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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07:45:08 조회 : 40         
20181102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차이의 생산 이름 : 한윤범(IP:14.39.134.122)
20181102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차이의 생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0장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내지 않지요. 레위기 21장, 22장, 23장이 계속 있고. 하여튼 이스라엘에 대해서 주님께선 끊임없이 추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궁지로 몰아넣어요. 인간에겐 원래 신앙이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의 마귀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만 절대화시키고 자기만 붙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신앙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있다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계속 제거하기 위해서 궁지로 몰아넣는 겁니다. 니 신앙 아무 효과 없잖아. 봐. 신앙 있다는 것은 자기 신앙으로 뭘 해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이 신앙 있으니까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축복해주옵소서, 하겠지요. 그걸 주님께선 계속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거부했으니까 다른 신앙으로 실습에 나서고 실험해보는 겁니다. 그것도 거부해버리죠.

그러면 나중에 이스라엘은 우리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번제를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사 드려라, 번제 드려라, 민수기, 출애굽기, 레위기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내가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상한 심령이 어떤 심령이냐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냉장고에 들어갈 물건에 밖에 내놓고 여름철에 일주일 놔두는 겁니다. 그 식품 상하게 되죠. 그것 상한 심령입니다. 못 먹어요. 더러워서 못 먹습니다. 그게 우리 마음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곰팡이 피어 더러워서 못 먹는 마음으로 곰팡이로 주물러서 주여, 받으시옵소서, 이러고 있단 말이죠. 믿씁니다, 이렇고 있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찬양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한테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 계속 보냅니다. 네가 기도할 때 손을 들었는데 그 손에 피 묻었다. 억울한 자들 괴롭혔잖아. 니 살기 위해서. 너 잘기 위해서 해놓고 그 피 묻은 손을 나한테 벌리느냐? 네 제물 바친다고? 제물 가져가. 더러워서 안 받아.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라도 안 받는다.

그 이야기가 호세아, 아모스에 나오거든요. 처음에는 그 이야기 안 해요.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들은 계속 밀리면서 하나님 이것 원하십니까, 저것 원하십니까?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걸 다 만들어내요. 그 만드는 공장이, 나다. 나라는 것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럼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내 몸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나왔거든요. 인간의 원칙은 뭐냐?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인간은 나름대로의 종교가 있는데 그 종교가 뭐냐? 내 몸이 잘 되는 나, 내 몸이 원하는 나, 내 몸을 지켜주는 나, 이게 인간의 종교입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욥 이야기했지요. 내 몸이 괜찮은 몸인 것을 증명 되는 나. 남들 보기에 이 몸과 나는 괜찮은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종교를 갖고 있어요. 혼자 살 때는 아무렇게나 하다가 누가 오게 되면 난리 치잖아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둘이 사는데 갑자기 며느리 와 보세요. 청소하고 화장실 정리하고 난리 난다고. 며느리 이름의 손님 온다고. 명절 되면 며느리만 애 먹는 게 아니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애 먹어요. 시아버지는 갑자기 안 보던 애까지 보려니, 애들한테 에헴 하는 게 안 통하거든요. 애들과 같이 뿡뿡하면서 체면을 다 구길 때 오는 그 손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내 몸을 살리는 나, 그래서 내 몸은 나의 착함을 보고 계속 건재해야 되고 유지돼야 된다는 종교, 인간의 타고난 종교지요. 창세기 3장에 악마가 집어넣은 종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의식하고 이와 다른 원칙이 가동되는 신앙을 준 거예요. 뭐냐 하면, 니 몸을 죽였는데도 살아 부활된 나, 이걸 만들어내는 겁니다. 엄청나지요.

인간이 성령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천국은 없어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 받은 모델로 사도 바울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조건 하에 구원받는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조건입니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해선 교회 장사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손댈 수 있는 여지를 다 박탈해서 그래요.

