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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9 15:26:52 조회 : 72         
안양20181214b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81214b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그 12제자 같은 경우에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 따로 있고, 자기 일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날 하는 말이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됩니까?” 이건 자기 일인 거죠. 자기는 그게 망상인 줄 몰랐어요. 주께서 수시로 이야기했습니다. 니 일은 니 일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수시로 어떤 기적을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물위에 풍랑이 있을 때에 그들은 할 도리를 다 해요. 그런데 그 자체가 믿음이 없음이 되어버려요.

분명히 내가 살기 위해서 평소대로 했는데 니가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되어있다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오천명 중에서 있는 이 사람들의 음식을 너희들 편에서 먼저 제공하라고 먼저 던지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난감한 상태에 있어요. “지금 남자만 오천명인데 어디서 우리가 다 사오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그래서 어린애 도시락가지고 오천명을 하고도 넉넉히 남겼잖아요.

그러면 이미 그들은 주의 일속에 편입돼 있어요. 자기 일은 없어요. 주의 일밖에 없어요. 그 떡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주님께서 이야기하기를 니가 나를 따라온 이유를 안다. 너희들은 떡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왔다. 그걸 예수님께서 뭐냐 하면 니가 육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제가 하는 것은 이 육의 떡. 이 육의 떡이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다 가버렸지요. 망상가들 다 가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다 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망상가로 본 겁니다.

따라서 아까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이미 어느 정도 죽었다고 치고 죽었는데 다시 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성령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근거가 되어있어요. 일종의 양탄자지요. 죽으심에다가 이걸 덮쳐버리면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오게 되면 나는 살아있는 채로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죽고가 돼요.

나는 죽고, 그 다음에 누가 산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문장 자체가 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주님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 홀로 있는 걸로 보이느냐. 주님이 부지런히 지금 나와 함께 있어 나에게 계속해서 일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증명해 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혼자 있는 거 맞아요. 하지만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끼리만 그걸 공유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래서 믿는 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 이건 죽은 자가 돌아온 것보다 더 기쁘지요. 기적이거든요. 그럴 수 없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까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인간은 돈과 엮이면 안돼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엮이는데, 돈과 엮여버리면 돈 없으면 관계도 다 연수가 다 되어버리잖아요. 돈 엮인 관계 말고 이거 끊어버리고 복음으로 성령으로 엮여버리면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한 몸이고 형제에요.

자, 지금까지는 설명하는 것이 평화로워요. 주님 성령 오셔서 내 일은 없고, 나는 망상가니까 내 일은 없고, 망상가인 나를 붙들어서 주님의 실재하심을 증거한다. 이리 되는데. 실재로 이렇게 주께서 성령 오시게 되면 이렇게 곱게 오지를 않아요.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느냐 하면 바로 이게 생깁니다. 분통, 절통한 억울한 일이 발생돼요. 실제로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전서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4장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주문했습니까? 요청했습니까? 그런 적 없지요. 주문하지 않았는데 고난이 왔다는 것은 이것은 달리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분통하고 절통하고 억울한 일 당한 거예요. 오해를 받은 거예요. 오해를.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 “에이그, 고집부리지 마. 내가 다 알아.” “아니야. 내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야.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니야.” 아무리 해도 주위에서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굉장히 억울함을 복음알고 억울한 일 당한 거 있습니까? 진짜 이건 돈이 몇 푼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억울함을 당하지요. 잠언서에 나오지만 사람 중에 제일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남의 마음을 갖는 게 제일 어려워요. 남의 마음을.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그쪽 마음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 또는 내 마음이 저 쪽에 들어가는 것. 이게 제일 어려워요. 그런데 잠시 헤헤 웃고 한다고 서로 마음에 공유했다고 착각하지요.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게 진짜로 좋아한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니고 원수가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이런 말이 그냥 막 나올 때가 있다고요. 아름다웠던 추억, 좋았던 시절, 아무리 10년 20년 있었어도 한 순간에 기분 나쁨이 그 모든 것을 무효화 시킵니다. 한 순간에.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었어.”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지나간 과거는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날아가야 되냐 어차피 망상이니까. 어차피 자기 자신은 누군줄 모르고 꿈만 꾸는 몽상가에요. 몽상가. 우리는 다 몽상가에요. 내가 모르는 상태기 때문에 몽상가라고 감히 이름 붙이는 겁니다. “니 누구야?” “몰라.” 꿈만 꿔. 아침에 출근할 때 꿈만 꾸고 일방적이라. 뭐든지. 뭐든지 일방적이에요. 무조건 잘되어야 되고 무조건 우리 가정 잘되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출세해야 되고,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일방적이에요.

