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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3 10:54:52 조회 : 176         
191강-창 49장 19-21절(갓과 아셀과 납달리에 대한 예언)190612-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59.116)
191강-창 49장 19-21절(갓과 아셀과 납달리에 대한 예언)1906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19-121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19-21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여기 나오는 갓, 아셀, 납달리, 표현할 때 전부 다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어요. 움직임을 묘사한다는 것은 소유가 목적이 아니고 움직임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반대가 되어 있어요. “부지런히 일하라. 그러면 그 결과로 너의 것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거든요.”

나의 것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동사가 아니고 명사가 되는 겁니다. 특정 사물, 물체를 겨냥할 때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명사를 사용해요. 고생했더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내가 이런 명사가 되었구나, 이런 인물이 되었구나, 이런 대상이 되었구나.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갑니다. 먼저 규정을 해줘요. 너는 내 백성이다. 명사지요. 내 백성이라면 그 백성 속에서 지옥 가는 백성이 아니라 천국 가는 백성으로서의 움직임이 나오게 되어 있다. 동사지요. 움직임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동사가 될 때는 무엇을 잊어야 되느냐 하면, 그 명사를 잊어야 되는데 명사를 잊는다는 말은, 내가 나 됨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것으로 종결되는 내 것은 없고 내 것이라 하는 것은 그 종결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 나의 모든 모습의 종결이에요. 나의 가치의 종결입니다. 주님 것 빼앗아 온다는 뜻이 아니고 주님한테 다 빼앗기고 주님 안에 있는 그것이 나의 최종적인 명사적 모습이 나의 위치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말씀드려서 여기 이 동사라 하는 것 두 개의 명사 사이에서 동사가 번져 나옵니다.

하나의 명사는 뭐냐 하면, ‘나는 나다.’ 나는 나다.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은 다 여기 있는 이 명사처럼 굳건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 나라는 명사를 빛내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행동을 해야 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우리가 흔히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명사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러나 또 하나의 명사가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이 야곱의 모든 예언은 갓이나, 아셀, 납달리라는 그 개인을 위해서 주어진 예언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스라엘전체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명사가 돼요. 나라는 명사는 포기되고 이스라엘이라는 큰 명사에 포함이 되면서 전류가 흐르듯이, 전류가 여기서 나와서 저쪽으로 이동하면서 나오는 그 움직임이 오늘 본문에서 예언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은 어렵게 했지만 쉽게 하면 피자 판이라고 생각합시다. 한판 전체가 이스라엘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발린 치즈, 또는 버섯, 그 위에 올려 진 고구마조각 그런 것, 얹어놓은 소시지 그런 것. 소지지 먹으려고 피자 먹지 않거든요. 그러려면 소시지 따로 사먹으면 되지요. 소시지라는 명사가 더 큰 명사, 피자 판이라는 명사로 전개하면서 거기서 변화되는 움직임이 동사가 되는 겁니다.

이 동사를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피자 판 이야기조차 어렵다면 더 쉽게 말해서 매스게임이지요. 북한에서 많이 하는 것. 전부 다 각자 나름대로의 어떤 색깔의 카드는 쥐고 있지만 본부석에서 보게 되면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라든지 글자, 숫자가 되는 겁니다. 그 숫자, 그림 보겠다고 자기 얼굴 가리는 판을 내리고 옆을 쳐다 보면 안보입니다.

양팔 올리라는 지시가 대번에 들어오지요. 우리 현대인은 어떻습니까? 남이 잘났나, 내가 잘났나 싶어서 자기 판을 내리고 옆을 곁눈질 하게 되면 우리는 상당히 독자적인 행동이에요. 나라는 이 덩어리, 명사덩어리, 실체, 물체덩어리, 이것 하나 지키겠다고 소소한 나를 위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오늘날 이 세상 모든 교육, 모든 경쟁, 과학, 모든 것이 다 그래요.

20세 이상 월드컵 결승 올라갔다고 지금 온종일 떠들고 난리에요. 자기조각, 자기 자신의 명사, ‘아 대한민국’이라는 명사를 위해서 몸부림치지요. 그러다가 경제 안 좋으면 캐나다 이민 가서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어버려요. 캐나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을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직 나만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변화가 없지요. 다른 큰 명사덩어리, 최종 피자 판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못 보인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 더 큰 덩어리에 결합,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 하나 있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고립이라고 하지요. 과연 우리는 고립되어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냐?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고집이냐, 아니면 신앙이냐, 하는 겁니다.

