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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9 15:26:09 조회 : 156         
안양20181214a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81214a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야고보서4장11절에서 12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막 나무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처음 봤는데, 본다고 하는 우리보고 막 나무라는 것 같아요.

마치 동화에 보면 연못이 있어서 연못에 자기 얼굴 비추려고 이리 보면 연못 수면 아래 눈에 띄지 않는 다른 어떤 괴물이 있어가지고 우리는 내 얼굴 보려고 성경을 연못을 수면을 보는데 연못 주인이 안에 연못 괴물이 “어디 니가 얼굴을 나한테 들이대?” 하는 식으로 반격을 가하는 그러한 심정이지요.

자, 성경 한 번 보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보자~ 하는데 니가 왜 판단하느냐? 하고 불쑥 연못 속에서 푹 튀어나오는 느낌을 주거든요. 이게 말씀이 살아있어서 그래요. 우리가 보통 보는 거울은 죽은 거울인 겁니다. 내 비취는 내 모습만 비춰주지요. 보통 기독교에서 좀 이렇게 자유주의 신앙을 하는 사람은 이걸 성경이라 하지 않습니다. 성서라고 해요. 거룩한 글씨라 했어요. 글. 그런데 옛날에는 성경이라 했다 이 말이지요. 거룩한 거울로 봤어요. 의미를 추가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성서보다 성경을 좋아합니다.

성서라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인간이 분석하고 째고 쥐포 째듯이 쫙쫙 쬘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요. 요즘은 신학교에서 쫙쫙 쬡니다. 인간이 쓴 글이니까 하나님이 쓴 글이 아니니까 우리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찢어야 된다. 분해해야 된다. 짜 맞춤 해야 된다. 그렇게 가르치지요. 홍해가 뭐 실제로 바다가 아니고 갈대숲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든지 그게 Y문서, J문서 이런 거 들어본 적 혹시 있습니까? 그런 거 잘 안 들어봤지요. 일반 교인들은.

목사들은 좀 지 유식한 척 한다고 창세기1장과 2장은 2개의 다른 전선에서 원천이 서로 다른데 이게 다윗시대에 편집해가지고 짜깁기해가지고 이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멘트를 날려줘야 지가 프로의 냄새가 풍긴다. 이리 보는 겁니다. 아무튼 믿음 없다는 고백은 안하고 쪽쪽 쬐고 다시 풀 가지고 다시 붙이는 거예요. 가위와 풀만 있으면 성경 하나 새로 만드는 겁니다. 각자. 문제 크지요.

자, 성경은 살아있어요. 살아있다는 것은 뭘 하느냐 하면 성경은 창조합니다. 무엇을 창조하느냐, 새 피조물을 창조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창조를 한다는 것은 새 피조물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에는 인간 본인한테 맡겨가지고는 절대로 개과천선 백날해도 새로운 피조물 되지 않습니다. 몰라. 홍탁 아들이야 뭐 백 종원 때문에 개과선천 했을 줄 모르지만. 국민 불효자. 그 애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연못 속에 있는 괴물이 우리를 잡아먹어야 돼요. 우리는 연못 속에 빠졌다가 나와야 됩니다. 그게 십자가에 죽었다가 성령으로 부활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으로 부활된다는 말은 여러분이 간만에 듣지요? 오랜만에. 우리는 보통 성령 빼놓고 부활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으로 부활 같으면 우리는 언제 부활되느냐 하면 계속 죽고 난 뒤에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때 영광된 몸으로 다시 부활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그렇게 안 되어 있거든요. 첫 부활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첫 째 부활이 있고, 둘 째 부활. 첫 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 자는 둘 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한다. 못을 박아 놨어요. 그러면 첫 째 부활이 되려면 어디 강한 힘에 사로잡혀야 되는 겁니다. 그 강한 힘이 나보다 더 센 강한 힘. 나보다 더 센 강한 힘.

마태복음8장으로 이야기한다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리 되거든요. 말씀을 주신 것은 어떤 우물인데 그 우물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스스로 개과천선하기 위해서,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우물에서 손 하나 그야말로 포항에 있는 호미곶이 있어가지고 바다에서 손이 올라와가지고 모가지를 딱 쥐는 거예요.

강제로 우리를 말씀밖에 있는 우리를 말씀 안으로 풍덩하고 집어넣는 겁니다. 진짜 이건 동화이야기가 아니고 이상한 이야기죠. 집어넣고 다시 토해내지요. 집어넣고 토해내는 겁니다. 제가 이리하면 와! 구라도 세다. 이렇게 하겠는데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던 사람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되어있습니다. 장악되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그 분 안 만났으면 안 죽었지요.

