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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12:13:33 조회 : 87         
37강-엡 4장 14절(어린아이)19081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37강-엡 4장 14절(어린아이)19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궤술이란 거짓을 말합니다. 거짓과 간사한 모든 유혹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눈에 보이는 사람들하고만 상대를 하지요. 상대할 때마다 뭐가 나오느냐 하면, 거짓이 뿜어져 나오고 간사한 유혹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유혹이라 하는 것은 지켜야 될 것을 흐릿하게 만드는 요소에요.

있어야 될 곳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 정신 팔리는 것, 그것이 유혹이라는 겁니다. 그 유혹도 인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14절에 나오는 “우리가”라고 할 때 ‘그 우리가 누구냐? 너는 인간이 아니냐? 너는 천사냐?’ 이렇게 따지게 될 거예요. 인간 속에서 거짓이 나오고, 인간 속에서 주님이 일을 방해하는 유혹이 나온다면, 너는 뭐냐는 거예요. 너는 뭐가 대단하냐고 나올 겁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우리’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난 겁니다. 이중 출생이죠. 성도는 한 번 출생하고 또 출생하고, 두 번 출생한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을 육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두 번째 태어난 것을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고. 육에서 태어난 사람은 결코 사도바울이 말하는 ‘우리’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냥 육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무엇을 하느냐 하면, 우리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 방해하고 현혹하고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자꾸 압박을 가하지요. 그래서 처음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사람이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느냐 하면, 육에서 태어난 자신의 성질은 그대로 있고, 성령께서 태어나게 해줬기 때문에 성령을 자기 맘대로 요리를 못하잖아요.

성령께서 도와줄 때만 성령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치 어떤 상태에 있느냐? 오늘 본문 14절에 의하면 ‘어린아이같이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났기는 났는데 옛날 눈에 마주치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거듭난 티가 전혀 나지를 않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에요. 거짓 것이 뿜어져 나오고 주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힘들이 나오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을 때는 인간이라는 것을 괜찮은 존재로 본 겁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이런 이야기나 흔히 주고받으면서 ‘평생토록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아왔기에 이정도면 나도 우수한 인간이 아닌가?’ 그것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요.

육으로 태어난 그것으로 그냥 버티겠다는 거예요. 계속 그냥 가겠다는 겁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그게 정상이고 그것만 인간답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나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옳다는 것이 마치 뭐와 같으냐?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방식이다.’라고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3절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육신에 속하여” 그 다음 단어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네가 어떻게 아직도 육신에 속하여서,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사람을 따라가느냐’ 그 말이거든요. 너는 사람이라는 규정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흔히들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이다, 사람이다, 하는 거기에 너는 속하지 않았어. 이미 너는 거기서 탈피했어. 벗어났어. 거기는 네 자리가 아니야. 거기 있으면 안 돼. 사람이 사람이라고 하는 그 자리에 있으면 안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다리가 있다 합시다. 그 다리 위에 사람들이 놓여 있을 때에 서로 아는 사람끼리 “안녕하십니까? 하고 악수 먹고 친한 티내면서 안기도 하고 반갑다고 하지만 다 다리 위에 있거든요. 그 다리가 무너진다면 아무리 자기들끼리의 결속이 다져지고, 친하게 지내고, 그동안 쌓아놓은 우정이 깊고 정이 오가도 다리 무너지면 같이 다 죽어요.

그걸 ‘다리운명공동체’라고 하는데 다리 위에 놓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다리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다리를 설치 해 놓았다고요. 그 다리 말고 다른 다리.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어디를 봐야 되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직업이 우수하고, 법무장관 되기 위해서 청문회를 열고, 열 몇 살 부터 이미 천재였고, 뭐가 어떻고, 아무리 해도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두 다리를 딛고 섰느냐를 봐요.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난 적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육신으로 태어난 날, 몇 년 몇 월 며칠 생, 그것으로 주민등록에 기록된 대로 죽 가는지, 그걸 지켜본다고요. 육이라는 그 다리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인간이라 하는 것을 믿지 마라. 거기서 거짓만 나오고 주의 일을 방해하는 힘들만 나오는데 어떻게 그 인간에 기대어서 살아가느냐?”라는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요? ‘우리’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이 말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렇게 저에게 상담이나 이야기를 할 때 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 제가 참 답답했어요. 발등을 찍혀야지요. 찍히고 또 찍히고 또 찍혀야지요. 내 발등은 그림자에 불과하거든요.