따라서 우리의 소원은 뭐냐, 행복입니다. 남북통일 아니에요. 남북통일 20조 퍼줄 일이 있습니까. 남북통일 아니고 행복이에요. 행복인데, 행복을 방해하는 게 뭡니까? 내가 일부러 불행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갑자기 들어 닥친 이 억울함입니다. 곡해와 오해. 내가 잘못한 걸 예상해서 잘못했으면 미리 대비는 되지요.

이건 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쑥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벌어진 사태. 애 키우는데 애가 갑자기 죽었다. 이런 거요. 내가 공들여서 30년 키웠는데 죽었다. 이런 것. 뭔가 나 어찌 살라고. 나 어떡하라고. 너무나 이거는 나라는 그 모든 것이 다 없어질 때, 억울한 상태. 그게 뭐냐 하면 ‘추상적 죽음’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 죽음’이에요.

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우리 몸이 숨 쉬고 있어서 살았다고 하잖아요. 이건 아니에요. 우리 몸이 과거가 있을 때는 산거예요. 만약에 숨 쉬고 있다고 하면 짐승하고 개하고 우리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심지어 내가 이리 하면 개도 화낼 거예요. 나도 추억이 있습니다. 이리 할 거예요. 그러면 추억 없는 거. 박테리아? 박테리아도 추억 있습니다. 할 거예요.

인간이 산다는 이유는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은요, 이건 정박아 애들은 몰라도 아주 IQ낮은 사람은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과거에 만든 꿈 때문에 살아요. 그것 때문에 안 죽고 싶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고집들 하는 이유가 희망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희망이 살아있는 한 나는 죽는다는 것은 꺼져버려! 죽는다는 건 저리 가! 나는 죽을 때가 안 됐어. 딸 아직 시집도 안 보냈는데. 안 돼! 저리 가! 살아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꿈이 흠집나지 않는 조건하에 살아있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죽을 만큼 힘들어도 내 희망한 가능성이 있다면 생생하게 나는 살아있다. 자살해. 미쳤어? 내가 왜 자살해. 꿈이 있는데. 꿈이 있는 한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은. 이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그 꿈마저 와자작 작살나는 순간이 성령이 개입한 순간입니다. 일체에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 명성, 내 자존심은 일체 챙겨주지 않는 순간. 그리고 다시 힘 있게, 힘 있게 일어설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작살내는 거예요. 그 정도 되어야 억울한 거예요.

다른 나쁜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사람이 억울한 게 아니라 특정 상태도 없는데 갑자기 내 인생이 이리 망가지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내 것, 그 내 것 안에는 나의 가족도 들어있지만, 내 돈도 들어있지만, 내가 애쓰고 먹을 거 안 먹고 쓸 거 안 쓰고 노력했던 돈도 우선이지만, 그 노력했던 자기한테 절대적 신뢰했고 자기를 밀어줬던 그 열성, 그 열성이 무용지물로 끝났을 때, 그게 바로 내 인생이 억울한 거예요.

내 인생 억울한 것. 이게 성령이 임할 때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이 주님이 찾아왔을 때, 낯선 타자지요. 타인. 완벽한 타인이 아니고 낯선 타인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문제 삼아봅시다. 첫째 시간 논리에 의하면 억울하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어야 정상입니다. 내 일이 아니고 다 주의 일이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에요.

이론이 좀 밑으로 내려가야 돼요. 밑에 내려가면 뭐가 필요한가, 원심분리기가 필요한데. 뱅뱅 돌려버리면 진액과 물 부분이 이렇게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비커에 보면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섞여있던 것이 혼탁한 것이 밑에는 건더기 있고 위에는 물 있듯이. 하나님께서 뺑뺑이 돌려버립니다. 뺑뺑이 돌리면 진짜 내 모습이 죽어도 못 내놓는 게 있겠지요. 이걸 작살내 버려요.