기도하라면 기도합니다. 돈 내라면 돈 냅니다. 전도하라면 친구들 데려올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죽었고,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기본 종교가 뭐냐? 열심히 교회 봉사하는 이유가 괜찮은 몸에 근거한 괜찮은 나를 목표로 잡아서 여기다 행함과 모든 시도를 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충족한다면 나는 기꺼이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믿을 용의가 된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몸과 나 사이에 죽음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이걸 실천에 옮깁니까? 칼 쥐고 죽어야 산다고요? 이케요? 더 쑤셔라. 이러면 진짜 죽는데요? 진짜 죽어라. 안 된다고 손 놔버리죠. 죽는 시늉은 할 수 있어도 어떤 인간도 자기를 안 죽입니다. 자살할 때도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인 것만 남기고 영혼만은 건지려고, 몸은 죽지만 영혼만은 괜찮았다. 내 인생에 책임질 줄 알잖아, 라는 가룟 유다 같은 심보로 자살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영혼이고 몸이고 몽땅 쓰레기라고 인정할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오늘 본문 27절 봅시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앞에 26절에,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민족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거룩의 조건이 뭐냐 하면, 27절,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죽음을 집어넣는 거룩이에요. 죽음 없는 거룩이 아니고. 거룩을 위해서라면 나는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데 거기에 네가 동의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 몸보다 거룩이 더 중요한데 내 거룩을 위해서 네가 죽을 수 있느냐고 요구하시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거룩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고 여깁니까? 하나님이고 자시고 간에 우선 내가 산다는 조건 하에 그 다음에 하나님이에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고 예수님도 소용없어요. 일단 나 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내 가족. 나와 내 가족이 산다는 조건 하에, 가족은 왜 들어가느냐? 내 자존심이기 때문에.

조건 하에 하나님도 믿을 용의 있고 예수님에게 굴복하지만 그러나 이 몸을 유지해달라고 굴복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이익을 있을 때나 굴복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인간은 절대로 양보 안 하거든요. 인간의 마음이 악마의 마음인데 양보합니까. 내가 하나님한테 이것 줄 테니까 하나님은 뭐 줄래요, 라는 식이에요.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에게 뭘 줄래요,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디모데전서 3장 16절, 유명한 구절이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경건한 생활하라고 준 거란 말이에요. 그걸 보고 이분이 진짜 울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원하는 경건한 말씀을 이룰 수 없어서 어쩌면 좋아요? 이게 질문이에요. 흔히 하는 질문인데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도대체 피조물이란 의식이 없어요. 피조물 잘 되기 위해서 창조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창조주를 빛내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제가 내린 답변은 이거에요. 경건은 주님의 경건이에요. 내가 쓰레기 될 때만 주님은 경건해요. 이 쓰레기와 주님 경건 사이의 연결고리, 이게 신앙이거든요. 이게 성령이란 말이죠. 우리가 잘나면 주님은 잘나지 않아요. 우리가 못날 때 주님이 잘나잖아요. 우리가 못나면 못날수록 주님은 잘났어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잖아요. 나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대 있음에, 그걸로 족한 게 사랑이에요. 사랑을 석 자로 이야기하면 ‘상사병’입니다. 상사병이란 보고 싶어도 그대를 못 봤을 때 평소에 그대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떡볶이에다 치킨에다 맛있는 것 먹고, 맛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등장했다. 그 다음부턴 뭘 먹든 이걸 먹으면 무슨 소용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큰 처남, 칠십이 넘었는데 월남에 파병됐었어요. 그때 우리 장모님은 한 번도 잠을 집에서 잔 적이 없어요.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교회에서 철야합니다. 지독하지요. 우리 장모님은 믿습니다. 뭘 믿습니까? 내가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응답하사 전쟁 한 가운데 있는 아들이 살아 돌아올 줄 나는 믿습니다, 라는 걸 믿어요.

믿음의 내용을 풀어봅시다. 거기에 성경말씀이 없지요. 누가 창조자고 누가 피조물이에요?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본인이, 내가 신이에요. 내가 신이 되기 위해서 철야가 뭡니까, 뭔들 못해요. 내 자식 지키기 위해서. 그것도 맏인데. 이 이야기 들으면 여러분도 만만치 않지요. 이건 일부러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밥이 안 넘어가요. 맛있는 것도 맛이 없어요. 지금 월남에서 고생하고 있는 큰아들 생각하면 잡채고 뭐고 아들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해요. 이게 상사병이에요. 내가 나한테 반해버린 거예요. 내가 내 뜻에 반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장모님이 아들이 없다. 딸밖에 없어서 군에 간 자식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장모님에게 아들을 주셔서 하필 월남전에 가게 함으로써 미처 내가 무엇에 푹 빠져 있고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를 주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낱낱이 전개되게 한 거죠. 펼쳐지게 만들었어요. 나란 여자는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하나님? 하나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자식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 예수님보다 내 자식이 더 중요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돈 바치라 했습니까. 곶감 바치라 했습니까, 굴비 바치라 했어요, 양 바치라 했습니까? 아낌없이 드릴 용의 있어요. 그러나 뭘 바치라? 혹시 꼴 보기 싫은 자식 바치라 했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 바치라 했어요. 나는 오로지 나만 사랑하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신앙인.

