두어둔 겁니다. 율법 밖으로 튕겨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이제 교회 안다니고 절에 갈래, 해서 절에 가 봤자 죽게 되면 무덤에서 다 끄집어냅니다. 끄집어져 나와서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받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율법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시간에 단풍구경 간 사람들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세요. 갓바위 올라가도 거기서도 자기 양심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양심이라는 율법체계가 있기 때문에 갓바위에서 빌면서도 율법의 저주를 받는 거예요.

첫 번째가 인간은 율법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법적인 조치였다는 거예요. 그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은 날 때부터 코앞에, 눈앞에 “따먹지 마”라는 법이 우선이고 인간은 나중입니다. 법을 법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피조물로 만들어진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하기를, “경건해야 되는데 경건 못해서 눈물로 지샙니다. 해결책이 없습니까?”라고 하시기에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본인이 창조주인지 피조물인지 먼저 그것부터 구분하라고. 본인이 본인을 위하라고 성경책을 준 것이 아니에요. 나 이 정도 된다는 그것 증명하라고 성경책 준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시는 창조주의 그 일관된 프로젝트를 위해서 성경을 준 거라는 말이지요.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나 착하고 훌륭한 것 증명하라고 성경책 준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또 자랑질 하려고요? 눈물 흘리는 것이 수상해요.

남자가 일생에 세 번 운다 하잖아요. 여자하고 헤어질 때 울고, 김장하려고 파 다듬다가 울고, 또 만났다가 또 헤어질 때 또 울고. 조국이니 부모생각이니 그런 것 없어요. 운다는 것은 내 가치에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영 못 미친다는 울분의 증거가우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

이번에 할 수련회 교재를 곧 올릴 것인데 교재 뒤에 부록이 있어요. 어제 원주에 갔더니 어떤 분이 교재를 너무 어렵게 한다고 하는데 교재를 어렵게는 하되 이번에는 부록으로 쉬운 것 두 개를 붙여 놨어요. 가요의 가사를 붙여놨는데, 조항조의 <거짓말>이라는 노래의 가사, 또 조항조가 불렀던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가사를 붙여놨어요. 하도 어렵다 하기에.

그 <남자라는 이유로> 가사에 이런 것이 나와요.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실컷 울어야 되는데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억눌렸는데 이제는 막 울고 싶다는 거예요. 정말 남자의 속마음을, 특히 결혼생활 하는 남자의 속마음을……, 정말 말하고 싶은데, 참다 참다, 묻어둔 세월이 너무 긴 거예요.

어디에 그 가사를 붙여놓았느냐 하면, ‘육적인 사랑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그 두 개의 가사를 붙여놓은 거예요. 나중에 올라오면 보시면 됩니다. 하도 어렵다고들 해서. 인간은 피조물이거든요. 피조물 같으면 자기 쪽으로 돌아오는 실익, 이득을 챙기는 것은 창세기 2장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한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주시면 누리면 되는 거예요.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 말씀대로 그냥 주시면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의 할 역할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말 안 듣는 손자, 말 안 듣는 자식인데 나중에 손자가 커서 20대 되어서 아가씨 한 번 사귀어 보세요. 말 잘 듣습니다. 그 아가씨 말을.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말은 목숨 내놓고 지키기 마련이에요. 할머니 말 안 듣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할아버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사랑하게 되면요 뭐든지 좋은 것 있는 것은 다 주게 되어있어요. 갖다 바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늘나라에요.

이거 하라 저거 하라, 강요할 필요 없어요. 말려도 하게 돼요. 시간 내는 것도 없어요. 일부러 시간 만들어서 갖다 바칩니다. 사랑하면. 해석이 그렇게 돼야 돼요.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친절하게 다시. 첫째는, 율법은 모든 인간을 가두어 두었다. 두 번째, 가두어 두니 발악을 하는 거예요. 미꾸라지 가둬두면 발악하잖아요. 소금 확 쳐버려야 되는데. 그래야 죽거든요.

그 미꾸라지처럼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돈, 권세, 권력, 이런 것, 살아보려고 막 몸부림쳐요. 꼭 미꾸라지 같아. 모든 인간이. 그런데 살면 살수록 율법이 주는 그 소금이라는 저주, 그걸 애써 감춰요. 난 착했는데, 난 나쁜 짓 한 적 없는데, 지금까지 파출소 한 번 간적이 없는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꼭 게거품 무는 미꾸라지 있잖아요. 저희끼리 부딪히고 싸우는 것, 꼭 그 꼴이에요. 기름 값이 오르니 내리니, 온 뉴스가 그거예요. 누가 죽었니, 신성일이 죽었니, 뭐 그런……, 참, 신성일이 죽었답니다. 결국 그렇게 죽을 거, 스타가 되든지 그저 인기가 없이 초라하게 죽든 결국 죽게 되어 있어요. 부자가 되든지 거지가 되든지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 있다고요.