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이지요. 왜 발등을 보존하려고 합니까? 그 발등이 뭐라고요? 친구 믿고 돈 빌려줬는데 친구가 배신할 줄 몰랐다. 그래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발등 안 죽었습니까? 도끼 가지고 발등을 찍고, 또 찍고, 또 찍어서 완전히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어서 내 발등은 애초부터 죽은 발등인 것을 아셔야지요.

또 찍히세요, 앞으로. 또 찍히시고요. 성도가 되었으면 아쉽다, 후회스럽다, 그런 이야기는 나오면 안돼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습니까? 인간이 덜 되었다고? 그 인간됨에 대해서요?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거듭난 체 하면서 성경을 보니까 어떤 성경해석에서 어떤 결론을 짓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뭘 얻어내려고 교회 다녀요. 하나님한테 뭘 얻어먹으려고 교회 다닌다고요.

얻을 것 없으면 교회 안 나와요. 우리 장로님이 요새 전화번호부 정리 하는데 백 명도 넘어요. 백 명 넘는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뭔가 얻으려고 온 거예요. 인간존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에요. 있으나 마나한 존재. 이것은 죽어도 그만 안 죽어도 그만. 불행해도 그만 안 불행해도 그만. 아파도 그만 건강해도 그만. 어떻게 살아도 그만, 착실하게 살아도 그만.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그림자 같은 존재.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이미지’에 불과하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직도 그걸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거듭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의 어떤 부부가 사람에게 주목을 받기 위해서, 또는 애를 못 낳는 것에 대한 어떤 원한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가친척들을 만나면 애를 왜 아직 안 가지느냐, 혹시 임신을 했느냐고 자꾸 물으니까 열등의식이 생긴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니까 용납을 해줍시다. 그래가지고 임신도 안했는데 조작을 했어요. 산부인과에서 구했는지 임신한 뱃속 사진을 일가친척들에게 보여줬어요. 축하한다, 아들이냐 딸이냐, 했겠지요.

임신도 안했는데 애를 낳았다고 해놨어요. 그러고 난 뒤에 애 낳은 지 다섯 시간 만에 죽었다고 또 사이트에 올렸어요. 그걸 본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임신이 그렇게 안 되다가 다행히 임신이 되었는데 그 애가 죽어버려서 안됐다 해서 사이트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67만원이 모금되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부가 애초에 임신한 적도 없었어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애초부터 거듭난 적도 없었어요. 거듭난 적도 없는데 성경에 거듭났다는 것이 있으니까 지금 거듭난 것으로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거듭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사도바울의 해석을 해야 돼요. 거듭나지 않은 쪽에서 해석을 해버리면 안되고 거듭난 자, 사도바울이 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해석에 맞춰지는가를 검토해보면 될 것이 아닙니까? 거짓으로 임신사진 찍지 마시고. 출생했다, 거듭났다고 우기지 마시고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설교단에서 복음만 전하면 돼요. 복음만 전하면 등록해도 다 나가요. 다 나가게 되어 있어요. 왜?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다 얻으려고 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 천당 보내주세요. 나 지옥가지 않게 해주옵소서.”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있으나 마나한 존재를 왜 천국에 가야 돼요?