그러면 다 작살나는 거예요. 정말 내가 누구냐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왜? 돈만 있으면 사니까. 꼭 내가 누군 줄 알 필요 없어요. 돈 주고, 돈 쓰고, 살림사고 끝. 내가 누군 줄 알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가지고서는 아주 조용하고 행복하게 지옥 갑니다. 행복한 가운데. 아무 무탈하게 지옥가요. 왜냐, 내가 누군 줄 모르니까.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거예요. 바위 있으면 피해가면 되고, 가시덤불 있으면 열매 안 맺으면 그만이에요. 열매 소관은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냥 되는 대로 힘들면 피해가고 방해하면 돌아가면 되고, 아주 살기가 편해요. 우리는. 그런데 이 억울함이라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억울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폐부, 심부까지 깊숙이 주사바늘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억울함. 그 억울함이 누구 억울함이냐, 주님의 억울함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주님의 억울함에 대해서 아무 관심 없어요. 왜냐, 나만 안 억울하면 돼요. 왜냐, 주님은 어디까지나 타인이니까. 나의 행복이 우선이지 주의 행복이 우선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주사바늘을 집어넣어버려요. 주님의 억울함이 와요. 그러면 아까 베드로전서4장 14절에 보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아니 그리스도는 2000년 전 사람인데, 맞아요. 2000년 전 사람인데 2000년을 뛰었다면 지금 내가 살아있어도 2048년도에 죽는 순간이 올 거 아닙니까. 언젠간 죽잖아요. 죽는 순간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죽는 순간을 이미 죽었다고 치고 지금에다가 지금 섞어 넣을 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다 이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이, 이까지 2000년도 뛰어넘었는데, 그까짓 거 몇 년 산다고, 그것도 같이 이렇게 결합을 시킬 수가 있어요. 시간을 초과해서 결합을 시킬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억울함이 있다는데 과연 우리가 첫째 시간 이론에 의하면 억울함이 생기지 않아야 돼요. 그럼 생기는 겁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뭐로 세우느냐 하면 ‘입법자’ 같은 말로 ‘판단자’로 행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과 부인을 해도 우리는 내 잘되기 위한 입법자, 입법이라 하는 것은 행정은 입법인데 법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없는 법을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법을 새로 만들어요. 입법이죠.

그 입법 행위가 내가 입법을 해요. 입법을 하게 되면 법이 생겨버리면 법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정의 그리고 정의로움 그리고 선을 의미하거든요. 진리. 그럼 입법자가 누굽니까? 내가 입법자가 되지요. 그럼 입법자 만들었으니까 누가 만들었어요? 누가 정의롭다? 나는 항상 정의롭고 나는 항상 선하고 나는 항상 진리답고 나는 항상 정당한 거예요. 완벽한 타인이지요. 타인.

이럴 경우에만 억울함이 발생되는 거예요. 억울함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자식들 10명이 있는데 그 애들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늘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 자식이니까 내 자식을 통해서 타인이 고통 받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했어요. 그 내용만 봐도 욥이 고난 받을 짓이라고 욥이 감히 생각하지 못한 거예요.

욥은 자기가 입법자로 여기지 않았고 판단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판단은 주님이 알아서 할 거라고 시작을 했어요. 언제까지 그랬습니까? 자기 몸이 고통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친구들이 와서 자기에게 해당되지도 않는 상황을 가지고 마치 자기를 그런 식으로 몰아세울 때에 여기에 즉각적인 반응으로 뭐냐, 갑자기 없던 입법 요소가 튀어나와서 강력하게 펜스가 되어가지고 그쪽에서 날아오는 불화살을 나의 정당함으로 강력하게 방어에 나섭니다.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랐던 겁니다. 앞으로도 70, 80 돼도 몰라요. 성령께서 미리 당겨서 봐버립니다. 너는 이미 죽었고, 왜 죽었느냐, “니 하는 짓거리가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짓거리다. 니가 죽는다는 것은 니가 과도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너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은 원래 가는 코스다.” 라고 분명하게 주께서 언질을 주게 되어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언질을 줍니다.

누가 입법자냐, 누가 판단자냐 하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만약에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전부 다 자기 안 보고 앞에 장로 보고 있는데요. 전부 다 봅니다. ‘헌금 좀 했다고 니 나보고 놀렸지? 니 고3이라고 교회 안 보낸다고 믿음 있는 가정이 애 교회 안 보낸다고 니가 뒤에서 험담했지?’ 전부 다 봐요. ‘교회 놀이터에서 놀 때, 우리 애 밀었잖아.’ 뭐 이런 것까지. 괜찮습니다. 해놓고는 잊지를 않아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아요. 잊을 리가 있습니까?

거미의 왕국에 거미줄 하나 떨어졌는데. 자기 왕국인데 어떻게 잊어요. 매일 신경 쓰는 게 내 왕국 관리인데. 내 왕국 인테리어 하기 바빠요. 리스칠 하고요, 데코레이션하고 이리 하는데. 자기 관리하기 바쁜데 뭐. 남의 차 박은 건 생각 안나요. 지 차 박은 건 생각나지.