세 번째가 뭐냐? 11월 셋째 주에 김장한다는 광고를 제가 아까 놓쳤는데 셋째 주에 김장할 거고요. 그 김장할 때 배추 숨죽일 때 배추를 목 조르지는 않잖아요. 이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금만 치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율법으로 소금을 쳐요. “그거 했어? 그럼 이것은 했나?” 말씀 못 지킵니다.

지킬 수 있는 것을 준 것이 아니에요. 그걸 어디서 증명하는가? 율법과 관련된 이스라엘이 그걸 증명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왜 율법을 받았는가? 인간은 모든 몸부림, 아무리 착함과 착함을 총동원해도 하늘나라에 합격점이 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유대인과 바리새인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선배 격으로 먼저 증명을 한 거예요.

그냥 율법을 못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못 지킨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러 이스라엘로 오셨는데 그 오신 분을 자기 몸부림친다고, 율법 잘 지켜서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잖아요. 죽여 버렸어요.

오늘 본문 16절을 봅시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했거든요. 이걸 말을 살짝 바꾸면 이렇게 돼요. 긍휼이 있는 그것이 새로운 이스라엘, 진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오직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기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왜 내가 불쌍히 여김 받을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러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본인이 그렇게 봐야 돼요.

하나님의 안목, 창조주의 안목이 이제는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아,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주제에 불과하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자꾸 발악하지 마시고. 운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 불쌍히 여김이 있으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구나, 라고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은 거짓이 무엇인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왔을 때에 요한복음 1장이 그것을 단적으로 잘 이야기합니다. 10절, 11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이에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그 집단, 그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마 이런 집단을 원했을 것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성경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내가 성경말씀, 사도바울의 말씀을 교회 와서 지킴으로서 이 지켰다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보내줄 것이라고 교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오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것이 오산인 것을 분명히 하고 그 다음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트릭을 쓰는 것이 아니에요.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게 거짓은 아니고 진리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들어요. “예, 시켜만 주이소. 목사님, 말씀만 하시면 내가 순종하겠나이다.” 아니에요. 그런 식은, 그것은 성경을 잘못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주께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할 능력이 나한테 애초에 없음을 우리가 자인하는 겁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기회가 온 거예요. ‘아, 저 말씀도 내가 지킬 수 없다는 그런 뜻이지요?’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나한테 안 된다는 그런 뜻이군요.’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바울의 편지(살전 5:18)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 범사에 감사가 안 되는 그러한, 이 원판자체가 잘못된 원판이군요, 라고 우리가 수긍해야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어렵지 않아요. 자존심만 버리면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한없이 자기를 높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한없이 자기를 개무시해요. 남이 무시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개무시 합니다.

‘나는 원래 안 되는 거야.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성령이 임해야 그런 변화가 생깁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게 불가능해요. 남하고 자꾸 견주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덤에다 집어넣었어요.

무덤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 무덤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방인도 아무것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무것도 아니고, 둘 다 아무것도 아니고, 전 인류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할 때에 새로 지음 받은 자라는 것은, 이미 죽으신 분이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 새로운 육체, 새로운 몸이에요.

기존의 몸은 안돼요. 새로운 몸, 이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이것은 예수님 소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을 놔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지하는 겁니다. 제가 알기에는 치매환자는 시계를 안 본다는 겁니다. 시계를 볼 때는 뭔가 계획이 있다는 것인데 그 계획할 수 있는 머리가 없으니까 시계를 볼 이유가 없지요. 지금 몇 시인지 볼 이유가 없지요.

성도는 시계를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저녁을 몇 시에 먹고……, 이렇게 하지 말고 저녁쯤 되면 배고프겠지요. 그러면 밥 하면 돼요. 잠을 몇 시에 잘까, 하지 말고 잠이 오지요. 그러면 주무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주무신다, 조용히 해라. 나는 주무신다, 나는 잠잔다, 잠잔다, 잠잔다……” 이래가지고 밤새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는 자고 있다는 의식 자체를 놔버릴 시점이 있을 거예요. 만약에 아홉시부터……, 아홉시부터 자는 이것은 나한테 해당되는 것인데, 만약에 11시 25분에 잠을 잔다면 나는 잠을 자야 된다.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 일을 한다, 하다가 한 5분이나 10분이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자야 된다는 의식을 놔버리지요.