인간은 기존에 태어난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자꾸 버티려고 해요. 야심들이 있어요. 교회 가서 천당 가겠다는 그 야심, 그게 야심이거든요. 구원의 욕망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교회는 얼씨구나 좋지요. “이렇게 하면 거듭날 수 있고 이렇게 하시면 천당 갑니다.” 하면 교인들이 와, 하고 몰리게 되면 교회는 돈이나 벌고 장사나 하면 되니까요.

사도바울의 해석이 왜 있느냐 하면, 거듭나지 않은 자의 해석과 거듭난 자의 해석이 틀리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거듭나지 않은 해석이 뭐냐? 거듭나지 않은 해석은 자기의 부분을 전체라고 여기는 것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특징이에요. 자기 몸뚱이 하나가 자기의 전체라고 여기면서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을 자기가 전체, 전부라고 여기고 살아가요. 평소의 모든 행동을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도바울의 생각은 뭐냐 하면, 성경의모든 것은, 전체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겠대요. 이게 전체성, 전부에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사는 이것이 전부에요.

그러면 ‘우리가 부모가 준 이 몸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살면 그 만이네.’ 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에베소서 1장 20절입니다. 지금 우리가 에베소서 4장을 보고 있는데 1장, 2장, 다 넘어갔어요. 넘어가니 뭐합니까? 한 주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데. 다 잊어버리지요. 잊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 지난 설교 요약을 해줘요. 요약해주면 뭐합니까? 읽고 나면 그만인데요.

수요일에 교인들 안 나와도 설교 생중계 한다고요. 하니 뭐합니까? 목요일에 잊어버리는데요. 에베소서 1장 20절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이게 조건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다. 이 죽은 자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대표해서 죽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대표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부모로 태어난 이 육신이 죽은 육신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는 자꾸 우리가 힘들다, 하는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만 힘든 것이 아니고 온 만물이 다 힘들어요. 그게 전체성이에요. 전체입니다, 전체.

그중 하나 나를 따로 빼서 행복하겠다고 하는 이것은 욕망, 욕심에 불과하고 그것은 현실파악을 못한 거예요. 제대로 현실을 볼 줄 몰라서 그래요. 힘들어야 돼요. ‘힘들어도 언젠가 낙이 오겠지.’ 낙은 없습니다. 무슨 낙이 있어요?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계속 힘들다 죽어요, 그냥. 힘들다가 그냥 죽는다고요.

희망 자체가 거짓입니다. 주님께서 시범을 보였잖아요. “너희들이 천당 가고 싶어? 너희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쓸데없는 욕망을. 나를 봐라. 내가 어떻게 천국가고 어떻게 아버지와 함께 했는지 자 봐.” 하고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죽여 버려요.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가 되었던 것이 하나에서 내부적으로 분리됩니다. 2가 돼요. 분리가 이뤄지고, 그 2가 되고 난 뒤에 1이 되는 겁니다. 그 2를 거치지 않으면 그 1, 진짜 제대로 된 전체성이 성립되지 않아요. 1에서 2로 분리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내가 전부에요. 세상 모든 것은 나 좋은 쪽으로 돌아가야 그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거듭난다는 말은 뭐냐? 나, 건전하고 잘났다는 그 나를 둘로 쪼갭니다. 쪼개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죽은 자가 되는데 그냥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로서. 죄인으로서 죽은 자가 됩니다. 거짓 것과 그리고 하나님 일을 방해하는 존재로서 내가 평소에 이 몸을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의 복음을 방해하고 주님의 일을 훼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 일, 복음을 방해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믿어줄게요.”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너 왜 믿는데 그거?” “나 천당가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악마야.” 그러니까 네가 악마에요. 너 자신이 과연 구원받을 자인지 생각이 없어요. 아무 생각이. 왜냐하면 악마에 의해서, 우리는 나 자신만 잘되면 그만이에요. 나 혼자 천당 가면 그만이에요.

그 욕망을 없애지 않고, 그 욕망을 다치지 않고, 그 욕망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장래에 죽으면 어디 가면 좋을꼬.’ 자기 맘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어떤 자격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구원파라는 거예요. 거기서 구원파가 나온 거예요.