그런데 그 분 만나고 난 뒤에 그냥 대화만 하는 사이가 아니고 예수님하고 제자들 사이에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대화하고 옆에 붙어있고 같이 동거 동락한 사이지요. 모든 걸 쥐고 장악한 사이는 아니었다 말이죠. 충실하게 적고 배우고 공부하고 그런 사이였고 주님 가신 데 따라가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우리 중에 제일 높은 제자가 되겠습니까? 라고 이런 기대를 걸고 했는데 전부 다 그게 말짱 다 헛방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세계로 들어올 때에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안’이에요. 예수안. 예수안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또는 목사들이 이야기하겠지만, 정작 예수안을 아는 사람은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모든 목회와 신학은 가짜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에 이게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것 가지고 신학하고, 이것 가지고 목회하고 예수안 이용하면 안돼요.

진짜 예수안에 들어온 사람은 내가 하는 목회 일이나 모든 신학도 다 죄가 된다는 걸 고백을 해줘야 이게 예수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이건 아주 당당함이고 배짱이지요. 예수안에 있다는 말은 나는 내 안에 내가 있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예수 안에 있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종교라는 것은 뭐냐 ‘내 안에 예수 모시기’에요. 내 안에 예수 모시기. 어떻게든 꼬셔가지고 재롱부리고 아양 떨어서 찬양, 찬미하고 이렇게 경건해가지고 어쨌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찬송가에 유명한 가스펠송 외국에서 만든 가스펠송이 있어요. 그 제목이 뭐냐 하면 주님 내 손 잡아주소서. 그런 가스펠송이 있어요. 주님! 내 손 잡아 인도하소서. 들어보신 적 있을 건데요. 그게 대표적인 거예요.

나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좀 붙잡아서 나를 선하게 인도해달라는 상당히 은혜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찬송을 가사 대로 하게 되면 이건 자기감정에 자기가 놀아나는 겁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잡아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안 잡아줬고 자기가 그걸 벌벌 떨면서 그걸 재단하기에 급급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말씀이 자체적으로 어떤 창조의 힘을 계속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야고보서4장 읽었던 이 말씀도 그냥 죽은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있고 말씀이 죽은 게 아니고 반대로 돼요. 말씀은 살아있고 우리는 말씀보고 괜찮은 내가 되려는 내 자신이 이건 죽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 10절, 11절, 12절 말씀을 아까 보라했으니까 보잖아요. 담박 딱 떠오르는 내용이 뭐냐 라고 한다면, 잡기 힘들어요. 제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0절, 12절 전체 말씀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주의 일 따로 있고, 나의 일 따로 있을까?” 라고 묻는 거예요. “주의 일 따로 있고, 나의 일 따로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이것은 주의 일이고, 이것은 나의 일이고. 또는 주의 일 가운데 일부 떼어서 요거는 나의 일이고,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처리해야 될 나의 일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전체가 주의 일이든지 아니면 전체가 나의 일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돼요. 우리가 하는 이 설거지나 커피 뽑아내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이게 나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지요. 주의 일이면 가치 평가를 내가 내릴 자격이 없어요. 옳았다. 그르다를 그런 건 내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게 나의 일이 됐을 때는 옳았다. 옳지 않았다. 가 되고 나의 일이 됐을 때는 내가 이익 봤다. 손해 봤다. 이게 성립이 돼요.

그런데 전체가 주의 일이 되어버리면 나의 이익, 손해, 죄 지었다. 안 지었다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지금 11절, 12절 말씀이 뭐냐 하면 율법 전체가 주의 일이기 때문에 니 빠져라! 는 이야기에요. 오늘 제목 괜찮다. “너 빠져라!” 니 일에서 니가 빠져버리라는 말이지요. 너의 일에서. “주님, 이것은 나의 일이기 때문에 성실히 해가지고 주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런 주제 넘는 짓은 이제는 제발 그만! 이제는 제발 그만 두라는 말이지요.

무슨 주의 일이 따로 있고, 나의 일이 따로 있습니까? 신학교 가면 교수들이 그렇게 가르쳐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은 것은 주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치기를 그렇게 가르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런 경계선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한테는 밥을 먹을 때는 나의 일이고, 밥 내려가면 식도의 일이고, 이건 아버지 일이고, 그런 식으로 예수님한테는 이게 구분이 안 되듯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구분이 안돼요.

모든 게 주의 일이기 때문에 건방 떨지 말고, 니가 니 일을 거기다가 뽑아내지 말라는 말이지요. 만약에 주의 일인데, 그 중에서 내 일이 따로 있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율법자가 되고 판단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에요. 11절, 12절 말씀을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맞는지.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리 되어있어요. 요걸 한 마디로 뭐라고요? 이 세상에 모든 일은 내 일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 일이 있어버리면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 됩니다. 벌벌 떱니다. 덜덜 떨어요. 나는 망했다. 내 인생 조졌다. 내가 그런 짓은 안 하는 건데.