이런 인간이 어디 간다? 지금 주님만 사랑해야 될 하나님의 룩을 이야기해야 될 천국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예요. 보내시는 방법은 중간에 죽음을 집어넣어요. 너, 자살하라는 게 아닙니다. 자살하라면 자살하지요. 자살보다 힘든 게 바로 내 자식을 그것도 남의 손이 아니고 월남전이 아니고 베트콩 손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마음가짐입니다. 그 마음가짐에 합치될 수 있는 사람, 일치될 수 있는 사람만 천국 갑니다.

그건 인간의 능력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런 마음이 생깁니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면 그런 마음이 생기도록 쓰레기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순간순간 정신이 나가버려요. 치매 같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것도 오래 안 가요. 2초 내지 3초인데.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미쳤는가봐. 내가 얼마나 대단한데. 아니야.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진면목을 6개월마다 2초? 너무 심했나. 1년마다 3초^^ 그것도 안 되면 2년마다 2초. 3년마다 4초.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다는 것, 주님 십자가 진 것 생각하면 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소에 자기 잘났다 하다가 순간에 진짜 자기 모습을 불연 듯 번개 치듯이 떠오르는 거예요. 번개는 자주 치는 게 아니잖아요. 번개 치는 그 짧은 순간에 진짜 내 모습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황 전도사님이나 그렇고. 손자 보고 너 죄인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도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챙기게 돼있어요. 이걸 인위적으로 억지를 부려서 믿는다고 하지 마세요. 그 몫은 내가 할 게 아니고 주님 살아 계시니까 알아서 죄인 되게 하실 거예요. 복권 샀는데 갑자기 20억 생길 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20억은 일단 챙기고 내가 돈만 사랑했던 인간입니다, 하고 20억 챙기고 한 2초 동안 생각하는 그런 일이 생길 거예요.

갑자기 자식이 효도한다고 해외여행 가라고 할 때 우린 예상 못한 일에 뭐라 합니까? “주여, 내가 평생 죄인입니다. 자식한테 이런 대우 받을 일 있습니까?” 그것도 자식 있는 데서 하면 도로 뺏을 수 있으니까, “주여, 제가 하와이 갈 자격이 됩니까?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이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이러면서 챙겨놓고 보는 거예요. 이건 예상 밖의 일이거든요.

돈을 좋아하는 것이 발각됐잖아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항상 잘난 내가 못난 나라고 어떤 계기가 왔을 때 성령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모든 인간이 자기 잘났다는 걸 선전하고 광고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안 꿀리고 싶은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다음에 말씀 들어가죠. 그러면 그만 살아도 좋으나? 그 짧은 순간은 살아온 것도 죄 지었는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집어넣은 계약의 약속입니다.

이번 주일 낮에 한 걸 다시 언급해보겠습니다. 노아방주 언급하면서 잣나무로 만든 노아방주 안에 위에서 봤을 때 이쪽에는 홍수에요. 노아방주 안에만 물이 없어요. 이쪽은 심판이고 이쪽은 용서받음이란 말이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얼마나 다행스러워요. 이 바깥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우리가 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야말로 소박한 소시민의 꿈같은 것들이 여기 있단 말이죠. 남한테 해코지도 않고 그냥 밥벌이만 하겠다는 그런 겸손한 마음도 주님의 언약에서는 저주가 되고 심판이 돼요.

