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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6 08:51:04 조회 : 62         
2021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6강-사무엘상 강해 : 기름발린 자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021겨울수련회, 사무엘상강해 제6강 : 기름 발린 자 - 이 근호목사

제 6강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끝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존중히 여기는 것이 어떤 상태를 가지고 존중히 여긴다고 하고, 멸시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지고 멸시라고 보느냐?

이 멸시상태에 대해서 엘리제사장이 자기 아들들에게 한 그 행위를 하나의 시범조로 보여줌으로서 이것이 나를 멸시하는 것이고 경멸히 여기는 것이라 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것이 들어왔지요. 보통 살아 있다는 것은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살아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광물 같은 것은 살아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언어라든지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다. 율법이 살아 있다는 말이 정확할까,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가 더 정확할까? 같은 말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유령의 영토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형태의 이스라엘 속에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것 자체로 율법이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고요. 살아 있으려면 식물, 동물, 인간, 이런 것으로 나타나야 되기 때문에, 이런 것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으려면 이것은 뭐냐? 제사장이 제사장다운 어떤 면모를, 어떤 행위나 면모를 보여야 되는 것을 가지고 율법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말은 율법이 결국 뭐가 되느냐 하면, 인격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인격화 되는 것, 율법이 인격화 될 때에 여기 필히 어떤 장애요소가 발생되는데, 율법이 인격화 될 때에 어떤 장애물 같은 것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인간들의 어떤 행위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자연물에 있는 것을 모방해서 형상화 시키고, 구체적인 어떤 사물화를 시키고, 사물화 시킨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이것이 뭐가 되느냐? 이것이 우상이 되거든요.

제사장이 자기는 제사행위를 했고, 아들도 제사장으로서 그 행위를 했고, 제사 드렸다 그 말이지요. 물론 육회를 좋아했다는 것이 문제지만 제사를 방해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내재되어 있는 어떤 모방성격, 형상화성격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이 율법이 생생하게 인격화 되는 것에 장애물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엘리제사장은 나를 경멸히 여기고 나를 멸시했다. 그래서 너희 집안은 영원히 그 뒤에 3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찌라.” 집구석 완전히 망하게 할 것이다.

멸시한 대가로 이렇게 하시는데 우리가 보기에 뭐 그 정도 해도 많이 한 것 아닙니까? 그걸 멸시했다고 해버리면 대체 어느 수준까지 이를 때 멸시 선에서 벗어나 존중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난감한 상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할 때 삶은 고기나 튀긴 고기가 싫다고 생고기 달라고 했을 때 그 다음부터는 생고기 안 좋아하고 그냥 삶은 고기 먹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게 돼요? 그래서 나를 존중히 여긴다 하는 어떤 기준 같은 것이 분명하지 않고요. 멸시한다 할 때 어느 밑으로 내려갈 때 멸시가 되고 어디부터는 존중이 되는지 그 경계선도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이 집안, 엘리 집안이 왕창 망한 것으로 봐서 율법은 살아 있구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관심사는 여전하구나, 딴 건 양보해도 율법은 양보 못한다는 그 하나님의 명확한 사실이 이 집구석이 왕창 망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집안이 망했을 때 멸시한 거라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멸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존중합니까? 우리 집안은 멀쩡하고 싶어요.”라는 그런 요청이 하나님 앞에 그 내막을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요. 어디서 이야기했는가? 사무엘상 2장 10절에서 이야기했어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 “이렇게 멸시하고 경멸히 여기는 자들은 내가 경멸히 여기고 나를 존중하는 자들은 따로 내가 존중히 여기도록 조치하겠다. 이것은 멸시고 이것은 존중이다.” 이렇게 둘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존중 편에 딱 서려고 ‘나는 존중받고 싶어. 우리 가문 안 망하고 싶어.’ 이렇게 나서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해서 이미 확정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이 뭐냐? 사무엘상 2장 1절에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리고 2절에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이렇게 했잖아요. 기름부음이 뭐냐 하면,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자아상이에요.