내가 입법자니까 입법자마는 외부에서 무슨 욕을 하던 내 내부에서는 내 정당함에 대한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법을. 만들어낼 때 성경말씀 가지고 만들어내요. 주여, 이것도 믿고요, 이것도 지켰고요, 전에는 못했는데 성화돼가지고 이것도 하고요, 계속해서 자기 정당성에 근거할 수 있는 것만 재다 쫙 해요. 그게 보편적인 것이 뭐냐, 기도해서 복 받았다는 이야기, 교회에서 계속 내놓는 간증들 그런 겁니다. 어려웠는데 기도하고 회개하니까 복 받았다. 그런 거 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욥처럼 똑같아요. 나는 이 정도로 억울할 정도로 나쁜 짓은 한 기억이 안 납니다. “주님, 어쩌려고 저를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제가 주님 앞에 무엇을 그렇게 나쁜 짓을 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떤 여력도 다 없어졌습니다. 이러하면 저는 못 믿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믿지 마라에요. 왜? 안 믿는 게 니 본성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안 믿는 자를 구원해요. 주께서는. 믿는다는 것은 지가 믿는다는 이 법을 만든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법을 만들어 놓고 믿는 사람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이러고 따지는 거예요. 그게 마귀적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억울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제 이야기 이론에 의하면 억울하다 하는 것은 평소에 주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관심이 없는데 억지로 관심을 주시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처음에 야곱은 내편이지요. 내편은 구원 못 받습니다. 누구 편 되어야 돼요? 하나님 편 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항상 인간은 내편이에요. 아까 이론대로 하면 자아가 있음은 어떤 타자, 타인이든 전부 다 나를 뭐로 만든다? 나의 세계의 지배권을 행세해서 나의 동질성에 합류시켜 버리지요. 나의 세계에 다 집어넣어요. 왜? 내편은 깨지면 안 되니까. 나는 내 편 때문에 내가 사니까. 이걸 어떻게 인위적으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강제적으로 성령이 와버립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갑자기 처음에는 뭐냐, 억울함이 생기는 거예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너무 심합니다.” 억울하다는 말은 그 순간에 뭘 안다? 자기가 나를 위한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한 율법이어야 되는데 이게 누굴 위한? 나를 위한 율법으로 장착되어서 마치 바깥으로 위장하기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인 양 철저하게 내가 거짓말 쳐가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 야고보서4장 13, 14절 한 번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 앞에 형용사가 붙어있지요. 안개 앞에. 없어지는. 우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어지는 이니까 우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어지고 있는 동사니까, 없어지고 있으니까 나라는 명사는 사실은 사라지는 동사로 해체되지요. 어떤 동사로? 점점 닳아지고 있는 거예요. 양초 같아. 점점 더 없어지고 있어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했잖아요. 우리가 죽게 되면 아예 안 산 게 된다고요. 너무나 냉정한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에요.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사람 되어 버려요. 우리는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내가 안 태어났다고 못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망상가인 거예요. 내 본질과 내 행동에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겁니다. 주님이 규정한 것과 내가 나를 규정한 것과 차이나도 너무나 차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짜에요. 가짜고, 구라고, 거짓말이고. 맨날 거짓말 때리는 거예요. 왜냐? 맨날 나는 내 위주로 살아가니까. 내 정당성을 변호하고 방어하는데 급급하니까. 전부 가짜인 거예요. “아휴, 그럼 가짜끼리 우이 살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한50년 지나면 다 없어져요.

여기 어제 눈 왔잖아요. 오늘 낮에 눈 다 녹았어요. 저 같으면 우리는 녹아진 눈이에요. 참이슬이나 이리 된다 말이죠. 없어질 걸 왜 만들었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를 통해서 악마의 속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냐, 악마가 이미 쥐고 있으니까. 우리는 입법자, 법을 따로 챙기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법은 하나님을 위한 법이 아니고 나 살려달라고 나 천당 보내달라고 버티는 법이에요. 이게 법이. 그게 바로 마귀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억울함을 발생시켰을 때에, 이 억울함이 있을 때에, 이 억울함이 이게, 억울하다 하는 것은 나쁜 거죠. 지가 뭔데 억울해요. 나는 개입니다. 하면 되는데. 그게 입으로 나오는 것하고 현실하고 안 맞다 이 말이죠.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해놓고는 개라고 했으니까 다시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또 버티는 이게 인간이거든요.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계속 내뱉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냥 맡기세요. 오늘 이 집에 시계를 보니까 이 시계가 오늘 말씀과 딱 부합이 되네요. 앞에 시계 한 번 보세요. 시계 틀이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틀은 없는데 움직이는 시침 꽂혀있고 숫자는 본드로 붙였는지 돌아가면서 붙였지요.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뭐가 없어요? 나의 세계가 없어요. 나의 세계의 망상 자체를 손을 놓으라는 뜻이에요. 니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살아요. 바위 있으면 피해가고, 못가면 뒤돌아 가면 그만이에요. 하더라도 그 바탕 자체가 주님이 일구어 나가는 세계에요.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틀이 나라는 시계 틀이 따로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주께서 쓰시는 대로 그냥 있는 곳에 가면 돼요. 어디가든지, 부산가든지 살면 되는데 “아니야, 서울로 목표를 해야지.” 갑자기 목표가 생기고 목적이 생겨버려요. 사람이 힘이 들 때 첫 번째 현상이 뭐냐 하면 목표가 생긴다는 게 현상이고. 둘째는 그 목표를 위하여 목적으로 나간다는 게 문제에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이게 악마로 가는 지옥으로 가는 삶입니다. 책 한 번 읽어보세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그거 지옥 가는 책이에요. 전부 다 시험 드는 거예요. 왜 시험 드느냐 목표가 있기 때문에 시험 드는 거예요. “아휴, 오늘 이 정도 하려고 했는데 일이 안됐다.” 왜 시험 들었어요? 이게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거예요. 누가 만들래? 누가 세우래? 안 세웠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면 매일같이 목표 없고, 목적 없는 날은 없어요.