모든 설교가 “당신이 이렇게 하면 죽어서 구원 받습니다.” 그쪽이에요. 그러한 주장이 어디서 나오는가? 한국 교회에서 나왔어요. 한국교회의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나왔어요.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인간의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 악마의 사주를 받고 교회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온 거예요. 그리고 그게 옳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믿어주는 그것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그런 발상을 옛날에 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얻을꼬?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덕분에 무엇을 얻어 챙길꼬?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방해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할 때 윤리 도덕적 죄 때문에 그런 줄 압니까?

내 존재자체가 나 위주로 버티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나만 챙기고. 소위 복음 안다는 사람에게 복음 이야기하게 되면 어느새 그 사람 눈빛이 악마의 눈빛으로 되돌아옵니다. 복음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계속 쑤시거든요. 쑤시게 되면 ‘나 예수 믿어줬잖아. 나 성령 받았잖아.’ 그래도 계속 쑤신다고요. ‘그렇게 되면 나는 망하잖아.’

결국 나오는 고백이 ‘이러면 나는 망한다는 거예요.’ 망하라고 만든 몸이에요, 이 몸이. 왜 안 망해야 되는데요? 성령은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이란, 나쁜 사람 따로 있고 좋은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나빠요. 다 나쁜 인간이 서로 기대고 이용해서 자기밥벌이 하려고 설치는 겁니다. 평생 사람 만나는 것이 ‘행여 나 도와줄 사람이 있나’라는 희망을 갖고 기대다가 발등 찍히는 겁니다.

진즉에 발등 찍혀야 돼요.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합니까? 결혼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평소에 자기가 자기하고 이야기하다가 나하고 맞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할 상대를 찾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결혼해서 한 20년 후에 이야기가 안 되는 성 싶다. 그러면 슬슬 이혼할 준비 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안 통하는데 왜 삽니까?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했던 세 번째 강의제목이 뭐냐? ‘보편적정신병’이에요. 정신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서 혼자 헉헉거리고 있는 상태가 정신병이에요. 어디 내 사정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내 한풀이 할 사람이 없는 것.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뭐냐? 서로 이야기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 교회 나온 겁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망한 교회냐? 이야기 안할 때 그 교회는 이미 망한 거예요. 대화가 안돼요, 대화가. 대표기도를 했는데 아멘, 소리가 나오지를 않아요. 성령의 축복입니다. 왜? 자신들의 본색이 드디어 벗겨졌기 때문에. 자기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하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얼음위에다 자기 이름을 매직으로 쓰는 것과 똑같아요.

써봐야 흩어지고, 써봐야 녹아내리고. 대체 협착이 안돼요. 주님의 나라에 내 이름이, 내 인생이 꽂히지를 않아요. 써봐야 흘러내리는데요.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이 교회 부흥하기 위해서 했던 수작들이 있어요. 성경해석을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는 것이 몇 가지 되는데 저는 지금 한 여섯 가지를 준비했는데요.

빨리 나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솔로몬의 일천번제.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어린아이 같은 짓이에요. 어린아이들은 형식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어떤 효과를 본다고 여기는 겁니다.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애 빼놓고 식구들을 다 죽였어요. 강도가 나가는데 뒤늦게 애가 잠이 깨어서는 “아빠, 엄마, 어디 있어?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니까 강도가 순간 재치 있게 “아빠 엄마를 찾아줄 테니 이불 덮고 1부터 100까지 세라.”

순진한 아이는 1부터 100까지 헤아립니다. 강도는 그 사이에 도망가지요. 자, 1부터 100까지 센다는 말은 주술적인 의미가 있어요. 내가 좋은 결과를 하나님 앞에 얻어내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1부터 100까지 하나, 둘, 셋……, 이렇게 세듯이. 솔로몬이 일천번제, 열왕기상 3장 4절에 나오는 일천번제를 가지고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니까 교회에서 일천번제를 그대로 시키는 거예요.