이 지상에 자기를 드러내는 자아상. 자아상이니까 성경적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형상화시키지 않은,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나는 형상. 그게 기름부음이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이 세상에 나타내고 싶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전의 그 작업이 뭐냐?

2장 9, 10절에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자아상, 하나님의 자기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뭐가 필히 요청되느냐 하면, 적이 요청되어야 돼요. 하나님한테 얻어맞을 적이 필요한 겁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나쁜 사람에게 뺨을 치는 대목, 그런 장면이 있다면 주인공이 치기 위해서는 어떤 역할을 하는 배우가 필요하냐 하면, 김치 싸대기를 맞는 자가 필히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주인공이, 그 캐릭터가 사는 겁니다. 정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중에 지상에서 하나님의 형상, 기름부음으로 나타날 때 여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을 유지시켜주고 계속해서 전개해 나갈 그 과정에서 적이 필요한 거예요.

그 적중 하나가 아까 이야기한 엘리가문이에요. 엘리가문이 등장하면서 뭐라고 죄를 뒤집어씌우느냐 하면, 너는 나를 경멸히 여겼다, 라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경멸히 여겼다는 그 증거가 뭡니까, 하게 되면 “날고기, 육회 먹었잖아. 육회!”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이 엘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높인다고 하셔서 그 벌로서 이렇게 가문이 완전히 망하는데 사무엘상 2장 24, 25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엘리제사장이 누구보고 했느냐 하면, 행실 나쁜 재벌 2세, 맨 날 마약이나 하는 그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요. “자식아, 네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다.” 이런 소리 하는 아버지도 요새는 없어요. “교회 가기 싫어요.” “가지 마세요.” 요새 아버지는 이렇잖아요.

교회가면 힘들다고 “가지 마, 가지 마.” 이런 식이지 “네가 교회 가서 예배 안 드리면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하나님께서 판결하신다.” 이 정도까지 자식이 들으면 평생 트라우마 될 일, 그런 잔소리를 해대는 이런 용감한, 겁 없는, 무대포라 하지요, 무대포 아버지 엄마도 별로 없어요.

그런 가운데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 장래를 걱정해서 이 정도 했으면, 적어도 이정도 했으면 더 이상 어떻게 잔소리를 더 합니까? 몽둥이 들고 개 패듯이 패줘야 “아, 네가 정말 하나님을 자식보다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티가 납니까? 엘리제사장이 아들을 제사를 함부로 했다고 쥐어 패면 그러면 그 집안 안 망합니까? 딴 것을 또 끄집어 낼 것인데. “팰 때 살살 팼잖아.” 뭐 그런 것.

자식보고 이렇게 아버지심정으로서 하나님을 생각해서 나무라주는 이런 아버지도 정말 훌륭한 아버지라서 우리 같으면, 우리보고 장례사 하라면 엘리제사장 천국 보내버립니다. 25절 끝에 보면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그러니까 엘리의 아들은 필히 망해야 돼요. 왜냐하면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의 형상, 자아상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그 과정 속에서 필히 적이 요청되어야 되고 그리고 그 나타난 적에 대해서 그 적을 꺾으면서 기름부은자는 어떤 일을 한자가 제대로 기름부음받은 자에 맞다, 부합된다, 합치된다, 를 앞으로 예언을 따라서 벌어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사울이 왕 되는 사건입니다. 사울에게 기름부음을 주거든요. 사무엘상 10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라고 해서 기름 부었다는 사실을 언급을 해요.