주께서 우리 성질대로 그대로 드러내고 그 다음 매일같이 그걸 억울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 작용을 주변의 상황을 통해서 계속 줍니다. 그 주변 상황이 누가 배치되어 있느냐 마귀 들린 사람들로 쫙 배치가 되어있어요. 산에 도 닦으려 하지 마세요. 그냥 시장 바닥에 살아야 돼요. 거기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손님이에요. 그분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주먹거리고 난리 납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어요.

날마다 만들어 내는 그 꿈과 계획이 늘 주위의 사람으로 인하여 강제로 좌절되게 만드는 역할을 그들은 충실해야 돼요. 그게 바로 13절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자, 장사하면서 이득을 보겠다고 했는데 그게 좀 이렇게 시원찮고 잘 안됐다 치면 질문은 이겁니다. 이거 누구 때문에 장사 안 된 거예요? 요게 제 질문입니다. 백종원 때문에? 골목장사 안된 거예요? 누구 때문에? 아니면 문재인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노무자는 데모해서 그런 거예요? 김정은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아니면 미국과 중국 무역 분쟁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세상은 경제구조로 짜여 있거든요.

이리 생각하면 제일 간단합니다. 공사 중에 있는 지하1층부터 있는 콘크리트 작업하고 철근 작업하잖아요. 처음에 단단한 콘크리트하고 거기다가 2층 지으려면 아래층에 철근해서 콘크리트 작업해야 되잖아요. 요걸 경제로 봅시다. 한쪽이 넘어지면 한쪽의 비중이 분산되기 때문에 이쪽이 같이 넘어져요. 세계경제라 하는 것은 이리 된다고요.

촌에 오이 농사하는 사람이 갑자기 오이 값이 내려갔다. 분명히 다른 데서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갑자기 남편의 직장이 구조조정 당한다. 뭔가 치고 들어온 거예요. 혼자 조용히 살림만 하고 살란다. 이래가지고는 그 수입이 안 들어와요. 전부 다 1층의 구조가 전부 다 연결되어있다 말이지요. 이걸 경제학자나 상식 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렇다면 장사가 안됐다. 누구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자기 때문에 안 된 거예요? 자기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남들 때문에 안 된 거예요. 나라가 대표적으로 조정을 못해서 그런 거예요.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뭘 포기 못한 거예요?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포기 못한 거예요. 왜? 자기는 뭐하기 때문에? 자기는 이 경제가 자기 장사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정당함이 손실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깨끗하고 자기는 더 욕심내지 않았고. 보통 중소 기업하는 사람이 제일 힘들어요. 새벽에 나와서 저녁까지 해요. 사장은 제일 일을 많이 하고 제일 많이 노는 농땡이는 초자가 제일 농땡이고. 사장부터 제일 힘들어요. 중소기업 같은 경우는 제일 힘들다고요. 보통 가게해보세요. 직장생활은 9시부터 하면 되지요. 치킨집은 하루 14시간해요. 집에 못 있어요. 나가야 돼요. 월드컵할 때는 밤샘합니다. 주문배달 때문에. 왜? 내거니까. 내가 사장이니까.

내년도 사장되려면 내가 지금 잠이 옵니까? 바깥에 가게에 나가야 되지요. 몸 버리고 난리나지요. 내가 왜 살아야 됩니까?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살아야 되지요. 그럼 남은 왜 죽어야 되지요? 부당하니까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선악구조입니다. 선한 사람은 오래 살고, 악한 사람은 일찍 죽어도 괜찮고. 음주운전해가지고 사고 나면 사형시켜야 돼. 내가 대통령되면 음주 운전하는 사람들 3진제도. 그거 필요 없어요. 제일 간단한 방법 있습니다. 그 사람 차를 폐차시키면 돼요. 벤츠가 되던 트럭이 되던 그 즉시로 “예, 예, 집에 편안히 계세요. 차는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해가지고 폐차시켜가지고 폐차 값 십만원주고 끌어 보내면 돼요. 실제로 그렇게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태리에 있는 소곡?이 그렇게 해요. 음주 운전 될 리가 없지요. 차가 날아가니까. 최고 좋은 방법이에요.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가 입법자가 되기 때문에 입법이 법을 세울 때는 항상 누구는 마땅히 정당한 거예요? 법을 누가 세워요? 내가 세울 때, 누구는 이유를 불문하고 항상 뭡니까? 내가 정당해요. 내가 만약에 음주 운전 3번을 걸렸다 합시다. 그럼 나보고 음주 운전 법을 세우라 하면 뭡니까? 10번을 걸려야 벌금50,000원. 그리 세울 거예요.