어떻게 시키느냐 하면, 새벽기도 나올 때마다 천 원씩 내는 겁니다. 번제가 돈으로 환산되니까. 1천 × 1천 = 백만 원, 백만 원을 내면 솔로몬이 받았던 그 능력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주술적이에요. 우리민족은 샤머니즘의 후손들이거든요. 샤머니즘은 뭐냐? 자기이익만 챙기면 끝나는 거예요. 내가 잘되는 그것이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무당의 후손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이에요. 우리민족이라니까요. 우리 민족은 무당으로 하나 되었어요. 그 뒤에 기독교가 들어왔으니까 역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 집안이 어렵습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내 몸이 이상한 병에 걸렸습니다, 애가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천번제 드리세요.”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두 번째 예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9절에 제자들이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하면서 21절은 개역성경에 (없음)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사본에만 들어 있는 내용이에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 제자들이 귀신을 못 쫓아내고 예수님이 쫓아내니까 “예수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귀신을 쫓아냅니까?” 할 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생긴 것이 기도원이고 금식원 아닙니까? 주술적이라. 시키는 대로 그대로 흉내 내면 되는 겁니다.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출산도 하지 않았지만 거짓으로 뱃속 사진을 가지고 전부 다 흉내 내기 하는 거예요. 거듭나고는 싶고, 거듭나지는 않았고, 이 현실을 애써 감추기 위해서 그 짓 하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 강의시간 같으면 내용을 다 설명하겠는데 설교시간이 되어서 빨리빨리 지나갑니다.

세 번째가 역대 상 4장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께서 복을 주시면 부동산 토지가 늘어난다는 겁니다. 복을 받아서요. 복이란 뭐냐? 교회 터가 늘어나고, 교회 주차장이 늘어나고, 예배당이 늘어나고 내 주거지가 늘어나고 부동산을 확보하는 것이 복이라는 거예요. 이게 야베스의 기도라고.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고 그 약속은 말씀이고, 따라서 말씀을 주셨으니까 우리는 믿고, 그리고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부동산을 넓혀준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소유의 부동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홀이 있는데 이 홀은 빌려서 쓰는 남의 부동산이지요. 우리교회의 부동산이 없다는 말은 여러분의 책임이 되겠네요? 여러분이 야베스의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겁니다.

목사가 이런 소리를 할 때요. 우리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이 야베스의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고 할 때에 교인들의 뜻은 이런 거예요. 이참에 내가 믿음이 있음을, 내가 거듭났음을 목사 앞에서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대화가 되니까.

네 번째……, 오늘 부흥의 비법 다 알려주는 거예요. 어디서도 이거 못 들어요. 네 번째는 사무엘상 10장 5, 6절. 거기 보면 하나님의 신을 받은 적이 없는 일반인 사울,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이 말은 뭐냐? 어떤 특정 공간, 특정 산에, 특정 지점에 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겁니다. 기도원 터 잡는데 이만한 논리는 최후논리지요. 이 터는 내가 성령 받은 터기 때문에 이 터에 기도원 지으면 이 터에 핵핵거리면서 올라오는 사람은 전부 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성령이 와르르 충만하게 들어선다는 거예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러면 다섯 번째로 넘어갑시다. 이사야 38장, 유명한 겁니다. 히스기야가 죽기 직전에 간절히 회개하고 기도했더니 수명이 15년 연장되는 거요. 여섯 번째, 이사야 41장입니다. 전부 이런 것은 주술적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성경해석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보니까 이런 것이 먹혀드는 거예요.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야, 이거, 이거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아무것도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지금 건성으로 들으시는데.

이사야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윤 복희와 그 오빠 윤 항기가 어려울 때, 힘들 때에, 그 때 그들이 교회를 다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때 이 말씀 듣고 지은 노래가 있어요.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바로 여러분!” ‘여러분’이라는 그 노래가 이 말씀 보고 지은 거예요. 성경해석 그게 맞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서 내가 종이 되었다는 그 말씀이 맞는 겁니까? 과연 내가 종 맞아요?