사무엘이 그렇게 언급을 해놓고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예언한대로 기름부음이 등장했잖아요. 등장했는데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제대로 된 기름부음이 되면 그 요청된 적들에 대해서 제대로 꺾어야 되고 그 기능을 수행을 해야 되는데, 기름 부었다는 사울 왕이 도대체 적들을 꺾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적들의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누가 또 등장하느냐 하면, 기름이 또 등장해요. 기름이 또 등장하는데 그 때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맞아죽을까 싶어서 몰래 찾아가서 기름 붓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 붓는 장면도 이게 이새의 아들이거든요. 이새의 아들에 다윗이 없어요. 비존재가 아니고 아예 없습니다. 이새의 생각에 다윗이라는 것은 없는 자식이에요. 자식이 총 여덟 명인데 이새라는 사람이 사무엘이 나타났을 때 일곱 명만 도열시켰습니다. 이중에 하나 뽑으라는 거예요. 자기는 큰아들이 제일 마음에 들고.

그렇다면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진짜 뽑고 싶지요. 제일 먼저 큰 아들입니다. 6절에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그래서 사무엘이 그 큰아들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다 이 말이지요. 했는데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라고 했거든요.

진즉하지 진즉, 진즉 해야지요. 왜 절차가 필요하고 왜 과정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자기자아상을 드러내는 데는 그 인간의 어떤 행위도 방해물로 작용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기름을 붓더라도 인간들이 말하기를 “제가 했습니다.” 하는 말을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이 땅에 구체화하는데 필수조건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했습니다, 나의 경건과 신앙으로 했습니다, 이런 것을 쏙 다 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을 피해가면서 그동안 인간을 억누르고 있던 그 적들을 파괴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적이지만 인간들 보기에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그 적이 인간들 보기에는 너무나 친숙하고 사모하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사울왕도 처음에 왕 될 때 인물이 못생겼습니까, 월등했습니까? 아까 보셨지요. 사울이 암나귀 잃어버렸을 때 그 대목 나오지요. 사무엘상 9장 2절에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그 다음에 어떤 소년이었습니까? 준수한 소년.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데 준수한 소년,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야, 이거 참 이거 타고난 유전자에요. 월등한 dna. 그런데 사무엘상 16장에서,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과연 이 사람이다, 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는데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이건 뭡니까? 분명히 사울 때는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거든요. 엘리압도 못지않아요. 그도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다 이 말이지요. 키 큰 사람에게 무슨 어드벤티지가 있는 겁니까? 키 작은 사람은 왕 되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16장 7절 중간에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이 뜻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기의 형상, 자기의 자아상을 드러낼 때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보는 것을 비켜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보는 것이 뭐가 문제냐? 그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자연물 중에서 어떤 모방을 해서 그걸 형상화시켜요. 따라서 인간이 맘에 든 자, 흡족하다 할 때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쁜 사람 세워놓고 “예쁘냐? 그렇다면 아닌 줄 알아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예쁜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 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한테는 전혀 해당사항 없습니다. 해당사항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고 오히려 감사하지만요. 7절 끝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나는 중심을 본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도 인간의 기준으로서는 혼선이 일어나는데 왜 그러냐 하면 12절에 보면, 없는 애인데 데려왔어요. 마지막 여덟째를.

“여기 있나이까” “없나이다” 그걸로 끝이에요. “여기 없습니까? 얘들 말고 또 없습니까?” 왜? 다 찍었는데 하나님께서 없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분명히 이새의 아들가운데 있다 했는데 없다 했으니까. 그 때 이새가 막내아들 양치기로 빼돌렸는데 그 애를 데려오는 거예요.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이건 또 뭐예요? 분명히 준수하지 않다 했는데 얼굴이 아름답더라. 왜 일관성이 없어요? 기준에. 갑자기 잘생긴 사람들은 희망을 가져요 ‘아, 잘생겨도 구원받을 수 있구나.’ 우리한테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중심을 보신다 했는데 다윗의 중심을 무슨 수로 압니까? 그러니까 사무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자기 일에 대해서 그냥 거수기처럼, 꼭두각시처럼 사무엘이 가서 그냥 사용당한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흐름이 이어질 겁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서 사사도 끝내버리고, 그 다음에 제사장자리도 끝내버리고, 이 왕 자체가 율법에 준해서, 율법의 인격화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등장한 인격화, 율법의 인격화를 통해서 등장한 게 왕이다. 지금 여기까지는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사무엘상에서.