그러니까 용서받은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도 평소에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게 몇 초가 안 된다니까. 몇 초 지나면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고 또 이 바닥에 뛰어들어요. 음주고 방언이고 십자가고 다 잊어버리고 이 바닥에서 날 무지하지 말라고 또 설친다고요. 주님께서 또 찾아와서 십자가 안에 가끔 집어넣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단 한 번도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그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부터 레위기 보니까 내 몸이 나는 거룩하다니까 바른 생활하면 신자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이야기하게 되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을 만들었는데 성경말씀은 뭘 걷어냅니까? 그들이 조작해낸 신앙을 뜯어내잖아요. 진짜 성도는 뜯어내게 되면, 들켰네. 나는 이렇게 죄인인 것을, 하고 그 벌거벗은 모습을 감사합니다. 주님한테는 못 속이겠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신자는 뜯어내면 죄인인 나만 남아있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어떠냐? 뜯어낼 게 아무것도 없어요. 뜯겨나간 그게 자기 인생의 전부에요.

뜯어낸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욕하고. 너만 믿음 있나. 너만 신자냐고 욕하고 말이죠. 십자가마을에 왔다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 왜 왔다 간 줄 알아요? 보자. 믿음이란 게 어떤 건지 보자 하니까 왜 부정적이냐, 왜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느냐? 날 욕하려면 사도 바울을 욕하세요. 사도 바울은 저보다 더 합니다. 욕하고 반발하는 이유는, 뜯겨버리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잘난 것만 줄곧 무장해왔던 겁니다.

27절 다시 봅니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돼있지요. 오늘날 현대와 비교해봅시다. 현대인들 타로 점치는 것, 궁합 보는 것 장난이라고 치잖아요. 교회 권사도 결혼할 때 재미로 날자 맞는지 본다 하잖아요. 궁합, 사주팔자 재미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당이냐, 점치느냐, 별 점 보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할 거예요.

남성과 여성으로 돼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이 돼있는데 구분이 되지 않으면 이게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만나서 다시 말해서 피 없이는 이스라엘 속에 못 들어간다고 만나버리면 인간은 졸지에 뭐가 되겠어요? 피는 대신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피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죄인 되겠지요. 죄인을 다시 소급해봅시다. 나는 남성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나는 죄인이 돼야 되고, 나는 여성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나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인이란 말은 무채색이에요. 알록달록이 없어요. 그냥 시커먼 색깔이에요. 색깔이 없는 거예요. 삭막하지요. 주님 보시기에 이렇게 보여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인간은 더 나갑니다. 죄인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바짝 마른 뼈에요. 인간이란 자체가 바짝 마른 뼈에요. 코도 눈도 없어요.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 되려면,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이스라엘 영이 임하면 공통점이 있어요. 나나 너나 죄인에서 뼈가 됐잖아요. 뼈에 성령이 임하면 죄인에서 인간, 인간에서 남성, 여성으로 나가는 겁니다. 처음 시작할 때 남성은 나란 가치를 보완하기 위해서 남성이 있었는데 방향이 성령이 와서 뼈가 죄인 돼버리면 뼈인데 남성되게 하고 뼈인데 여성되게 하신 여기에 예수님의 공로, 취지와 언약이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예수님의 언약을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남자고 여자에요. 하지만 그 안에는 뼈가 있단 말이죠. 뼈 없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제가 말한 뼈란 주님의 죄인에 대한 심판의 결과물이 뼈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 안에 나의 죽음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을 죽음 임플란트라고 했잖아요. 임플란트할 때 이렇게 시키죠. 딱딱 해보세요. 나의 죽음이 감촉되는지 느껴지는지.

나중에 늙어 죽는 게 아니고 벌써 죽은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벌써 죽어 있는 상태에요. 이렇게 움직이는데 왜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나 죽었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면 곧 주님이 살아 있는 결과물로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고 더 기쁘고 더 좋은 것은 뭐냐?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 기준으로 봤을 때는 지금 엄청난 걸 요구하지요. 이것은 예수님 계실 때 열두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 이상입니다. 구약 선지자들보다 더 이상이에요. 구약 때 아무리 훌륭해도 신약의 어린아이보다 못하다고 했거든요. 천국에서 작은 자가 구약에서 큰 자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에요.

