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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8 23:14:34 조회 : 46         
소유욕(삼상 15장7-24절) 대전- 42강 이름 : 주향(IP:115.20.251.218)
소유욕(삼상 15장7-24절)
대전- 42강

이근호


2018년 9월 1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7-24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 상 15장 7절부터 9절 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말렉과 전쟁을 유발시키셨는데 여기서 아말렉이 먼저 공격했다는 것을 아셔야 되요.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을 붙여 공격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면 죽음의 의미 즉 죽음이란 게 뭐냐를 알게 하는 겁니다. 보통 죽음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끊어질 때 비로소 죽음을 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죽은 당사자만 알지 살아있는 사람은 타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이상 죽음에 대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것을 나중에 알면 되지 지금 살아있을 때는 구태어 죽음을 알아야 되냐는 생각들을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죽음을 알게 한다는 것은 인간을 처음 만들 때는 죽음이란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죽지 않을 인간을 만든 거에요. 죽지 않을 인간을 만들어 놨는데 무슨 난리를 쳐서 죽게 되는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 앞에 더 중요한 거에요. 왜냐하면 죽음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야, 갖고 있어야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도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아는 순간이 하나님이 뭔가를 알려 줄 때인데 그것이 뭐냐하면 죽음입니다. 인간에겐 죽음 없이는 하나님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은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에겐 알 길이 없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가짜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과는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죽음을 품고 왔는데 그것을 마중 나오는 인간은 죽음을 도외시 한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대화가 될 리 없지요. 교회에 가 보세요. 죽여 주세요 하고 나오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앞장 세워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교회에 가면 죽여 달라는 사람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교회가 절간하고 똑같은 거에요. 아무 의미 없는 곳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뭐가 빠졌습니까? 무슨 요소가 빠졌어요? 죽음의 요소가 없잖아요. 살아 있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 뭐가 빠졌어요? 죽음이 빠진 거에요. 죽음이 빠지면 가상 신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 달라고 가상 신을 만들어 놓고 비는 거에요. 알다시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할 수 있는 어떤 요건도 없어요.


하나님과 함께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에요. 하나님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부러 가져오신 죽음 안에 우리가 합류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사귀는 중입니다. (죽음 안 = 십자가 안)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피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같은 말이에요.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 서울에 있는 사람과 재전에 있는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안에 있는 사람과 죽음 밖에 있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인데 한국의 기독교 150년 동안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하니까 말하는 나도 성경과 다른 소릴 하는 느낌입니다. 한국 교회는 교단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느 교단에 속합니다. 어느 교회에 속합니다만 이야기 했어요. 등록 하세요. 백날 교회에 속해 있어도 살아 있는 체 가는 거에요. 만약에 지금 여기서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가정 안으로 들어가요. 가정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가정 안으로 들어가요.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상관없거든요.


지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 복을 달라고 힘을 달라고들 하는데 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했지요. 황금 알을 매일 낳으니까 그 안에 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까? 황금 덩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지는 황금을 만드는 기계가 그 안에 있는 줄 알았어요. 죽여 놓고 보니까 보통 거위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백숙이라도 해 먹었는지, (웃음) 똑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한번 그렇게 쪼개 보자 말이죠.


쪼개 보니까 뭐가 들어 있어요? 설교 시간에 말했듯 그 안에 황금이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의 무시가 들어 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서의 버림받음이 들어 있는 거에요. 그 버림받음이 풍랑을 잠잠케 했고 그 버림받음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버림받음이 우리 죄를 사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나처럼 세상에게 버림받을 수 있느냐 따를 수 있느냐를 묻는 거에요. 당당하게 버림받는 그 능력이 천국에 들어 온 것이 확인되는 것이고 버림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에게 무시당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예수는 상상하지 마세요. 다른 예수는 없어요. 복음 가지고는 목회 안 됩니다. 이런 소릴 하는 데 무슨 목회가 되겠어요? 안 됩니다. 헌금하려고 돈 넣으려다 빼요. 택도 없는 소리지요. 절에 가던 사람이 교회로 올 때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절은 산에 있어서 머니까 가까운 교회로 가는 거에요. 그 인간 안 변했습니다. 변하지도 안는데 천국에 간다? 이건 예수님께서 극구 말리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가 이 세상을 실컷 봤잖아 보고 본 것을 통해서 구성된 사고방식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인생관이랄지 가치관.