그게 죽는 순간이에요. 그게 죽음의 순간이에요. 이제는 누가 데려가도 몰라요. 왜? 자고 있으니까. 그러고 난 뒤에 아침에 눈 뜨면 죽은 자를 또 살린 거예요. 잠잘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자는 것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고 싶어도 언젠가는 정신 바짝 차린 그것도 놔버려야 된다니까요.

모든 순간순간 하나님이 인간을 언제 죽이고 언제 살리고는 하나님의 소관에 달린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님께서 새로운 몸을 주시는데 새로운 몸이라는 것은 새로운 예수님의 안목, 하나님의 안목이 들어온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제일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이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새로운 자는 어떠한 생각을 가질 때 새로운 자라고 그걸 규정지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그것이 궁금할 거예요. 궁금 안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문제인데, 천국 가야 되는데 궁금하겠지요.

그것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결합에 의해서 율법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망하게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참석하고, 성전 지었고, 열심히 제사 드리고, 시키는 대로 십일조도 하고 다 했던 그들이 망했어요. 지옥 간 거지요.

그렇다면, 이 성경말씀을 지켜도 안 된다면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는 말이지요. 못 지키는 말씀을 들이밀 때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이 있을 때 정말 너는 누가 뭐래도 새로운 피조물이야, 라고 규정지을 수 있느냐, 그게 뭐냐 하는 거예요.

이사야 1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소나 개나 배우기만 하면 납득되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이유 때문에 엉터리고 거짓이에요. 기존교회를 사교단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님을 몰라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한 번 들어보세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삼위일체 거론하고, 살아계시고, 아주 성경에 나오는 문자는 다 동원시켜서 꽁꽁 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게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말씀에서 나왔지요. 말씀과 자기가 생각했던 신관념과 결부를 시켜 놓은 거예요. 율법과 자신의 기본적인 육체의 살고자 하는 마음과 결부를 시켜놓은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살아야 되겠다는, 기어이 천국에 가야 되겠다는 자기의 의지와 단짝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모른다고요. 제가 원주특강 올려놨거든요. 십자가마을 기타강의란에 올려놨는데 그 원주강의 들어보세요. 이런 대목이 나올 거예요. 왜 수학자들이 엉터리냐 하면, 수학자들이 세상을 잘못 해석하느냐 하면, 수학에서 무한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무한이라는 개념이 뭐냐? 1, 2, 3, 4, 5, 6……, 해놓고 나중에 휙 돌아가는 표시(∞)해서 무한대로 되어 있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 1, 2, 3, 4, 5, 6……, 그 다음에 n,n보다 하나 못한 것이 n-1, n보다 두 개 못한 것이n-2가 돼요. 그리고 그 n……, 그 다음에 무한대에요.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무한대라는 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단절이 없어요. 연결, 연결되어서 인간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더 훌륭하고, 더 착하면 그것이 곧 신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어디서 출발했어요? 인간인 내가 알고 있는 지식부터 해서 더 확고하고, 완전하고, 더 포괄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진리를 추앙하면서 시도한 거예요. 그게 수학이고 무한개념이에요.

무한개념에 진무한, 가무한, 두 개가 있는데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요. 진무한이라는 것은 제한된 가운데 무한을 계속 파내는 것을 진무한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간에 무한개념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와서 그렇게 생각하는, 그렇게 과학적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십자가라는 것으로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천국이라는 것은 없는 세계에요. 왜? 인간은 이미 천국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만들어서 교회마다 그것을 상품화 시켰기 때문에. 진짜 천국은 없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기록된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잉태치 못한 자, 라는 것은 없다, 없음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잉태치 못한 자의 세계가 천국이에요. 없어요. 인간들이 과학을 생각하든, 합리를 생각하든, 철학을 생각하든 그 생각으로 인하여 인간으로부터 배제당한 그 세계가 천국입니다. 신학을 생각하든.

신학자들은 아마추어들이에요. 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사람들이에요. 신학의 논리를 가지고. 그거 해서 교수질하는 사람들이에요.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 목숨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모든 복음, 진리, 이것은 밥 먹고 살고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나를 얼마나 귀하게 봤으면 주께서 말씀을 주셨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유대인들이.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이 중요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I am nothing, 그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생각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참 이거 어렵지요? 잉태치 못한 자의 세계, 그들만 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가는 나라,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거예요.