왜냐하면 그래야 아직까지 7번 남아있으니까. 법을 누가 세우느냐에 따라서 누가 정당하냐가 되는 겁니다. 국회의원들 자기 세비를 올린다 하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들이 입법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들이 OK하면 그냥 월급 올라가는 거예요.

입법자라 하는 것은 기준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선악과 지식을 알았다. 왜? 꼬아? “하나님, 나는 선과 악을 알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 싫어요?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내가 하나님 되렵니다. 싫어요?” 하나님 앞에 대드는 모습이에요. 악마의 모습입니다.

자, 강의를 처음부터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을 보는 이유가 지금 성경 보는 내가 이걸 봄으로서 지금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런 이야기했지요. 자, 발전한다는 말은 뭡니까? 내가 이 법을 가지고 조리해가지고 나의 정당성을 더욱 단단히 굳히기 위한 새로운 법을 또 하나의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연못 속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호미곶에서 손이 올라와가지고. 진짜 호미곶 보세요. 해뜰 때 찍으면 손 사이에 해가 있어요. 호미곶이 손이 올라와가지고 나를 잡아당겨버리지요. 이미 니는 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니가 하는 모든 것은 니 일이 아니고 다 주의 일이에요. 말씀의 일이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죽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야 될 운명입니다. 그냥 사라지면 안 되지요. 왜 사라져야 됩니까?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왜 정당하지 않는 이유가 입법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판단자가 되고 입법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장사는 잘 되어야 되고 남은 망해도 괜찮다. 왜? 입법자로 보니까 나는 오래 장사해야 될 가치가 있고 니는 내 장사 앞에서 사라져도 마땅한 나보다는 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개인의 동질성에 항상 인간은 거기서 집착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고칠까요? 말까요? 어디 고칠 수 있습니까? 안 고쳐지지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구원은 이걸 드러내는 겁니다. 들춰내는 겁니다. 제가 아까 식사하면서 이야기했는데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오늘 누가 십자가마을에 질문했지요. 답변했다 했는데. 질문이 뭐냐 하면 “ 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성령을 소멸치 말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할 때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그것은 독자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기를 어떤 가장이 있는데 그 가장이 보기에 자식이 항상 밤10시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밤10시 이후에 들어오면 내 자식 아니다.” 라는 선언을 해버렸다 했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자식이 들어올 때는 9시에 들어올 때도 있고, 10시에 들어올 때도 있고, 11시에 들어올 때가 있더라도 그 자식이 계속 자식 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내가 만든 입법, 내가 만든 기준 말고 우리 아버지는 밤10시 되면 자식 아니다. 하는 기준이 계속 남아있는 채 11시에 들어와도 괜찮고 12시 넘어서 들어와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내 기준이 빠지고 누구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버지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에 늦게 들어와도 아버지 기준이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그야말로 손이 내밀어서 나를 잡아올 때는 그런데. 만약에 성경을 그냥 내 잘남으로 보려고 보게 되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니까 스스로 성령을 소멸했다. 안 했다를 결정하는 입법을 누가 제정해야 돼요? 내 행동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그걸 제정을 해야 된다고요. 그리고 혹시 성령을 소멸하더라도 다시 성령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내가 법을 만들어요. 일방적으로. 그걸 반성기능입니다. 회개기능이라 하거든요.

내가 스스로 반성해서 다시 원상 복귀할 수 있는 그런 법까지라도 내가 스스로 내가 만들어버려요.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만들면 뭐합니까? 사라지는데. 그 만든 법이 진짜 하나님 뜻에 맞으면 안 사라져야 되지요. 그 자기 사라짐과 동시에 법도 안개가 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어차피 사라질 거 내가 누구냐는 알고 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아~ 내가 주님께서 나를 입법자, 선악적인 체계에 서 있다고 나를 죽이시는구나!’ 라는 기준이 선악을 아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창세기2장의 기준이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요. 이미 주의 백성 맞습니다. 그래서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었다고 쳤는데, 오히려 아직 안 죽었다 하지만.