그렇지요? 그냥 보기만 했을까요? 인간이 듣기만 했을까요?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 가지고 구성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생관이고 가치관이잖아요. 그런 가치관과 인생관은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천국은 그런 구성된 사고방식으론 넣어 주지 않는 곳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이어야 되냐고 묻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사고방식, 예수님이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30년째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이야기를 해서 알아들을 것 같으면 말도 안하지요.

교회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옛날부터 이야기 했거든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교회가 내세우는 예수는 가짜 예수에요. 왜? 내가 안 변하는데 30년 40년이 되도 내가 안 변했어요. 교회에 다니면서 뭐를 하냐 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플러스에요. 내가 하는 일도 꽉 쥐고 있고 또 교회에 다니면서 취미 생활 하나 더 보태고 8+1이에요. 9+1이든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6 이라면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온전히 7로 해서 살아 있을 때는 6으로 죽을 때는 하나 더 보태서 7로 하려고 이것을 제가 보험 드는 것과 같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교회에선 그게 맞는데 성경을 보면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거든요. 교회엔 가도 성경은 안 봐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전쟁이 없이는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아말렉이 쳐들어 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붙여 붰을 때 지난 설교에서도 했지만 모든 전쟁은 여리고 성 안에 있는 사람이나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별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설교하면서 막 살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착하게 살다가 악하게 사는 것으로 오해들 하는데 그게 아니고 막 살아라는 말은 마음을 낮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악하게 사는 게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니에요. 악하게 사는 게 자랑인줄 알고

마음을 낮추라는 것은 번거로운 것이나 귀찮은 것이나 더 이상 이런 게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한 평생 살면서 이런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님만으로 좋아요. 이런 고백이라면 무엇이 무섭지 않으냐 하면 번거로운 일이나 귀찮은 일이니 짜증나는 일이 더 이상 겁나지 않아요. 주님만으로 족하게 되면 사람들은 살면서 번거로운 일이 생길 까봐 미리 겁을 내요. 집 하나를 사고 옮길 때 서류 하는 것을 겁내잖아요. 기차 표 예매하는 것도 짜증나요. 예수님만으로 좋아요를 두 자로 하면 자유라고 해요. 어떤 번거로운 일이라도 와라 나는 그것을 귀찮게 여기지 않겠다는 거에요.


누구를 만나도 괜찮아! 나는 주님만으로 족하기 때문에 그런데 귀찮고 번거로운 있다는 예수님 만으로 좋은 rpo 아니에요. 뭔가를 기대하는 것 때문에 일이 짜증나는 거에요. 그런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있다는 것은 뭔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예수님만으로 족하다는 말은 기대하는 것이 끝났다는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끝났어요. 타인을 만난다는 것, 타인을 만날 때 두렵지 않던가요? 여러분이 나중에 상견례 할 때 하번 보세요. 지금은 웃지요. 며칠 앞두고 한 번 보세요. 멸 벌 되지도 않는데 이 옷 골랐다가 저 옷 골랐다가 이거 입어 볼까? 저거 입어볼까? 상당히 두려워요.