고집은 나를 믿는 것이 고집이지요. 신앙은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신앙이에요. 나는 떠나야 될 장소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계속 내가 나를 붙들면 나는 나와 더불어서 망한다는 것, 그런 인식이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라는 명사, 나라는 명사.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동사는 나를 버리고 주님 앞에 합류하는 것. 그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 안에서 구원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의 구원. 사도바울의 편지가 신약이라면 지금 우리는 구약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고 어떤 식으로 오늘 본문말씀대로 우리가 합치될 수 있느냐?

노력해야 되는가? 애써야 되는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성은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그런 인간을 물려받았어요. 그런 성질을. 절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함부로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남에게 구제를 하고 남에게 봉사를 할지언정 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천국 가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신 거예요. 우리는 내 문제를 내가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는 주님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나의 근원적인 문제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은 나 자신을 주님의 일에 방해된다고 문제 삼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너 그대로 있으며 안 돼. 내가 너를 다룰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박격이라는 것은 공격, 반격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지요.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기름진 것이라는 것은 풍족한 농사지요.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왕에게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될 것이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상당히 속도가 빠르다는 뜻입니다.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뜻이 아니라 빠르게 움직인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아름다운 소리라 하는 것은 최종적인 결말이 난 상태에서 기쁨의 소리, 노래를 부른다는 겁니다. 이런 예언, 갓 지파에 속한 사람, 아셀지파에 속한 사람, 납달리지파에 속한 사람이 지킬 수가 있느냐? 그들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킬 수가 없는데 예언은 지킨다고 되어 있어요.

예언은 하나의 명사로 보고 못 지키는 것은 또 하나의 달라져야 될 옛날 명사로 본다면 이 움직임은 이들의 솜씨나 이들의 어떤 능력이 아니라 갓지파, 아셀지파, 납달리지파를 문제시하고 그게 너에게 문제 있다고 찾아오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들은 이 예언과 합치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하나님의 예언들, 달리 해서 야곱언약의 예언들, 또 달리 말하면 아버지 야곱이 자식들에게 한 예언인데 이것은 인간적인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예언인 겁니다. 이런 예언의 방식은 아브라함 때도, 네 자식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그 차원과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아기도 못 낳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를 낳을 것이라고 한 그런 예언.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 먼저 말씀먼저 제시되는 그런 상태처럼 오늘 본문도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제일 좋습니다. 나를 위한, 이것이 현재 나를 위한 명사, 나를 위한 예언이 아닌 것이 나에게 찾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면 바르게 됩니까? 내가 원하지도 않고, 내가 예상치도 않고, 내가 기대하지도 않은 어떤 목표점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쳐들어왔을 때 그 때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을 반듯하게 살아가야 된다는 모든 부담 같은 것은 일거에 다 날라 가버립니다. 사람이 일을 하든, 놀든 간에, 또는 공부를 하든, 뭘 하든 간에, 또는 스포츠를 하든, 경기를 하든지 간에, 제일 부담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이 목표를 내가 달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가 원하지도 않은 목표인데 일방적으로 그 목표를 들고 나에게 찾아와서 “네가 이 목표달성에 네가 기여할 것은 없다. 네가 신경 쓸 것은 하나도 없어. 가만히 있거라. 내가 이뤄줄게.” 이렇게 한다면 정말 우리는 그 목표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돼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인도할 때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지척까지 다 따라왔어요.

애굽군대가 공격할까 싶어서 앞에 가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뒤로 갔어요. 뒤로 가서 그들이 못 보도록. 이스라엘백성, 히브리인들이 요단강 건너가는 것을 그들이 못 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급한 상황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에게 원망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죽을 자리가 없어서 집단죽음의 공동묘지를 만들려고 이 곳까지 왔느냐고 원망들을 해댈 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받은 예언은 이렇습니다.