또는 반대로 내가 이만큼 복권 당첨되었다. 드디어 나는 내 식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돈을 써야지. 이건 왜? 내 일이니까. 그동안 평생토록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이 성경을 대하기 전에 그대로 대하기 전에는 뭔가 속아왔다는 감을 잡아야 돼요. 우리가 속고 살아온 거예요. 벌벌 떨면서 속고 산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율법의 모든 일이 주의 일이다. 하는 것은 이건 납득이 돼요.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은 납득이 되거든요. 납득이 된다. 그러면 주의 이 일이 어떤 목적이 있을 텐데 그럼 우리 자신의 일도 주의 일에 속한단 말인가, 그러면 우리는 목적을 부여받은 게 되는데 그 목적이 뭐냐, 그 목적이 ‘열매 맺기’입니다. 열매 또는 열매 맺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할 때는 어떤 결실을 내요. 내는데, 여러분이 이건 꼭 안 찾아봐도 알아요. 마태복음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게 있습니다. 워낙 말씀의 도사들이니까 볼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 씨 뿌리는 비유를 다시 한 번 우리가 들여다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이유가 뭔지.

모든 일은 무슨 일이다? 모든 일은 주의 일이다. 이 말은 나의 일은 애초에 나의 일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허락하신 적도 없고 주신 적도 없어요. 나의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럼 나의 일도 없는데 왜 자꾸 명령하느냐. 명령하는 이유는 손을 놔라는 말이죠. 니 철봉에서 손 떼라는 말이지요. “아휴! 밑에는 절벽인데.” “니 원래 떨어져서 죽게 되어있어. 지금 니가 니 자신이 어색하다는 걸 니가 못 느끼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나이 늙어서 죽잖아요. 아직까지 그렇게 연세 많은 분은 안 계시지만. 이건 아부하는 소리입니다만.

70, 80 넘으면 죽어요. 원래 죽게 되어있다니까요. 저 철봉 손 놓게 되면 밑에 떨어진다면 죽잖아요. 원래 우리가 가는 방향이 죽는 쪽이에요. 아직도 우리 자신이 이유를 모르니까 살아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지금 살려고 하니까 이게 어색한 거예요.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산다는 게 굉장히 거북스러워요.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내 일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야~ 어색하다. 어색해. 니 일 없어.” “아닙니다. 요건 꼭 내가 성취시켜야겠습니다.” “어색한데. 니도 알지? 이게 껄끄럽다는 거.” “나중에 니가 우울증 걸릴 수 있어. 잘못하면. 니 정신병 돼.” 그렇게 늘 말씀을 통해 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나의 일은 없어요. 주의 일인데, 목적이 있지요. 열매입니다. 그럼 이 열매라는 것을 제가 왜 언급하느냐 하면 마태복음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는데 씨 뿌리는 비유는 여러분이 첫 번째는 다 아실 거예요. 길가에 떨어졌는데 마귀가 윙~ 하고 날아와 가지고 떨어지는 쪽쪽 다 주워 먹었다 말이죠. 왱~ 하고.

두 번째 보세요. 씨를 뿌렸는데 잠시 좀 생육했다 싶어서 좋아했는데 뿌리가 땅속까지 내려가 보니까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말이죠. 자, 바위 덩어리 있었다. 연약한 뿌리가 바위 덩어리를 뚫고 내려갈 수는 없는 거죠.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가다가 앞에 골목길이 막혀 있으면 돌아가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뿌리가 내렸는데 바위가 있다. 두루룩 뭐 공사할 일이 있습니까? 바위 있으면 뿌리를 안 내리면 그만이죠. 뿌리를 내리지 말라고 바위가 있으니까 그건 돌아가면 되거든요. 피해가면 되거든요.

그것처럼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억지를 부려봤자 거대한 바위가 막혀있으면 우리는 뿌리를 못 내립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가 없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아무리 너희들이 몸부림쳐도 내가 보기에 하나님 보기에 주님 보기에는 너희들은 내가 설정한 그 설정의 범주를 절대로 너희는 이겨내지 못한다. 극복하지 못한다를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바위를 뚫어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는 백성이 돼야지.” 이런 고집을 부리지 말라 말이죠. 인생살이 하면서 안 되면 돌아가면 그만이지 뭐. 애 공부 못하면 기술배우면 되지. 그걸 또 SKY들어가려고 밀실 만들고 자물쇠 잠그고 그럴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애들도 알아요. 나는 춤추는 게 더 잘하지 공부는 못한다고.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이 비유 자체가 모든 일은 너의 일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신은 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습니까? 내 마음대로다 왜? 주님 마음대로에요. 주님은 말씀을 주면서 공통점을 찾아라 이 말이죠. 바위를 뚫지를 못해서 시들 시들 열매가 없어 말라버린 그 씨앗과 30배, 60배, 100배 맺은 씨앗과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더라 라는 그런 공통점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런 속성으로 무장된 사람 천국 갑니다.