첫 번째 사람은 누구냐 하면, 사울이었고 두 번째 사람은 다윗이었잖아요.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 자기들 지켜주기 위해서 사사가 필요했고, 그 다음에 율법을 지켜주기 위해서 제사장이 필요했는데 둘 다가 소용없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 기능이 어디로 모아져야 돼요? 왕이 율법의 기능, 사사의 기능과 제사장의 기능이 제대로 다 완수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완수 되었다, 혹은 안 되었다는 뭐로 아느냐? 완수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완수되었을 경우에는 외부의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것이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승리가 되면 이 왕은 어떤 왕입니까? 제대로 율법과 그리고 사사기능을 제대로 완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사울이냐 다윗이냐, 다윗이냐 사울이냐, 둘 중 하나 보자 이 말입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지금 잠시위기가 찾아오는데요. 지금 쉬었다 갈 수도 없고요. 주님은 뭐 중심을 보시니까. 사울이 분명 사사 기능처럼 적을 이겼어요. 적을 이겼는데 문제는 무엇을 위반해서 이겼느냐 하면, 율법을 어겨 가면서 이겼을 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자아상에 부합되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는 계기가 사무엘상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적들이 쳐들어오지요. 점검하기 위해서 적들을 보냅니다. 5절에 보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이렇게 공격하러 옵니다. 이 블레셋의 공격기능은 제가 지난 시간에 언급했지요. NPC라고, Non Player Character, 주체 측에서 만들어놓은 플레이어.

과연 게임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이 핸디캡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주께서 다루시는 민족, 이방민족이에요, 아말렉.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무사히 성사시켰잖아요. 무사히 성사시킬 때 그 나라가 그 나라 이스라엘이어야 돼요.

그 이스라엘이 계속 해서 존속되고 있느냐를 그 다음부터는 그 이스라엘을 물리쳤던, 여호수아 때 물리쳤던 적들이 계속 수시로 침범해서 공격하게 되면, 그리고 제대로 물리치면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고 못물리치면 그 때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 판정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블레셋 3만 6천이 왔을 때에 8절에 보게 되면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이 길갈은 언약궤가 있는 장소입니다. 처음에 언약궤가 요단강 건너서 여리고에 왔거든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건넌 후 처음 진 친 곳이 길갈입니다. 길갈도 요단강 근처의 지명이에요.

그 다음에는 실로에 오고, 그렇게 되는데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그 다음에 사울에게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흩어지는지라” 이걸 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 사울이 온전한 율법정신, 다시 말해서 “이 일은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를 통해서 자기자아상을 드러내기 위한 예언의 완성으로서 우리를 사용했습니다. 나는 그 왕이니까 여러분은 내가 하는 지시에 다 따라줘서 나 자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율법의 일이기 때문에 따라주시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보니까 자기 율법대로 하려고 사무엘을 기다리는데 사무엘이 약속한 기한대로, 이레가 칠일이니까 7일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는데 사무엘이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사무엘이 오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사울은 오지 않았는데 오지 않아도 그 병사들이 딱 일사불란하게 사울의 명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계속 기다리겠는데 그게 아니고 흩어지는 거지요.

흩어지니까 사울마음이 급했던 겁니다. 9, 10절에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그 때 사무엘이 짜잔, 물론 그런 말은 없지만 “……사무엘이 온지라.” 그래서 10, 11절에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라고 한 거지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라는 말은 뭐냐 하면,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고 13절에 나오지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그 이야기를 가지고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습니까, 하니까 사울이 하는 말이 “당신은 늦게 오고, 블레셋사람은 믹마스라는 곳에 진 쳤고, 군사들 사기는 떨어지고, 흩어져서 남은 군사는 얼마 안 되고, 그래서 적들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라고 사울이 예측한 거지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증거가 돼요, 안 그러면 사울왕의 자기 기름부음을 자랑질 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중간에 사울 왕이 하나님의 자기증거를 방해하고 나선 거예요. 어떻게 방해하고 나섰느냐 하면, 사울 왕이 판단하기에 지금 한창 맘이 하나 되어야 이기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못 이긴다, 라는 그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이나 하나님이 없는 이방나라 사고방식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똑같지.