성경의 어느 누구 개인을 향하여 종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모든 성경은 누가복음 24장의 말씀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는 있으나 마나 무가치하기 때문에. 나는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가복음 끝부분에 나와 있어요. 설교시간이 짧은 것이 안타까워 죽겠습니다만.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반드시 성경해석 할 때는 나로부터 출발하면 안돼요. 내 사업이 부도났다. 내가 몸이 아프다. 거기서 출발하면 안 되고 나는 마땅히 부도나야 되고 나는 마땅히 아파 죽어야 되고, 그리고 살만큼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만이에요. 지금 죽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왜 이 사실을, 왜 우리가 그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왜 우리가 몰라요? 성경하고 나하고 결부시키지 마세요.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사라져도 그만이에요. 후회, 아쉬움, 그런 것은 악마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겁니다. 발등 찍히니 어쩌니 그런 식의 인생.

에베소서 1장 20절의 말씀대로 모든 성경은 우리 몸과 누구 몸과 비교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몸과 비교하는 겁니다. 성경말씀이 네 몸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을 위해서 왔는데 예수님 몸은 그 말씀대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네 몸은 배제되는 거예요. 네 몸은 히마리없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성경해석 할 때 나 자신은 죽어 마땅하고, 아무 히마리없음, 그런 식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제대로 된 이해인데 모든 인간은 해석할 때 얻어 챙기려고 해석해요. 교회 부흥되려고 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입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나 위주로 성경을 보는 어린아이를 주께서는 이스라엘로 데려가요. 왜? 이스라엘은 뭐냐? 1로부터 시작해서 2로 갈라졌다가 1이 돼요. 1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이 나중에 2가 되는데 그게 뭐냐? 북쪽 이스라엘과 남 유다나라로 갈라져요. 1에서 2,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되었다가 그게 하나로 통합되는 1, 그게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 그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시는데 갈라진 이스라엘을 다시 접합시킵니다. 그 중에 등장하시는 분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대로 오신 왕이 오셔서 그걸 연결시키거든요.

쉽게 말해서 ‘이 세상 어떤 민족이든, 어떤 나라든, 어떤 개인이든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적조건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키는 인간은, 혹은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약을 통해서 증명해 내시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우리도 다 포함해서. 왜냐하면 우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분이거든요. 부분을 전체로 보지 마세요. 어린아이 생각이 뭐냐? 자기가 부분인데 전체로 여기는 것이 어린아이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옵니다. 10절, 11절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현재 자기에게 생겨나는 모든 일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어린아이에요. 그게 조각인데, 부분인데. 전부가 아니거든요. 전부가 아닌 것이 전부인척 하면서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빌고 기도해버리면 이것은 거짓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유혹이에요. 유혹의 반대말이 뭐냐? 어슬렁거림. 여유. 비심각성. 느긋함. 이것이 유혹의 반대입니다.

언제 유혹받느냐 하면, 초조함, 급함, ‘급전’ 그런 거요, 급한 것, 다급한 것, 시급한 문제. 도대체 근심걱정이 왜 생기는 거예요? 자기가 전부라고 꽂혀 있기에 자기가 전부라는 그것으로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최고를 추구하거든요.

최고를 추구하는데 지장이 될까봐 자기가 다급한 거예요. 최고가 되는데 지장이 될까봐, 그게 방해가 될 까봐, 세상의 어떤 일이 내가 최고가 되는데, 내가 욕망의 전부가 되는데 훼방이 될 까봐 그거 아쉬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빌고 난리도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의 무당집으로 차려져 있고요. 십자가인지 무당집 대나무 꽂힌 것인지 분간도 안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멸망했는가? 그걸 계속해서 추구하시는 거예요. 이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딱 들어가 버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완전 망했어요. 그 망한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어떤 영웅이나 위인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존재한 이유가 고린도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에 구약사람들도 그렇지만 현대의 유대인들도 성경을 안보는 것이 아니라 봐요. 보는데 자기 얼굴에 수건 덮였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수건을 덮었다는 말은 해석을 할 때 전체성으로, 전부로 해석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해석 할 때 자기 좋은 쪽으로, 자기 잘되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까 30년, 40년, 50년 교회 다녔는데 아직도 자기밖에 몰라요.