천국이 우리를 집어넣어 줄 때 주님의 목적이 있어요. 어떤 목적이냐, 열매가 된 상태에서 천국을 가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열매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일은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입니까? 모든 일은 항상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은 내 일 경우에만 우리가 관심 갖고 남의 일은 관심 없어요. 우리는 내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열심내고 있어요. 남의 일 같으면 열심 안 내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예민합니다. 내 것에 예민해요. 이래가지고는 구원이 안 되겠지요. 내 것에만 예민한 것에서는 지옥에 가야지 천국 못가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물 속에 있는 호미곶이 손으로 멱살을 쥐는 이유가 그냥 들여다봐서는 내 일로 시작해서 내 일로 마감이 돼요. 교회 가는 것도 내 일이고, 예수 믿는 것도 내 일이고, 마감이 되니까 이게 멱살을 쥐어서 아예 처음부터 니는 속고 있다는 것을 다른 세계에 속해서 다른 세계가 예수안이죠.

다른 세계에서 속해서 거기서 새롭게 조작되어야 되고 새롭게 창조되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잡아당겨서. 그러면 그 일을 요한복음4장 봅시다. 35, 36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성도는 무슨 역할을 맡기느냐 하면 추수꾼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추수꾼은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복음 전하면요, “목사님, 이제 저는 복음 듣고 놀면 되겠네요.” 복음 듣고 놀 생각하는데 복음이 들어가 버리면 요한복음4장됩니다. 주와 함께 움직여요. 신입사원들 처음 들어가면 혼자 일 안 맡깁니다. 고참 하나 대리하고 함께 움직여요. 밖에 나가 영업할 때도 함께 움직여요. 하나, 하나 다 가르쳐야 돼요. 문을 두드릴 때는 띵동~ 할 때는 이렇게, 이렇게 누르고, 영업사원들 다 가르치는 것처럼 주님은 영업사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초자거든요. 초자 데리고 우리가 노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미 평생의 연봉을 다 받고 해요. 이미 삯은 다 받았어요. 영생을 다 받은 거예요. 영생을 다 받고 우리와 똑같이 영생을 다 미리 받아야 될 사람을 찾아나서는 작업을 하시는데 우리는 몰라요. 누군지를. 함께 있는 주님은 알고 우리를 추수꾼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 추수꾼의 대표가 요한복음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물 길러 왔다가 자기 목적, 자기 일, 물동이 던져버리고 심봤다! 하는 식으로 물 길러 왔다가 물은 안 길고 물동이 던져버렸어요. 메시아 만났다고 더 급한 이야기를 했던 이 사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 여인이 이미 추수된 자고 영생 얻고 영생 얻은 자만이 뭘 하느냐 하면 추수꾼이 되는 거예요. 영생 얻은 자만이. 추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 챙기고 평생의 연봉은 다 받았다니까요. 영원히 축복받는 영생보다 더 센 연봉이 어디 있어요. 평생 다 받고 이제는 나는 메시아 만났다. 하고 물동이 버려두고 29절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것을 전하는 추수꾼이 된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양식이라고 30절에 되어있거든요.

자, 야고보서4장 봅시다. 제가 추수꾼이 되었다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그러면 추수꾼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먹고 그 다음에 추수하자. 해가지고 지하철이나 동네에다가 커피 한 잔씩 나눠주고, 껌 나눠주고, 휴지 나눠주고, 교회 소개하고, 건강이 행복이 다가 아니다. 그런 문구해가지고 그게 추수꾼일까요?

오늘 하는 야고보서 11절, 12절 근거하는 추수꾼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적을게요. ‘아무도 믿지 말라.’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라.’ 이게 추수꾼의 본질이어야 되지요. 이거 복음입니다. 특히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라.’ 이게 복음이에요. 남편 자식한테 엮이지 마세요. 남편, 자식이 우리를 영생 준 거 아니에요. 영광 다 준 거 아니거든요. 사람에게 엮이게 되면 추수꾼이 아니고 나의 자존심을 추수하려 해요. 나의 명예와 나의 명성과 나의 가치를 자꾸 놓지를 못하고 있어요. 자식보고 니가 공부를 잘해야 이 엄마 각오가 선다고. 왜 자식은 그런 생각 안하는데 엄마가 너무 자식한테 엮이고 있어요. 너무.