그런데 예수님만으로 족해요 할 때는 사돈이 어떻게 하든 아무 신경 안 써져요. 그 쪽이 나를 뭐라고 이야기 하든 그래서 파토 나도 상관없어요. 기대를 안 하는 거에요. 기대를 안 하는 방법은 우리가 주님이 아는 죽음 안에 있어서 죽음은 지옥이거든요. 여기가 지금 지옥이라 해 봅시다. 뜨거워서 나가고 싶은데 문이 잠겨 못 나간다고 해 봅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살려 주세요라고 밖에 할 수 없지요.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외칠 수 있는 성도의 고백은 뭐냐 주님 살려 주세요라고 밖에 안 하지요. 주님이 살려 줬잖아요. 죽음에 있을 때, 지옥에 있을 때 주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주님으로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기대할 것이 더 이상 없어요.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만남에서 이쪽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고 저쪽 아말렉은 언약이 없는 비언약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최종 모습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이지요. 예수님의 죽음이지요. 그래서 이쪽엔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고 저쪽엔 없는 거에요. 아말렉은 죽음을 몰라요. 이스라엘은 이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죽음의 의미를 아는 거에요.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게 아니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는 그냥 꼴가닥 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으면 살다가 힘들면 자살하면 되요. 편히 쉬려고 자살들 하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편히쉬어요.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끝입니까? 끝이라면 제가 여기 올 이유도 없어요. 그 다음은 본격적이라니까요. 그 지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이냐 하면 차라리 이 땅에서 불의한 뇌물로 친구를 사는 남에게 횡령했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 게 낫다는 거에요. 지옥에 비하면 이 땅에서 너는 돈이나 횡령하고 감옥에나 가라고 지적 받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차라리 저 지옥보다는 훨씬 옳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는 누가 복음 16장에 나옵니다.

(히 9: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주님께서는 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 파악하라는 거에요.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착해서 뭐할 건데 착한 건 써 먹을 데가 없다니까요. 아무 쓸데없어요. 어차피 지옥 갈 거 착하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나처럼 죽으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구원에 대한 그림이 있어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있는데 잘 생기고 수염도 멋있게 하고 키도 크게 해서 물에 빠져서 손을 내밀어요. 성화라고도 하지요. 거기에 보면 파도가 막 치는데 주님께서 오른 팔로 왼 팔로 하면 안 되요, 오른 팔로 딱 잡는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서 문제점이 뭐냐하면 물에 빠진 인간을 건져 낼 때 그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적이지요. 전혀 성령과 관계없어요. 물에 빠진 인간을 그냥 건져 내는 거에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어떤 의도로 그린 것이냐 하면 값없이 건진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린 거에요. 아무 댓가 없이 주의 능력 있는 오른 손으로 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럴 것 같으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어요. 다니엘 서 5장에 보면 나오지요.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오지요. 나와서 글씨를 쓰잖아요. 그것처럼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예수님이 오셔서 오른 팔로 전부 하나씩 건져내면 되는데


내가 잡을 께 하면서 건져 내면 되잖아요. 다니엘 서 5장 5절에 보면 손가락이 나타났는데 이간 누구 손가락이에요? 주님의 손가락이잖아요. 주님의 손가락이 글씨만 쓰지 마시고 그냥 손잡고 데려가면 되는데 왜 성화처럼 안하시느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건지시죠.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했습니까? 거부했습니까?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옆에 베드로도 따라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제트 팔처럼 팔이 쭉쭉 늘어나서 화롯가에 있던 베드로의 멱살을 잡고 가자! 천국으로 이렇게 했으면 갔을 텐데 그게 아니고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베드로에게 무슨 고백을 하게 만듭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는 고백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구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베드로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있을게 아니에요. 거기에서 구성된 메시아상이 있을 거에요. 그것을 베드로는 일치시키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메시아가 아마 저 분 일 꺼야 라고 했는데 주님은 냉정하게 그게 아니라고 하므로 말미암아 현재 베드로를 건지실 의향이 없으신 거에요. 아브람을 건지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건지는 거에요.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그 인간과 상대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건짐을 받아야 되요. 좀 충격이 되겠지만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건지시는 거에요. 제가 지금 너무 나간 겁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영이 있는 사람만 건집니다. 같은 이야기에요. 어제 농협에선가 50대 아줌마가 강도짓을 했지요. 흉기가 뭐였어요? 공사장에서 못을 쏘는 총이지요. 주께서 성령을 우리 속에 못을 쏘듯 쏘아 버린 거에요. 주님이 먼저 쏜 거에요. 왜 우리는 주님을 무시하니까, 주님과 상종하기 싫어해요. 나의 가치를 인정 안 해 주니까, 내가 예수 믿는 노력의 가치를 인정 안 해 주니까,