똑같은 거잖아요. 그러면 이방나라에는 뭐가 없습니까? 율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사울왕은, 자기가 율법을 혼자서 이루겠다고, 율법대로 한다고 나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왕이 율법 없는 나라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요. 율법이 있는 사람처럼 굴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사울 왕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울 왕이 뭐라고 변명하겠습니까?

“나도 그럴 줄 알고 제사 지키려고 왔는데 저 사무엘이 약속시간을 안 지켰잖아요. 약속시간을! 나는 내 할 바 다 했다 그 말이야. 내 책임 없어. 저 사무엘이 약속시간에 늦게 왔기 때문에. 제사만 지내면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기세가 높을 것이고 전투의지로 단결이 될 것인데 제사가 안 되니까, 진격을 못하니까, 나라도 제사 드려야지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러면 사무엘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 것은 율법이 없는 저 적들한테나 이야기해라. 그들하고나 소통이 될 이야기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방해하는 망령된 일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한나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자는 무슨 과정을 거쳐야 된다? 기름부음 받은 자의 할 일 중에 하나는 적들이 요청되어야 돼요. 바로 그 적은 기름 부었다는 당사자 사울이 하나님이 예상한 기름 부은 자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 사울은 충실하기 위해서 출몰한 겁니다. 가만 보니 이게 남의 이야기 아니지요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교회 오려고 했는데, 나도 주일날 집구석 앉아 있으려니 미안한 것 같은데, 그런데 방송에서 ‘다음부터는 다섯 명 이상 모이지 말라’ 하니까 나는 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우리 교인이 다섯 명 넘을 것 같아서, 그래도 갈까 싶었는데 대구시장이 또 벌금을 십만 원 때린다네, 걸리면 3백만 원, 참석하는 사람은 10만원 벌금, ‘가만있자. 이번 달은 수입도 얼마 안 되는데 십만 원 뜯겨버리면 그거 안 되잖아.’

“목사님, 내가 예배 안 드린다고 주님께서 이미 택한 백성 지옥 보내십니까? 아니, 나 하나 빠진다고 교회 예배 안 됩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왜, 그런 변명을 하는 의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의도가 뭐냐? 내가 예측했고, 내 존재의 낯섦을 거부하고 친숙함으로 완전히 내가 장악하려는 내 모습, 그것이 기름 부은 메시아의 적입니다. 메시아의 적이 그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요시! 일본말로 됐다. “앞으로 내가 벌금 백만 원이라도 참석하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횡포입니까? 집에 백만 원 있습니까? 그건 또 무슨 횡포에요? 오다가 길에서 미끄러져서 차 박아서 2백만 원 더 나와 버려라. 이건 무슨 객기입니까? 오기고!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감사함으로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요시! 또 하고 ‘감사함으로 하자.’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도대체 나는 자꾸 나에게 기대를 걸게 하느냐, 나한테 기대를 걸고 있느냐? 나는 이미 나를 형상화 시키는 겁니다. 내가 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형상의 과정인데 내가 어쨌든 간에 적이 안 되려고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에 나서겠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내가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장애물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문제 책임은 코로나 바이러스, 그게 문제라. 코로나 바이러스만 아니었으면 전부 다 훌륭한 신앙인 되는데 그것 때문에 본색 다 들통 났어요. 블레셋이 안 쳐들어오면 되는데 블레셋이 쳐들어 와가지고 사울 왕 위신 다 깎아 놨다 그 말이지요. 13절에 봅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아, 이 장면 보세요.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왕 해야 되느냐.’ 그런 자괴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얼굴이 준수한데, 키도 큰데, 그냥 암나귀나 찾으러 다닐 때가 좋았지요. “내가 하고 싶어 했습니까? 내가 언제 왕 못돼서 환장을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선택해가지고 하나님하고 다 짜놓고 이제 와서……”, 토사구팽이라 합니까, “……자기가 실컷 써먹고 난 뒤에는 ‘에라, 이제 다 써먹었다.’ 하고 버릴 카드로 사용하고, 그럼 나의 자존감 자존심은 어디서 회복합니까?”