왜 엮이느냐, 누가 자기를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까. 모든 세상에는 내 일밖에 없으니까. 자식 잘 키우는 것도 내 일이고, 가정 행복도 내 일이니까.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러니까 주의 일은 아니고 전부 다 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이게 속고 있는 거예요. 이게. 지금 교회고 뭐고 간에 지금 우리가 행복이 없었던 것은 너무 엮여서 문제에요. 엮였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무 믿었어. 믿지 마세요.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이걸 좀 어렵게 표현하면 주체는 객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자꾸 시도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아닙니다. 저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에요. 그래서 안 되면 화내고 울고불고.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니는 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주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자아가 있으면 타자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존재하도록 하는 걸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동일성’이라 합니다.

타인마저 나의 ‘동일성’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이건 어른이건 어린애든 갓 난 36개월 애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그 집안을 자기 손아귀에 다 쥐려고 합니다. 언제 울면 맛있는 요구르트 주더라. 다 있어요. 동질성은 이게 뭐냐 하면 지배욕이에요. 지배욕. 또는 평정. 이 가정을 내 입맛에 맞게 평정하겠다는 거예요. 식구가 4식구 같으면 4식구 다 갈등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평정하려고 하니까.

각자가 패를 갖고 있어요. 모였다하면 고스톱 친다고 보시면 돼요. 이 말하면 엄마가 얼마나 잔소리할까, 이 말하게 되면 아빠가 용돈을 더 줄까, 말까, 딸도 아들도 전부 다 자기 고스톱을 치고 있어요. 패를 갖고 있다고요. 패를. 이건 친구한테 내밀 패, 이건 엄마한테 내밀 패, 그런데 갑자기 급습해가지고 다 뒤집어가지고 “니 요새 공부 안 한다 보니 성적서 떨어지는 거 보니까 니 이 짓하려 하느냐, 학교 가지 마!” 한바탕 한 것은 패를 다 들춘 거예요.

그러면 친구한테 가서 “야야, 엄마한테 들켰다. 6개월간 만나지 말자.” 이리 되는 거예요. 도대체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은 그 가정을 자기 위주의 공간으로 월드로 자기 세계로 전부 다 전환시키는데 악을 쓰고 있어요. 악을 쓰고 있어요.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자매는 자매끼리, 남편은 남편끼리, 아내는 아내대로.

“그러면 목사님, 어쩝니까? 태생이 이런데 어떡하란 말입니까?”라고 한다면 엮이지 말아야 되고, 믿지 말아야 되고, 우리는 지금 이거 외에는 하는 일과가 매일 엮이고 믿고 하는 일과인데, 이용하는 일과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신다면, 이건 아이하고 개하고 공통점이 있어요. 아이하고 개 특히 눈이 올 때, 아이하고 개보세요. 그들은 지금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놀고 있습니까? 노는 거예요.

에덴동산은 작업하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놀라고 준 거예요. 그런데 작업을 한 게 사단 난겁니다. 진짜 사탄에 의해서 사단 난거예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어디에 못 갑니까? 천국 못 가지요. 그러면 천국은 어떤 세계다? 일하는 세계가 아니고 놀아야 될 세계지요. 그러면 이 땅에 구원 받아야 될 사람은 이 땅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아야 될 사람이에요. 노는 식으로 살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갑니다. 저의 또 공식입니다.

왜냐하면 가는 나라에 맞아야 돼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맞으면 안 되고, 사는 세계와는 이질적이고, 가는 세계와 동질적이어야 돼요. 그쪽 세계는 마구 마구 노는 세계에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노는 데는 뭐가 없느냐 하면 목적 달성이 없어요. 성과급이 없어요. 성과라는 게 없어요. 성과는 회사의 그래프가 성과지, 학교 성적표가 성과지, 천국에 무슨 성적표가 있습니까? 내가 몇 명 전도했나 보자. 이런 그래프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천국가면서 천국 가는 세상이 어떤 세계인지를 진짜 모르고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겠지요.

우리는 가야 될 나라에 맞춰야 돼요. 그리고 이 땅에서는 엮이지 말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는 발을 빼야 돼요. 믿지 말아야 돼요. 괜히 믿어놓고 속았다. 사기 쳤다 하는데 이건 분명히 사기 당한 것도 전부 다 믿었기 때문에 사기 당한 거예요. 처음부터 믿지 말라고 했으면 이 복음을 들었으면 사기도 안 당지요.