죽은 자가 뭘 하겠어요, 뼈가 뭘 하겠습니까? 그냥 주께서 인도하는 데로 시키는 대로 막 살면 돼요. 막 살 때 신나게 막 사는 거예요. 왜? 아무리 내가 막 살고 싶어도 막 살게 하는 방식은 주님이 쥐고 있기 때문에. 내 식대로 막 사는 것은 이미 끝났어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막 사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을 로마로 막 살게 만들죠.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폭풍을 일으켜서 그게 네 뜻이 아니었다. 내 뜻이었다. 로마 가는 게. 네 뜻은 없어. 그리고 나중에 독사에 물리잖아요. 독사에 물리는 것도 막 사는 거예요. 독사에 물리게 하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주께서 막 살게 하신 것이고. 세밀하게 쪼개보면 아침에 눈 뜨는 것도 막 살게 하시려고 눈 떴고 저녁에 자게 한 것도 주께서 막 살게 한 것이고. 어느 것 하나도 나의 행함의 보상으로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어서 오늘도 우리가 매일같이 사는 거예요. 에브리데이 매일같이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주님이 나보다 확실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늘 인식할 순 없어요. 세상에 먹고 마시는 이 동네에 뛰어들어서 잘 나기 때문에.

그래서 남은 시간에는 이걸 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즘 세상을 경제적으로 표현해요. 자본주의사회라 하지요. 경제가 정치를 앞서서 대표가 된 거예요. 옛날 같으면 민주주의사회라 하는데 그게 아무 느낌이 안 와요. 지금 진짜 제대로 꼭 집어서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사회가 더 확실하게 다가오지 민주주의사회는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본을 지켜주기 위해서 민주주의란 정치적 체제가 도입된 거예요. 사유재산 보호하기 위해서. 존 로크의. 자본주의사회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두 사회의 차이를 이야기해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란 뭐냐, 라고 물을 때 반드시 뭔가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는 반대되는 개념을 거론해서 그 차이를 발견해야 제대로 양쪽의 개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알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물을 때 반대되는 개념을 물으면 제대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지요. 어떤 단어를 물을 때 이 단어와 이 단어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면 두 개의 단어를 한꺼번에 알고 있을 때 그 사용을 혼동하지 않는단 말이죠.

마찬가지에요. 성경에 이스라엘 나오니까 믿습니다. 이러면 거짓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와 다르지요, 라고 물어야 돼요. 그러면 이방나라와 다르다고 하거든요. 옛날에 그 시대에 이방민족이 있었지만 지금 시대는 모든 이방민족이든 이방나라는 자본주의사회에요. 자본주의와 이스라엘의 차이점, 다시 강조합니다. 차이점이에요. 왜 차이점을 제가 언급하느냐 하면, 교회 나올 때는 이스라엘 되고 사회 나가면 자본주의사회, 이렇게 두 패를 다 쥐려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한 몸이 양쪽 다 소속되는 법은 없어요. 자본주의사회에 소속되면 이스라엘에서 빠지든지 이스라엘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빠지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왜냐하면 가랑이가 찢어져버려요.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반 존재적 이야기할 때는 이런 차이가 안 나타나요. 집에 가면 아버지고 회사 가면 사장님이고. 이땐 차이가 없잖아요. 기능만 바뀌죠. 몸은 하나고.

그러나 이스라엘은 살아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죽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 속에 들어갑니다. 아까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지요. 이스라엘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차이점이 뭡니까? 자본주의사회는 반드시 무너지게 돼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지만 언급 안 해도 알겠지요.

자본주의가 버티며 자체적으로 안 무너지려고 애를 써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본주의사회 바깥에서 계속해서 폭격을 해요. 천사들이 가만두질 않아. 이 세상 사회를.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역량을 다해서 계속 반발을 다 해요.

요한계시록 18장 10절에 보면,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큰 성 바벨론이 어떤 것으로 가득 찼느냐 하면,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 나라가 몇 개라 했습니까? 큰 성, 단일성, 단일 시장이에요. 단일시장에서 가치를 뽑아낼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농사짓는다고 가치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가치를 교환해줘야 돼요. 교환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상인들이에요. 상인들 입장에서는 옛날부터 그랬어요. 국가의 경계, 국경이란 건 의미 없습니다. 나한테 커피가 있다. 저쪽에서 커피를 달라고 한다. 사상이 문제겠습니까, 국가가 문제겠습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커피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비싼 값에 팔면 되는 거예요.