쉿! 가만히 있거라. 네가 가만히 있어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겁니다. 네가 설치면, 막 어떻게 할까 하고 설치면, 설치면 설칠수록 네가 조작한 하나님만 자꾸 상상될 뿐이지 진짜 하나님은 저만치 네가 설치는 것에 다 가려져서 안 보인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거라. 가만히 있거라, 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의미 없다는 거예요.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성도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시거든 뭐든지 하세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시거든.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뭘 하든, 목회를 하든, 설교를 하든, 잠을 자든, 무의미하다고 여기거든 뭐든지 하세요. 왜?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사업하면서, ‘이것은 주님이 주신 사업이라 의미 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악마에 지금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사업 잘되어야 영광 돌려. 사업 잘되어서 십일조 많이 바쳐야지.’ 고 3쯤 되어서 교육방송 들으면서 ‘이거 주께서 듣게 하셨구나. 이거 의미 있다.’ 이러면 그거 공부 안돼요.

‘서울대학 간들 무슨 의미가 있고 의사된 들 무슨 의미가 있지? 목사님 말씀대로 의미 없을 때 일하라고. 그래, 공부나 하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뭘 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떨어져도 의미가 없고 합격을 해도 의미가 없고, 수능 빵점 맞아도 의미가 없고 만점 맞아도 의미가 없고. 의미가 없기 때문에 뭐든지 부담 없이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여행갈까 말까, 갈까 말까? 견주지 마시고 언제 가야 되느냐 하면, 여행 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때 가시고, 여행 가봤자 안 가는 것이 낫지, 하고 안 가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거든 안가면 돼요. 이래도 무의미하고 저래도 무의미하고. 인생사는 것 뭐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가만히 있어라, 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기대가 있을 때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은 악마의 늪에 빠진 겁니다. 네가 설정한 목표 달성하려면 성경 더 많이 봐야 되고, 기도 더 많이 빡세게 해야 되고, 교회 충성해야 되고, 봉사 많이 해야 되고. 이것이 악마로부터 계속해서 부담을 주는, 나를 지키기 위한, 나라는 명사를 위해서 그 명사를 지키기 위한 동사, 나를 위한 동사가 계속 튀어나와요.

이것은 아무리 사업 잘돼도 주님의 나라에 도달되지를 못합니다. 그 동사가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안돼요. 그리고 인생을 잘 살았니 못 살았니 내가 평가하고 내가 내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밖에 안돼요. 똑바로 해라 인간아. 내가 나의 멱살을 쥐고 “네가 의미 있게 살아야지.” 하고 내가 나에게 닦달 내는 짓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백날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19절을 봅시다.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이것이 하나의 예언이거든요. 다시 제가 걱정되어서 이야기합니다. 이 예언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하늘나라의 피자 판, 이스라엘이라는 피자 판을 위해서 그쪽에서 나오는 동사에요.

기어이 너로 하여금 이런 일에 연루되도록, 말려들도록 내가 조치한다. 한번 가만 있어봐. 너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봐. 비로소 내가 살아가는 이 길은 내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주께서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거예요.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신이 나에게 찾아온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성경에서 진짜 하나님은, 신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찾아와요. 신과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없어요. 신과 인간 사이에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상대해요. 그것은 이방인들, 이방종교들이 그런 짓 하고 있어요. 상대 못합니다. 말씀이 오는 거거든요. 그 말씀이 오늘 예언의 말씀이거든요. 그 예언의 말씀, 또는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킵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은 성취가 되는 겁니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가 돼요. 지켜버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흠집 내고 호작질 하는 것밖에 안돼요. 날 향한 주의 일에 내가 방해를 놓으면 안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뭘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삶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반대로 그것을 홀가분하게 여기고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아, 나는 인생 모든 것을 알게 되어서 오히려 찬양해야 돼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안 살아도 된다는 사실.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이게 고립이 아니고 자유에요. 이것은 나의 고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목표를 내가 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큰 숙제를 덜은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해야 옳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거든요. 이사를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왜?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그게 무의미하기 때문에. 무의미하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동쪽으로 가도 괜찮고 서쪽으로 가도 괜찮고. 어차피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길을 추격하는 여기에 있거든요. 생뚱맞은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끄집어낸 목표가 아니잖아요. 주님의 목표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목표는 뭐냐 하면, 전쟁에 네가 가담하게 될 것이다. 네가 원치 않는 전쟁에 참여, 참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전쟁이 아니에요. 주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전쟁이 주어지느냐? 우리가 성경을 그냥 상식적으로 보게 되면, 처음에 낙원에 있었는데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낙원에 다시 집어넣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도 조용하게, 고요하게. 그냥 사랑으로 봐줘서 넣어주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아주 편리하게, 간단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 29절에 보면 전쟁, 군대이야기가 나와요. 군대의 박격, 군대의 참전, 전쟁, 이런 것을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폭력이 없이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나와요. 전쟁은 폭력이거든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상상이 안돼요. 어떻게 폭력이 낙원을 성립시킵니까?