예수님을 탓할 것 없어요.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를 건지는 것을 그렇게 섭섭해 하지 마세요.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건지려고 했던 존재가 우리에요. 거울아~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화장 빨이 제일 좋으냐? 이런 식으로 그러면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화장이 안 먹습니다. (웃음)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언약 대 비 언약의 만남인데 아까 그것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라고 해야 하냐하면 왜 죽어야 됩니까? 해야겠지요.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스라엘은 무슨 일을 해야 하냐 하면 아말렉을 진멸해야 되요.


본문 15장 9절에 보면 진멸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지요. 진멸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아말렉을 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위 가진 자의 여유로 보는 거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르치려 하는데 지금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가르치려고 하는 거에요. 진멸이란 다 멸하는 것이 진멸입니다. 100% 다 멸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하면서 자기들이 저 쪽을 죽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남을 죽여 버리면 그 때는 죽음의 의미를 몰라요. 왜냐하면 죽이는 나는 안 죽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나는 살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죽여야 될 자도 내가 죽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 신파극에 보면 애가 남의 집에서 도둑질을 하니까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잘못한 애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회초리를 주면서 자기의 종아리를 걷고 네가 나를 때려라! 자식을 잘못 키운 벌은 네가 잘못이 아니라 내가 맞아야 된다하며 자기가 맞지요. 그 다음의 순서가 그것을 보고 자식이 아버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지막은 울면서 서로 껴안고 끝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진멸하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누구 때문에 죽으신 거지요? 죄인들 때문이지요. 죄인들에 의해서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가치관에서는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고 우리가 예수를 죽여도 죽일만한 권한이 있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돌아 오셨잖아요. 죽으신 분이 돌아왔다는 말은 누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죽어 마땅하지요. 지금 착하고 안착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착하면 구원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내가 아직 안 죽어 본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미리 아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안 죽어야 돼 가 아니라 비로소 나는 죽어 마땅한 것을 알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알기 위해 태어난 거에요. 1900 몇 년도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지어야 하는 거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타인이에요. 제대로 된 타인을 만나야 되요. 인간은 타인을 제대로 안 만나면 항상 자기 생각에서 출발해서 자기 생각으로 귀환됩니다. 수련회 때 사람들을 보면 각자 자기들의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이 이 만큼 있고 플러스로 주님을 추가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진장한 나를 알게 해주는 타인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남편 될 사람을 만나든 아내 될 사람을 만나든 저 사람과 만나 함께 살아도 내가 누군지 몰라요. 평생 살아봐도 남편이 안 알려주고 평생 살아도 아내가 나를 모르는 거에요. 둘 다 살면서 누군지도 모르고 그때그때 감정대로, 기분대로 살아가요. 진장한 주님(타인)은 싸우라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심 있는 우리가 남을 진멸하겠습니까? 타인을 죽이겠어요? 남을 죽이겠어요?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착각하며 봐주겠지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남(타인)을 생각할 때 평소에 어떤 식으로 남을 생각했는가를 아말렉을 다루면서 자신들의 진면목이 다 드러나요. 귀한 것은 살려주고 쓸모없는 것은 죽였다가 되거든요. 이것이 평소에 귀한 것을 이스라엘은 소유하고 싶은 거에요. 인간에겐 소유욕이 있는 거에요. 이것을 가져서 뭐 할 건데? 가져서 살아있는 내가 더 살고 싶은 소유욕이 있는 겁니다. 사람은 왜 화를 냅니까? 네 소유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그건 안 갖고 싶은데 가지라고 해서 화가 나는 거에요. 또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그것을 갖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내 소유가 안되서 화가 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것으로 하는데 지장이 있어 화를 내는 겁니다. 제가 울산 강의에서 (나 ⟶ 내 것⟶소중한 내 것)한 번 소중한 내 것이 되면 절대로 빼앗기기 싫은 것, 그 다음은 내 것이 왜 소중하냐? 나의 의로움을 반영하기 때문에 나는 이 정도는 가질만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거에요. 간단한 예로 부잣집을 봅시다. 부잣집이 자랑하는 것은 부동산인 집이 내 것이라 하지요. 길에 지나는 것을 보고 목욕탕에서 옷 벗으면 부자인지 가난한지 몰라요. 약간 차이는 나요. 거의 몰라요. 그런데 목욕탕에서 나와 타는 차를 보면 단박 표시 나지요. 그 차를 건드리면 내 것을 건드리게 되는 거에요.