오늘 본문에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11절,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의 사물이 물건이 아니에요. 물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외부의 살아있는 사람이 이걸 옮겨줘야 여기서 이렇게 옮기는 게 사물이거든요. 율법의 실행이나 성취는 물건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켜줄 때만 옮겨지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스스로 주님에 의해서 스스로 이게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11절, 12절 말씀은 뭐냐 하면 누가 움직이고, 누가 죽은자냐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누가 살아서 움직이는지 누가 그냥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라는 이야기가 11절, 12절 이야기에요. 니가 주제 넘게 뭔데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평가해? 니가 뭐야? 하는 식인 거예요.

오늘 본문 11절, 12절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어떻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에요? 이 성경 말씀은 이미 전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이 말씀을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3장 19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울산에 천상이라는 장소가 있어요. 이름이 참 희한하지요. 천상. 하늘 위라는 말이 있어요. 거기에 우리교회 따서 우리교회라는 교회가 있어요. 그 얼마 전에 제가 강의했잖아요. 그 강의하면서 뭐냐 하면 그 강의 제목이 ‘판결’이란 이름으로 강의를 했거든요.

그 잠간 중요한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가 뭘 행하기 전에 이미 판결난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는 절대로 심판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 이미 최종 판결이 났어요. 이게 바뀌지 않는 판결입니다. 심판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말해서 율법을 준 것은 하나님이 우리한테 “니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나는 너를 알고 있거든.” 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니를 안다. 너는 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요.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준비한 이유가 알기 때문에 알아도 너무 아시기 때문에 피를 준비하신 거예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피를 준비한 거예요. 지혜롭게 하려고 아주 몸부림을 쳐요. 조금 더 지혜롭게. 교회 가서 남보다 더 지혜롭게, 지혜롭게. 지혜롭게 환장하기 때문에 가장 안 지혜로운. 지혜롭다는 것은 내가 지혜롭잖아요. 예수님의 피는 뭐냐 하면 내가 지혜롭다, 안 지혜롭다는 전혀 나를 배제하고 주님 쪽에서 준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몸부림치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알고 율법을 준 거예요. 로마서3장19절 말씀하고 똑같은 말씀이에요. 너는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니가 지금 무수하게 남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제목이 뭐라고 했지요? 너 빠져.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아까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질성인데. 누구 위주냐, 나 위주의 동질성입니다. 나 위주의 동질성. 나는 하나의 살인거미에요. 내가 있는 곳에 거미가 있어요. 아지트에요. 거미는 바깥에 거미줄을 해놔서 완전 스파이더맨처럼 쫙쫙 뽑아내서 자식이고 남편이고 하여튼 여기 택배기사까지 전부 다 내 손으로 잡을 거예요. 백화점에 가면 백화점 점원 막 잡아. 어디가도 내 뜻대로 되어야 돼요. 전부 다 내 뜻대로 다 되어야 돼요. 전부 다.

시집가면 시집은 내 뜻대로, 친정가면 내 뜻대로 전부 다 내 뜻대로 다 되어야 돼요. 나는 한 마리의 거미. 제목 바뀌었다. 거미로. 나는 한 마리의 거미에요. 내 중심. 내 앨범에는 여고 때 찍었던 사진들 요리 삐쭉이 찍었던 그런 사진. 한 줄로 서서 찍은 건 40대. 한쪽 15도로 보는 거. 비행기 지나가는 거 같아. 그거 다 보고 있어. 전부 다 한 마리의 거미에요. 완전 곤충이에요. 곤충. 카프카의 단편소설 같아. 변신하는 게 있거든요. 갑자기 세일즈맨 온 가정의 가장이 자기가 안 벌면 다 굶어죽는 가장이 하루아침에 거치게 되어있으니까 처음에는 아버지 걱정, 남편 걱정하다 나중에는 뭐 걱정하느냐 하면, 당신 돈 못 벌면 그러면 벌레 되어가지고 집에 완전 누워있으니까 당신 못 벌면 우리는 어떻게 살지. 자기 걱정하는 그 내용이에요.

인간은 서로를 이용해 왔다는 거죠. 거미지요. 그러면 우리 옆에 누가 있습니까? 다른 쪽은 못지않아요. 다른 거미가 있어요. 거미가 또 있다고요. 그러면 이 거미와 거미의 만남에서 서로 자기 위주의 동질성을 추구할 때는 이건 뭘 해야 돼요? 이건 서로 날카로운 판단들이 주고 가는 겁니다. 완전히 컴퓨터 게임 같아요. 레벨을 2, 3으로 올리고 하는 거 있잖아요. 판단들이 있지요. 판단들.