주님 이야기합니다. “그걸 왜 회복해야 되지? 아니 그걸 왜 회복해야 되는데?” 그게 바로 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또 다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왕이라도 있으니까 이정도 되었지 나 말고 다른 적절한 왕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걸요?”라고 나오게 된다면, 물론 그런 이야기는 없지만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사무엘상 14장을 딱 보면 나와요.

14장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요나단이 나오거든요. 14장 6절에 요나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이거 위험한 작전이에요. 그것도 두 명이서 단독으로. 계곡인데 현지의 그 계곡을 봤거든요. 보니까 이게 험준해서 건너가기 힘든 거예요. 설마 여기를 건너오지는 않을 거라고 적들도 그렇게 안심할만한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6절 중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그 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자,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상 13장 8절에 사울이 걱정한 것처럼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11절에도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사울은 “나 아니면 이스라엘 안 됩니다.” 했는데 막상 14장에 딱 가보니까 자기 아들 요나단의 사고방식이 뭐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할례 받은 자냐, 안 받은 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왕이 해야 될 일이에요. 율법의 인격화가 왕이에요.

왕은 기름 부었잖아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무슨 자리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렇게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아상이 구체화 되고 드러나야 될 그 자리다 그 말이지요. 다시 말씀 드릴게요. 율법을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이게 과연 승리냐 하는 겁니다.

사울이 있기 전까지는 승리하면 무조건 율법대로 된 거예요. 그러나 사울이 등장해서 그 승리를 좀 더 깊이 분석해 보니까 율법을 어기면서 한 승리도 있고, 율법을 지켜가면서 한 승리가 있다는 것이 더 세분화 된 겁니다. 누굴 통해서? 사울 왕을 통해서. “사울 왕 너는 아니야. 너는 기름부음에 적합한 자가 아니야.”

아직도 사울왕은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나 말고는 될 수가 없다. 자기 생각에는 일사불란하게 모든 권한은 내가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드디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어요. 승리를 했는데 승리할 때 다른 사람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작스러운 승리를 보고 기세가 올라서 여러 사람이 세대로 나눠서 공격해서 이겼어요.

이겼을 때 승리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냐 하면, 사울 왕에게는 나만 왕이며 모든 율법과 모든 하나님의 일은 내 명령 하에 되어진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내용이 기니까 짧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배고파서 힘들었을 때에 사울 왕이 뭐라고 명령하느냐 하면 24절에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어요.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요나단이 하는 말이 29, 30절에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다른 군사들은 누구한테 명령을 받았어요? 왕한테 명령을 받아서 절대로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거예요. 승리는 했는데 이 승리가 율법이 완성된 계통과 노선을 통해서 승리가 왔을 것인데 왜 승리를 한 당사자 요나단이 한 행세와 사울왕의 지시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 노선을 봐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케 했느냐? 거기에 대해서 드디어 사울 왕이 화가 난 겁니다.

“내가 먹지 말라 했지?” 사람들이 소와 송아지를 피 채 먹는 것을 보니까. 율법에 보니 피 있는 채로는 먹지 말라 했거든요. 레위기 17장에서. 사울왕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법을 자기가 적용시키는 겁니다. 적용시킴으로서 내가 유일한 통로다. 내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래서 일사불란하게 내 명령을 지켜야 되는데 나 말고 다른 노선이 삐딱한 노선이 나오면 내 명령이 안 먹히잖아요.