왜 건드리지 마라는 것이냐 소중하니까 다르게 말하면 내 것이 소중하다는 것은 내가 소중한 거에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이때 화를 내는 겁니다. 나도 그 만큼 소종한데 내가 소중함을 티낼 방법이 없네, 가진 게 없어서, 가진 게 빚 밖에 없어서 남에게 내가 소중하다고 외칠 근거가 없어요.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금융에서는 신용도라 해요. 대출할 때 신용도 등급보고 하잖아요. 저는 소중합니다. 대출해주세요. 뭘 보고 해줘요. 담보 잡을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만 나는 내가 소중합니다. 하면 가 주세요! 당신에게 대출해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신용 안에서 움직입니다.


신용 없는 사람은 죽어 마땅할 정도에요. 세상에선 냉정하게 신용이고 가정에서나 개인적으로는 신뢰이고 같은 이야기입니다. 남북 관계에서도 신뢰이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 관계지요. 신뢰 또는 신용, 근거가 있어야 되지요. 담보가 있어야 되고 신용의 뜻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희안하지요. 비슷한 말도 아니고 정 반대되는 말이지요. 왜? 담보가 있어야 되니까, 담보를 신뢰하는 것이지 나는 너를 신뢰하지 못한다. 담보가 있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신뢰할 께! 방금 이야기한 이러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습관처럼 몸에 배였어요.


내 소중한 것을 위해서 타인과 관계해야 되고 타인을 통해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살아가는 재미이다라는 겁니다. 막 결혼한 새댁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들 합니까? 저기의 남편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해 주는 지, 자기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이야기하잖아요. 커피숍에 모여 앉아서 뭐냐하면 나를 보호해줄 타인이 적어도 이 정도야 하고 자랑하는 거에요. 다들 그렇게 해 왔지요. 그게 바로 내게 필요한 타인이에요. 무조건 나는 소중해요. 소중한 것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그런 타인을 원합니다. 이 타인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이라는 범주 안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도 집어넣고 자칭 신자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유욕입니다. 그런데 이 소유욕이 죄라면 이 죄를 알게 되는 것이 자유입니다. 내가 뭔가 안 가져도 구원되는데 뭔가 소중한 것을 찾는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나의 죄가 된다는 사실. 이것을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사울이 그럽니다. 저건 귀한 것, 진멸하지마! 것 죽이지마! 소중한 거야!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말렉 전쟁을 통해 보여줍니다. 저 살찐 양, 살찐 소, 기름진 것들을 그러면 그 나라는 언약의 나라가 아니라 사울 본인이 살아가는 인생관이 확산된 것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사용하신 것은 그런 소유로 인해 잘 되기를 바라는 바로 죽어 마땅한 인간에게 죽음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아말렉을 맞닥뜨리게 하신 거에요. 이러한 전쟁이 없으면 사울은 내가 왜 죽어야 해? 내가 뭘 잘못해서 죽어야 해?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데! 이 만큼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사울의 모습이나 아말렉 사람의 모습이나 사실 똑같아요. 죽임당해야 될 적이나 죽이는 이스라엘이나 똑 같아요.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린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똑같은데 누구를 정죄합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했는데,