폭력과 낙원의 연관관계가 납득이 안돼요. 조용한 것이 좋다고, 조용하게 가면 안 됩니까? 여기서 폭력이라는 것, 군대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놓여 있는 그 상태가 이런 강압적인 폭력, 전쟁 없이는 우리가 빠져나올 수가 없는, 그 정도로 우리가 문제성 있는 속에 푹 잠겨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주님은 아시는데.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조용하게 은혜로 갑시다.’ 우리는 그런 식이에요. 그렇다면 이 폭력은 어떤 식으로 폭력이 되고 폭력에서 낙원으로 이뤄진다면 어떤 절차, 어떤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진행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분명하게 했습니다. 분명하게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통해서, 또는 말씀을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야곱 가정에 있어서 중보자는 누구냐 하면, 요셉입니다. 요셉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어요.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요셉에게 꿈이 오기 전에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독점하기 전까지는 그게 없다면 형제사이에 왜 싸우겠습니까? 싸울 일이 없어요. 유독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고, 특별히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마저 편들어서 꿈에 계시를 줘서 미래상까지 보여주니 형들은 참을 대로 참은 거예요.

너 하나 행복하자고 우리가 불행할 수는 없다. 없애자. 죽이자. 그래서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겁니다. 어떤 여자가 이혼해서 재혼해서 살려고 하는데 전 남편이 자기 애 보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 생각은 뭐냐? 앞으로 자기가 행복해지려면 저 전남편만큼은 죽여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이름이 고유정이라는 이름이에요.

저 인간을 죽여야 내가 행복하거든요. 나라는 명사는 항상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가치를 의미 있게 위해서는 동사, 어떤 움직임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고유정이나 요셉의 형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아요. 같은 피자 판이니까. 전부 다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요셉을 죽였지요. 이미 죽었다고 치고……, 죽였다는 말은 이미 우리 곁에는 그 인간은 두 번 다시 없어. 존재하지 않는다, 부재지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죽었다고 치고 마침 애굽에 가는 상인에게 팔어 먹은 거예요. 그런데 형들은 죽었다고 친 것이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이미 죽은 것이고. 그러면 여기서 요셉의 상은 죽은 자 요셉이에요.

죽은 요셉인데 나중에 그 요셉이 어떻게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요셉의 이미지, 상이 두 개가 등장해요. 요셉이라는 이름의 덩어리, 명사가 두 개가 된다고요. 그러면 이 죽은 요셉과 애굽의 통치자가 된 요셉, 그 덕에 형들과 아버지가 먹고 사는 요셉 사이에 동사가 있을 거예요. 움직임이 있을 거예요. 그 움직임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이 야곱의 예언에 참여된 피자 판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매스게임에 참석했다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에서는 죽은 요셉과 그리고 총리대신 요셉, 아버지 야곱은 그 둘 사이에서 뻥,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라는 것을, 나에게 찾아왔던 그 약속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었다고 여긴 그 없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약속을 다 이루어서 우리 앞에 등장시키는 거예요.