계속 쑤시면 결국은 ‘나 잘났다’는 겁니다. 마지막 버티기에 들어가요. 온갖 성경은 다 외워서 어려울 때 ‘이거 써먹을까, 저거 써먹을까?’ 쓸데없이 스위치를, 아무 효험도 없는 엉뚱한 스위치를 눌렀다 껐다 눌렀다 껐다 해요. 화장실 다녀오고 난 뒤에 화장실 스위치를 꺼야지 부엌 스위치를 백날 껐다 켰다 해도 화장실은 그대로 있잖아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교회 가서 헌금 하고, 십일조 하고, 다 하는데 스위치가 엉뚱한 스위치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체성이 와야 돼요. 전체성이 한꺼번에 터져야 됩니다.

자, 인간 대 인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 설교한 것 하나도 모른다 치고, 인간 대 인간으로 그냥 만납시다. 만나서 뭐할 건데요? 만나서 뭐하려고요? 실컷 자기 이야기하다가 헤어지지요. 자기 한풀이 하다가.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어디까지 갈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데까지는 갈 수 있어요.

세상 모든 것이 세상도 아무것도 아니고,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전부 다 한 점으로 살고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도 거기까지는 가요. 거기까지는 가는데 어딜 못 넘어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데 까지는 못 넘어 와요.

지난 수요설교 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헛되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헛되다고 내가 앎으로서 내 구원에 아직도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우상숭배자예요. 내가 나의 우상숭배자라니까요. 내가 붙들 것이 나밖에 없어요. 나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헛되고 내가 헛된 것을 내가 아니까, 이 지식이라도 내가 아니까 주께서 좀 봐주소, 좀. 이렇게 헛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천당 보내주세요. 제발 주님이여!” 여기에 머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교회 와서 복음 좀 들은 사람은 그 정도까지 알아요. 만나봐야 헛되고 헛된 인간 너무 깊이 안 들어가야지. 그 정도까지는 아는데 문제는 예수님의 죽이심이 자기 생애와 더불어서 나오지를 않아요. 나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안 나온다니까요. 그걸 넘어서야 되는데. 그게 성령으로 거듭난 거거든요.

그리 되려면 내가 주님이 하는 일에 부분으로서 지금 복제물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썼던 가사가 있어요. “후회가 또 화가 나 눈물이 흐르네.” ‘또 내가 후회를 해? 아 짜증나. 그것 때문에 또 내가 눈물이 나네.’

“누가 울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누가 울어도 이젠 아프지도 않아요. 하도 내 곁에 우는 사람이 많아가지고. 이게 이문세가 불렀던 <옛사랑>의 가사입니다. 이 용훈씨가 가사를 썼는데요. 그 가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이게 아까 제가 말한 것인데 부부라는 것은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싶어서 결혼한 거예요. 그런데 3개월, 6개월, 3년도 안되어서 ‘속닥속닥’이 끝나버렸어요. 벌써 각방 씁니다. 여자는 애만 챙기고. 사랑도 이제 지겹다. 그러면 뭐예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하고, 공부하고, 철학을 하고, 모든 학문을 다 했는데 마지막 도달 지점은 뭐냐?

헛된 것 아니까 나는 알만큼 다 알았다. 머리 깎은 중이나 도사처럼 다 승려고 다 중이에요. 도사 다 되었어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끝. 그러니 내 편한대로 살자. 돈 있는 것 쓰고 여행가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요 뭐. 그 뿐이에요.