이렇게 남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에게 주님이 벌이신 전쟁은 뭐냐?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죠. 저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말은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을 의시대고 있는 거에요. 주님이 바닥에 글씨를 쓰실 때 그 다음 차례는‘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죄를 쓰시는 겁니다. 주님은 그래 잘 던졌어! 그런데 네가 던질 돌로 너도 한번 맞아봐라 이거에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끼리 만날 때 그 사람은 몰라요. 주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때 왜 그 사람을 만나게 했는지,


그 사람이 나를 대하면서 하는 사고방식이나 내가 평소에 사람을 대하면서 하는 사고방식이나 얼마나 똑같은지,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같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너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나는 살아남아야 돼! 속으로 미안허이!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지만 미안할 것도 없어요. 둘 다 죽어야 하니까. 구한 것은 남기고 하찮은 것은 죽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말렉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마땅히 진멸돼야할 민족이라는 것을 까발리십니다. 그럴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내 힘으론 빠져나올 수 없는 족쇄를 주님께서 의미 있는 타인을 보내 비로소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어떤 모습으로? 의인의 모습으로? 아니!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빠져 나올 때 주님은 말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그 죄는 흉기를 들고 못 총을 쏴야 죄인이 아니라 소유욕 자체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 안될래야 안 될 수 없게 만들어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래서 폭망 했다고 하잖아요. 폭망 했다는 것은 소유욕이 있었다는 거에요. 자유를 못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만으로 좋아요가 안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뭐가 두렵다는 거에요. 다음에 또 망할까 싶어서 뭔가 기대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은 성도 주위에 전부 아말렉을 두십니다.

모든 타인과의 만남은 전쟁입니다. 가수 임재범의 노래 중에 너를 위하여라는 가사에 전쟁 같은 사랑~ 사랑도 전쟁이에요. 사실 전쟁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어요. 전투에서 이긴 것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전투에서 적이 지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보자! 하며 또 달려들지요. 전투는 온전한 게 아니에요. 사소한 전투는 계속 일어나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겨야지요. 게임 오버가 돼야 되요. 끝났어요. 이미 주님이 나를 밟았어요. 그냥 꽉 밟아버렸어요. 백날 튀어 봐야 안에 있는 소유욕이 튀는 거에요.


오늘 강의 제목을 부력으로 할 까 합니다. 부력이란 눌러도 떠올라요. 상한선을 누가 정하냐 하면 본인이 정해요. 내가 이 정도 내려가는 것은 폭망이 아니고 이 정도는 망한거다. 본인이 정해요. 이 정도 올라가면 얼추 성공한 거다. 상한선과 하한선을 만들어 놓고 하루 종일 그 생각해요. 주여! 오늘도 무사히, 이건 무슨 뜻입니까? 상한선과 하한선 그 사이에만 있게 하옵소서! 하한선으로 내려가면 난 삐질거야! 이런 식으로, 소유욕입니다. 모든 전쟁은 인간 속에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알려 줍니다. 사무엘 상 15장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이 먼저 쳐들어갔어요? 아말렉이 먼저 쳐들어 왔어요?


아말렉이 먼저 쳐들어 왔지요. 아말렉을 두 자로 하면 타인이지요. 타인인 아말렉이 왔다는 것은 평소에 이스라엘이 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는 겁니다. 남을 어떻게 생가하라 했나요?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했지요. 진멸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낸 타인은 너희가 아직 죽기 전에는 모르는 죽음의 의미를 타인으로 인해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죽음의 의미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왜 죽어 마땅한 가를 타인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에요. 그 방법으로 진멸, 즉 다 죽여 버리는 거에요. 그런데 사울이 다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다 안 죽이지요.