옛날에 자본주의가 태동할 기미가 뭐냐 하면, 후추에요. 인도에서 나오는 향신료 후추를 유럽 사람들이 원하는 겁니다. 돈 가진 유럽 사람들이 원할 때마다 계속해서 자본주의사회로 접어가는 겁니다. 영국에서 차를 원할 때는 은으로 바꿨기 때문에 아편전쟁이 일어났거든요. 네덜란드 같은 경우에는 튤립이 가치 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집을 팔아서 튤립의 구근, 뿌리에 투자를 한 거예요.

자본주의사회는 미래를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 하에 미래 안정성을 보고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에요. 이걸 주식시장에서는 선물거래, 먼저 물건을 사는 거예요. 공매도, 주식도 없는데 먼저 계약해서 주식을 사잖아요. 이게 신용사회에요. 카드로 물건 살 때 뭐라고 합니까? 일시불로 할까요, 할부로 할까요? 묻지요. 뭐냐 하면, 당신은 몇 달 동안 살아 있다는 걸 보장한다는 겁니다. 홈쇼핑 보세요. 이 상품에 대해선 10개월 할부로 해줍니다. 그러면 내일모레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건을 못 받지요. 산다는 보장 하에 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물건이 있고 이윤 남아서 파는 게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건 상업주의고. 자본주의는 먼저 살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필요한 물건을 찾는 거예요. 자금을 대고 이윤이 많이 남는 쪽으로 필요한 물건들 갖다 대는 거예요. 돈의 가치, 돈의 본질이 뭐냐? 관계없어요. 이익만 많이 남으면 그게 좋은 물건이에요.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 그 다음엔 때려치우는 거예요.

노래방 처음 할 때는 장사 잘 되다 노래방 많으면 안 돼요. 노래방 왜 하십니까? 난 노래 부르는 걸 너무 좋아해서. 거짓말하지 마라. 이게 돈이 벌리니까 하는 거예요.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고 직장생활하면 그게 보람 있다고요? 자기 하고 싶은 걸 다른 사람도 하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윤이 적기 때문에 그만둬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꼭 테스 같아. 나는 소박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자본이란 사회가 가만두질 않아요. 나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어요. 10년, 20년 한 장사를 그만두게 만듭니다. 이윤이 없으니까. 이윤이 뭐예요? 이윤이란 지금만 살지 않고 내일도 내가 살아야 돼. 거기에 필요한 돈을 이윤이라 합니다. 내일 산다는 보장 하에 내일 필요한 돈을 지금 만들기 위해서 이윤, 이자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정신이에요.

제가 성경으로 이야기하니까 이게 뭔가 나쁜가하는 이런 느낌 들지만 성경 덮어버리세요.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게 살아요. 처음에 우리 대학 나올 때 교사하라고 해도 안 했습니다. 삼성, 현대에서 스카우트하는데 교사 월급이 반밖에 안 되거든요. 나는 애들 가르치는 게 사명이다. 사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중에 현대 막히니까 교사라도 뚫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윤 때문에.

그 이윤 어디 쓸라고? 지금만 사는 게 아니고 내일도 살고 모레도 살고 한 달 뒤에도 살아야 되고. 일 년 뒤에 결혼하게 되면 여자를 위해서 살아야 되고, 여자와 사이에 자식이 나오잖아요. 그럼 내 가정을 위해서 내가 사표내고 싶어도 못 내는 거예요. 미래한테 얻어맞아도 살아야 돼. 석궁으로 쏴도 살아남아야 돼, 직장에서.

오야봉이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해도 참아내야 돼요. 너 나와 같이 패자. 같이 패는 거예요. 회장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주목하고 있는 고향에 있는 부모를 생각해서, 대학 나와서 취직했다고 쳐다보고 있는 부모를 위해서 여기서 성급하게 사표내면 안 되는 거예요. 소박한 꿈도 없어요.

자본주의사회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결핍으로 몰아넣습니다. 계속해서 결핍하게 하는 거예요. 청년들 나라에서 돈 주잖아요. 그 돈으로 사이판 놀러갑니다. 그 청년들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청년들이 놀러가니까 자긴 놀러 못 가니까 뭘 느낍니까?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난 인간도 아니야. 놀러갔다와야 인간 되는 거예요. 사이판이나 괌이나 놀러갔다와야 돼요. 나라에서 돈 주니까 사이판 가고 장사하니 안 됩니다. 이러고 끝나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성경에 있더라도 그 말 안 듣습니다. 남들처럼 그럴싸한 인생이 될 때만 자기가 약간은 결핍을 줄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사는 사회입니다.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나에게 계속 결핍을 조장해내요. 골프 치십니까? 못 칩니다. 아이고, 그 나이에 골프도 못 치고. 팔 부러졌나? 항상 약을 올려요. 바깥에서.