판단들에 의해가지고 판단들이 맞으면 서로 동질이 되고, 판단 안 맞으면 갑자기 적이 돼요. 동질이 됐다가 적이 됐다가, 적이 됐다가 동질이 됐다가. 완벽한 타인이지요. 있을 때는 칭찬하다가 뒤에서는 험담하고. 전부 다 이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정치적 협상’이라 합니다. 정치적 협상은 노리는 게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평화, 또는 화목. 이걸 목적으로 정치적 협상과 타협에 나섭니다. 늘 배틀하는 거예요. 줄 거주고 양보와 협상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양보와 협상에 나가게 되면 거미왕국 또는 거미국가, 나의 국가지요. 나의 국가는 하나의 캐슬, 성으로 둘러 쌓여 있겠지요. 이걸 자기 동질성이라 해요. 이 자기 동질성가지고 철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주체인데 옛날에는 주체가 이렇게 고형화되다가 딱딱하게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해서 주체를 굳어진 하나의 주체로 봤는데. 좀 더 연구를 해보니까 이 주체가 환경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이게 늘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철학자는 이 주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고체 주체와 액체 주체로 나눠요. 액체주체라는 특징은 뭐냐 하면 잔의 모양에 따라서 몰망인데 같이 즉각 즉각 달라지는 거죠. 카멜레온. 얍삽하게 이래 됐다, 저리 됐다. 저리 붙었다가 이리 붙었다가 액체 같아. 그런데 고체 주체는 주로 어떤 특징이냐 하면 깊은 산골이나 농촌에 있는 노인네들.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에요. 곧 죽어도 병원에는 안 가겠데. 나 주사 맞는 게 아프데.

이 콘크리트 석고처럼 굳어져가지고 “그래, 니가 그렇게 잘 배웠나? 그럼 니 알아서 해라.” 이런 식으로 자녀들 이렇게 효도를 해도 효도 안 받아. 왜? 자기 굳어진 고집이 있어가지고. 제발 다단계 사지 말고 노인들 어디 놀러 가가지고 그거 해가지고 선물 준다고 물건 이만원짜리 오십만원주고 사지 말고.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아이고, 그 아저씨. 니보다 더 낫더라. 얼마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지. 말은 듣지 않아요. 이게 고체에요. 고체.

차달래부인 나오는 그 남편 같아. 치매 걸린 남편. 완전히 왕고집있잖아요. 왕고집. 왕고집에다가 가부장적 제도. 김언중씨. 광산김씨. 고체 주체. 사기는 또 다 당해요. 고체주체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 액체주체는 융통성은 있어요. 하지만, 융통성은 있는데 단점이 뭐냐 하면 주체가 고정되지 않아가지고 내가 왜 사는지를 몰라요. 어떤 가게 같아. 가게 뭐 해놓고 한 3년 가겠나 싶으면 앞에 라이벌 있어가지고 인테리어도 새로 해야 되고. 같은 업종해가지고 팍삭 망하면 또 다른 업종 바꿔야 돼요. “당신은 뭐 일 하나 해도 오래 진득하니 하는 게 없네.” 아내로부터 그런 소리를 많이 들을 때 남편은 초조하기 시작합니다. 애는 고등학교3학년인데 당신은 사업 바꾸다가 돈 다 날려가지고 어디 2년을 못 넘기네. 이제는 친정에도 돈 빌리기 미안해서 못 빌리겠다. 아내는 또 바가지 긁지요.

이 시대가 마치 방랑자 신세 같아요. 한 곳에 진득하니 못 살아요. 동탄에도 못 살고 여기와도 못 살고 자꾸 돌아다녀. 그것도 새로 가면 분위기에 맞춰야 되지 친구 새로 사귀어야 되지. 사귀다 보면 떠나야 될 조건 또 생기지. 유동성이에요. 유동성. 고향은 없고 자꾸 타향만 만들어내는 시대.

자,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뭐냐 하면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엮이지 마라. 그러면 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외로울 수도 있고 도저히 왜 사는지 모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하신다면 바로 주님 자체가 유일하게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부산강의에서 했던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예수님만 쓸 수 있다고요. 우리 하나님이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건 예수님만 쓸 수 있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요. 우리 아버지.

새로운 주체를 줄 때에 이미 영생, 영원한 연봉은 다 받고 온 거예요. 그리고 동행합니다.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가 함께 해요. 그러면 우리가 남은 것은 뭐냐, 아무도 믿지 말고 엮이지 말라 하는 것은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약을 올려버리라 말이지요. 어떻게 약을 올리느냐 하면 아무도 판단 안 하면 되는 거예요. 판단 안 하는 방법이 뭐냐, 나는 죄인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죄인이다. 이러면 마귀도 재미없어 떠납니다. 마귀가 정당성을 주장해야 마귀가 확 달려들거든요.