먹히지를 않지요. 예배당 본당에서 예배드리고 같은 시간에 아래층에서도 예배드리고 그리되면 교회 꼴이 우습잖아요. 빛과 소금이 되라 하는데 빛이 두 가지 종류, 소금이 두 가지 종류 같으면 위층 소금으로 가야 될지 아래층 소금으로 가야 될지 헷갈린다 그 말이지요. 그럴 때 사울 왕이 끝까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나님께 물어보자 한 겁니다. 38절에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 보자이게 내 아들이라도 용서치 않으리라.” 한 거예요.

자기자존감 앞에서는 자식도 없어요. 마지막에 자기가치 챙기는데 바쁜 겁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을 놓고 추첨을 합니다. 추첨 되게 좋아해요 하여튼. 그래서 죽 해보니까 누가 뽑혔느냐 하면 41절 끝에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사달 난 것이, 이게 승리는 했는데 어느 쪽이 율법적이냐 하는 그 판결은 백성들은 빠지고 기름 받은 자의 자리 왕과 그 아들사이가 벌어진 겁니다.

옛날 고전적인 게임 있잖아요. 바닷가에서 작대기 하나 모래에 꽂아놓고 마지막 모래를 떨어냈을 때 막대기 넘어뜨리는 쪽이 저녁사기, 이런 것 있지요 그전에 모래 떨어내는 사람은 아무 책임이 없어요. 마지막 건드리는 자가 책임을 옴팍 다 뒤집어 쓰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최후의 남은 자가 달랑 두 사람 남았어요.

누가 내 명령을 어기고 먹었느냐, 이렇게 할 때에 42절에서 요나단이 하는 말이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그러니까 44절에, 사울이 자기 가오가 있는 거예요. 자존심이 있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지만.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직도 사울은 이 승리가 요나단의 그 …… 다시 말해서 요나단이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했다 했지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사람 없이 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아, 어렵다. 인간은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사람을 사용하는 거예요. 일 해놓고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십니다.” 하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아상을 드러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드러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내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자아찾기 하는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보탬이 도와준 것이 없다. 봐, 내 일을 했던 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봐.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저 봐. 이야기 들었지?”

바로 그 사람이 구원받는데 그 사람 본인도 한 게 없다고 고백함으로서 하나님 내가 홀로 다 한 것 맞잖아,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오늘날 열두 제자를 선택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를 구원한 겁니다. 주님의 증인되라고 성령이 임한 거예요. 그렇다면 제 말 듣고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건 제 말을 못 알아듣고 있어요.

그런 고백을 하게 되면 그런 고백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니까요. 안 되면 안하면 되지 그걸 억지로 하겠다는 것은 방금 주께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냥 살면 되지 아무것도 아닌 강도를 구원했다, 하는 식으로 세리와 창기를 구원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살면 되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글자로 써가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나는……, 이라고 주어자리에 나를 집어넣습니까? 나의 목적을 왜 집어넣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나이다. 이걸, 목적을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 목적,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는 그 문장 서술어에다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면 거기서 나는 빠져도 됩니다, 라는 말로 해야지요.

그래서 사울이 요나단을 죽인다고 나오거든요. 그럴 때 누가 말리느냐 하면, 백성들이 “왕이여, 그건 옳지 않습니다.” 하고 나오지요. “요나단 아니면 승리 못했습니다.” 하고 나오니까 왕의 위상이 어떻게 되었어요? 그대로 추락했지요.

백성위의 명령자가 왕이어야 되는데 왕은 지금 누구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의 결심한 것을 시행을 못했습니까? 백성들이 반발을 일으킨 거예요. 그것이 뭐냐? 당신은 왕 자격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론조사가 필요한 거예요. 지지율이 그렇게 필요한 겁니다. 별로 안 나오거든 자진해서 내려오라 그 말이지요. 십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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