이것은 신약에서 뭐야 같으냐 하면, 십자가에 죽었던 하나님, 곧 예수님이지요, 그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나타난 예수님, 죽은 줄 알았던 그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시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고, 온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분으로 통일되는, 그래서 영광 받아야 될 주님으로 나타났을 때 그 변화, 그 변화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 죽은 자가 부활되었다면 그 동일한 성령이 찾아온 사람들을 가지고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성령이 그렇게 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주신 예언, 또는 야곱 언약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준비한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느냐? 거기에 어떤 절차가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은 어떤 공통적인 절차로 주입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죽었던 요셉이 꿈에 따라서 총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형들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그들은 그동안 못 느꼈던 자신의 죄를 비로소 자각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 자기의 문제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복이에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그 죄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때 그 과정을 그대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사람에게만 진정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약속대로 돌아가는지를,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그들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지만 여기에서는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으로서 신약의 부활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역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로 미리 채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 설교를 잘 따라왔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짐작해야 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언에 대해서 필히 거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짐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번영과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이 예언과는 상관없는 식으로 자기위주로 하나님의 축복을 계산하겠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하면, 나만의 이익과 원래 하나님이 해야 될 그 목표 사이에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곧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여기에 대해서 신명기 33장 20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33장은 뭐냐 하면, 오늘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열 두 지파에게 축복을 하는 대목이라면 신명기 마지막장인 33장에서는 모세가 열 두 지파에게 축복하면서 예언하는 내용이 나와요.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찌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이것은 갓이 맹렬하게 전쟁에 나가서 전투하고 싸우는 일을 계속해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전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갓을 가장 적들이 빈번하게 쳐들어오는 그 지점에 위치하게 만듭니다. 가나안 땅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 변방에, 요단강 동쪽에, 이스라엘 땅과 약간 걸치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 땅은 아닌 곳에 갓 지파를 주둔시켜서 오는 모든 외세에 대해서 죽어라고 갓은 전쟁하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 싸움을 갓 지파가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낙원을 원해요. 그냥 조용하게 사는 것을 원해요. 말씀 없는 것을 원합니다. 남이 나를 집적거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서로 좋게 평화를 이루기를 원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갓을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마구마구 외세와 전쟁하게 되어 있고 갓은 죽기 살기로 전쟁해서 거기서 버텨냅니다.

버텨내면서 그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이러한 팔자, 이러한 운명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전체가 가져야 될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를 우리가 할당받고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느껴야 했던 겁니다. 물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느끼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을 못 느끼고 다음에 전쟁이 일어나면 쉽게 항복해 버려요.

힘이 없어 못하겠다, 무기가 없어 못하겠다, 인구가 적어서, 군사의 숫자가 적어서 못하겠다, 하고 전부 항복해버립니다. 항복했다는 말은 뭐냐? 본인의 목표를 잊어버리고 내 편한 쪽으로, 그냥 상납하면 그걸로 내가 원하는 대로 전쟁은 마감되겠지. 이렇게 자기 편한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기 편한대로.

그러니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과 따로 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목표에 의해서 이제는 이방민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누구와 하느냐? 이 기준에 맞춰서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전쟁을 벌여버립니다. 선지자나 사사를 보내서. 그 다음에 두 번 째,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에서는 아주 기름진 많은 곡식이 나는데 이것은 왕에게 바치기 위함이에요. 이러한 아셀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5장 11절에 보면 솔로몬 때에 완성이 됩니다. 솔로몬 때는 어떤 때냐 하면, 모든 마음이 하나가 될 때에요. 너무 잘 먹고 잘 사니까.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결승에 올라간 그 마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누구 하나 이강인 못한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봉준호 감독 <기생충>이 황금종려상 받을 때는 기분이에요.

역시 최고상 받을 만 하다. 누구 하나 시비 거는 사람 없이 하나가 될 때 그 때 그 하나 됨의 축복은 내가 잘된 것이 아니고 솔로몬의 약속 때문에 잘 되었다고 해서 아낌없이 그 자기고장에서 나는 그 많은 산물을 솔로몬 왕에게 바칩니다. 이것은 우리가 챙길 문제가 아니고 왕이 가져야 합당합니다, 라는 태도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서히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말씀이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가 아니고 전체인데, 갑자기 나라는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처음에는 주님을 찾아와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복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가 그게 몇 개월, 몇 개월도 길다, 하여튼 몇 년도 채 안가서 ‘구원받았는데 슬슬 내 욕심이나 챙겨보자’ 하는 식으로 자기위주, 자기라는 명사를 지키기 위해서 믿는 것은 그저 핑계로 대는 식으로 가버리는 그런 경우와 똑같다고 볼 수 있어요.

세 번째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여기 나오는 이 찬송. 항상 노래라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에서 오는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고요, 그 즐거운 노래 소리, 이것은 왕을 위해서,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노래 부를 때 노래 부르는 사람이, 내 소프라노, 내 알토 어떠냐, 이런 자기찬양 아니에요. 나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를 위한 곡식의 풍성함도 아니고 나를 위한 전쟁의 승리도 아니에요. 처음에는 밀리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반전이 일어나서 적을 물리쳤다는 갓에 주어진 이 역할, 이 사명. 농사 잘 되어서 왕에게 바쳤다는 이 역할, 전쟁이 끝나고서 온통 평화로워서 노래가 절로 나와서 그 노래를 납달리지파가 한다는 그런 역할, 이 모든 것은 각자 본인들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점차 본인들 위해서 가는 식으로 변질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요? 납달리지파가 노래하는 것이 전쟁에 승리해서 노래를 했다는 근거는 사사기 5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4장 6절에서, 납달리군대가 여자사사 드보라를 도와놓고 그 다음에 드보라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부르는 거예요. 그 노래에 보게 되면 이것은, 칭찬은 납달리보고 하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승리로, 그리고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나의 구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전체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그 한몫을 담당했고 그 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에요. 왜? 우리는 죄인이니까.