여러분, 오래 살고 숨 끊긴다고 해서 죽음이 아닙니다. 2018년도 있는데 2052년 죽었다 칩시다. 그런데 이게 죽음일까. 죽음이 아니에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죽음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어도 안 죽어요. 다시 의의 부활로 악의 부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죽으면 사실 속 편하지요. 죄 짓고 죽으면 제일 편하지요. 사람 죽이고 난 뒤에 사형 당하면 제일 편해요. 자기가 사형하는 것은 자살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자살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살해서 죽어도 다시 일으켜 세워요. 주님 뒤끝 있습니다. 한 번 인간 됐잖아요. 끝났어. 우리는 계속 인간되어야 돼요. 우리 소관 아니에요.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끝까지 다 날아가야지. 영화를 끝까지 봐야 돼요. 끝까지. 반전이 있어요. 끝까지 다 봐야 돼요. 다 보고 난 뒤에 다 본 내용 시나리오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잠시 우리는 억울함을 느껴요. 욥처럼. “이럴 수 없습니다. 내 인생 망가졌습니다.” 하면 “니 인생 어디 있어?” ‘아! 그렇지. 내 인생 없지.’ “이건 내 월드 내 테두리입니다.” “니 봐! 시계 봐! 니 테두리 없어. 니는 그저 숫자판이야.” 널려있는 숫자판 중에 하나에 불과하지요. 초침은 주님이 초침이고, 주님이 알리는 시간을 지정하기 위해서 너는 거기에 7자로 박혀있을 수도 있고 12로 바뀔 수도 있고, 집사님은 4로 박힐 수도 있고. 그건 죽을 사자인가. 그럼 3으로 바꿔드릴게요.

각자 다 달라요. 다른데, 주님을 하시는 일을 지향하고 그것을 증인하고 증언하고, 그걸 드러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런 관계가 되려면 우리는 이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름을 아예 안개라 칩시다. 안개. 그것도 멋진 안개가 아니고 칙칙한 밤안개. 현미가 불렀던 밤안개~ 칙칙한 밤안개가 되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는 운명은 확정적이라는 사실을 평온하게 합니다. 평화롭게 만들어요.

순간, 순간 억울한 것은 인간 개과천선하려다 일부러 마귀가 와서 그렇게 북돋은 거예요. 되지도 않는 게 이만하면 됐습니다. 까불다가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말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희한한 일이 좋은 일 하나 있잖아요. 그러면 좋은 일이 있으면 혹 나쁜 일 있어요. 나쁜 소식부터 먼저 할래, 좋은 소식부터 먼저 할래 그렇듯이. 항상 이렇게 하도 경험했기 때문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불안, 불안해요. 이쯤 되면 한 건 쯤 터지게 되어있는데..., 안 터지면 또 안 터지는 대로 불안해. 마이 월드. 나의 세계를 계속 고수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12절에 봅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뭡니까? 하나이시다. 17절에 보면 하나, 주님밖에 없어요. 그 분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또 그렇다고 구원 안 받으려고 애 쓸 필요는 없어요.

구원은 뭐냐 하면 내편에서 주님 편으로 옮겨가잖아요. 내 위주에서 내 이력 없어지고 주의 일로 가게 되면 주의 일에 대해서 동의하고 참모하게 되면 그게 주의 백성입니다. 사실은 주의 일 같으면 우리는 주는 남의 일이잖아요. 보통 우리는 남의 일에 대해서 나보다 더 중요시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맞는데, 이 본성을 이겼어요. 성령께서.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에서 끄집어 내줘가지고 주님의 본성 속에 집어넣어 놓으니까 우리의 안목이 주님의 본성 쪽에서 물끄러미 전에 있던 내 쪽을 바라보는 거예요. “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것을 바라보는 안목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구원 받아야지. 하다가 이제는 구원이고, 멸망이고 간에 이건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편하게 인정해요. 그걸 아주 벌벌 떨면서 인정하면 안 되고 만약에 믿음 없이 성령 받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것 밖에 안 주어집니다.

공포에요. 공포. 성경을 보면 볼수록 공포스럽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와 버릴 자를 이미 정해져있다. 로마서9장.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윽! 그러면 내 노력도 안 먹힌다는 말이지. 내 노력도 안 먹혀요. 내 열성과 마음 낮음도 안 먹히지요. 그러면 내가 50년 교회 다녔는데 아무 소용없지요. 그 소용없다는 걸 성령 받은 사람은 이제야 종을 놓아주시는군요. 하고 속편하게 생각하는데. 그 병원이 속편한 내과라 하는 거예요.