그들의 어머니는 이 땅에 없습니다. 하늘에 어머니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진리를 말로 이야기할 때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바울뿐만이 아니고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본래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방인들도 몰랐는데, 이스라엘은 안다고 우겼는데 이스라엘과 율법과 결부해보니까 이사야서 1장 3절에서,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고 하는 최종판정을 받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모르면 모든 나라도 하나님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 왔을 때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구약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보고, 네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말은 뭐냐? 이삭이 누구로부터 온 거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아, 네 손으로 하나님의 흔적을 이 땅에서 지우라는 뜻이에요. 네 몸에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그 자식을 네 손으로 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흔적을 이 땅에서 지워버려라.

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죽기 위해서, 없어지기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멸망하는 이스라엘, 유대인들 밖에 안돼요. 인간이 아무리 날고 신학을 해도 유대인의 수준을 못 넘어가요.

그들은 얼마나 철저에 철저를 기한지 몰라요. 완벽에 완벽을 기했던 사람들입니다. 왜? 자기 목숨과 같은 것이 하늘나라고, 그게 자기가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얼마나 철저를 기했겠습니까? 얼마나 해석에 완벽을 기하겠습니까? 해석가운데 그들은 중요한 해석만 전통적으로 받아온 거예요. 꼭 개혁주의신학 같아요.

칼빈과 루터가 이야기한 중에서 중요한 것만 뽑아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어요.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가 전부 다 스물두 가지에요. 그거 만들어서 “이거 동의하시면 천당 갑니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했고, 그래서 교단이 생겼고, 그 교단에서 배출된 목사들, 그들은 소위 상인들이지요. 본사가 교단이고. 대리점으로서 그걸 그대로 전하는 거예요. 나 이것 상품으로 팔아서 목사로서 밥 먹고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여러분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워버리세요. 그게 우리 성도의 역할입니다.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그것이 화근이에요. 그게 나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없는데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없이하는 그 방식이, “나는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하는 그것이 “내 손으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이고 믿음이고 소망이에요. 내가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고백이.

이게 성경해석의 끝판왕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환영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에요. 인간의 손으로 자진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없어야 돼요. 그래야 긍휼이 빛이 나고, 사랑이 빛이 나고, 사랑이 빛이 나게 되면 우리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지 말래도 그 사랑하는 분 앞에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죽으라고 하면 죽고, 까라 하면 까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거든요. 특별히 법적으로 이것을 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알아서 테이블도 닦고……, 그래서 또 교만하겠다마는, 알아서, 알아서, 알아서. 누가 시키지도 않아요. 어떤 교회 갔더니 이런 것이 붙어 있어요.

세 가지인데 하나를 잊어버렸는데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천지 교인은 출입을 금합니다.” 참……. 그거 하나고 두 번째가 “굶어도 십일조” 그것은 “교인들이여, 날 좀 살려주세요.” 그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당신들은 나의 밥이 되세요.”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교인들이 나빠요. 사람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나빠요. 우리 자신들이 나빠요.

교회라는 것은 천당 보내는 전문단체, 여행사인줄로 알고 있어요. 달리 의지할 데가 없어서 교회 와서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본인이 나빠요.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구원받겠다고 욕심을 내고 있는 겁니다. 안되니까 줄줄 눈물 흘리는 거예요. 눈물 흘리면 봐줄 줄 알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미 당신을 없는 쪽으로 넘기세요. 이미 사는 것은 없고, 죽었다고 치고 다시 매일같이 주께서 여러분을 살려내신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죽은 마당에서 뭐만 쳐다볼 겁니까? 죽은 이유가 율법으로 죽었잖아요. 그러면 살아있는 것은 뭐냐? 죽은 자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십자가의 피로 살려낸다면 우리는 십자가 피만 자랑할 거예요. 사도바울처럼.

성도는 볼펜 끝에 있는 구슬 알 같아요. 조그마한 구슬 알, 잘 보이지도 않아요. 하지만 볼펜을 움직일 때마다 거기서 예수님의 피가 스며 나와서 이 땅에 피가 적힙니다. 성도는 몸을 굴릴 때마다, 구슬을 굴릴 때마다 피가 나오듯이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계속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 찌꺼기가 나오는가? 나 복음 안다, 나 예수 믿는다, 이렇게 할 때 찌꺼기가 생기는 거예요. “좀 비켜. 좀 빠져.” 우리는 오늘 본문대로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을 이 땅에 적기 위한 긍휼의 볼펜 안에 있는 조그마한 구슬 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슬 알,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해석한 것, 너무나 충격적이고 너무나 도발적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그동안 피조물 주제에 멋도 모르고 창조주를 종 부리듯이 부렸습니다. 이제는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12강-갈 6장 15-16(새로운 자)181104-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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