죽으심을 증거하려면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 되어야 되는데, 내가 범인 되어야 되는데 어느 구석을 봐도 내가 예수 죽일만한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인상을 자기에게서 찾아내지를 못했어요. 안 나쁜데 어떡해요, 안 나쁜데. 내가 그렇게 극악무도한 인간이 아닌데 어떡할 거예요?

왜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인줄 모르느냐? 사람을 안 만나봐서 그래요. 다 아는데 뭐. 복음 듣고 우리교회 10년 다니면 다 아는데요 뭐. 다 알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는데 왜 만나느냐는 식이에요. 그게 아니에요. 인간은 만나면 만날수록 내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 존재인지를, 내가 우세당하기를 얼마나 싫어하는 존재인지를 자기가 절감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어린아이가 아니거든요. 어린아이가 아닌 사도바울이 하는 짓을 보세요. 완전히 죽으려고 환장했잖아요. “아이고, 어데요? 난 사도바울이 아닙니다.” 맨 날 그런 식이에요. ‘나는 사도바울 복음이나 삼켜서 달랑 천당이나 가렵니다.’ 그런 식. “나는 사도바울의 길 안 가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저 통박과 요령만 남았어요. 내 몸 편하게 하는 그것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아요.

그래놓고 십자가를 아니까 거듭났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후 설교 여호수아서 하고 있는데 여호수아가 곧 끝납니다. 끝나면 뭐할 건가? 욥기를 할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욥은 악마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 일도 안했어요. 악마가 찾아오니까 비로소 주의 일이 시작된 겁니다. 악마를 피하지 마세요. 인간은 악마들이에요. 악마의 일군들입니다. 피하지 마세요.

가게에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오든, 누가 오든 피하지 마세요.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자기 것 지키겠다는 것에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승부에서 안 지려고, 이 긴자 되려고, 게임 벌이고 있어요. 끝으로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우연히 놀러갔는데 보니까 ‘바다가 보인다. 저 바다 너무 좋다. 저 바다에서 놀고 싶다.’ 그랬는데 우연히 옆에 보니까 거기서 수영복 빌려준다. 거기서 또 구명조끼가지 빌려주네요. 그것도 우연히. 물안경까지 빌려 주네요 우연히. 그래서 물놀이 신나게 했어요. 전부 합쳐보면 우연이에요. 우연의 전체성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깔아놓은 장기판 위에 장기 알 빌려주고 장기의 룰까지 다 해주고 우리는 그냥 움직임만 보였을 뿐이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내가 깔아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다 현지 조달된 겁니다. 천구백 몇 년도, 태어날 때부터 기저귀부터 해서 죽을 때까지, 내가 들어갈 관까지, 전부 다 주님이 조달하신 거예요. 그냥 물놀이나 하라고.

어떤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요. 있으나 마나한 존재에요. 그것을 통해서 주님의 주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이 거듭난 사람의 배포요, 여유요, 자유입니다. 모든 성경은 나를 위해서 나온 내용이 아닙니다. 마귀조차 날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주님의 전체성 안에서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주님의 언약 안에서, 주님이 성령 줬다는 것은 이미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라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받은 어린아이지만 구원받은 어린아이에요. 철딱서니 없어서 그렇지.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그 모든 것 안에 뭐든지 모든 것이 제공된 겁니다. 그걸 가지고 세자로, 오늘 제목을 바꾸고 싶다, ‘현장성’

미리 예측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만나세요. 만나면 둘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함께 대질하도록 주께서 동승해 줄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처소에요. 임마누엘이에요. “너희 가운데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꾸만 내가 지킬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되지도 않는 성경구절과 이론 신학 끄집어내면서 나 천당 간다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 아무리 해도 나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인간인데도 흉내 내기에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이 주님이 깔아놓은 판인 것을, 그 위에 주님에 의해서 그냥 움직였을 뿐인 것을,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이미지인 것을, 이제는 마음껏 감사하고 자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7강-엡 4장 14절(어린아이)190818-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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