마귀는 선악에 꽂이는 존재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선악을 인간에게 전수해가지고 인간을 자기 종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인간을 계속 지배하려면 인간 속에 뭐가 계속 있어야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의 갈등 투쟁이 계속 있어줘야 마귀가 나설 명분이 만들어져요. 마귀가. 니가 그래서 신부답냐, 니가 그래서 목사답게 될 수 있느냐. 니가 그래서 중다울 수 있느냐, 그래가지고 사장다우냐, 계속해서 마귀가 갖고 놀고 협박, 공갈치고 추궁할 수 있는 빌미가 인간 속에 그 내부가 장착되어있어요. 위치 축적기가 우리 안에 달려있다고 보시면 돼요. 어디 가도 다 들켜요. 우리는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악마는 다 알고 있어요. 쫙 오거든요. 이 위치추적기를 빼버리면 되거든요.

언제 빠지느냐, 이게 죽을 때 빠져요. 그럼 미리 죽었다 하지. 미리 죽으면 되잖아요. 자, 미리 죽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번개탄 아닙니다. 넥타이 아닙니다. 미리 죽는 방법은 안 죽으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지금 2018년도 제가 만약에 제가 만약에 2052년도 죽는다면 이미 2015년에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나는 이미 죽은 상황이에요. 파티마 병원에서 이미 장례 치렀어요. 나는 관 속에 누워있습니다. 파티마병원 관 속에 누워있는데 관 속에 누워있으니까 간지럽고 화장실도 가야 되고 잠시 관문을 스르륵 열고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우리 집까지 왔다 칩시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모든 게 뭐가 돼요? 과거가 되겠지요. 이걸 가지고 순수과거라 하는데.

순수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없어질 과거가 아니고 전에 있었던 그 과거가 그대로 살아있는 과거가 된다는 게 순수과거에요. 이 말은 어려운데 그냥 넘어갑시다. 어쨌든 간에 이게 돌아오기는 과거가 되는 거죠. 과거가. 순수과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한테는 순수라는 게 없어요. 없기 때문에 진짜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그 내막은 뭐냐 그 순수한 모든 것은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가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다시 이렇게 문 열고 이리 왔다면 이 인생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허락한 인생이에요. 주의 인생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일은 없고 주의 일이에요. 아까 커피 탔잖아요. 그게 주의 일이에요.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아바타로, 주님이 안에 들어있는 아바타로 껍질로서 맛있게 커피를 마시는 거예요.

지금 이걸 인위적으로 자꾸 말로 하니까 골치 아프지요. 왜냐 인위적으로 그걸 자꾸 그렇게 합체하고 맞추려고 하니까 이게 요소가 몇 가지 요소더라. 일단 죽었다가 파티마병원 갔다가 관 열고 이러니까 골치 아픈데, 그래가지고는 안 되고요. 수시로 주사가지고 나는 항상 망상가거든요. 왜냐 하면 항상 내 세계를 주장하기 때문에 망상가에요. 망상가.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는데 나는 우기고 있어요. 세상은 내 뜻대로.

나는 내가 원하는 팀이 있는데 내가 원하는 팀은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팀이다. 내일 동남아시아 월드컵하는데 우승해가지고 우리나라 제품이 베트남에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뭐든지 생각하면 내 일이 되어버려요. 뭐든지. 축구 이기고 지는 건 누구 일입니까?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베트남이 이기려고 하는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배탈나가지고 전부다 기다가 5:0으로 질수도 있는 문제에요. 주의 일인데 이게 나는 상상하기를 뭐냐 하면 나의 일로 보는 거예요.

그게 나는 망상가에요. 모든 인간이 다 망상가입니다.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망상을 실제라고 우기기 때문에 왕고집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 세상이 그리 됐어. 니 성적 어떻게 됐어? 성적 내려갔어. 어, 내려갔구나! 이러면 되는데 내가 뭐라고 했어? 이리 노니까 성적 내려갔잖아. 라고 망상을 강요하고 우기는 겁니다. 마치 안 그래야 되는 것처럼. 마치 주님이 개입 없는 것처럼. 이건 주님이 없는 세상. “주님이 어디 있어? 인간들이 하기 나름이지.” 이걸 자꾸 고집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순간 순간에 성령으로 주사를 놔버립니다. 주사를 놓으면 뭐 한 순간이 잘못된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입법자가 아니고 판단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나는 입법자, 판단자도 아니면서 판단하는 자체가 내가 망상가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일을 하시지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81214a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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