속이 그렇게 편한 거예요. 마치 얹혔던 것이 쏵 내려가는 것처럼. ‘아이고~ 내가 쓰잘데기 없는 내 일이 없는데 내 일이라고 우겼구나!’ 생각하는데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데 편하게 생각하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내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격분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거 뭐 아마 예정론인데, 이걸 예정론이라 이야기하는데 아마 다른 해석이 있을 거야.’ 다른 해석을 일부러 찾아가요. 그러니까 신학자들은 안 믿는 사람을 위해서 다른 예정론을 만들어놨어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예정된 건 아무도 모르지만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 예정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런데 그것도 문제 있어요. 열심히 사는데, 열심히 살았다. 안 살았다 누가 입법합니까? 누가 판단해요? 본인이 본인의 정당성.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본인이 법 세웠는데 그 법은 소용없는 법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세웠기 때문에 본인은 반드시 천국에 넣어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주님이 입법자가 되면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이게 구약에 사무엘상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아지게 하기도 하시고, 숫자가 2가 되게 하시고 6으로 가게 되어 6으로 밀릴 수 있고, 이게 밀린 게 아닌지 모르지만. 6에서 8이 될 수 있고 10될 수 있고. 이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내 일은 없으니까. 장기알 가는대로 가야지요. 피동적으로 옮기는 대로 가야지요. 갈 수밖에 없어요. 옮기면. 이리 옮겼다가 또 가면 가야지요. 동탄 살다 이리 옮겨놓으면 좋겠다. 왔다 갔다 마음대로 하겠지요.

그러니까 15절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너희라 하는 것은 성도를 말합니다.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할 것이요. 아! 이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쥐포 뜯듯이 완전히 자기 마음을 해체시키는 사람 없습니다. 마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안 되지만, 이게 기준인 것을 우리는 감사히 받아줘야 지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심지어 내 뜻대로 되도 내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되어야 된다는 것. 명심해야 됩니다. 내 뜻이 되더라도 이건 진짜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는 식이 돼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애가 평소에 반에서 한 중간쯤하다가 요번에 한 2등쯤 올랐다. 우리 애가 실력이 이 정도구나! 하지 말고 이거 뭐 지가 뒷걸음질하다 뭐 하나 잡았구나! 우린 애는 내 머리 닮아서 애는 공부 잘하는 게 안 돼. 그런데 그 애가 특수할 때 뿔이 나가지고 전교1등 했네요.

“엄마, 전교 1등 했어요.” “그래, 될 수가 없어. 니는 내 머리를 닮아서 될 수가 없어.” 그런데 그 애가 서울 의대 들어갔네. “이거 뭐 출제 문제가 잘못 돼서 그래.” 항상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뭐 인위적으로 마음을 낮추고 할 거 없어요. 왜? 나를 아니까. 주께서 서울 의대 들어가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게 뭐 대단한 학교는 아니지만. 어차피 돼봐야 고생하니까. 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엄마가 저렇게 복음으로 살고 마음을 낮추니까...” 마음을 낮춘 적이 없다니까. 뭘 마음을 낮춰요.

실제로 이야기할 뿐인데 뭘 마음을 낮춰요. 마음을 낮추면 입법자가 되는 거예요. 입법자. 나는 마음 낮아졌다. 나는 지금 마음을 낮췄다. 완전히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정숙하게. 릴렉스! 릴렉스! 그런 짓 한 거 아니거든요. 있는 거 있는 대로 할 뿐이에요. 내가 살았다. 이건 기적이에요. 이건 잘못된 거예요. 어제로 끝나야 돼요. 오늘 또 살면. 이상하게 나 왜 살지?

이건 마음을 낮추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니까. 왜?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아직도 주의 뜻이 어느 쪽이다? 사는 쪽으로 결정한 거예요. 오늘까지만. 내일은 몰라요. 오늘 오후4시까지만 그래요. 5시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트럭이 와서 박을지 그것도 몰라요. 그 다음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잖아요. 항상 우리 내부에는 항상 없어질 수 있는 요소가 우리에게 꽉 차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득 차있어요. 없어질 수 있는 요소가.

그래서 이렇게 하면 무슨 목적을 이룹니까? 그게 바로 감사와 온유와 화평이란 열매가 맺히지요. 성령의 열매. 온유와 감사와 양성과 형제우애. 이런 열매를 주께서는 목표로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동안 누가 방해했어요. 내가 정당했고 내가 입법자 되어서 한 겁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더 살아야 마땅하다고 우겼던. 주님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매일같이 방해하는 겁니다.

이거 알았다고 해서 인간 바뀌는 게 아니에요. 오늘 오후도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미 개입했다는 것. 이미 말씀으로 실시해서 내가 율법을 안 만들었다는 이 가장 단순한 것. 오늘 제목대로 “너 빠져!” 라는 이것이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좋은 기쁜 소식일 수가 없어요. 니 인생에서 니가 좀 빠져! 남한테 엮이지 말고. 남 믿지 말고.

왜냐, 주님만 믿고 니는 빠지고 그냥 놀러왔듯이 죽었는데 관 좀 열고 놀러와 가지고 “아이고~ 내가 이렇게 살았어.” “아이고~ 내가 열심히 낼 필요 없습니다. 주의 일인데.” 이렇게 어슬렁거리듯이 여러분, 남은 인생을 그냥 소풍 왔듯이 그렇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떠나야 될 세상에 좋은 구경났다는 식으로 편하게 살도록 주께서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81214b야4장11절(너 빠져)-이 근호.hwp (80.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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