안 죽인 이유가 뭐냐하면 진멸하라고 한 아말렉 안에는 본인이 탐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사울이 평소에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한 것, 자기에게 더 소중한 것은 챙기고 자기에게 안 좋은 것은 쓰레기처럼 내어 버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가꾸어 온 것입니다. 왜 가꿀까요? 그것은 내가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꼭 살아남아야 되는 삶의 의미에 치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진멸하라는 아말렉을 그 중에서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남겨두고 쓸데없다고 여기는 것들은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를 알기보다 자기 살고자 하는 본색이 노골화 되었지요.

이 사고 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왔을 때 사람들은 현재 나에게 소중한 것이 있지만 예수님을 하나 더 보태면 플러스로가 돼서 이것도 소중하지만 저것도 소중해서내게 소중한 것 +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그 소중한 것에 의해서 천국 가겠지 하고 생각하는 거에요. 전혀 달라진 게 없지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오른 손으로 건져 낼 때 물에 빠지기 전에 인간을 그내로 곤져 버리면 건져 낸 인간이나 물에 빠진 인간이나 달라진 게 없잖아요. 우리는 자기 형편 아쉬운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건져주는 메시야이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그건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달라져야 되요. 주님이 바깥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니고 직접 구원하신 주님은 아예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지요. 니가 죽음의 의미를 알아? 이런 식으로 너는 살고자 하잖아? 나는 죽기 위해 왔다는 거에요. 니가 알고 있는 예수 아니야! 정 반대의 메시야가 온 거에요. 인간은 왜 살고자 합니까? 바로 소유욕 때문에 귀한 것을 살려 두는 이유도 귀한 것들을 끌어 모아서 나에게 장착 시키면 사는 데 보다 유리 할 것이라 생각해서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을 살려 두라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여라!


그런데 사울은 다 죽이지마! 결국 사울이 기대하는 세계는 천국이 아니고 누구의 세계입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천국이지요. 자기 자랑하는 천국, 가짜 천국, 엉터리인 있지도 않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능력을 행할 때 그 능력이 궁금했겠지요. 예수님을 쪼개 보니까 뭐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까? 사람들에게 당한 멸시가 들어 있어요. 무시당한 것이 우리를 용서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내가 내 안에 들어오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도 예전엔 나는 무시당하면 안돼! 무시당하면 안돼! 나는 소중하니까! 막상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인 것을 예수님으로 인해 알게 되니까,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그 죄를 알게 되니까 그 죄를 용서하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부터는 오히려 무시당해도 짜증나니 않는다는 능력이 이미 천국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에요. 나보다 누가 더 소중해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보다 소중하니까, 예수님만으로 소중하니까, 예수님만으로 좋으니까 나에게 어떤 귀찮은 일, 어떤 번거로운 일도 이젠 무섭지 않은 거에요. 누구든 오라는 말이죠. 어떤 타인이든 오라는 말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타인은 오고 쓸데없는 타인은 가라! 했잖아요. 그것을 고른다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이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좋아요가 되니까 이 땅에서 누구를 붙여줘도 그건 아말렉이고 그들을 보니까 어쩜 나와 똑같은 지, 자기의 소유만을 이용해서 나를 찾으러 온 거에요. 그들이나 나나 똑같아요. 나도 귀한 것을 건지기 위해 그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에요. 똑같은 입장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이고 죽어 마땅한 나의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바로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 매, 부력이라 했지요. 자기를 계속 띄우는 거에요. 너무 떴나 싶으면 자기가 누르고 자기의 욕심을 또 띄우고 상한선과 하한선을 두고 띄우는 겁니다.

올라갈 땐 기분 좋고 내려 갈 땐 기분 나쁘고 조울증, 우울증 환자 되요. 좋았다가 슬펐다가, 좋았다가 슬펐다가 짜증났다가 좋았다가 감사하다가. 부력에 구멍을 내어 버립시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대전42강 사무엘 상15장 7절.hwp (62.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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