자기 인생에 만족하도록 가만 놔두질 않는다니까요. 결핍하도록 쑤시는데 그게 바로 천사의 활동입니다. 인간은 결핍하면서 스스로 망하라고. 원래 망하도록 된 인간이기 때문에 네가 아무리 살고 싶어도 망하는 쪽으로 살게 돼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각인시키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죽었으니까 남은 것은 막 살면 되는 거예요. 이왕 죽었으니까. 살고 안 살고는 주님 소관이에요.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손가락으로 벌린 게 아니에요.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신 거예요. 인간은 잠잔다고 해서 잠자는 게 아닙니다. 잠자면서 나는 자고 있다, 나는 자고 있다. 이런 잠은 없어요. 그건 깨어 있는 거예요. 나는 자고 싶다고는 할 수 있는데 잠이 들면 귀신이 가져가도 몰라요. 이미 죽은 존재니까. 잠든 순간만큼은. 아침에 눈을 떴다? 죽은 데서 눈 뜬 거예요. 그 날 염려는 그 날 할 것이요 내일 염려는 할 필요 없어요. 이게 예수님께서 우릴 그렇게 다루겠다는 거예요.

신약에서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인간들이 속해 있는 자본주의사회 또는 옛날 같으면 농경사회라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차별 없이는 거룩이 없어요. 혼자 도 닦는다고 거룩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거룩하지 않는 그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맞대게 만들어요. 거룩은 인간들이 평소 하는 것들과 마주하면서 그때 눈에 들어오게 돼있어요.

거룩이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사람, 죽음의 용서라는 조건에 가동되는 나라와 용서가 전혀 없이 자기 행함으로 도 닦아서 천당 가겠다는 것과 대비를 시킴으로서 거룩이 나오지요. 그러면 이러한 요소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을 때 있지요. 그러면 나와 나 사이에 거룩이죠. 육적인 나와 주님이 달리 보시는 이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거룩이 생산되는 거예요. 굉장히 쉽지요.

이게 막 살아야 돼요. 사람이 막 살게 되면 막 사는 본성이 뭐냐 하면, 결핍을 줄이려고 해요. 내가 저 사람만큼은 해야지. 적어도 내가 대학 나왔는데 차는 이 정도는 굴려야 되지, 라는 육적인 요소가 계속 나와요. 그러다 차를 박았다. “미쳤어. 주께서 나를 신자로 다루시는구나.” 그러면 주께서 차 고치는 값 주십니까? 안 줘요. 안 주는데 뭘 알았어요? 주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

나한테 이렇게 하게 되면 차 자랑이나 집 자랑이나 자식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데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시죠. 모든 변수는 주께서 하는 거예요. 뮤지컬 사장님이 술 먹고 차 몰 때 동승한 아가씨들 세 명인가 죽었지요. 그런데 내 딸은 왜 거기 안 탔어요? 일단 나이가 많고 그 동네 사람 아니고. 내 딸 사는 동네와 다르지요. 만날 기회 없지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만날 기회를 조성했습니까? 출신성분 다르고, 지방 다르고, 대학 다르고, 전부 다 달리하신 분이 누굽니까? 그 변수를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벤츠에 탔던 사람은 주의 뜻인 거예요. 그리고 살았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지금은 다른 변수가 내 딸과 나한테 따로 인도하고 계신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 점을 안다는 거예요. 내 일은 없고 모든 것은 주의 일만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의 일뿐이라는 내 일은 아예 없다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믿어질 때 이미 그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인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언약으로 다시 보게 하옵소서. 그저 살면서 남하고 이야기할 때는 기죽고 살고 약 올림 당하면서 살았는데 성경말씀 보니까 그런 인간은 이미 죽었고 주께서 주님 증거 하라고 새롭게 인도하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주님의 거룩만 나타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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