죄가 뭘까요? 내 편한 것만 생각하는 것이 죄였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목표를 정하시고 찾아오셔서, 네 편한 것이, 네가 행복한 그것이 죄였다. 그것 때문에 너는 악마에 말려들었다. 이제는 네가 해야 될 목표는 네가 정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임의로, 일방적으로 네게 덮쳐준 것인데 그 덮쳐진 목표가 되게 되면 너는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로 인하여 덤으로 구원되었다는 사실, 네가 거기에 참여된 것만 해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어요. 자, 어떻게 이 말씀에 대한 이들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냐, 하고 여러분은 생각할 거예요. 성경에 신약이 없고 예수님 오시지 않고 구약만 있다면 지금 우리는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그들은 옛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해봤자 그것은 성공 못해요.

그들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없으니까 계속 한 번 해보자는 식이에요. 여러분 신앙생활 그런 식으로 합니까? 한 번 해보자는 식이에요? 이미 합격이 아니고 노력하면 합격되겠지, 그런 식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유대인이에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약의 예언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어떤 식으로 연관시켜야 되느냐?

그것은 촌스럽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아이스케키 장사가 있어요. 그냥은 안줘요. 회전판이 있어요. 회전판이 있어서 위에서 돌리고 바늘로 꽂아서 뽑기를 해요. 열 개 하면 열 개 주고, 한 개 맞으면 한 개 주는 거예요. 한 개짜리 판은 제일 넓고 열 개짜리 판은 아주 좁아요. 좁아도 꽂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순진한 생각이고요.

그 판 아래 철판을 붙여놓아서 맞아도 튕겨 나오게 해놨어요. 그 회전판이 구약입니다. 구약 때 열심히 해봐요. 하지만 그 회전판에 열 개짜리 꽂혔다, 한 개짜리 꽂혔다, 그것이 아니고 밑에 아이스케키 통이 있는데 그 통에서 나온 네모난 작대기, 그 작대기 밑에서 진짜 먹을 아이스케키가 나오지요.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이거 백날 찍어봐야 그게 낙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짜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셔요. 주께서 구약에서 이렇게 실패했다는 것을 왜 보여주느냐? 너도 구약적으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선배를 통해서 알듯이 너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소용없어, 그걸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님 혼자 다 해내신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주님이 하셨다, 가 아니라 나는 못하는 것을, 우리가 못하는 것을, 반드시 앞에 이 전제를 해야 돼요. 내 쪽에서 나오는 동사, “내 쪽에서 나오는 움직임 가지고 내가 구원 못 받습니다. 주님의 움직임이 나를 당겨서 내가 주님 앞에서 구원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만 의미 있고 우리는 무의미한 거예요. 앞으로 성도가 인생을 살 때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무의미한 것과 계속 부딪혀야 돼요. 의미 없는 것과 계속 부딪혀야 됩니다. 부딪히면서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감상하면서 즐겁게 보내면 됩니다. 이 세상 어떤 것들, ‘성공했니, 출세했니, 돈 벌었니, 금메달 땄니.’

그 어떤 것들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의미없는 것이고 무의미한 거예요. 그것을 마음껏 보는 거예요. ‘나도 저랬지. 나도 저걸 원했어. 나도 저런 개인적인 것이 목표였었어.’ 그걸 마음대로 감상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자유로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음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새언약, 야곱언약의 완성인 새언약속에 있는 성도의 삶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목표를 정한다는 자체가 이것이 나를 위한 꼼수인 것을 저희들이 인정하게 해주시고 하지만 그 꼼수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나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께서 우리대신 모든 일을 치른 것을 도리어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1강-창 49장 19-21절(갓과 아셀과 납달리에 대한 예언)190612-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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